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갖는 집회에 신자들을 참여시켜야 하는가?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신앙 운동으로 펼쳐나가는 영성훈련을 우려하며-
언제부터인가 교계 신문에 심삼찮게 광고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교도 영성훈련원'의 집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청교도 신앙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새로운 청교도 영성훈련'(NPST)을 내세우고 있으나 살펴본 결과 매우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하는 궁금증을 당연히 갖기 마련이기에 이것에 대하여 설명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청교도 신앙에 대한 이해부터 먼저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청교도 신앙을 먼저 살펴본 후에 계속해서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펼쳐 나가는 청교도 영성훈련에 대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청교도 신앙
기독교인들은 청교도 신앙의 운동에 대하여 대단히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를 이상적인 신앙 운동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청교도 신앙의 운동이 있게 된 배경과 이것이 끼친 영향 때문입니다. 청교도 신앙 운동에서 '청교도'란 말은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6세기부터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교도'가 개신교[개혁신교;개혁교회]의 신앙으로 크게 영향을 발휘한 때는 17-18세기의 미국에서입니다. 그러나 청교도란 말이 처음부터 좋은 뜻으로 사용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 이 말은 개신교도들을 비난하고 멸시하면서 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영국을 통치하던 당시 그 나라의 종교 상태는 혼란을 거듭하던 때였습니다. 영국은 오랫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치와 신앙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영국에 1534년까지 소수의 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자들이 존재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수의 신자들이나마 영국에 반 카톨릭 교도들로 있었던 것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개혁교회의 신학에 선 신앙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때인 1534년에 영국을 통치하던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끊는 '수장령(首長令; Act of Supremacy)을 의회에서 결의하였습니다. 수장령[수위령(首位令)이라고도 함]이란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한다는 로마교황의 주권을 거부하고 대신에 영국의 왕을 정치와 종교의 머리[주권자]로 한다는 법령을 말합니다. 이 법령으로 영국교회는 더 이상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를 받고 독자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국교회[이 영국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영국 내의 개혁교회와의 구별을 위해 영국국교회라 부른다]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예배 형식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어떤 변화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국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띤 것은 교회개혁에서가 아닌 단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치와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것에 불과하고 영국 왕의 주권을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행사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그에 따른 계산에서였습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서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후 켄터벨의 대주교인 토마스 그랜머(Thomas Granmer)의 주도에 의해서 '39개 신조'가 영국교회의 새로운 신조로 채택되는 일 등이 있으면서 일련의 교회개혁이 있기는 하였으나 에드워드 6세의 죽음으로 더 이상 진전을 보지는 못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개혁은 없었다고 볼 수 밖에 없을만큼 아주 미미하였습니다.
이런 영국에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서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 여왕은 '피의 메리', 또는 '피의 여왕'으로 불리웁니다. 메리 여왕은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어머니의 신앙을 잇는 로마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이런 메리는 여왕에 즉위하자 영국을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로 복귀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메리 여왕은 대주교 그랜머를 비롯하여서 많은 영국교회 신자들을 탄압하고 처형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영국교회의 신자들은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떠났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제네바로 가서 당시 칼빈의 신학 사상과 신앙의 영향을 입으며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당시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우열곡조 끝에 영국에 와 있으면서 에드워드 6세의 궁정 설교자로 있었으나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와 칼빈 밑에 있으면서 그의 신학을 배우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인 존 낙스를 목사로 맞이하여서 칼빈의 신학과 장로정치에 의한 교회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존 낙스는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고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세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여간, 제네바로 망명해 온 영국교회인들은 이곳에서 칼빈의 영향 속에서 개혁교회를 이루어 나갔는데 1558년에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여서 