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음속에 나무를 심어보는 植木想念을 해 보기로 한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오고
무심한 일편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
무명씨의 이 시조를 기억하는가.
오동나무에 내려앉은 그윽한 달빛 풍경이 눈에 밟히는 아름다운 시이다.
봉황이라는 꿈과,
조각달이라는 현실이 벽오동이란 매개물의 양 가지에 걸린 채
또렷한 대비효과를 자아내 실의(失意)의 허허(虛虛)함을 더욱 깊게 새기고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괴로움이 어디 요새 뿐이랴?
어느 시대도 깊게 품은 자신의 이상(理想)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태의 얕음에
좌절하는 한숨이야 많았으리라.
벽오동(碧梧桐)이란 푸른 오동나무다.
다 크면 10미터는 족히 넘는 큰 나무이다.
나무 껍질이 푸르스름한데 이는 늙어도 그 색이 변치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벽오동이다.
잎은 넓고 잎자루는 길어 커다란 오동잎이 부드럽게 일렁이는 모양은 참으로 장관이다.
가수 최헌이 80년대 어름에 불러 빅히트한 노래 <오동잎>은 사실 오동잎에 대한
노래가 아니다.그저 첫 구절에만 딱 한번 <오동잎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가을밤에>라고 나올 뿐,나머지는 모두 귀뚜라미의 노래다.
말하자면 오동잎은 처음에 바람잡이로 나온 소품일 뿐인데,제목을 오동잎이라고 떡하니 붙여 저 상서로운 오동나무를 민망하게 하였다.
봉황은 굉장한 새다.
닭의 머리와 뱀의 목,제비의 턱,거북의 등,물고기의 꼬리모양을 한 중국의 전설조(傳說鳥)다.
상상이 가는가?
상상이 안가면 화투짝 11월 오동을 펼쳐보라.
거기 닭머리를 한 어둠 속의 새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봉황이다. 하하하
몸과 날개에는 다섯가지 빛이 찬란하고 울음을 울면 다섯가지 소리가 울려퍼진다고 한다.
수컷은 봉(鳳)이라고 하고 암컷은 황(凰)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여자들이 잘나가는 요즘 세상에 띨~빵한 남자들이 <봉>인 것과는 다른 개념의 봉이다.
봉황은 대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예천(醴泉)을 마신다.
예천은 중국의 전설적인 샘물인데 태평성대가 되면 단물이 솟는다는 샘이다.
봉황이라는 새 자체가 위대한 황제가 나타나는 때를 맞춰 <천연기념>으로 태어나는 새이니,
봉황과 예천은 바로 <좋은 세상>을 꿈꾸는 옛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작품이었으리라.
봉황의 귀함은 그가 앉을 자리를 까다롭게 가리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 새는 여느 나무에는 눈을 주지 않으며 오로지 아까 말한,
잘생긴 오동나무에만 앉으신단다.
아까 무명씨께서 벽오동을 심은 뜻이 이제 좀 짐작이 되는지 모르겠다.
굳이 이 시조를 나름대로 풀자면 봉황은 당시의 권력자인 임금 쯤 될 것이고,
벽오동은 자신의 재능이나 학식을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런 은유를 빼더라도 이 시조는 풍경을 찍어내는 화소(話素)들이 뿌연 달빛과 어울려 사뭇 고즈넉하고 소소(蕭蕭)하다.
오동나무에 대한 추억의 보따리들이 먼저 풀려나와 버렸다.
하지만 첫 귀절에 내가 벽오동을 심은 뜻은 다른 얘기를 하고자 함이었다.
<오동동타령>이라고 불리는 대중적인 노래 하나를 따라가며 아주 차분하게 의미를 곱씹어보고 싶었던게 생각의 실마리였다.
아마 대학 시절 쯤이었을 것이다.
난 오동동타령을 들으면서 그 노랫말이 사뭇 감칠 맛이 있고 문자향(文字香)마저 느껴진다는 생각을 얼핏 하면서 언젠가 이 노래를 소재로 글을 한번 써 봐야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벌써 16년이 흐른 지난 가을의 어느 날 노래방에 갔다가 아주 지긋하신 선배 한분이 열창하는 이 노래를 듣고는 옛 마음이 되살아났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한자를 잘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는 <오동추>가 어떤 사람의 이름인 줄 알았다.
