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中國佛敎史
鎌田茂雄 著/ 鄭舜日 譯/경서원
2565. 3. 9
제2부 발전과 창작 -東晋·南北朝의 불교
제7장 불교의 사회적 발전
제3절 佛敎藝術의 발달 2
龍門石窟
龍門石窟은 하남성 낙양에서 남쪽으로 12킬로 떨어진 伊川의 兩岸에 있는 석굴이다. 여기에 처음으로 석굴이 열렸던 것은 太和 18년(494)이다. 북위가 平城에서 낙양으로 도읍지를 옮기자 자연히 운강석굴의 조성이 용문석굴로 옮겨졌다. 용문석굴은 처음에는 私的인 작은 佛龕등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景明(500~503) 초기가 되어서 宣武帝는 大長秋卿인 白整에게 조칙을 내려 大同의 운강석굴에 준하여 낙양의 남쪽 伊闕山(용문)에 효문제와 그 황후 文昭황태후를 위해서 석굴 2개소를 조성케 하였다(『魏書』 釋老志). 이 2개소는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正始 2년(505)에 大長秋卿인 王質에게 칙령을 내려서 계획했던 그림을 축소케 하였다. 또한 永平중(508~512)에 선무제를 위하여 석굴 1개소를 조성하였다. 이 황실의 3개의 석굴이 현재의 賓陽洞 三窟이다. 이 3굴은 북위 후반의 대표적인 석굴이며 후벽에는 좌불을 중심으로 한 五尊像이 있고 좌우의 벽에는 부처 立像을 중심으로 한 삼존불의 입상이 있다.
북위의 멸망후에도 개착이 진행되었고 특히 당의 高宗시대(670~680)에 磨崖三佛과 雙洞·萬佛洞·獅子洞·惠簡洞·奉先寺洞등이 조성되어 용문석굴의 전성시대가 출현하였다. 특히 咸亨 3년(672)에 시작되어 上元 2년(675)에 완성되었던 봉선사동은 용문최대의 석굴이며 중앙은 노사나불을 안치하였고, 좌우에 나한과 菩薩을 조성하였으며 그 사이에 공양자의 입상이 있고 좌우의 벽에는 神王像과 力士像이 있다.
麦積山 석굴
돈황이나 운강, 또는 용문등과 관련되는 중국 불교예술의 寶庫에 麦積山석굴이 있다. 甘肅省 天水縣 남동쪽의 秦嶺산맥 서쪽에 위치하는 맥적산의 동남면에 석굴과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마애와 석굴의 수는 194 개소 이상을 헤아릴 수 있으며 東方崖와 西方崖로 대별된다. 북위의 景明 3년(502)에 張元伯이 개착하였던 것을 비롯하여 북위양식이 분명한 것은 서방애이다. 동방애의 上七佛閣(散花樓)은 북주시대에 이루어진 것(「泰州天水郡麦積崖佛龕銘並序」)이다. 그 후 수·당·송을 거치는 동안에 조성과 수리가 이루어졌다.
같은 북위의 경명중(500~503)에 조성되었던 석굴사원에는 鞏縣석굴이 있다. 이 석굴은 하남성 공현성 북서쪽의 邙山을 뒤로하고 洛水를 앞으로 하여 남쪽을 향하는 다섯개의 석굴이다. 初唐에 일부 修造가 행해지고 이후 송·원·명·청대에 보수되었다.
天龍山·藝堂山·雲門山
북위에 이어서 北齊때에도 석굴조성이 성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천룡산 석굴과 향당산 석굴이다. 천룡산 석굴은 太原市의 남서쪽에 있으며 東方群과 西方群으로 나뉘어 동방군에 여덟
개의 굴이 있고 서방군에 열세개의 굴이 있다. 창건자와 개시연대는 명확치 않지만 동위와 북제 시대를 걸쳐서 조성된 것이다. 隋代의 조성으로 명확한 것은 제 8굴이며 수의 開皇 4년(584)의 銘文이 있다. 그 후 唐·五代·北漢에 이르는 동안 조성과 보수가 계속되었다.
북제시대의 불교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響堂山석굴이 있다. 향당산은 鼓山이라고도 하며 太行산맥의 지맥으로 하북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있다. 석굴은 남북 2개소가 있고 북향당산은 하남성 武安縣 義井里에 있으며, 남향당산은 하북성 滋縣 彭城鎭에 있다. 북향당산은 常樂寺의 배후에 있고 3대굴이 조성되어 있다. 3 대굴의 하나인 南洞의 굴밖에는 북제 武平 3년(572)의 晋晶郡公唐邕의 刻經記가 있어서 南洞의 조성이 572년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향당산에는 7굴이 있고 開皇(581~600) 에서 先天(712)에 이르는 동안의 造像記가 있다.
석굴사원은 북위와 북제 시대에 많이 조성되었지만 수와 당대에는 雲門山 석굴이 개착되었다. 운문산은 山東省 益郡縣城의 남동쪽 王家庄에 있다. 여기에 5개소의 석굴이 조성되었다. 석굴의 조성은 수나라 초기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則天武后시대에 많이 조성되었다. 이 운문산 석굴의 가까이에 駝山石窟이 있다. 타산석굴은 운문산과 대치하여 수에서 당대에 걸쳐서 조성되었다.
