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하반기 신인상 당선작 - 반영월식 외 3편 / 박병수
반영월식 / 박병수
털을 숨긴 짐승의 잠버릇은 고약하다
뜬눈으로 밤을 샌다
흥망에 걸린 별들이 심하게 퍼덕인다
어떤 물고기가 탈출을 시도하다 저리 많이
비늘을 다쳤을까
저곳에서 옷을 벗은 물고기는 얼마나 아팠을까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새는 한통속
사랑도 어둠에 녹는다는 것이 더는 비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낯익은
거뭇한 날들이 겨드랑이에서 자랐다
날개를 들키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털을 길렀던
천사의 혈통은 지금도 궁금하다
감쪽같이 그물망을 통과하는 방법에 골똘한
새들의 조상은 암수 구분이 모호했다
남자들은 왜 날개를 달지 못한 걸까
천사를 만난 후
내 몸의 털은 숨어 자랐다
새벽 강 그물망에 걸린 것은 날개가 짧은 물고기였다
물고기를 삼키고 비상한 새
달을 쪼아 먹다 반쯤 남기고 사라졌다
지난 밤 보름달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계의 술사들 / 박병수
지난겨울 햇살 뜸한 외곽도로에 빨간 코트를 벗어주고 떠난 고양이 기억나니
왕벚나무 숲길에서 고양이가 두 개의 번쩍이는 은륜을 타고 ‘퍽’ 하고 사라진 거야
쉿, 그건 기막힌 타임머신이었어!
그날 이후 도심의 나무들은 텅 빈 고양이의 뱃속에 타임머신의 카탈로그를
산더미처럼 쌓았지 날 선 도끼의 단단한 자루가 되어주었던 피노키오의 후예답게
타임머신의 성능에 만족하여 잠이 든 거야
잠 속에서 우리 동네 나무들은 키가 쑥쑥 자라 달의 얼굴을 가렸지
어둠 속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가지 못했지
내가 잠든 곳은 새 떼를 꿀꺽 먹어버린 늙은 고양이의 뱃속
달의 눈을 파먹고 왕벚나무의 나이테에 숨어버린
달콤한 칩거 / 박병수
푸른 독니로 제 몸을 무는 은둔자의 얘기는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다
사막을 횡단중인 낙타들과 밀림의 습지에 숨어 사는
악어 떼를 퇴근길에 만났다
둘 중 어느 무리에 속할 것인지 망설이다가
재갈을 물린 낙타 떼를 몰고
악어의 망막에 숨어드는 방법에 골몰하게 되었다
밤이 깊을수록 몸의 수분이 빠져나가고
그 부피만큼 악어의 눈물방울이 석순처럼 자라
피가 돌지 않은 팔 다리는 잘라 악어에게 주었다
죽음보다 깊은 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수초처럼 누워
척추에 숨겨뒀던 물혹을 꺼내 길게 찢었다
물혹의 비명이 이마를 깊숙이 패고
몸피가 자꾸만 헐거워진다
젖은 허물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창문 아래로 얼룩무늬가 선명한 사람들이 지나간다
어린 카젤의 울음
흐르는 젖가슴을 모듬은 여인이 정갈한 식탁을 차린 아침
그러나 가야만 한다
지금은 무더운 궁기,
추락한 새들을 잡아먹고 잠드는
악어의 눈물 속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알키투더스* 추모기 / 박병수
반듯한 막대기에 집착했던 쿡 선장은 대왕오징어였다
전생에 팔비신장이기도 하였던 그는 여러 개의 다리로
새벽시장 골목을 헤엄쳐 다니며 빈병이나 폐지 등을
수집하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구멍가게 여주인에게
멱살 잡혀 패대기질 당하고 꾸물꾸물 사라졌네
그날 이후 대왕오징어는 가운데 다리가 없을 거라
결론 내린 사람들이 해장국 삼아 그를 끓여
먹었다고도 하네 한번은 심해에 숨어 사는 뼈 없는 종족
훔쳐보고 싶었던 몇몇 사람들이 술병 깊숙이
고성능 레이더를 내려 보내 대왕오징어의 동태를 살폈다네
새벽이 되어서야 레이더망에 부표 크기의 동그란 입만 달랑 포착되어
쿡 선장은 무골이다 투명인간이다,
시장통 하수관으로 괴상한 소문이 흘렀다고도 하네
그의 집은 언제나 불빛 없는 깊고 깊은 바다
허기진 저녁이면 수족 같은 오징어를 잡아먹고
온몸에 이상한 광채를 껌벅이곤 하였는데 아무도 빛의
진원을 알지 못했네
‘향유고래의 뱃속에서 알 수 없는 발광체의 다리가 발견되다’라는
토픽이 실린 날 여느 날과 달리 불빛 환한 그의 집,
환상통 철각이 차르륵 차르륵 언제 저 많은 발소리를 허공에 매단 걸까
뼈 없는 종족, 웅크린 청마루가 수막처럼 갈라지네
발굴된 족적, 만월이 흡반처럼 추적 중이네
* 전설 속의 대왕오징어.