영국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다시 영국국교회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왕을 교회의 머리로 하는 수장령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와 함께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을 떠나 망명하여 개혁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자들의 귀국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때 귀국한 신자들은 영국을 떠날 때와는 크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빈주의에 확고하게 선 신앙과 장로정치에 의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귀국한 이들은 영국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개혁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절감하고 영국교회[영국국교회]를 신조와 교리에 선 가운데서 성경의 원리에 의한 교회 정치를 하고 예배 생활을 하며 경건을 도모해 나갈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 잘못된 제도들을 고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이들은 자신들을 엄격히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신앙관은 당시 영국교회에서는 좀처럼 쉽게 이해되어지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신자들로부터는 많은 비난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것으로 인식이 되었고 이들의 교회개혁을 위한 노력은 영국교회에 눈 밖에 나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자기들의 신앙만이 옳다고 여기는 그런 아주 고집스런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이들을 '퓨리탄'(Purita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는 '청교도'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엄격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들을 퓨리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에 대한 평가를 좋게 가져서가 아니라 비꼬는 투가 다분했습니다. 마치 우리네 교회에서 앞뒤가 꽉 막힌 듯한 신자를 비난하고 멸시하는 말로 '보수주의자'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사실 보수주의자란 말은 신자에게서 성경 진리의 신앙을 지키는 데 아주 엄격함을 보이는 참으로 고귀한 신앙을 지닌 것을 보기 때문에 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계하며 적대감을 지닌 자들에게서 이 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신앙을 제일이라고 아는 그런 고집스런 자들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청교도들의 신앙을 따르는 무리들은 점차 그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퓨리탄, 곧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 평온을 유지하며 교회개혁을 힘껏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청교도들의 세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을 보고는 영국교회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겨서 이들을 굴복시켜서 영국교회의 정치와 예배에 따르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처럼 청교도들을 저지하고자 하였던 것은 정치적 의도에서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을 통치하면서 국가를 주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침략으로부터 지킬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온국민의 집결력이 필요하였는데 이를 영국교회로의 단결을 통해서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영국교회의 개혁을 외침으로 적지 않은 장애가 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영국교회를 따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청교도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크게 끼쳐 청교도 정신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합병하고 제임스 1세로 통치하던 때에서도 청교도를 복종시키기 위한 탄압을 가했고 그의 아들 찰스 1세의 통치 기간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청교도는 생명을 걸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청교도에게서 신앙의 지킴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성경과의 관계에서 신앙이 저울질되는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청교도는 쉽게 그 신앙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앙 양심을 저버리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선 곧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청교도는 '엄격한 사람'이며 또한 '꼿꼿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청교도는 엄격한 종교 생활에 의해서 도덕과 윤리면에서 '청결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청교도에 대한 정의는 퓨리탄이란 용어 외에 '프레씨시안스'(Precisians)라는 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 말은 '꼼꼼한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이렇게 불려진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의해 조망하고 그 안에 두고서 엄격히 해 나가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개혁교회의 산물인 신조와 교리와 여기에서 나온 신학에 충실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이것을 따르는 것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나가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의 삶은 성경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한데 따른 것이기에 당시의 성경에 대한 해석과 그 이해의 관점에 있어서는 문자 하나 하나를 중요시 다루었기에 교회 생활에서 주일을 지키는 것을 비롯하여서 예배 의식 등에 엄격하고도 꼼꼼한 모습을 띠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는 종교 형식에 치우치고 매인 사람들로 여겨졌으며 이런 이유로 이들을 '꼼꼼한 사람'이란 뜻의 '프레씨시안스'라고 불렀습니다.
