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897, 재위 887~897)은 우리 역사에서 3명뿐인 여왕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녀는 음란하고, 정치를 잘못한 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과연 그녀 때문에 신라가 멸망했던 것일까? 그녀는 어떤 여왕이었을까?
신라 3번째 여왕이 되다
그녀는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과 문의왕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오빠는 헌강왕과 정강왕이었다. 그런데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이 갑자기 죽자, 아들이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동생인 정강왕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또한 1년 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이때 왕위 계승 1순위는 경문왕의 동생인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었다. 그런데 정강왕은 상대등이 아닌, 시중(侍中) 준흥(俊興)에게 자신의 유언을 남겼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여동생 만(曼)이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옛날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의 고사를 따라 그녀를 임금으로 받들라고 했다. 정강왕의 유언 탓에 그녀가 임금이 되기는 했지만, 신라사 전체에서 본다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경문왕의 자손들만으로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라는 세력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성여왕의 즉위에 있어서 다른 귀족들의 반대는 거의 없었다. 신라 후기 치열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해진 것을 경험한 탓인지, 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이후에는 왕위 계승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진성여왕은 또한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숙부 위홍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선덕, 진덕여왕 시기보다도 진성여왕 때의 왕권은 안정적이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편 진성여왕
그녀가 즉위할 당시 신라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자립하고, 반란 세력들이 차츰 등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즉위 후 곧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고, 주(州) · 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시켜 주기도 했다. 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여 설법을 듣는 등 불교를 통한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또한 상대등 위홍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정리한 [삼대목(三代目)]을 편찬케 하기도 했다. 대구화상이 48대 경문왕을 위한 노래를 지어 바친 적이 있는 인물이었던 바, 삼대목 편찬 사업은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효녀 지은의 이야기에 있다. 지은은 서른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귀족의 집에 노비로 팔려갔다. 그 대가로 얻은 쌀로 어머니를 봉양하자, 어머니가 그 일을 알고 몹시 서러워했다. 두 모녀가 껴안고 운 사연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진성여왕이 이들에게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주고 곡식을 내려주었으며 심지어 군사를 보내 보호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진성여왕은 자신이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농민 반란이 일어나다
진성여왕이 백성을 위한 정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가 정치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 계기는 즉위 다음해 2월 숙부이자 애인이었던 상대등 위홍의 죽음이었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위홍이 진성여왕의 남편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금 관점에서는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가 음란한 것이 되지만, 신라시대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위홍이 죽자 그녀는 젊은 미남자 2, 3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중요한 벼슬자리를 나누어 나라의 정치를 맡게 하기도 했다. 그러자 아첨꾼이 생기고, 뇌물을 주는 일이 벌어지는 등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게 되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는 그녀가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인 부호(鳧好)부인과 그 남편 위홍 등 3, 4명이 권력을 마음대로 해 정치가 어지러워져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도 했다. 그녀가 정치에 관심을 끊자, 주변 인물들이 권력을 휘둘러 국가 운영을 잘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때부터 그녀에 대해 비판을 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888년에는 신라에 큰 흉년마저 들었다. 그러자 다음해인 889년 각 지역에서 들어오는 세금이 크게 줄어, 나라의 창고가 비게 되었다. 진성여왕은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지만, 도리어 사방에서 도적떼가 생겨나게 되었다.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농민 반란을 시작으로, 기훤(箕萱), 양길(梁吉), 견훤(甄萱, 후백제의 초대 왕, 재위 900~935), 궁예(弓裔, 후고구려의 초대 왕, 재위 901~918), 적고적(赤袴賊) 등 사방에서 반란의 무리가 생겨났다. 특히 견훤이 신라의 동남부를, 궁예가 강원도와 경기도 지역을 장악하여, 신라의 실질적인 통치지역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 한정될 정도였다. 896년에는 적고적이 금성(金城)의 서부지역인 모량리까지 진출해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전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치 풍조가 부른 신라의 위기
이렇게 백성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게 된 것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신라는 사치 풍조가 만연하고 있었다. 서기 880년 헌강왕이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고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써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이냐”라고 신하에게 묻기도 했다. 이 물음은 곧 신라의 풍요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신라의 사치풍조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와 생산이 늘고, 숯으로 밥을 짓게 되면, 당연히 산에 많은 나무를 베어내어야 한다. 당시 경주는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대도시였다. 경주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나무를 소비함에 따라, 경주 주변의 많은 산들이 민둥산이 되어갔다. 이는 곧 환경의 역습을 가져오게 했다. 나무가 베어짐에 따라 가뭄이 자주 생기게 된 것이다. 887년 대기근은 신라의 사치 풍조가 만들어낸 자연 재해인 셈이다.
또한 지나치게 풍요로운 귀족들은 씀씀이가 커진 반면,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져 빈부격차가 더 커진 것도 문제였다. 삼국통일을 이룬 후 신라에는 큰 전쟁이 없자 진골귀족들은 권력 다툼에 신경을 쓸 뿐, 백성들을 돌보는데 소홀했다. 오랜 평화가 신라 지배층의 나태함을 불러온 것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정치를 잘못하자,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은 커지게 되었다.
아울러 887년 진성여왕이 즉위 후 1년간 세금을 감면해준 조치도 역효과를 내었다. 888년 세금이 덜 걷히게 되자 정부 재정의 적자 문제를 초래했다. 888년 가뭄 탓에 농민의 수입이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889년 정부는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세금 징수를 강압적으로 실시했다. 이는 곧 농민에게 더 큰 재앙이 되었다. 결국 귀족들의 나태함과 사치풍조, 빈부 격차의 심화, 환경의 역습과 진성여왕의 경제 정책 실패가 어우러지면서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신라의 분열을 막지 못하다
신라에 더 큰 문제는 호족들의 급격한 성장에 있었다. 중앙 귀족들이 왕위 다툼과 사치 풍조에 빠져 있을 때에,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자들이 지방에 내려가 호족이 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무역 등으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자, 군에서 실력을 키운 자들이 차츰 신라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립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견훤, 궁예 등이 등장한 것이다. 지방 호족들은 신라 정부의 간섭과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들을 지원했다.
견훤, 궁예 등의 성장으로 나날이 약화되는 신라를 위해 진성여왕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894년 진성여왕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 857~?)이 제시한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6위)에 임명하는 등 개혁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최치원의 시무책 내용은 전해오고 있지 않지만, 대개 골품을 초월한 인재 등용과 중앙 집권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 추정된다.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귀족들이 이런 개혁을 수용할 만큼 협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최치원의 개혁안마저 거부한 상태로 자신들의 이권만을 소극적으로 지켜낼 뿐이었다. 그녀는 귀족들의 변화를 이끌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다.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진성여왕
진성여왕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895년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인 요를 만나서 “경문왕의 후손인 나의 형제자매의 뼈대는 남들과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불록하게 솟아 있으니 진실로 헌강왕의 아들이구나.” 라고 말하면서 태자로 책봉했다. 경문왕의 후손들 가운데 왕위 계승자를 찾자, 진성여왕은 897년 6월 신하들에게 “근년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는데, 이는 내가 덕(德)이 없는 까닭이다. 이제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 되었노라” 라고 말하면서 왕위를 이제 15세가 된 태자 요에게 선양(禪讓)하였다. 실정(失政)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진성여왕은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진성여왕은 정치를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신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리 타당성이 없다.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면서 나태해진 신라 진골 귀족들과 여러 왕들의 잘못이 더 크다. 이미 곪아버린 신라의 정치를 바로잡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늦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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