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1. 1) 1) 유래 한해의 첫날 전후에 치루는 의례와 놀이 등을 통털어 가리키는 말 첫날을 설날, 그 하루 전날을 까치설날이라 한다
① 삼간다는 뜻. 새 해의 첫날에 일년동안 아무 탈없이 지내게 해 달라는 바람에서 생겼을 것 ② ‘섧다’의 뜻에서 유래.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것 ③ ‘설다. 낯설다’에서. 새로운 시간 주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그리고 완전하지 않다는 뜻에서 ④ 한해를 새로 세운다는 뜻의 ‘서다’에서.
그러나 설이란 말은 17세기의 문헌에 '나이,해'를 뜻하는 말로 쓰여진 반면에, 요즈음과 같이 나이라는 말이나 나이를 뜻하는 '살'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를 하나 더먹는 날'의 의미를 가진 '설날'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살'로 바뀌므로써, '설'과 구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하루 전날인 섣달 그믐날을 왜 까치설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설날을 맞고 보낸다는 뜻을 말할 때, 다른 명절을 지내는 것과 같이 특별히 '쇠다,쇤다'고 말하고 있다. 이 '쇠다'는 뜻은 '오래되다,늙었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설에 대한 해석 가운데에서 두 번째의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설을 쇠다'는 뜻은 '한 살을 더 먹어 늙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날은 1년의 첫날이라는 점에서, '한 해'라는 시간단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와 함께 하루와 보름, 그리고 달과 계절 등과 같은 시간 단위는 사회생활과 일상생활, 제도와 농사 등과 밀접한 연관을 갖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단위와 절일 등을 정하는 역법은 바로 국가의 중요한 기밀사항의 하나였다. 따라서 어느 날을 설날로 잡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로서, 현재의 설날은 달과 태양의 주기를 합쳐서 계산한 태음태양력에 의한 것이다.
2) 설날의 풍속 설날 풍속은 당대의 지배이념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던 궁궐과 관리를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의 풍속과 피지배계층이었던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들의 풍속으로 나누어지며, 그것도 설날의 전과 후에 걸쳐서 며칠간에 걸쳐 이어진다. 새로운 지배이념이 등장했을 때, 과거의 지배이념에 의해서 이루어진 풍속은 그 잔존물로서 일부계층이나 지역에 민속에 남겨진다. 따라서 불교가 지배이념으로 채택된 때에는 무속의 풍속이, 유교가 지배이념이 된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풍속이 일부 지역과 계층의 민속으로 남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조선시대의 유교 풍속이 민속의 일부로 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①설빔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 놓은 새옷을 입는데 이 새옷을 「설빔」이라고 한다. 설빔을 위해서 각 가정에서는 가을부터 옷감을 마련하였다가 주부는 미리 정성껏 만들어 둔다. 설빔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살림 정도에 따라서 마련하거니와 어린 아이는 설빔에 대한 기대 크고 서로 자랑도 하기 마련이다. 옛날 같으면 어른은 두루마기 또는 도포를 비롯하여 버선.대님까지 새로 한 벌을 하며, 바지.저고리에는 새 솜을 두어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르게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한 벌을 마련하여 색동옷으로 곱게 단장한다. 여러 가지 색깔의 옷을 입으므로 마치 꽃밭처럼 아름답다. 설빔으로 갈아 입은 뒤에야 차례를 지낸다
②성묘(省墓) 설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 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생존한 어른에게는 세배를 하지만 이미 사별한 조상에게도 생존시처럼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수많은 자손들이 나이 많은 어른을 앞에 모시고 조상의 효열담(孝烈談)을 들어 가면서 줄을 지어 눈길 속에 성묘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정경이다.
③차례 설날 아침 일찍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를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차례라고 한다. 사당은 지손(支孫)은 모시지 않고 장손이 모시는데,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의 4대조의 신주를 모셔두며 정조차례 때에는 차례대로 제사하고, 보통 제사 때에는 해당되는 분에게만 제사하게 된다. 5대조 이상의 신주는 각기 분묘 옆에 묻어 집에서는 지내지 않고 10월에 있는 시제 때에만 제사를 지낸다. 차례 때에는 원근에 있는 자손들이 모두 장손집에 모여 들어 함께 지내는데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차레상은 홍동백서, 어동육서, 좌포우혜 등의 원칙에 따라 상위에 음식을 차린다.
④세배 차례가 끝나면 일동은 자리를 정리해 앉는다. 이때 조부모・부모・백숙부모・형제 등 차례로 절을 하고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집 안에서 세배가 끝나면 차례 지낸 세찬과 떡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리게 되는데, 사당을 모신 집이 있으면 먼저 사당에 절을 한 다음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주식(酒食), 아이에게는 과일과 돈으로 대접하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일가 어른이 먼 곳에 살면 수십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으며, 세배를 할 줄 모르면 교양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다. 먼 곳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인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주는 데워서 마시지 않고 찬대로 그냥 마시는데, 여기에는 봄으 맞이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⑤덕담 정초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에 말로써 새해 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덕담이라고 한다. 이때에 “과세 안녕하셨읍니까?”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고 하며, 연소한 아이들에게는, “새해에는 복 많이 받게”또는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게”하는 등으로 처지와 환경에 알맞은 말을 한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하여 서로 복을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축의(祝意)를 표시하는 것이다.
