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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1)
불공(不共)의 공덕이란, 성문ㆍ독각 등 다른 뭇 성자와 공통되지 않는 불타만이 지닌 공덕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3념주(念住)와 대비(大悲) 등 18가지가 있다. 본론 제75권에서 자세하게 논의한다.
2)
지덕(智德)은 일체법을 두루 비추어 아는 지혜의 공덕, 단덕(斷德)은 그것에 의해 일체의 번뇌를 단멸한 공덕, 은덕(恩德)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비의 공덕. 본론 제75권에는 인원덕(因圓德)ㆍ과원덕(果圓德)ㆍ은원덕(恩圓德)의 3덕이 설해지고 있는데, 지덕과 단덕은 과원덕의 하나이다.
3)
‘일체종의 어둠’은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를, ‘온갖 경계의 어둠’은 염오무지(染汚無知)를 말한다. 여기서 염오무지(kliṣṭa-ajñāna)란, 법의 실상을 능히 알지 못하여 망견(妄見)을 일으켜 생사 윤회하게 하는 번뇌성의 무지(즉 煩惱障)를 말하는 것이라면, 불염오무지는 비번뇌성의 무지(즉 解脫障)를 말한다. 곧 성문 독각은, 염오무지는 끊었지만 불염오무지는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덕만을 갖추었을 뿐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지덕은 갖추지 못하였다.(후술) 따라서 지덕과 단덕, 나아가 은덕을 갖춘 이는 오로지 불세존뿐이다.
4)
의요(āśaya, 보통은 阿世耶로 한역)란 뭔가를 하고자 하는 목적 의식. 수면(anuśaya)은 번뇌의 이명(異名). 즉 의요수면의 지혜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유위의 지혜를 말한다.
5)
『대법장론』은 『아비달마구사론(Abhidharmakośa-śāstra)』의 의역어(意譯語). 곧 『순정리론』은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하고 유부의 정의(正義) 즉 정리(正理)를 밝히는 논이기 때문에 『구사론』의 체제와 내용에 따르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6)
택법(dharmavicaya)이란 법(존재)을 간택(簡擇, 분별 판단)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 판단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혜(jññna)이다. 이러한 판단력에는 다시 번뇌[漏]를 수반하는 유루혜와 더 이상 어떠한 번뇌도 수반하지 않는 무루혜가 있는데, 무루혜는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정혜(淨慧), 즉 청정한 지혜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지(佛智)로서, 이것이 바로 대법, 즉 아비달마의 본질이다.
7)
『장아함경』 제10권 「석제환인문경(釋帝桓因問經)」.
8)
현관(abhīsamaya)이란 진리대상(즉 4諦)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 판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현관의 본질은 ‘혜’이지만, 이는 지각[受]이나 표상[想] 등 여타의 의식 작용[心所] 내지 생성[生] 등의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힘[不相應行法] 따위와 동시에 생겨난다. 따라서 무루혜에 수반되는 상응ㆍ불상응의 행법(이를 隨行이라 함) 또한 아비달마의 부수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온갖 존재[諸法]의 종류와 동시 구기(俱起)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데, 본론 제10권~18권에 걸쳐 논의되고 있다.
9)
‘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은 무표색으로, 여기서는 무루의 무표색인 도생률의(道生律儀, 혹은 無漏律儀, 혹은 道共戒,무루성도를 획득할 때 생겨나는 힘)를 말한다. 행(samskṛta)이란 유위세간을 조작하게 하는 힘으로, 여기에는 마음[心]과 관계하는 상응행법(즉 심소법)과 관계하지 않는 불상응행법(‘생’ 등 14가지)이 있다.
10)
무루의 5온이란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온으로, 여기서는 무루 정혜(淨慧)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隨行)의 법을 말한다.
11)
현관에는 견현관(見現觀)ㆍ연현관(緣現觀)ㆍ사현관(事現觀) 세 가지가 있다. 견현관(darśanābhīsamaya)이란 오로지 무루혜만으로써 4성제를 관찰하는 것이고, 연현관(ālamvanābhīsamaya)은 무루혜와 그 상응법인 심ㆍ심소가 동일한 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이며, 사현관(kṛyābhīsamaya)은 무루혜를 중심으로 하여 심ㆍ심소와 도생률의(道生律儀)와 생(生) 등의 4상(相) 등이 동일한 성제를 대상으로 하여 그 작용[事業]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루혜는 세 현관 모두에 대해, 이에 수반되는 심과 심소법은 ‘연’과 ‘사’ 두 현관에 대해, ‘생’ 등의 불상응행법은 다만 사현관에 대해서만 공능을 갖는다. 3현관에 대해서는 본론 제63권에서 자세하게 논의한다.
12)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고제(苦諦)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4상 등 이른바 4제(諦) 16행상(行相)에 대한 현관(즉각적인 통찰)에 의해 열반이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이러한 통찰의 주체는 ‘혜’이며, 그 밖의 수행법(隨行法)은 통찰의 근거[緣]나 부수적인 작용[事]만을 수행한다. 곧 아비달마의 본질은 바로 그 같은 무루혜이며, 이는 승의(勝義)의 아비달마로서, 불타의 진지(眞智)이다.(후술) 4제 16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에서 상론된다.
13)
아비달마는 무루혜를 본질로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타 진지(眞智)이기 때문에 이생 범부로서는 이를 획득하기 위해 세간의 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간의 지혜에는 스승이나 친구의 말을 듣고서 획득하는 지혜[聞慧, 즉 聞所成慧], 그것을 주체적으로 사유함으로써 획득하는 지혜[思慧, 즉 思所成慧], 다시 선정을 통해 반복적으로 익힘으로써 체득하는 지혜[修慧, 즉 修所成慧]가 있으며, 이러한 세 가지 지혜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타고난 지혜[生得慧] 등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선천적 혹은 후천적 실천에 의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그 근거가 되는 또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협의의 아비달마,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아비달마 논서이다.(후술)
14)
‘근본 아비달마(혹은 本論)’란 유부 아비달마의 기초가 되는 『품류족론(品類足論)』ㆍ『식신족론(識身足論)』ㆍ『법온족론(法蘊足論)』ㆍ『시설족론(施設足論)』ㆍ『계신족론(界身足論)』ㆍ『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의 6족론과 『발지론(發智論)』, 그리고 이에 대한 광박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말한다.
15)
‘업의 이숙’이란 선업 또는 악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또 다른 번뇌의 근거(자량)가 되지만, 역시 ‘업’으로 불리듯이, 혹은 “음식이나 의복은 그 자체 즐거움[樂受]은 아니지만 즐거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고 하듯이, 혹은 여인은 그 자체 더러움(즉 탐ㆍ진 등의 번뇌)은 아니지만 더러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라고 하듯이 아비달마 제론(諸論) 역시 무루혜(즉 승의의 아비달마)의 조건 혹은 방편이 되는 혜(慧)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한다”고 하였다.(『대비바사론』 제1권, 한글대장경118, p.29-31)
16)
세간의 세 가지 지혜와 생득혜(生得慧), 그리고 온갖 논(論)이 승의 아비달마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對法]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세친(世親)의 『구사론』 역시 아비달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대해 중현은 세친의 게송을 빌려 『구사론』은 아비달마가 아니라 아비달마를 간추린 것(정요), 아비달마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7)
‘아비달마(對法)코샤(藏)’라는 말을, 두 개의 명사로 구성된 복합어의 경우 뒤의 명사는 반드시 앞의 명사를 한정한다는 격한정복합어[依主釋]로 해석할 때, 그것은 ‘대법을 포섭한 핵심(藏)’의 뜻이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의 정요[堅實]를 간추린 것일 뿐이다. 혹은 앞의 명사는 형용사적인 수식어라는 소유복합어[有財釋]로 해석할 때, 그것은 ‘대법을 근거로 한 것’이라는 뜻이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에 근거한 이차적인 논일 뿐이다. 즉 『구사론』은 근본 아비달마(주14 참조)의 요점을 정리한 것, 혹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아비달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현의 생각이었다.
18)
『구사론』 제1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5-6. 경주(sūtrakāra)는 『구사론』의 작자 세친을 말한다. 즉 세친은 『구사론』의 본송(本頌)이나 장행의 주석 상에서는 ‘전(傳)하는 바에 따르면’, ‘전설(傳說, kila)에 의하면’, ‘~하였다고 전한다’ 혹은 ‘~라고 인정한다’거나 혹은 ‘허락[許]한다’는 등의 말은 모두 세친 자신은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카슈미르의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의 정설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용어이다. 세친이 어째서 중현에 의해 ‘경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다[經量]’는 경량부의 사유에 근거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본론상에서 세친이 ‘경주’로 불린 것은 168회이며, 그가 경량부의 설을 최선설(最善說)이라고 함으로써 비판된 것은 36회이다.
19)
가다연니자(Kātyāyanīputra)는 불멸(佛滅) 300년 무렵 서북인도에서 출세한 대논사로서, 『발지론』 20권을 지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교학을 확립함으로써 이 부파의 비조가 되었다.
20)
현존 『구사론』상에서는 이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제10권(앞의 책, p.471)에서 “우리(경부)는 계경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을 뿐 본론(本論)을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니, 그것을 파괴한다 한들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그래서 세존께서도 ‘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고 언급하고 있다.
21)
잡염과 청정의 인과란 고ㆍ집과 멸ㆍ도의 4제를 말한다. 곧 아비달마에서의 존재의 실상(法相)은 4제이며(『구사론』 제1권, 앞의 책, p.4), 특히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이후의 아비달마 제론은 이러한 4제를 논의의 체제로 삼고 있다.
22)
불타는, 열반을 앞두고 아난이 “우리는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여래는 교단의 통솔자가 아니며, 교단 또한 나(인격)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오로지 그대 자신과 ‘법에 의지하라’”고 말하였다. 이는 이후 스승의 인격[人, pudgala]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法, dharma]에 의지할 것이며, 밖으로 드러난 말[語, vyañjana]이 아니라 뜻[義, artha]에,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不了義, neyārtha)가 아니라 요의(nītārtha)에, 그리고 일상의 상대적 인식[識, vijñāna]이 아니라 절대적인 통찰 직관지[智, jñāna]에 의지해야 한다는 4의(依)로 정리된다.(후술)
23)
『별해탈경(別解脫經)』이란 별해탈률의(혹은 별해탈계, 혹은 波羅提木叉), 즉 계율의 조문을 모은 계본(戒本, 혹은 學處. 이를 經이라 하기도 한다)을 말한다. 이에 대해 ‘광비나야’란 계본이 성립하게 된 인연 등을 해설한 「경분별(經分別)」과 출가 교단의 운영 규칙인 「건도부(犍度部, khandhaka)」, 그리고 부록인 「부수(付隨)」로 이루어진 광률(廣律)을 말한다. 즉 불타법문(즉 經)에 대한 해석인 아비달마가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계본에 대한 해석인 「경분별」의 광률 또한 불설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24)
불성(不成, asiddha)의 허물이란 미확정의 오류. 즉 ‘경에 의지하라’는 불타의 말씀을 논거로 하여 아비달마가 불설이 아님을 논증하는 것은 경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유명제의 불확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불성의 허물[不成過], 즉 미확정의 오류에 대해서는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대정장32, p.2하) 참조.
25)
아비달마는 계경(契經, sūtra)을 널리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불설이다. 즉 불타가 아난타에게 ‘경에 의지하라’고 할 때의 ‘경’의 뜻은 넓은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경을 협의의 경, 즉 12분교(分敎) 중의 계경으로만 해석하여 오로지 그것에 의지해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응송(혹은 重頌, geya, 설해진 계경의 내용을 운문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 등도 경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
26)
‘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 의지하라(當依經量)’에서 ‘의지해야 할 것’이 바로 ‘지식의 근거[量]’라고 한다면 요의경(了義經)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인데, 법(法)ㆍ의(義)ㆍ지(智)라는 세 가지 의지해야 할 바를 더 설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뜻이다.
27)
4의(依)에서 이미 ‘스승의 인격에 의지하지 말고 법(경의 차별)에 의지하라’고 하였으면서 지금 다시 ‘경에 의지하라’고 하면, 그것은 의미 없는 동어반복의 오류[唐損過]를 범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28)
‘당의경량(當依經量)’에서 ‘경량’을 세친은 경이 지식의 근거라는 의미로, 중현은 각기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시설된 여러 경을 해석하는 근거, 즉 아비달마로 이해하였다.
29)
『칠유경』을 전승하고, 중유를 주장하는 부파는 바로 설일체유부로서, 이에 대해서는 『구사론』 제8권(앞의 책, p.374)을 참조할 것.
30)
점진적 현관, 즉 점현관(漸現觀) 역시 설일체유부의 학설로서, 4제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을 16찰나에 걸쳐 점진적으로 행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대중부에서는 단박에 관찰하는 돈현관(頓現觀)을 주장한다.
31)
이에 반해 『중아함경』 제13권 제66경 「설본경(說本經)」에서는 아씨다(Ajita, 혹은 阿逸多)에게 미래세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에서는 아씨다를 미륵과 혼동하여 그에게 성불의 수기를 주었다고 설하고 있는 등 각기 전승한 경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다. 인용한 경은 불명(不明).
32)
잡장은 경ㆍ율ㆍ논 이외의 문헌으로, 대중부에서는 3장과 더불어 잡장ㆍ범주장(梵呪藏) 등의 5장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이처럼 잡장을 경의 또 다른 형태(차별)로 이해하여 3장만을 인정할 뿐이다.
33)
가섭파(Kāśyapa)는 불타의 10대 제자 중 일인으로, 불타 입멸 후 제1결집을 주도하였다. 보통은 마하가섭(摩訶迦葉)으로 불린다.
34)
4념주 내지 8지성도(혹은 8正道)란 4념주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의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1권에서 상론한다.
35)
4정행은 4제에 통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는 방식인 고지통행(苦遲通行)ㆍ고속통행(苦速通行)ㆍ낙지통행(樂遲通行)ㆍ낙속통행(樂速通行)의 4통행(通行)을 말하며(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1권에서 상론함), 4법적은 법의 근본이 되는 무탐법적(無貪法迹)ㆍ무진법적(無瞋法迹)ㆍ정념법적(正念法迹)ㆍ정정법적(正定法迹)을 말한다.
36)
4무애해는 다른 성자와도 공통되는 불타의 공덕으로, 온갖 경계 대상을 지각하고 깨닫고 설하는 등에 대해 어떠한 장애도 없는 법(法)ㆍ의(義)ㆍ사(詞)ㆍ변(辯)무애해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한다.
37)
공공ㆍ무원무원ㆍ무상무상은 3중(重) 삼마지(三摩地, 또는 等持)로서, 공삼마지를 공(空)으로, 비상(非常)의 무원삼마지를 무원(無願)으로, 정(靜)의 무상삼마지를 무상으로 관하는 삼마지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9권에서 상론한다.
38)
현관변의 세속지란 4제 각각을 즉각적으로 통찰할 때 함께 닦게 되는 세속지를 말하는 것으로, 유부에 의하면 견도 16찰나 중 상(上) 2계의 고(苦)ㆍ집(集)ㆍ멸제(滅諦)를 관찰하는 세 가지 유지(類智:이는 法智에 대해 後邊이며, 그래서 ‘현관변’이라고 한 것임)에서는 미래의 세속지를 함께 닦아 획득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4권에서 상론한다.
39)
무루와 유루의 정려를 번갈아 가며 닦는 것을 ‘잡수’라고 하는데, 이는 오로지 욕계의 번뇌를 떠난 불환(不還)과 아라한만이 닦는 선정이다. 즉 그들은 지금 바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정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거기서 물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려를 잡수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에서 상론한다.
40)
무쟁과 원지는 4무애해와 더불어 성자와도 공통되는 불타의 공덕으로, 무쟁은 자신으로 인해 더 이상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탐(貪)ㆍ진(瞋) 등의 번뇌를 낳지 않게 되는 것을, 원지는 원하는 대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5권에서 상론한다.
41)
변제정은 궁극의 선정(변제 prāntakoṭika는 無越極의 뜻), 즉 제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무쟁과 원지 등의 공덕이 획득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한다.
42)
‘지(智)’에는 10지가 있으며(본론 제73권), 지(止, śamatha)ㆍ관(觀, vipaśya- nā)은 선정과 지혜의 뜻이다.
43)
『집이문족론』ㆍ『법온족론』ㆍ『시설족론』은 설일체유부에서 근본 아비달마로 간주하는 6족론의 하나로서, 순서대로 사리불, 목건련, 가다연니자가 지었다고 전한다.
44)
이를 광률(廣律)이라 한다. 주 23) 참조.
45)
『대비바사론』 제1권(한글대장경118, p.22)에 의하면, 비나야는 증상계(增上戒)에 근거한 논의이며, 수트라 즉 경은 증상심(增上心)에, 아비달마는 증상혜(增上慧)에 근거한 논의이다.
46)
아급마(Āgama, 阿含)는 ‘전승’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소승경전의 총명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아비달마 비나야와 더불어 수트라, 즉 경(經)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47)
온갖 존재[諸法]가 인연 화합하여 드러난 무상의 세계를 유위(有爲)라고 하며, 이때 온갖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유위(samskṛta)란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조작되지 않은 세계, 혹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로운 유위세간의 원동력이 되는 무지와 탐욕 등의 번뇌가 소멸된 세계를 무위라 하고, 그러한 존재를 무위법이라고 한다.(후술) 유위법은 다시 번뇌가 수반되는 유루법(有漏法)과 수반되지 않는 무루법(無漏法)으로 나뉜다. 이상의 유위ㆍ무위, 유루ㆍ무루를 아비달마교학의 기본구도인 4성제에 대입시켜 보면, 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인 고(苦)와 집(集)은 유위이고 유루이며, 깨달음의 이상인 멸(滅)은 무위이고 무루이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인 도(道)는 유위이고 무루이다. 즉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은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드러난 현실에서의 경험이기에 유위이지만,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다.
48)
5취온이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등 번뇌에 따라 생겨난 유루의 5온으로, ‘취(upādāna)’는 번뇌 취착(取著)의 뜻. 또한 반대로 이 같은 5온을 근거로 하여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도 한다. 그래서 유루이다.(후설) 5온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3권에 걸쳐 자세하게 해설한다.
49)
‘누(漏,āsrava)’란 누설의 뜻으로, 여섯 감관(6根)으로부터 누설된 것, 즉 번뇌를 말한다. 즉 번뇌(누)가 따라 생겨나고, 또한 번뇌에 따라 생겨나는 법을 일컬어 ‘유루’라고 한다. 그러나 청정한 법(滅諦와 道諦)을 대상[緣]으로 하여 번뇌가 생겨나는 일은 있어도 그것에 따라 생겨나지는 않기 때문에 청정한 법은 유루가 아니라 무루이다. 여기서 ‘따라 생겨난다’는 말을 전통적으로 ‘수증(隨增, 隨順增益의 준말)’이라고 하는데, 유부 번뇌론상에 중요한 술어이다. 번뇌의 수증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49권에서 상론한다.
50)
설일체유부에 의하는 한 번뇌(kleśa)란 그 자체 개별적으로 실재하면서 마음을 오염시키는 의식 작용을 총칭한 말로서,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전(纏)ㆍ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ㆍ신계(身繫)ㆍ개(蓋)ㆍ수번뇌(隨煩惱) 등의 각각의 명칭으로 분류되고 있다. 유부에서는 이 가운데 ‘수면’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번뇌론을 전개시키는데, ‘5취온은 나[我]도 나의 것[我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그릇된 지식 작용’인 유신견(satkāyadṛṣṭi, 또는 薩迦耶見)은 10가지 수면 중의 첫 번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51)
이를테면 욕계에서는 색계의 5취온이나 혹은 무루법을 대상으로 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일은 있어도, 그 같은 법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는 일이 없다. 즉 세계를 달리하는 법이나 무루법에 따라서는 번뇌가 수증(隨增)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유루라고도 하지 않는다.
52)
수번뇌(upakleśa)란, 탐ㆍ진ㆍ치 등의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로서, 여기에는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악작(惡作)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ㆍ질(嫉)ㆍ간(慳)의 10전(纏)과 뇌(惱)ㆍ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의 6번뇌구(煩惱垢)가 있다.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한다.
53)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수ㆍ상ㆍ행ㆍ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
54)
분노는 근본번뇌(유부에서는 이를 隨眠이라고 함)인 미워함[瞋]에서 일어나는 수번뇌(10纏의 하나임)이다.
55)
이에 반해 출세간(出世間), 즉 세간에서 벗어난 것을 무루라고 한다. 곧 세간은 탐욕 등의 번뇌의 산실이며, 그로 인해 생사윤회하기 때문이다.
56)
고제(苦諦)란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의 4상(相)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4상이야말로 현실 세간의 참다운 실상이기 때문에 ‘고제’이다. 본론 제61권 참조. 참고로 ‘세간’도, ‘고’도 모두 유루의 이명(異名)이다.(후술)
57)
비유논사(Dārṣṭāntika, 또는 譬喩者, 譬喩師)란 세간적 사실인 비유[現喩, dṛṣtānta]로써 법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경량부(經量部)의 선구로 알려지고 있다. 『대비바사론』에서는 이들의 주장이 90여 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으며, 본론에서도 『구사론』의 작자인 경주(經主) 세친과 경량사(經部師)인 상좌(上座) 스리라타(Śrīlāta)와 더불어 중요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삼자는 다 같이 경량부와 관계하는 이들로서, 세부적인 사상적 차이는 아직 알려지고 있지 않다.
58)
비유정수란 감각을 갖지 않는 무생물을,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이란 성자의 소의신(所依身)을 말한다.
59)
무비(Anupamā)는 비할 바 없는 절세미인으로 본명은 마간디야(Māgandiyā). 우전왕(優塡王)의 비(妃). 지만(Aṇgulimālya, 央掘摩羅)은 그릇된 스승을 만나 천 명을 죽여야 해탈한다는 말을 믿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부처님에 의해 구제되었다. 오로빈라가섭파(Uruvela Kāśyapa)는 원래 불을 섬기는 외도로 500명의 제자를 이끌고 불타에게 귀의하였다. 이들은 불타에게 귀의하기 전에 각기 순서대로 불타에 대해 애탐과 진에와 우치의 번뇌를 낳았다.
60)
‘~에[於] 대해’라는 말은 제7 처격(處格)이지만 사실상 원인 이유를 나타내는 제4 구격(具格)으로 사용되어 ‘~에 의해’를 의미한다는 뜻. 즉 비유논사는 ‘~에 대해 번뇌를 일으킨다’는 말을 ‘~에 의해 번뇌를 일으킨다’는 말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61)
유루란, ‘번뇌[漏]에 따라 생겨나는 것’, 혹은 ‘그것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는 것’, 즉 번뇌가 수증(隨增)하는 법을 말하지 번뇌의 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멸(滅, 열반)이나 성도(聖道)는 번뇌의 근거나 조건은 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에 따라 (혹은 그것에 의해) 번뇌가 생겨나지는 않는 것이다. 주 49) 참조.
62)
앞서 비유논사는 비유정수, 즉 감각을 갖지 않는 무생물을 무루라고 하였고, 또한 번뇌의 소의를 유루라고 하였지만, 유부에 의하는 한 번뇌의 근거가 유루는 아니기 때문이다.
63)
이생(pṛthagjana, 또는 凡夫)은 무루의 성법(聖法)을 획득하지 못한 유정으로, 5취 등 각기 다른 생(生)을 받기 때문에 이생이라 하였다.
64)
유학위란 견도(見道)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 전까지 단계의 성자를 말한다. 유부교학에 따르면, 마음은 항상 대상에 수반되는 것(識有必境)이기 때문에 대상을 번뇌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생의 선한 의식뿐 아니라 성자위의 선한 의식도 유루가 되어야 한다는 뜻.
65)
주 69) 참조.
66)
의준량(arthāpatti)이란, 지금 알려진 사태에 근거하여 다른 어떤 사실을 내함적(內含的)으로 이해하는 인식 방법으로, ‘요청’, ‘가정’이라 할 만하다. 이를테면 ‘데바닷타는 뚱뚱하지만 낮에는 식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관찰될 경우, 밤 동안의 식사를 요청 가정하지 않고서는 뚱뚱하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도 경에서 유루의 색이 설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무루의 색을 요청 가정하였다는 뜻. 불교에서는 이를 인식 방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67)
여기서 상좌(Sthavira)란 경부사(經部師) 스리라타(Śrīlāta, 室利羅多). 후대의 주석가들은 한결같이 스리라타를 본론의 상좌(上座)로 평석하고 있다. 이를테면 『구사론기(俱舍論記)』 제9권(대정장41, p.168상), ‘此是經部中室利羅多解. 此名執勝. 正理呼爲上座. 그는 세친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인물로, 『경부비바사론(經部毘婆沙論)』를 지었다고 전하며, 본론 제25권에서는 세친과 사제지간으로 언급하고 있다.
68)
즉 아라한 등의 성자가 번뇌[漏]를 갖지 않는다는 경설(經說)로써 무루의 색 등을 논증할 수 없다는 뜻.
69)
순취(upādānīya)란 취착을 일으키는 것으로, 취(取)와 순취의 관계는 누(漏)와 유루의 관계와 같다. 즉 안근 등은 그 자체 취착이나 번뇌가 아니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번뇌(取ㆍ漏)가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또한 번뇌를 근거로 하여 그것이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수증(隨增)하기 때문에 유루ㆍ순취(혹은 有取)라고 한다는 뜻. 이에 대해 비유사(경부)는 ‘번뇌에 의해 생겨나는 것’ 또는 ‘번뇌를 낳는 것’을 유루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유부에서는 실유(實有)의 번뇌가 안근 등을 근거로 하여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유루라고 한 반면, 비유사는 안근 등은 번뇌를 낳기 때문에 유루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안근 자체는 유루가 되어야 한다. 이 같은 논쟁은 궁극적으로 제법의 실유론(實有論)과 가유론(假有論)에 의한 것으로, 이 같은 입장에서 비유사는 다만 번뇌불생(煩惱不生)을 택멸열반으로 이해한 데 반해 유부에서는 번뇌영단(煩惱永斷)으로 이해하였다.
70)
유루(sāsrava)는 sa와 āsrava의 합성어로서, 이때 sa는 saha, 즉 함께하다[俱]는 뜻이기 때문에 유루를 ‘누와 함께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71)
즉 미래의 어떤 사실에 대해 현재 갈망할 때, 미래의 어떤 사실은 현재의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번뇌를 낳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sa-āsrava의 sa는 구기(俱起)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72)
이상은 유루(sa-āsrava)에 대한 여러 다른 해석으로, 첫 번째는 접두어 sa를 ‘같은 종족(sakula)’에서처럼 ‘동등한 종류(sadisa)’라는 뜻으로, 두 번째는 유독식(saviṣa bhojana, 독이 섞인 음식)의 경우처럼 ‘더럽혀졌다’는 뜻으로, 세 번째는 유달책가(satakṣaka)의 경우처럼 ‘함께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달책가는 용왕의 이름이지만, 천제석이 그것과 함께 떨어진다는 것은 의미 불명.
73)
앞서 아비달마의 작자에 대해 논설하면서 4념주 내지 8지성도 등을 언급하였다.(p.9) 이에 대해서는 본론 「변현성품(辯賢聖品)」(제71권)에서 구체적으로 상론한다.
74)
허공(ākāśa)이란, 말하자면 절대공간으로 일체의 물질적 변화를 제거할 때 남는 존재이다. 즉 유부에 의하면 시간(kāla 혹은 adhvan, 世路)은 유위제법의 변화 상태를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지만, 공간은 그 자신 공간적 점유성 혹은 장애성을 지니지 않아[無礙]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물질로 하여금 나타나게 하는 근거로서,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한 것이다.
75)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8)에 의하면, 소에 멍에를 멘 수레[牛所駕車]를 줄여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간택력(지혜의 힘, 즉 판단력)에 의해 획득된 멸(즉 열반)[擇力所得滅]을 줄여 ‘택멸’이라 이름하였다.
