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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요한 21,18-31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죽였다. 너희와 내가!”
많은 사람들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상징적인 이 말만으로 그를 철저한 무신론자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시대를 앞질러간 말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광인’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단한 세상을 선포합니다. 광인은(불편한 진실을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세상이 이제까지의 형이상학적이며 도덕적인 확실성의 기반을 상실했다고 알린 것입니다. 니체의 이 주장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믿는 종교 안에도 잘못된 믿음(맹신)에 따른 파괴적인 ‘하느님상’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ex. 무수한 사이비 종교의 해악과 폐해, 신천지가 단적으로 잘 보여줌).
그럼 어떤 하느님 상을 가져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그 단초를 제시합니다.
먼저 마르티노 성인의 일화에 주목해 봅니다. 성인에게 한번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속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상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피흘린 상처를 보여줄 수 없는 신이라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우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니체가 선포한) ‘신의 죽음’ 이후 주인 잃은 왕좌를 차지하려 드는지요?
나는 모든 인간의 아버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한 ‘종교 기관’이나 그들의 대표자들이 ‘독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여기저기서 휘돌고 있는 강물이 지향하고, 포기하지 않음으로 최종적으로 만나는 바다입니다. 각자의 전통의 빛, 각자의 진리를 향한 갈망, 삶의 궁극적 신비를 성실하게 추구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그들의 양심과 인식의 빛에 이끌려 온 모든 이들이 만나는 강어귀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 체제와 문화의 경계는 결국 그분에게서 만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토마시 할리크는 자신의 저서 [상처입은 신앙]에서 고백합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다른 이의 하느님’이 결국 ‘나의 하느님’이라는 희망을 앗아 갈 수 없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또한 내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 안에서 나는 상처 입은 손과 꿰뚫린 심장에 의해 열린 바로 그 문 말고 그분께 가는 다른 길은 알지 못합니다.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나는 믿나이다’(Credo)로 시작합니다. 라틴어 ‘믿다’(credere)라는 말은 ‘심장을 내어주다’(cor dare)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나의 심장과 나의 신앙은 오직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하느님께만 속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그 상처를 보여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어찌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겠습니까?(로마 8, 35) 하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이 당신의 상처로 증명되는 사랑에서(요한 20, 20-27) 우리를 갈라 놓겠습니까? 그분의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습니다. 강렬하게 빛나는 종교적 환영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에서 ‘못 자국’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환상은 아닌지, 내 소망의 투사는 아닌지, 심지어 그리스도의 적인 사탄의 장난은 아닌지 의심해야 합니다. 나와 우리의 하느님은 상처 입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상처를 만져 보시오!’
“당신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살펴보시오. 그리고 당신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 시대의 골고타’에 다가가라는 뜻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모든 작은 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습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이야기는 상처 입은 모든 이,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에도 여전히 가득한 그분의 상처를 만질 때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암시하는 이사야서 53, 5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는 더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따라서 이 세상에 가득한 수많은 이들의 상처를 만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나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서 ‘한 번에 한 군데씩’ 상처를 풀었다 싸매는 행동으로써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의 상처만 치유할 수 있을 뿐입니다(헨리 나웬의 상처입은 치유자의 맨 마지막 장에 나오는 예화 참조). 이에 신속한 완성을 바란나머지 실망해서 세상의 상처에서 도망가거나 그 상처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 상처를 보고 만져야 합니다. 그 상처에 의해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상처에 무관심하고 냉담하고, 상처받지 않은 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심장을 내어 놓는 신앙을 고백하고, 보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의 아픔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고백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눈 감는 신앙은 환상이거나 마약일 뿐입니다.
여기서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토마스 사도의 불신이 믿는 제자들의 신앙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합니다.”