당연히 <오동추야>는 오동추를 부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하하하
그런 오해가 나 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우스개이긴 하지만 이런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가 있었다.
<오동추야 대머리 깎아서 오동통이냐>.
하지만 오동추야(梧桐秋夜)가 오동잎 지는 가을밤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마음의 거문고(心琴)가 울었다.
매화나무 한 가지에 깃든 봄밤의 그윽한 마음을 <일지춘심(一枝春心)> 이라 표현했던 이조년의 풍류에 훌륭한 댓귀가 될 만한 가을밤의 시상(詩想)이 아닐 수 없다.오동나무 가을밤에 달이 너무 밝아 오동동(梧桐動)이냐.
오동동이란 오동나무 잎새가 미세한 동선을 그리며 흔들리는 것을 말하거나 혹은 실바람도 없는데 커다란 잎 하나가 툭! 떨어지는 풍경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달이 밝기로서니 달은 빛일 뿐인데 오동나무를 움직인단 말인가?
옛 사람들 특유의 허풍을 빌려온 것일까?
어디선가 읽은 햇살돛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주선의 동력으로 햇살을 사용하자는 어느 과학자의 제안을 소개한 것이었다.
즉 우주공간에는 무중력 상태이므로 미세한 에너지로도 물체를 움직일 수 있단다. 그러니 햇살을 흡수하는 돛을 우주선에 설치하여 태양광선을 동력원으로
이용하자는 얘기였다.
이 햇살에너지는 무한하고 품질도 좋으며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어 우주선의 동력원으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의견이었다.
이런 기발한 생각을 오동동타령을 지은 가객도 하였을까?
달빛이 너무 밝아 오동나무를 움직였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게 겉문자 대로 해석할 일이 아니라,
이 노래를 부르는 가객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섬세한 생각의 전이를 따라가보자.
<가을밤 달이 너무 밝으니 내 마음 속에 깃든 사모(思慕)의 염(念)이 더욱 사무치는구나.
그러니 그리운 사람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달덩이처럼 커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갈 수는 없다.
저 달빛은 그의 하늘도 역시 비추리라.
한 하늘 같은 달 아래서 우린 왜 이리 헤어져 있어야 하는가?
가고싶은 욕망과 가고싶은 마음을 막아서는 거리와 질곡이 간절함을 덧없이 키우기만 한다.
그러니 어찌 한숨이 나오지 않겠는가?
아~아! 그 한숨소리가 너무 간절하고 커서 오동나무 잎새를 흔드는 것은 아닌가?> 이런 마음의 동선이 <달이 밝아 오동동>이란 간략한 문자에 한숨처럼 배어있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소리를 나름대로 두 가지로 분류해보는 버릇이 있다.
귀를 채우는 소리와 귀를 비우는 소리가 그것이다.
세상에 나도는 대부분의 소리는 귀를 채우는 소리다.
뜻이 만들어지고 느낌이 들어가고 생각이 엮어지는 말들. 그 모두가 귀를 채운다. 그러나 가끔 어떤 소리들은 귀를 씻고 비운다.
머리가 떠들썩하고 헝클어진 마음으로 어느 시골을 찾은 날에 대숲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대바람(竹風)은 귀를 씻는다.
이른 새벽에 어둑한 산에 올라 약수를 한 사발 마시노라면 목 뒤로 불어오는
송풍청음(松風淸音)도 귀를 씻고 생각을 맑게 한다.
그런 점에서 오동잎 지는 소리도 귀를 비우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비워도 너무 많이 비워버리는가?
오동잎 지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허허(虛虛)로움이 지나쳐 쓸쓸해진다.
오동동타령은 이 지나친 쓸쓸함에 주목하고 있는 노래다.
다음 구절로 넘어가보자.
