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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0. )『역주 장릉지속편 권2. 75~78쪽』한글 해역을 찾아내고, 한글화하여 다시 올리다.
重建子䂓樓記 / 李福源 중건자규루기 / 이복원
雙溪遺稿卷之十 > 한국문집총간 > 쌍계유고(雙溪遺稿) > 雙溪遺稿卷之十 > 記 >
重建子䂓樓記 / 이복원(李福源)
上之十五年春。輦過露梁。睠顧六臣祠。親綴文賜祭。仍感念當時事。命詞臣遍考國乘野記。
蒐求故實及節義諸人之未及腏食者。筵臣有白子䂓樓重建事。迺命關東伯具建樓顚末以聞。
觀察使尹師國上奏 言寧越客舘之南。古有梅竹樓。端宗大王甞御樓。有詠鵑二篇。
自是後名斯樓者。不曰梅竹而曰子䂓。萬曆乙巳。大浸樓圮。邑民結廬其墟。不復知樓處。
且數百年昨年秋。臣行部到州。訪遺址。謀重建。府使李東郁將擧圭臬。忽大雷雨以輟。
翌曉風又作。火舘南民廬五戶。火定而風不止。簸沙揚灰。墟落空曠。敗瓦出。紋礎現。
樓之周遭始可辨。而時則隆冬。以木石爲憂。會大雨三日。崖雪盡消。伐木斲巖。以流以曳。
民爭趨役。工亦效誠。得以遄完營搆。非臣之力。實賴天佑民助。上省奏。大加嗟異曰。
予方興感。樓乃告功。天意神理有相之道。非偶然也。命臣福源以文記其事。臣謹拜稽言曰。
往復者。天運也。廢興者。人事也。追遠之誠。述事之孝。有格于上。不期而然。以人事合天運者。
其惟德之至乎。於休我肅祖誕擧光復莊陵之禮。又褒祠六忠。英考受命。因而篤之。至我聖上。
克承兩聖之志。而益推廣之。闡揚于上。表章于下。以尊君綱。以勵臣節。自近以來。
聖念冞切惻怛之敎。屢發中朝。搜訪之擧。至及秘史。中外臣庶。莫不聳聽而郵傳。
以爲礪世扶敎之一大機。而斯樓重建。適在此時。雷風之警。欝攸之灾。又若有昭告默佑於冥冥之中。
而非人力之所及。不亦異乎。嗚呼。巍巍宸極。昔日之所臨御。奕奕寢廟。今日之所陟降。
而人情感慕。偏在越州。於越州之中。瞻望愛惜。尤在斯樓者。盖以聖后之遜荒於斯。
陟方亦於斯。而黼扆之座。多於斯樓。悽惋之藻。起於斯樓。星霜屢換。雲馭寢邈。而焄蒿悽愴。
如在其上。志士騷人。歌吟相續。斯樓之一廢一興。實關國人之瞻聆。而乃於數百年未遑之餘。
重還舊觀於天心戚戚之際。其擧則對揚。其理則感應。天運人事。怳然湊會。此聖上所以咨嗟諄勤。
旣冒臣具奏。又命臣爲記。以表靈異之跡。以志愴喜之意。以垂示來後者也。嗚呼。山月終古。
蜀禽在耳。不知樓成之日。越中父老。望樓拜俯於官道之傍。復如疇昔之爲也否。
重建子䂓樓記 / 이복원(李福源)
上之十五年春。상지십오년춘。금상(정조)15년(1791)봄에
輦過露梁。련과로량。어가가 노량을 지날 때
睠顧六臣祠。권고육신사。문득 육신사를 돌보더니
親綴文賜祭。친철문사제。 친히 제문을 짓고 제사를 내려주셨다.
仍感念當時事。잉감념당시사。그리고 당시의 일에 감동하시며
命詞臣遍考國乘野記。명사신편고국승야기。사신에게 명하여 국승과 야기를 두루 상고하여
蒐求故實及節義諸人之未及腏食者。수구고실급절의제인지미급철식자。
당대의 고실 및 절의를 지켰으나 아직 배향되지 못한 인물에 대해 널리 수집하게 하셨다.
筵臣有白子䂓樓重建事。연신유백자䂓루중건사。연신이 자규루를 중건한 사실을 아뢰자,
迺命關東伯具建樓顚末以聞。내명관동백구건루전말이문。
즉시 강원도관찰사에게 명하여 누각 중건의 시말을 상세히 보고하게 하셨다.
