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쿠바(Cuba)
1960년 초인가, 쿠바의 카스트로(Castro)가 집권한 뒤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 기지 건설을 막기 위해 미국의 젊은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봉쇄령을 내림으로 장비를 실은 소련선박이 철수했다는 뉴스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기억이 있는 나라다. 그 후로는 꽉 막힌 사회주의로 발 디딜 수 없는 나라라고 여겨 잊고 있었던 나라이다.
암튼 가라고 했으니 가는 수밖에 없다. 알바니아를 출발, 지브롤터 해협을 지남으로써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을 가로질렀다.
Italy 그리고 Spain 연안을 항과 중에는 모처럼 TV가 볼만했다. 역시 국민의 자유와 권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느낀다. 생존, 언론, 정치 각 방면에 걸친 인간의 개성과 능력이 존중되고 제대로 발휘되는 사회가 진정한 발전을 자연스럽게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초라하고 답답했던 불가리아의 TV에서 애처로운 연민의 정을 느꼈음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인간의 삶에 돈이 물론 전부는 아니라지만 현대 사회에서 물질적 부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는 데서 많은 갈등이 생긴다.
Owner(船主)로부터 큐바의 Havana Agent와 연락이 안 된다는 전문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도착지가 정해져야 우편물을 그곳으로 보내고 기타 필요한 일들을 수배해야 하는데….
유일한 희망도 잿불처럼 사그러지려는가? 자기네들이 필요한 것 이외는 일체 통보해 주지 않는 Agent가 무슨 놈의 대리점이란 말인가. “썩을 놈의 쌔끼들!” 욕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오랜만에 맞는 황천(荒天), 그토록 싫어했던 미친듯한 파도이지만 갇혔던 며칠 전에 비하면 그래도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과 자유를 느낄 수 있어 한순간은 자신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해를 쌓아 갈수록 거친 해상(海上)이 더욱 겁이 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아직 양하항도 미정(未定)인데 다음 항차가 쿠바 ↔ 소련이라는 소식이다. 이 일을 어쩐다? 눈 앞이 캄캄해진다. 겨울철인데…. 얼어붙는 Baltic Sea(발틱해)에서 한 달가량 머문다면? 비둘기나 갈매기를 잡아먹고 눈(雪)으로 물을 만들어 먹었다는 경험자들의 얘기가 바로 내 자신의 일로 닥아올 모양이다. 우선은 어떤 방법으로든 먹을 것을 확보해야 했다.
“단풍이 한창일텐데-”
“뭐요? 단풍이 뭔데? 그런 것도 있오?” 식당에서 오고 간 참 우울한 얘기들이었다.
양하항이 하바나(Havana)로 정해졌다고 한다. 예상보다 제반 여건들이 좀 나으려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더욱 커진다. 아예 기대를 말기로 했다. 지나가는 선박이나 비행기가 원인도 모르게 실종되거나 사라진다고 전해지는 플로리다와 버뮤다, 푸에르토리코를 잇는 대서양의 ‘마(魔)의 바다’(버뮤다 삼각지대, Bermuda Triangle)를 통과해야만 한다.
새벽 4시 바하마 해협에 진입. 미국 Florida의 TV 방송을 보면서 항해 중, 느닷없이 목적항 하바나항을 Santiago De Cuba 항으로 바꾸란 Cable(전문)이 있어 180도 정남으로 돌았다. 빌어먹을 놈의 것들 엊저녁에만 타전해 주었어도 내일 저녁때는 들어갈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저녁에는 처음보는 이름으로 양하항 순서가 타전된다. 믿어도 되는 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Santiago De Cuba → Havana → Nueva Gerona → Cienfuegos항 순으로 네 항구이다.
한 곳도 아닌 네 곳을 돌아본 귀중한 코스였음
1987년 10월 30일, 첫 순서인 Santiago De Cuba항부터 시작했다. 생각보다 항내가 넓고 냉장시설까지 갖춘 Reefer(냉동)船 전용부두이다. Boarding Office들도 생각보단 인상이 좋다. 1주일 전에 우리나라 야구팀이 여기 와서 세계아마추어야구대회에 3위를 하고 귀국했단다. 그때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남은 모양이다. 외출도 허가한다. 이때부터 차례로 4개의 항구를 돌았다.
15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 콜럼버스가 쿠바에 건너온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고,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하여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검은 사람들이 많았다.
Africa산(産) 육류를 Cuba내에서는 사용금지 하란다. 우린 뭘 먹냐? 역시 여기도 식료품 사입에도 어려움이 있다. 오후 늦게 Agent 차로 그들의 사무실에 들러 한국의 집으로 전화를 시도했다. 2시간 걸렸다. 미국을 거치는 등 절차가 복잡했으나 쿠바에서 한국으로 전화가 통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또 내가 직접 교환원과 통화, 전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많은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웅장한 석조건물이지만 사무실의 우중충함과 커다란 구식 타자기 등이 인상적이다. 농담 삼아 ‘저 타자기 나한테 파시오’ 했더니, ‘골동품이라 엄청 비쌀거요’ 라고 해서 함께 웃었다. 저들도 사정을 아는 모양이다.