⑥세함(歲銜) 벼슬을 하는 집안에서는 옻칠을 한 책상을 대청에 비치해 둔다. 그러면 밑에 거느리는 아전들이 종이를 접어 이름을 써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다. 각 관청(官廳)의 서리(胥吏)와 영문(營門)의 교졸(校卒)들도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청이나 선생의 집에 드린다. 이것을 세함이라고 한다. 설날이 되면 주인(主人)은 모두 하례하러 세배차(歲拜次) 나가서 부재(不在)이므로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
⑦문배(門排) 설날을 맞이하여 그 해에 나쁜 귀신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장군이나 닭, 호랑이 등의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이는 것을 말한다. 이 것을 새해 첫날에 붙인다고 해서 ‘세화’ 라고도 한다. 문배는 귀신이 무서워하는 종규라는 장군을 많이 그리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동물 그림으로는 닭과 호랑이를 많이 그린다. 닭 그림을 붙이는 이유는 설날이 닭의 날이라고 예부터 전해오기 때문이지요. 호랑이 그림은 한 달이 호랑이의 달이라고 해서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닭은 새벽을 알리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귀신들이 무서워한다. 호랑이도 산에 사는 산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귀신들이 무서워해서 그려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 때의 인물인 처용의 얼굴을 붙이는 풍속이 전해 내려온다. 처용의 얼굴 그림을 붙여서 귀신을 쫓는 데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⑧ 머리카락 태우기 옛날에는 우리 몸을 조상이 주신 것이라고 해서 함부로 해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머리카락도 함부로 자르거나 버리지 않았다. 요즘은 머리카락을 아무렇지 않게 자르지만 옛날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남자나 여자나 일 년 동안 머리 빗을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서 빗상자에 담아 두었지요. 그러다 설날이 되면 모아 둔 머리카락을 담 쪽으로 가서 태워 버렸다. 그렇게 하면 일 년 내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⑨ 야광귀 쫓기 야광귀라는 귀신은 설날 밤중에 내려와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이 있으면 신고 달아난다고 한다. 그러면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은 일 년 동안 재수없는 일만 생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이 귀신이 내려와 신발을 훔쳐 갈까 봐 신발을 감춘 뒤 불을 끄고 잠을 잤다. 또한 눈에 잘 띄도록 마루나 높은 장대에 가루를 거르는 데 쓰는 체를 걸어 두었다. 체를 거는 이유는 야광귀가 신발을 찾아 내려와서는 체를 먼저 보고 체에 있는 조그만 눈을 세기 시작한다. 그런데 체의 눈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야광귀는 그것을 세다가 잊고, 또 세다 잊고 해서 새벽을 맞게 되면 그냥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발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해에는 나쁜 일이 생기지도 않는다고 믿었다.
⑩ 복조리 복조리는 쌀로 밥을 지을 때 모래 등을 걸러 내는 도구이다.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설날 새벽에 복조리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복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었다. 복조리를 사는 까닭은 일년 내내 먹을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다. 옛날에는 먹을 쌀이 없어서 굶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설날에 사 둔 복조리로 일 년 내내 쌀을 일 수 있도록 바랐다. 이와 함께 복조리로 복을 많이 일어서 집안이 편안하고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정초에 복조리 장수가 오면 마을의 길조이고, 엿장수가 들어오면 흉조로 생각했다.
