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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체크 : 민영익의 ‘죄상(罪狀)’은 정말일까?
“민영익이 (왜인들에게) 나라 팔고, 농지 팔고, 수로(水路) 팔아먹었다.”
어떤 사람의 블로그에서 발견한 문구입니다.
그 블로거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만경평야를 삶터로 삼아온 전라북도 농민들 사이에서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식적인 문헌에서는 그런 기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 ‘후기’에 이 문제도 포함하고 싶었지만 워낙 지나치게 긴 글이어서 이 이야기까지 쓸 수는 없었기에, 따로 한 꼭지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팩트 체크’ 들어갑니다.
1. 민영익은 나라를 팔지 않았다 - 친일파? No!
간단하게 민영익의 이력을 살펴보자.
민씨 가문에서 왕비가 나오자 조카 민영익도 그 혜택을 크게 입은 것은 사실이나, 18세에 과거에 급제하는 등 원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명성황후의 특별한 총애로 과거급제 즉시 중앙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한다.
1883~1884년 6개월 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박람회를 보고, 농장, 방직공장, 제약회사, 전기회사 등 산업시설들을 시찰했고, 귀로에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나라를 거치며 이른바 해외 연수를 했다.
귀국 직후 그가 한 말은 “나는 암흑계에 나서 광명계에 갔다가 지금 또 다시 암흑계로 돌아왔다.”
견문을 넓히고 온 그가 개혁성향을 띠게 된 것은 당연하다.
신사유람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문물을 보고 오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사회제도를 본받을 것과 조선에 무슨 일이 있으면 미국에 그 해결을 의뢰할 것을 주장하는 등으로 ‘일본형 개혁’을 주장하는 개화파 내부의 반발을 샀고, 급진적 개화정책을 못마땅해 하는 민씨 가문의 배척으로 개화에서 한 발 물러선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자 다시 민씨 가문의 힘에 의존하여 세력을 만회하려고 친청(親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하지만, 태도를 왔다 갔다 한 민영익은 급진적 개화파들로부터 ‘제거대상 1호’로 지목받아 갑신정변(1884년) 때 김옥균 등 개화당의 손에 칼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청군에 의해 정변은 사흘 만에 진압되어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은 일본으로 도망가고, 민영익은 미국인 의사의 치료를 받고 겨우 생명을 보전하여 청의 홍콩으로 건너갔다(1886년).
망명객으로 전락한 그는 중국에서 인삼 무역으로 정치자금을 만들고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했다.
왜의 강요로 갑오경장(1894년)이 발표되자 강력한 반대의 뜻을 전보로 고종황제에게 상소하기까지 했다.
1895년 자신의 최대 후원자이던 명성황후가 시해(을미사변)되자 조선에 대한 희망을 접고, 샹하이에서 서화와 글씨로 소일한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총격살해하여 체포되자 그동안 모았던 돈으로 프랑스와 러시아 변호사를 사서 석방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들은 그는 망국의 아픔을 술로 달래다가 1914년 55세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상으로 보건대 그는 친일파가 아니며, ‘나라를 팔아먹을 틈’조차 없었다. 오히려 안중근의사의 구명활동을 벌일 정도로 우국지사였던 것이다.
2. 수로를 만든 것도 (왜인들에게) 팔아먹은 것도 민영익이 아니었다 – 조상들이 만들었고, 일제가 팔았다.
우선 1927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이 기사는 「전익(全益, 전주익산)수리조합」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수리조합이 사들인 땅과 수로에 대한 이야기가 첫 줄부터 다섯째 줄까지에 소개되어 있는데 간략히 다시 설명하면, ‘삼례읍 독주항에서 춘포면 석탄리까지에 걸쳐 있는 논 1,445 정보’와,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뚫은 관개수로’가 대상물건이다.
‘수로(「간선도수구」)는 지금(1927년)으로부터 150여 년 전(1770년 경)에 조선인 배씨(裵氏) -일설에는 백대석이라는 사람- 가 처음 만든 것이며, 80년 전에 「죽동궁」 소유로 바뀌었던 것’이라 부연 설명되어 있다(6~7줄).