76)
상식적으로 수많은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번뇌는 각기 개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택멸(즉 열반)에도 그만큼의 수가 있어야 하지만(그래서 일체의 번뇌가 모두 끊어진 것을 완전한 열반, 즉 般涅槃이라 함), 택멸에는 동류(同類)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는 ‘단멸되는 모든 법은 단일한 하나의 택멸이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77)
고법지인이란, 견도(見道) 16찰나 중 첫 번째 찰나로, 4제 중 고제(苦諦)의 진리성(非常ㆍ苦ㆍ空ㆍ非我)을 인가하는 단계의 수행도. 이것에 의해 고제의 진리성을 확증하는 고법지(苦法智)가 획득되며, 이에 따라 욕계 고제에 미혹하여 생겨난 번뇌가 끊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에서 상론한다.
78)
만약 무위택멸의 열반이 단일하다면, 그것은 무루혜의 첫 번째 단계인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증득될 것이므로 그 후 또 다른 실천도를 닦을 필요가 없게 된다. 나아가 고법지인에 의해 그 일부만을 증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단일한 무위택멸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
79)
이를테면 꽃을 보고 있을 때 작용하는 것은 눈과 의근(意根)이며, 그 순간 그 밖의 색이나 소리 등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는 전5식(識)과 꽃에 대한 의식을 제외한 그 밖의 의식과 이에 따른 의식 작용[心所, 이는 法處에 포섭됨]은 현현(顯現)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한다. 즉 택멸무위가 무루혜의 간택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면, 비택멸무위는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위를 말한다. 유부의 이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과거ㆍ현재ㆍ미래 3세에 걸쳐 실재하며, 미래법은 일정한 때 일정한 조건 하에서 생기 현현(현재)하지만, 그 같은 조건을 결여한 그것은 잠세태(潛勢態)로서 영원히 미래에 머물게 된다. 이를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 혹은 필경불생법(畢竟不生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불생불멸인 이것도 일종의 무위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80)
‘계 따위’란,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의 무루의 5온을 말한다.
81)
유위(samskṛta)란 함께 조작된 것[共所作]이란 뜻으로, 다수의 존재[諸法]가 원인과 조건[因緣]으로써 화합하여 생겨난 것을 말하며, 이 때의 각각의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예컨대 싹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온도, 수분, 광선 등이 동시에 함께 작용해야 한다.
82)
땔감은 불에 타지 않는 한 땔감이 아니지만, 태워질 가능성이 있고, 언젠가는 탈 것이기 때문에 땔감이라고 하듯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법 역시 언젠가는 여러 인연에 의해 조작되어 생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위라고 할 수 있다는 뜻.
83)
거문고나 비파는 제 소리를 내어야 거문고이고 비파이지만, 이미 소리를 내었던 것이나 앞으로 소리를 낼 그것도 역시 거문고나 비파라고 한다. 예컨대 ‘거문고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할 때, 거문고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84)
세로(adhvan)란 과정(過程)의 뜻이다. 즉 모든 유위법은 3세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으로, 이미 생겨나 소멸한 것을 과거법, 지금 생겨나 있는 것을 현재법,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미래법이라고 한다. 유부교학상에 있어 시간(kāla)이란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이른바 ‘법’이 아니라 다만 생멸변천하는 유위제법을 근거로 설정된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실재적 시간을 의미하는 kāla(時)라는 말을 피하고, 변천 변이의 뜻인 adhvan(世,혹은 世路)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즉 유위법은 무상 변천하여 시간[世]의 근거[路]가 되기 때문에 ‘세로’라고 한 것으로, 시간은 바로 유위의 이명(異名)일 뿐이다.
85)
명(名,nāma)은 책상ㆍ하늘과 같은 명사적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말의 근거는 이 같은 단어 그 자체(전통술어로 能詮의 名)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所詮의 法)이다. 즉 일체의 유위법은 언어적인 의미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언의’이다. 말소리와 단어[名]ㆍ문장[句]ㆍ음소[文]와 의미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에서 상론한다.
86)
여기서 세 가지란, 말의 근거가 되는 단어[名]와 문장[句]과 단어를 구성하는 음소[文]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를 참조 바람.
87)
『품류족론(品類足論)』 제9권(대정장26, p.728상), ‘言依事十八界ㆍ十二處ㆍ五蘊攝.’ 즉 ‘언의(言依)가 유루의 이명으로, 5온을 포섭한다’고 할 경우, ‘언의는 18계ㆍ12처에도 포섭된다’고 설한 『품류족론』에 위배된다. 이에 따르면, 5온은 오로지 유위이지만, 18계 등은 무위도 포함하므로 ‘언의’는 유위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택멸(열반) 역시 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말의 대상으로서 드러난 택멸은 다만 유위일 뿐이며, 무위택멸은 불가설이다. 곧 언의는 오로지 유위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품류족론』을 잘 해석해야 한다’고 설한 것이다.
88)
세친은 이상의 내용을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하는 설[傳說]로 언급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구사론』 제1권, 앞의 책, p.12) 왜냐하면 이상의 논의도 이미 소멸하였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과거ㆍ미래법조차도 실재한다는 제법의 3세실유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89)
바로 앞의 본송에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이다(又諸有爲法 謂色等五蘊)’고 규정하였다.
90)
피안에 이르면 뗏목도 버려야 하듯이 열반에 이르면 무루의 성도도 버려야 하지만, 일단 버리고 나면 다시는 버려야 할 것이 없지만, 유루의 법은 그렇지 않다.
91)
5견이란, 살가야견(薩迦耶見 혹은 有身見, satkāya-dṛṣṭi)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로, 유루법은 이러한 번뇌가 생기하는 주처(住處), 즉 토대가 되기 때문에 견처이다. 5견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92)
10처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과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 1처의 일부는 법처에 포섭되는 무표색. 무표색(혹은 무표업)은 신체적 형태(즉 身業)와 말소리(즉 語業)를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 세력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와 제18권에서 상론한다.
93)
정색(rūpa prasāda)이란 광명이 차단됨이 없는 맑고 투명한 색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94)
이하 ‘본론’은 본 『현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달마의 근본이 되는 논(즉 6족론과 『발지론』)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 p.18).
95)
이는 세친의 주장으로, 그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14)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색 등의 5경을 말하며, ‘식’이란 바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즉 ‘그러한 식’의 소의(所依)가 되는 5가지 종류의 정색(淨色)을 그 순서대로 바로 안 등의 5근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그는 『품류족론』에 따른 앞의 유부의 정설을 이설(異說)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96)
‘식이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유재석, 즉 앞의 명사를 형용사적인 수식어로 해석할 경우, ‘식의 근거[識依, vijñānāśraya]’라는 말이 되며,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함(vijñānāśraya prasāda)’은 바로 믿음[信, 이는 大善地法의 하나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임]이기 때문에 5근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함’이라고 하는 말에는 반드시 ‘색’이라는 말을 붙여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한 색(vijñānāśraya rūpaprasāda)’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97)
앞의 본송, 즉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彼識依淨色)’ 중에서 ‘근거가 되는’이라는 말[‘依’]을 중심으로 하여 앞의 말인 ‘그러한 식’은 안식 내지 신식의 근거가 되는 안근과 그 밖의 4근의 관계를 분별하기 위한 말이고, 뒤의 말인 ‘정색’은 무간멸하는 의근과 안근 등의 관계를 분별하기 위한 말이라는 뜻. 여기서 무간멸이란 전 찰나와 후 찰나 사이에 1찰나의 간격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의근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이라는 본송에서의 말은 앞의 5근의 차별을 나타내는 동시에 안 등의 5근과 의근의 차별도 나타내고 있다는 뜻.
98)
동분(sabhāga)이란, 근(根)ㆍ경(境)ㆍ식(識)이 화합[交涉]하여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존재. 이에 반해 피동분(tat-sabhāga)은 아직 자신의 작용을 행하지 않는 가능태로서의 존재. 이를테면 어떤 색과 그에 따른 안식과 관계하는 찰나의 안(眼)이 동분의 안이라면, 색을 보지 않고 소멸한(혹은 소멸할) 눈은 피동분의 눈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권에서 상론함) 곧 ‘그러한 식’은 현재 작용하고 있는 안근에 근거한 말이며, ‘정색’은 작용하고 있지 않는 안근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뜻.
99)
즉 거문고와 비파(원인)에 의해 낳아진 소리(결과)가 각기 다르듯이, 정색 역시 원인(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근으로 낳아지게 된다는 뜻.
100)
‘수’와 무위는 다 같이 법처(法處)에 포섭되지만, 자상이 동일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안근 내지 신근 역시 비록 자상은 다르지만 다 같이 ‘정색’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뜻.
101)
무한의 허공이 무위법이라면, 공계는 방안 콧구멍과 같은 공간을 말한다. 이는 곧 12현색 중 밝음과 어둠[明暗]을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부에서는 별도의 색경(色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공계의 색을 안아가색(隣阿伽色)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말미에서 상론한다.
102)
신표업이란 수족(手足)의 굴신(屈伸) 등 몸으로 짓는 업[身業]으로, 이것의 본질은 바로 신체적 형태, 즉 형색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3권~34권에서 상론한다.
103)
이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16)에서의 힐난으로, 법보(法寶)의 『구사론소』제1권 여(餘)(대정장41, p.478중)에 의하면 경부(經部)의 난문(難問). 여기서 실체[事, dravya]는 극미(極微, paramāṇu, 5근 5경 등의 물질을 분할하여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 단위)를 말한다. 식유필경(識有必境)의 전제에서 출발한 유부는 존재론적 의미[有境義, the sense of to exist]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의미[有智義, the sense of to know]에서 현색과 형색은 동시에 알려지기 때문에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은 현색과 형색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 것일 뿐으로, 신표업의 본질은 오로지 형색이지 현색이 아니다. 이를테면 ‘흰 손이 때리고 검은 발이 찬다’고 할지라도 그 때 손의 현색(즉 흰색)은 신업의 본질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경량부의 힐난은 유부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현색만이 실재할 뿐 형색은 그것에 의해 일시 설정된 언어적 가설일 뿐이며, 신표업이란 다만 의지[思]가 신체를 통해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본론 제34권 참조)
104)
본론 제34권 ‘경주의 형색(형색) 가유론 비판’ 참조
105)
여기서 유집수 대종(大種)이란 감각이 있는 유정의 지ㆍ수ㆍ화ㆍ풍 4대종을 말하며, 무집수 대종이란 감각이 없는 무정물의 4대종을 말한다. 그리고 유정수(『구사론』에서는 有情名)의 소리란 의미를 지닌 언어적인 소리를, 가의성의 소리는 듣기에 즐거운 소리이다. 따라서 성처의 8종이란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노랫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장단에 맞춘 손뼉 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주위를 환기시키는 손뼉 소리)가 있으며,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변화인의 부드러운 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변화인의 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악기 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천둥소리)가 있다.
106)
여기서 장양(완전한 명칭은 所長養)은 음식 등에 의해 길러진 후천적인 대종을, 이숙(완전한 명칭은 異熟生)은 전생의 선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선천적인 대종을 말하며,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로서의 대종을 말한다. 참고로 소리는 이숙생이 아니다. 소리가 만약 이숙생이라면 현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권를 참조할 것.
107)
여기서 ‘유기’란 무기(無記)의 반대로, 선악을 분명하게 기표할 수 있는 소리를 말한다.
108)
『구사론』상에서는 앞서와 같이 소리[聲處]를 여덟 가지로 분별하지만, 중현은 다만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 등 두 가지로 분별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유정수 등과 가의성 등에 의한 분별은 문제가 있으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리는 여덟 가지 이상으로 분별될 수 있어 그 자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후술)
109)
구유인이란 결과와 동시에 존재하는 원인으로,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이라는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어떤 하나의 소리가 산출되었다고 한다면, 둘 중의 하나는 구유인이 아니게 된다. 예컨대 손바닥(유집수 대종)으로 북(무집수 대종)을 쳤을 경우, 이때 소리의 원인은 손바닥인가, 북인가? 이 경우 사실상 각기 자신의 소리를 내지만 북의 소리만 들리는 것은 손바닥의 소리가 북의 소리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후술)
110)
여기서 세 가지 소리란,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 그리고 양자 모두에 근거한 소리를 말한다.
111)
『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 p.18).
112)
증상과란 능작인(결과의 생기를 방해하지 않는 소극적인 원인)의 결과로서, ‘증상(adhipati)’이란 ‘뛰어난 힘’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곧 평등향은 선악의 행위와 관계없이 다만 4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 자체 제근을 증장시키고 감손시키는 힘을 갖기 때문에 호향 등처럼 증상과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유부의 인과관계(6因ㆍ4緣ㆍ5果)에 대해서는 본론 제15권~20권에 걸쳐 상론되고 있다.
113)
무간(無間,nirantaratva)은 근과 경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없이 절대적으로 근접한다는 뜻이다. 유부에 의하면 물질(색법)의 극소인 극미가 다른 극미와 결합하기 위해 접촉한다면 그것은 면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 극미가 아니어야 한다. 따라서 극미의 접촉은 절대적 근접인 무간을 일시 가설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극미로 이루어진 신근과 촉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다만 서로 지극히 가까이하는 경우[隣近], 그것을 일시 ‘접촉되는 것’과 ‘능히 접촉하는 것’으로 가설할 뿐이다. 물질적 존재(5근과 5경)의 접촉과 불접촉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론 제7권~8권에 걸쳐 상론된다.
114)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18)에서는 칭량(稱量)할 수 있는 것을 ‘무거움’이라 하였고, 그 반대를 ‘가벼움’이라 하였다.
115)
강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지만 그것을 이용해 여행하면 능히 즐거움을 낳기 때문에 강을 즐거움이라 할 수 있으며, 밥은 사람의 목숨이 아니지만 능히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숨이라 말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는 곧 원인(강, 허기짐)을 결과(즐거운 것, 먹기를 바라는 것)로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의 예증이다.
116)
여기서 두 말이란, 어지러움은 미끄러움(수ㆍ화의 증대)과 관계가 있다는 말과 수ㆍ풍(차가움)의 요소가 증대하여 생겨난다는 두 말.
117)
본론 제4권~5권에 걸쳐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大種性)이라는 상좌(上座)의 설’을 비판하면서 소조촉에 대해 상론하고 있다.
제2권
1)
무표색(avijñapti-rūpa)이란, 5근ㆍ5경과는 달리 외부로 표출되지 않은 색이란 뜻으로, 무표업(無表業)이라고도 한다. 유부에 있어 색법은 사실상 행위, 즉 업설(業說)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외부로 표출되는 행위[表業]는 5근과 5경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신업(身業)은 신체적 형태를, 어업(語業)은 말소리를 본질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행위된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또 다른 색법을 낳아 우리가 행위할 때의 마음과는 다른 상태에 있든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든, 혹은 무심의 상태에 있든 항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유부에서는 이것을 무표업이라고 하는데, 표업의 본질이 물질(즉 형태와 말소리)이기 때문에 무표업 역시 물질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무표색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비록 극미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공간적 점유성도 지니지 않을 뿐더러 형태와 색채(眼處에 포섭되는 색의 특성)를 갖지 않을지라도, 나무가 움직일 때 그 그림자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4대종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색법에 포섭시켜 제6 의식의 대상(즉 法處에 포섭되는 색)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량부나 세친은 모두 이 같은 존재나 신체적 형태(즉 신업)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3권~35권에 걸쳐 자세하게 논의되고 있다.
2)
무상정(saṃjñā-samāpatti)과 멸정(또는 滅盡定, nirodha-samāpatti)은 제4정려(靜慮)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단계에서 일체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소멸된 명상의 상태로서, 본론 제12권에서 상론된다.
3)
무표색(혹은 무표업)은 모든 표업에 의해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수계식과 같은 맹서의 의식(儀式)을 통한 행위나 선악의 성격이 분명한 행위에 의해서만 낳아진다. 선의 맹서(즉 善戒)에 의해 낳아져 악을 막게 되는 무표색을 율의(saṃvara)라 하고, 악의 맹서에 의한 것을 불율의라고 하며, 맹서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선ㆍ악의 행위는 각기 비율의ㆍ비불율의의 무표를 낳는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6권 이하에서 상론된다.
4)
선심에 의해 일어난 정(淨)무표가 상속하고 있을지라도 이에 따라 반드시 선심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
5)
무표색은 행위의 잠재 여력, 즉 행위의 상사(相似) 상속을 가능하게 하여 결과를 산출하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의 하나인 득(得, prāpti) 역시 유정들로 하여금 자신이 상속한 유위제법이나 택멸 등의 법과 적극적으로 관계하게 하여 결과를 획득하게 하는 힘이다. 곧 이 같은 ‘득’과 구별하기 위해 무표색은 대종소조(지ㆍ수ㆍ화ㆍ풍 4대종에 의해 조작된 것)의 색법임을 별도로 밝혔다는 뜻. ‘득’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에서 상론한다.
6)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생(生)ㆍ의(依)ㆍ입(立)ㆍ지(持)ㆍ양인(養因) 등 5가지의 원인이 된다.(본론 제20권을 참조할 것)
7)
여기서 ‘다른 논사’란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를 말한다. 이 점에 관해 세친은 “‘설한 것이다’고 함은, 이러한 무표색은 바로 비바사사 종의[師宗]에서 주장하여 말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논설하고 있다.(『구사론』 제1권,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22) 즉 세친은 경량부설에 따라 이 같은 무표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단지 비바사사의 종의로서 설하였다는 것이다. 무표색에 대한 경량부의 논란과 이에 대한 중현의 재 비판에 대해서는 본론 제34권~35권에서 상세히 논의되고 있다.
8)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 21.
9)
세친은 무표를 ‘따라 유전하는 것[隨流, pravāha]’, 즉 본법(本法)과 서로 유사하게 상속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는데, 그럴 경우 제1 찰나의 무표는 ‘상속’이 아니기 때문에 세친이 정의한 무표에 포함되지 않으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상속(saṇtāna)이란 전법과 후법 사이의 간단없는 계기(繼起)를 일컫는 가설적 개념일 뿐 실재적인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무표를 상속으로 규정할 경우, 무아법상(無我法相)에 있어 행위의 인과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무표색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 아비달마의 종의 자체가 허물어지고 만다는 뜻.
10)
두 번째 등이란, ‘등’이라고 하는 말은 난심과 무심 모두에 통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무심 등’의 ‘등’을 말한다. 즉 ‘등’이라는 말을 난심과 무심 모두에 적용시킬 경우, 난심의 ‘등’은 난심을 제외한 그 밖의 마음을, 무심의 ‘등’은 무심을 제외한 그 밖의 마음을 가리키므로 상호 포섭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11)
비존재[無]는 동일성의 개념으로, 차별적 존재로 나뉠 수 없기 때문에 ‘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
12)
이는 앞서 지적한 문제점을 고려하여 중현 자신이 지은 본송이다. 즉 무표색이란, 조작(행위)할 때나 조작을 떠났을 때나 조작이 끝나 수전(隨轉)하는 무대의 조색(造色)에 있어서나(이상 ‘조작할 때 등’), 조작할 때의 마음과 다른 마음이나 혹은 동류의 마음에서나(이상 ‘다른 마음 따위’), 그리고 무상ㆍ멸진정과 같은 마음이 소멸된 상태(무심)에 있어서 수전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무심정에서는 오로지 선(즉 淨)의 무표만이 일어나며, 불선은 그 밖의 두 상태에서 일어나며, 산선(散善)은 세 상태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무표는 선ㆍ불선의 언표가 가능한 유기(有記)이며, 나아가 극미소성(極微所成)이 아니기 때문에 무대(無對)이다. 따라서 대종은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무표를 그것으로 분별하지 않고 소조성(所造性)으로 분별하였다. 즉 중현은 무표를 무대의 비색(非色)으로 간택하면서도 5온 중의 색온에 포섭되기 때문에 소조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종은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대종소조성’이란 무표의 정의는 애매하며, 따라서 ‘무대소조성’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현종론』 제2권의 해석에 의한다.
13)
‘계(界, dhātu)’란 종족(種族, gotra)의 뜻이다. 여기서 ‘종족’이란 바로 생의 근본[生本]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산(山) 중에 다수의 동(銅)ㆍ철(鐵)ㆍ금ㆍ은 등이 있는 것을 다계(多界), 즉 다양한 광물의 세계라고 하듯이 하나의 소의신 중에 열 여덟 가지 종류의 제법의 종족이 있는 것을 ‘18계’라고 이름한다.(본론 제3권 참조)
14)
이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2)에서의 논설이다. “지ㆍ수ㆍ화ㆍ풍은 능히 자상(自相)과 소조색(所造色)을 보지하기 때문에 ‘계(dhātu)’라고 이름하며, 이와 같은 4계를 또한 역시 ‘대종(mahābhūta)’이라고도 이름하니…….” 여기서 대종은 일차적 물질, 소조색(또는 造色)은 그것이 결합하여 생겨난 이차적 물질을 말한다. 즉 4대종은 일체의 물질의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계’이다.
15)
여기서 ‘종(bhūta)’이란 종류의 뜻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이 되는 종자의 뜻이다. 곧 이러한 대종의 차별에 따라 이차적 물질인 조색에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대(mahā)’는 보편[遍], 즉 만물에 두루 한다는 뜻이다.(후술)
16)
다시 말해 4대종만이 유성(有性) 혹은 유정의 몸 등을 생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체 만물의 인(因)과 연(緣)이 되는 모든 존재가 그러한 작용을 지니기 때문에 ‘종(種)’이라 해야 한다는 뜻.
17)
견고성 등이란 4대종의 자상으로, 지(地)는 견고성을, 수(水)는 습윤성을, 화(火)는 온난성을, 풍(風)은 운동성을 본질로 한다.(후술)
18)
‘향’과 ‘미’는 단식(段食, 분단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으로서, 색계에 태어나는 이는 이에 대한 탐욕을 버렸기 때문이다.(본론 제4권 참조) 따라서 색계에는 비식(鼻識)과 설식(舌識)도 존재하지 않는다.
19)
즉 대종은 유정의 이익과 손상을 초래하는 근원적인 것이며, 또한 크나큰 작용을 갖기 때문에 ‘대종’이라 하였던 것이다.
20)
이를테면 방에 사람이 한 명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넓어 보이지만, 열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 틈이 없이 좁아 보인다. 그러나 허공은 공간적인 증감이 없다. 그래서 허공은 무위법이었다. 이에 반해 방이나 콧구멍 따위처럼 구체적인 한계를 지녀 명암을 본질로 하는 공간[虛空界, 또는 空界]은 유위법이다.(후술)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의 말미에서 상론한다.
21)
대종이 흩어지지 않게 끌어당겨 포섭[引攝]하는 것은 수대(水大)의 작용이며, 가속하여 낙하하는 운동성(유동성)은 풍대(風大)의 작용이다. 현실에서의 돌은, 제 형태를 유지하여 다른 사물에 저항하는 작용[持用, 즉 견고성]을 갖는 지대(地大)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물을 포섭하는 작용[攝用, 즉 습윤성]을 갖는 수대와, 사물을 성숙시키는 작용[熟用, 즉 온난성]을 갖는 화대와, 사물을 동요하게 하는 작용[長用, 즉 운동성]을 갖는 풍대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존재한다. 이 세 가지는 다만 두드러지지 못하였을 뿐이다.(후설)
22)
이를 줄여 지(持)ㆍ섭(攝)ㆍ숙(熟)ㆍ장(長)이라 하며, 이는 다음에 설할 4대의 자상, 즉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의 대구(對句)로 항상 함께 일컬어진다.
23)
지(地) 등 4대종 자체는 견고성 등의 자상(즉 性)과 불가불리의 관계라면서 이와는 다른 보지 등의 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난문.
24)
견고성 등의 자상을 지녔기 때문에 ‘지(地)’라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과실이다. 자상은 다만 작용을 통해 추리된 것으로(후술), 그렇기 때문에 자상과 작용의 관계는 서로 개별적인 것도 아니고(非離), 동일한 것도 아니다(非卽).
25)
다음의 본송에서 설하겠지만, 지계(地界)는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땅이 아니라 견고성을 본질로 하는 물질적 요소이다. 따라서 이는 직접 지각되지 않으며, 다만 사물로 하여금 제 형태를 유지하여 다른 사물에 저항하게 하는 작용[持業]을 통해 추리된다. 화계(火界)의 경우, 사물을 익게 하는 작용[熟業]을 통해 온난성이라는 그 자체의 특성이 추리된다.
26)
갈랄람(kalalam, 또는 凝滑)이란 태내(胎內) 5위(位) 중 첫 단계로, 수태 후 첫 7일간의 상태를 말한다.
27)
자상은 대종의 본질로서 3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작용은 오로지 현재 찰나에만 존재한다는 뜻. 유부에 의하면 제법 자체는 3세에 걸쳐 실재하지만,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가 미래이고, 이미 작용한 상태가 과거이며, 지금 작용하는 찰나가 바로 현재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에서 상론한다.
28)
현실에서 경험되는 땅과, 견고성의 특성을 갖는 요소로서의 지대(地大)는 다르다. 그러나 바람과, 운동성의 특성을 갖는 풍대(風大)는 동일하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의 게송과 장행의 해석에서 상론한다.
29)
여기서 계경은 『잡아함경』 제11권(대정장2, p.72하). 『품류족론』은 제1권(대정장26, p.692하).
30)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바람과 풍계의 관계를 설한 것으로, 운동성의 풍계가 두드러진 현실상의 바람(즉 4대종에 의해 이루어진 이차적 물질로서의 바람)은 가벼움(7가지 所造觸의 하나)을 본질로 한다. 즉 다른 세 가지 대종과는 달리 풍계의 경우 그것의 결과인 현실상의 바람과 성격이 동일하기 때문에 계경 등에서 풍계를 가벼움과 운동성으로 규정짓고 있다는 뜻. 이에 대해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3)에서는 “풍계는 마땅히 운동성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해야 하지만, [『품류족론』이나 계경에서는] 작용[業]을 들어 풍계의 본질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역시 또한 ‘가벼움’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고 해명하고 있다.
31)
이하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可見] 땅ㆍ물ㆍ불ㆍ바람과 같은 가(假)의 4대와,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과 같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과 작용을 갖는 실(實)의 4대(즉 4계)의 차이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32)
즉 ‘옷이 희다’거나 ‘옷이 길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옷의 냄새가 좋다’, ‘옷의 감촉이 부드럽다’고 말하듯이 땅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색처만을 땅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
33)
촉처(觸處)의 11가지 중 앞의 네 촉은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종이었다.
34)
향(香)ㆍ미(味)는 색계에 존재하지 않아 오로지 욕계의 그것만을 나타내지만, 현색과 형색은 욕계와 색계의 땅 등을 모두 나타내기 때문에 색ㆍ향ㆍ미ㆍ촉의 4처로 이루어진 땅을 현색과 형색만으로 규정하게 되었다는 뜻.
35)
땅이나 옷은 모두 4대종으로 이루어진 이차적 물질로서, 색채와 형태가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색처에 포섭되는 것이지만, 다만 세간의 언어적 명칭으로서만 차별된다.
36)
즉 ‘옷’이라는 개념이 의식의 상속상에 생기하여 나타나기 위해서는 말소리가 더해져야 한다. 여기서 ‘생’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 의식상에 생기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본론 제13권 참조)
37)
흐름은 안근의 대상인가, 신근의 대상인가? 안근의 대상은 색채와 형태이며, 신근의 대상은 습윤성 등의 감촉으로, 이것이 흐름은 아니다. 흐름이란 곧 이러한 안근 등에 의해 파악된 차별적 지식에 근거하여 가설된 것으로, 자상을 지닌 단일한 실유의 존재(즉 법)가 아니다.(후설)
38)
형색의 여덟 가지란, 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ㆍ고(高)ㆍ하(下)ㆍ정(正, 평평함)ㆍ부정(不正)을 말한다.(본론 제1권 참조)
39)
다시 말해 실유의 존재는 더 이상 분할 환원할 수 없는 궁극적 존재(이를 ‘법’이라 함)로서, 하나의 본질, 하나의 작용만을 지닌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다수의 본질을 지닌 것, 그래서 다수의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수의 법이 결합하여 현상한 가설적 존재일 뿐이다. 곧 본 항에서의 논의의 요지는 여러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현실에서의 땅(혹은 물, 불)이 물질의 질적 궁극으로서의 지대(地大)가 아니라 4대종의 복합물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땅’이라고 한 것은 다만 세간의 언어적 관습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40)
바람을 색채나 형태로 파악하는 것은 보편적 사실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파악된 바람은 부정(不淨)한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 존재의 질적 구극인 풍대와는 차별된다. 그래서 본송에서 ‘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시 그러하다고 한다’고 하였지만, 현실에서 경험하는 ‘바람은 바로 풍대이다’는 주장이 유부의 선설(善說)이라는 뜻.