⑪ 그밖에 함경도 지방에서는 나무로 만든 소를 관청에서 마을까지 끌고 다니면서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했다. 농사를 권자하고 풍년을 바라는 마음에서 행하던 풍속이다 또한 밭에서 자라고 있는 보리를 뽑아 뿌리를 보고 그 해 농사를 점치는 풍속도 있었다. 뿌리가 세 갈래 이상 나 있으면 풍녀닝고, 두 갈래쯤이면 평년작, 한 갈래나 뿌리가 없으면 흉년이 들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땅의 기름기가 있고 없음을 미루어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그 해의 수확으 미리 알아보는 풍속도 있었다. 볶은 곡식 가운데에는 가장 먼저 볶아져 나오는 곡식이 그 해 농사에서 가장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으로 짐작하기도 했다
(2) 동물의 날(상심이지일) 1) 유래 일년이 시작되는 정월 초에서 정월 대보름 사이에, 띠에 등장하는 열두 동물의 날을 정해서 그 날에 따른 다양한 풍속을 전해 왔다. 그 가운데 털있는 동물의 날(유모일)과 털없는 동물의 날(무모일)을 나누기도 했으며, 각 동물의 날에 따라 다양한 풍속이 있었다. 털있는 동물의 날이 설날이 되면 그 해에는 농사가 풍년이 된다고 믿었다. 반대로 털 없는 동물의 날이 설날이 되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2) 풍습 ①상자일(쥐의 날) 정월에 들어 첫째 자일 농부들은 쥐를 없애기 위하여 들에 나가 논과 밭을 두렁을 태우는데 이를 ‘쥐불놓이’라 한다. 이날 밤 자시에 방아를 찧으면 집안의 쥐들이 모두 없어진다고 믿었다. 방아 찧을 곡식이 없는 집에서는 빈 절구를 절굿공이로 두드려서 방아 찧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상자일엔 옛날부터 일도 하지 않고 백사(百事)를 금하고 놀았다고 하는데, 이날 일을 하면 쥐가 부지런해져서 곡식을 많이 축낸다고 한다. 쥐는 곡식을 잘 먹는 까닭에 상자일 밤엔 불을 밝히지 않으며 길쌈을 하거나 의복을 짓는 일도 하지 않는다. 옷이나 천을 쥐가 쏠기 때문이다. 곡식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으면 재수가 좋다고 전한다. 이때 콩을 볶으면서 “쥐 주둥이 지진다”라는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대궐에서는 주머니를 만들어 명주(名色) 실로 끈을 만들고 큰 나비같이 두 귀를 싸서 정조(正朝)에 문안(問安)오는 근신(近臣)이나 재상에게 나누어 주었다.
② 상축일(소의 날) 정월 초의 첫 소날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쇠죽에 콩을 넣어 먹였다. 일년 내내 고생하는 소를 위하는 의미에서. 소날에는 칼을 쓰지 않으며, 쇠붙이로 만든 연장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쇠고기를 요리하려면 칼을 써야 하는데, 소날에만은 소한테 너무 잔인하다고 해서 안 썼던 것이다. 연장도 이 날 사용하면 부러진다는 속담이 있어 쓰지 않는 풍속이 생겼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소가 밭을 갈면 그 해 농사는 풍년이 된다고 한다. 바쁜 농사철에 대해해서 준비운동을 시키는 것이었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이 날 방아를 찧으면 소의 머리가 아파서 죽는다는 풍속이 있었다. 또 이날 소를 사면 좋다고 해서 소값이 오른다고도 한다.
③ 상인일(호랑이의 날) 정월의 첫 호랑이 날 이웃집으로 출입하는 것을 금했는데, 특히 여자들은 외출을 못하게 했다. 이날 밖에 나가면 호랑이한테 물려간다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④ 상묘일(토끼의 날) 정월의 첫 토끼날. 토끼날에는 남자가 먼저 일어나서 대문을 열어야 한다. 가장이 열면 더욱 좋으나, 가장이 없을 때에는 식구 중에서 누구든지 남자가 먼저 대문을 열기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일년동안 가운이 융성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에 여자가 먼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가운이 불길하다고 한다. 이것을 철저히 지키는 집안에서는 밥을 짓는 일도 남자가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간 다음에야 방문을 열고 나와서 한다. 토끼날은 장수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남녀 할 것 없이 명사(命絲)라 해서 명주실을 청색으로 물들여 팔에 감거나 옷고름에 매달거나 또는 문 돌쩌귀에 걸어 두는데, 그렇게 하면 명이 길어 진다고 전한다. 또 상묘일에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한다고 해서 부녀자들은 실을 짜고 옷을 지으며 베틀이 있으면 한 번씩 올라가서 베를 짜본다. 그래야만 장수한다고 전한다.
⑤ 상진일(용의 날) 정월의 첫 용날 상진일 이른 새벽에, 농촌에서는 부인이 남보다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긷는다. 상진일에는 천상에 있는 용이 하강해서 우물에 알을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무도 길어가지 않은(우물에 일찍 가서 물을 뜬다는 것은)우물 속에 낳은 용란을 뜨는 것이 된다. 이것을 [알 뜨기]라고 하는데 용알을 떠다가 밥을 지어 먹으면 그 해는 농사가 잘 되어서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그래서 농촌의 부인들은 이른 새벽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 간다. 용란을 먼저 떠간 사람은 용알 뜨고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짚을 우물에 띄운다. 그러면 다음에 왔던 사람이 보고 다른 우물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용알 뜨기를 하는 까닭은 용이 농사에 중요한 물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올 때 용이 하늘로 오른다거나, 천둥 번개를 치는 것은 용이 조화를 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⑥ 상사일(뱀의 날) 정월 들어 첫 상일을 [상사일]또는 [뱀날]이라고 한다. 이날 머리를 빗으면 그 해에 진안에 뱀이 들어온다는 속신이 있다. 뱀이 침입한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요 누구든 금기한다.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뱀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날 집에서 쓸 물을 미리 길어다 놓았다. 그래서 상사일에는 남녀간에 머리를 빗지 않는다. 뱀을 금기하는 것은 집념이 강하고 악착스러워서 대개 좋아하지 않는다. 뱀이 죽어 귀신이 된 사귀는 한번 사람에 부착하면 악행을 자행할 뿐 아니라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고 전한다. 상일에 이발을 하지 않는 것은 사전에 사귀의 침입을 예방하는 것이니 하절에 뱀이 많은 지방에서 이 금기가 엄격하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뱀이 많기 때문에 뱀의 피해를 줄이려고 ‘뱀 입춘문’을 쓰기도 했다. 이것은 뱀을 잘 잡았던 중국의 적제자나 항우 등의 이름에 검(劍)자를 쓴 것이다. 전라북도의 위도에서는 청사. 흑사. 홍사 등의 뱀 이름을 한자로 써서 거꾸로 붙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뱀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⑦ 상오일(말의 날) 옛날에는 말이 귀했기 때문에 이 날 말에게 제사를 지내고 음식도 주었다. 말의 날에는 장을 담갔는데 특히 10월 말의 날에 김장을 하기도 했다. 이 날 장을 담그면, 말이 좋아하는 콩이 장의 원료로 쓰이기 때문에 장맛이 좋다고 한다. 또 말의 피가 진한 색이기 때문에 장도 진하고 맛도 달다고 한다.