<오동동 술타령에 오동동이냐>
달을 바라보고 있는 외로운 마음은 갑자기 밖에서 유쾌하게 들려오는
술집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가을밤 흥취에 젖은 목소리들이 들떠있다.
아까는 달빛 때문에 오동잎이 흔들리느냐고 묻더니 이번엔 노랫소리 때문에 오동잎이 흔들리느냐고 묻는다.
빛으로 나무를 흔드는 것보다야 소리로 흔드는 것이 좀더 그럴 듯 해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아무리 큰들 노랫소리일 뿐인데 정말 오동나무를 흔들기야 하려구?
여기에도 노랫소리를 듣는 마음의 귀가 있다.
오동동 술타령이 뭔가? 오동동 술타령은 <동동주 술타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의 매력은 톡톡 튀는 언어감각이다.
오동동의 동동과 동동주의 동동을 잇는 솜씨를 보라.
앞의 동동(桐動)과 뒤의 동동은 전혀 다른 말이다.
동동주의 동동은 술의 표면에 밥알갱이가 동동 뜨는 것을 가리키는 동동이다.
동동주가 어떤 술인가?
마실 땐 달콤 쌉싸름하지만
그 맛을 믿고 많이 마시다가는 어김없이 대취하고 마는 유혹의 술이다.
사랑이 그런 것 아니던가?
처음엔 달콤한 기분에 호기심반 장난반으로 뛰어들었다가 이윽고 만취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운명의 장난,아니 장난의 운명이 아니던가?
그런 동동주에 대책없이 취하여 부르는 노래이니 어찌 달콤한 사랑의 사연 한자락쯤 그 취중의 가슴 속에 솟아나오지 않겠는가?
외로운 귀에는 그 노래 역시, 자신의 한숨처럼 오동나무를 뒤흔드는,
우레와 같은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이제 보니 오동나무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일렁임이 바로 오동동이로구나.
그런데 이쯤에서 갑자기 가객은 생뚱한 소리를 한다.
<아니오 아니오 궂은 비 오는 밤 낙숫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그침이 없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요>
앞의 두 문장을 되돌아가 자세히 살펴보니 의문문이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 단정지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달빛이든 노랫소리든 오동나무를 흔드는 게 아니란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까 말한 것은 사실 지금 말해야 할 것을 위한 들러리였다.
갑자기 말투가 달라지는 것도 눈길을 끈다.
위의 의문문은 반말로 하다가 갑자기 존대어로 바뀌는 이유는 뭘까?
위의 말은 스스로에게 자문하듯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아니오>문장의 이 얘기들은 누군가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말을 건네고 있다.
'실은 이렇답니다. 그런 고백' 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세상사람들 일까? 혹은 님일까?
어쨌든 이 엉뚱스러워 보이는 국면전환은,
일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분위기를 풍긴다.
한참 달빛 속의 외로움을 잘 노래하다가 갑자기 궂은 비 오는 밤은 왜 나온담?
이런 것이 이 시를 민간의 유행가로 남아있게 하는 약간의 무리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런 기상 이변(?)이 별로 무리한 것도 아니다.
이 노래는 하룻밤의 풍경이 아니라 여러 날의 외롭고 괴로운 날들이 중첩되어 있는 밤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날이야 궂든 개든 심상의 이동에는 전혀 무리함이 없다.
달 밝은 밤이든 혹은 비오는 밤이든 그것이 그리움을 한없이 자극하는,
지루하고 속타는 밤인 점에는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이 노래의 강점은 뛰어난 차음(借音)이다.
오동잎이 흔들리는 소리라는 <오동동>을.....
동동주의 의태어인 동동으로 풀어내더니
이번엔 낙숫물 소리의 의성어로 엮어올린다.
처음의 그윽한 소리는 술잔의 밥알갱이로 바뀌다가
마침내 리듬도 빨라진 물소리로 변한다.
이 활발하고 익살스러운 언어치환은 가히 발군이다.
이 노래가 내용은 답답하고 막막한 외로움을 토로하는 것이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활달하고 명랑한 이유는
이 낙천적인 말 꿰어맞추기의 해학에 숨어있다.
