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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는 기독교 강요의 초반에 자연 만물에 나타난 자연계시를 이야기한 뒤에, 이제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특별계시에 대한 얘기로 넘어갑니다.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균형있게 다루는 것이죠.
시편 19편은 이러한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가 균형 있게 잘 나타나 있죠.
1절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이 하나님의 솜씨를 알려준다'고 말합니다.
온 우주와 천제, 지구의 생태계, 원자와 분자, 세포, 생명체, 그리고 인체의 구조 등에서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
누구라도 그것은 ‘조물주의 놀라운 창조 능력’으로 생겨났을 것임을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창조 세계 속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연’이라는 만능 언어로 해체해 버립니다.
하지만 자연이 뭐란 말입니까? 자연이 원자와 그 속의 전자 및 핵이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소립자의 질서, 세포의 구조, 단백질의 기능, 천제의 질서 등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있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말을 자연이 창조했다는 말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의식 없는 자연이 의식 있는 신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말이 아닐까요.
시편 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3절에서 다윗은 자연 계시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창조 계시는 온 세상 끝까지 미칩니다.
온 세상 모든 부족과 민족 사람들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우주를 보고 신의 존재, 곧 조물주의 존재를 의식하니까 말이죠.
하지만 날이 날에게 하는 말, 밤이 밤에게 전하는 지식은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계시는 모호합니다.
창조 계시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모호성입니다.
사람들은 우주와 자연, 인체를 보고 조물주의 존재를 느낍니다. 하지만 대체 그 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 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신의 이름은 무엇인지, 우리 인간을 향해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 신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맘대로 신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형상도 만들고, 신전도 만들고, 봉헌도 바치고, 예배도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죠.
일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가는 아빠가 있었다고 해봅시다.
하루는 아빠가 일이 빨리 끝나서 집에 일찍 들어갔는데, 자녀가 아빠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라고 했습니다.
거기다가 공부를 가르쳐주러 온 과외 선생님의 무르팍에 앉아서 '선생님이 아빠면 좋겠다'라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그 아빠의 마음이 어떨까요?
우상숭배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신에게 예배하면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무지 불쾌해 하십니다.
1. 그래서 우리는 자연계시말고 좀 더 명료한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특별계시, 곧 성경이죠.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성경 없이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칼뱅은 성경을 안경에 비유했습니다.
저처럼 노안이 심하게 온 사람이 책을 보면 흰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자라는 것만 알아봅니다. 책을 저 멀리 떨어뜨려야 겨우 글자가 보일락말락 합니다. 그러나 또 너무 멀면 글자가 안 보여요.
뭔가가 있기는 있는지 알겠어요.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알아볼 수 없어요.
창조 계시는 안경 없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런데 돋보기 안경을 쓰면 어떻게 됩니까? 글자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명하게 알아볼 수가 있어요.
본문을 보면 1-6절은 창조계시에 대해서 말씀한 뒤,
7절부터 끝까지 특별계시, 곧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계시, 곧 일반계시와 성경, 특별계시가 합쳐져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야훼’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으니까 알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이 '야훼'라고 알려주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주신 것이 바로 말씀이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니 성경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길이 따로 없습니다.
7절: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만듭니다. 신상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고, 신의 계보와 역사를 만들고, 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도 인간이 만듭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이렇게 인간이 신을 만드는 원리를 '투사'라고 했습니다. 투사로 신을 어떻게 만든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통해서 그런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빼놓고는 인간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인간의 몸을 지녔는데, 인간보다 완전한 몸매를 가졌어요. 인간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는데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초인적인 능력으로 죄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도둑질하고, 강간하고, 질투하고, 죽입니다. 마치 극장에서 필름의 이미지를 큰 스크린에 투사해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인간을 천상이라는 스크린에 투사해서 만든 것이 신이라는 뜻입니다.
바알, 아세라, 밀곰, 그모스... 이런 고대 신들을 보면 신은 인간 욕망의 투사임을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고대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보면 젖가슴이 여러 개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것은 다산과 풍요라는 욕망을 투사해서 그 여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기독교는 달라요. 기독교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즉 계시를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밝히셨어요. 그리고는 늘 말씀하시기를, '니네들 멋대로 나에 대해서 상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연 종교는 인간의 투사물이지만, 기독교만 계시 종교입니다.
다른 모든 자연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지만,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 내려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계시가 없으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없으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성경을 우회해서 하나님과 직접 만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혹시 어떤 인간이 자기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그 인간을 멀리 하셔야 합니다.