⑧ 상미일(염소의 날) 일반적으로 양의 날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 나라에는 양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염소로 대신 생각해 왔다. 이 날은 그냥 무관심하게 보냈는데, 다만 어촌 지방에서는 염소 걸음이 방정맞다고 해서 사고가 날까 봐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았다
⑨ 상신일(원숭이 날) 이 날은 일을 하지 않고 노는데, 특히 칼을 갖고 일을 하면 손을 다친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보다 남자가 먼저 일어나 집 안을 청소해야 하며, 부엌에도 남자가 먼저 들어가는 날이라고 한다. 부엌에 귀신이 드는 날이기 때문에 여자가 먼저 들어가면 나쁜 짓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⑩ 상유일(닭의 날) 이 날은 여자들이 바느질을 안 하는 날이다. 바느질을 하면 손이 닭의 발처럼 못생기고 흉하게 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이 날 사람들이 모여 노는 것도 금하는데, 그 까닭은 사람들이 싸우게 되어 다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라 한다.
⑪ 상술일(개의 날) 이 날도 역시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 개가 텃밭을 파헤쳐서 농작물에 해를 준다고 믿었다. 풀 쑤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개가 먹을 것을 자주 토해서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해녀들이 잠수할 때 쓰는 도구를 손질해 주면 좋은 날이라고 하며, 장을 담그는 메주를 쑤면 좋은 날이라 한다.
⑫ 상해일(돼지날) 돼지날이 되면 얼굴이나 피부가 검은 사람은 왕겨나 콩깍지로 피부를 문질렀다. 그러면 검은 피부가 하얗게 변한다고 믿었다. 부녀자들은 바느질과 머리를 빗지 않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 날 이것을 하면 중풍에 걸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는 젊은 내시들이 횃불을 들고 땅을 이리저리 비추면서 “돼지 주둥이 지진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다녔다. 또한 곡식의 씨를 태워서 주머니에 넣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풍속은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2. 놀이 (1) 설의 놀이와 연희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또 토정비결을 본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오행점은 나무조각에 금 목 수 화 토를 새겨 장기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한번에 던져 엎어지고 자빠진 것으로 괘를 얻고, 그 괘에 따라 정해진 점괘로 그 한해의 신수를 본다고 하였는데, 현재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李芝涵 1517-1578)의 저술이라고 전해지는 점서로, 인간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사주 가운데 연월일에 해당하는 수를 그 해에 정해진 수와의 관계를 가감해서 얻어진 괘에 따라 점을 친다. 이 점괘는 1년치와 함께 달별로 상순 중순 하순으로 나누어서 일신과 가사, 그리고 공사에 관한 다양한 내용의 괘사로 되어 있다. 지금도 정초가 되면 길거리에서 토정비결을 보아주는 사람들을 볼수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이루어진 세시풍속 관계의 문헌들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주역]에 바탕을 둔 점서로, 민간에서 심심풀이로 전해 오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널리 퍼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농악을 치고 고사를 지내는 '지신밟기'가 있다. 마을제사는 지방마다 형태가 다른데, 일반적으로 가족 가운데 병자가 없거나 험이 없는 깨끗한 삶을 제관으로 뽑고, 마을 뒤나 산위에 있는 당나무나 당집에서 유교식으로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마을 사람들과 동물이 건강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축문을 일고, 소지를 올리고 끝낸다. 제사를 끝내면 마을 동회를 열어 마을의 공동 일을 의논하고 일년동안 공동으로 사용한 경비를 결산하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쌀을 내 놓는데, 이것은 마을의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이 마을제사와 지신밟기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는다.