[신인의 말]
ㅡ 이 강이 나를 영원히 삼키길 ㅡ
사람들이 강을 읽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물의 결을 해독하고 어떤 이는 물입자의 경계를 두드리면서 밤낮, 젖은 것들의 형질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강변에 선 사람들은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요한 포착에 찔린 강바닥이 떵, 떵, 쇳소리로 울 때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는 새벽이 또 힘겨운 날입니다. 때론 두려웠고 때론 도망치고 싶었던 속내를 깊이 감출수록 몸속의 부레가 팽창합니다. 척추에 심은 지느러미를 일으켜 세웁니다.
깊은 강에 나를 담가 몸을 뺄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강을 거슬러 오릅니다. 때론 어두운 기슭을 만나 환한 지등을 달아두고 싶었지만, 내가 도착하고 싶은 곳은 언제 마를지 모를 어둡고 습한 물의 문장입니다. 갈 길이 멉니다.
강이 나를 영원히 삼키기를 바랍니다. 물의 어금니에 더 많이 상처받기를 바랍니다. 죽는 순간에는 이 강을 더 깊이 증오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숨이 턱밑에 찰 때까지 강의 심박을 더 멀리 타전하고 싶습니다.
손을 잡아주신 든든한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다짐을 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은 신인이 되겠습니다.
긴 시간, 격려와 질책으로 나를 이끌어 주신 ‘시산맥 시회’ 회원님들과 시와 일상에서 언제나 뜻을 나눈, 정말 사랑하는 ‘영남시 동인’님들,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던 ‘시마을 동인’님들과 아낌없이 성원을 보내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이 기회에 정중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선후감]
투고된 작품들 중에서 최종심에 오른 이들은 모두 다섯 분이었다. 박병수, 이일옥, 정운희, 예외석, 하미애 제씨들이다. 다섯 분의 작품을 놓고 논의한 결과 비교적 쉽게 당선자를 선할 수 있었다. 예외석과 하미애 씨는 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새로움과 시적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먼저 제외되었다. 정운희 씨는 기존의 시적 관습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시적 문법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러나 시가 전체적으로 정제되지 않고 풀어져 있었다. 요즘 긴 산문시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어서 선뜻 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수사력은 만만치 않아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선자로 선정된 박병수, 이일옥 씨는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시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시인들이었다.
박병수 씨는 선 굵은 진술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상상력의 시공이 크고 행간을 성큼성큼 뛰어넘는 언어의 보폭이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월식의 일종인 반영월식은 달이 빛을 잃어 어두우면서도 부드럽게 보이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짐승”에서 “별들”로, 다시 “물고기”에서 “날아가는 새”로, 또다시 “천사”에서 “새들의 조상”으로 시적 대상을 이동하면서 사유의 폭넓음을 보여준다. 결국 화자의 시선은 “남자”로 시적대상이 이동하면서 자아의 내면을 응시하고, 마지막에 월식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박병수 씨는 시 속에서 언어를 배치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달콤한 칩거」에서 보듯 적재적소에 아포리즘과 감각이 지나간다. 시인의 일상 속으로 “낙타들”과 “악어떼”를 끌어들여 시적 자아와 함께 방목하는 상상력, 「알키투더스 추모기」에서 보이는 우화적 상상력 또한 시인을 신뢰하게 할 만하였다.
이일옥 씨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수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모녀가 손짓으로 주고받는 수화를 “손가락으로 말을 뜨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그 이미지를 끝까지 시에서 살려내고 있다. 또한 수화의 이미지를 ‘소통’과 ‘상실’이라는 주제로까지 결합하는 능력은 눈여겨볼 만 했다. 「검은 방문」에서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 검고 앙상한 군집들은 저녁 무렵 죽음을 발라내듯/ 노을 몇 줌 서쪽 허공에 게워내곤 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이미지이다. ‘흉’의 상징인 까마귀를 묘사하는 게 상투적일 수 있는데 그러한 점을 잘 극복해나가고 있다. 「도둑이 사는 집」에서도 술 취한 한 사내가 골목 입구로 들어가는 이미지를 “어둠의 내부를 따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일옥 씨는 오랜 동안 회화의 영역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해왔다. 시인은 이런 점을 잘 진화시켜 자기만의 개성적인 언어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자들껜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다음을 기약하며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본심 심사 : 이수익, 원구식, 이재훈(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