41)
여기서 ‘이 가운데’란 ‘색온 가운데’라는 뜻으로, 색온 가운데 무표색을 제외한 5근과 5경은, 12처 중에서는 의(意)와 법(法)을 제외한 10처(處)에, 18계 중에서는 ‘의’와 ‘법’과 6식(識)을 제외한 10계(界)에 해당한다. 참고로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7)에는 “이 가운데 근과 경을 바로 10처ㆍ10계라고 인정한다.(此中根與境 許卽十處界)”로 되어 있다. 여기서 ‘인정한다’(許, iṣṭa)는 말은 ‘전설(傳說)’이란 말처럼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에 대한 경주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부에서는 온(蘊)ㆍ처(處)ㆍ계(界) 3문(門)의 실유(實有)를 주장하고 있는 데 반해 경량부에서는 이 중에 ‘온’과 ‘처’의 가유(假有)를 주장하며, 따라서 가유인 ‘처’의 그것으로 실유인 ‘계’의 체(體)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유부에서만 ‘인정한다’고 설한 것이다.(『구사론기』 제1권말, 대정장41, p.25상)
42)
『구사론』상에서 이 내용은 10처ㆍ10계의 건립을 논설하기 전에 언급되고 있다.
43)
여기서 『의품(義品)』은 보광이나 법보에 의하면 법구(法救)에 의해 결집된 것이지만, 남전(南傳)의 『경집(經集, Sūtta nipata)』 중의 「의품(aṭṭhaka vagga)」을 말한다. 한역(漢譯)은 『의족경(義足經)』으로, ‘족’은 ‘품’자의 옛 오사(誤寫)이다.
44)
이상(異相)이란 유위4상의 하나로, 사물로 하여금 변이하게 하는 힘. 본론 제13권 참조.
45)
무루색(무루행에 의해 무루율의, 즉 道共戒)은 변괴하지 않는다. 무표색에는 욕계 계(戒)인 별해탈률의(別解脫律儀)와 색계 정려와 무루도에 의한 정려율의, 무루율의 세 가지가 있다.(본론 제36권 참조)
46)
무견색은 이를테면 법처에 포섭되는 무표색. 즉 무표색과 이후 나타나는 유견의 온갖 색(신체적 형태)은 전생에 행한 동일한 업의 과보이다.
47)
소리는 발성자의 욕망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멈추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업의 이숙과가 아니다. 즉 소리가 전생의 업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현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본론 제5권에서 상론한다.
48)
염현은 불제자로서, 생긴 모양은 누추하였지만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고 한다. 즉 그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는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전생의 선업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뜻.
49)
극미(paramāṇu)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단위로서, 하나의 극미는 통상 4방 상하의 6개의 극미에 둘러싸여 최초의 결합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 단일한 극미[事極微]는 무방분(無方分)이기 때문에 지각의 대상이 아닌 가설적 극미[假極微]이며, 현상하여 우리들 경험의 대상이 되는 실제적 극미[實極微]는 다수의 극미가 취집된 유방분의 극미[聚極微]이기 때문에 ‘애성(礙性,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극미의 크기와 집적에 대해서는 본론 제10권 ‘색법의 구생’과 제32권 ‘공간, 즉 길이의 단위’를 참조 바람.
50)
물질의 최소단위인 극미는 부피를 갖는 것인가, 갖지 않는 것인가? 만약 갖는다면(有方分) 그것은 더 이상 극미가 아니며, 갖지 않는다면[無方分] 수많은 극미가 적집한 코끼리도 부피를 갖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이에 대해 중현은 극미를 가설적 극미[假極微]와 실제적 극미[實極微]라고 하는 이중구조로 해석하였다. 즉 물질을 양적으로 분석한다고 할 때 감관으로써 지각할 수 있는 데까지 분할할 경우, 그것은 실제적 극미로서 유방분이며 형색(形色) 등의 자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를 관념적으로 더욱 분석하여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 것’에 이르게 될 때, 이는 가설적 극미로서 무방분이며 장ㆍ단등의 형색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의 대상도 지각의 대상처럼 실재한다는 유부교학의 전제(識有必境)에 따라 이것의 실재성도 인정하였다.(본론 제32권 참조) 따라서 경험의 대상이 되는 실제적 극미는 변애(변이성와 장애성)를 갖기 때문에 ‘변애하기 때문에 색이다’는 정의는 성립할 수 있다는 뜻.
51)
‘변애하기 때문에 색이라 이름한다면, 과거ㆍ미래의 색은 마땅히 색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다’는 난문에 대한 논변. 즉 지금 타고 있는 것만을 땔감이라고 하지 않으며, 이미 태워진 것(과거의 땔감), 앞으로 태워질 가능성을 지닌 것(미래의 땔감)도 모두 땔감이라고 하듯이, 또한 근(根)ㆍ경(境)ㆍ식(識)이 화합하지 않아 현재 자신의 작용을 행하고 있지 않는 눈(피동분안) 또한 눈이라고 하듯이, 이미 변애한 과거의 색, 앞으로 변애의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색도 색이라 이름할 수 있다는 뜻.
52)
『입아비달마론』(권상 대정장28, p.981하)에서 이러한 예를 들고 있다. 즉 빨리 가기[疾行, āśum ayati] 때문에 말(aśva)이라 하고, 바로 가기[正行, gacchati] 때문에 소(go)라고 하듯이 변괴(變壞, rūpyate)하기 때문에 색(rūpa)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변괴(rūpana)란 뇌괴(惱壞, bādhaṇā)의 뜻이다.(如變壞故, 或變礙故說名爲色. 如是卽說可惱壞義ㆍㆍㆍ如能疾行故名爲馬, 以能行故說名牛等)
53)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6.
54)
본권 벽두에서 논설하였듯이 무표색은 표색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4대종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표색이 소멸할 때 무표색도 따라 소멸하지 않으며, 따라서 세친의 비유는 옳지 못하다는 뜻.
55)
금강유정이란, 무색계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 제9 하하품의 번뇌를 끊는 무간도(無間道)의 선정으로, 이는 금강석처럼 견고하고 예리하여 어떠한 번뇌도 능히 깨트릴 수 있기 때문에 금강유정이라고 하였다. 금강유정에 의해 유정지의 제9품의 번뇌가 끊어짐과 동시에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집(集)을 끊었고, 멸(滅)을 작증(作證)하였고,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진지(盡智)가 생겨난다. 진지란, 번뇌멸진(즉 택멸)의 득(得)과 동시에 작용하는 무루지라는 뜻으로, 제9품의 해탈도인데, 이때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소의인 나무가 소멸할 때 그림자도 따라 소멸한다면, 금강유정이 소멸할 때 진지도 마땅히 소멸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소의인 아버지(혹은 장인)가 사멸할 때 그에 의해 낳아진 자식(혹은 전당)도 따라 사멸한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같은 유례(喩例)는 진위부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뜻.
56)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6-27.
57)
무표색과 대종의 관계는 그림자와 나무의 관계와 동일하지 않다는 뜻. 즉 그림자는 나무가 소멸하면 함께 소멸하지만, 무표색의 경우 대종이 소멸하여도 함께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후술)
58)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7).
59)
첫 찰나의 대종이 소멸하고 제2 찰나의 대종이 생겨날 때, 이는 제2 찰나 무표색의 소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제2 찰나의 무표색은 첫 찰나 무표색을 상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60)
대종은 소조색에 대해 생(生)ㆍ의(依)ㆍ입(立)ㆍ지(持)ㆍ양인(養因) 등 5가지의 원인이 되는데, 비록 생인이 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네 원인이 되기 때문에 ‘소의’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 즉 대종은 소조색을 낳기 때문에 생인(生因, janana-hetu)이 되며, 소조색이 이에 따라 전전하기 때문에 의인(依因, niśraya-hetu)이 되며, 대지가 사물을 지탱하듯이 소조색을 능히 임지(任持)하기 때문에 입인(立因, pratiṣṭha-hetu)이 되며, 소조색을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지인(持因, upastambha-hetu)이 되며, 소조색을 능히 장양시키기 때문에 양인(養因, upabriṃhaṇa-hetu)이 된다. 자세한 것은 본론 제20권을 참조할 것.
61)
이는 ‘만약 소의가 되는 대종이 변애하기 때문에 능히 그것에 근거하는 무표색 역시 색이라 이름할 경우, 안식 등의 5식도 그것의 소의가 되는 5근이 변애를 지니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색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라는 앞의 힐난에 대한 답변이다. 즉 5근과 5식의 관계는 대종과 무표의 관계와 동일하지 않다. 안 등의 5식은 색근(안근 내지 신근)뿐만 아니라 의근을 소의로 삼으며, 궁극적으로 6식은 다만 소의에 따른 차별일 뿐 그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에 색근을 소의로 한다고 하여 ‘색’이라 하고, 의근을 소의로 한다고 하여 ‘비색’이라 해서는 안 된다는 뜻.
62)
‘수’의 작용은 대상(所緣)을 영납(수용)하는 것이지만, 그 밖의 다른 심ㆍ심소법도 역시 동일한 대상을 영납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의 차별을 알기 어렵다. 다시 말해 지각[受]ㆍ표상[想]ㆍ확인[勝解]ㆍ판단[慧] 등은 모두 동일한 대상에 관한 지식 작용으로, ‘수’를 다만 대상을 영납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경우 다른 심ㆍ심소법과의 변별성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으로 ‘촉을 영납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이를 자성수라고 하였다는 뜻.
63)
『잡아함경』 제17권 제452경.
64)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따른 3수, 안촉(眼觸) 내지 의촉(意觸)에 근거하여 생겨난 안촉소생수(眼觸所生受) 내지 의촉소생수(意觸所生受)의 6수를 말한다.
65)
상(saṃjña)이란, 인식의 대상을 취하여 개념화시키는 의식 작용을 말한다. 말하자면 표상 작용이다.
66)
‘상응’이란 ‘심상응’의 준말로서, 마음에 대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심소법(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상응행법에는 사(思) 등의 46가지가 있으며, 불상응행법에는 득(得) 등의 14가지가 있다. 상응법에 대해서는 본론 제10권~11권에서, 불상응행법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14권에 걸쳐 상론된다.
67)
『잡아함경』 제3권 제63경.
68)
업에는 내적 의지 작용인 사업(思業)과 그것에 의해 조작되어 외부로 표출된 신(身)ㆍ어(語)의 사이업(思已業)이 있다. 본론 제33권에서 상론한다.
69)
일체 유루의 유위법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고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온이 바로 ‘사’라면, 이것과 수ㆍ상ㆍ식을 제외한 그 밖의 심소법과 불상응행이 5취온 중에 포섭되지 않을 것이고, 고제ㆍ집제에도 포함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들은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뜻.
70)
『잡아함경』 제8권 제223경, 225경(대정장2, p.55중).
71)
작의란 심대지법의 하나로, 주의ㆍ경각의 의식 작용을 말한다. 곧 이것이 마음을 자극함으로써 대상으로의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세친은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9)에서 “4온을 제외한 그 밖의 유위의 행(行)은 모두 행온에 포섭된다고 마땅히 인정[許]해야 한다”고 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에 대해 보광은 “경부(經部)는 경전상에서 오로지 6사신(思身)을 행온이라 설하였기 때문에 단지 ‘사’만을 행온이라 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경량부에서는 유부에서 행온에 포함시킨 심소법이나 불상응행법을 모두 마음의 변화차별 내지 개념적 존재[假說]라고 하여 그 실재성을 부정하고, 유위 조작(造作, 즉 행)의 본질을 ‘사’로 파악하였다.
72)
주 67)에서 인용한 계경을 말한다.
73)
수등지(修等持)란, 등지 즉 삼마지(samādhi)를 닦는 것으로, 여기에는 지금 여기서의 즐거움(이를 現法樂이라고 한다)을 얻기 위해 닦는 삼마지와, 뛰어난 지견(知見)을 획득하기 위해 닦는 삼마지와, 분별의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 닦는 삼마지와,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기 위해 닦는 삼마지 등 네 가지가 있다. 즉 그 자체로서 선인 정(淨)등지와 무루등지를 닦으면 즐거움을 획득하며, 온갖 선정을 통해 천안통을 닦으면 뛰어난 지견을 획득하며, 욕계로부터 유정처에 이르는 문(聞)ㆍ사(思)ㆍ수소성(修所成)의 선법과 그 밖의 일체의 무루의 유위 선법을 닦으면 분별의 지혜를 획득하며, 금강유정(金剛喩定)을 닦으면 바로 모든 번뇌의 영원한 멸진을 획득한다.
74)
식(āhāra)이란, 유정을 존속시키는 두드러진 에너지로서, 향ㆍ미ㆍ촉 등을 본질로 하는 물질적 에너지인 단식(段食, 분할되어 섭취되기 때문에 단식임), 근ㆍ경ㆍ식의 3사 화합의 촉을 본질로 하는 희열 등의 촉식(觸食), 사(思)를 본질로 하는 희망 등의 사식(思食), 그리고 유정의 신체와 생명을 존속시키는 근거인 의식의 식식(識食)의 네 가지가 있다.
75)
불퇴타법이란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예류과(預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의 4과(果), 또는 그러한 4과를 획득한 성자를 말한다.
76)
‘득’이란 유정의 상속상에 어떤 법을 획득하게 하는 힘으로, 획득되는 법과 ‘득’의 선후 관계에 따라 법전득(法前得)ㆍ법후득(法後得)ㆍ법구득(法俱得)ㆍ비전후구득(非前後俱得)으로 나뉜다.
77)
유부에 있어 의식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근거를 가져야 하는데, 7식주란 바로 3계 5취상에서 의식이 안주(安住)하는 일곱 가지 형태를 말한다.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도 다르고[身異] 생각도 다른[想異] 인취와 욕계 6천 등은 제1식주이며, 신체는 서로 다르지만 생각은 동일한 초정려의 범중천ㆍ범보천ㆍ대범천은 제2식주, 신체는 동일하지만 생각이 다른 제2정려의 소광천ㆍ무량광천ㆍ극광정천은 제3식주, 신체와 생각이 동일한 소정천ㆍ무량정천ㆍ변정천은 제4식주, 그리고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는 제5ㆍ6ㆍ7 식주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22권 참조할 것.
78)
증정(證淨, avetya prasāda)이란 4제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불(佛)ㆍ법(法)ㆍ승(僧) 3보(寶)와 계(戒)에 대한 청정한 무루의 믿음[信]을 낳게 되는 것을 말한다.
79)
즉 상좌(上座) 스리라타(Śrīlāta)는 경설에 따라 ‘행온은 오로지 사(思)이다’고 주장하지만, 경설은 대개 이같이 모두를 열거하지 않고 앞뒤 혹은 중간의 말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
80)
사(cetanā)란 마음으로 하여금 선ㆍ불선 등을 조작하게 하는 의식 작용, 즉 의지 작용으로, 제법 중 유위(saṃskāra, 共所作의 뜻) 세간을 조작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언급하였다는 뜻.
81)
사마타(śamatha)와 비발사나(vipaśyanā)는 각기 어지러운 마음을 억지하여 고요하는 선정과 무상(無常) 등의 제법실상을 통찰하는 것으로, 지(止)와 관(觀)으로 한역된다.
82)
선사취란, 욕계의 번뇌를 끊어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뿐더러 상계로 나아가 다시는 욕계에 돌아오는 일이 없는 불환과의 성자를 말하는 것으로, 색계 5종 불환 중 중반(中般, 중유에서 반열반하는 불환)과 생반(生般, 색계에 태어나서 반열반하는 불환)을 각기 다시 중유에서 (혹은 색계에 태어나자마자) 바로 신속하게 반열반[速般]에 드는 이, 얼마 동안 머문 후[非速般] 혹은 오랜 시간 지난 후 반열반[經久般]에 드는 이로 나누고, 여기에 보다 높은 경지로 올라가 반열반에 드는 상류반(上流般)을 더하여 7선사취라고 한다. 본론 제65권에서 상론한다.
83)
누(漏)는 번뇌의 이명(異名)으로, 번뇌는 유정을 3계 5취에 걸쳐 생사 유전하게 하며, 6근을 통해 끊임없이 허물을 누설하게 하기 때문에 ‘누’라고 하였다. 여기서 욕루는 무명을 제외한 욕계의 번뇌를, 유루(무루에 대응하는 유루가 아님)는 무명을 제외한 색계ㆍ무색계의 번뇌를, 무명루는 3계의 무명을 말하는 것으로, 무명은 그 자체만으로 능히 3유를 초래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누’로 독립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3권을 참조할 것.
84)
3결은 견결(見結)ㆍ계금취결(戒禁取結)ㆍ의결(疑結). 예류과는 4제의 진리성을 현관(現觀)함으로써 끊어지는 일체의 번뇌(이를 見道所斷, 혹은 見諦所斷이라 함)를 끊음으로써 획득된다.
85)
유부에 의하면 제법은 3세에 걸쳐 실재하기 때문에 원인(예컨대 思)이 바로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원인은 다만 미래법을 현현하게 하는, 다시 말해 작용하게 하는 조건이 될 뿐이다.(그래서 引生 引起라고 설하게 된 것임) 또한 원인과 결과는 시간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 병존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구유인(俱有因)이라고 한다. 즉 ‘사’는 그것을 촉발시키는 ‘생(生)’ 등에 의해 낳아지며, 이러한 ‘사’에 의해 실유의 유위제법이 현현 조작된다.
86)
경량부에서는 유정에게 경험된 일체의 유위 세간과 그것의 유전 변천을 의지, 즉 사(思)와 ‘사’의 상속으로 해명하고 있다. 예컨대 본론 제10권 이하에서 설해지는 일체의 심리 작용 역시 종자(種子)에 비유되는 ‘사’의 상속 과정(轉變과 差別)상에 일시 가설된 개념으로 이해하며, 업의 본질 또한 신체적 형태나 말소리가 아니라 ‘사’로 이해하고 있다. 곧 『구사론』상에서 유부의 제법 실유론에 대한 세친의 비판적 태도는 이에 근거한 것이며, 본론에서의 경부(經部, 혹은 經主 세친, 비유자, 상좌)에 대한 비판 역시 대다수 이에 대한 것이다.
87)
‘사(의지 작용)’가 직공에 비유되고, 직공에 의해 조작된 옷감이 ‘사’에 의해 나타난 현재의 유위제법을 비유하는 것이라면, 실은 직공에 의해 조작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옷감에 앞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직공(思)이 원래부터 존재하였던 실(미현현의 미래법)로써 옷감(현재법)을 짠(조작한) 것이라고 해야 올바른 비유가 될 수 있다는 뜻.
88)
경량부에 의하면 탐ㆍ진ㆍ치는 ‘사’의 한 형태로서 모두 마음의 차별적 상태이기 때문에 바로 의업이며, ‘사’를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구사론』 제17권, 앞의 책, p.767 참조). 그러나 유부의 경우 의업(意業)은 오로지 사업(思業)으로, 탐 등은 그 자체 업이 아니지만 사업의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의지에 구체적인 방향을 부여하는 소의처(依處) 혹은 길[道]이 된다는 점에서 ‘업의 도’, 즉 업도(業道)일 뿐이다.(본론 제42권 참조)
89)
옷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지만, 즐거움의 자량(자재와 양식, 즉 근거)이 되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 불리며, 제론(諸論)은 그 자체 무루 정혜(淨慧)를 본질로 하는 아비달마가 아니지만 그것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하였다.(본론 제1권 참조)
90)
7루란 견루(見漏, 견도에서 끊어지는 사견)ㆍ수루(修漏, 수도에서 끊어지는 탐진치 등)ㆍ근루(根漏, 5근에서 비롯된 번뇌)ㆍ악루(惡漏, 악행에서 비롯된 번뇌)ㆍ친근루(親近漏, 좋은 의복이나 음식 등을 가까이함으로써 생겨나는 번뇌)ㆍ수루(受漏, 고ㆍ락ㆍ불고불락수에서 비롯되는 번뇌)ㆍ염루(念漏, 邪念에서 비롯된 번뇌)이다.
91)
모든 불선업(흑업)과 색계의 선업(백업)과 욕계의 선업(흑백업, 욕계의 선업에는 악이 섞여 있기 때문에 흑백임)을 영원히 끊고 다한 무루업을 ‘비흑ㆍ비백업’이라 한다. 이러한 무루업을 ‘비백’이라 하는 까닭은 백(白)의 이숙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일체의 업은 이러한 무루업과 함께하는 사업에 의해 끊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1권에서 상론한다.
92)
5온은 색계 선정(4정려)의 본질이며, 색을 제외한 4온은 무색계 선정(4무색정)의 본질이다.
93)
만약 ‘수’가 온에 포섭(즉 수온)되기 때문에 업(즉 행)이라고 해야 하는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법을 다른 명칭으로 일컬을 수 있다는 사실―이를테면 탐ㆍ진ㆍ치는 업이 아니지만 업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의업이라 한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바로 자신의 또 다른 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된다는 뜻.
94)
행온이 다수의 법이라면 어떤 까닭에서 ‘사(思)’ 한 가지만 설하였을 것인가? 그러므로 작의 등 ‘사’ 이외 법은 ‘사’가 변화하여 차별된 양태일 뿐이라는 뜻.
95)
행온은 사(思)이기도 하지만 득(得)도 포함되는 등 상호 포섭 관계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
96)
법처란 그 밖의 다른 11처(안처 내지 의처, 색처 내지 촉처) 이외의 모든 법을, 법계란 그 밖의 다른 17계(안계 내지 의계, 색계 내지 촉계, 안식계 내지 의식계) 이외 모든 법을 포함한다.
97)
‘사’ 즉 행온을 최후에 설하지 않은 이유, 다시 말해 5온을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순서로 설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에서 상론한다.
98)
상응(saṃprayukta)이란 다수의 존재(특히 마음과 온갖 의식 작용)가 서로 관계하고 계합(契合)한다는 말로서, 만약 일체의 의식 작용이 ‘사’의 차별이라면 결국 상응이라는 개념이 부정되고 만다. 참고로 경량부에서는 제법의 동시 구기(俱起)가 전제가 되는 상응설을 부정하고 이시(異時) 계기설(繼起說)을 주장한다.
99)
5탁법이란, 세간이 허물어지는 시기[壞劫]에 나타나는 다섯 현상으로, 기근 질병 전쟁이 횡행하는 겁탁(劫濁)ㆍ사견이 횡행하는 견탁(見濁)ㆍ번뇌가 치성하는 번뇌탁(煩惱濁)ㆍ악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생탁(衆生濁)ㆍ수명이 점차 감소하는 명탁(命濁)이다.
100)
만약 ‘수’, ‘상’ 등의 의식 작용이 모두 ‘사’라고 하는 일법(一法)의 차별이라면, 그러한 일법에 의해 즐거운 느낌[樂受, 이는 ‘수’의 작용임], ‘작다’는 관념(이는 ‘상’의 작용임) 등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지만, 이치상 하나의 존재에 다수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뜻.
101)
이상의 무루 5온 중 마지막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제외한 앞의 4온. 유학은 견도에 이르렀으나 아직 번뇌를 모두 끊지 못한 성자, 무학은 일체의 번뇌를 모두 끊은 아라한과의 성자를 말한다.
102)
앞서 상좌가 예증으로 제시한 계경, 즉 ‘신(身)ㆍ어(語)ㆍ의(意)의 묘행(妙行)과 정견(正見)을 닦고…….’ 다시 말해 정견과 사견은 의묘행과 의악행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설한 것처럼 사(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예증과 여기서 신(信) 등은 ‘사’를 자성으로 삼지만, ‘사’는 ‘신’ 등과 전체적으로 구별하여 설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사성이 없다는 뜻.
103)
이러한 ‘수’ 등의 심리 작용[심소법]에 대해서는 본론 제10권 이하에서 상론한다.
104)
여기서 설행이란, 신(身)ㆍ어(語)ㆍ의(意) 3행 중 어행(語行)을 말한다. 즉 ‘심’과 ‘사’는 뭔가를 추구[尋求ㆍ伺察]하려는 의식 작용으로, 말의 원인이 된다. ‘심’, ‘사’가 어행이라는 주장은 『대비바사론』 제25권(한글대장경118, p.557);『구사론』 제4권(앞의 책, p.186)에 나온다.
105)
계경에서 “6사신(思身)을 설하여 행온이라 한다”고 설한 것은 절대적 언명[了義說]이 아니라 ‘사(思)가 그 밖의 다른 행법에 비해 수승하기 때문이다’는 조건이 전제된 밀어(密語), 즉 불요의설(不了義說)이라는 뜻.
제3권
1)
안식(眼識)은 색을, 내지 의식(意識)은 법(비감각적 대상)을 요별(了別)하는 것으로서, 어떤 한 대상의 상을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은 대상에 따라 그것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단순히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으로 규정될 뿐 지극히 무내용적인 것으로서(『구사론』 제30권,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1380 참조), 대상의 형상을 지각하고 판단ㆍ확인하는 등의 개별적인 작용은 심소(心所)의 역할이다.
2)
안식(眼識)은 색채[顯色]와 형태[形色]를 대상[所緣]으로 하여 일어나는 감성적 인식[自性分別]으로, 불확정적 인식이기 때문에 판단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푸른색 등의 판단은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오성적 인식[計度分別]인 제6 의식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주 1)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에 든다’거나 ‘남성이다’고 하는 판단 등은 수(受)나 상(想)ㆍ혜(慧) 등 심소의 작용이다. 『현종론』 제2권에서는 “식은 오로지 대상의 상(相)을 능히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이지, 그 같은 대상의 상을 차별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
3)
이는 식(識)을 요별하는 것이라고 할 때, ‘누가 요별하는 것인가?’ 하는 인식 주체에 관한 논설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체(pudgala)를 부정하는 불교에 있어 식을 떠나 ‘요별하는 자’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불이 탄다’고 할 때, 타는 작용을 일시 ‘불’이라 가설할 뿐 작용을 떠난 실체로서의 불(즉 타지 않는 불)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식의 요별 작용에 대해 일시 작자(즉 요별하는 자)를 가설할 수 있다는 뜻.
4)
『잡아함경』 제15권 제372경.
5)
식(識), 즉 마음 자체는 단일하지만, 그것이 발동하게 되는 근거인 안근 내지 의근에 따라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으로 나뉜다.
6)
의계(意界, 즉 의근)란 과거로 낙사(落謝)한 전찰나의 6식을 말하는 것으로, 후찰나의 식을 낳는 근거[所依]가 된다. 이를테면 찰나찰나의 흐름인 어떤 한 지점의 강물은 거기에 이르는 순간 밑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위의 강물을 끌어내리듯이 식(識)이 현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찰나의 식이 과거로 낙사함과 동시에 미래의 식을 인기(引起)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개도의(開導依)라고 한다. 그리고 현행식은 소의에 따른 6식의 차별이 있지만, 과거로 낙사한 식은 개도의로서의 작용만을 갖기 때문에 다시 6계(界)로 나누지 않고 1계(즉 의계)로 삼은 것이다.
7)
6식계와 의계는 별체(別體)가 아니기 때문에 6식을 계로 설정하면 의계는 무용하여 17계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의계를 설정하면 6식계는 무용하여 12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
8)
여기서 ‘개피’란 후 찰나의 의식을 인기(引起)하기 위해 전 찰나의 식이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길을 열어 주는 것을 말한다.
9)
즉 일체법(5온과 무위, 즉 5位) 가운데 색법(5근ㆍ5경ㆍ무표색)은 색온에, 심법(6식과 의근)은 의처에, 그 밖의 심소법과 불상응행법과 무위법은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에 일체법은 하나의 온ㆍ처ㆍ계, 즉 색온ㆍ의처ㆍ법계에 모두 포섭될 수 있는 것이다.