* 개인놀이 ① 연날리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전래되고 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전쟁에서 자기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처음으로 연을 사용했다는 설과 고려 시대 최영 장군이 탐라(제주도)에서 일어난 난을 평정할 때부터 연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연날리는 바람과 큰 연관이 있기에 바람이 세게 부는 해안 지방에서는 큰연을 만들고, 내륙지방에서는 중간 크기의 연을 많이 날린다. 조선시대에는 연을 만드는 종이도, 그리고 연실도 또한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서울과 같은 도시지역에서 성행했었다. 연날리는 정월 초에서 시작하여 정월 대보름까지 한다.
② 널뛰기 설날에 노는 유일한 여성 놀이다. 널뛰기는 약 2-3미터 쯤 길이의 널빤지 밑에 짚단이나 가마니를 놓고 양 끝에 한 사람씩 올라가 마주 보면서 번갈아 뛰며 노는 놀이이다. 고려 시대까지만해도 우리 나라 여자들이 가장 즐기던 놀이엿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이 되면 같이 앉을 수 없다는 유교규범에 묶여 겨우 정초에나 놀 수 있게 되었다. 널뛰를 하게 된 유래로 몇 가지 속설이 있다. 첫째로는 부녀자들이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자 담장 밖의 세상과 남자들을 보기 위해 뛰었다는 설과 둘째로는 옥에 갇힌 남펴능ㄹ 보기 우해 여인들이 옥의 담장 밖에서 널을 뛰었다는 설이다.
* 널뛰기 할 때 맞춰 부르던 노래 묵은 해는 지나가고 새해 신원을 맞이했네 널뛰자 널뛰자 새해 맞이 널뛰자
앞집의 수캐야 네 왔느냐 뒷집의 순이야 너도 왔니 널뛰자 널뛰자 새해 맞이 널뛰자
만복무량 소원 성취 금년 신수가 좋을시구 널뛰자 널뛰자 새해 맞이 널뛰자
서제 도령 공치기가 널뛰기만 못하리라 널뛰기만 못하리라 널뛰자 널뛰자 새해 맞이 널뛰자
규중생장 우리 몸은 설노룸이 널뛰기라 널뛰자 널뛰자 새해 맞이 널뛰자
널뛰기를 마친 후에 떡국 놀이를 가자세라 널뛰자 널뛰자 새해 맞이 널뛰자
③ 윷놀이 윷놀이는 네 개의 윷가락을 던져 말파느이 말을 모두 나오도록 하는 놀이로, 정월 초에서 정월 대보름까지 많이 한다. 남녀노소를 가지리 안혹 집안 바깥 어디에서나 놀 수 있는 우리 나라 대표적 놀이이다. 윷놀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놀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윷의 종류로는 가락윷(채윷), 중윷(서울윷), 장작윷(장자윷) 이 있다. 가장 큰 것이 장작윷이다. 그 밖에도 농부들이 밭일을 하다가 쉴 때 콩을 두쪽 내어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콩윷이라 한다. 여자용은 박달나무에 채색을 해서 예쁘게 만들었으면 곱게 만들어 촉감이 좋다. 남자용은 밤나무를 베어다 크게 만들었다. 윷가락의 호칭은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뜻한다. 조선 시대 김인표가 쓴 <윷판설>에 따르면 윷판의 바깥쪽 둥근 것은 하늘을, 안의 모진 것은 땅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말판에 그려진 동그라미 29개는 하늘의 별자리를 본뜬 것이다. 윷놀이는 놀이뿐 아니라 정초에 농부들이 그 해 농사를 점치는 도구로도 쓰였다. 산촌에서는 높은 지대와 낮은 지대 마을 사람으로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고 이기는 편의 마을이 풍년이 들 것으로 믿었다. 윷을 던져 사람의 한 해 신수를 점치기도 했는데, 이것을 윷점이라 한다. 윷점에는 총 64가지 괘가 있으며, 윷을 세 번 던져 그 결과를 보고 개인의 운세를 점쳤다. 윷점은 대부분 윷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보는 것으로, 윷을 3번 던져서 나오는 결과를 조합해서 정해진 점괘를 통해서 보는 점이다. 모 와 윷은 같은 것으로 보고, 예글 들어 '도도도'는 '어린 아이가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다' '도개걸'은 '남비가 등불을 친다' '개걸도'는 '갓난 아이가 젖을 얻느다' '모걸도'는 '구시가에 바람이 인다'등과 같은 내용으로, 특히 어린이들과 부인들간에 성행하였다고 한다.
④ 쥐불놓이 쥐불놓이는 대개 쥐으 날에 많이 했는데, 점차 정월 대보름에 하는 풍속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쥐불놓이는 원래 농가에서 논둑이나 밭둑을 태워 잡초와 쥐들을 없애려는 생각에서 행해진 풍속이다. 이것은 동시에 해충의 알들을 없애기 때문에 농작물이 잘 자라도록 하는 이점이 있다.