빗속에 둘러본 거리는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근사한 건물들이 거의 껍데기만 남았을 뿐 속은 비었다는 느낌이었다. Sanpedro De Mar(공연장 이름)의 현란한 율동과 멜로디의 show에서 카리브해의 정열적 속성이 남아 있는 듯하여 지금까지 상상 속의 Cuba에 대한 인식이 다소 달라지기는 했지만, 교통이 너무 불편했다.
느닷없이 20여 명의 세관원이 급습, 1시간 동안 선내를 샅샅이 뒤졌다. 생각보다 신사적인 편이였지만 심지어 탐지견까지 동원하여 입항하는 선박마다 실시하고 있다고 했다. 통상 성역(聖域)으로 여기는 선장실까지 뒤졌다. Agent의 귀띰으론, 한국인 한 명이 포함된 마약밀수단이 세관당국에 적발된 탓이라고 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든 것이다. 3-4년 전만 해도 한국 선원들은 상륙도 불허했다고 한다.
최근 시가지의 모습. 당시와는 완전히 달리 세련되고 깨끗해 보인다(빌려온 사진)
식품을 청구했을 때 없다고 딱 잡아떼던 오이와 감자를 담당자 녀석이 갖고 왔다. 밉기보다 반갑다. 다소 숨통이 트인다. 그래도 그자를 나무랄 수도 없다. 개인 사업이 아니고 대리점의 업무 중 하나로 담당일 뿐이다. 시장에서 물품도 자유롭게 유통되고 사고파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서 배급되어 나오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마침 오이와 감자가 배급된 것이란다. 자연이 배급되면 시장의 값도 엄청 싸지지만 없으면 똑같은 물건이라도 금값이 된다. 단, 담당자의 재량으로 한두 줌을 더 줄 수는 있다. 대신 다른 곳은 그만큼 적게 주면 된다. 슬쩍 집어 주는 1불짜리 지페 한 장의 위력이다. 공산주의 국가 어디서나 겪는 일이다.
승무원들의 우편물을 받았다. 쿠바까지 찾아온 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싶었다. 내 몫으로는 딱 한 장의 엽서가 있었다. 그렇게 위로와 용기가 될 수 없다. 그래 용기를 갖자
다시 새로 왔다는 대리점의 Mr. Orestes란 젊은 녀석이 싹싹하고 친절하며 일에도 밝다. 다행이다. 한국선원들과도 많은 접촉 경험이 있는 듯하다.
시내 길거리의 이발사에게 이발을 했다. 6·25 사변 때 우리가 겪었던 노천 이발소였다. 그것도 한 시간 전에 예약을 해야 했다. 중간중간 깨진 거울 조각을 쥐어 주며 들고 보라고 한다. 그런데 면도는 안 해주고 씻어 주지는 않아도 짜른 머리카락을 대강이라도 털어주기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가위질만 하고 다됐다고 한다. 목과 어깨, 가슴 부위가 머리카락에 찔려 가렵고 따갑기까지 한다.
세관(Customs) 출입구에서 불시의 외환점검 때 묘한 함정에 걸려들었다. 귀한 달러를 몇푼씩 앗겼다. 약은 고양이가 밤눈 어두운 꼴이었다. 외환관리를 위해서 자국민들이 쓰는 동전과 외국인들이 쓰는 동전의 모양을 달리 해 두었음을 몰랐던 탓이다.
암시장(Black Market)에서의 환율이 10배 이상이니 선원들로서도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 미묘한 전쟁이다. 선내 위원회를 소집. 각자 스스로 준비하고 요령껏 하여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무엇보다 범법(犯法)으로 문제의 발생소지는 절대 피하도록 했다.
간밤에 사나운 꿈자리로 뒤숭숭하며 잠을 설치더니, 갑판부 선원 김 군이 선원수첩 분실사고를 보고 받았다. 그것도 이틀 전 밤에 그랬다나. 다음 기항지에서 만기(滿期)로 귀국해야 할 입장인데-. 어떻게 처리하나? 여기가 어디야. Cuba가 아니냐. 종일 씁쓸한 기분이다.
저녁에 그가 갔다는 ‘Red Bar’ 등을 Agent 차로 비공식적으로 둘러보았으나 헛탕. 어디서 어떻게 잃었는지를 모른다. 부득이 공식 절차를 의존해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전원을 상륙 금지조치 하다. 인간관리가 역시 어렵다.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그것도 한순간의 실수로 전체가 오랫동안 쌓아온 보람을 일시에 흩어 버리고 만 셈이다. 이놈의 세월이 고장이라도 났나 왜 이리 더딘고?
다음날 공식적으로 경찰에 신고.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 걸린다. 본서. 지서 그리고 현지 파견원과 Bar, 다시 지서, Bar. 뒤죽박죽이었다. 얼마만큼의 기대와 보람을 가질 것인지? 너무 늦은 시간까지 애써준 Mr. Orestes녀석이 고맙기도 하다만 그만한 보답은 해줬다. 늦은 저녁을 외식으로 Mr. Orester와 떼우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한 끼 먹는 걸 위해 그처럼 늘어선 긴줄을 보면 이놈의 나라 장래는커녕 지금 당장도 싹수가 말아 비틀어지고 있는 듯하다.