10)
이는 ‘포섭’이라는 말의 의미에 관한 이설이다. 즉 제법의 상호 포섭 관계에 있어 유부의 경우, 이를테면 안근은 그것과 동류의 존재[同性]인 색온과 안처와 안계 등에 포섭되듯이 동일한 자성을 지닌 법만을 포섭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다른 부파에서는 서로 다른 법[他性] 사이에만 포섭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8지성도(즉 8正道) 중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은 계온(戒蘊)에, 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은 정온(定蘊)에,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는 혜온(慧蘊)에 포섭된다고 설한 계경이 그 예증이라는 것이다.
11)
‘상응’이라는 말은 심ㆍ심소에 한정된 말로서, 유부에 의하는 한마음은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심소와 함께 생겨나는데, 양자는 다섯 가지 점에서 평등하게 관계하며(이를 5義平等이라 함), 이 같은 양자의 관계를 ‘상응’이라고 한다. 예컨대 어떤 순간에 안근과 항아리를 근거로 하여 항아리의 형상을 띤 하나의 마음이 생겨났다면, 동일한 순간 동일한 감관과 대상을 근거로 하여 동일한 형상을 띤 하나의 지각, 하나의 표상, 하나의 판단 등이 반드시 함께 생겨난다. 즉 심과 심소는 동일한 근거[所依], 동일한 대상[所緣], 동일한 형상[行相]을 지니고서 동일한 시간[時]에 생겨나며, 또한 마음이 한 찰나에 하나의 존재[一事]만 생겨나듯이 마음의 작용 역시 각기 하나의 존재만 생겨난다. 그래서 심소법을 심상응행법(心相應行法), 줄여서 상응법이라고도 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1권 ‘심ㆍ심소의 이명’을 참조할 것)
12)
‘신’등의 5근이란, 신(信)ㆍ근(勤)ㆍ념(念)ㆍ정(定)ㆍ혜(慧)의 5무루근을, 4섭사는 4섭법, 즉 보시(布施)ㆍ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사(同事)를 말한다. 『중아함경』 제9권 『평장자경(平長者經)』에서 평장자는 이러한 4섭사로써 자신의 무리들을 포섭하고 무리들은 이에 따라 우리가 섭수(攝受)되었다고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여기서 ‘포섭’이라는 말은, 동일한 자성을 포섭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방편(혜근는 다른 4근의 뛰어난 방편이 됨) 유인이라는 세속적 의미이다.(『대비바사론』 제59권, 대정장27, p.306하 참조)
13)
유부의 법상에 의하면, 제 번뇌는 견고(見苦)ㆍ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에 의해 끊어지는 네 가지 견소단(見所斷)의 번뇌와 반복된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수소단(修所斷)의 번뇌가 있다. 이를 5부(部)라고 하는데, 만약 어떤 법이 다른 존재를 포섭한다면 결국 일체의 법을 포섭하는 것이 되고, 그럴 경우 하나의 번뇌가 생겨나면 그에 포섭되는 일체의 번뇌가 함께 생겨나게 될 것이고, 하나의 번뇌가 끊어지면 그에 포섭되는 일체의 번뇌가 함께 끊어지게 되어 다른 4부의 수행도를 닦을 필요도 없게 되고 만다.
14)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은 22근의 하나로, 신근(身根)에 포섭되지만 성에 대한 증상력에 따라 별도로 설정하게 되었다. 22근에 대한 온갖 분별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를 참조할 것.
15)
22근 중 낙(樂)ㆍ고(苦)ㆍ희(喜)ㆍ우(憂)ㆍ사(捨)의 5수근(受根)과 신(信)ㆍ근(勤)ㆍ념(念)ㆍ정(定)ㆍ혜(慧)의 5근, 그리고 명근(命根)은 다 같이 법계ㆍ법처에 포섭되지만 증상력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별도로 설정하였다는 뜻. 22근의 증상력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를 참조할 것.
16)
이는 3과(科)의 포섭 관계에 부수하는 문제로서, 18계 중 안(眼)ㆍ이(耳)ㆍ비계(鼻界)는 각기 두 개가 있으므로 18계가 아니라 21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17)
처(處,āyatana)란 어원적으로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을 낳는 통로(āya), 즉 문(門, āya-dvara)’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뜻. 즉 안처와 색처 등을 통해 안식 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18)
앞서 언급한 대로 의계, 즉 의근은 6식이 과거로 낙사한 의식으로 6식과는 다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별도의 ‘계’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 유부에 의하면, 전찰나의 의근은 현행하는 의식, 즉 6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6식과 의근은 능의(能依)와 소의(所依)로서의 차별이 있다.
19)
온ㆍ처ㆍ계 3법에 대해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실유라고 주장하지만, 경량부에서는 오로지 ‘계’만을, 세친은 ‘처’와 ‘계’를 실유라고 하였다.(『구사론기』 권1末, 대정장41, p.29상;『구사론소』 제1권 餘, 대정장41, p.489상 참조) 즉 유부에서는 가(假) 극미가 적취하여 하나의 실(實) 극미가 될 때 비로소 극미로서의 자상을 갖기 때문에 적취의 뜻인 온(‘一實極微名爲蘊’) 역시 실유라고 주장하였으나, 세친은 온은 어디까지나 적취물이기 때문에 가유(假有)일 뿐이라고 하였다.(『구사론』 제1권, 앞의 책, p.39) 이를테면 온갖 부품의 결합체인 차(車)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언어적 가설적 존재라는 것이다. 아울러 경량부에서는 ‘만약 온이 가유라면 유색처(有色處)도 역시 가유임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안 등의 극미는 다수가 모여야 비로소 의식을 낳는 문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대한 上座의 설과 중현의 비판에 대해서는 본론 제4권을 참조 바람)
20)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다’고 함은 적취가 바로 온이 아니라 적취의 근거를 ‘온’이라 한다는 뜻. 이를테면 온갖 부품의 적취인 차(車)가 온이라는 것이 아니라 차의 근거인 온갖 부품을 온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온은 가유가 아니라 실유이다.
21)
유부에서는 물질[色]의 최소단위인 극미를 단일한 극미[事極微]와 복합의 극미[聚極微]로 나누어, 무방분(無方分)ㆍ무대(無對)인 전자는 오직 관념[覺慧]으로써만 알려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단일한 극미는 적취하여 비로소 자상을 갖는 하나의 실제적 극미[一實極微]가 되므로, 적취(rāśi)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실유의 충족조건이며, 따라서 그것과 같은 뜻인 온 역시 실재한다는 것이다.
22)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39.
23)
이들에게는 심소를 수ㆍ상ㆍ사로 나누어 상설(詳說)한 5온을 설하였다.
24)
이들에게는 색을 5근과 5경으로 나누어 상설한 12처를 설하였다.
25)
이들에게는 색과 심을 10가지와 7가지로 나누어 상설한 18계를 설하였다.
26)
세친은 3과 건립의 이유를 이처럼 중생의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에 근거하여 분별하고 있을 뿐더러 이를 전설(傳說)이라 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지만(『구사론』 제1권, 앞의 책, p.40), 중현은 좀더 자세하게 분별하고 있다.
27)
안 등의 5근은 색 등을 경계로 삼고, 의근은 법을 경계로 삼지만 결국 5근과 의근도 일체법에 포함되므로 이 역시 의근의 경계가 된다는 뜻.
28)
협(Pārśva) 존자는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 왕 시대(2세기)의 유부의 논사로, 500명의 아라한들과 함께 『대비바사론』의 결집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진다.
29)
식주란 의식이 머물게 되는 근거를 말하는 것으로, 의식은 색ㆍ수ㆍ상ㆍ행온에 머물기 때문에 이를 4식주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2권을 참조할 것.
30)
멸정(혹은 滅盡定)이란 멸수상정(滅受想定)의 준말로서, 의식, 즉 ‘수’와 ‘상’이 끊어진 무심정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을 참조할 것.
31)
유루온은 염오법의 소의가 되고, 무루온은 청정법(열반)의 소의가 된다. 즉 ‘온’이라는 말은 유루ㆍ무루 모두에 통하지만, 무위에는 이러한 두 뜻이 없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32)
여기서 어떤 이의 설은 『대비바사론』 제75권(대정장26, p.385중)에 ‘무위를 온으로 설정하지 않는 10가지 이유’ 중 두 번째 설이다.
33)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42). 즉 5온의 종식[滅]이 무위이기 때문에 ‘온’ 중에 무위가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12처ㆍ18계의 종식도 역시 무위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거기에도 역시 무위가 포함되지 않아야 하는 모순이 성립한다는 뜻.
34)
즉 색계 초정려에서는 희수(喜受)와 낙수(樂受)가 생겨나고, 제2정려에서는 희수가, 제3정려에서는 낙수가, 그리고 제4정려에서는 사수(捨受)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7권~78권에서 상론한다.
35)
세 가지 무색계란,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로서, 여기서는 공(空)과 식(識) 등의 상(相)만을 취하기 때문에 상(想)의 상이 가장 수승하다.
36)
‘식’을 최후에 설한 까닭은 그것이 마치 밭에 뿌려지는 종자처럼 색ㆍ수ㆍ상ㆍ행 중에 머물기 때문이다. 4식주에 대해서는 본권 주 28)을 보라.
37)
부정관은 탐욕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소의신의 부정(不淨)한 모습을 관찰하는 관법(觀法)이며, 지식념은 어지러운 마음을 대치하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는(기억하는) 관법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9권~60권에서 상론한다.
38)
제6 의근은 현재ㆍ과거의 대상을, 혹은 3세의 법을, 혹은 3세의 법과 무위법을 동시에 인식하는 경우도 있어 그 대상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장 뒤에 설하였다. 즉 대상이 확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작용에 뒤섞임이 있어 그 특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39)
6근의 순서에 대해 『대비바사론』 제73권(대정장27, pp.380하~381상)에서는 첫째 문사(文詞)의 순서에 따라, 둘째 설자(說者)ㆍ수자(受者)ㆍ지자(持者)의 순서에 따라, 셋째 추세(麤細)한 순서에 따라, 넷째 정(定)과 부정(不定)의 순서에 따라, 다섯째 위치하는 장소의 상하 순서에 따라, 여섯째 유정들이 서로 만나 예의를 갖추게 되는 순서에 따라 설해진 것이라 평석하고 있는데, 선설(善說)의 취사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친은 이 가운데 네 번째 근이 취하는 대상의 정ㆍ부정과 다섯 번째 근의 위치에 의거하여 6근의 순서에 관한 송문을 지었던 것이지만, 중현은 후자를 전설(傳說)에 따른 가설로 이해하였으며, 정ㆍ부정 중에서도 현재의 대상이나 소조색에 따른 순서를 작용의 선후에 따른 순서로 해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6근의 순서는 결정적 사실이 아니다.
40)
즉 앞서 언급한 ‘멀리 있는 숲에 바람이 몰아치면 그것이 요동하는 것은 바로 볼 수 있어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예증.
41)
공계의 색은 인아가색(隣阿伽色)이라고도 하는데, 명암을 본질로 하는 한정된 공간을 말한다. 본권 말미에서 상론한다.
42)
능작인(能作因)이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를 낳게 하는(혹은 생기를 방해하지 않는) 원인으로, 그 밖의 다섯 가지 원인도 능히 다른 존재를 낳게 한다는 점에서 능작인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들에게는 각기 개별적인 명칭이 있기 때문에 능작인이라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5권을 참조할 것.
43)
10처를 모두 색법이라 할 경우 그 차별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9처에는 각기 안ㆍ이 내지 성ㆍ향 등의 별명을 설정하고, 안 등의 차별된 명칭이 없을 경우에만 총명(總名)을 그대로 별명으로 삼아 다른 처와 구별하고자 하였다는 뜻.
44)
색처 중에는 열두 가지의 현색과 여덟 가지의 형색 등 스무 종류의 색이 있다.
45)
46가지 심소법, 14가지 불상응행법, 세 가지 무위법, 그리고 무표색 등은 모두 법처에 포섭된다.
46)
8만의 법온 내지 무루온의 ‘온’과 10변처(遍處)ㆍ8승처(勝處)의 ‘처’와 62계 등의 ‘계’가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47)
말[語, vāc]의 본질은 바로 음성으로 색온에 포섭되며, 단어[名, nāma]는 작상(作想), 즉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불상응행법으로 행온에 포섭된다.
48)
부처님 말씀[佛敎]의 본질은 말소리[語言]인가, 의미를 드러내는 언어적 개념, 즉 단어[名] 내지 단어의 집합인 문장[句] 혹은 음소[文, 즉 글자]인가? 『대비바사론』 권126(대정장27, p.659상ㆍ중)에 따르면 말씀 자체[體]를 드러내는 것은 말소리이며, 단어의 의미는 말씀의 작용[用]이다. 이러한 말소리와 언어적 개념(즉 名ㆍ句ㆍ文)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에서 상론한다.
49)
12연기(緣起)에 대해서는 본론 제25권 이하에서, 4제(諦)에 대해서는 제62권에서, 4식(食)에 대해서는 제30권에서, 4정려(靜慮)와 4무색정(無色定)에 대해서는 제77권에서, 4무량(無量)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ㆍ10변처(遍處)에 대해서는 제79권~80권에서, 37각분(覺分), 즉 보리분법에 대해서는 제71권에서, 6신통(神通)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ㆍ4무애해(無礙解)는 지혜에 의해 획득되는 공덕으로 제75권~76권에서 상론한다.
50)
즉 이러한 ‘참다운 설’은 앞서 논설한 온(蘊)ㆍ처(處) 내지 무애해 등의 말에 따라 법온의 양을 안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밝힌 것이라는 뜻.
51)
앞서 부처님의 말씀이 말소리[語]를 본질로 한다고 할 경우 그가 설한 8만의 법온은 색온에 포섭되고, 언어적 개념, 즉 단어[名]를 본질로 한다고 할 경우 행온에 포섭된다고 논설하였다.
52)
즉 ‘계’ 등의 5온은 무루온으로, 이때 계온의 본질은 무루성도와 함께하는 무표색[道共戒]이기 때문에 색온에 포섭되는 것이며, 그 밖의 4온은 순서대로 각기 정(定, 즉 三摩地)ㆍ혜(慧)ㆍ승해(勝解)ㆍ혜의 심소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행온에 포섭된다.
53)
10변처는 지ㆍ수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ㆍ공(空)ㆍ식(識)이 일체 처(處)에 두루한다고 관찰하는 것. 8승처란 온갖 색에 대해 뛰어나게 알고 뛰어나게 관찰[勝知勝見]하는 것으로, (1) 내적으로 색의 상(想)이 있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 (2) 내적으로 색의 상이 있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 (3)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 (4)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 (5)~(8)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청ㆍ황ㆍ적ㆍ백을 관찰하는 것.(본론 제80권 참조) 이 중 앞의 8변처와 8승처는 탐을 대치하기 때문에 무탐을 자성으로 한다.
54)
여기서 4무색처는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즉 이 같은 4무색처와 10변처 중의 공무변처와 식무변처는 색을 제외한 4무색온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수ㆍ상의 심소와 불상응의 행온은 법처(法處)에 포섭되고, 식온은 의처(意處)에 포섭되는 것이다.
55)
5해탈처란, 부처 등의 설법을 듣는 것, 스스로 독송하는 것, 남을 위해 설법하는 것, 정려사유하는 것, 선한 정상(定相)을 취하는 것. 즉 이 5가지에 의해 해탈, 즉 열반을 획득하기 때문에 해탈처라고 말한다.
56)
무상유정천처(無上有情天處, asaṃjñisattva-devāyatana)는 무상천(無常天)ㆍ소광천(少廣天)ㆍ복덕천(福德天)이라고도 하는데, 색계 제4정려천 중 광과천(廣果天)의 일부이다. 무상정을 닦아 도달하는 경지. 본론 제12권 ‘무상과’를 참조할 것. 그리고 비상비비상처는 무색계의 제4처로 그 이전의 7정(定)과 같이 거친 상[麤想]이 아니기 때문에 ‘비상’이며, 그렇다고 무심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비비상’이다. 본론 제77권의 ‘4무색정’을 참조할 것.
57)
『다계경』은 『중아함경』 제47권에 나온다. 『구사론기』 제1권(대정장41, p.33하)에 의하면, 3종의 6계(地ㆍ水ㆍ火ㆍ風ㆍ空ㆍ識의 6계, 苦ㆍ樂ㆍ喜ㆍ憂ㆍ捨ㆍ無明의 6계, 欲ㆍ恚ㆍ害ㆍ無欲ㆍ無恚ㆍ無害의 6계), 1종의 4계(受ㆍ想ㆍ行ㆍ識), 6종의 3계(欲ㆍ色ㆍ無色의 3계, 色ㆍ無色ㆍ滅의 3계,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계, 선ㆍ불선ㆍ무기의 3계, 劣ㆍ處中ㆍ妙의 3계, 學ㆍ無學ㆍ非學非無學의 3계, 양종의 2계(유루ㆍ무루계, 유위ㆍ무위계), 그리고 18계를 말한다.
58)
여기서 ‘전설’은 구사논주(俱舍論主) 세친의 불신을 나타낸다.(후설) 즉 세친과 경량부에서는 명암을 본질로 삼는 규극(竅隙), 즉 공계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공계는 허공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허공 자체도 실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허공이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을 일시 설정한 개념일 뿐이다.(본론 제17권 참조) 그러나 유부법상에 의하는 한 명암은 12현색 중의 하나로 실유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질로 하는 공계 또한 실유의 법으로서 색법에 포섭된다.
59)
여기서 ‘허공계’란 6계 중의 공계(명암을 본질로 하는 유위법)를 말하며, ‘허공’은 허공무위를 말한다. 즉 상좌 스리라타를 비롯한 경량부에서는 다만 공간적 점유성[礙性]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일시 허공이라 이름할 뿐 실체로서의 허공을 부정하기 때문에, 공계는 허공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논의를 ‘전설’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허공을 비롯한 무위3법의 가실(假實) 문제에 대해 본론 제17권에서 다시 논쟁한다.
60)
허공무위는 절대공간으로서 무한하지만, 허공계(즉 공계)는 명암에 의해 드러나는 한정된 공간으로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며, 예컨대 방안에 사람들이 꽉 차면 공간의 부피는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이다.
61)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ㆍ식(識)의 6계(界)는 다 같이 유정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실유이다. 지계가 실유이면 공계 역시 실유라는 뜻.
62)
색에는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이 있고, 현색에는 다시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연기[煙]ㆍ구름[雲]ㆍ먼지[塵]ㆍ안개[霧]ㆍ그림자[影]ㆍ빛[光]ㆍ밝음[明]ㆍ어두움[闇]의 열두 가지가 있다.(본론 제1권 참조) 즉 티끌(원문에서는 ‘垢’)을 갖거나 갖지 않는 것은 색이기 때문에 이 게송은 바로 공계가 바로 색임을 증명하는 경증이 된다는 것이다.
63)
번뇌와 업 등의 유루법이 유정의 생을 낳고[生] 기르고[養] 수용하는 것[長]임에 반해 무루법은 그것을 끊고[斷] 해치고[害] 허물어뜨리는[壞] 작용을 갖기 때문에 생의 의지처가 아니며, 그래서 무루의 식(識)을 식계(識界)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64)
즉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ㆍ식(識)의 6계 가운데 앞의 4계는 18계 가운데 촉계에 포섭되고, 다섯 번째 공계는 색계에 포섭되며, 여섯 번째 식계는 7심계(心界), 즉 의계와 6식계에 포섭된다.
제4권
1)
여기서부터 제8권에 걸쳐 18계법을 유견ㆍ무견, 선ㆍ불선 등의 스무 가지 관점에서 분별하고 있다. 온ㆍ처ㆍ계 의 3과(科) 가운데 18계에 대해서만 분별하는 것은 여기에 근(根)ㆍ경(境)ㆍ식(識)이 모두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18계에 포섭되는 일체의 만법(萬法)을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여 그것의 내포(內包) 외연(外延)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논의 방식을 이른바 제법분별(諸法分別)이라고 한다.
2)
경계유대(viṣaya-pratighāta)란 인식 기능과 그 대상 사이의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즉 자신의 대상을 갖는 6근ㆍ6식의 12계와 법계 일부인 심소법(이를 有境法이라 함)은 경계 대상에 의해 그 생기가 제약되기 때문에 ‘유대(장애성을 갖는 것)’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경계 대상이 부재하는 경우 장애되어 생겨나지 않는다.(후술)
3)
이를테면 물고기의 눈이 그러하다. 물고기의 눈은 다만 물에서만 경계 대상과 만나 작용하기 때문에 뭍에서는 대상에 의해 장애되는 일이 없다.
4)
소연유대(ālambana-pratighāta)란, 말하자면 심ㆍ심소와 대상(즉 소연)간의 필연적 제약 관계로서, 자신의 소연이 부재하면 장애되어 생기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랑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면 ‘사랑의 마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5)
5근과 심ㆍ심소는 경계에 의해 그 생기가 제약되지만(경계유대), 경계는 또한 심ㆍ심소에 대해 소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경계유대의 외연이 소연유대보다 넓다.
6)
장애유대(āvaraṇa-pratighāta)란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지니는 색법(즉 안과 색 등의 10계)의 상호 제약적 관계를 말한다.
7)
즉 선ㆍ불선심의 힘에 의해 일어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색(色)과 성(聲)의 선ㆍ불선이라고 한다. 신업과 어업의 본질은 각기 신체적 형태와 말소리이기 때문이다.
8)
법계에는 무표색과 46가지 심소, 14가지 불상응법, 세 가지 무위 등 총 64가지의 법이 포섭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선의 경우, 그 자체가 선인 자성선(自性善, 곧 無貪ㆍ無瞋ㆍ無癡ㆍ慚ㆍ愧)과, 자성선과 상응하는 제 심소의 선[相應善]과, 자성선과 함께 일어나는 불상응행의 선[等起善]과, 그리고 궁극의 선인 무위택멸의 승의선(勝義善)이 있다. 본론 제36권 참조.
9)
이에 대해서는 본권 주) 34를 참조할 것.
10)
5식신은 뭔가를 추구하려는 의식 작용인 심(尋)과 사(伺)와 상응하는 감성적 인식(자성분별)이기 때문에 사실상 무분별은 아니지만, 마치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말을 일컬어 다리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처럼 완전한(확정적) 인식이 아니기 때문에 무분별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후술)
11)
이숙생이란, 전생의 선악업에 의해 낳아지는 과보로서 무기성이다. 이숙과가 만약 선ㆍ악의 유기성이라면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또 다른 결과를 낳아야 하며, 그럴 경우 결정론에 떨어지게 된다.
12)
6애신이란 안촉에 의해 생겨난 애신(眼觸所生愛身) 내지 의촉에 의해 생겨난 애신(意觸所生愛身)으로, 안 등의 6근이 각각의 경계대상에 대해 탐착하고 애락(愛樂)함을 말하는데, 만약 앞의 4식신이 무기성이라면 이 같은 경설에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다.
13)
「육육경」은 『잡아함경』 제13권 제304경. 여기서 육육이란 6근(根)ㆍ6경(境)ㆍ6식(識)ㆍ6촉(觸)ㆍ6수(受)ㆍ6애(愛)를 말한다. 혹은 다른 곳에서는 6근ㆍ6경ㆍ6식ㆍ6수(受)ㆍ6상(想)ㆍ6사(思)로 설해지기도 한다.
14)
안촉 및 신촉에 의해 생겨난 앞의 다섯 가지 신수(身受)는 고(苦)ㆍ락(樂)ㆍ사(捨)를 자성으로 삼지만, 의촉에 의해 생겨난 유분별의 심수(心受)는 희(喜)ㆍ우(憂)ㆍ사(捨)를 자성으로 삼는데, 이 세 가지는 의식의 직접적인 조건[近緣 혹은 親緣]이 되어 의식으로 하여금 그 대상으로 빈번히 유행(遊行)하게 하기 때문에 의근행(意近行)이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각기 6경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여기에 18가지가 있는 것이다.
15)
5식신의 무분별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18계법의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에 관해 분별하면서 상론한다.
16)
여기서 계(繫, saṃyukta)란 계속(繫屬)의 뜻으로, 욕계계라고 하면 그것은 욕계의 번뇌에 계박되어 욕계에 소속되어 머무르게 되는 법을 말한다.
17)
단식(段食, 혹은 搏食)은 4식(食)의 하나. ‘단’은 분단(分段)의 뜻. 즉 분활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로서, 향ㆍ미ㆍ촉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이것은 욕계에만 존재하는데, 초정려 근분(近分)의 미지정(未至定)에 의해 욕계의 번뇌를 단진(斷盡)할 때 이를 떠나게 된다. 본론 제30권을 참조할 것.
18)
즉 색계에서는 단식(斷食)으로서의 촉(觸)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대종과 소조색, 즉 5근과 의복 따위는 존재하기 때문에 촉은 색계계(色界繫)이다.
19)
선정 중에서 색계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 소의신에 경쾌 안적한 느낌[輕安觸]이 생겨나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날 때에도 이 세 가지는 서로를 쫓아[隨逐] 존재하지만, 향ㆍ미는 선정 중에 부재하기 때문에 색계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보광(普光)에 의하면 여기서 유여사는 바사가(婆沙家), 혹은 경부(經部)의 실리라다(室利邏多, Śrīlāta).
20)
『구사론』 제2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60.
21)
여기서 ‘의처’는 부진근(扶塵根)으로, 색ㆍ향ㆍ미ㆍ촉으로 이루어진 육단(肉團), 즉 눈에 보이는 코와 혀를 말한다. 즉 그것이 다만 언설을 일으키고 소의신을 장엄하는 것일 뿐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는 등의 본질적인 기능을 갖지 않는 것이라면 부진근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 원문에서는 ‘근이 견(見)을 갖지 않는데(根非有見)’이지만 문맥상 ‘견’을 ‘용(用)’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참고로 『구사론』에서는 ‘이러한 두 근(根)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로 되어 있다.
22)
여기서 두 근의 ‘근’은 공능 그 자체를 뜻하는 승의근(勝義根)을 말한다. 즉 부진근(승의근의 依處)은 승의근을 돕는[扶]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의근이 없다면 그것을 돕는 부진근도 역시 없어야 한다는 뜻.
23)
남근은 누추하여 소의신을 장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4)
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 탯집에서 죽어야 할 아이는 비록 근이 소용없을지라도 6근이 생겨난다.
25)
여기서 수승한 업이란 5근 등을 획득하려고 하는 사업(思業)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은 반드시 원인을 갖기 때문이다.
26)
즉 색계의 유정은 경계에 대한 애탐[貪]을 떠났으므로 근에 대한 애착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근을 생겨나게 할 만한 원인이 없으므로 마땅히 비근과 설근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
27)
유부 비바사사는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애탐(자발적 능동적 애탐)과 외적 경계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애탐(수동적 애탐)을 구별하여, 6근에 대한 애탐은 내적 소의신에 의해 일어난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생기의 원인으로 외적 경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남근의 애탐은 외적 경계에 의해 유발된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외경(外境, 즉 음촉의 경계)이 없는 색계에는 남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28)
즉 의계와 의식계 가운데 도제(道諦)에 포섭되는 것이 무루이고, 그 밖의 것은 유루이며, 법계 가운데 도제와 3무위는 무루이고 그 밖의 것은 유루이다.
29)
여기서 심(尋, vitarka)과 사(伺, vicāra)라고 하는 것은, 마음, 즉 전5식과 제6식으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대상을 추구[尋求ㆍ伺察]하게 하는 보다 거칠고[麤性] 세밀한[細性] 의식 작용으로(본론 제10권 참조), 욕계와 색계 초정려에는 심ㆍ사의 작용이 있지만 중간정에서는 ‘사’만이, 색계 제2정려 이상부터는 심ㆍ사가 없다.
30)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63.
31)
법계 비상응법이란 열네 가지 불상응행법과 3무위 및 무표를 말하는데, 이러한 것에는 물론 심작용이 없기 때문에 무심무사이며, 중간정에 존재하는 사(伺)는 ‘심’을 수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사’이므로 또 다른 ‘사’를 수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 역시 무심무사이다.