* 집단놀이 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마을에서 지내던 제사와 연결된 집단 놀이였다. 따라서 집집마다 짚을 엮어서 새끼를 꼬아 커다란 줄을 만드는데 여러 가닥, 여러 겁으로 합친 길이가 40-60미터, 지름이 0.5-ㅂ.4미터 쯤의 굵은 새끼줄이었다. 이 몸줄에 참가자 수만큼 손잡이줄을 매달고, 줄머리에는 고리를 지어 보다 큰 암고리 속에 수소리를 끼워 넣고 통나무를 꽂아 연결했다. 대개 마을을 둘로 나누어 암줄과 수줄을 만드는데,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이 둘을 연결해서 하는 것이다. 한 마을을 도로나 개천을 경계로 동,서로 가르고 동편은 수줄을 서편은 암줄을 당긴다. 암수 줄로 나누지 않는 마을에서는 하나로 된 긴줄을 이용했다. 이때는 남녀로 편을 갈라서 줄다리기를 했다. 이때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된다고 해서 남자 펴닝 일부러 져 주기도 했다. 줄다리기에서 이긴 마을은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될 뿐만 아니라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 바로 승부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쉬면서 농악을 치고 다양한 춤과 <쾌지나 칭칭 나네>와 같은 민요도 부르면서 놀았다. 그러다 보면 3일쯤 걸리는 대규모 놀이가 된다. 이처럼 줄다리기는 승부에만 집착하는 경기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더불어 놀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놀이이다. 잘 알려진 줄다리기는 충청남도 당진의 ‘기지시 줄다리기’와 경상남도 창녕의 ‘영산 줄다리기’가 있다
⑥ 고싸움놀이 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마을을 동서로 편을 나누어 하던 놀이이다. 이 놀이는 정월 초부터 시작하여 정월 16일에 절정에 이르고, 음력 2월 1일에 마치는 대규모 놀이다. 특히 남성들만 참여하여 자기네 편의 고를 들어 부딪치면서 싸움을 하기 때문에 격렬한 놀이이다. 고싸움의 ‘고’는 옷고름이나 그 끝의 한 가닥을 길게 늘여 둥글게 모양을 맺는 것을 말한다. 즉 고싸움에 사용하는 고가 이와 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고싸움은 줄다리기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줄다리기의 암수 줄을 연결하는 방식이 같고 노느 방법도 줄다리기와 비슷하다. 고는 먼저 대가리와 몸통 그리고 두 가닥의 꼬리로 만들어진다. 이때 먼저 어린이들이 할 수 있도록 조그만 고를 만들어 상대편 마을로 가서 약을 올린다. 그때 부르는 노래로 ‘승전가’가 있다
이겼네 이겼네, 동부(서부)가 이겼네 졌네 졌네, 서부(동부)가 졌네 이기려고 올라왔던(내려왔던) 서부 청년들(동부 청년들) 어찌하여 지고 가는가 내년 요때나 만나나 보세
이렇게 약을 올리면 상대편 마을 아이들은 더 큰고를 만들어 다시 약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점차 어른들의 싸움으로 번져 큰 고를 만들어 본격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다. 마을의 큰 공터에 모여 상대편의 고를 향해서 다가갔다가 물러나고 다시 다가갔다가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분위기가 고조되면 앞으로 돌진하여 정면으로 고가 부딪치게 된다. 미는 힘에 의해 고는 하늘로 솟아오르고, 줄을 타고 있던 대장들은 서로 밀어 떨어드리려고 싸움을 벌인다. 이때는 농악대나 구경꾼들이 자기 편이 이기도록 풍물과 함성을 울리면서 한껏 분위기를 돋운다. 특히 고끼리만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들도 상대편 사람들과 싸움을 하는 등 마치 전쟁터같다. 이 고싸움은 정월 내내 이루어지는데, 승패가 나지 않으면 2월 초하룻날에 마지막 결전을 치러 승패를 가린다
⑦ 석전(돌싸움) 편을 갈라 하는 석전은 남성적이며 전투적인 놀이였다. 이 놀이는 선사 시대 때부터 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이 놀이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이나 고개 등을 경계로 하는 마을 단위의 싸움이다. 전국적으로 전승되었는데, 특히 평양 지방에서는 가장 격력하게 싸움을 했다. 로의 크기는 대략 호두알만했다. 싸움을 하다 도망가는 편이 지게 되었다. 이 놀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진취적 기상과 마을을 단위로 한 협동과 단결을 다져 왔다.