성경 없이 지극한 열심과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그 결국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떠나면 반드시 오류에 빠집니다.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 찬양을 부를 수도 없고, 성경을 떠나서 기도할 수도 없고,
성경을 떠나서 예배할 수도 없고, 성경을 떠나서는 구제와 실천을 할 수도 없습니다.
신비한 영적 체험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신앙의 기초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참과 거짓의 시금석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세요. 그 길만이 우리 영혼이 사는 길입니다.
2. 반드시 알아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상응합니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계시관에 대한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특별계시의 범주에 성경과 교회의 전통,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개신교회는 특별계시를 오직 성경 뿐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성경 위에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회는 교회 위에 성경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가톨릭교회가 성경 위에 교회의 권위를 두는 것은 교회 회의를 통해서 신약 정경이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정경을 정했으니 교회가 성경보다 권위가 높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정경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정경이 교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구약 정경은 AD 90년에 유대인 랍비들이 얌니아 회의에서 결정했습니다.
신약 정경은 AD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교부들이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만 보면 정경은 교회회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가톨릭 교회의 말대로 교회가 정경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정경을 확정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AD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구약 39권에 12권을 더해서 51권이 되었습니다. (자세한 역사적인 내용은 생략함) 그렇다면 가톨릭교회는 나중에 또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성경을 또 바꿀 수도 있겠지요.
저는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계시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경을 교회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맞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정경을 만들었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회가 정경을 바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교회가 정경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스스로 정경이 된 것입니다.
2018년에 한국의 아이돌그룹 BTS가 빌보트 차트에서 2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때문에 BTS가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빌보드 차트가 BTS의 음악을 뛰어나게 만든 겁니까? 아닙니다.
빌보드 차트에 올라가기 전부터 이미 전 세계 음악팬들은 BTS 음악에 열광했습니다.
빌보드 차트는 그것을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BTS의 음악성을 인정만 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숟가락만 얹은 셈이죠. 다만 빌보드 차트는 공정하게 심사를 한다는 공신력이 있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권위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빌보드 차트가 공정하게 심사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빌보드 차트의 권위는 아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신약정경을 정하기 전에 이미 2세기 초부터 15권 정도의 신약성경은 이미 모든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회의도 없이 말입니다.
논란이 되었던 몇 권의 책들이 있어서 그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권위는 이미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교회 회의는 숟가락만 얹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정경을 정했다는 식으로 교회가 성경의 권위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사도들은 신약성경을 말하고,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바울은 성경이 교회의 터 위에 있지 않고, 교회가 신구약성경의 터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교회가 성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를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가 부여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위도 성경의 권위를 능가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또다른 방식으로 성경의 권위를 문제 삼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도전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나 성서비평학자들은 성경이 오랜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변경이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오리지널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의 원본을 알 수 없으니 지금의 성경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66권 중에서 단 한 권도 원본은 남아 있지 않는 것은 맞습니다.
수 천 년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원본은 다 유실되거나 훼손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들은 전부 사본들 뿐입니다. 그것도 수 십 번째 사본들이에요.
수 천 년 동안 사본을 수 십 번 필사하다 보면 얼마나 많이 첨삭이 이루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사본만 가지고 만든 성경이 과연 신뢰할 만한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필사의 오류 뿐만 아닙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필사자가 자신의 생각을 집어 넣는 것을 원본의 훼손이라고 생각지 않고 도리어 원본에 대한 찬양으로, 즉 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 또 기타 여러 고전들은 수많은 필사자들이 자기 생각을 집어 넣어서 원형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성경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니 계시로서 성경의 신뢰성은 크게 실추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요.
구약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 39권이 전부 남아 있는 완전한 형태의 사본은 1003년에 씌어진 레닌그라드 사본입니다. 그 이전의 사본 중에는 이런 완성된 형태의 사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47년에 한 동굴에서 다량의 구약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쿰란 사본, 혹은 사해 사본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이사야서 전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사본이 만들어진 때를 BC 70년 경이라고 합니다.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1천년도 훨씬 전에 필사된 사본이었습니다.
학자들은 과연 사해 사본과 레닌그라드 사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첨삭이 일어났는지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99.999%
미세한 차이 외에는 사실상 100% 일치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니다.
성경 이외의 그 어떠한 문서에서도 이러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사본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성경은 놀라울 정도의 신빙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교 불가능한 신뢰성(incomparable credibility)을 성경이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자, 이런 놀라운 결과를 보고 학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게 되었을까요?