觀察使尹師國上奏 言寧越客舘之南。관찰사윤사국상주 언영월객관지남。
관찰사 윤사국이 상주하기를 “영월부의 객관 남쪽에
古有梅竹樓。고유매죽루。예전부터 매죽루가 있었습니다.
端宗大王甞御樓。단종대왕상어루。단종께서 일찍이 이 누각에 거둥하여
有詠鵑二篇。유영견이편。두견을 읊조린 두 편의 시를 남기셨습니다.
自是後名斯樓者。不曰梅竹而曰子䂓。자시후명사루자。불왈매죽이왈자䂓。
이로부터 이 누각을 ‘매죽루’라 부르지 않고 ‘자규루’라 불렀습니다.
萬曆乙巳。만력을사。만력 을사년(1605. 선조 38)에
大浸樓圮。대침루비。큰 홍수가 나서 누각이 무너졌고
邑民結廬其墟。읍민결려기허。고을 백성들이 그 터에 초가집을 짓자,
不復知樓處。불부지루처。더 이상 누각이 있던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且數百年昨年秋。차수백년(작년추)。그렇게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昨年秋)臣行部到州。(작년추)신행부도주。작년 가을, 소신이 관내 지역을 순시하다가 영월부에 이르러
訪遺址。방유지。유적을 방문한 뒤
謀重建。모중건。중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府使李東郁將擧圭臬。부사이동욱장거규얼。부사 이동욱이 측량을 위해 규얼을 막 들려고 하자,
忽大雷雨以輟。홀대뢰우이철。갑자기 천둥과 소나기가 매섭게 몰아쳐 측량을 멈췄습니다.
翌曉風又作。익효풍우작。이튿날 새벽, 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火舘南民廬五戶。화관남민려오호。화염이 솟구치더니 객관 남쪽에 있던 5채의 민가를 태웠습니다.
火定而風不止。화정이풍불지。불길은 꺼졌으나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簸沙揚灰。파사양회。재와 모래가 바람결에 흩날리면서
墟落空曠。허락공광。텅빈 집터가 휑하니 드러났습니다.
敗瓦出。패와출。깨진 기와조각이 나오고
紋礎現。문초현。문양이 새겨진 주춧돌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樓之周遭始可辨。루지주조시가변。 비로소 누각의 사방 경계를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而時則隆冬。이시칙륭동。그러나 엄동설한의 계절인지라
以木石爲憂。이목석위우。목재와 석재를 마련할 방도가 없어 한참을 근심하던 차에
會大雨三日。회대우삼일。사흘 동안 큰 비가 내렸고
崖雪盡消。애설진소。그 덕분에 언덕에 쌓인 눈이 모두 녹아내렸습니다.
伐木斲巖。벌목착암。이에 나무를 베고 돌을 캐낸 뒤,
以流以曳。이류이예。강물에 띄우거나 인부들이 끌면서 운반했습니다.
民爭趨役。민쟁추역。백성들이 다투어 공역에 참여하고
工亦效誠。공역효성。장인들도 정성을 쏟은 덕에
得以遄完營搆。득이천완영구。신속히 중건한 것이니
非臣之力。비신지력。이는 소신의 힘이 아니라
實賴天佑民助。실뢰천우민조。진실로 하늘이 보우하고 백성이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라 하였다.
上省奏。상성주。주상께서 상부한 내용을 살피더니
大加嗟異曰。대가차이왈。크게 탄식하고 기이하게 여기며
予方興感。여방흥감。“내가 바야흐로 감흥을 느끼고 있는데
樓乃告功。루내고공。때마침 누각이 완성되었구나.
天意神理有相之道。천의신리유상지도。천의와 신리가 서로 도와준 도리는
非偶然也。비우연야。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라 하신 뒤,
命臣福源以文記其事。명신복원이문기기사。신(臣) 복원에게 기문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게 하셨다.
臣謹拜稽言曰。신근배계언왈。신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往復者。왕복자。순환하고 반복되는 것은
天運也。천운야。하늘의 운세요,
廢興者。폐흥자。흥성하고 쇠망하는 것은
人事也。인사야。사람의 일입니다.
追遠之誠。추원지성。조상을 추모하는 정성과
述事之孝。술사지효。사업을 계승하는 효성이
有格于上。유격우상。저 하늘을 감동시킨바,
不期而然。불기이연。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以人事合天運者。이인사합천운자。사람의 일과 하늘의 운세가 합치된 까닭은
其惟德之至乎。기유덕지지호。오직 성덕이 지극하기 때문입니다.