⑧ 그밖에 차전놀이, 쇠머리대기, 거북놀이, 기세배 등 지방에 따라 다양한 놀이가 전승되어 왔다
3. 음식 (1) 설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 한다. 차리는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 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지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이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편 설 전에 어른들께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세찬이라고 하였다. 그때 보내는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魚物),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①떡국 설날에 흰떡국을 끊이는 풍습은 최남선의[조선상식]에서 흰색의 음식으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천지만물의 부활신생을 의미한다는 종교적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흰떡의 역사를 문헌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벼농사를 짓고 시루와 확돌을 사용하던 때가 B.C 4 - 5세시경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이 때부터 흰떡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흰떡은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按盤)위에 놓고 메로 쳐 몸이 매끄럽고 치밀하게 되도록 한 다음 가래떡으로 만든다. 이 떡을 백병(白餠) 거모(擧摸)라 하였다. 꾸득꾸득해진 가래떡을 얇고 어슷하게 썰어서 떡국거리로 준비해 둔다. 지금은 기계화되어 사라진 정취지만 1950년대만 해도 세모에 집집마다 떡에 소리가 골목을 메워서 즐거운 명절 분위기를 자아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떡국은 흰떡과 쇠고기, 꿩고기가 쓰였으나 꿩을 구하기 힘들면 대신 닭을 쓰는 경우가 많다. "꿩대신 닭"이란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요즘은 쇠고기가 많이 쓰이고 있다. 떡국 끊일 때는 고기장국을 미리 끊여 두어야 한다. 국물이 맛있게 우러나는 양지머리를 고아서 덩어리는 편육으로 이용하고, 양념한 장국을 끊이다가 준비된 흰떡을 냉수에 씻어서 넣고 한소끔 끊이면 떡이 떠오를 것이니 이때 그릇에 담아서 웃기를 얹는다. 웃기는 따로 살코기를 다져 볶은 것과 황백지단을 쓴다. 혹은 살코기와 움파를 꼬치에 꿰어 만든 산적을 한 두 꽂이 얹기도 한다. 특히 개성 지방에서는 조랭이 떡국을 끊이며 충청도 지방에서는 생떡국, 이북 지방에서는 만두국을 끊이기도 한다.
②평안도 만두국 밀가루를 따뜻한 물로 반죽하여 젖은 보자기로 덮어 두었다가 끈기가 생기면 손바닥만큼씩 둥글게 밀어 놓는다. 속은 쇠고기, 돼지고기를 다지고 김치는 속을 털어내고 곱게 다져 물기를 꼭 짠다. 두부도 베주머니에 넣어 물기를 짜고 숙주나물은 살짝 데쳐서 잘게 다져 물기를 꼭 짠 다음 잘 섞어 갖은 양념으로 무친다. 밀어놓은 껍질에 소양지를 넣어 집어 두었다가 쇠고기로 육수를 만들어 만두를 넣어서 끊인다. 상에 낼 때 그릇에 떠서 웃기로 황백지단 채 썬 것을 얹고 초장을 곁들인다.
③조랭이 떡국 멥쌀가루를 곱게 쳐서 흰떡을 만들어 참기름을 바르면서 나무칼로 썰어 조랭이떡을 만든다. 양지, 사골, 양 등을 고아 국물을 만들어서 간을 하고 삶아진 건지는 건져 양념해서 웃기로 쓴다. 준비한 떡을 찬물에 헹구어서 끊는 장국에 넣어 끊으면 그릇에 담고 고기와 완자, 홍백지단을 웃기로 얹는다.
4. 이야기 (1) 설 1) 나이먹는 것과 관련한 토끼 늑대 거북이 옛날에 토끼와 늑대와 거북 셋이서 길을 가다가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주었다. 그런데 고기를 셋이 똑가팅 나누어 먹으면 좋을 텐데 혼자서 독차지학려고 서로 다투기 시작햇다. 그래서 배가 고픈데도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그때 토끼가 좋은 꾀를 하나 생각해 냈다. “우리 이렇게 싸울 것이 아니라, 승부를 내는 것이 어떻겠니?” 성질이 급한 특대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인데?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 발리 이야기해 봐” “그게 뭐냐면, 우리 앞에 보이는 저 산에 가장 빨리 오르는 쪽이 이 고기를 먹도록 하는 거야”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방법이다” 느림보 거북도 한참 생각한 뒤 찬성했다. 토끼, 늑대, 거북은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산까지 뛰어 올라간 토끼는 산에 오르자마자 “야, 내가 일등이다. 산에 내가 가장 먼저 올라왔다” 하면서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늑대는 코웃음을 치면서 “토끼야 웃기지 마라. 너는 산 위에 올라왔는지 몰라도 나는 등이 하늘에 닿았다” 하면서 자기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으니 일등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거북이 골똘히 생각한 뒤에 말했다. “늑대야, 너의 등이 하늘에 닿았다구?” “그럼, 내 등이 하늘에 닿았다니까” “그러면 내가 일들이네” 거북의 말에 늑대는 화를 냈다. “어떻게 네가 일등이냐, 내가 일등이지” 그 말을 들은 거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 등이 닿은 곳은 하늘이 아니라 내 배이기 때문이지” 토끼는 늑대와 거북의 대화를 듣자 자기 꾀에 자기가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또 다른 꾀를 내어 자기가 고기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번에 우리가 한 것은 경주였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쪽이 질 수밖에 없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늑대와 거북은 토끼 말에 맞장구를 쳤다. “토끼야, 그러면 어떻게 정했으면 좋겠니. 나는 배가 몹시 고프단 말이야” 늑대가 말했다. “이번에는 나이가 가장 많은 쪽에게 고기를 주는 것이 어떨까. 우리 나라는 동방 예의지국이니 나이 많은 사람을 존경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면 토끼부터 말해 봐라” “내 나이는 1000살이나 되었으니 당연히 내가 가장 웃어른이지” 토끼는 방정맞게 아무 생각 없이 대꾸를 했다. 그쯤이면 가장 나이가 ksg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늑대가 코웃음을 쳤다. “그 나이로 나하고 견주다니 웃음이 나온다. 나는 이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 같이 생겨났단다” 늑대의 말을 듣고 거북이 점잖게 말했다. “늑대도 나이를 많이 먹었구나. 