청교도에 대한 정의는 '프레스비테리안'(Presbyterian)이라는 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 말은 '장로교도'라는 의미인데, 이는 이들이 교회 정치를 장로주의에 의해서 해 나가는 때문이었습니다. 청교도사(淸敎徒史)를 보게 되면 청교도는 하나의 무리들로만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청교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세 부류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가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교회론'에 대한 차이 때문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우리가 오늘날 '성공회'라고 부르는 영국국교회주의자 계열인 청교도입니다. 이들은 국가적 교회를 믿었기 때문에 영국교회를 떠날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있을 때도,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가능한 한에는 영국교회 안에 남아 있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데는 영국교회 안에 있으면서 내부로부터 교회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장로주의 정치를 채택하고 있는 장로교주의자 계열인 청교도입니다. 이들은 국가적 교회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가적 교회는 장로주의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교리의 표준일 뿐만 아니라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표준인데 성경의 교회 정치의 원리는 장로주의에 의한 정치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국가적 교회일지라도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는 왕에 의해서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동의를 받아서 임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치리[권징]는 장로들이 담당해야 하며, 감독과 장로와 목사는 영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회중정치를 따르는 회중교회주의자 계열인 청교도입니다. 이들은 독립파라고도 불리우는데 그것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로서 각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다스림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교회는 자율적이고 자치적이어야 한다고 보고서 교회는 자신의 목사와 집사를 회중에 의해서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회중정치를 따르는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국가적 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상태에서 독자적인 교회를 이루어갔습니다.
청교도가 이렇게 세 부류로 형성되어 있습니다만 우리네 신자들에게는 '청교도'를 언급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신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가 장로주의 정치에 의한 장로교회의 형태를 갖게 되었고, 영국 또한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통해서 '장로주의 규준'(Presbyterian Standards)를 작성하여서 그동안 유지해 왔던 정치 형태인 감독과 대사제 제도의 감독정치를 대신해서 장로주의 정치 형태로 명실공히 자리잡음으로써 국가적 교회였던 성공회에서 장로교회로 전환한 데다가 삼대표준 문서[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서, 소교리문답서]를 교회가 고백할 신앙 문서로 채택하였는데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가 이를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장로교회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따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장로교회로 전환한 이후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때 장로주의가 폐지되고 영국국교회가 복귀되어서 감독주의가 부활되고 장로주의가 쇠퇴해 가는 듯한 역사적 변환의 시기도 겪었습니다만 19세기부터 영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g of England)가 결성되고 전세계에 확장된 개혁교회에서 장로교회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때 장로교회는 청교도들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다룰 수가 없습니다. 장로교회의 역사는 개혁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잇는 것인 동시에 청교도의 역사와 전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청교도'를 기억하고 떠올리면서 이들이 펼쳐 나갔던 신앙을 '청교도 운동'으로 명명하여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이 지닌 신앙이 참으로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진 것은 미국 장로교회의 선교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장로교회의 최초의 선교사는 언더우드 목사인데 그는 북장로교회에 속한 자로서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인 아펜 셀라 목사와 함께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 목사가 들어온 이후에 미국 내에 있는 다양한 교파를 띠고 있는 장로교회를 비롯하여서 다른 교단들도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교회에서 큰 비중의 차지하고 있는 교회는 장로교회인데다가 사실 타교단의 교회의 경우도 '청교도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교단 여부를 불구하고 각 교단을 형성한 분들이 청교도 신앙의 유산에 의해서 신앙 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교도 신앙은 교단을 초월해서 한결같이 중요시 여기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비록 각 교단이 신학적 차이에 의한 다른 교리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청교도 신앙은 개혁교회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러기에 기억되어야 하고 강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청교도 신앙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신앙 운동으로 펼쳐 나가는 영성훈련이 지닌 문제점(청교도 영성훈련원의 신앙 운동은 과연 청교도 신앙 운동과 관계가 있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청교도 신앙인데 왜 청교도 신앙 운운하는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문제가 됩니까? 이는 그곳이 청교도 신앙을 말하지만 그 청교도 신앙을 이용하여 사실은 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비신앙적인 상태의 교회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는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성격을 보면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사실 청교도영성훈련원이 갖는 집회에서 원장인 전광훈은 복음이 아닌 다른 말을 하며 온갖 해괴한 말을 쏟아내면서 신자들을 현혹하고 비신앙적으로 끌고 나가고 있지만 여기서는 단지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내세우는 내용만 가지고 다루도록 합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의 원장으로 있는 전광훈은 청교도 영성훈련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목적 의식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10년전이나 오늘이나 양과 질적 면에서 전혀 달라 진 것이 없고, 오히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예배와 성도의 삶이 무기력증에 빠져서 헤메고 있습니다.