즉, 민영익이 뚫은 수로가 아니며 일본인들이 최초로 설치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 땅과 수로를 “1908년(메이지 42년) 10월에 수리조합이 1만원에 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민영익의 이력에서 보았듯이 1908년에는 민영익이 조선 땅에 있지 않았다. 청의 샹하이에서 울분을 달래고 있었을 민영익이 어찌 땅과 수로를 팔아먹을 수 있었을까.
또 이상한 것은, 그 다음 7줄~10줄에 걸쳐 “(논과 수로의) 소유권이 80년 전(1847년경)에 「죽동궁」으로 넘어갔었다”는 이야기 다음에, 갑자기 “민영익씨가 상해로 도망간 후부터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수로가 막혀버린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 기사로 보면 ‘죽동궁 소유’와 ‘민영익의 관리책임’이 인과관계에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죽동궁=민영익」이라는 등식을 은연중 어필하고 있는 것.
여기서 ‘죽동궁’과 민영익과의 관계를 들추어 보자.
죽동궁은 왕실소유의 궁의 하나다. 임금의 가족이 살면서 정무를 보는 곳을 ‘궁궐(정궁과 이궁을 모두 포함)’이라 하고, 왕의 친족이나 결혼한 자녀가 궁궐을 나가서 사는 곳을 ‘궁’이라 불렀다. 대원군이 거주하던 곳을 운현궁이라 불렀음을 생각해보면 된다.
죽동궁은 지금의 관훈동에 있었고, 역대 공주·옹주들이 결혼하여 그 부군과 함께 살기도 하던 곳이었다. 궁들의 관리는 왕실의 법도에 따라 내전(왕후)이 맡아 하였고 살림을 챙겨주는 것도 왕후의 소임이었다. 사가(私家)에서 결혼한 자녀의 제금 내는 일을 주부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겠다.
한편 왕족에게는 생활비와 제사비용을 위해 궁방전(宮房田)이라는 토지와 수조(收租)권을 함께 주었는데 궁이 많아지면서 백성의 조세부담도 늘어났다.
명성황후의 은총을 입은 민영익이 이 죽동궁에 들어가 살게 된 데에 문제의 발단이 있었다고 보인다.
민영익은 왕족이 아니므로 엄밀하게는 궁에 들어가 살 수 없었지만, 어린 고종을 좌지우지하며 조카를 초고속 승진시키고, 가까이에 두어 하루 세 번이나 입궐시켜(특별 대우였다) 국사를 논의하고 싶어 하던 명성황후가 궁궐(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죽동궁에 입주시킨 것이다.
‘80년 전(1847년경)’에 이미 해당 토지와 수로가 죽동궁 소유의 궁방전으로 바뀌어 있었다면 1860년생인 민영익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더구나 궁방전 관리제도를 감안한다면, 민영익이 사사로이 소유하거나 팔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민영익의 것’이며 ‘민영익이 팔아먹었다’라는 소문이 횡행하게 되었을까?
여러 추론이 있을 수 있다.
3.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
우선, 뿌리 깊은 ‘잘 되는 자에 대한 시기’다.
민씨 가문의 많은 인물이 정·관계 일선에 전진 배치되어 폭넓은 세도를 하면서부터, 게다가 18세에 급제하자마자 정부인사권·군통수권·재정권 등 최고의 실질권력을 가지게 된 소년 세도가 민영익에게는 더욱, 냉소적인 세간의 비아냥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4. ‘아니면 말고’ - 제대로 된 정보전달 수단이 없던 시절
두 번째로, “어차피 죽동궁 땅이라면 ‘죽동궁에 사는 사람’이 물세와 도지를 받을 것이므로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니라”는 가벼운 생각에서 이런 말이 무책임하게 떠다녔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왕실’소유이므로 거두고 지출하는 일은 궁의 살림을 관장하는 궁내부가 맡고 있다는 점을 일반 백성들은 잘 몰랐을 것.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그게 그거지 뭐’, ‘아니면 말고’ 식의 헛소문으로 「가짜뉴스」로 퍼져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의 농촌지역에서도 여전하다.
5. 보복과 이간질 - 일제의 프레임
세 번째로, 아마도 이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전익수리조합」의 교묘한 「프레임 씌우기」다.
