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이 실패했다고 느낄 때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일찍 말하기를 슬프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 하도다 하셨고
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렘 45:2~5).“
사역자에게 한 딜레마가 있다.
그 모순된 상황은 다름 아닌 하나님 말씀대로 사역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악화된 것 같아 보일 때이다.
이런 딜레마를 안 겪은 사역자는 성경에 단 한 명도 없다.
인류 역사상 첫 순교자인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렸는데 형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왜 하나님께선 예배 성공한 참된 예배자 아벨을 지켜주지 않으셨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본토와 친족을 떠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갔는데,
그곳 주민들과의 분쟁과 흉년을 겪어야만 했으며, 심지어 자신에게서 후손도 태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거창한 이름이었는데도....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으로 바로 왕 앞에 열 번이나 가서 사역했지만,
번번히 헛수고만 하는 것 같았으며, 결국에는 홍해를 건너서 데리고 나온 백성들은 툭 하면 그를 원망했다.
과연 이사야가 사역하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전이 회복되고 예배가 온전해졌을까?
예레미야가 사역을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가?
엘리야가 비를 몇 년간 멈춘 뒤 다시 오게 하는 이적을 행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를 사역자로 초청해서 합당한 대우를 해주거나 존경하거나 아니면 사역이 많아졌는가?
오히려 목숨의 위협을 받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낙심한 상태에서 도망을 가야했다.
그 어떤 사역자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교회를 세우며 사역을 시작할 것이다.
그 어떤 찬양사역자든지 자신의 예배인도와 음반과 공연에 하나님의 후원하심이 가득할 것을 믿고
사역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대했던 사역의 열매가 맺히기는커녕
오히려 사역의 뿌리조차 말라버리는 듯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나? 아니면 내가 뭔가 죄를 지었나?
아직 사역자로서 부족한가? 사역지를 잘못 선택했나? ’ 등등 사역자는 종종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예레미야를 도와 사역했던 바룩도 이런 좌절을 경험했다.
아무리 열심히 사역을 해도 그가 기록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무시당하고 거부당했으며
사람들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죽이려고 난리였다.
아마도 바룩은 예레미야가 없을 때 혼자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했던 것 같다.
하나님 때문에 사는게 더 힘들어졌다고....
그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바룩에게 더 열심히 사역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바룩이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평안히 맡기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선 사역자에게 사역을 하면 금방 효과가 있다거나 확연한 열매가 있을거라고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역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순종함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사역자는 나무와도 같다. 어떤 나무는 공기 좋은 산에 심겨져 있다.
하지만, 어떤 나무는 하루종일, 아니 평생 매연을 맡아야 하는 도로의 가로수로 심겨져 있다.
나무는 한번 심겨지면 걸어다닐 수 없다. 뿌리를 내린 그 자리에서 말라죽어 고목이 될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역자는 하나님께 심겨진 나무일 뿐이다. 사역지는 혹 바뀔 수 있을 것이지만,
사역을 맡기신 분을 떠날 수는 없다. 우리의 사역지는 세상이나 사람들이기 이전에
사역을 맡기신 하나님의 임재 앞이다. 그래서, 사역의 결과는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
진정한 사역은 내가 스펙을 쌓고 힘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를 드러내며
그분이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나에게 사역을 맡기신 분을 떠나지 않는 한 사역의 실패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