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의 울음]
열차표 예매는 몇 주 전에 마쳤다. 지난 방문 때 표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일찍 준비하였다. 아내와 함께 주말에 친척 결혼식에 참석할 겸 손주도 보러 간다. 목을 가누고 뒤집기를 시작한 아기다.
이틀이 멀다고 영상 통화를 하면서 손주의 모습을 봐 왔지만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아들 집을 찾아가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아들 부부가 아이와 함께 외출하여 두 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온다. 기차역에 내려서 아파트를 찾아가는 빠른 길을 두고 쉬엄쉬엄 건물의 그림자를 끼고 짐 꾸러미를 끌고 무거운 다리를 옮긴다. 기온이 높고 햇살이 강하게 내리지만, 아랑곳없이 발걸음이 가볍다.
백일 기념 때 얼굴을 보고 오늘 만나게 된다. 조숙아로 또 미숙아로 세상에 한 달 먼저 우리에게 안겼다. 세 번째 만남이다. 사는 곳이 달라 자식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다가온다. 만나면 반갑고 떠나고 나면 아쉽다고 하는 것이 자식이라 했던가?
10차선 도로를 나란히 두고 걷는다. 오후, 네 시를 넘어가는데 수업을 마친 학생과 일을 끝낸 직장인들로 거리가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삼십여 분을 걸어오는데 우리 또래나 허리가 굽은 어르신과 마주한 적이 없다. 도시 전체가 젊음으로 가득하다. 자식 집에 도착하기까지 몇 차례의 건널목을 맞이하면서 내가 사는 도시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색다르게 느낀다.
아들 내외와 손주를 마주한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가볍게 포옹하며 만남의 기쁨을 대신한다. 두 손을 뻗어 손주를 품에 안는다. 아가의 부드럽고 하얀 피부가 얼굴에 닿는다. 머리카락 숱이 적어 부모의 애를 태우는 아이다. 잘 놀다가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해가 저물고 미세 먼지 나쁨으로 외출은 내일로 미루고 가볍게 두세 가지 반찬으로 저녁을 먹는다. 손주의 옹알이는 잔잔한 배경음악이다. 제때 기저귀와 우유가 제공되지 않아 때 쓰는 모습은 귀여움이 가득하다. 얼굴에는 신기한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루의 피로는 손주의 웃음으로 녹여낸다.
아침을 먹고 소아과 병원을 찾아간다. 정기 검진과 예방 접종이 있는 날이다. 집에서 십여 분 거리에 있는데 손주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여느 병원과 달리 임산부와 아이들로 대기실이 가득하다. 접수처에 간단한 인적 사항을 적고 차례를 기다린다. 키와 몸무게를 재어본다. 한 달 전보다 조금 더 자랐다. 드디어 손주가 진료실로 아들과 함께 들어간다. 곧이어 ‘응애’하고 울음소리가 들린다. 뽀얗고 튼튼한 왼쪽과 맞은 편 허벅지 두 곳에 뾰족 한 주삿바늘이 고통을 준 모양이다. 병실 밖으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가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영락없는 손주의 우렁찬 소리다. 진료실 문을 나설 때는 눈물만 흔적을 보일 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빠 품에 안겨 있다. 양쪽 허벅지에는 밴드가 붙여져 있다. 진료실 앞은 대기하는 아이들로 붐빈다. 임산부와 아이를 눈에 가득 담는 공간이다.
예방 접종을 마치고 산책길로 접어든다. 햇살은 머리 높이 가까이에 와 있다. 손주를 유모차에 태우고 하천 따라 정비된 산책길에 몸을 맡긴다. 높아진 기온 탓에 짧은 소매의 운동복 차림으로 띄엄띄엄 달리는 사람들이 부럽게 다가온다.
목에 수분을 보충할 음료를 한 잔씩 구매한다. 얼굴에 햇살이 내리자 손주는 인상이 일그러진다. 몸통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거닐다가 공원 의자에 앉아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갖는다. 유모차에 눕힌 손주는 발버둥이다. 이내 울음까지 섞였다. 자신의 의사 표현을 오로지 울음으로 대신하는 아이 때문에 아들 부부는 초보 부모로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두 아이를 성장시키고 성인이 된 시점에 우리 아이들의 양육 과정을 뒤돌아본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함께하지 못했다. 아내가 가끔 내뱉는다. 손주는 귀여워 안아주면서 우리 아이에게는 이처럼 하지 않았다는 말에 변명의 말이 있을 수가 없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 사람이 자녀에 대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손주에게는 더 사랑을 보내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부모와 달리 한 발 떨어져 보낸다. 그렇기에 수용적인 자세로 손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이 울음소리 듣기가 어려운 시대다. 출생아 제한을 외치던 시대에 학교를 다녔고 가정을 꾸리고 살았던 우리 세대다. 일부 국가에서는 출산 장려금을 지급한다는 이야기에 그런 나라가 있는가 싶었는데, 반세기 만에 우리나라도 그 속에 끼어들었다. 세상 변화의 한 단면을 몸으로 체감한다. 꾸준히 인구 증가 대책을 펴 온 정부 정책과는 달리, 지금은 저출산이 국가적으로 불안한 요소로 다가온다. 정부나 지자체의 출산 장려 정책과 달리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더더욱 줄어 사회적으로 여러 곳에 문제가 생겨났다. 결혼을 꺼리는 세대와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는 세태, 해결책은 요원하기만 하다. 도시에서도 특별한 몇 곳을 제외하고는 인구가 줄어 학교가 폐교되고 상대적으로 고령화는 경제 활동 인구의 변화까지 몰고 온다. 농촌 지역은 아예 한 명의 입학생이 없는 초등학교도 곳곳에 있단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우리 자녀들만이라도 한 자녀 더 갖기에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육 개월 지난 손주의 동생을 보았다는 소식을 조만간 들게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결혼할 무렵 자녀 계획과 지금의 출산 환경은 달라질 수 있다. 오로지 부모로서 희망 사항이다.
자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모처럼 활력이 넘치는 도시에서 첫걸음을 걷는다. 손주의 울음을 접하면서 아이의 울음소리 듣는 것이 오랜 기다림의 큰 반가움으로 바뀐 사회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이 낳아 키우기 어려운 세상, 부부 둘만의 즐거움으로 만족한 삶을 누리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 분위기가 짙어진다. 자신의 삶만큼이나 부부 본연의 역할도 필요하리라 본다. 아기의 울음에는 많은 반응이 담겨 있다. 여러 가지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저출산 문제, 아기 울음이 정겹고 반가운 일상이 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우리 아가의 걸음마가 머잖아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