당시의 수리조합이 어떤 단체인가. 농지를 개량하고 관개를 원활히 하려는 농민의 자발적 단체인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사실은 조선인에게서 농토를 몰수하기 위한 조직폭력단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정부의 직접적인 지휘 또는 비호 아래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빼앗을 목적으로 경술국치(‘한일합방’) 훨씬 이전부터 ‘합리적 과학영농’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수리조합의 결성을 권했다. 조선인 농민들이 부담할 능력을 초과하는 과도한 조합비를 책정함으로써 조선인지주 조합원의 권리는 극도로 억제되었다. 그리고는 조합의 결정임을 앞세워 토지제도 개혁에 앞장선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갑오‘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호도되고 있기도 하다)으로 전국적인 토지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위에서 ‘민영익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력은 이미 밝혔다.
융희황제는 결국 1904년 칙령으로 「황실제도정리국」을 설치하면서 불필요한 황실의 재산은 정리할 것을 명했고 1907년에는 궁방전을 관리하는 도감도 폐지했으나, 이것이 어찌 고종의 진심에서 나온 것일까.
이어진 「국토조사」에서 왕(황)실 소유의 전답은 발견되는 족족 모두 국유(대한제국 소유, 나중에는 ‘대일본제국’ 소유)로 전환했고 그것을 민간에 불하하는 형식으로 「어용」수리조합에 차례차례 매각하였던 것. 당연히 모든 궁방전도 그 신세를 면치 못했고 더구나 이 평야지역의 귀중한 수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전익수리조합은 그것을 “(당시 죽동궁에 살던) 민영익의 소유”라는 소문을 기정사실화하고 “주인 민영익은 샹하이로 도망가서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며, 민씨 가문의 세도에 저항감이 가시지 않고 있던 민심을 자극하여 매수를 합리화했을 것이다.
일본과 친하지 않았던 명성황후 일가를 국민과 더욱 이간질하여 명성황후 시해의 비난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6. ‘친일·어용 언론’의 묘한 보도태도
그런데 기사는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음도 행간에 보인다. 다시 읽어보자.
11줄~20줄의 내용 : “…민영익씨 상해 ‘원찬’ 이래 수로를 감시하는 자도 없어 황폐해진 것을 이 평야(만경평야)에서 가장 이해관계가 깊은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들이 상의하여 그 수로를 1만원의 가격으로 매수하고 … 메이지 43년(1909년)에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조합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조합이 설립된 뒤에 바로 제반 사업시설의 기초가 될 조합구역(토지)의 실측을 완료하고 수로·제방의 수리를 하고 또 새로운 수문의 설비와 둑의 축조를 행하여 한·수해(旱水害)의 예방에 노력하고 있다.”
민영익은 ‘나쁜 놈’ 만들어 놓고 -“원찬(遠竄, 멀리 도망가 숨음. 또는 멀리 유배되어 감)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수리조합의 활동은 혁혁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수리조합 사무실은 나중에 ‘무혈입성’하는 「호소카와 농장」사무실의 길 건너편에 있었다.
7. 가짜뉴스의 효과는 오래 간다
‘카더라’ ‘들었다’로 시작되는 헛소문은 전설처럼 경전(經典)처럼 긴 수명을 가지는 법이다. 팩트 체크를 해보려는 시도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민영익의 보, 민영익의 땅’이라는 거짓 프레임은 그 후로도 계속 써먹어지고 있음을 본다.
1909년에 발행된 <전라북도 전주군 우서면 독주항보(犢走項洑) 전도(지도)>에 「민보국영익소유보(閔輔國泳翊所有洑)」라 부제를 붙여 “보국숭록대부 민영익이 사사로운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
'보국숭록대부'는 정1품 벼슬에 붙이는 존칭이다. 이미 실각하여 망명(1886년)해 있는 그를 굳이 ‘보국’이라는 과거 직함까지 붙여 사익을 추구했던 사람으로 모욕한 것이다.
또, 1908년에 이미 사들였다면 아직도 ‘민영익 소유’아닌데 그렇게 표현한 것은 가짜 뉴스를 ‘공식기록’화함으로써 「그를 ‘백성의 원수’로 만들려는 계략」의 연장이었음에 다름 아니다.