그러나 그 유쾌한 와중에서도 곰곰히 짚어 생각해보라.
홀로 수심하여 빈방을 지키는 외로운 여인이 얼마나 오랫 동안 그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면
그 놈의 낙숫물 소리가 <오동동 오동동>으로 들린다는 사실까지 발견했겠는가?
혹시 님이 오는 발자국 소리라도 들을까 하여 쫑긋 세운 귀에 들려온 그 쓸쓸한
빗소리의 오동동은 차라리 처음의 오동잎 지는 소리나,
동동주 취한 노랫가락보다 더욱 사람을 못견디게 하는 오동동이 아니었으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냐>는 말은 의미상으로는 아리송한 마무리다.
앞 구절들의 댓귀를 생각한다면 의미없이 붙인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동동>을 이어붙이는 절묘한 언어감각의 소유자가 마지막엔 싱겁게도 그냥 <오동동이냐>를 붙였다는 건 이해가 잘 안간다.
빗소리를 듣고 있는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타올랐기에 그 마음이 오동나무를 움직였을까?
이렇게 해석 못해줄 것도 없긴 하다.
달빛이나 노랫가락이 오동나무를 흔든다면 왜 이 여인의 사무친 마음인들 오동나무를 흔들지 못하겠는가?
결국 오동잎은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흔들리는 것이니 그 이유를 굳이 외물에만 연결시킬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비오는 밤이니 빗방울에 오동나무가 이미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인의 타는 간장이 흔든다고 강변하기에는 좀 말빨이 덜 먹히는 점이 있다.
이 여인의 마음 속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지루한 낙수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인의 방 속을 엿보자.
빈방에 이불이 깔려있고 두동달이 베개의 한쪽이 비어있다.
혹시 저 빗 속에 님이 오시지 않을까 기다리는 마음에 자꾸만 문고리 쪽에 눈이 간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밤을 적신다.
저 비 그치면 그가 올까?
그렇다면 저 낙숫물 소리는 그리운 해후를 위한 빗방울 전주곡인지도 모른다.
오동잎이 흔들린다는 것이 봉황이 그 나무에 깃드는 것이 아닌가?
오동잎 소리는 바로 님이 오시는 소리다.
그러니 독수공방 타는 간장은 오동동(梧桐動)과 빗소리의 발자국소리의 오동동에 함께 귀를 열어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엉뚱한 생각을 한다.
이 뛰어난 언어감각의 노랫꾼은 그리 섣부르게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의 오동동은 <내 (吾心)가 흔들리고 흔들린다>는 뜻의 오동동(吾動動)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오동동은 하염없이 푸푸 내리쉬는 한숨 소리와 외로움이 사무쳐 가슴이 벌떡이는 동계(動悸)의 형상화가 아니냔 말이다.
그렇게 풀어놓으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냐>는 쉽게 풀린다.
외로운 마음에 내 가슴이 벌떡이고 있단 얘기다.
물론 오동잎 지는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노래의 주조음(主調音)이다.
달빛과 노랫소리와 낙숫물소리와 가슴뛰는 소리의 오동동은 그 주조음의 현란한 변주이며 여인의 상심한 마음의 이동이기도 하다.
경박스럽고 경망스럽고 촐랑거리는 듯이 부르는 이 노래,
오동동타령에도 얼마나 사무친 별리의 아픔과 외로운 밤의 고독과
수없는 밤이 중첩된 그리움들이 푸르게 배어있는지 보라.
노래란 수천 수만의 마음이 지나간 정서의 궤적이다.
조금도 닳지 않고 바래지 않은 푸른 마음이 살아있는 궤적을 따라가노라면
어느덧 목이 쉰다.
이 그윽하고 외로운 가슴으로 불러보라.
오동동타령을.....
술 한잔 묵고 불러 보면 더 좋으리라.....하하하
날 생각하고 있을 그 고운 여인을 그려보면서 불러보면....
아무리 대취했어도 술이 확! 깨면서 눈물도 나리라.......
한잔 걸치지도 않고 끝까지 탐독하시느라 고생한 보람되시길....하하하
^*^comic함/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