고령화가족 – 가족, 밥상머리 지지고 볶은 시간의 퇴적물

[달의신]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없다.
형제간에 위아래도 없고, 막말은 기본에다 발길질도 예사다. 상대에 대한 배려라든가 하다못해 예의상 해주는 덕담도 이 집구석에는 씨가 말랐다. 그렇다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상대의 속을 긁어 놓으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것뿐이다.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서 제멋대로인 건가? 그렇다면 철들기라도 기다리련만, 평균 나이 47세. 나잇살이나 드신 분들이 이 모양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고뭉치 큰아들은 백수건달로 칠십이 낼모레인 엄마에게 얹혀살고,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유일한 대졸자 둘째 아들은 명색이 영화감독이지만 실상은 가정도 일도 파탄 난 고학력 실업자 신세. 막내딸이 그나마 경제력이 있어 엄마에게 보탬이 되지만, 이건 무슨 팔자를 타고났는지 결혼과 이혼을 밥먹듯 한다. 게다가 그녀의 딸은 싸가지 제로의 중딩. 제 앞가림은 고사하고 나잇값도 못하는 자식들 때문에 집안은 바람 잘 날 없다.

옛말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으니, ‘가화’와 담 쌓은 가족이 ‘만사성’이 될 턱이 있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 가족의 인생이 이 모양인 것이 ‘가화’ 탓인가? 머리 쓰는 재주는 없고 주먹 쓰는 데는 능한 큰아들 한모가 범죄에 연루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낙인은 쉽고 진입 장벽은 높은 우리 사회에서 한번 엇길로 나간 인생은 되돌리기 어렵다. 인문학적 지성이 넘치는 영화감독 인모는 예술을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밀린 방세도 해결 못하는 망한 영화감독이다. 예민하고 감성 풍부한 이 영화감독은 현실과 타협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생활력 강한 막내딸 미연은 사랑 없인 못 사는 여자.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 남편의 가정 폭력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어디 그녀 탓인가.
따지고 보면 가정은 늘 외풍에 흔들리기 쉬운 것이었다. 가정의 평온이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어서 빈곤, 실업, 불황, 사업 실패 따위는 가정 내 갈등을 초래하고, 격변기의 가치관 혼란, 세대 차이, 문화적 변동은 가족 구성원의 불화를 유발한다. 예기치 못한 사고나 범죄 피해, 사회적 소요 사태, 민란, 또는 외침이나 전쟁 같은 것들은 곧 가족 해체와 직결된다. 일제 강점기 가혹한 농촌 수탈의 결과 유이민(流移民)으로 전락한 가정의 운명은 농촌 공동체를 기저에서부터 붕괴시켰다. 70년대 산업화의 희생양이 된 농촌은 이농의 역사를 통해 전통적 대가족의 해체를 완성시켰다. IMF 경제 위기는 이혼율을 급증시켰고, 총 가구 중에서 23.9%에 달하는 1인 가구의 증가 추세(<2010 인구주택총조사> 통계)는 경기 침체의 장기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정에 대한 사회적 영향력은 더욱 크고 긴밀해졌다. 즉 ‘만사성’이 ‘가화’의 전제 조건이 될 가능성이 더 커진 것이다. 나이 들어도 나잇값 못하는 가족의 문제는 결국 나잇값 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 미욱하고 보잘것없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미덕이 있다. 끊임없이 지지고 볶고 불화하면서도 가족이 해체되지 않는다. 현실이 팍팍해지면 가정은 깨지고 가족은 이합집산하게 마련이거늘, 오히려 이들은 다시 엄마의 집으로 모여든다.
바야흐로 5월은 가정의 달,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5월의 극장가에 찾아든 이 불경스런 콩가루 가족을 보니 의문이 떠오른다. 가족은 화목해야 하는가? 정말 대부분의 가족은 화목한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고 상처 주는 가족이 얼마나 많으며, 가족의 화목이란 당위의 그늘에서 조용히 치러지는 가족의 희생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서로를 비교하고 질시하는 마음, 금전 문제, 재산 분배 등 수많은 이유가 다툼과 갈등의 원인이 되어 가족을 서로 등지게 만들기도 하고, 성적, 학벌, 경제력, 사회적 지위 등 온갖 기준 때문에 가족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명절이라고 가족이 모여도 위세를 부리는 이와 눈치를 보는 이가 나뉘고, 인연을 끊는다느니,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느니 하며 가족 관계 자체를 가족에 대한 위협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가족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숱한 갈등을 ‘화목’이란 포장지로 덮어 두거나, 가정의 화목을 유지할 갖가지 조건이 만족스럽게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던가.

가정은 화목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격식과 예의를 차리면서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가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따위에 이 콩가루 가족은 전혀 속박 받지 않는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고 서로 윽박지르지도 않고, 가족의 덕을 봤다 해서 미안하다, 고맙다 살가운 인사치레가 오가는 법도 없다. 그냥 각자 알아서 자기 인생 잘 살면 된다. 그리고 못나고 허물 많은 가족들의 모습을 남보다 더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린다. 단,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왜? 가족이니까!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무한 불화의 가족이 인생이 궁지에 몰리고 세상의 외면을 받을 때 가족의 곁으로 기어드는 것은 바로 가족은 이래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에서 자유로운 대신 이런 원초적 결속력이 끈끈하게 서로의 보루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콩가루 가족의 수위는 점점 올라간다. 큰아들은 중학생 조카를 넘본 변태 파렴치한의 혐의를 쓴다. 심지어 엄마는 자식들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매춘을 했다는 의혹에 내몰린다. 이 막장 상황에서 가족들의 반응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온가족이 뒤집어질 상황에서 막내딸은 엄마에게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하지~” 하고, 큰아들은 “난 나물만 먹어도 괜찮은데…….” 한다. 영화는 내친 김에 기가 막힌 출생의 비밀까지 드러내어 ‘콩가루’의 끝을 보고자 한다. 그래도 콩가루 가족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 뒤에는 한없는 이해와 긍정의 힘으로 가족의 울타리를 지켜온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가족이라면 세상에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이 변화하면서 가족 중심주의, 위계를 중시하는 가부장제의 전통적 가족 관계는 점차 약화되고 있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1인 가구 같은 형태의 출현이 증가하면서 가족의 위기를 논하기도 한다. 영화는 이러한 가족의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다. 혈연을 중심으로 구축된 견고한 전통적 가족 관계를 와해시킨 자리에 영화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제시한다. 가족은 피로써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혈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가족에 대한 윤리 도덕적 당위도 내려놓은 자리에서 가족이란 오롯이 함께해 온 시간들이 집적되어 만들어진다. 그리고 콩가루 가족은 해체된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가족은 다른 방식으로 재건되고, 시멘트 옹벽에 뿌리내린 꽃처럼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꽃피워 간다. 영화는 전통적 가족 관계에 대한 향수 대신 가족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벗어 버린 콩가루 가족을 통해 가족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보여준다. 어쨌든 가족은 든든한 힘이다.

아울러 늘어나는 노령 인구를 부양해야 할 짐으로 떠안고 있는 고령화사회에 대한 우려에도 한 방 먹인다. 이 대책 없는 고령 가족의 한심함과 무능력함을 보라. 하지만 지리멸렬한 고령 가족의 구심점은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칠순의 엄마이고, 무위도식의 결정판 큰아들은 감동적인 반전의 주인공이지 않은가.
최악의 가족을 연기하는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연기 조합은 최고이다. 가족들을 밥상머리로 불러 모으는 엄마 윤여정의 그윽한 미소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할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