냉철한 의식으로 찬찬히 생각 좀 해보자.
그 많은 고위관직을 한꺼번에 가지고 짧은 기간 누구보다 바쁘게 국정을 보았을 청년 민영익 대감.
격변의 시기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서 풍운아와 같은 삶을 살았던 그.
친미·친러·친청으로 왔다 갔다 하는 등 다소의 기회주의적 태도는 있었지만, 결단코 커다란 친일행위도, 친일단체에 자기 땅을 헐값에 파는 ‘쪼잔한’ 친일행위도 하지 않았다.
서울 재동에서 태어나 전라도 농촌에는 와보지도 못했을 ‘사대부 집안의 용(龍)’이었던 그가 그런 지저분한 재산 챙기기에 관심이나 있었을 것인가?
8. 조선총독부의 교육시책 - “조상을 멸시하게 하라”
삼일운동 이후 제3대 조선총독으로 온 사이토오 마코토(齊藤實)는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이때 발표한 「교육시책」에서 사이토오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9. 수로는 이미 예전부터 있었다!
친일언론은 우리 조상의 잘한 일은 숨기고 역사는 칼질하여 단축하는 등 선조를 멸시하고 허무감에 빠지도록 획책한 조선총독의 「교육시책」에 협력했다.
그런 신문마저도 이 수로를 원래 조선인이 만든 사실만은 부정하기 힘들었는지 “조선인의 손으로 150년 전 창설”이라 헤드라인에 쓰고 있다.
그런데, 다른 기록들은 그보다 훨씬 이른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이미 「40리 물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 당시 “전주에 옥야(沃野, 비옥한 들)가 있는데 … 막힌 수로를 닷새 만에 준설해낸 사람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사 속의 ‘150년 전 배씨’나 ‘일설의 백대석씨’도 사실은 처음 만들었다기보다 예부터 있던 수로를 관리·정비한 것이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궁내부의 위임으로 궁방전의 관리책임을 맡은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기사에서 '멀리 상류 고산천에서 끌어온 물(引水)'이라 했는데 예전에는 고산까지의 상류 만경강을 ‘고산천’이라 불렀던 사실을 감안하면 고산면의 어우리 보(당시 이름은 무엇이었을지?)로 만경강을 막은 것도 이미 예전(광해군 이전)에 있었던 일이 된다!
수리조합은 예전부터 있던 수로를 정비·확장하고 새로운 수문을 만들었을 뿐 없던 수로를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전익수리조합이 매수한 후 삼례 비비정을 통과하는 수로를 ‘개선하는’ 공사 사진이 증거이고, 해당 수로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비비정의 돌부처('석지장(石地藏)'은 일본말 단어)」 또한 그 증거다.
10. 마치며
물론 우리 농민들이 어느 시대에나 풍요롭고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는 과거는 인정한다.
양반·지주 또는 정부에 세를 내는 것이나, 왜인들에게 뺏기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 삶이었기에 그 허탈감과 박탈감을 냉소적으로 표출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러나 그렇다고 애먼 동포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스스로 ‘원수'를 만드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니겠는가.
또, 앞서 쓴 ‘만경강 따라 걷기 후기(2)’에서도 주장했지만, 우리 선조들은 치수와 관개 사업에 많은 노력을 쏟았고 정성을 다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의 조상을 폄하하고 부정하는 「기풍」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던 침략국의 흉계에 놀아나서, 그들의 프레임에 갇힌 채. 만약 그렇다면 저들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 된다. 그것도 몇 세대가 지나 자유 민주국가가 된 지 70년이 넘은 이 시대에 말이다.
마침 삼일운동 1백주년 되는 해에 ‘만경강 따라 걷기’를 하고 있는 이즈음, ‘징게맹갱뜰 피수탈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 선조들의 무능을 말하거나 비아냥거리기로 흐르거나 할 것이 염려되었다.
“과연 소문대로 그랬을까?”라는 심정으로 팩트 체크를 해 보았다.
얕은 연구와 미숙한 글로 너무 큰 이슈를 다룬 점, 사실은 대단히 두렵습니다.
이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함께 토론하고 수정할 용의는 충분히 있으므로, 거리낌없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