32)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64.
33)
즉 심ㆍ사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상응법은 유심유사(有尋有伺)이며, ‘심’은 무심유사(無尋唯伺)이며, 일체의 비상응법은 무심무사(無尋無伺)이며, ‘사’는 무사유심(無伺唯尋)이다.
34)
전5식을 보통 무분별(無分別, avikalpika,)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이 유심유사로서 심ㆍ사의 심소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그것을 유분별(有分別)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5식상응의 ‘심’은 바로 분별(사유 작용)이기 때문에 5식을 무분별(불확정적인 사유)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하는 난문.
35)
여기서 5식은 심(尋)ㆍ사(伺)를 본질로 하는 자성분별(즉 감성적 지각)일 뿐이고, 그것은 혜(慧)를 본질로 하는 계탁분별(즉 추리 판단의 오성적 지각)과 제6식 상응의 염(念)을 본질로 하는 수념분별(즉 기억이나 재인식)에 의해 확실한 사유[有分別, savikalpa]가 된다.
36)
의지(意地, mano-bhūmi). 여기서 ‘지’는 소의(所依)의 뜻이므로 ‘의지’란 의(意)로서 소의가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뜻은 ‘제6 의근을 소의로 삼아 상응하는’의 뜻.
37)
즉 이미 인식된 대상에 대해서는 간택(판단)이 종료되었기 때문에 간택을 위한 표상 작용[想]은 필요하지 않으며, 아직 인식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선악 등을 인가 결정하는 작용인 승해(勝解)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별이라는 말은 인식된 것이든 인식되지 않은 것이든 추구(推求, 즉 尋)와 간택(簡擇, 즉 慧), 명기(明記, 즉 念)와 통할 뿐이기 때문에 분별에는 세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38)
초정려의 선정에서는 자성분별과 수념분별이 일어나고, 산심일 때는 계탁분별과 수념분별이 일어난다.
39)
곧 상지의 선정 중에서는 수념분별이 일어나고, 5식신은 오로지 자성분별일 뿐이다.
40)
이는 『구사론』(앞의 책, p.66)에서 유소연을 능히 ‘경계[境]를 취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에 대한 이론(異論)으로, 이 세 가지는 다 같이 대상이라는 뜻이지만 개념상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소연은 심ㆍ심소가 생기하는 조건으로서의 대상이며, 소행(所行)은 바로 그러한 심ㆍ심소가 작용하는 근거로서의 대상을, 경계는 바로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 능히 경계를 취하는 것이 유소연이라면 여기에는 5근도 포함되어야 한다.
41)
화합이란 전체성, 예컨대 다수의 부품에 대한 ‘자동차’, 혹은 제법에 대한 ‘자아’와 같은 개념적 존재[假說, 또는 世俗有]를 말하는 것으로(『현종론』 제3권에 의하면 ‘화합이란 다수의 법[多法]에 대해 일으키는 단일한 언어적 관념[增語]을 말한다.’), 오성적 판단[計度分別], 즉 제6 의식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전5식을 일으키는 대상(즉 소연)은 ‘극미의 화합’이 아니라 다만 ‘집합[和集]된 극미’이다. 나아가 단일한 극미는 인식되지 않으며, 그것이 집합될 때 비로소 감각적 대상이 되기 때문에 ‘화집’은 바로 실유의 조건이 된다.
42)
청색이 다수의 극미의 화합이라면 그것은 안식에 의해 인식되지도 않을 뿐더러 실유도 아니다.(후술) 유부에 의하는 한 청색 등의 ‘색’은 4대종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소조색의 하나로서 단일한 실체이다.
43)
여기서 승의유란 자상을 갖는 궁극적 존재인 법을, 세속유란 그 같은 제법의 인연 화합에 의해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를 말하는데, 이에 대한 진리를 각기 승의제와 세속제라고 한다.(본론 제58권 참조)
44)
극미(paramāṇu)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색법)의 최소단위로서, 그것은 통상 하나의 극미는 사방 상하의 여섯 개의 극미에 둘러싸여(이를 微聚라 한다) 현상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극미 자체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피[礙性]라는 색의 특성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색이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리 많은 극미가 취합하여도 역시 부피를 갖지 않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중현은 극미를 실제적[實] 극미와 가설적[假] 극미라는 이중의 구조로 해석하여, 전자는 감각[5識]으로 인식되는 물질의 극소, 후자는 관념[覺慧, buddhi]적으로 더욱 분할되어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물질의 극소라고 하였다. 즉 연장을 갖는 색법[可析法]은 분석되어 궁극에 이르게 되면 세간에서 현견될 수 있는 취색(聚色)이 되며, 그것이 다른 어떤 취색에 의해 다시 쪼개어질 경우 미세한 취색[細聚]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세한 취색은 더 이상 현견할 수 있는 것으로는 쪼개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관념으로써 다시 분석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극소의 극미는 이미 최극소의 시간으로 설정된 찰나처럼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관념적 소산[覺慧所知]이기 때문에 또 다른 관념으로 분석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가설적 극미이다. 이것은 결정코 존재하는 것으로, 이것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구체적인 색, 즉 취색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본론 제10권과 32에서 상론함)
45)
앞서 상좌가 극미 소성(所成)인 5식의 소의 소연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논거로 인용한 경설. 즉 “부처님께서 다문(多聞)의 여러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고하기를, ‘그대들은 이제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할 것이니, 온갖 존재로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안식에 의해 인식된 색, 여기에는 어떠한 상주성(常住性)도 항상성(恒常性)도 없다.……[이것이야말로] 전도됨이 없는 출세간의 성스러운 진리이니, 이것들은 모두 허위로서 허망하게 사라질 법이다.”
46)
상좌 및 경량부에서는 온ㆍ처ㆍ계 3과 중 ‘계’의 실재성만을 인정하였다.
47)
상좌를 비롯한 비유자 혹은 경량부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삼세실유설에 대한 유부의 입장과 경량부의 비판 및 중현의 재비판에 대한 것은 본론 제50권~52권에 걸쳐 상론된다.
48)
안식 등에 의해 인식된 색 등이 바로 거짓된 것으로서 허망하게 사라지는 법이 아니라 그러한 색을 영원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거짓된 것이라는 뜻이므로 이러한 경설이 5식의 소연인 색 등은 가유의 법이라는 사실의 경증이 될 수 없다는 뜻.
49)
이상은 4비성어(非聖語)와 4성어(聖語)의 하나.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衆集經)」.
50)
보여진 것은 ‘오로지’ 색일 뿐 영속성[恒常性] 등이 아니다. 즉 이때 ‘오로지’라는 말은 영속성 등을 부정하는 말이지 색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따라서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속의 관례에 따른 것이 아니다.
51)
만약 ‘처’가 가유(假有)라면 색ㆍ성 등의 차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색ㆍ성 등의 법은 그 자신의 고유한 자상을 갖기 때문에 실유이다.
52)
촉처는 4대종(지ㆍ수ㆍ화ㆍ풍)과 소조색(색ㆍ향ㆍ미ㆍ촉)을 포함한다.
53)
공화론자(śūnyapuṣpa)란 소승의 논사가 대승의 논사를 부르는 말로서, 이는 불타는 다만 스승에 불과하므로 그의 말씀을 쫓아 파당을 짓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54)
‘각각의 극미는 소의와 소연이 되지 않으며, 다수의 극미가 화합할 때 소의와 소연이 된다’는 논의는 상좌 자신의 논의이다. 그래서 상좌는 다수의 극미 화합물인 안 등 5근과 색 등 5경(10有色處)의 실재성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각각의 맹인은 보는 작용이 없으며, 여러 맹인이 모여 있더라도 역시 보는 작용을 갖지 않는다’는 맹인의 비유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55)
‘화집(和集)의 극미가 소의와 소연이 된다’는 것은 유부의 논의이다. 극미는 화집된 상태로서만 나타나며, 안근극미와 형색(혹은 현색)극미는 소조색으로 실재한다. 즉 각각의 극미가 소의와 소연이 되지 않으면, 여러 맹인이 모여 있더라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다수의 극미가 화집하여도 소의ㆍ연이 되지 않겠지만, 이미 극미 자체가 소의ㆍ연이 되기 때문에 다수의 극미가 화집하여도 역시 소의ㆍ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56)
즉 18계 가운데 소연(所緣)을 갖는 것은 7심계와 법계에 포섭되는 심소법인데, 이 중에서 전5식은 오로지 실재하는 대상[實有, 혹은 勝義有]만을 소연으로 삼으며, 그 밖의 의식과 모든 심소법은 실재하는 대상과 개념적 대상[假有, 혹은 世俗有] 모두를 소연으로 삼는다.
57)
과거ㆍ미래의 5근에는 고수(苦受)ㆍ낙수(樂受)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집수이다.
58)
5근과 화합하지 않은 색 등(이를테면 머리카락이나 손톱)은 비록 신체 내부에 존재할지라도 고수(苦受) 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무집수이지만, 5근과 화합한 색 등(이를테면 눈꺼풀이나 목구멍)은 괴로움 등의 느낌을 갖기 때문에 유집수라는 것이다.
59)
유집수(upātta)란, 집수(감각)의 의식 작용을 갖는 대종(大種)과 조색(造色)을 말한다. 즉 안 등의 5근은 심ㆍ심소의 직접적인 의처(依處, 심ㆍ심소의 근거, 즉 소의처)가 되고, 성경(聲境)을 제외한 색 등의 4경은 근의 대상으로서 간접적인 의처가 되어 심ㆍ심소와 더불어 손해와 이익을 함께하는 것이다.(‘성’을 제외한 이유는, 소리는 유집수나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임) 이를테면 심ㆍ심소가 우고(憂苦)를 일으켜 감손(減損)될 때 의처도 역시 감손되며, 심ㆍ심소가 희락(喜樂)을 일으켜 이익될 때 의처도 역시 이익된다. 반대로 의처가 만약 좋은 음식 등을 획득하여 이익될 때 심 등도 역시 이익되는 것이며, 나쁜 음식 등을 획득하여 감손되면 심 등도 역시 감손된다.
60)
예컨대 눈꺼풀은 소의[根]는 아닐지라도 근(즉 안근)을 떠나지 않으며, 마음 등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집수이다.
61)
본론 제1권 ‘5경’ 중 촉처 참조. 즉 촉(觸)에는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을 자상(自相)으로 하는 4대종과, 미끄러운 성질[滑性]ㆍ껄끄러운 성질[澁性]ㆍ무거운 성질[重性]ㆍ가벼운 성질[輕性]ㆍ차가움[冷]ㆍ허기짐[飢]ㆍ목마름[渴] 등 일곱 가지 소조촉이 있다.
62)
촉처는 오로지 대종성이라고 하는 상좌의 주장은 『구사론』에서는 존자(尊者) 각천(覺天, Buddhadeva)의 설로 주장되고 있다. 각천은 바사(婆娑)의 4대 평가(評家) 중의 일인으로, 그는 ‘열 가지 색처는 오로지 대종성이다’고 주장하였다.(제2권,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68) 그에 의하면, 열 가지 유색처는 4대종의 안포차별(安布差別)로서, 4대종을 떠나 별도의 실체(소조색)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대비바사론』 제127권, 대정장27, p.661하)
63)
『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 이하 내용으로 볼 때 상좌는 이 경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중현은 경설의 의미를 분석하여 이 경이 다른 경에 위배되지 않는 것임을 논증하고 있다.
64)
여기서 두 종류의 공경이란, 『중아함경』 제49권의 「소공경(小空經)」과 「대공경(大空經)」을 말하는 것인가?
65)
앞서 언급한 『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에서는 법처에 대해 “법외입처(法外入處)란 11입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서, 불가견(不可見) 무대(無對)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66)
『장아함경』 제9권 「십상경(十上經)」. 후술하듯이 무표색도 법처에 포섭되는 색으로, 이 역시 소조성이다. 그런데 이 『증십경』에서는 색처로서 10처만을 설하여 법처의 무표색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 반면 앞서 인용한 경에서는 법처를 무색이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이는 바로 무표색을 포함하기 때문임) 두 경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즉 상좌를 비롯한 비유부와 경량부에서는 무표색의 존재를 부정하므로 법처를 무색이라고 설하지 않은 앞서 인용한 경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67)
『증십경』은 1에서부터 10에 이르는 법수(法數)에 따라 상법(上法, 즉 열반에 이르는 법)을 설하고 있다.
68)
『장아함경』 제9권 「십상경(十上經)」에서는 이러한 10색처(여기서는 色入)를 10각법(覺法)으로 부르고 있다.
69)
고제(苦諦)는 마땅히 두루 알아야 하는 것[當知]이며, 집제(集諦)는 마땅히 영원히 끊어야 하는 것[當斷]이며, 멸제(滅諦)는 마땅히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當證]이며, 도제(道諦)는 마땅히 두루 닦아야 하는 것[當修]이다.
70)
욕계계(欲界繫)와 색계계인 별해탈률의와 정려율의는 유루의 무표이지만, 무루계인 도생(道生)률의는 무루이다. 본론 제36권 ‘율의’ 참조.
71)
여기서 ‘개’란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5개(욕탐ㆍ진에ㆍ惛眠ㆍ掉悔ㆍ疑)가 아니라 다만 번뇌의 이명(異名)으로, 선법을 장애하기 때문에 ‘개’이다. 「십상경(十上經)」에서는 사견(邪見)ㆍ사사(邪思)ㆍ사어(邪語)ㆍ사업(邪業)ㆍ사명(邪命)ㆍ사방편(邪方便)ㆍ사념(邪念)ㆍ사정(邪定)ㆍ사해탈(邪解脫)ㆍ사지(邪智)의 10사행(邪行)을 10멸법(滅法)으로 설하고 있다.
72)
즉 『증십경』은 다만 법수에 맞추어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열 가지 종류의 ‘영원히 끊어야 할 법’만을 설한 것으로, 무표색의 법처를 색법 중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논거로써 이 경을 결집(結集, 즉 經藏)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뜻.
73)
이는 상좌(上座)가 촉처의 소조성을 부정하는 첫 번째 논거였다.
74)
미끄러움이나 껄끄러움 나아가 목마름 등은 어떠한 색깔도 형태도 갖지 않기 때문에 안근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을 단순히 대종이 배열된 형태상의 차별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뜻.
75)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은 4대종의 자성이지만 현실에서 파악되는 견고성은 지대(地大)가 두드러진 것, 다시 말해 그 밖의 3대가 두드러지지 않은 것(이를 4大隱顯이라고 함)이다. 만약 미끄러움 등이 4대종의 차별이기 때문에 4대종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견고성 역시 3대종의 차별이기 때문에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한다는 뜻.
76)
진흙의 경우처럼 지대(地大)가 미끄러울 경우, 거기에는 견고성이 부재한다. 다시 말해 견고성과 미끄러움은 개별적 존재라는 뜻.
77)
이미 앞서 논설하였듯이 전(前) 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개념적 추상적 존재[假有]를 요별하지 못하며, 오로지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존재[實有, 혹은 勝義有]만을 요별한다.
78)
가유, 즉 가설적 개념은 오로지 제6 의식에 의해 분별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79)
미끄러움 등 일곱 가지 소조촉의 전체적인 차별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 ‘색온- 5경’에서 논설하였다.
80)
무거움이나 가벼움은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무거운 것에 대해서는 가벼운 것, 자신보다 가벼운 것에 대해서는 무거운 것으로 일컬어지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뜻. 이는 일견 상의상대(相依相待)의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을 주장하는 중관(中觀)의 입장과는 유사하다.
81)
『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 p.18).
82)
본론 제2권 ‘4대종’에서 이에 관해 논설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권 말미(주 92)에서 다시 재론한다.
83)
‘지’의 자상은 견고성이며, ‘수’의 자상은 습윤성이기 때문에, 견고성 등이 바로 무거움은 아니라는 뜻.
84)
‘화합’은 가유로서 제6 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85)
예컨대 아버지가 그 자식에 대해 원인이 되었으면 더 이상 그 자식의 결과는 되지 않는 것처럼, 무거움이 가벼움의 근거(원인)가 되었으면 더 이상 그것의 결과는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가벼움이 무거움의 또 다른 근거는 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가벼움과 무거움의 기준이 상실되어 모든 사물은 결국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으로, 이는 사실상 지식의 부재이다. 이에 반해 대승 공관에서는 아버지는 자식의 원인이 되지만 자식 역시 아버지의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자식이 없다면 아버지란 명칭 역시 획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다. 유부가 인식의 근거(이를테면 所詮)로서의 실유의 존재를 논의하였다면 상좌나 대승의 공관은 오로지 인식으로 드러난 사실 자체(이를테면 能詮)에 대해서만 논의하였다고 할 수 있다.
86)
현실상에 나타난 가벼움과 무거움은 서로에 대해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지만, 그러한 원인과 결과에 따라 생겨나는 가벼움과 무거움 자체는 실재한다는 뜻. 곧 가벼움이라는 조건[緣]에 따라 무거움이 생겨나지만, 이때 조건은 존재 자체의 조건이 아니라 생기의 조건일 뿐이다.
87)
이편 언덕에서 보면 저편 언덕이 피안이지만, 저편 언덕에서 보면 이편 언덕이 피안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상대적인 가칭[假稱]일 뿐이고, 피안이나 차안 자체는 실재한다. 다시 말해 능전(能詮)의 상(相)은 부정(不定)이지만 소전(所詮)의 체(體)는 불변이다. 여기서 피안과 차안은 열반과 생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
88)
견고하지 않은 것에 근거하여 ‘견고성’을 설정하는 경우 그 대상(견고성)은 구체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견고성에 근거하여 ‘견고하지 않은 것’을 설정하는 경우 이는 견고성 이외 모든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결정적이지 않다.
89)
‘가벼운 것’도 ‘매우 가벼운 것’에 비하면 ‘무겁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라는 말은 결국 동일한 대상(즉 소조촉)을 지시한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두고서 가볍다 무겁다고 말하는 것[能詮]은 대상과는 다른 또 다른 존재[所詮], 즉 가벼움이나 무거움이 실재하여 그것이 어떤 조건(즉 대종화집)하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90)
가벼움은 무거움에 근거한 것이고, 무거움은 가벼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가벼움과 무거움은 어떠한 자성도 갖지 않는 동일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
91)
본론 제2권 주30)을 참조 바람. 즉 풍계의 자상은 운동성이며, 그것이 두드러진 현실상의 바람은 가벼움을 본질로 하지만, 이는 소조촉이다. 곧 ‘계경 등에서 소조촉인 가벼움을 풍계라고 말한 것은 결과로써 원인을 나타낸 것일 뿐이니, 소조촉인 가벼움은 풍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92)
화계는 가벼움의 한 조건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니, 여기에는 반드시 풍계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본론 제2권 ‘4대종’ 참조)
93)
머리카락과 터럭 등은 4대종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다만 견고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지계’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
94)
‘가벼움이란 무거움의 부재를 본질로 한다’고 할 경우, 무거움의 비존재와 가벼움의 존재가 동시에 함께 존재해야 한다.
95)
경안이란, 몸과 마음을 경쾌 안적(가뿐)하게 하는 심리 작용으로, 이 또한 가벼움의 일종이다. 대선지법(大善地法)의 하나. 본론 제11권 참조.
제5권
1)
이하 제4권에 이어 일곱 가지 소조촉 중 차가움[冷性]의 실재성에 관한 상좌(上座) 스리라타의 비판과 논주 중현의 재비판이 논설되고 있다.
2)
유부에 의하면 소조촉에는 미끄러움ㆍ껄끄러움ㆍ무거움ㆍ가벼움ㆍ차가움ㆍ허기짐ㆍ목마름이 있지만(본론 제1권 참조) 상좌는 4대종만을 인정하고 이러한 소조촉의 개별적인 실재성을 부정한다. 즉 뜨거움(혹은 따뜻함)이 화계가 증강한 것이라면 차가움은 화계가 감소한 것으로, 뜨거움이든 차가움이든 화계의 차별일 뿐이다.
3)
만약 화계가 적거나 강성하지 않은 것을 차가움이라 하고, 많거나 강성한 것을 따뜻함(혹은 뜨거움)이라고 할 경우, 결국 손해와 이익의 원인이 동일하여 손해의 원인이 이익을 낳고 이익의 원인이 손해를 낳는다고 해야 한다.
4)
즉 차가우면 차가울수록 어떤 정도의 따뜻함은 더욱더 따뜻한 것이 되기 때문에 차가움도 이익의 적은 원인이 되며, 그럴 경우 ‘결핍된 화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5)
상식적으로 뜨거움과 차가움은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화계가 증대될 때에는 별도의 차가움이 생겨나지 않으며, 화계가 감소할 때에는 별도의 차가움이 생겨난다’고 해야 하겠지만, 상좌의 주장에 따르는 한 ‘화계가 증대될 때에도 차가움(즉 보다 덜 뜨거운 상태)이 생겨나며, 화계가 감소할 때에도 차가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즉 보다 덜 뜨거운 상태만이 존재할 뿐이다.’
6)
즉 상좌에 의하는 한 화계(火界)가 적은 것을 ‘차가움’이라 하였기 때문에 ‘차가움이 생겼다’거나 ‘따뜻함이 생겼다’는 사실을 말을 할 경우 ‘화계가 적어졌다’, ‘화계가 많아졌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차가움은 끝내 분별할 수 없게 된다. 후술하듯이 금이 적다 하여 그것을 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7)
유부에서도 차가움은 수계(水界)와 풍계(風界)가 증대할 때 생겨난다고 주장한다.(본론 제1권 ‘5경’ 참조) 그러나 수ㆍ풍계가 바로 차가움은 아니다.
8)
차가움이 따뜻함(즉 화계)의 부재를 본질로 하며, 그래서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따뜻함 역시 차가움 등의 부재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만, 따뜻함 등의 4대종은 상좌 역시 개별적 실체로 인정한다.
9)
‘차가움이란 따뜻함의 부재를 본질로 한다’고 할 경우, 차가움은 언제나 따뜻함의 비존재와 동시에 함께 존재해야 한다.
10)
‘허기짐’과 ‘목마름’은 일곱 가지 소조촉의 하나로, 각기 먹기를 바라고 마시기를 바라는 것. 여기서 ‘바란다(희구)’는 것은 심소법 중 ‘욕(欲)’이라는 심리 현상이지만, 이는 원인(허기짐)을 결과(먹기를 바라는 것)적 측면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심소법이 아니라 각각 풍대와 화대가 증가할 때 일어나는 소조색이다.(본론 제1권 ‘5경’ 참조)
11)
화계가 바로 허기짐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화계는 다른 3계와 더불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므로 항상 허기짐과 목마름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12)
풍계와 화계가 증강할 때 ‘허기짐’과 ‘목마름’이라는 소조촉이 생겨나는 것이라면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욕망도 풍계와 화계가 증강할 때면 항상 생겨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기서의 욕망은 소조촉을 결과적 측면으로 일컬은 말이기 때문에 심소법인 욕망[欲]이 항상 생겨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13)
4대종 중 화대가 보다 강성해질 때 ‘목마름’이, 풍대가 보다 강성해질 때 ‘허기짐’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욕망은 신근과 촉경만 갖추어지면 생겨나는 신식과는 생기의 조건이 다르다.
14)
즉 신식은 다만 촉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지만, 먹고 마시기를 바라는 욕망은 필경 대종의 차별에 근거하여, 다시 말해 풍계와 화계의 대종이 강성할 때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허기짐과 목마름이라는 소조촉을 근거로 한다는 뜻.
15)
‘허기짐’으로 인해 먹기를 바라는 욕망[欲]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근(소의)과 대종의 차별(소연)과 신식이 화합하고, 다시 이러한 욕망과 관계해야 한다.
16)
원문에는 대법지(大法地)로 되어 있으나 ‘대지법’으로 정정하였다. 뭔가를 희구하는 의식 작용인 ‘욕(欲)’은 열 가지 심대지법(心大地法)의 하나, 이는 선ㆍ악ㆍ무기 중 어떠한 마음과도 함께 일어나는 의식 작용이다.(본론 제10권에서 상론함)
17)
유부에 의하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땅’ 등은 거기에 색ㆍ향ㆍ미ㆍ촉이 존재할지라도 대개 형태와 색채로써 그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다만 세속의 언어적 관념에 따라 땅이나 물 등을 다 같이 현ㆍ형의 색처로 설정하였지만(본론 제2권 ‘假의 4계와 實의 4계’ 참조), 만약 땅이나 물 등에 4대종이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땅이라고 하고 물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18)
짠맛이 바로 소금이며, 영납(領納)이 바로 ‘수’이다.
19)
소금과 물이 화합하는 경우, 소금과 물 자체는 증감이 없지만 그 작용의 강약에 따라 짠맛이 된다는 뜻의 비유.
20)
양약과 독약은 생겨나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때는 양약이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독약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양약과 독약에 각기 고유한 개별적인 작용이 있어 양약이 독약을, 혹은 독약이 양약을 대치(對治)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21)
예컨대 모래가 화합하지 않는 것은 인섭(引攝)의 작용을 지닌 수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양이 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계 자체가 적기 때문이지 그 작용이 감소하였거나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22)
이는 바로 대종(大種)의 뜻으로, 본론 제2권 ‘4대종’에서 상론하였다. 즉 견고성 등은 지(地) 등 4대종의 자상으로, 이것은 모든 색법의 보편적 근거로서 광대하지만 그 밖의 색ㆍ향ㆍ미ㆍ촉의 소조색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하 ‘색 등이 따라 쫓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그 밖의 다른 색을 손괴(損壞)하기 때문에’, 반대로 ‘색은 능히 대종을 손괴하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논거로써 대종이 일체 색법의 소의임을 밝히고 있다.
23)
만약 ‘지(地)’ 등의 4대종이 소촉성(所觸性)이 아니라면 그것의 화합물인 색취의 소촉성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즉 ‘지’ 등의 대종을 소촉성이라고 해야 비로소 그 밖의 다른 색의 소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4)
보지(保持) 등의 네 가지는 순서대로 각기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작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4대종’을 참조할 것.
25)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권 말미에서 논설하였다. 즉 ‘매우 견고한 것’에 비하면 ‘견고한 것’은 ‘견고하지 않은 것(즉 습윤성)’이 되며, 이 역시 ‘보다 견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 ‘견고한 것’이 된다. 결국 ‘견고한 것’, ‘견고하지 않은 것’이라고 함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언표(이를 能詮이라 함)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견고함과 습윤성 자체(이를 所詮이라 함)는 실재한다는 것이 유부의 생각이었다.
26)
차가움은 그것보다 더 차가운 것에 비하면 따뜻한 것이므로 ‘차가움’과 ‘따뜻함’은 동일한 결과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차가움과 따뜻함 자체는 실재한다.
27)
차가움은 따뜻함에 근거하는 것이며, 따뜻함은 차가움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차가움의 소의가 되는 따뜻함은 대종성이지만 차가움은 대종에 의해 드러나는 소조성(所造性)이다.
28)
『잡아함경』 제11권 제273경(대정장1, p.72하), ‘彼眼者, 是肉形, 是內, 是因緣, 是堅, 是受, 是眼肉形內地界.’
29)
이 같은 비유논사의 논란은 『구사론』 제1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69)에서 각천(覺天)의 설로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6계설을 전하는 다른 경은 『구사론』에 따르면 『입태경(入胎經)』.
30)
이때 안근을 승의근(勝義根)이라 하며, 안근의 살덩이를 부진근(扶塵根, 눈에 보이는 거친 물질적 형태의 눈으로서 승의근을 돕는 작용을 가졌기 때문에 부진근임)이라 한다. 즉 ‘견고성[堅性]’ 따위는 안근(승의근) 중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4대종으로 이루어진 안근의 살덩이(부진근)에 존재하기 때문에 경에서 ‘내적인 지계를 안근의 살덩이 중에 존재하는 견고성 등’이라고 설하였다는 것이다.
31)
본문에서는 문맥상 ‘안근의 살덩이 중에’라고 번역하였었다. 원문은 ‘於眼肉團中’이지만, 중현은 이처럼 이를 ‘안근에[於眼], 살덩이 중에[於肉團中]’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32)
멸진정이란 무심정(無心定)의 하나로, 비상비비상처에서 닦는 선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에서 상론한다.
