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형 폭스바겐 비틀.
폭스바겐 (Volkswagen)의 비틀 (Beetle)은 역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차 중 하나다. 전 세계적으로 2100만대 이상, 역대 3번째로 가장 많이 팔렸다. (단일 모델로는 세계 최고다). 천재적인 디자이너에 의해 탄생한 소형차 비틀은 뛰어난 성능과 내구성, 앙증맞은 디자인,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인들을 매료시켰다. 비록 ‘전쟁광’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정치적 논리에 따라 탄생됐으나,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한 인기를 구가했으며 지금도 그 성공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천재 기술자 포르쉐 박사와 독재자 히틀러의 만남
페르디난트 포르쉐.<출처: (CC)German Federal Archives at Wikipedia.org>
1920년대 비틀이 탄생하기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은 미국의 주도하에 있었다.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한 포드 덕분에 자동차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달리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소량 생산 위주의 제작방식을 고집했다.
비틀을 탄생시킨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1875~1951) 박사는 소형차, 즉 효율적이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차에 관심이 많았다. 1875년생인 그는 만 15세의 나이에 파리 만국박람회에 자신이 설계한 하이브리드카 ‘로나 포르쉐 1호’를 내놓으며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아스트로 다임러(Astro-Daimler)에서 경주차와 로드카를 제작하던 그는 다임러가 벤츠에 합병된 후 경영진과 마찰을 일으키다 1930년 결국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포르쉐사를 설립한다.
비틀의 탄생을 논하기 전에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다. 1933년 수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경제 부흥에 힘썼다. 그는 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자동차 산업의 성장을 계획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국민차’가 필요했다.
1936년 폭스바겐 비틀 프로토타입.<출처:폭스바겐 코리아>
이듬해 포르쉐 박사를 만난 히틀러는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그가 포르쉐 박사에게 원했던 것은 튼튼하고 값이 싸며, 무엇보다 연비가 좋아 서민들이 구입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른 2명과 아이 2-3명이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그리고 7ℓ의 연료로 100㎞를 갈 수 있을 것, 값은 1000마르크 이하일 것 등을 주문했다. 이는 포르쉐 박사가 평소 꿈꿔오던 대중 소형차의 그것과 흡사했다.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 정권은 포르쉐 박사에게 공학연구소를 만들어 줬다. 1936년 나온 프로토타입은 수평대향 4기통 1.1ℓ 엔진에 최고속도 98㎞/h, 최대출력 26.5마력을 지녔으며 간단한 구조와 우수한 내구성이 장점이었다. 특히 후면에 위치한 엔진과 후륜구동의 RR방식은 나중에 포르쉐가 설계한 차들의 시초가 됐다.
값싸고 실용적이며 유지비 부담 적어
1938년 독일 볼프스부르크 공장, 히틀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공식에서 첫 양산모델이 공개됐다. <출처: (CC)German Federal Archives at Wikipedia.org>
1938년 독일 볼프스부르크 공장, 히틀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공식에서 첫 양산모델이 공개됐다. 히틀러는 이 차의 이름을 ‘KdF’(Kraft durch Freude)라고 불렀는데, ‘기쁨의 힘’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차를 처음 본 히틀러는 디자인이 불만스러웠으나 70일간의 성능테스트 후 결과를 보고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포르쉐 박사는 이 이름 대신 차의 비공식 명칭인 폭스바겐(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이다)을 선호했다. 이와 별개로 독일의 소형차 생산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미국에서는 이때부터 이 차의 외관에서 모티브를 얻어 비틀(Beetle, 딱정벌레)로 부르기 시작했다.(당시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에서 이 차를 비틀로 언급했다고 한다).
히틀러 정권은 국민들에게 폭스바겐 우표 900마르크 어치를 구입하면 차 한 대를 준다고 공표했고, 이를 통해 엄청난 돈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국민차’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모든 돈은 고스란히 전쟁 준비에 쓰였다. 전쟁 중에 폭스바겐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바뀌었고 비틀은 생산이 중단됐으며, 그 동안 만들어 두었던 KdF는 전쟁에 이용되었다.
전쟁 후 독일은 각 나라에 전후 보상금을 줘야 했고 팔 것이 부족했던 독일정부는 급기야 폭스바겐 공장과 비틀을 내놨다. 하지만 폐허가 된 공장과 딱정벌레처럼 생긴 자동차에 관심을 갖는 나라는 없었다. 독일정부는 별 수 없이 경제 부흥을 목표로 이름만 남아있던 폭스바겐의 공장 재건과 비틀의 재생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때 비틀의 설계자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의 요구대로 비틀을 생산했다는 이유로 전쟁 전범으로 낙인찍혀 2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미국서 인기, 2003년까지 2152만여대 생산
1955년형 비틀 생산 공장의 모습<출처: 폭스바겐 코리아>
1959년 미국 시장을 공략한 폭스바겐의 'Think Small' 캠페인. <출처: 폭스바겐 코리아>
전쟁 후 피폐해진 서민들의 살림에 비틀은 안성맞춤이었다. 값이 싸고 튼튼했으며 연비가 좋아 유지비가 적게 들었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엔 1만대 이상 생산하며 집중 조명을 받았다.(이때까지 폭스바겐의 운영은 영국에서 맡았으며 관리는 영국 군인들이 책임졌다). 특히 독일의 자동차 회사 BMW의 기술자이자 오펠(Opel)의 임원 출신인 하인리히 노르트호프(Heinrich Nordhoff)가 경제 재건사업의 일환으로 1948년 폭스바겐 공장의 운영을 맡으면서 폭스바겐은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미국시장은 비틀에게 큰 도전이었다. 수출에 사활을 건 노르트호프는 미국에 비틀을 소개했으나 냉담한 반응만 확인해야 했다. 단단하고 연비는 좋았으나 우스꽝스러운(적어도 미국인들이 처음 접했을 때) 디자인과 비교적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한 해 겨우 150대 수준만 판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마케팅과 비틀 특유의 내구성, 우수한 연비 등이 제대로 평가 받으면서 1955년(비틀을 포함해 한 해에 100만대 이상을 팔았다)을 기점으로 1960년대에는 연간 20만대 이상의 비틀을 미국인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비틀은 1978년 독일 생산을 끝마친 후 2003년 7월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을 중단하기까지 총 2152만9000여대가 제작됐다.
1938년형부터 1975년형까지 전시된 비틀. <출처: 폭스바겐 코리아>
뉴 비틀, 더 비틀로 이어가는 성공신화
이후 제2세대 비틀이라 할 수 있는 ‘뉴 비틀’(New Beetle)이 생산됐으며 지난해엔 제3세대 비틀 ‘더 비틀’(The Beetle)이 세상에 공개됐다. 전장과 전폭이 더 커졌으며 전고는 낮아졌다. 오리지널 비틀의 성격에 맞게 성인 4명이 탑승해도 공간이 충분하고 최대 905ℓ 용량의 적재 공간도 갖췄다. 국내에는 2012년 가을 선보일 예정이다.
2011년형 제3세대 비틀. <출처: 폭스바겐 코리아>
2011년형 제3세대 비틀 제원
엔진 형식 : 2.0ℓ 직렬 4기통 / 배기량 : 1984㏄ / 최고속도 : 223㎞/h / 트랜스미션 : 6단 DSG / 휠베이스 : 2537㎜ / 공차중량 : 1199㎏ / 최고출력 : 200hp·5100rpm / 최대토크 : 28.6㎏·m·1700rpm / 전장 X 폭 X 전고 : 4278㎜ X 1808㎜ X 1486㎜ / 휠베이스 : 2537㎜ / 제로백 : 7.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