다시 한국 교회는 부흥할수 있을까요? 어떤 학자는 복음이 타문화권에서 인구의 25%가 한계선이라고도 하고 경제 GNP가 1만불 이상이 되면 어렵다고 하지만 미국과 일본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도 성장하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 성장은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닙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또 한번의 사도행전을 회복하면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9장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2000년의 역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교훈은 성경에서 눈이 떨어지면 그 시대의 교회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면 생명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를 깨닫지 못하는 어둠에 쌓여 부패 속에 빠져가고 진실한 믿음과 진리가 부족한 이때에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청교도들처럼 다시 말씀 속에 우리를 비추고 달려가고자 하는 새로운 땅이 아닌 새로운 영으로 거듭나는 일들을 이루어 가고자 새로운 청교도 영성훈련을 시작하여 신앙운동의 한 획을 긋고자 합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말씀학교를 운영하면서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주제로 여러차례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본 영성훈련에 참석하셨던 많은 목회자님들의 영성이 살아나고 예배가 회복되는 모습을 봅니다. 5∼60년도 한국교회에 찾아왔던 성령의 바람이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통하여 다시금 한국교회 위에 강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청교도 영성대학은 독특하게 성경을 보는 눈을 제시하고 설교의 자신감과 자유함을 얻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제2의 한국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고자 전국를 순회하면서 '청교도 말씀학교'를 매월 한번씩 2박3일 일정으로 진행합니다. 청교도 말씀학교를 통하여 반드시 한국 교회가 살아나고 목회사역에 놀라운 능력과 성령의 '라마나욧'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
여기에 따르면 청교도 영성훈련의 목적은 한국 교회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달라진 것이 없이 부흥을 해 나가지 못하고 침체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무기력해지고 있어서 이러다가는 교회가 결국은 망할 것이기 때문에 청교도 영성훈련을 통해서 청교도들에게 나타났던 성령의 나타나심을 알게 하여서 영성을 다시 살려 도덕성을 회복하고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오게 만듦으로써 한국교회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전광훈은 오늘날의 사회적인 문제인 급증하는 이혼율과 성상품화, 세계제일의 악성 노조, 이념과 사상의 혼란 등으로 우리 민족이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고 말하면서 이런 우리 민족을 살릴 길은 오직 성령의 능력 밖에 없는데 이를 한국교회가 17~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청교도 운동을 통해 새로워짐으로써 해 나갈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취재한 기자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영적 개혁이 필요하며 그 신앙의 모범은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운동이 돼야 한다는 움직임이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중심으로 조용히 확산되고 있다고 기재하고 있습니다.
전광훈은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지난 98년 설립한 이후, 매월 2차례 청교도 영성훈련을 실시하면서 여기에 초교파 목사와 성도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데 크게 고무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이 훈련을 거쳐간 목회자만 근 20,000명에 가깝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영성훈련은 청교도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멉니다. 우선 영성을 훈련하고 이를 통해서 도덕성을 회복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영성(靈性)은 훈련받아서 훈련받기 전의 영성과는 전혀 달라지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영성훈련을 하는 이유가 도덕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우선 인간은 아무리 영성훈련을 받아도 죄성을 띤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도덕과 윤리 면에서 죄와 상관없이 살고 행동할지라도 그런 육에서 죄성은 발휘되고 거기에서 나오는 죄의 힘은 악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선을 행하는 우리에게서 또한 악을 행하는 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부활에 이른 것이 아니어서 아직 육의 완전한 구속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 이렇게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실상은 죄가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욕망과 그에 따른 행동은 모두가 악한 죄의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바울의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어떤 선한 행동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겠다는 그 마음을 할례 받으라는 것입니다. 곧 그러한 마음을 아브라함 때부터 해 왔던 육신의 할례를 행하듯이 그렇게 잘라내라는 것이죠.. 즉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한 착한 일이나 행동으로 정한 규칙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인정받겠다는 것을 이제는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온갖 마음을 써서 의롭다, 착하다, 인간이 됐다는 인정을 받을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한 이상 그 마음에서 갖게 된 온갖 선한 행동은 십자가에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주도해 나가시는데 따라야 합니다. 이를 바울은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삶'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생각과 행동은 다 성령님을 좇은 데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로 맺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양선, 충성 등...이 모든 것 하나 하나가 성령님을 좇아서 맺은 열매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청교도 영성훈련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영성은 결코 훈련되지 않으며, 따라서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령 성령의 열매의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사랑을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행하는 모습을 띠고 이를 좋게 여기며 또한 다른 신자들에게도 권합니다. 