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밤의 사진편지 romantic walking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대한민국 U자걷기] 후기 스크랩 윤종영의 U자 걷기 제11구간 참가기(2)(13/6/10/월)
함수곤 추천 0 조회 43 13.06.09 22: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밤의 사진편지    제1939호  (13/6/10/월)    

 

   

   함수곤의 블로그 '한밤의 사진편지'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blog.daum.net/ham60/> 

 

'한사모' 카페 'romantic walking'으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 cafe.daum.net/hansamo9988 >

cafe.daum.net/hansamo9988

<맨 아래 '표시하기' 클릭하면 '음악' 흐릅니다.>

 

 

 

 

대한민국 U자 걷기 제11구간 참가기(2)

 

 

 

 

글 : 윤 종 영(한사모 고문, yooncy1936@hanmail.net)

  

 

 

다음날(43)

 

새벽에 눈을 뜨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어제 비교적 어려웠던 길을 별탈 없이 완주한 것 때문인 것 같다.

 

오늘만 무사히 지나면 벌써

반을 지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기분을 다듬었다.

 

밖을 내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것 같다.

 일기예보대로 쾌청이라 정말 반가웠다.

 

아침 식당에 모인 회원들을 보니

어제 80여리 걸은 피로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 같다.

 

어제 걸으면서 느꼈던 강화에 대해 이런 저런 화제가 상머리에 오르내린다.

오늘 아침일정은 이곳에서 가까운 전등사(傳燈寺)를 산책삼아 다녀서

버스로 초지진으로 이동 본격적인 걷기 코스에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일행은 전등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초등학교 수학여행 이래 수립차례 찾은 곳이기에

주변을 보니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조금 오르자 삼랑성(三郞城:鼎足山城) 안내판이 보인다.

삼랑성은 마니산(摩尼山)에 있는 참성단(塹城壇)과 더불어

강화를 민족의 성지로 성역화시킨

국조단군(國祖檀君)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이다.

 

삼랑성은 강화해협 남쪽에 있는 세봉우리를

단군이 세왕자(扶蘇, 扶虞 扶餘)에게 쌓아 연결하게 한 성이라고

참성단은 단군이 그의 조부인 석제환인(釋帝桓因)

제사 지낸 곳이라고

 

그런데 강화도에 이런 국조단군의 유적이 발굴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왕실과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강화도를 중심한 예성강 유역의 해상세력으로

크게 성장하여 뒤에,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강화도는 고려왕실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연유로 고려왕실은 이곳을 국조의 성지로 성역화하였다고

생각되고 이것이 여몽전쟁(麗蒙戰爭) 기간 중

이곳에 천도하며 더욱 이런 면이 부각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정족산성(삼랑성)과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고종 3(1866),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강화를 점령하고

수많은 서책을 약탈해 갈 때 이곳 정족산성은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1816-1888) 장군의 선방(善防)으로

이곳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과

수많은 사적을 지켜내었고 프랑스군을 강화로부터

퇴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는 巡撫千摠梁憲洙勝戰碑가 있다)

 

나는 옆에 걷는 회원과 옛날에 읽었던 이 전투에 종군했던

프랑스 리델(Ridel)신부의 종군기에 기억나는

“ --산성을 점령하고 전등사에서 오찬을 즐기자며

산성 100m까지 접근하였을 때 돌연 총성이 비오듯 쏟아져 대패하였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다 보니 전등사 경내라,

앞에 대웅보전이 서 있다.

 

이 건물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임란 이후

광해군 13(1621),지어진 조선 후기 대표적인 건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건물에 시선을 끄는 것으로 추녀밑에 앉아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여인의 나신상,

전설로 알려지기는 도편수와 얽힌 여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재미있다.

 

또 전등사와 잊을 수 없는 것은 임진왜란으로 실록을 보관했던

4대사고중 전주사고만 보존되자 난후

 이를 다시 인쇄해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과 한양 춘추관에 각각 보존하였다.

 

그러다가 이곳 전등사에 장사각(藏史閣)과 선원각(璿源閣)을 짓고

숙종4(1678), 마니산의 실록(전주사고 원본)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璿源世譜)를 비롯하여

 

수많은 왕실 사적들을 이곳으로 옮겨 보존토록 하여

전등사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고가 되었고

국가와 왕실의 보호를 받는 국찰(國刹)

전국의 대표적인 사찰이 되어 현재까지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만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 전등사를 뒤로하고 산을 내려 버스에 승차 초지진으로 이동하였다.