33)
동류인이란, 결과와 유사한 성질을 지녔으면서 그것과는 시간적으로 선행하거나 무간(無間)으로 존재하는 원인을 말한다. 곧 멸진정에서도 신근은 동류로 상속하기 때문에 동류인으로서의 작용을 갖는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
34)
이미 그들(비유논사)은 대종과는 다른 소조색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색 등의 5경도 소조색으로서 동일하다’는 예로써 대종과 소조색의 동일성을 논증할 수 없다는 뜻.(후술)
35)
색 등 경계 대상의 상을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은 안식(眼識) 등의 6식이다. 본론 제3권 ‘식온’ 참조.
36)
‘소조색은 대종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우 색 등은 모두 견고성 등의 동일한 특성을 지녀야 하며, 안 등의 5근이 그러한 동일한 일체의 경계를 파악하게 되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37)
안 등의 5근은 정색(淨色)을 본질로 한다. 여기서 정색이란 광명이 차단됨이 없는 맑고 투명한 색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본론 제1권 ‘5근’ 참조.
38)
대선지법(大善地法)의 하나로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 작용인 신(信)도 ‘징정’을 본질로 한다.
39)
이하 청색 등에 근거하여 소조색의 존재를 논증한다. 유부에 의하는 한 청색 등은 대종이 아니라 소조색이지만, 소조색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좌의 경우 청색 극미 또한 대종이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청색극미는 4대종인가, 1대종인가? 이하 이에 관해 논란한다.
40)
4대종은 견고성 등 그 성상(性相)이 각기 다르다고 하면서 청색 극미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결국 4대종의 차별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41)
소조(所造), 즉 ‘지어진 것’이라는 말은 경전상에서 ‘짓는 것[能造]’과는 다른 별도의 근거 없이 설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앞서 비유논사가 인용한 경증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이 경증은 후자에 해당한다. 즉 아견이 ‘색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하였을 경우, 색과 아견은 전혀 다른 존재로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아견이 다만 색의 차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색법이 되어야 한다.(후술)
42)
유신견(혹은 薩迦耶見, satkāya dṛṣṭi)이란, 5온에 대한 애탐의 결과인 5취온(取蘊)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염오혜를 말한다. 즉 그것은 실재[有:薩, sat]하는 집적[身:迦, 耶kāya]의 온을 대상으로 하여 ‘나[我]’ 혹은 ‘나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견이다.(본론 제47권 ‘5견’ 참조)
43)
여기서 ‘이 경’이란 논주가 앞서 소조색의 경증으로 인용한 “존재하는 모든 색은 다 4대종과 아울러 4대종의 소조색에 포섭된다”는 지교(至敎).
44)
『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대정장2, p.91하). “眼是內入處, 四大所造淨色不可見有對--.”
45)
즉 아견은 다만 색의 차별이 아니라 색에 근거하여 생겨난 개별적 실체이듯이, 대종소조 역시 대종의 차별이 아니라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난 개별적 실체이다.
46)
여기서 ‘능(能)’은 바로 그렇게 하는 주체를 말하고, ‘소(所)’는 그렇게 되는 대상을 말한다.
47)
일체의 유위법이 찰나에 생성 소멸하는 것이라면 ‘도끼[能折]가 나무[所折]를 쪼갠다’고 할 경우, 도끼가 출현하여 작용하였으므로 그것은 이미 두 찰나에 걸친 것이다. 이 문제는 극미 상호간의 접촉 불접촉의 문제와도 관련되는데(즉 극미의 접촉은 ‘출현’과 ‘접촉’이라는 두 찰나를 전제로 해야 함),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 주112)와 제7권~8권에서 상론되는 ‘근과 경의 접촉 불접촉의 문제’를 참조 바람.
48)
신(身) 등의 색근은 몸으로부터 분리되면 그 자체로서 상속 생기할 수 없으며, 또한 비록 4대 소조색이지만 구슬의 빛처럼 특수한 감관으로서의 기능[根]을 갖는 것(즉 淨色)이기 때문에, 쪼개고 쪼개지는 등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뜻.
49)
소리는 다른 유색계처럼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자마자 소멸하기 때문에 능히 쪼개거나 쪼개지는 등의 여섯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50)
여기서 ‘이숙생’은 전생의 선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무기의 과보로서, 5색근과 색ㆍ향ㆍ미ㆍ촉의 4경, 7심계와 법계가 이숙생이다. 이숙생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소장양’은 음식 수면 등에 의해 장양되는 후천적인 것으로서, 5색근과 5경이 그것이다.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를 말하는데, 7심계와 법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실사(有實事, dravyavat)란 견실(堅實)을 본질로 하는 무위를 의미하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법계뿐이다. 그리고 한 찰나의 마음만으로 낳아지는 것, 즉 무루 견도의 첫 찰나인 고법지인(苦法智忍)이 ‘일 찰나’인데, 의ㆍ의식계와 법계가 이에 해당된다.(후설)
51)
“[본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이숙생이나 소장양을 떠나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구사론』 제2권, 앞의 책, p.72) 즉 안 등의 5근은 동류인ㆍ등류과로서 전후 상속하지만 전 찰나의 동류인도, 후 찰나의 등류과도 필경 이숙(선천적)ㆍ장양(후천적)으로 생기 증장하는 5근의 전후 상속으로, 이 두 가지를 떠나 별도의 등류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본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았다는 뜻.
52)
마치 소가 끄는 수레[牛所駕車]를 우차(牛車)라고 하듯이, 이숙인소생(異熟因所生)에서 ‘인소(因所)’를 생략하여 이숙생이라고 하였다는 뜻.
53)
6촉처란, 6근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업’이라고 한 것은 원인을 일시 결과의 명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숙생이라는 말 역시 결과상에 일시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는 뜻. 이상은 ‘이숙’의 네 가지 뜻으로, 5근은 선악업의 이숙과이기 때문에 ‘이숙생’이다.
54)
즉 음식 수면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길러진 안근[所長養의 相續] 등은 이숙업에 의해 선천적으로 획득된 안근[異熟生의 相續] 등을 마치 외성이 내성을 방호하듯이 지킨다는 뜻.
55)
본론 제2권 주47) 참조.
56)
다른 색은 단절됨이 없이 찰나찰나 상속하며, 상속이 단절되는 경우 다시는 생기하지 않지만, 소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또한 만약 소리가 이숙생이라고 한다면 현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저절로 생겨나야 하겠지만 발성자의 욕망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멈추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니다.
57)
이는 음성을 이숙과라고 주장하는 독자부(犢子部)와 분별론자(分別論者)의 주장(『대비바사론』 제118권, 대정장27, p.612하)이다. 즉 부처님은 과거 수행시대 추악어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선업력에 의해 범음성을 획득하였다는 뜻. 여기서 범음성은 32상 중의 하나.
58)
과거의 선악업이 제1전(傳), 그러한 업에 의해 생겨난 대종이 제2전, 대종이 인연 화합하여 생겨난 소리가 제3전. 즉 소리는 직접적으로는 과거 선악업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재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숙생이 아니라는 뜻.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74)에서는 제5전의 이설도 전하고 있다. 즉 과거의 선악 등의 업은 이숙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전해져 장양의 대종을 낳았으며, 이것이 전해져 다시 등류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바야흐로 소리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59)
앞서 대사(大師)의 범음성은 비록 업에 의해 생겨난 것일지라도 업으로부터 온갖 대종이 생겨나고, 온갖 대종의 인연에 따라 그 같은 소리가 생겨났기 때문에(즉 第三傳) 직접적인 이숙생은 아니라고 하였다.
60)
궤범사는 ācārya, 즉 아사리(阿闍梨)의 의역어로서, 모범이 되는 스승을 말한다. 즉 색ㆍ향ㆍ미ㆍ촉의 4계가 이숙생ㆍ소장양ㆍ등류성이라는 것은 일반적 주장이라는 뜻.
61)
이때 등무간연(等無間緣)이란, 고법지인(苦法智忍)의 전 찰나의 마음인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4제(諦) 16현관(現觀)의 첫 찰나인 고법지인(苦法智忍)은 전 찰나의 마음인 세제일법으로부터 일 찰나의 간격도 없이[無間] 증득되기 때문에 더 이상 동류인을 갖지 않는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에서 상론함) 여기서 세제일법이란 무간(無間)에 견도의 무루지를 낳게 하는 유루지로서, 세간지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기(혹은 강력하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이름하였다. 본론 제61권 ‘4선근’ 참조.
62)
여기서 그 밖의 고법지인과 구기하는 법이란, 무루 율의(律儀)인 색, 수ㆍ상ㆍ사 등의 상응법, 그러한 법을 획득하게 하는 득(得), 그리고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의 4상을 말한다.
63)
이하에서는 이상 18계의 이숙생 등의 분별에 대한 이설(異說)을 전하고 있다.
64)
5근과 5경의 유색계 중에는 이숙생도 있기 때문에 ‘일부’라고 말한 것이다.
65)
5근과 색ㆍ향ㆍ미ㆍ촉의 4경과 7심계와 법계는 이숙생이지만, 여기에는 소장양인 것도 있고, 등류성, 유실사, 일 찰나인 것도 있기 때문에 ‘일부’라고 말하였다.
66)
후술하듯이 12처는 일체법을 포섭하는 것으로, 색처와 성처를 제외한 여덟 가지 유색처는 무기이지만, 색ㆍ성처와 의ㆍ법처는 3성(性)과 통한다.(본론 제4권 ‘선ㆍ불선ㆍ무기의 분별’ 참조)
67)
상좌에 따르는 한 일체법은 이숙생이며, 소장양은 이숙생과는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범주가 아니라 다만 이숙생이 아닌 것[非異熟]을 말한다.(후술) 이는, ‘차가움’이란 따뜻함[火界]에 근거하여 그것이 부재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 뿐 개별적 실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형식의 논의이다.
68)
일체법이 모두 전생의 선ㆍ악업의 결과로서 이숙생이라고 한다면 결국 니간타 나타풋타의 숙작인설(宿作因說)과 다를 바가 없어 현생에서의 노력 정진을 부정하는 결정론에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유부에서는, 일체법이 이숙생도 아니며(선악으로 表記될 수 있는 것은 이숙생이 아니다), 선ㆍ악의 이숙인에 의해 낳아진 결과(이숙과) 역시 무기(無記)로서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또 다른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69)
예컨대 안근이 오로지 이숙생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업에 의해 낳아진 것이므로 어떠한 승렬(勝劣)의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뜻.
70)
이에 대해서는 본권 앞부분에서 경주(經主)의 오해를 시정하면서 논설하였다.
71)
눈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숙생)과 후천적으로 길러진 것(소장양)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은 그것이 취집된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라는 뜻.
72)
이상은 ‘안 등이 이숙생이고 소장양이라고 한다면, 하나의 소의신 중에 두 종류의 안근이 있어야 하지만 두 가지의 작용이 별도로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소장양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좌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하나의 식은 이같이 두 가지 작용에 의해 낳아지기 때문에 안 등은 이숙생일 뿐 아니라 역시 소장양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73)
‘수계’란, 비유부(譬喩部)나 경량부에서 주장하는 행위의 인과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 종자(種子)의 별명.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12권 ‘득(得)과 비득(非得)’, 제18권 ‘인연(因緣)’의 항목을 참조할 것. 즉 일체가 업의 이숙생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인 수계나 종자와 같은 개념도 무용하게 되는 것이다.
74)
이 게송은 득(得, prāpti)과 성취(成就)에 관한 6근ㆍ6경ㆍ6식의 관계를 분별한 것이다. 여기서 ‘득’이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이미 상실한 제법을 유정의 상속상에 획득하게 하는 원리이며, 성취는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게 하는 원리이다. 본론 제12권에서 상론한다.
75)
이러한 3생의 유정은 처음으로 입태하는 순간(즉 羯邏藍)에는 안근이 없으며, 그 후 6처위(處位)에 이르면서 점차적으로 획득하는데, 그 때에는 이미 안식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4생 가운데 화생은 온갖 근을 단박에 획득[頓得]하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76)
중유(中有)로서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색계의 안근을 획득하는데, 거기에는 5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식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77)
이는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난 본유(本有)의 경우로서, 이때 안근은 처음부터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은 없으며, 또한 이러한 상태에는 식이 존재하지 않지만 초정려의 식을 빌려 일으키기 때문에(이를 借起識이라고 함) 이같이 분별한 것이다.
78)
위의 세 정려에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날 때에는 이미 안근이 성취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지만, 안식은 그 때 비로소 획득된다.
79)
무색계에는 안근도, 안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몰하여 욕계나 초정려의 범세에 태어날 경우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80)
엄밀히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 획득[獲]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였다면, 이 경우는 다만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성취(成就)할 때의 안근과 안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득(得, prāpti)에는 획득(獲, prātilambha)과 성취(samanvāgama)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본론 제12권 참조.
81)
제1구는 안근을 획득하더라도 안식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2구는 안식을 획득하더라도 안근을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3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는 경우, 제4구는 양자 모두를 획득하지 않는 경우.
제6권
1)
심과 심소는 아집(ahaṃkāra)의 근거[依止]가 되기 때문에 자아[我]로 가설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러한 자아의 소의가 되는 것[親近]을 ‘내적인 것’이라 하고, 소연이 되는 것[疎遠]을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후설)
2)
불살생계를 지킬 경우, 그것의 주체로서 일시 가설되는 것이 ‘자아’이다.
3)
즉 앞(본론 제3권, 주6)에서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을 의계라 하고, 이것만이 마음의 소의가 된다고 하였다.
4)
여기서 ‘자종(自宗)’이란 비바사사(毘婆沙師), 즉 설일체유부의 종의를 말한다. ‘18계는 모두 3세와 통한다’는 사실은 『대비바사론』 제71권(대정장27, p.367중)에 ‘三世各有十八界相’에 근거한 것이다.
5)
이상 ‘자아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내외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경주(經主) 세친(世親)의 논의. 『구사론』 제2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78-79.
6)
안계 등의 12계를 ‘내적인 것’이라 하고, 색 등의 6계를 ‘외적인 것’이라고 할 경우, 법계에 포섭되는 심소법도 외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7)
만약 마음(6식)의 소의만을 ‘내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안근 등은 심소와 상응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소의가 되지 않으며, 마음도 심소에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 또한 ‘내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힐난.
8)
즉 유신견(5취온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염오혜)은 마음[識]뿐만 아니라 색ㆍ수ㆍ상ㆍ행에도 근거하기 때문이다.
9)
마음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됨이 없이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헤아리고 인식하여 업을 일으키게 한다.
10)
사실상 심소는 ‘내적인 것’이지만 경에서는 보다 수승한 마음을 자아로 가설(假說)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자아의 근거가 되는 6근ㆍ6식을 내적인 것이라 하여도, 다시 말해 심소를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아무런 허물이 없다는 뜻.
11)
이를테면 선심은 염오심에 대해서도 소의가 될 수 있지만, 선의 심소의 경우 선심에는 능히 의지할지라도 염오심에는 능히 의지하지 않는다.
12)
하나의 마음은 최소한 10가지 대지법에, 혹은 선심일 경우 22가지 심소(각기 10가지 대지법과 대선지법, 그리고 尋ㆍ伺)에 소의가 되므로 소의성의 마음은 단일하지만 능의성의 심소는 일정하지 않다.
13)
수(受)ㆍ상(想)ㆍ사(思)ㆍ촉(觸) 등의 10가지 대지법은 선ㆍ불선ㆍ무기 등 일체의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 작용(심소)이므로(본론 제10권~11권 참조) 동류와 이류의 어떠한 마음에 대해서도 능의성(能依性)이 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14)
구마라다(Kumāralāta). 구역에서는 구마라라다(鳩摩羅邏多)로 동수(童受)로 번역된다. 규기(窺基)의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불멸 후 100년 무렵에 출세한 경부본사(經部本師)로 일컬어지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이를테면 『대당서역기』에서는 마명(馬鳴)ㆍ제바(提婆)ㆍ용맹(龍孟, 즉 용수)과 함께 당시 네 개의 태양[日]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대개 마명ㆍ용수 내지 『대비바사론』보다는 후대, 세친이나 중현보다는 전대, A.D.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의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
15)
이는 사실상 앞의 경주 세친의 설과 동일한 것으로, 『대비바사론』 제74권(한글대장경120, p.544)에서 설한 내외의 네 가지 분별 중 제1설이다.
16)
안근이나 색경 등은 다 같이 유정수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개별적[不共]인 색법이지만 소의가 되고 되지 않음에 따라 내외로 설정하였듯이, ‘안’과 ‘수’ 등은 다 같이 법처에 포섭되지만 이 또한 소의가 되고 되지 않음에 따라 내외를 설정하였다는 뜻.
17)
여기서 이분이란, 동분(同分)과 피동분(彼同分)으로, 전자가 자신의 작용을 이행하는 현세적(顯勢的)인 법이라면 후자는 잠세적(潛勢的)인 법이다.(본권 후술) 따라서 당연히 동분의 근은 ‘내적인 것’이고, 피동분의 근은 ‘외적인 것’이지만,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
18)
『잡아함경』 제13권 제322경(대정장2, p.91하).
19)
그러나 경에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았다.(次註 참조)
20)
유부에서는, 앞의 계경에서 색에는 유견유대(有見有對)ㆍ무견유대(無見有對)ㆍ무견무대(無見無對)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나아가 “법처란 말하자면 외처(外處)로서, 이는 11처에 포섭되지 않는 법이며, 무견무대이다”는 경설을 논거로 삼아 무표색(혹은 무표업)을 주장한다. 즉 이 경 후반에서 제6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무견무대의 법을 제6 의식처럼 비물질[非色, 혹은 無色]이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무견무대색은 바로 법처에 포섭되는 색, 즉 무표색을 뜻하지 수ㆍ상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경설에 근거한 무표색의 논증에 대해서는 본론 「업품(業品)」(제35권)에서 상론되고 있다.
21)
법처를 설명함에 있어 일체의 모든 법으로도, 개별적인 법으로도 나타내지 않았다는 뜻.
22)
즉 앞서 상좌가 설한 “안 등이 식(識)의 소의로서 작용할 때 안처(즉 內)로 설정하지만, 만약 의식의 소연의 경계가 될 때는 법처(즉 外)로 설정한다”는 주장.
23)
동유(同喩)란, 논증의 주제와 동일한 성격의 예를 말하는 것으로, 안근의 동유로 인용한 의근의 경우,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
24)
순신관(循身觀, kāyānupāśin)이란, 4념처 중 신념처(身念處)로, 머리 꼭대기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순서대로 몸을 쫓아가며 부정(不淨)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25)
『잡아함경』 제2권 제33경 등(대정장2, p.7중하).
26)
이를테면 안근 등은 색법으로 안식의 경계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안식의 소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식의 소의와 같은 몸에 있는 안근(즉 내 눈)은 ‘내적인 것’이지만 몸 밖에 있는 안근(즉 남의 눈)은 ‘외적인 것’이다.
27)
전주(前註) 참조.
28)
여기서 ‘3관(觀)’은 4념처 중 신념처(즉 循身觀)를 제외한 수(受)ㆍ심(心)ㆍ법념처(法念處)로, 그것들을 각기 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로 관찰하는 것. 즉 이러한 3법이 관찰의 대상(소연)이 되는 한 그것은 외적 존재이며, 심념처(순심관)의 대상인 마음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29)
의근(전 찰나의 식)에 의해 의식이 낳아지지만, 그것이 또한 의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혹은 안근은 안식의 소의이지만 그것은 또한 의식의 소연도 되기 때문에, 6식의 소의가 되는 것을 ‘내적인 것’으로, 소연이 되는 것을 ‘외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경우, 잡란의 과실을 범하게 된다.
30)
이 말은 『구사론』(제2권, 앞의 책, p.79)에 의거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따르면 무변의 의식은, 그 자체와 그것과 구유(俱有)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외된 법도 역시 제2 찰나 마음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체의 경계 대상은 두 찰나 마음의 소연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성자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관하였을 경우, 그것은 3세 일체법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것과 구기(俱起)하는 다양한 심소와, 생(生) 등의 불상응행법이 수반된다. 그리고 의식 자체를 포함한 그것들은 그 순간 동분이 되지 않지만, 다음 순간(제2 찰나) 반성력에 의해 객관화됨으로써 마침내 일체의 대상은 법동분이 되는 것이다.
31)
이는 곧 색을 보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안근과 불생(不生)의 안근을 말한다.(『구사론』, 앞의 책, p.80)
32)
유식속불생법(구역 與識相應不生法, vijñānasamāyukta-)이란 식과 근이 모두 갖추어졌지만 연이 결여되어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하며, 무식속불생법(구역 與識不相應不生法, avijñānasamāyukta-)이란 근만이 있고 식이 없기 때문에 끝내 생겨나지 않는 법을 말한다.
33)
의계, 즉 마음은 이미 생겨난 이상 어떤 대상(소연)에 대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동분이며, 따라서 필경(畢竟)불생법만이 피동분이 된다.
34)
향ㆍ미ㆍ촉은 감관과 직접 접촉하여야 알려지는 것[合中知]이므로 그 당사자만 알 뿐이지만, 색과 성은 그렇지가 않기[離中知] 때문이다.
35)
근ㆍ경ㆍ식 세 가지의 교섭이 원만하여 이른바 ‘동분’의 뜻을 각각 갖게 될 때 촉(觸)이 낳아지므로(三事和合觸), 그러한 촉을 ‘분’이라 이름한다는 뜻.
36)
견소단과 수소단은 견도(見道:무루혜에 의한 4諦관찰)와 수도(修道:선정을 통한 반복된 관찰)로 끊어지는 법이며, 비소단은 무위택멸처럼 끊어지지 않는 법을 말한다.
37)
88수면은 4제 각 행상(行相)에 미혹하여 생겨난 이지적 번뇌, 즉 미리혹(迷理惑, 혹은 見惑)으로, 본론 제46권에서 상론된다.
38)
여기서 ‘기별(vyākaraṇa)'이란, 불타의 설법양식(12分敎) 중의 하나로, 본래는 문답체의 해설을 말하지만 미래세 깨달음[證果]을 예언하는 것, 즉 수기(授記)를 의미한다.
39)
여기서 이생성은 성법(聖法)의 비득(非得)을 자성으로 삼는 자. 즉 이러한 이생성과 결정코 악취(지옥ㆍ아귀ㆍ축생)의 생을 초래할 만한 신ㆍ어업 등의 염오법은 견도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유신견(有身見)처럼 견소단이 되어야 한다는 뜻. 다시 말해 견도를 거친 예류과의 성자는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생성이나 불선의 신ㆍ어업을 견소단으로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어떤 이는, 바사(婆沙)나 칭우(稱友)에 의하면 독자부(犢子部)이지만, 『구사론기』(제2권)에 의하면 경부(經部)이다.
40)
이생성은 선도 불선(염오)도 아닌 불염오무기성이기 때문에 견소단(무루혜에 의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혹 견소단이라 할지라도 욕계 고제(苦諦)에 대한 무루혜인 고법지(苦法智)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인가하는 그 전 단계(苦法智忍)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41)
일반적으로 법에는 법 자체가 단진(斷盡)되어야 할 것과, 그 자체는 단진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을 반연(攀緣)하는 번뇌를 단진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전자를 자성단(自性斷)이라 하고, 후자를 이박단(혹은 緣縛斷)이라고 한다. 안근의 경우 안근 자체를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근을 계박하는 결(結,즉 번뇌)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경증을 인용한 것이다.
42)
이경단이란 경계 대상 자체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한다.
43)
유부 아비달마에 따르면, 번뇌의 단(斷), 즉 번뇌의 제 심소가 마음의 상속과 구생(俱生)의 관계를 떠나는 것은 무간도에 의해, 그것의 이계(離繫)는 해탈도(무간도 최후에 낳아지는 一念의 正智)에 의해 획득된다. 참고로 양자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해 보면, 전자는 도둑을 문밖으로 쫓아내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문을 닫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본론 제63권 ‘忍ㆍ智의 작용과 순서’ 참조) 그런데 수소단의 번뇌는 강성한 것(상상품)으로부터 미약한 것(하하품)으로 점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次註 참조) 어떤 한 지의 그것은 제9 하하품의 무간도에 의해 비로소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욕계 수혹의 경우, 먼저 상상품이 무간도에 의해 끊어지고 해탈도에 의해 이계(離繫)가 획득되며, 다시 상중ㆍ상하 내지 하하품이 무간도에 의해 끊어질 때 비로소 욕계 수혹이 ‘끊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3계 9지에 있어 최후의 무간도는 유정지(有頂地, 즉 비상비비상처) 제9품(하하품)의 번뇌를 끊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며, 최후의 해탈도는 여기서 생겨난 진지(盡智)로, 이때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44)
견도란,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것을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에 의해 5견(見)과 의(疑)와 같은 이지적 번뇌[迷理惑 혹은 見惑]가 끊어진다. 곧 이러한 번뇌는 마치 해머를 내리치는 순간 바위가 깨어지는 것처럼 단박에 끊어지기 때문에 견도는 오로지 무루이다. 그러나 수도는 견도를 닦은 이후 더욱 증진하여 그것을 반복적으로 익히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탐(貪)ㆍ진(瞋)ㆍ만(慢)과 같은 정의적 번뇌[迷事惑, 혹은 修惑]가 끊어진다. 곧 이러한 번뇌는 연근의 심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강성한 것(상상품)에서부터 시작하여 미약한 것(하하품)에 이르기까지 아홉 단계[9地]에 걸쳐 점진적으로 끊어진다. 그래서 유루의 색 등은 견소단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45)
즉 ‘악취를 초래할 만한 신ㆍ어업 등의 염오법 역시 견소단이라고 해야 한다’는 앞의 주 39)의 논설.
46)
인등기(hetu-samutthāna)란, 업의 원인이 되는 심ㆍ심소를 말하는 것으로, 업을 짓고자 할 때 현재의 인등기심은 미래의 업을 인기하기 때문에 ‘전인’이라고도 한다. 찰나등기(tatkṣaṇa-samutthāna)란, 업과 동시병존하면서 업의 생기에 충족조건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업이 현재찰나의 원인과 불상리의 관계로서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수전인’이라고도 한다.
47)
이에 반해 유여사는 여기서 ‘다하였다’고 함을 ‘끊었다’는 뜻으로 해석한 결과 신ㆍ어업을 견소단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본론 주) 39 참조)
48)
제법의 삼세실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50권~52권에 걸쳐 상론되고 있다.
49)
본론 제1권(‘색온’ 중 ‘5근’) 참조.
50)
여기서 관조(ālocana)란, 근이 거울과 마찬가지로 외계 대상을 비추어 받아들이는 작용을 말한다.
51)
유신견 등의 5견이란, 유신견(또는 薩迦耶見, 5취온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견해), 변집견(邊執見,斷ㆍ常의 두 극단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행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52)
진지란, 유정지(有頂地) 제9품의 번뇌를 멸진할 때 생겨나는 지(智)로서,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이미 집(集)을 끊었고,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고,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것을 말하며, 무생지는 부동법의 아라한이 진지와 무간에 획득하는 지로서, ‘나는 이미 고를 알아 이제 더 이상 알 것이 없으며, 나아가 나는 이미 도를 닦아 이제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고 아는 것을 말한다. 즉 ‘견’이란, 후술하듯이 추리 판단[推度, 혹은 決度]의 작용인데, 이 같은 진지와 무생지는 추리 판단된 것이 아닌 결정적 판단[決斷]이기 때문에 다만 지(智)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3권 ‘인(忍)과 지(智)와 견(見)의 관계’를 참조 바람.