내용의 결국은 사랑을 많이 베푸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사랑에 풍성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자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도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기도하여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에 따라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겠습니까?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 날마다 사는 사람 말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이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어서, 그리고 훈련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서 사는 삶의 내용으로서 사랑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랑이 목표이고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어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사는 것에서 성령님께서 행하게 하심에 의하여 사랑을 행하여야 할 일이 있을 때 사랑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아니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양선, 충성 등....모두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행하는 것을 삶의 규칙으로 정해 놓고 이 규칙을 지킬만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면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할례 받을 것이 요구되고 있는 우리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훈련시켜서 영성을 발휘해 나가게 한다고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그릇된 것인지요!.
더욱이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보면 영성을 나타내게 한다는 것이 지극히 종교성을 자극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회복의 강조를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켜 나가자는 데 있습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진단하기를 과거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영적으로나 질적으로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한국교회는 크게 침체되어 있고 무기력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으로 매년 20만 명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고 예배와 성도의 삶이 무기력에 빠져 헤매고 있으며 생활은 혼탁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교회는 다시 말씀 속에 바로 서서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회개와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받아서 노아와 아브라함처럼 사용되면 또 한번의 사도행전을 회복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해 나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살리자는 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는 현실에 직면하여서 이를 방관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초대교회로의 회복을 가져와서 교회를 살리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노아와 아브라함 같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영성이 살아난 사람이 되어서 교회를 영적으로나 질적으로 구원해 나가는데 기여하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을 청교도 영성훈련원에 동원하여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하면 교회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각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동원되는 인력이요 자원인 셈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사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전광훈 목사는 일단 목회자를 중심으로 청교도 운동을 펼쳐나간 후 그것을 점점 평신도 지도자들로 확산시켜 민족복음화의 동력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내년(2005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월경 2만 명의 목회자가 참가하는 영성훈련을 실시하고, 6월에는 평신도를 포함한 24만 명의 청교도 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는 청교도 신앙훈련을 통해 형성된 '300만 신앙공동체'를 꿈꾼다."
청교도라는게 과연 이런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강조하고 이를 자극하여서 교회 부흥이라는 자기 욕망, 한국교회 부흥이라는 육체의 욕망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말입니다. 결코 교회 부흥이라는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이를 말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를 요구하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교회는 말이죠. 부흥해야 할 곳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심판하는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줄 아십니까? 십자가의 도를 들이대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없는 자를 걸러내고 분리해 나가는 것에서입니다. 그게 복음 전도의 실체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은혜 속에 있는 남은 자들만을 구원해 나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교회 부흥이라니요? 사람들이 누군가가 기도하여 말하는 바와 같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게 하옵소서!"하고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없는 자들을 쫓아내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흥이니 성공이니 하는 의미가 결코 없으며 따라서 그런 용어조차 전혀 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한국사회의 도덕적 타락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현재 교회가 종교개혁과 같은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이 사회가 몰락할 것이라는 것을 메시지로 하여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청교도 영성훈련원을 통해 청교도의 신앙정신아래 이 땅의 도덕성 회복과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로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아무리 영성훈련을 할지라도 그 사람에 의해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성훈련을 한 사람의 본능과 본성도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을 통해서 더욱더 육체에 불과한 악한 사람임이 드러날 뿐입니다. 