 

버스에 내려 간단한 체조를 하고 오전걷기인

 강화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에 진입하였다.

 

초진진 앞에서 초지진을 중심으로 강화 이야기를 하라고 해

강화도의 지정학적인 의미, 강화의 간략한 역사적인 소개,

강화해협에 얽힌 역사적인 사건 등을 간략하게 이야기하였다.

 

우리일행은 초지진을 둘러보고 이곳과 얽힌 현대사의

이런저런 면모를 떠올려보며 강화해협과 면한

호국돈대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화해협은 조선조의 조운로(漕運路)의 가장 중요한 길목으로

 남쪽에서 해상으로 오는 모든 조운선은 이곳을 통해

한양으로 운항하였기에 국방의 요지였다.

 

더욱이 근대 개항기에 외세의 포함외교(砲艦外交)

첫 접촉지역이여서 그의 아픈상처가 많이 남아 있는곳이다.

 

이곳과 연계하여 최근세사에 우리에게 기억될

대표적인 사건은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운요호(雲揚號)사건을 들어 볼 수 있다.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1866:병인사옥)

빌미로 일어난 사건이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9명을 포함 천주교신자 수천명을

참형에 처하였고 이때 죽음을 면한 리델(Ridel)신부 등이 탈출,

 

청국 주재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제독에 알려

 이를 응징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로즈제독은 18669월 군함 2척을 파송, 한강을 거슬러 올라

한양의 양화진까지 탐사를 하고 돌아가고

10월에 군함7척을 이끌고 와 강화도를 포격하고 점령하였으나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 패퇴, 철수하였다.

 

이때 이들은 왕실의 의궤(儀軌: 왕실의 즉위, 결혼,

장례 등 왕실행사의 의전절차를 기록한 왕실 문서)

왕실의 전적을 보관한 외규장각(外奎章閣)

거의 송두리째 약탈하여 갔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강화학파의

전판서 이시원(李是遠:이건창의 조부)과 그의 동생되는 전군수 이지원(李止遠)이 음독 순국하여 강화에 호국정신의 뿌리를 깊게 내려주었다.

 

신미양요는 1866, 대동강에 무단히 들어왔다

소각당한 미국선적의 무역선 제너럴 셔만호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조선을 개국 시킬 야심을 갖고 일으킨 사건이다.

 

미국은 1871, 로저스(Rodgers)제독이 이끈 5척의 아시아함대를

강화해협에 파견, 강화도의 포대와 포격전을 전개하며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차례로 점령하였고

 

강화해협의 조운로를 봉쇄해 도성에 물가가 폭등하는 등

조선을 곤궁에 처하게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저항의지가

쉽게 꺽일 것 같지 않고 조선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자

미국은 결국 철수하였다.

(대원군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

강화도를 비롯한 전국요지에 斥和碑를 세웠다)

 

 

운요호사건은 1875, 초지진에서 벌어졌던

일본과의 포격전으로 다음해 강화도조약체결에

빌미가 되었던 사건이다.

(강화도조약은 1876926일 강화읍 연무당에서 체결)

 

우리 일행은 호국돈대길의 강화해협을 따라 걸으며

초지진의 일본군과 미군의 포탄흔적도 찾아보았고

덕진진에서는 병인양요때 양헌수 장군이 강계포수군을 이끌고

김포의 통진부에서 이곳을 거쳐 야간에 정족산성으로 이동, 매복하였다

 

프랑스군을 요격한 사실도 확인하고 손돌목돈대에서

신미양요 때 미함과의 첫 전투모습도 그려 보았다.

 

손돌목은 진도해협에 있는 울돌목과 같이 바닷물이 소용돌이 치는

좁은 해협으로 강화에는 이곳과 연관된 여러설화가 전래되고 있다.

 

전래되는 설화는 외침을 당해 국왕이 강화섬으로 피신할 때

안내 뱃사공이 손돌(孫乭)이었는데 갑곶에서 이곳에 오니

앞길이 막히고 바닷길이 험해지자 손돌을 의심해

그를 잡아죽여 이후 이곳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덤과 최근에 세운 비석이 있음).