53)
즉 5식신은 무분별이기 때문에(본론 제4권 참조), 그것과 상응하는 혜에는 추탁(推度)의 공능이 없다. 그래서 ‘견’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54)
이하 앞에서 논의한 견(見)의 주체를 감관, 즉 안근으로 볼 것인가, 의식, 즉 안식으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본다’고 하는 사실을 관조[見]로 규정할 것인가, 요별(了別)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으로, 전통적으로 전자를 근견설(根見說), 후자를 식견설(識見說)이라고 하며, 유부에서는 근견설의 입장을 취한다. 『대비바사론』 제13권(대정장27, p.61하)에서는 ‘견’의 주체에 대해 안식이 색을 본다는 법구(法救, Dharmatrāta)의 식견설, 안식과 상응하는 의식 작용으로서 이해ㆍ간택력인 혜(慧)가 본다는 묘음(妙音, Ghoṣa)의 상응혜견설(相應慧見說), 안근과 안식이 화합하여 색을 본다는 비유자(譬喩者)의 화합견설(和合見說), 그리고 두 개의 눈은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색을 본다는 독자부(犢子部)의 일안견설(一眼見說)을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작용을 갖고 있는 두 개의 눈이 본다고 주장한다.(‘一眼見과 二眼見의 대론’은 본론 제7권에서 이루어진다.)
55)
이는 식견가의 재난(再難). 만약 보는 주체가 안근이라면 다른 의식 활동에 관계없이 항상 보아야 하지만, 그럴 경우 안식과 다른 의식이 동시작용하게 되며, 이는 유부의 2식(識) 불구기설(不俱起說)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구사론』(앞의 책, p.87)에서의 반문은 이러하다.:“만약 안근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식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마땅히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다.”
56)
본권 ‘동분ㆍ피동분의 분별’ 참조. 예컨대 모든 톱이 항상 자르는 작용을 행하는 것은 아니며 현재 목수와 결합하여 자기 작용을 수행하고 있는 톱만이 자르는 작용을 행하듯이, 모든 눈이 항상 보는 것은 아니며, 안식과 함께하여 현재 자신의 작용을 행하고 있는 눈(同分眼)만이 보는 작용을 행한다는 뜻.
57)
땔감에 따라 불의 명칭이 바뀔지라도 불 자체는 따뜻함을 본질로 하듯이, 6식 또한 소의에 따라 그 명칭이 바뀔지라도 식 자체는 요별(了別)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안식을 ‘보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58)
안식은 현재의 색을, 의식은 과거의 색을 소연으로 삼는다.
59)
선이 일체의 식에 통하지 않는 것처럼 안식의 ‘견’ 또한 일체의 식에 두루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보는 것’은 안식이 아니라 안근이라는 뜻.
60)
이는 앞의 이증에 근거한 해석으로, 만약 경에서 안식이 다른 식과 능히 차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能別相]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서(차별되는 특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소의, 즉 안근에 따른 것이다) 그것의 본질이 ‘보는 것’이라고 설하였다면, 이는 어떠한 논리성도 갖지 않는 독재자의 명령과 같은 것이라는 뜻.
61)
이는 식견가의 힐난과 변명이다.
62)
‘견’은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 즉 추탁(推度)으로, 간택(簡擇)의 ‘혜’를 본질로 한다. 그런데 앞서 식견가는 ‘식’과 ‘견’의 관계는 ‘견’과 ‘혜’의 관계와 같다고 하였는데(주 61), 그럴 경우 ‘식’과 ‘혜’는 다 같이 ‘견’을 본질로 하는 것이므로 양자는 결국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
63)
유부와 같은 범주론적 사유 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法]는 오직 한 가지 본질과 작용을 갖기 때문에 ‘보는 것’, 즉 견자(見者)가 식이라면 요별자를 반드시 따로이 설정해야만 한다. 즉 ‘견’이 마음의 감성적 작용이고 요별이 오성적 작용이라면 그 작용의 주체 또한 구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부의 경우 안근의 본질은 관조[見]이고, 안식의 본질은 요별로서, 각기 개별적 존재인 것이다.
64)
2식(識) 불구기(不俱起)의 원칙에 따라 그 밖의 다른 식이 현전하는 경우 안식은 현전하지 않으며, 식견설에 따르는 한 그럴 경우 이를 맹인이라 해야 한다는 뜻.
65)
즉 앞서 “안식이 ‘보는 것’이라면 비록 안근을 결여한 모든 맹인일지라도 안식을 성취하는 경우, 마땅히 맹인이라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만약 비록 다시 성취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견(見)과 식(識)이 현전하지 않은 상태를 맹인이라고 한다면, 세간에 눈을 갖은 모든 이도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역시 마땅히 맹인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고 논설하였다.
66)
이는 근견가(根見家)의 또 다른 해석으로, 세친은 이를 전설(傳說)로 전하여 예의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구사론』 제2권, 앞의 책, p.87).
67)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8.
68)
6식은 다만 소의에 따른 차별일 뿐이기 때문에 ‘요별’ 이외 별도의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갖지 않는다고 앞에서 이미 논의하였다.
69)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8. 안식이 감추어진 색에 대해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안근과 동일한 경계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라면, 이는 곧 안식이 안근에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70)
유부 제법분별론에 따르는 한 유위제법은 각기 개별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제법의 동시구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왜냐하면 제법은 각기 자기만의 고유한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구기하지 않고 계기(繼起)한다면 각각의 작용은 찰나생멸하기 때문에 산괴(散壞)하여 하나의 인식을 이룰 수 없게 되고 만다. 유부에서는 이러한 이유에서 심ㆍ심소를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면서도 그것들의 동기 구기를 주장한다.(본론 제10권 이하 참조)
71)
유부에 의하는 한 어둠[暗] 역시 색법(즉 顯色)의 하나이다.
72)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8. 눈은 반드시 대상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이중지(離中知), 즉 비지경(非至境)의 감관이기 때문에 합중지(合中知)의 피부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으며, 대상과 직접 접촉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이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든(有對) 지니지 않든(無對) 관계없다. 따라서 눈이 벽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유대성으로 인한 불접촉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이 수정이나 유리 운모 물 등에 의해 방해 받아도 그 뒤에 감추어진 대상을 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안근이 유대성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대상을 볼 수 없다고 한 근견가의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73)
유대(有對)에는 장애유대뿐만 아니라 경계유대ㆍ소연유대 등 세 종류가 있다.(본론 제4권 참조)
74)
즉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는 것이 인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눈은 장애유대일 뿐만 아니라 경계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두 사람이 나란히 있어도 한 사람을 볼 때 다른 한 사람은 시각의 대상이 되지 않거늘 하물며 그 사람이 다른 사람 뒤에 숨었을 경우 어찌 시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
75)
‘안식이 본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안식은 경계유대가 되어야 하며, 비록 장애성(장애유대)을 갖지 않았을지라도 이 같은 이유에서 감추어진 색을 능히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논주의 해명은 옳지 않다는 힐난. 즉 안근은 경계유대이기 때문에 모든 경계를 능히 동시에 취할 수 없다면, 안식 역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는 뜻.
76)
안근과 안식은 소의와 능의의 관계로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대상을 취하지만, 의근과 의식의 관계 또한 비록 그러할지라도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본론 제3권 주6 참조)
77)
근은 장애유대일 뿐만 아니라 경계유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비ㆍ설ㆍ신근처럼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하는 것일지라도 접촉한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근과 경의 접촉ㆍ불접촉에 관한 문제는 본론 제7권에서 상론한다.
제7권
1)
『잡아함경』 제9권 제255경(대정장1, p.64상). 婆羅門, 眼是門, 以見色故. 耳鼻舌身意是門, 以識法故.
2)
즉 앞서 인용한 계경의 의미는, 눈은 ‘본다’고 하는 사실의 구체적 근거[見所依]가 되기 때문에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이지 눈 자체가 본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는 주체[見者]는 눈을 근거로 하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3)
4섭사 혹은 4섭법이란, 중생을 능히 잘 포섭하기 위한 네 가지 덕목, 보시ㆍ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사(同事)를 말한다. 수(手)거사는 재가자 중 4섭법에 가장 뛰어났던 핫타카 아라바카(Hatthakāḷavaka)이다.
4)
이는 식견가의 반증. 즉 자아에 대응하는 개념은 ‘식’이지만, 식은 안근의 인근연(隣近緣)이고 소의지(所依止)가 되기 때문에 경에서 ‘안(眼)을 문으로 삼아……’라고 설하였다는 뜻. 곧 경에서의 ‘안’은 안근이 아니라 안식이라는 것이다.
5)
‘안(眼)을 문으로 삼아 색을 보며, 나아가 의(意)를 문으로 삼아 법을 요별한다’고 할 경우, 앞의 5근은 그럴 수 있을지라도 의근은 과거로 낙사한 6식인데 그것이 어떻게 현재의 대상(법)을 요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곧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견설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
6)
안근과 안식은 서로 다른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의근과 의식은 동일한 존재의 전후 찰나이기 때문에 ‘의근이 의식을 방편으로 하여 법을 요별한다’고 해도 과실이 없다는 뜻.
7)
의근, 즉 의계(意界)란, 과거로 낙사(落謝)한 전 찰나의 6식을 말하는 것으로, 후 찰나의 식(즉 의식)을 낳는 소의가 된다. 본론 제3권 참조.
8)
중현은 ‘以眼爲門 唯爲見色’이라는 경설에서의 ‘안’을 안식이 아니라 안근으로 이해하여, 안근을 ‘문이 되는 것’과 ‘색을 보는 것’, 즉 피동분과 동분의 두 측면으로 해석하였다. 그럴 경우 ‘과거로 낙사한 의근이 법을 요별한다’는 난점이 야기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의(意)에 대해서만은 무용(즉 의근)과 유용(즉 의식)으로 해석하여 후자(즉 후 찰나 의식)는 전자(즉 전 찰나의 의식)에 의해 낳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의가 능히 요별한다’고 설하여도 과실이 없다는 것이다.
9)
『구사론』 제2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88.
10)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8-89.
11)
의(意, 의근)와 식(識 ,의식)의 관계는 앞서 논설한 것처럼 전 찰나와 후 찰나의 관계이므로, 현재 찰나의 마음인 ‘식이 인식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뜻.
12)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89. 소리를 내게 하는 주체[能依]는 사람이지만 그 매개[所依]가 평상이기 때문에 ‘평상의 소리’라고 하듯이, 또는 나무를 자르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그 근거가 도끼이기 때문에 ‘도끼가 나무를 자른다’고 하듯이 ‘의근이 능히 법을 인식한다’는 경문은 ‘인식[了別]’이라는 사실의 근거[所依]가 되는 의근에 대해 인식 주체인 의식의 주체적 작용[能依業]을 설정한 것이라는 뜻.
13)
책상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를 듣고 ‘책상(소의:매개)의 소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책상을 두드리는 자(능의:주체)의 업을 나타낸다.
14)
안근이나 안식의 작용은 순수 감각 혹은 순수 지각과 같은 것이어서 구체적인 인식 내용을 갖지 않는다. 흔모(기뻐하여 추구하는 것)는 판단(慧, 즉 計度分別)과 기억(念, 즉 隨念分別)을 수반할 때, 다시 말해 유분별의 의식에 의해 생겨난다.(본론 제4권 ‘5식신의 무분별의 문제’ 참조)
15)
6수(受) 중 제6 의촉소생수를 심수(心受)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희(喜)ㆍ우(憂)ㆍ사(捨)라는 자성에 따라 세 가지 의근행(意近行)으로 나뉘는데, 이 같은 세 가지의 영납은 오로지 의(意)와 상응할 뿐이지만 각기 여섯 경계[境]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가 된다. 즉 이러한 희 등의 3법은 의근을 가까운 연[近緣]으로 삼아 경계로 자주 유행(遊行)하기 때문에 의근행(manopavicāra)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9권에서 상론한다. 즉 흔모의 분별은 안식에 의해 인기된 의식에 의한 것이지만, 마치 의촉소생수가 의근을 연으로 삼아 경계 대상으로 유행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 하듯이 안식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눈에 의해 흔모된 것’이라고 하였다는 뜻.
16)
혜견론이란, 본권 초두에 언급한 ‘안근을 문으로 삼아 혜(慧)가 색을 본다’는 유여사의 주장. 『대비바사론』에 따르면, 이는 존자 묘음(妙音)의 주장이다.(본론 제6권 주54 참조)
17)
누차 언급한 대로 6식은 소의에 따른 차별일 뿐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별도 없는 단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18)
유부의 근본아비달마(본론에서는 ‘本論’으로 일컬어짐)는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ㆍ『법온족론(法蘊足論)』ㆍ『시설족론(施設足論)』ㆍ『식신족론(識身足論)』ㆍ『계신족론(界身足論)』ㆍ『품류족론(品類足論)』과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의 『발지론(發智論)』 등 7론이며, 『비바사』는 앞의 『발지론』을 해석한 『대비바사론』을 말한다.
19)
『발지론』 제1권(한글대장경176, p.10). 이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상론한다.
20)
『품류족론』 제2권(한글대장경117, p.48).
21)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91. 『구사론』에서는 이상의 비유부 논사의 주장을 경부제사(經部諸師)로 전하고 있다. 경부, 즉 경량부(Sautrāntika)는 이상의 근견가(根見家)과 식견가(識見家)의 논의를 모두 파기한다. 그들에 의하면 대상[色境]이 생기하는 순간과 눈[眼根]이 작용하는 순간, 의식[眼識]이 일어나는 순간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고 있어 동시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계기(繼起)하는 세 가지 존재 사이에 직접적인 작용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 작용을 놓고서 인식 성립의 본질적 요소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은 마치 실재하지 않아 잡히지도 않는 허공을 서로 움켜쥐려고 맞붙어 싸우는 것[摣掣虛空]과 같다. 즉 인식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는 그 원인이 된 감관의 찰나, 외계 대상의 찰나는 이미 과거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도 작용하지도 않으며,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대상이 보여지고 있다고 하는 결과로서의 인식 그 자체[法]뿐이다. 따라서 경량부에서는 인식을 유부에서처럼 동일 순간에 공존하는 감관과 대상, 그리고 의식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즉 의식에 부과된 형상이 원인이 되고, 다음 순간 상속의 결과로서 인식이 생겨난다고 하는 인과의 관계로서 설명한다.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직 결과로서 드러나는 ‘인식’이라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주관적 계기나 객관적 계기로 분석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나 언어의 습관적 설정일 뿐이며, 인식 그 자체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상 근견과 식견, 그리고 이에 대한 경량부의 논의에 대해서는 권오민, 『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서울 경서원, 1994) 제2부 제5장 「아비달마 인식론의 중도적 지양」을 참조할 것.
22)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계(風界)는 순서대로 견(堅, 견고성)ㆍ습(濕, 습윤성)ㆍ난(煖, 온난성)ㆍ동(動, 운동성)의 자상과 지(持, 保持)ㆍ섭(攝, 引攝)ㆍ숙(熟, 成熟)ㆍ장(長, 增長)의 작용을 지닌다.(본론 제2권 ‘4대종’ 참조)
23)
여기서 총실(總實)이란 전체자로서의 실체라는 뜻으로, 이를테면 온갖 부품의 총화인 ‘차’, 5온의 총화인 자아 따위를 말한다. 즉 자아와 같은 전체자 통일자나 그 작용은 부정되지만, 그러한 전체자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법, 이를테면 안근ㆍ색경ㆍ안식과 같은 개별적인 실체(別實)로서의 자상과 작용은 부정하지 않는다. 전자가 가설적 존재[假有]라면 후자는 진실의 존재[勝義有]로서 실재한다는 것이 유부의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눈ㆍ색ㆍ식 세 가지는 능견(能見)ㆍ소견(所見)ㆍ능료(能了)라는 작용을 갖고 접촉하여 구성해 내는 것이 바로 ‘본다’는 인식이며, 그럴 때 ‘보는 것’은 오직 눈뿐이라는 것이다.
24)
이를테면 ‘나는 산을 본다’고 하였을 때 ‘나’는 제법의 인연 화합에 의해 드러난 가설적 존재이기 때문에 ‘보는 이’가 ‘나’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
25)
2제는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 이를테면 궁극적(승의)으로 불은 존재하지 않으며 타는 그것을 ‘불’이라고 하듯이, 사실상 눈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는 그것을 ‘눈’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세속언설에 의거하여 ‘눈이 본다’고 말하여도 어떠한 과실이 없다는 뜻. 여기서 ‘눈’은 작자이며, ‘보는 것’은 작용이다.
26)
「파륵구나계경」은 『잡아함경』 제15권 제372경(대정장2, p.102상중). 즉 총실로서의 자아(즉 요별하는 자)는 부정되지만 개별적 실체로서의 식(識)과 그 작용인 요별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뜻.
27)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4권 ‘무아와 윤회상속’에서 다시 논의한다.
28)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식이 요별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보는 것은 ‘자아’가 되어야 한다는 힐난.
29)
이하 앞의 ‘견ㆍ비견 분별’에 부수된 방론(傍論)으로, 본 단의 주제인 일안견(一眼見)과 이안견(二眼見)의 문제를 비롯하여 근과 경의 접촉[至]ㆍ불접촉 및 양적인 관계, 극미의 문제, 6식과 그 소의의 시간적 관계, 근이 소의가 되는 이유와 그에 따른 6식의 명칭, 그리고 3계(界) 9지(地)상에서 근ㆍ경ㆍ식의 상호 관계 등 여덟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30)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93)에 따르면, 이는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여러 위대한 논사(論師)들의 일반적 주장이다. 즉 『발지론』 제1권(한글대장경176, p.10)에서는 “한 눈을 감고 색을 보면 부정식(不淨識, 명료하지 않은 인식)이 일어나며, 두 눈을 뜨고 볼 때 정식(淨識, 명료한 인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두 개의 눈이 색을 본다”고 설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비바사론』(제13권초)을 비롯한 모든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31)
두 눈을 뜨면 분명하게 보인다고 해도 두 눈이 각기 전후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한 눈을 뜬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32)
즉 안식의 소의가 두 가지라면, 능의인 안식도 반분되어 역시 두 가지가 되어야 하고, 그럴 경우 동일찰나에 두 가지 인식이 동시에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식은 색처럼 방처(方處, 부피)를 갖는 것이 아니기에 분할될 수 없기 때문이다.
33)
이 같은 일안견설(一眼見說)은 독자부(본론 제6권 주54 참조), 혹은 후술하는 경부(經部) 중의 상좌에 의해 주장되었다.
34)
일안견설에 따르는 한, 두 눈을 뜨든 혹은 한쪽 눈을 감든 어차피 한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두 눈으로 보면 분명하고, 한 눈으로 보면 명료하지 않다’는 식의 차별적인 논의는 불가능하다.
35)
대체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36)
유선나(yojana, 구역에서는 由旬)는 거리의 단위.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설이 있으나 보통은 유행자(혹은 제왕)가 하루에 가는 거리 정도로서, 마을에서 유행자들이 머무는 숲까지의 거리인 1구로사(俱盧舍)의 8배. 길이의 단위에 대해서는 본론 제32권에서 상론된다. 여기서는 신근의 모든 부분을 나타낸다.
37)
열세 가지 화취란, 극열지옥에서의 불길을 말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8권 주38)의 본문을 참조 바람.
38)
유부 제법 분별에 따르면 유정은 유정으로서의 보편성, 즉 동분을 갖기 때문에 유정이라 불리는 것으로(본론 제12권 참조), 그 같은 동분(무차별동분)을 획득할 때 비로소 유정의 생이 낳아지게 된다. 따라서 한 유정의 생을 현상시키는 보편적 동분은 하나의 업[一業]에 의해 초래된다. 그리고 남녀ㆍ빈부ㆍ귀천 등 어떤 한 생의 내용을 구성하는 개별적 동분(유차별동분)은 다수의 업[多業]에 의해 초래된다. 이를 각기 인업(引業, 구역에서는 總報業)과 만업(滿業, 구역에서는 別報業)이라고 한다.(본론 제43권에서 상론함) 즉 상좌는 고수의 이숙과는 다수의 만업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만업은 법이(法爾)로서 이숙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연(緣)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 중현의 주장이다. 참고로 동분을 포함한 제법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에서는, 마치 씨앗이 상속 전변하면서 그 세력의 차별에 따라 싹 줄기 등의 온갖 형태로 나타나듯이 업은 그 세력에 따라 상속 전변하며 차별됨으로써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의 업에 의해 다수의 생이 낳아진다고 주장하였다.
39)
등활나락가는 8대지옥 중 하나로, 온갖 괴로움에 몸을 핍박당해 자주 번민하여 죽을 듯하다가도 본래대로 소생하여 다시 괴로움에 핍박되기 때문에 ‘등활’이다. 지옥에서 몸이 완전히 산괴(散壞)함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지옥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에서 상론한다.
40)
식(識), 즉 마음은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41)
식이 주처(住處)를 갖는다면, 결국 일 찰나 중에는 두 눈 중 어느 하나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有分], 두 눈 사이에 머무는 것이라 하는 경우 신식과 구별이 없어질 것이며[相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결국 하나의 식이 아니어야 한다[非一]. 그러므로 ‘식은 주처를 갖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후술)
42)
‘안식은 소의인 근에 따라 손상되기도 하고 이익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안근 중에 머무는 것이다’는 주장은, 이를테면 ‘음성은 인식 대상이 되기 때문에 무상하다’의 경우처럼 이유명제의 진위가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즉 인식 대상에는 무상한 것도 있고 영원한 것도 있듯이 소의에 따라 손상되거나 이익되는 경우에도 소의 중에 머무는 것도 있고 머물지 않는 것도 있다.
43)
식은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대상과의 원근(遠近)을 말할 수 없다는 힐난.
44)
이상 ‘어떻게 두 눈에 의해 하나의 안식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설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결정적 논거는 ‘식은 주처(住處)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45)
만약 안근이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라면, 후술하듯이 안근에서 빛(광명)이 나와 대상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일 찰나의 빛이 멀고 가까운 대상에 동시에 함께 이를 수는 없다는 뜻.
46)
이러한 주장은 승론(勝論, Vaiśeṣika)의 주장이다. 즉 승론에서는 안근의 본질[體]을 화대(火大)로 이해하여 그 빛이 대상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47)
수정 등에 의해 감추어진 대상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한다는 말이며, 의혹이 생겨나는 것 또한 감관과 대상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뜻.
48)
이근이 직접 접촉한 대상(소리)만을 취하는 것이라면 4방 8유의 원근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원근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직접 접촉한 대상(향)만을 취하는 비근에도 역시 원근의 관념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
49)
코는 냄새(향)나는 곳의 방향이나 원근을 알지 못하며, 설혹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냄새나는 쪽으로 기웃거려 추측하여 아는 것일 뿐이라는 뜻.
50)
외계의 냄새를 맡음으로써 코와 함께 생겨난 내적인 냄새도 취할 수 있다는 뜻.
51)
만약 안근 등이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하는 것이라면, 불접촉이라는 점에서 이 모두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또한 마땅히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힐난.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94)에서는 다만 “만약 안근이 직접 접촉하지 않은 색만을 능히 볼 수 있다면, 어째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장애를 갖는[有障, 감추어진] 등의 온갖 색을 능히 널리 볼 수 없는 것인가?”라고만 묻고 있다.
52)
소리가 귀에 들어와 들리는 것이라면, 이미 요령에서 울린 소리는 요령을 잡더라도 들려야 하지만 그런 일은 없기 때문에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한다는 뜻.
53)
소리는 그것의 소의(예컨대 종)를 떠나 전전(展轉) 상속하여 청각 기관(귀)에 이를 때, 다시 말해 청각 기관과 직접 접촉할 때 들려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생겨난 순간과 들려진 순간은 동시가 아니기 때문에 소리가 들려졌을 때 소의에서 생겨난 소리는 소멸하였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
54)
예컨대 기름이 다하면 등불도 밝음도 동시에 함게 소멸한다.
55)
향은 코(비근)와 직접 접촉하여 지각되는 대상[至境]이지만, 예컨대 이명(耳鳴)과 같은 귓속의 소리는 직접 접촉하여 지각되는 대상이 아니다.
56)
이하 어둠 속의 색이 밝은 곳에서의 색과 다른 종류의 색이 아님을 밝힌다.
57)
‘어둠’은 어둠 속의 색이 생겨나고 밝은 곳에서의 색이 소멸하는 원인이 되며, ‘밝음’은 어둠 속의 색이 소멸하고 밝은 곳에서의 색이 생기하는 원인이 된다.
58)
불이 원래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나무의 마찰과 같은 보조적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진술은 일견 타당한 것 같지만, 불이 반드시 보조적 원인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불성(不成, 미확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59)
지극히 멀리 있는 색은 ‘멀다’는 공간적 원격성에 의해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능히 볼 수 없다고 하듯이 어둠 속의 색 역시 암흑에 가로막혀 볼 수 없다는 뜻.
제8권
1)
이는 『구사론』(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95)상에서의 이유이다.
2)
결론적으로 말해 정통유부인 카슈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극미의 직접적인 상호 접촉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만약 극미가 결합한다고 할 때, 그것은 부분적 결합 아니면 전체적 결합이다. 하나의 극미는 통상 사방상하 여섯 개(본론에서는 사방의 네 개)의 극미에 둘러싸여 최초의 결합을 시작하는데, 그럴 경우 극미는 여섯 부분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극미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 것[無方分]이기 때문에 그 같은 부분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극미는 너무나 미세하여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고 하여 일곱 개의 극미가 동일 공간에서 전체적[遍體]으로 접촉한다면 결국 구체적인 물질도 하나의 극미 크기 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각 극미의 본질 자체가 뒤섞여 버리고 만다. 따라서 유부에서는 제 극미가 절대적으로 근접하여 ‘그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無間]을 접촉이라 이름하고, 그 실재성을 인정하였던 것이다.(후술)
3)
본 역(譯)에서는 지경(至境, prāptaviṣaya)을 일관하여 ‘직접 접촉한 대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원래 감관에 ‘도달한, 출현한, 혹은 획득된 대상’이라는 뜻이며, 실제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prāpti는 득(得, attain)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엄밀히 보면 접촉(觸, sparśa,contect)과는 그 의미가 다르지만, ‘눈은 그것과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하고 몸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고 하는 것이 보다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에 ‘접촉’이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아울러 주 2)에서 보듯이 유부에 의하는 한 실제의 접촉[觸] 또한 불가능하며, 무간(無間)의 절대적 근접을 ‘접촉’이라 가설한 것이기 때문에 ‘지(至)’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하 ‘지경’의 ‘지’는 ‘(직접) 접촉’으로, ‘촉’은 ‘실제적 접촉’으로 번역한다.
4)
휴류자(鵂鶹子, Ulūka, 혹은 Kanada, 기원전 150-50 무렵)는 바이세시카 학파의 개조로, 낮에는 색(色)ㆍ성(聲) 따위를 피해 산이나 숲 속에 숨어들고 밤에만 걸식하고 다녀 올빼미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휴류자’라고 하였다. 혹은 밤이 되면 부녀자나 어린애들을 놀라게 하면서 나돌아다니다 마당의 맷돌에서 겨에 섞여 있는 쌀알갱이를 골라 먹었기 때문에 ‘식미제(食米濟)’라고도 하였다.(『성유식론술기』 제1권末) 그는 세계를 해명함에 있어 실체[實]ㆍ속성[德]ㆍ운동[業]ㆍ보편[同]ㆍ특수[異]ㆍ내속[和合] 등의 6가지 범주[句義]를 설정하였는데, 소리(śabda)는 24가지 속성[德, guṅa] 중의 하나로, 결합이라는 또 다른 속성에 의해 실체와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소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결합에 의해 생겨난 소리이며, 둘째는 분리에 의해 생겨난 소리이며, 셋째는 소리로부터 생겨난 소리이다. 결합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란, 가촉성(可觸性)을 지닌 실체가 결합하는 세력 작용과 함께할 때의 소리로서, 가촉성의 실체가 공처(空處)에서 결합하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다.”(『勝宗十句義論』, 한글대장경250, p.602).