於休我肅祖誕擧光復莊陵之禮。어휴아숙조탄거광복장릉지례。
아! 아름답습니다.
우리 숙종께서는 단종을 광복하는 전례를 성대히 거행하셨고
又褒祠六忠。우포사육충。또한 여섯 신하를 표창하고 배향하셨으며,
英考受命。영고수명。영조께서도 천명을 받으신 뒤
因而篤之。인이독지。 이를 독실하게 실천하셨습니다.
至我聖上。지아성상。우리 주상전하에 이르러
克承兩聖之志。극승양성지지。두 선왕의 뜻을
而益推廣之。이익추광지。능히 계승하여 더욱 넓히셨으니,
闡揚于上。천양우상。위로 단종을 천양하고
表章于下。표장우하。아래로 충신을 표창함으로써
以尊君綱。이존군강。임금의 기강을 높이고
以勵臣節。이려신절。신하의 절의를 독려하셨습니다.
自近以來。자근이래。근래
聖念冞切惻怛之敎。성념미절측달지교。주상의 상념이 한층 애틋하여 애달파하는 전교를
屢發中朝。搜訪之擧。루발중조。수방지거。연석에서 여러 차례 내리시고,
至及秘史。지급비사。 비사까지 두루 점검하며 상고하게 하셨습니다.
中外臣庶。중외신서。이에 경향의 모든 신하와 백성이
莫不聳聽而郵傳。막불용청이우전。공경히 듣고 입으로 널리 전하며,
以爲礪世扶敎之一大機。이위려세부교지일대기。세상을 권면하고 교화를 떠받칠 중대한 기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而斯樓重建。適在此時。이사루중건。적재차시。마침 이러한 때에 이 누각이 중건되었는데,
雷風之警。뢰풍지경。우레와 바람의 변고와
欝攸之灾。울유지재。불의 재앙이
又若有昭告默佑於冥冥之中。우약유소고묵우어명명지중。흡사 어두운 세계에서 분명히 말해주고 묵묵히 돕는 듯했습니다.
而非人力之所及。이비인력지소급。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不亦異乎。불역이호。또한 기이하지 않겠습니까!
嗚呼。오호。아아!
巍巍宸極。외외신극。우뚝한 대궐은
昔日之所臨御。석일지소림어。옛날에 거둥하셨던 곳이요,
奕奕寢廟。혁혁침묘。웅장한 종묘는
今日之所陟降。금일지소척강。지금 성령께서 오르내리시는 곳입니다.
而人情感慕。이인정감모。그러나 사람들이 감동하며 사모하는 곳은
偏在越州。편재월주。 유독 영월이고,
於越州之中。어월주지중。영월중에서도
瞻望愛惜。첨망애석。 우러러 바라보며 아끼는 것은
尤在斯樓者。우재사루자。이 누각만한 곳이 없습니다.
盖以聖后之遜荒於斯。개이성후지손황어사。그 이유는 성후께서 이곳에 은거하셨고
陟方亦於斯。척방역어사。이곳에서 승하하셨으며
而黼扆之座。이보의지좌。대부분 이 누각에서 보의를 치고 앉으셨고
多於斯樓。悽惋之藻。起於斯樓。다어사루。처완지조。기어사루。이 누각에서 처연한 시편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星霜屢換。성상루환。성상이 자주 바뀌어
雲馭寢邈。운어침막。돌아가신 지가 이미 까마득하나,
而焄蒿悽愴。이훈호처창。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제물의 향기는 어찌나 서글픈지
如在其上。여재기상。지금도 누각 위에 계시는 듯하고,
志士騷人。지사소인。뜻이 곧은 선비와 시인 묵객들은
歌吟相續。가음상속。끊임없이 시를 읊조리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斯樓之一廢一興。사루지일폐일흥。이 누각이 한번 무너지고 한번 일어나는 것은
實關國人之瞻聆。실관국인지첨령。진실로 온 백성이 보고 들은 바입니다.
而乃於數百年未遑之餘。이내어수백년미황지여。그런데 수백 년 동안 미처 중건하지 못했건만
重還舊觀於天心戚戚之際。중환구관어천심척척지제。주상께서 슬퍼하실 즈음에 누각의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其擧則對揚。기거칙대양。그 조처는 임금의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는 것이요
其理則感應。기리칙감응。그 이치는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는 것으로,
天運人事。천운인사。하늘의 운세와 사람의 일이
怳然湊會。황연주회。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합했습니다.