 

그런데 이 전설에 나오는 국왕을 보면

고려 희종, 고종, 충정왕, 공민왕과 조선의 인조가 등장하는데

 일부 관심있는 학자들은 손돌을 죽인 국왕이

희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熙宗은 폐위되 강화로 유배왔기에 군용선을 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

 

우리일행은 해협을 따라 걷다 덕진진을 지나

산등성이를 넘어 걸어 광성보(廣城堡)에 이르렀다.

 이곳은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신미순의총(辛未殉義: 전사한 무명용사 51명의 합장묘),

쌍충비각(雙忠碑閣:中軍 魚在淵(1823-1871)

그의 동생 魚在淳(1826-1871)59명의 殉節碑) ,

기념물이 남아 당시에 격렬했던 전투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참전한 미군의 슬레이(W.S. Schley)소령이 회고를 보면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를 한자루도 보유하지 못한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미국총포에 대항하여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러한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 전사하였다.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 볼 수 없다.------”라고 썼다.

 

 

나는 이글을 떠올리면서 이곳의 무덤과 비각을 찾아

그들의 영혼을 추모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광성보를 나오니 뜻밖에 강화출신인 윤치문교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정말 반가웠고 오랜 지기이기에 더욱 반가웠다.

 

또 우리 회원들을 위해 강화인삼막걸리를 가져와 나를 더욱 감격시켰다.

우리일행은 여기에서 가까운 점심식당인 통나무 쌈밥집에 도착,

오전 걷기의 막을 내렸다.

 

 점심 식사는 쌈밥정식”, 상큼한 야채맛에 취해

오전 걷기의 피로를 풀고 다시 원기를 회복하였다.

 

오후 걷기는 광성보에서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을 걸어

갑곶순교성지까지 30여리길, 지휘부의 선도에 따라

회원들 모두가 활기 있게 발걸음을 욺겼다.

 

별로 손질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자연그대로의 바닷가

갈대숲 사이로 난 흙길을 걷는 것도 우리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우리들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취해 열심히 걸었다.

우리가 걷는 호국돈대길은 조운로의 보호와

수도권 방어를 목적으로 대략 1Km 간격으로

 18개의 돈대가 설치되여 있었으나

일부만 복원되여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걷는 길가에 있는 오두돈대, 화도돈대, 용당돈대, 용진진은

지도에서 확인만하고 지나쳐 걸었다.

 

나는 용진진을 지나며 몇 번 들러보았던 이곳에서

가까이 있는 선원사지(禪源寺址)를 떠올려보았다.

 

선원사는 고려와 몽고와의 힘든 전쟁와중에 강도(江都)로 파천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신앙(護國信仰)일념에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을 판각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곳도 한번 찾을 만 한곳인데 하는 아쉬움만 간직한채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걷다보니 오후3시경. 드디어 오늘 걷기의 실질적인

 꼴인지점인 갑곶돈대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갑곶돈대 구역안에 있는 포대와 강화비석군을 둘러보고

갑골순교성지를 찾아보았다.

 

강화도는 천주교전래와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이곳이 중국과 해상교통요지였기에

선교사입국에 중요한 길목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병인양요, 신미양요시 서구인의 길잡이가 될 위험 때문에

천주교신자들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곳에 모셔진 병인사옥이후 처형당한 최인서등

수명의 순교자와 신미양요때 미함을 찾아갔다

 

효수당한 수명의 순교자가 있다.

이 부근은 갑곶진으로 강화의 육로교통로의 관문과 같은 곳이여서

강화대교가 가설되기 이전에는 이곳이 김포와 연결하는 포구였던 곳이다.

 

전래되는 이야기로는 이곳이 본래 동진이라 하였는데

몽고의 한 장군이 강화를 공격하다 돌아가

본국의 군주에게 강이 좁아서 갑옷을 쌓아 건너갈만 합니다라고 하여

 이후 갑곶이라고 하였다고. 그러나 갑곶(甲串)에 곶은

해안에 반도같이 뾰죽히 나온 곳을 가리키는 우리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후자의 설이 맞는 것 같다.

 

우리일행은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강화나들길 제1코스에 있는

오늘 최종종착지인 연미정(燕尾亭)으로 출발하였다.

 

버스속에서 요사히 벌어지고 있는 남북간에 첨예(尖銳)한 대결상황을

 떠올리며 북녘땅을 찾는 것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철부지같은 북한의 위정자들이 제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면서도 도대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할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20여분만에 연미정 앞에 도착, 연미정을 올랐다.

