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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리(載李)’들이 과거시험에 응시하면 그 답안지는 대부분 ‘제리(除李)’가 됐다. 예를 들면 갈암 선생의 조카 항렬에 해당하는 남자가 25명쯤 되는데, 이 가운데 벼슬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조직적으로 배제됐다는 증거다. 실력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었다. 이렇게 되니 다음부터는 과거라는 시험제도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산림처사로 지낸 것이다. 갈암 선생의 후손이 소설가 이문열씨다. 삼보컴퓨터 창업자인 이용태 회장,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이희령 산자부 장관도 모두 재령 이씨다.”
-보학을 연구하다 보면 집안이라는 울타리 내로 시야가 축소되는 경우도 있지만, 윗대 조상의 혼맥과 학맥까지 아울러 조사하면 범위가 훨씬 확대되는 것 같다. 그렇게 확대된 사례가 있으면 소개해달라.
“안동 지역에 ‘팔고조도(八高祖圖)’라는 게 있다. ‘조부의 조(祖)가 누구인가’ ‘조부의 외조(外祖)가 누구인가’ ‘조모의 조가 누구인가’ ‘조모의 외조가 누구인가’ ‘외조의 조가 누구인가’ ‘외조의 외조가 누구인가’ ‘외조모의 조가 누구인가’ ‘외조모의 외조가 누구인가’를 따져서 도표로 그려놓은 것이다. 안동에서는 선비 집안이라 하면 팔고조도를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만들다보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 피를 주고받은 친척인 것이다.”
‘팔고조도’ 그려야 양반
-보학을 하려면 어떤 수업과정이 필요한가.
“우선 한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사서와 삼경은 물론 여러 집안에 남아 있는 문집을 섭렵해야 한다. 이 과정이 이론이라고 한다면 실전이 필요하다. 실전은 문집을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을 해봐야 실력이 생긴다. 다음에는 해당 문중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 만나보면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 발견된다. 그리고 중요 인물이 살던 집터나 정자, 기타 유적지를 반드시 답사해야 한다. 현장에 가봐야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분위기를 알아야 정확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현재 대학의 한문학과 교수들은 학교와 학회 내에서만 활동한다. 일반 집안사람들과는 거리가 있다. 보학을 하려면 현장의 문중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야 하는데, 이 현장 감각을 익히려면 대학 밖에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기회가 많다.”
-보학자로서의 장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정년퇴직이 없고, 흰머리가 날수록 권위와 단가가 높아진다.” 문중에 글을 지어주거나 번역해주면서 돈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래저래 기본 수입은 항상 유지된다. 근래에 비문 짓는 경향을 보면 영남지역은 아직까지 순한문으로 된 비문을 선호한다. 국한문을 혼용해서 글을 지으면 누구든지 읽을 수 있으니 글을 잘 지었는지, 잘못 지었는지 판별할 수 있지만, 순한문으로 지으면 알아볼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 사회의 전통을 읽어내는 독해법 중 하나는 보학이다. 보학을 알아야 한국 사회를 알 수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