此聖上所以咨嗟諄勤。차성상소이자차순근。이것은 주상께서 언제나 간절하게 탄식했기 때문입니다.
旣冒臣具奏。기명도신구주。이미 관찰사에게 명하여 소상히 아뢰게 하였거늘,
又命臣爲記。우명신위기。또다시 소신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명하신 까닭은
以表靈異之跡。이표령이지적。신령하고 기이한 자취를 드러내고
以志愴喜之意。이지창희지의。희비가 교차하는 뜻을 기록하여
以垂示來後者也。이수시래후자야。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嗚呼。오호。아아!
山月終古。산월종고。산과 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蜀禽在耳。촉금재이。두견새 울음소리도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不知樓成之日。불지루성지일。누각이 완성되던 날,
越中父老。월중부로。아마도 영월의 노인들은
望樓拜俯於官道之傍。復如疇昔之爲也否。망루배부어관도지방。부여주석지위야부。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큰길가에서 누각을 바라보며 엎드려 절했을 것입니다.
원임 규장각제학 판중추부사 신 이복원(1719~1792)이 전교를 받들고 찬술하다.
자규루기 / 이복원
금상(정조)15년(1791)봄에 어가가 노량을 지날 때 문득 육신사를 돌보더니 친히 제문을 짓고 제사를 내려주셨다.
그리고 당시의 일에 감동하시며 사신에게 명하여 국승과 야기를 두루 상고하여 당대의 고실 및 절의를 지켰으나 아직 배향되지 못한 인물에 대해 널리 수집하게 하셨다.
연신이 자규루를 중건한 사실을 아뢰자, 즉시 강원도관찰사에게 명하여 누각 중건의 시말을 상세히 보고하게 하셨다.
관찰사 윤사국이 상주하기를 “영월부의 객관 남쪽에 예전부터 매죽루가 있었습니다.
단종께서 일찍이 이 누각에 거둥하여 두견을 읊조린 두 편의 시를 남기셨습니다.
이로부터 이 누각을 ‘매죽루’라 부르지 않고 ‘자규루’라 불렀습니다.
만력 을사년(1605. 선조 38) 큰 홍수가 나서 누각이 무너졌고 고을 백성들이 그 터에 초가집을 짓자, 더 이상 누각이 있던 곳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작년 가을, 소신이 관내 지역을 순시하다가 영월부에 이르러 유적을 방문한 뒤 중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부사 이동욱이 측량을 위해 규얼을 막 들려고 하자, 갑자기 천둥과 소나기가 매섭게 몰아쳐 측량을 멈췄습니다.
이튿날 새벽, 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화염이 솟구치더니 객관 남쪽에 있던 5채의 민가를 태웠습니다.
불길은 꺼졌으나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재와 모래가 바람결에 흩날리면서 텅 빈 집터가 휑하니 드러났습니다.
깨진 기와조각이 나오고 문양이 새겨진 주춧돌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비로소 누각의 사방 경계를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동설한의 계절인지라 목재와 석재를 마련할 방도가 없어 한참을 근심하던 차에 사흘 동안 큰 비가 내렸고 그 덕분에 언덕에 쌓인 눈이 모두 녹아내렸습니다.
이에 나무를 베고 돌을 캐낸 뒤, 강물에 띄우거나 인부들이 끌면서 운반했습니다.
백성들이 다투어 공역에 참여하고 장인들도 정성을 쏟은 덕에 신속히 중건한 것이니 이는 소신의 힘이 아니라 진실로 하늘이 보우하고 백성이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라 하였다.
주상께서 상부한 내용을 살피더니 크게 탄식하고 기이하게 여기며 “내가 바야흐로 감흥을 느끼고 있는데 때마침 누각이 완성되었구나. 천의와 신리가 서로 도와준 도리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라 하신 뒤, 신 복원에게 기문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게 하셨다.
신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순환하고 반복되는 것은 하늘의 운세요, 흥성하고 쇠망하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과 사업을 계승하는 효성이 저 하늘을 감동시킨바,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일과 하늘의 운세가 합치된 까닭은 오직 성덕이 지극하기 때문입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우리 숙종께서는 단종을 광복하는 전례를 성대히 거행하셨고 또한 여섯 신하를 표창하고 배향하셨으며, 영조께서도 천명을 받으신 뒤 이를 독실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우리 주상전하에 이르러 두 선왕의 뜻을 능히 계승하여 더욱 넓히셨으니, 위로 단종을 천양하고 아래로 충신을 표창함으로써 임금의 기강을 높이고 신하의 절의를 독려하셨습니다.