바다건너 북녘땅(개풍군)이 지척(咫尺)에 보인다.

 6.25전쟁전에 자주 찾을 기회가 있었기에

고향땅을 보는 것 같은 반가움이 있지만

요사히 정세 때문인지 마음이 편안치가 않다.

 

연미정(戀尾亭)은 이지역이 한강 임진강이 합류해서

서해와 강화해협으로 흘러 그 모습이 제비꼬리 같다는데서

유래되어 정자이름이 된 것 같다.

 

이 정자는 고려 고종때 9(九齋)의 생도를 ?아놓고 면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건립시기를 고려시대로

추정하기도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정자 밑으로 내려오니 철망이 쳐진 공터안에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莊武公黃衡將軍宅址碑)”가 있다.

 

황형장군(1459-1520)은 조선전기 무장으로

중종 5(1510), 삼포왜란시 전라도 방어사가 되어

이를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말년에 낙향하여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이 집터위에 있는 연미정도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묘소도 이 부근에 잘 보존되고 있다.

나는 몇몇 회원들과 연미정과 황씨 집안과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버스에 올랐다.

 

우리일행은 오늘 저녁 식사장소인 “일미골가든으로 이동

푸짐한 생삼겹살에다 윤치문교장이 희사한

강화인삼막걸리로 허기진 속을 달랬다.

 

한 것 분위기가 고조된 속에 재미있는 만담 에다

11구간에 새로 참여한 회원들의 소감발표와 흥겨운 노래까지

겻들이다 보니 낮에 피로가 거의 사라진 듯

모든 회원들이 가벼워진 기분으로

저녁숙소로 이동, 잠자리에 들어 숙면할 수 있었다.

 

 

 

 

다음날(44)

 

새벽에 눈을 뜨니 기분이 가볍다.

오늘로 걷기에 후반에 들어섰다는 생각을 하니

몸도 마음도 가쁜하다.

 

창문을 열어보니 안개는 끼였지만 날씨는 쾌청이라,

가벼운 기분으로 식당을 찾으니 맞나는 회원모두가 나와 같은 기분인 것같다. 아침식사도 북어해장국, 상큼한 국맛으로 속을 달래었다.

 

아침 8, 우리 들은 버스에 승차, 강화도에 하직을 고했다.

강화를 떠나며 이런저런 강화에서 다시 찾고 싶었던 몇몇 곳을 떠올려 보았다.

 

 강화의 호국정신의 상징인 병자호란 때 강화성 남문의 화약위에서 자폭한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순절지.

 

몽고와의 강화를 거부하고 끝까지 항쟁하다

강화를 떠난 삼별초(三別抄)의 출항지,

 

또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강화에서 가난한 농군으로 살다

철종 임금이 된 강화도령과 얽힌 용흥궁(龍興宮),

 

이곳에 살던 철종의 외가인 염()씨 집안 일화 등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강화대교 위에서 강화해협을 보며 5.16직후

이곳에 강화도와 김포를 연결하는 방조제를 쌓기로 하고

기공식을 하였던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그런데 방조제가 당시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지

교량공사로 바뀌어 현재의 대교가 되었다.

우리 일행은 대교를 건너 김포 문수산성(文殊山城) 남문입구에 도착, 하차하였다.

 

문수산성은 강화의 갑곶진과 함께 강화해협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요새로 강화를 마주보는 강화해협에 근접한 곳으로

 숙종때 강화에 대대적인 방어시설을 갖추며 축성하였다.

 

이 산성은 병인양요때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이 강화를 함락하고 한양까지 진격로를 찾고자

 

로즈제독은 휘하부대 120여명을 갑곶진을 건너 정족산성을 정찰,

공격케하였는데, 당시 이곳에는 초관(哨官) 한성근(韓聖根)

이끈 50여명의 소부대가 수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프랑스군이 산성에 접근해 오자 이들이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일제히 공격을 가해 프랑스군 25명을 사상시켜 프랑스군은

강화도로 패퇘하여 결국 뒤에 강화도에서 철병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들의 오늘 오전 걷기는 문수산성 남문입구를 기점으로

 애기봉까지로 새로 회원 두분(이순애, 윤정아)이 참여, 68명회원이

 대오를 이루어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문수산성은 오르지 않고 김포대학교 앞을 통과하는

 김포대로의 평탄한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참 아스팔트길을 걷다보니 해병대 휴게소인 청룡회관에 도착,

잠간 휴식을 취하였다.

