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6편 1~11절
[서론] 흔들리는 세상과 마르틴 루터의 선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고통의 순간이든, 사회적·우주적 혼돈의 순간이든 인간은 연약함 앞에 무력함을 느낍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가톨릭 교권과 거대한 제국의 압박, 목숨을 위협하는 이단 심문, 절친한 동료들의 죽음과 흑사병이라는 절망적 전염병 속에서 그는 극심한 영적·육체적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절망의 가장 어두운 순간마다 자신의 동료 멜랑히톤(Melanchthon)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가서 시편 46편을 찬송하세나!” 루터는 이 시편 46편에 기반하여 그 유명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A Mighty Fortress Is Our God)>를 작사·작곡했습니다. 그를 절망에서 건져내고 개혁의 깃발을 들게 했던 것은 시편 46편 속에 숨겨진 깊은 영적 비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시편이 담고 있는 신약적 의미와 철학적 사유를 살펴보고 우리의 삶과 교회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혼돈의 세상 속 유일한 존재론적 피난처
본문 1절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마하세)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라고 합니다. ‘마하세(מַחֲסֶה)’는 피난처, 은신처, 굳건한 보호막을 의미합니다. 2~3절에서 묘사되듯,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는 전 우주적 해체(Chaos)와 같은 위기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영적 아지트를 뜻합니다.
현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세상이라는 거친 풍랑 속에 무방비하게 던져진 존재, 즉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자 근본적 불안(Angst)에 사로잡힌 존재로 보았습니다. 인간이 구축한 자본, 이성, 제도라는 산과 성벽은 실존적 위기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기반은 이 가변적인 세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마하세’ 안에 있습니다.
구약의 물리적 성벽이었던 ‘마하세’는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완성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하시며, 세파에 던져진 인간에게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유일한 영원한 피난처로 제공하십니다.
성도는 세상의 흔들림에 일희일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절대적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안에 안착한 존재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마하세'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전방위적 방어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부로부터 소생하는 생명수
본문 4절은 “한 시내(나하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라고 합니다. ‘나하르(נָהָר)’는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강' 또는 '줄기'를 의미합니다. 3절의 바닷물(얌)이 요동치고 파괴하는 외부의 혼돈이라면, 4절의 ‘나하르’는 하나님의 도성 안에서 조용히 흘러 도성을 기쁘게 하고 소생시키는 은혜의 물줄기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만물을 움직이는 창조적 근원으로서 ‘생의 도약(Élan Vital)’을 언급했습니다. 외부 세계가 아무리 파괴적이고 비극적이라 할지라도,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내적 생명력이 있다면 존재는 타락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나하르’는 영혼의 도성을 적시는 거룩한 내적 생명력의 원천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성령의 역사를 예표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신약의 성도는 외부의 기근이나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생수의 강)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기쁨과 평안을 공급받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외형적 세력이나 세상의 인정을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 개인과 공동체의 내면 속에서 날마다 흐르는 성령의 ‘나하르(생수의 강)’를 마시는 데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작은 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깊은 샘물을 끌어올려 세상을 개혁했듯, 성도는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서 내면의 은혜를 퍼 올리는 생명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인간의 기표를 멈추고 하나님을 직관하는 거룩한 정적(靜寂)
본문 10절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하르푸)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고 합니다. ‘하르푸(הַרְפּוּ)’는 '늘어뜨리다', '손을 놓다', '시도를 중단하다(Be still / Let go)'라는 뜻의 명령형입니다. 자신이 직접 상황을 통제하려는 육신의 애씀과 인간적인 무기(칼과 창)를 내려놓고,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가만히 머물라는 부르심입니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나 스피노자의 사유를 빌려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힘과 담론으로 세상을 규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와 초월적 존재(God)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인간 고유의 소음과 자아의 분주함을 멈추는 ‘거룩한 정적(Holy Silence)’이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내려놓는 ‘하르푸’의 순간 비로소 신성(Divinity)이 개입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적 자기 비움(Kenosis)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에서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 명령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뜻을 완전히 내려놓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결짓고 승리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보다 앞서 달려가며 자신의 불안을 통제하려 안달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나의 계산과 고집의 손을 놓는(하르푸) 내적 수용성에서 시작됩니다. 불안과 염려의 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결론] 루터처럼 고백하는 삶으로
마르틴 루터는 ‘마하세’(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의지했고, 말씀의 ‘나하르’(생명수)를 마셨으며, 자신의 인간적 수단과 염려를 내려놓는 ‘하르푸’(가만히 있음)를 통해 거대한 시대의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는 것 같은 삶의 위기 속에 서 계십니까?
ㆍ나의 열심과 능력을 내려놓고 영원한 피난처 되신 ‘마하세(מַחֲסֶה)’ 그리스도께로 피하십시오.
ㆍ내면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나하르(נָהָר)’ 성령의 생명수로 영혼을 적시십시오.
ㆍ불안과 염려의 손을 내려놓는 ‘하르푸(הַרְפּוּ)’의 정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인간의 손을 내려놓을 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침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이 위대한 승리의 노래가 성도 여러분의 삶과 우리 교회 가운데 영원토록 울려 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