근래 주상의 상념이 한층 애틋하여 애달파하는 전교를 연석에서 여러 차례 내리시고, 비사까지 두루 점검하며 상고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경향의 모든 신하와 백성이 공경히 듣고 입으로 널리 전하며, 세상을 권면하고 교화를 떠받칠 중대한 기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이러한 때에 이 누각이 중건되었는데, 우레와 바람의 변고와 불의 재앙이 흡사 어두운 세계에서 분명히 말해주고 묵묵히 돕는 듯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또한 기이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우뚝한 대궐은 옛날에 거둥하셨던 곳이요, 웅장한 종묘는 지금 성령께서 오르내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감동하며 사모하는 곳은 유독 영월이고, 영월중에서도 우러러 바라보며 아끼는 것은 이 누각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후께서 이곳에 은거하셨고 이곳에서 승하하셨으며 대부분 이 누각에서 보의를 치고 앉으셨고 이 누각에서 처연한 시편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성상이 자주 바뀌어 돌아가신 지가 이미 까마득하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제물의 향기는 어찌나 서글픈지 지금도 누각 위에 계시는 듯하고, 뜻이 곧은 선비와 시인 묵객들은 끊임없이 시를 읊조리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누각이 한번 무너지고 한번 일어나는 것은 진실로 온 백성이 보고 들은 바입니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미처 중건하지 못했건만 주상께서 슬퍼하실 즈음에 누각의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조처는 임금의 아름다운 덕을 선양하는 것이요 그 이치는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는 것으로, 하늘의 운세와 사람의 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합했습니다.
이것은 주상께서 언제나 간절하게 탄식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관찰사에게 명하여 소상히 아뢰게 하였거늘, 또다시 소신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명하신 까닭은 신령하고 기이한 자취를 드러내고 희비가 교차하는 뜻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아아!
산과 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두견새 울음소리도 여전히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누각이 완성되던 날, 아마도 영월의 노인들은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큰길가에서 누각을 바라보며 엎드려 절했을 것입니다.
원임 규장각제학 판중추부사 신 이복원(1719~1792)이 전교를 받들고 찬술하다.
李福源
• 생년 1719년(숙종 45) • 몰년 1792년(정조 16) •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 저서(작품) 천령향함이지락(千齡享含飴之樂) • 대표관직(경력) 형조판서|우의정|좌의정
[정의]1719(숙종 45)∼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정구(廷龜)의 6대손이며, 봉조(鳳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신(正臣)이고, 아버지는 판서 철보(喆輔)이며, 어머니는 박필순(朴弼純)의 딸이다.
[내용]1738년(영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양구현감을 지내던 중에 1754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무학(懋學)·근정(勤政)·신질(愼疾)·납언(納言) 등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헌납(獻納)·교리·승지·대사간·이조참의, 예조·병조·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1772년 당시 대제학으로 현종의 상호(上號)를 지어 바치고 영조에게서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1773년 한 때 사직했으나, 이듬 해 다시 이조참판으로 증광시 시관(試官)에 임명되고, 1775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행장·시장(諡狀)을 찬술하기 위한 찬집청(撰集廳)의 당상에 임명되었고 영조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바쳤다. 우참찬·병조판서·명의록찬집당상(明義錄纂輯堂上)·형조판서·규장각제학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나, 관아를 비웠다 하여 강화유수로 좌천되고 이어 사형수의 자살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다시 1780년(정조 4)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형조판서·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부(世子傅)·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동안 1783년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 1790년 동지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783년 종부시에서 간행한 『선원계보기략팔고조도(璿源系譜紀略八高祖圖)』의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해 이치를 주로 했고, 특히 사명(詞命)에 뛰어나 정조가 신설한 규장각에서 활약하였다. 김익(金熤)과 동시에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소박한 선비 차림이었고 행실이 독실해 당시 유상(儒相)으로 불렸다 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술활동]저서로는『천령향함이지락(千齡享含飴之樂)』이 있다.
[참고문헌]『영조실록(英祖實錄)』『정조실록(正祖實錄)』『국조방목(國朝榜目)』『속조야집요(續朝野輯要)』
『역주 장릉지속편 권2. 75~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