 

나는 몇몇 회원 들과 옛날 육군 논산 훈련소 면회소를 떠올리며

옛 이야기에 잠깐 빠져들기도 했지만.

우리일행은 곧 청룡회관을 출발, 김포 평화누리길 둘째길과

 연결된 길을 걸어 산등성이 나무계단을 따라 조강(祖江)저수지를 끼고

물가에 만든 나무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였다.

 

조강(祖江)은 김포반도와 강화도 그리고 북한의 개풍군 사이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맞나 흐르는 강을 지칭하는

 할애비강이라는 의미로 옛부터 불러왔고 이곳은 강뿐 아니라

지명도 조강이라 불리어져왔다.

 

 

걷다보니 안내표식판에 조강포구 입구,

또 조강2리 마을회관 표식판이 보인다.

 

걷는 우리 시야(視野)에 논밭 너머로

저 멀리 휴전선 건너 북녘 땅이 들어온다

(그곳에도 조강 지명이 있다).

 

.분단의 아픔이 다시 가슴을 저민다.

오전1115분 우리일행은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오전 걷기 꼴인 지점인 애기봉관리사무소 도착하였다.

 

애기봉(愛妓峰)전망대, 최근에 북송전단이나

크리스마스 츄리 점등(點燈) 문제 등으로 자주 언론에 오르내려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던 곳이고

이전에 몇 번 찾았던 곳이지만

최근 남북긴장관계로 새로운 기분으로 전망대에 올랐다.

 

애기봉이라는 이름은 고박정희대통령이 이곳에 전래되어 내려온

병자호란때 평양감사와 그의 애기(愛妓)와 얽힌 이야기를 듣고

 명명하였다고(1966)어떻든 재미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우리일행은 전망대에서 한승희 소장의 이곳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와 탈북음악인인 조미영양의 아코디언을 듣고

전망대를 뒤로 하였다.

 

 나는 이곳 망배단(望拜壇)에서 북한에 고향을 둔 몇 회원들과 함께

북녘땅에 잠든 조상들에게 잠깐 묵념을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점심식사장소인

보경가든으로 이동 순두부전골로 입맛을 다시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오후걷기는 펑화누리길 셋째길로 애기봉 입구에서

 전류리포구까지 40여리길이다.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회원 모두가 임진각이 점차 가까워져서

그런지 별로 걷기에 힘든 기색이 안보인다.

걷는 길가 동네어구에 큰느티나무가 서있다.

안내판을 보니 수령(樹齡)이 오백년이 되었다고

이곳에 묘가 있는 박신(朴信:1362-1444)선생이 심었다고 한다.

 

 

박신 선생은 고려말 정몽주선생의 제자로 고려가 망한후

조선조에 태조로부터 세종까지 봉직, 호조. 이조, 병조 판서를 역임한

조선전기 문신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일행은 평화누리길을 따라 시골길을 열심히 걷는데

연화봉 안내표식판이 보인다.

 

삼국시대 쟁패지역(爭覇地域)이라고, 이 부근은 역사적으로

삼강이 모이는 한반도에 중심지역이였기에

삼국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였다.

 

처음에 백제가 점유했다가 장수왕때 고구려가, 진흥왕때 신라가 이곳을 점유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루워졌다.

 

옆에 걷는 회원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한참 걸으니

 후평리 철새도래지안내판이 보이고

철책선너머로 한강이 흐른다. 한강 정감이 어린 평화스러운 강이다.

 

 이곳에서 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제방도로를 걸어 가니

한강하구부근에 오늘 오후 걷기의 종착지인 전류리포구에 도착,

꼴인의 감격을 맛보았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일산대교를 건너

자유로를 달려 파주통일동산에 있는 오늘 숙소인 호텔위즈도착,

 방 배정을 받고 버스로 저녁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저녁은 장단콩 두부마을에서 청국장정식으로

오랜만에 우리의 전통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을 가졌다.

 

숙소에 돌아와 오늘도 무사히 완주할 수 있게 도와주신

높은곳에 계신 높은분에게 감사한마음을 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Leo Delibes
Chanson Espagnole Les Filles de Cadix,
bolero for voice & piano (or orch)
까딕스의 아가씨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