하지만 나보다는 한참 어리군” 거북은 말을 천천히 이어 가면서 늑대를 보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늑대 너를 보니까 죽은 내 손자 놈이 생각난다. 내 손자 녀석은 네가 태어난던 날 죽었거든” 이렇게 따져 보니까, 거북이 가장 나이가 많더랍니다. 그래서 거북은 고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잘 먹었다고 한다. 이이야기는 나이 많이 먹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나이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 살씩 더 먹는 것인데, 거북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그만큼 지혜가 많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2) 처용의 이야기 처용은 본디 동해 바다에 살고 잇는 용왕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헌강왕이 지금의 울산 지역에 있는 개운포라는 곳에 놀러 갔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헌강왕은 놀라서 무슨 일인가 신하에게 물었다. 신하가 다음과 같이 대답햇다. “이것은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린 것이니,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풀어질 것입니다” 헌강왕은 이 말을 듣고 동해 용왕을 위해 절을 짓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헌강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헌강왕이 경주로 돌아올 때 동해 용왕의 아들도 한 명 따라왔는데, 그 이름을 처용이라고 지었다. 헌강왕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여자와 혼인도 시켜 주고, 벼슬도 내려 편안히 살도록 했다. 처용의 아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인이었기 때문에 병을 옮기는 귀신인 역신이 탐낼 정도였다. 하루는 처용이 없는 사이 역신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처용의 집에 들어가서 부인을 유혹하여 하룻밤을 같이 잤다. 처용은 밤새도록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방에 들어오니 이불 밖으로 다리 네 개가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처용은 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물러나와 마당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밖으로 나갔다. 이때 부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경 밝은 달에 밤이 늦도록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떡하겠는가
이 노래를 듣고 귀신은 정체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처용 앞에 무릎을 끓고 엎드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내가 당신의 아내를 탐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노래와 춤으로 위로하니 넓은 아량과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앞으로는 당신 얼굴이 그려진 것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나쁜 병을 가져오는 귀신을 쫓기 위해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문에 붙이게 되었습니다. 처용 그림을 붙인 집에는 역신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지요.
3) 김유신 장군의 연이야기 <삼국사기>를 보면 김유신 장군이 전쟁중에 연을 사용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시대 선덕 여왕 때의 일이다. 선덕 여왕이 정치를 잘 못한다고 비담과 염종이 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켰다. 선덕 여왕은 이 난을 진압하려고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선덕 여왕이 있는 월성 쪽으로 큰 별이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니 월성 쪽으로 큰 별이 떨어졌도다. 옛날부터 별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피 흘릴 일이 생긴다고 했다. 이것은 여왕이 패할 징조이니, 우리가 승리할 것이 분명하도다” 이 말을 들은 부하들은 큰 용기가 생겨 함성을 질렀다. 그들의 함성은 땅을 뒤흔들 만큼 대단했다. 선덕여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자 김유신 장군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좋고 나쁜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이번에 월성에 떨어진 별도 아무런 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라옵건대 여왕께서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마시옵소서” 여왕은 그 말을 듣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의 말대로라면 오죽이나 기쁜 일 이오” 그 날 밤 김유신 장군은 부하들에게 허수아비와 큰 연을 만들도록 명을 내렸다. 그런 뒤 큰 연에 허수아비를 달고 불을 붙여 하늘로 띄웠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마치 큰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다. 다음날 김유신 장군은 사람들을 시켜 다음과 같은 소문을 내도록 했다. “어젯밤에 떨어졌던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도다” 그 소문을 들은 적군은 크게 동요했다. 김유신 장군은 흰 말을 잡아서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다음날, 김유신 장군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하늘에서 떨어졌던 별이 다시 올라갔음은 우리에게 상서로운 일이 생길 것을 암시하는 것이오. 지금 비담의 무리들이 여왕에게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켰으니, 어찌 하늘이 노하지 않으리오. 이제 그들을 공격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오” 여러 장수와 부하들은 사기가 높아졌다. 그래서 비담의 무리가 모여 있는 성을 공격하여 쉽게 이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