末法思想과 房山石經
중국에서 말법사상이 성립하였던 것은 남북조시대부터 수에 걸쳐서이다. 말법사상이란 불교의 역사철학으로 정법·상법·말법의 三時사상이나 五濁(劫濁 · 見濁 · 煩惱濁・衆生濁 · 命濁)이나 法滅의 사상에 의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正 · 像 · 末의 시한에 대하여 (1) 정법 5백년 상법 1천년, (2) 정법 1천년 상법 5백년, (3) 정 · 상 각 5백년, (4) 정 · 상 각 1천년의 여러 설이 있다. 말법에 대해서는 정법과 상법의 후 1만년이라고 하는 점에서 여러설이 일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정법 5백년 상법 1천년 말법 1만년의 설을 많이 믿었다.
말법사상이 유행하게 되는 사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첫째로는 澆末을 설명하여 正·像의 시한을 밝히는 경전에 접했던 것, 둘째로는 澆末의 모습을 목전에 드러내 보이는 것 같은 교단의 타락과, 외부에서의박해가 있다. 경전으로는 이미 北齊의 曇景에 의해서 澆末사상을 설명한『摩訶摩耶經』이 번역되었고, 那連提耶舍에 의해서 『大集月藏經』이 번역되었다. 특히 인심에 가장 큰 자극을 주었던 것은 那連提耶舍의 『大集月藏經』이었다. 隋의 吉藏이나 三階敎의 信行, 그리고 당의 道綽 · 善導 등이 모두 이 『大集月藏經』에 의해서 말법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 말법이 도래했다는 의식을 처음으로 표명하였던 것은 문헌상에서는 南岳慧思이다. 그는 지금은 분명히 말법시대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立誓願文』을 저술하였다. 『立誓願文』을 慧思 15 세의 저작이라고한다면 『大集月藏經』의 역출보다도 7년전으로, 북주 무제의 폐불사건보다도 15년을 앞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일찌기 심각한 말법의 자각을 환기시켰던 것은 주목해야할 것이다. 그 후 말법에 상응하는 교법으로서 수립되었던 것이 信行의 三階敎와 道 善導의 정토교이다.
북주의 폐불에 의해서 法滅의 참화를 목전에서 보았던 불교도는 급속히 말법의 도래를 의식하였다. 그 때문에 교법을 오랫동안 보전하게 하려는 호법적 정신의 발로로서 경전을 돌에 새겨 영구히 보존하려는 刻經사업이 일어났다. 靜琬의 房山石經이나 靈裕의 寶山石窟등의 石經이 그것이다.
방산석경등의 선구로서 이미 북제시대에 風峪의 석경이나 北響堂山 석경이 있다. 風峪의 석경은 산서성 太源의 남서에 있으며 『화엄경』을 새겼으나 이 『화엄경』은 당의 實叉難陀의 번역이기 때문에 북제 시대의 것은 아니다. 북향당산 석경은 북제시때 唐이 발원하여 568 년부터 572 년 사이에 석굴의 벽면에 『유마경』 『승만경』 『李經』 『미륵성불경』 등을 새겼다.
방산석경은 가장 대규모적인 석경으로 隋의 靜琬(? ~639)이 大業中(605~617)에 발원하여 『一切經』을 비석에 새겨 두었다. 一代에서는 완성되지 않지 않고 그 사업은 唐 · 遼 · 金代까지 수백년에 걸쳐서 계승되어 석실의 벽면이나 비석에『一切經』이 새겨졌다. 이 방산석경은 法滅을 대비하여 준비하였던 성업이었다. 房山雷音洞에 있는 貞觀 2년(628)의 刻記에는「正法과 像法이 무릇 1500 년이 지나고 貞觀 2년에 이르러 이미 末法에든지 75 년이 지났도다. 미래에 불법이 폐훼될 때 이 석경이 나와서 세상에 유통하여지이다」라고 씌어 있다. 정관 2년을 말법기 75 년이라고 한다면 서력 553 년 즉 梁의 承聖 2년, 北齊의 天保 4년을 기해서 상법 시한을 끝내고 그 다음해부터 말법시에 들어갔다고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法滅을 걱정하여 寶山에 석굴을 조성하고 석경을 새겼던 사람으로 靈裕가 있다. 「寶山에서 石龕 1개소를 만들고 이름하여 金剛性力住持那羅延窟이라 하였다. 벽면에 따로 法滅졌의 相을 새기었다」(『唐傳』 卷九, 靈裕傳)고 전해진다. 이 석굴은 隋의 開皇 9년(589)의 조성으로 그 속에 노사나불 · 아미타불 · 미륵불의 삼존을 조립하고 석굴의 벽면에 『승만경』 『열반경』 『법화경』 등의 경문이 새겨져 있다. 靈裕는 『滅法記』라고 하는 책을 저술하였던 것을 보아도 강렬한 말법도래와 법멸의 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宗眞 寫經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