토마스는 비참한 최후까지 스승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라자로를 소생시키러 가실 때, 무언가를 느낀 사도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 16) 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한 그에게 부활은 아름답게 꾸며진 ‘행복한 결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직 ‘만질 수 없는 신비’에 열려 있을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토마스는 ‘부활’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1코린 1, 17 참조) 의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려 했던 예수의 상처는 마르티노 성인의 질문처럼 상처 없는 신(or 부활)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당신 상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상처는 우리 모두의 죄와 고통의 아픔을 지고 간 순종의 상처였습니다. 그 상처는 ‘모든 것을 견디어 낸’(1코린 13, 7) 사랑이며, “큰물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갈 수 없는, 죽음처럼 강한 사랑”(아가 8, 6-7 참조)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가 상처를 만짐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다시 깨우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가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거기에서, 어쩌면 그곳에서만 너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에서 나를 만난다. 이 만남을 피하지 마라. 두려워하지도 마라! 불신하지 말고 믿어라!”
토마시 할리크는 말합니다. “부활은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요청이며 요구다.” 라고...
참으로 그러합니다. ‘우리시대의 골고타’ 앞에서 그 고통의 불길을 끌 수 없다 할지라도, 이 고통의 불길 앞에서 항복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악에 직면해서 악에게 최종 결정권을 내맡겨서도 안 됩니다.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심으로써 ‘심장을 내어주는’ 믿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 사랑을 잃어버린 곳에서 마저도, “사랑을 믿는 것”(1요한 4, 16 참조)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은 요청이며,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일어나 세상의 상처가 (or 그분의 상처 자국이) 우리에게 어떤 부름이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외침을 알아 들을 것입니다. 그 순간 비로소 만질 수 없는 신비에 우리 자신이 열려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Andrea Bocelli & Helene Fischer의 “The Prayer”를 감상해 봅시다.
I pray you'll be our eyes (우리의 눈이 되어 주시고)
and watch us where we go (우리가 어딜 가든 굽어 살펴 주소서)
And help us to be wise (그리고 우리를 지혜롭게 하소서)
in times when we don't know (우리가 무지할 때에도)
Let this be our prayer (이렇게 저희가 기도하게 하소서)
when we lose our way (우리가 길을 잃을 때)
Lead us to a place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guide us with your grace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To a place where we'll be safe. (우리가 안전할 수 있는 곳으로)
La luce che tu hai (The light that you give us)
I pray we'll find your light (당신의 빛을 찾게 하소서)
And hold it in our hearts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 간직하도록)
Nel cuore resterà (Will stay in our hearts: 그 빛을 저희가 기억하게 하소서)
A ricordarci che (When stars go out each night: 매일 밤 별들이 떠오를 때)
L'eterna stella sei
Nella mia preghiera (You are an everlasting star 당신은 영원한 별이십니다)
Let this be our prayer (이렇게 당신께 기도하게 하소서)
Quanta fede c’è (There’s so much faith: 얼마나 많은 믿음이 필요한지요)
When shadows fill our day (어둠이 우리 삶을 채울 때)
Lead us to a place (당신의 은총으로 저희를 인도해 주소서)
Guide us with your grace (당신의 자비와 함꼐)
Give us faith so we'll be safe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며 저희를 안전하게 하소서)
Sogniamo un mondo senza più violenza (평화의 세상을 꿈꾸게 하소서)
Un mondo di giustizia e di speranza (정의와 희망의 세상)
Ognuno dia la mano al suo vicino (가장 가까이 있는 이의 손을 잡게 하소서)
Simbolo di pace, di fraternità (평화와 형제애의 상징으로)
La forza che ci dai (주님이 주신 사랑의 힘으로)
We ask that life be kind (우리의 삶이 평화롭게 하소서)
E’il desiderio che (저희의 바램입니다)
And watch us from above (하늘에서 저희를 굽어 살피시어)
Ognuno trovi amore (모든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We hope that life be kind (이처럼 평화롭게 하소서)
Intorno e dentro a se (In and around himself: 주님 안에서)
Another soul to love (또 다른 영혼이 그 사랑을 만나기를)
Let this be our prayer (이렇게 기도하게 하소서)
Just like every child (어린 아이처럼)
Need to find a place (필요한 곳을 찾아)
(당신의 자비와 함께 우리를 인도하소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저희를 안전하게 하소서.
그 믿음,
주님께서 우리 맘 속에 밝히시던,
그 믿음이 우리를 살리게 하소서)
https://youtu.be/fRmn9XzmLx0
첫댓글 아멘!
그분의 외침을 알아듣고
온 마음을 다하여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할 수있기를 기도합니다
신부님 강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