마침 일본 선적의 ‘Yoshino Reefer’란 선명의 선박과 연결, 세관의 승낙을 얻어 쌀 4포대와 약간의 무와 간장 등을 구입했다. 처음 보는 일본인 近藤(곤도오) 선장이 피차 같은 입장이라 쉽게 이해를 한다. VHF(초단파무선 전화)로 고마움을 전했다. 쌀과 함께 보내준 일본 신문에서 우리의 12·12 사태가 다시 쟁점으로 부상한다는 등의 소식을 짐작으로 얻었다.
쿠바의 수도인 하바나에서 잠시 들렸던, 이름이 긴 바(Bar)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 우리 귀에도 익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고,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Ernest M. Hemingway)가 자주 들렸다는 곳이다. 유명하다는 칵텔 모히토(mojito)와 맥주를 마시며, 머리와 수염이 온통 허옇게 된 늙은 흑인 Bartender와 얘기를 나눈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영어도 유창했으며 헤밍웨이에 대한 자랑도 대단했고, 당시의 유물처럼 남겨 벽에 걸린 그림들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쿠바가 미국과 가깝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鄕愁)도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사회주의 답답함을 통탄하면서도 말 못하는 울분을 토로하는 것이리라.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바. 같은 장소이나 당시의 모습과는 다소 달라졌다. 헤밍웨이 때문에 외국 관광객이 붐빈다(빌려온 사진)
이 쿠바에도 한국인 3세가 살고 있었다. 미국 하와이와 본토를 거쳐 이곳까지 온 이민 1세들의 후손인 아가씨가 Agent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Agent의 소개를 받아 인사를 나누었으나 전연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얼굴에서 한국 여성임을 읽을 수는 있었다. 그는 이미 한국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섭섭한 일이었다. 그 아가씨를 위해서 한국적 Image가 담긴 것 하나라도 남겨 주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없다.
한국산 청바지 등 옷을 비롯한 제품들이 Mark를 달리하고 여기까지 들어오고 있었음도 놀라운 일이었다. 앞섶에 누비 무늬를 넣은 여름 남방 사쓰가 한 때는 한국에서도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이곳에서는 고급품으로 인정, 일부러 내게 보이기 위해서 입고 나온 Agent 직원도 있었다. 물론 상표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지만 분명히 ‘Made in Korea’였다.
Mrs. 수잔, 간호원 매춘부의 실태에서 금력(金力)의 위대함을, 공무원으로 검역소 직원이라면서 찾아와 자신의 아내 청바지 하나 사 달라고 부탁하던 일은 졸저 『痕迹 : 80옹 회고록』, 「큐바의 추억」에서 밝힌 바 있지만 아무리 공산사회라 해도 인간은 모두 같은 심성과 욕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용품과 식품도 배급제이기에 긴 줄을 섰다가도 품절이라면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억압과 절망의 그늘을, 그러면서도 미화(美貨) 1달러짜리 하나를 슬쩍 보이기만 하면 술집의 없던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제과점의 긴 줄을 보면서도 뒤쪽으로 오라고 손짓하고는 빵 봉지를 들려주던 일들에서 인간의 공통점을 읽을 수 있다.
대리점의 부장급 직원이 손을 보여준다. 손바닥에 군살이 박혀있다. 매주 정해진 날은 사탕수수농장이나 기타 오더(Order) 받은 대로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공산국가에서는 자유가 없다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막상 공산국가에서 보고 느낀 자유란, “인간이 자신의 능력껏 일하고 벌어서 자유롭게 쓸 수 있음으로 자기 만족을 채울 수 있는 그 자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욕구를 대신 국가가 채워주기 위한 수단으로 놀랄만큼 좋은 예술 공연장과 공원, 체육시설 등이 아닌가 싶지만,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개개인의 내면에 살아 움직이는 자발적 생동감이 없었다.
획일적인 사회에서는 발전을 위한 욕망의 제어로 활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개인의 삶이 공평할 수는 없다. 이것을 권력의 힘으로 통제함으로 근원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국가가 정해준 일터에서 정한 시간만 버티면 생존의 기본여건은 해결해 주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라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지만 공산주의로 국민들이 자유롭고 부유한 나라는 없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살던 사람이 이런 사회가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여자, 이성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있을 때도 있었고, 인간이 사는 곳에는 당연히 해결의 길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성(理性)이 욕망을 눌러 이길 수 있었음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큐바에 여행 한 것 보다 더 상세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늑점이님의 경험담을 읽어면서 새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본인은 세상에 태어나 세계 여행. 다양한 경험. 또는 생계 수단일 수도 있겠지만 가족은 편한 날이 없을 듯.
성깔 마른 바람새는 장암이 잠수하러(취미 생활) 외국에 가면 귀가할 때까지 가슴 조여 날씬형이 되었지요.ㅎ
용감하고 능력있는 친구 덕분에 많은 생각. 다양한 간접 체험을 하게 되었네요.
늑점이님의 지난 삶들이 본인이나 주변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은 시간 건강하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