설사 그리스도인의 수가 많아져서 이들이 지극히 종교적이고 도덕과 윤리적일지라도 그것에 의해서 세상은 단 얼마큼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 육체인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범죄률이 낮아지고 높아짐에 의해서 세상의 도덕성의 여부가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교회에 사람의 수가 많아져서 예배하는 사람이 많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서 세상의 도덕성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으로 교회의 부흥을 얻어내고 사람들의 인정을 얻어낸다고 하면 그것 또한 악한 죄인 것입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은 과거 한국의 복음화를 외쳤던 것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령 한국복음화운동본부를 설치하고 매년 한국복음화운동대회를 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매년 빌리그래함 목사를 불러서 여의도에서 집회를 하고 이런 저런 이름의 온갖 부흥사가 난무하면서 한국교회를 온통 부흥집회로 만들어 놓은 것의 또 하나에 불과합니다. 요즘 '성시화운동본부'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도시의 거룩화와 도시의 복음화를 꾀하는 것입니다(성시화운동에 대해서는 본 개혁주의신앙공동체의 질문과 답에 올려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이것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설사 온갖 이름을 동원하여서 신자들을 꾀하고 이를 통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교회의 부흥을 가져올지라도 그것은 결코 교회 부흥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극단적인 말입니다만 인간의 종교 놀음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는 교회에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옳으냐? 그르냐?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등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성도들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말만 붙으면,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란 말만 들으면, 이게 교회의 일이라고만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렇게 해서 되어지는 일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 일'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해서 기뻐하고 이익을 얻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일을 벌인 사람입니다.
청교도 영성훈련원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두고 힘써 할 일은 이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알고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한에는 이것만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성훈련을 통해서 하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영성훈련을 받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의 도이겠습니까?
3. 청교도 신앙 운동을 교회 신앙 운동의 모델로 삼을 수 있는가?
이제 끝으로 오늘날 교회가 갖는 청교도 신앙 운동과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청교도는 앞서 설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교회사에서 종교개혁 이후에 있은 개혁교회의 신앙에 서 있던 분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과거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교회의 교회된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청교도들이 전형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참 교회로 존재하게 해 온 교회의 실체를 보고 이를 통해서 교훈을 받고 해야 합니다.
청교도는 분명 오늘의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울 점이 많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개혁교회의 신앙을 고집스럽게 꼿꼿이 지켜왔는지를 말입니다. 도대체 그들을 그렇게 신앙으로 살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청교도의 신앙에서 문제되는 점들이 있기에 여기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가져 나가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다룰 일이 아니기에 하지 않습니다만, 그러기에 청교도 운동을 현하 교회가 교회의 모범적 모델로 삼고서 이를 닮고자 할 수가 없습니다. 청교도의 교회가 지닌 신앙은 청교도가 존재한 개혁교회의 시대에서 보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신앙은 청교도 신앙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계시하여 주신 교회가 지닌 신앙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닐 신앙의 원리적인 면을 성경에서 계시하여 주신 교회에서 배웁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어떤 신앙으로 있어야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성경의 어떤 한 교회를 들어서 그 교회를 모델로 삼고 그 교회가 해 나간 일을 교회의 일로 삼고서 해 나가려고 한다면 교회는 그것을 위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하물며, 청교도 운동을 들어서 그것도 그들이 지닌 신앙을 빌미로 청교도 영성훈련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서 교회 부흥이라는 자기 만족의 욕심을 채워나가려고 한다면 이를 어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4. 맺는 말
이제 글을 맺겠습니다. 지금까지 청교도 신앙을 살펴보고 나서 지금 우리네 교계에서 있는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신앙 운동으로 펼쳐 나가는 영성훈련을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이 왜 문제가 있으며 잘못된 것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청교도 영성훈련원이 내세우는 청교도 신앙 운동은 결코 교회의 신앙 운동의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란 것도 설명하였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진다면 결코 이를 빌미로 하여서 영성훈련을 해 나갈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청교도 영성훈련원으로 인해서 교회가 미혹 받는 일이 없도록 교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경계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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