아니죠.그들은 여전히 또 다른 문제를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 한 가지 사례로 모든 비평학적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는 성경을 의심의 해석학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해석학으로 먼저 접근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소위 학문의 이름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도가 존재하지만 많은 경우 그러한 학자들의 연구는 지식인들의 불신앙이 포장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물론 학자들 중에는 비평학을 도구로 해서 성경의 영감성을 입증해 나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학자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평학을 택한다고 해서 무조건 불신앙으로 흐르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증거나 반대증거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성경의 진위에 대한 결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어떠한 증거가 나와도 결국 믿을지 말지는 여러분 각자가 결정할 일입니다.
결국 성경을 믿을지 말지는 증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신앙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결정하십시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사실 증거를 통해서 성경의 권위를 입증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만일 증거를 통해서 성경의 권위가 입증된다면 증거의 권위가 높은 겁니까, 성경의 권위가 높은 겁니까?
성경 위에 객관적 증거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결국 객관적 증거가 하나님이라는 말이겠지요.
학문적으로 성경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의 권위는 그런 것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의 영감이 살아 숨쉰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3.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는 것의 뜻은 무엇일까요?
9-14절을 다시 읽읍시다. 그것은 순종함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의 기록이고, 텍스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의 양심을 후벼 파고,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러 세울 때가 있어요.
그때 성경말씀은 더 이상 객관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나를 향해 돌진해 오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voice)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의 뜻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자세를 바로 고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사변적인 지식, 곧 유레카적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수 천, 수 만 명의 신학자, 철학자, 문학가, 인류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통해 찾는 것은 사변적인 지식들입니다.
하지만 사변적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그것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유레카적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인 지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알게 되자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알게 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단순히 텍스트로 대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와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르네 지라르는 모태신앙인이었으나 고등학생 이후로 무신론자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인 지라르가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는 이렇게 첫 번째 회심을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한 번 더 회심합니다.
병이 들었을 때, 자신을 찾아와 주신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이것이 두 번째 회심인데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실존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해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 한 복판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순종함으로써입니다.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리는, 순종의 해석학이라는 겁니다. 순종할 때, 더 깊이 말씀이 깨달아지고 해석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내 상황 속에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더 깊이 해석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읽었다고 칩시다.
사변적인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읽으면, ‘아, 성경은 부모 공경을 가르치는 텍스트구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관계적인 관점에서 이 본문을 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컨대, 제가 이 말씀을 순종의 해석학으로 읽는다면 저는 이 말씀이 제가 저의 어머니이신 오 권사님을 부모님으로 공경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끝납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니 순종해야죠.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물론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유함 가운데서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지금 전화를 드리면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고,
‘통장으로 어머니께 용돈을 송금해 드리는 건 어떻겠니?’
혹은 ‘주말에 어머니를 한 번 찾아 뵙는 건 어떻겠니?’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그런 음성이 들리면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순종의 해석학으로 성경을 읽는 길이에요
이것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기본 자세입니다.
2019년 1월달에 방문한 미션 디모데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지금의 대표목사인 다니엘과 세 친구들, 뤽, 스탄, 미쉘, 이 4명이 신학교 동기인데, 신학교에서 그들이 느꼈던 것은 답답한 아카데미즘이었습니다.
교수님들은 성경 해석을 가르치는데, 해석을 통해서 답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끊임없는 질문 속을 헤매게 만드는 식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교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아무 답도 찾을 수 없었으며, 도리어 더 많은 물음과 질문만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다니고 있던 다니엘의 아버지 베르탕은 평신도였고 장로였는데 그의 가르침은 교수님의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베르탕 장로님은 자기 사업을 잠시 접고 1,000km도 넘는 거리를 날라와 신학교 앞 호텔에 방을 잡고, 저녁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만나 성경공부를 해주었습니다.
베 장로님은 성경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직면하게 해주었고, 회개하도록 촉구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베 장로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세 친구들은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간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도 그 간증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교수님은 이들을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비난하고, 베 장로님도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교수님들은 베 장로님과 학생들의 성경 해석법을 붉은 망토를 향해 돌진하는 투우소 같은 해석법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결국 교수님들은 4명의 학생을 퇴학처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교수님들이 비아냥거렸던 그 표현은 정확히 올바른 성경해석의 길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관망하거나, 감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붉은 망토를 향해 돌진하는 투우소처럼 성경 말씀을 향해 돌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순종의 해석학이라고 말씀드리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말씀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말씀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와 성경이 충돌할 때,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 속으로 들어가고, 성경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의 위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이끌고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순종함으로 여러분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