5)
즉 두 색법의 상속이 근접하여 생겨날[隣近生] 때를 ‘결합’이라 가설(假說)할 수 있기 때문이다.(후술)
6)
‘촉계를 갖는 것’이란, 4대종의 견고성[堅性]ㆍ습윤성[濕]ㆍ온난성[煖]ㆍ운동성[動]과, 일곱 가지의 조작된 촉[所造觸], 즉 미끄러움[滑性]ㆍ껄끄러움[澁性]ㆍ무거움[重性]ㆍ가벼움[輕性]ㆍ차가움[冷]ㆍ허기짐[飢]ㆍ목마름[渴]의 성질을 갖는 색법을 말한다.(본론 제1권 참조)
7)
『대비바사론』 제132권(대정장27, p.684상;한글대장경123, p.145). 이하의 인용문은 “온갖 ‘이러한 접촉된 존재[是觸物, 곧 화합색]’는 바로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접촉되지 않은 것[非觸, 곧 극미]’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4구분별이다. 곧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이 제시될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하는 의도에서 극미의 상호 접촉을 주장하는 이설자가 이를 논증(論證)으로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구사론』(제2권, 앞의 책, p.97)상에서는 두 극미 사이에 더 이상 극미가 개입될 수 없는 무간의 근접을 ‘접촉’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의 논증(論證)으로 인용하고 있다.
8)
향유진(또는 隙遊塵)은 1극미의 7의 7승으로, 이를테면 문틈[隙]으로 들어온 광선에 비쳐 겨우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티끌을 말하는데(본론 제32권 참조), 이러한 미세한 색취[細聚]는 다시 그러한 미세한 티끌을 낳기도 하고, 혹은 더욱더 미세한 것을 낳기도 하여 전후 차별은 있을지라도 다 같이 미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을 것을 낳는 것으로 분별한 것이다.
9)
『대비바사론』 제132권(대정장27, p.684상), “문;[극미가 실제적으로 접촉한 것이 아니라 무간(無間)으로 결합한 것이라면] 취색(聚色, 극미 화합물)이 서로 부딪칠 경우 어찌 흩어지지 않는 것인가? 답;풍계(風界)가 포섭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風界攝持故令不散).” 즉 유부에서는, 극미의 실제적 접촉은 불가능하며, 무간의 결합을 일시 ‘접촉’이라 가설하지만, 극미 상호간의 견인력을 풍계의 힘으로 이해하여 그것에 의해 산괴(散壞)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0)
이는 단일한 극미 자체를 부정하는 비유사의 힐난이다. 비유사와 경량부는 다만 유방분(有方分)의 복합극미(여기서는 ‘是觸’)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본론 제2권 ‘상좌의 有色處 가유론 비판’ 참조)
11)
즉 현상에서 경험되는 구체적 물질인 색취(거친 화합색)는 미취(微聚, 미세한 화합색)에서 낳아진 것으로, 『바사』에서의 ‘접촉되지 않은 것[非觸]’이란 바로 이러한 미취를 의미한다는 뜻.
12)
예컨대 부동촉(不動觸)과 무소유촉(無所有觸)과 무상촉(無相觸)을 설하고 있는 바로 앞서 인용한 계경.
13)
비유사나 경량부에서는 무방분의 극미를 부정하고 유방분의 복합극미(saṃghatā paramāṇu)만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것을 물질(색법)의 최소단위로서 단일한 존재라고 하는 한 ‘화합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14)
이상은 무방분의 극미를 주장할 경우, 하나의 극미를 중심으로 한 사방의 네 극미의 결합 또한 무방분이 되어 서로를 장애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상좌(上座)의 논란. 유부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극미는 상호 접촉하지 않으며, 다만 무간의 근접을 ‘접촉’이라 가설한다.(후설)
15)
극미가 부분을 갖지 않는 것이면서 실제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다수의 극미 취집은 결국 하나의 극미 크기일 수밖에 없다는 뜻.
16)
유부의 정의(正義)는 관념적 극미[假極微]는 무방분이지만 실제적 극미[實極微]는 유방분으로 부피를 갖는다는 것이다.(본론 제32권 ‘공간, 즉 길이의 단위’ 참조) 즉 구체적인 물질[有對色]을 세분하여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것을 극미라고 할 때, 이는 관념[覺慧]으로써 더 이상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시간의 극소인 찰나를 더욱 분할하여 1/2찰나라고 할 수 없듯이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 극소이다. 따라서 이는 무방분이지만, 이 같은 극소 화합물인 미취(微聚)는 유방분으로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적 극미이다.(본론 제10권 ‘색법의 俱生’ 참조)
17)
앞서 인용한 “멸진정(滅盡定)에서 출정(出定)할 때 부동촉(不動觸)ㆍ무소유촉(無所有觸)ㆍ무상촉(無相觸)과 접촉한다”는 경설을 말한다.
18)
요약하면 비ㆍ설ㆍ신근은 모두 ‘직접 접촉하는 대상’을 취하지만 근접의 정도를 달리하기 때문에, 근접하는 대상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오로지 신근과 촉경만을 ‘능히 접촉하는 것’, ‘접촉되는 것’이라 한다는 뜻.
19)
미끄러움과 껄끄러움 등은 촉의 11가지 자성 중의 하나이다.(본론 제1권 참조)
20)
왼손과 오른손이 접촉할 때 어느 것을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 하고, ‘접촉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따라서 접촉의 능(能) 소(所)는 일시 가설된 개념일 뿐이라는 뜻.
21)
“‘접촉되는 것’도 역시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신근도 역시 바로 ‘접촉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대상과 대상을 갖는 법은 마땅히 뒤섞여 버리고 말 것이다.”(본권 주 7)과 관련된 본문 참조)
22)
세친은 이를 “화합색(和合色)은 부분을 지니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한다 하여도 여기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로 논설하여 유부정설로 간주하고 있다.(『구사론』 제2권, 앞의 책, p.97) 여기서 화합색은 극미소성(極微所成)의 색. 즉 제 극미 상호간에는 접촉하지 않지만 그러한 극미의 집적에 의해 이루어진 분할할 수 있는 현상의 구체적인 색은 상호 접촉한다는 뜻. 이 같은 견해는 『바사(婆沙)』에는 보이지 않으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대정장31, p.76상)에서도 유부정설로 설하고 있다. “迦濕彌羅國毘婆沙師言;非諸極微有相合義, 無方分故--但諸聚色有相合理, 有方分故.”
23)
본권 주 9) 참조.
24)
우주[器世間]가 처음 형성될 때 먼저 온갖 유정들의 업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풍륜이 생겨나고 다음으로 수륜이 생겨나는데, 수륜(물)이 흩어지거나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은 풍륜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본론 제31권 ‘3輪’ 참조)
25)
본권 주2) 참조.
26)
‘접촉하는 것’과 ‘접촉되는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이익이나 손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예컨대 손이 칼에 베였다면 손은 접촉하는 것인가, 접촉되는 것인가 하는 힐난.
27)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을 소조색(所造色)이라 한다. 광명, 즉 빛과 밝음은 소조색으로, 12가지 현색(顯色) 중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태양의 불꽃을 일컬어 ‘빛’이라고 하며, 달이나 별, 화약, 보주(寶珠), 번개 등의 온갖 번쩍임을 ‘밝음’이라고 한다.(본론 제1권 ‘5경’ 참조)
28)
대덕(Bhadanta). 이는 위대한 덕행이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특정의 개인에 대한 존칭의 보통명사인지 또는 고유명사인지는 불명. 『대비바사론』에는 대덕의 설이 지금 여기서의 설(제132권, 한글대장경123, p.145)을 포함하여 116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데, 목촌태현(木村泰賢)은 그를 각천(覺天, Buddhadeva)으로, 궁본정존(宮本正尊)은 법구(法救, Dharmatrāta)로 보고 있다. 지금 여기서의 설은 '접촉'이란 다만 그 중간에 일 극미도 들어갈 여지도 없는 절대적 근접[無間]을 개념적으로 가설(假說)한 것이라는 뜻.
29)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98). 원문은 ‘中間旣空 誰障其行’으로, 여기서 행(行)은 앞의 공(空)을 말한다. 참고로 『구사론』상에서는 이를 논거로 삼아 극미 사이에 간극이 있다면 그것을 유대(有對)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유부의 극미 불접촉설을 부정하고 있다. 이하 이 같은 대덕의 설을 평가하면서 이에 대해 반론한다.
30)
즉 뒤섞이지 않는다고 하는 이상 극미는 유방분이 되어야 하며, 간극이 없다고 하는 이상 극미의 상호 접촉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극미는 무방분이며 상호 접촉하지 않는다는 유부의 주장과 상반되어 긍정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뜻.
31)
원문에서는 ‘但由無間’을 줄여 다만 ‘但間’이라고만 쓰고 있다.
32)
제 극미는 상호 접촉하지 않기 때문에 ‘결정코 간극이 있지만[定間]’, 그 사이로 하나의 극미도 들어갈 여지가 없기 때문에 ‘간극이 없다[無間]’고 하였다는 뜻.
33)
이는 『구사론』(앞의 책, p.99)상에서 ‘근과 경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에 관한 논주 세친의 총평이다. 유부의 경우 극미 무방분(無方分)설을 취하지만 경량부에서는 유방분설을 주장한다. 그럴 경우 유방분이라면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극소의 색인 극미에도 방분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극미가 서로 접촉한다고 하든 하지 않는다고 하든 문제될 것이 없다. 즉 이미 유방분이라고 하였으므로 접촉함으로써 다시 분석될 수 있다는 논란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극미가 무방분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문제되지 않으니, 원래 방분이 없다고 하는 극미가 서로 접촉(즉 無間觸)할지라도 거기에 방분을 인정한다는 뜻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세친의 뜻은 근ㆍ경 화합이라는 인식의 문제에 있어 접촉ㆍ불접촉의 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34)
본권 주 2) 참조.
35)
본 단의 주제는 인식[見]의 과정상에서 근과 경의 양적 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예컨대 눈이 큰 산을 볼 경우, 눈의 극미와 같은 크기[等量]의 대상을 각각으로 취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취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큰 산을 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눈에 자재(自在)의 작용이 있어 대상의 크기에 관계없이 동시에 취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36)
『구사론』(앞의 책, p.100)에서는 파지가(頗胝迦), 즉 수정과 같다고 하였다.
37)
세친은 이를 ‘전설(傳說)’로 전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구사론』, 앞의 책, p.101)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에 의하면, 이는 서방(西方)의 고덕(高德)이 전하는 의가(醫家)의 설로서, 혀 중앙에 설근 극미가 없는 지극히 작은 한 지점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사혈(死穴, 즉 末摩, marman)이라는 것이다.
38)
즉 안근 등의 극미는 어느 하나가 동분이면 다른 모든 극미도 동분이 되어 동시에 작용하지만, 신근의 경우 신근과 그 대상이 되는 각각의 극미에 간극(間隙)이 있어 동시에 신식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동시작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손끝에 느낌이 있다 해서 발끝에도 동일한 느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신체 어느 한 극미가 손상되어도 전체의 극미가 손상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약 동시에 작용한다면 극열지옥에 떨어진 유정의 몸은 동시에 산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방분 극미의 상호 접촉을 주장하는 경량부에서는 신근의 극미 역시 동시에 작용한다고 주장하며(身根遍發識說), 그래서 세친은 이를 ‘전설’로 전하고 있다.(『구사론』, 앞의 책, p.101) 참고로 경량사(經部師)인 상좌(上座) 스리라타는, 극열나락가에서 몸이 산괴되지 않는 것은 피동분의 신근 때문이 아니라 숙업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본론 제7권 주37 참조)
39)
안 등의 5근은 개별적인 소의[別所依]이며, 의근은 6식 모두에 공통하는 소의[通所依]이다.
40)
마음은 반드시 단독으로는 일어나지 않으며 소의와 소연(대상)에 근거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 찰나의 마음과 그 작용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를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 한다. 여기서 ‘등무간’이란 전 찰나의 마음과 후 찰나의 마음 사이에 또 다른 마음이 개입되지 않는 시간적 상태를 말한다.(본론 제19권 참조)
41)
여기서는 4구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제1구는 안식의 소의가 되면서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 구생(俱生)의 안근은 안식의 소의이지만 그 자체 심ㆍ심소가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 제2구는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면서 소의가 되지 않는 것. 즉 과거로 멸해 버린 심소는 다음 찰나의 그것에 등무간연이 되지만 소의는 되지 않는다. 제3구는 안식의 소의가 되면서 동시에 등무간연도 되는 것. 과거인 의근은 안식의 소의가 되면서 다음 찰나의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제4구는 안식의 소의도 되지 않으면서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 것. 무위나 색 등의 5경, 불상응행법은 소의도 아니며(다만 소연성일 뿐), 또한 심법도 아니기 때문에 등무간연도 되지 않는다.
42)
근(根)과 경(境)을 인연으로 하여 식(識)이 생겨나고, 이 세 가지의 화합을 촉(觸)이라고 할 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근과 경은 식에 선행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경량부에 따르면 근ㆍ경ㆍ식 삼자는 시간적으로 동시[俱時]가 아니며, 따라서 그 사이의 직접적인 작용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본론 제7권 주21 참조) 이에 대해 중현은 삼자는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인과로서 상속(相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합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본론 제29권 ‘촉에 대하여’ 참조) 참고로 유부와 경량부 사이의 대론의 전제는 언제나 제법의 동시 구기설(俱起說)과 이시(異時) 계기설(繼起說)이었다.
43)
경량부의 과미무체설(過未無體說)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 참조.
44)
현량(pratyakṣa)이란, 언어와 결합 가능한 개념적 구상을 떠난 무분별(無分別)의 지식으로, 말 그대로 눈(yakṣa) 등의 감관과 현전(현재)의 대상이 직접 관계하여 일어나는 대상 자체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45)
현량의 지각 대상은 감관과 동시 존재하는 외계 대상이 아니라 영납(領納)을 본질로 하는 ‘수(受)’라는 뜻.
46)
과거색에 대해서는 수(受)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이 같은 ‘수’에 대해 현량의 지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다른 이의 ‘수’를 자신이 영납한다는 말과 같다는 뜻.
47)
유루지(有漏智)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세제일법(世第一法)과 무간(無間)에 일어나는 견도(見道) 제1찰나인 고법지인(苦法智忍)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 참조.
48)
“알려지는 것[所識]은 바로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이라 이름하고, 색식(色識) 내지 법식(法識)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구사론』 제2권, 앞의 책, p.104)
49)
‘법’에는 광의의 법과 협의의 법 두 가지가 있다. 자상(自相)을 갖는 일체법이 전자라면, 18계 중의 법계(여기에는 17계에 포섭되지 않는 심소나 불상응행법 무위등의 법이 포함된다)는 후자이다. 여기서 보편적인 법[通法]이란 일체법을 말하고, 개별적인 법[別法]은 법계를 말한다.
50)
법계에는 심ㆍ심소법 이외에도 불상응행법이나 무위법도 포함된다.
51)
북소리는 손과 북이 합하여 생겨나지만 북은 소리의 뛰어난 소의이고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손소리’가 아닌 ‘북소리’라고 이름한 것이며, 보리 싹은 보리 씨앗과 땅, 수분, 온도 등의 조건에 의해 생겨나지만 그 주요 원인에 따라 ‘보리 싹’이라고 이름하였다는 뜻.
52)
예컨대 산(색)은 태생(胎生)인 인간에게도 난생(卵生)인 새에게도 다 같이 안식을 낳게 하는 공법(共法)이지만, 인간의 눈(안근)은 오로지 자신의 안식만을 낳을 뿐 새의 안식을 낳게 할 수 없는 불공법(不共法)이라는 뜻.
53)
예컨대 욕계 생의 의근은 색계 생의 의식을 낳을 수도 있다.
54)
허공은 일체 처(處)에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벽 등에도 존재한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허공은 장애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벽 등에 의해 은폐된 사물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
55)
「상적유경」(『중아함경』 제7권, 대정장1, p.467). “만약 내적인 안처(眼處)가 허물어지지 않고 외적인 색이 광명(光明)을 받게 되면 바로 생각[念]이 있어 안식이 생겨나게 된다.(若內眼處不壞者, 外色便爲光明所照, 而便有念, 眼識得生)”
56)
이 단에서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3계(界)ㆍ9지(地)상에서의 소의신ㆍ근ㆍ경ㆍ식 네 가지의 관계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즉 유부에 의하면 욕계에는 18계 전부가 존재하지만, 색계 초선에 이르면 향ㆍ미와 비식ㆍ설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제2선 이상 제4선에서는 앞의 네 가지 이외 안ㆍ이ㆍ신식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시 무색계에 이르면 앞의 15계가 부재하고 오로지 의ㆍ법ㆍ의식의 3계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하지(下地)에 있더라도 선정지(智)나 천안ㆍ천이통에 의해 상지를 인식할 수 있으며, 상지에서도 하지의 인식이 가능하다. 그럴 때 바로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57)
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눈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58)
욕계의 눈으로써 색계의 천안을 얻어 색계의 색을 보는 경우.
59)
색과 안식이 안근과 등지라는 것은, 소의신은 욕계에 있으면서 욕계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하지라는 것은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선의 색을 보는 경우이다. 이때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고,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60)
등지는 욕계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이며, 상지는 제2정려의 천안을 획득하고 초정려의 안식을 빌려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이때 색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기 때문에 색은 식의 상지임)이며, 하지는 초정려의 안식으로써 욕계의 색을 요별하는 경우이다.
61)
제2정려 이상에서 태어나 초정려의 식신을 빌려 상지의 촉경을 느낄 경우, 식신은 신근과 촉경보다 하지이다.
62)
5수근(受根)이란 다섯 가지의 수(受)의 심소로서, 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사근(捨根)을 말하며, ‘신’등의 5근이란 지혜의 자량이 되는 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 등의 다섯 가지 심소를 말한다. 그리고 3무루근이란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을 말하는 것으로, 첫 번째는 견도위(見道位)의 무루지이고, 두 번째는 수도위(修道位)의 무루지, 세 번째는 소작이변(所作已辨), 즉 무학위(無學位)의 무루지이다. 즉 이 세 가지 무루근은 의(意)ㆍ희(喜)ㆍ낙(樂)ㆍ사(捨)ㆍ신(信) 등의 5근을 본질로 하는데, 이 중 의근은 법계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라고 한 것이다.(후설) 이를 비롯한 유부 아비달마에서 정리하는 22근에 대해서는 본론 제9권에서 상론한다.
63)
여기서 아비달마 여러 대논사가 설한 것이란, 『발지론』(제14권, 한글대장경176, p.324)과 『대비바사론』(제142권, 한글대장경123, p.374)을 말하는 것으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전통적으로 22근을 설정함에 있어 무소연의 색법을 먼저 설하고, 그 후에 의근이나 낙(樂)ㆍ희(喜) 등 유소연의 심ㆍ심소법을 설하고 있다.
제9권
1)
근의 원어 indriya는 ‘Indra에 상응하는’ 혹은 ‘~속한’이라고 하는 뜻의 형용사로서, 명사로 쓰일 경우 인드라의 힘, 인드라의 영역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하 논설처럼 근은 뛰어난 힘 즉 증상력(增上力, ādhipatya)의 뜻으로 해석된다.
2)
‘가장 뛰어나게 자재하다[最勝自在, paramaīśvarya)’는 indriya의 어근 √idi의 뜻이고, ‘밝고 명료하다[照灼明了]’는 √indh(to kindle, light) 혹은 √ind의 뜻이다. 이에 대해 『구사론』 제3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111)에서는 “가장 수승[最勝]하게 자재(自在)하며, 빛나고 현저[光顯]하기 때문에 ‘근’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으며, 『구사석론』(제2권, 대정장29,p.173상)에서는 “근이란 사용(事用)에 있어 증상 자재하기 때문에 최승자재(最勝自在)의 뜻이며, 또한 소의신 중 가장 밝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광식(光飾)의 뜻이다”고 하였다.
3)
치성광현(熾盛光顯, indonti)은 그 어근 ind의 현재 3인칭 복수형의 역어이다.
4)
앞의 이유는 안근과 이근이 소의신을 이끄는 작용을, 뒤의 이유는 비ㆍ설ㆍ신근이 소의신을 기르는 작용을 설명한 것이다.
5)
여기서 ‘생신(生身)을 수호함’이란 험난한 곳을 피하여 몸을 보호하는 것을 말하며, ‘법신(法身)을 수호함’이란 많이 들어 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6)
여기서 선체(ṣunḍha, 구역은 黃門)는 무세근(無勢根) 즉 남근이나 여근을 갖지 않은 자를 말한다. 이와 유사한 이로서는 남ㆍ여근을 갖지만 그 작용이 불완전한 성불구자인 반택가(半擇迦, paṇḍāka, 구역은 故作黃門), 남ㆍ여근을 동시에 갖은 이형인(二形人)이 있다. 즉 일반인들은 여ㆍ남근으로 말미암아 불율의 즉 악계(惡戒)를 수지(受持)하기도 하고, 선근을 끊고 무간업을 짓기도 하며, 또한 이와 반대로 율의를 수지하고, 성도에 들어 성자가 되기도 하며 이욕(離欲)하기도 하지만, 선체 등에는 그런 일이 없기 때문에 여ㆍ남근은 염오법과 청정법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는 뜻.
7)
중동분(衆同分)이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서, 예컨대 사람을 사람이게끔 하는 보편성을 말한다. 곧 명근은 중유(中有)의 중동분이 사유(死有)의 중동분을 상속하게 하고, 또한 능히 이후의 중동분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8)
본 권 주 84)의 본문 참조.
9)
『중아함경』 제24권 「대인경(大因經)」(대정장1,p.579하). 갈라람(kalalam)은 중유(中有)가 입태한 후 첫 7일 간의 상태.
10)
낙 등의 5수근이란 낙(樂)ㆍ고(苦)ㆍ사(捨)ㆍ우(憂)ㆍ희(喜)의 다섯 가지 감각적 기능을 말하며, 신(信) 등의 8근이란 일체의 청정법을 낳는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근과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俱知根)의 3무루근을 말한다.
11)
희근과 낙근은 탐수면(貪隨眠)의 소의가 되고, 우근과 고근은 진(瞋)수면, 사근은 치(癡)수면의 소의가 된다. 다시 말해 ‘탐’은 희근과 낙근에 따라 증장하고, ‘진’은 우근과 고근에 따라, ‘치’는 사근에 따라 증장한다.
12)
『중아함경』 제10권 『하의경(何義經)』(대정장1,p.485중)에 나온다. 즉 심신이 안락하면 마음도 삼매와 상응하여 정(定)을 획득하게 된다는 뜻.
13)
『증일아함경』 제23권(대정장2,p.668중)에 나온다. ‘낙으로써 낙을 구할 수는 없고, 괴로움 이후에 도를 성취하게 된다.’ 즉 생사의 괴로움을 혐오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 열반의 대락(大樂)을 욕구하고 그것으로의 신(信)을 일으키기 때문에, 고(苦)는 신(信)의 소의가 된다.
14)
여기서 ‘등’이라고 함은 『중아함경』 제42권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대정장1,p.692하 이하)에서 언급되는 ‘여섯 가지 출리(出離)의 소의가 희(喜)와 우(憂)와 사(捨)이다’를 말한다.(『구사론』 3권, 앞의 책,p.114) 여기서 여섯 가지 출리란 색 등 6경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희ㆍ우ㆍ사를 말하는 것으로, 소연의 경계에 근거하여 여섯이라고 하였다. 즉 선심상응의 희ㆍ우ㆍ사가 색 등의 6경을 반연하여 애착을 낳지 않을 때 그것은 바로 생사 출리(出離)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
15)
본송 첫머리에서 ‘전설에 따르면’이라 하였고, 『구사론』(앞의 책,p.115)에서는 이상의 논설을 마치면서 ‘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라고 논설하고 있다. 즉 세친은 ‘근’의 의의에 관한 이상의 논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만 비바사사가 전하는 설 즉 ‘전설(kila)’이라고 하였으며, 계속하여 이에 대한 이설(普光의 『俱舍論記』에서는 識見家등의 설, 法寶의 『俱舍論疏』에서는 曇無德 Dharmagupta, 즉 법장부의 설, 『稱友釋』에서는 경량부설로 해석됨)로서 다음의 세 게송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16)
이러한 주장은 대상에 대한 인식은 감관의 작용[見]에 의해서가 아니라 식의 확인 판단[決度]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 같은 의미에서 보광(普光)은 이러한 이설의 주장자를 식견가(識見家)라고 평석하고 있는 것이다.(前註 참조)
17)
이는 논주 중현의 비판이다. 색 등의 6경도 식을 낳는 소연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6근을 그러한 이유에서 ‘근’으로 설정하였다면 6경 역시 ‘근’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뜻.
18)
이는 식견가의 답이다. 색 등의 6경도 소연으로서 작용하고 있지만, 안근 등이 다양한 색의 인식을 위한 통인(通因)이 되는데 반해 색경 등은 오로지 청색이면 청식(靑識)만을 낳게 할 뿐이며, 또한 안근 등의 승열 강약에 의해 안식에 밝고 어두움이 있지만 색경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근’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증상력이란 가장 수승[最勝]하게 자재(自在)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색을 요별하는 식이 발생하는데 가장 수승하게 자재한 것은 색이 아니라 눈이며, 따라서 색 등의 대상을 ‘근’이라 이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
중현의 답. 유부에 있어서도 피동분 근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앞서 언급한 구체적인 작용은 갖지 않지만, 몸을 장엄하는 작용만은 갖고 있다.
20)
즉 앞에서 이미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정설로서 ‘식과 심소를 낳는 것은 5근의 작용 중의 하나(세 번째 ‘生識等’)임을 밝혔음에도 식견가(識見家)는 다시금 다른 작용은 배제하고서 6근은 6식을 낳는데 증상력이 있다고 하였지만, 양자 사이에는 사실상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뜻.
21)
본론 제6권~7권에 걸쳐 식견설(識見說)에 대해 비판하였다.
22)
『구사론』 제3권(앞의 책,p.117). 이하 논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거기서의 논설을 모두 인용하면 이와 같다. “3무루근은 그 다음 다음의 도와 열반 등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여기서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은 유형별로 그 하나하나는 각기 능히 근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미지당지근은 이지근의 도를 획득하는데 증상의 작용이 있고, 이지근은 구지근의 도를 획득하는데 증상의 작용이 있으며, 구지근은 열반을 획득하는데 증상의 작용이 있다. 즉 이 때까지 마음은 아직 해탈하지 않았고, 반열반(般涅槃)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여기서 9근이란 의(意)ㆍ낙(樂)ㆍ희(喜)ㆍ사근(捨根)과 신(信) 등의 5근을 말한다. 이러한 9근과 3무루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 권 ‘3. 제근 각각에 대한 해명’을 참조 바람.
24)
『구사론』 제3권(앞의 책), p.118.
25)
수행도에는 준비단계인 가행도, 번뇌를 끊는 무간도, 번뇌에서 벗어나 이계(離繫) 택멸(擇滅)을 획득하는 해탈도, 보다 높은 단계의 무간도로 승진하는 승진도 네 종류가 있는데(본론 제71권 ‘4道 ’참조), 만약 미지근 등이 견도 등의 번뇌를 끊는 증상력이라고 한다면 무간도만이 ‘근’이고, 그 밖의 도는 ‘근’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
26)
순결택분은 가행도인 4선근(煖ㆍ頂ㆍ忍ㆍ世第一法)을 말하는 것으로, 무루의 견도[결택]를 낳는 원인이기 때문에 순결택분이다(본론 제61권 참조). 또한 도류지는 무루 현관의 제16찰나이지만 제15찰나인 도류지인(道類智忍)을 다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도이다.(주32 참조) 그런데 만약 견소단의 번뇌를 끊는데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미지당지근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미지당지근이 되어야 한다는 뜻.
27)
현관에는 오로지 무루혜만으로써 성제(聖諦)를 관찰하는 견현관(見現觀), 무루혜와 더불어 그 상응법인 심ㆍ심소가 동일한 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연현관(緣現觀), 도공계(道共戒)와 4상(相) 등 무루혜와 구기(俱起)하는 법이 함께 작용하는 사현관(事現觀) 세 가지가 있다.(본론 제62권 참조)
28)
주 23)에서 언급한 9근에서 ‘혜’를 제외한 8근.
29)
고법지인(苦法智忍) 등의 8인은 4제의 이치를 인가하는 무간도(고법지는 해탈도임). 그런데 만약 3무루근이 두 가지 근을 갖춘다고 할 경우, 번뇌를 멸하는 단계인 인위(忍位) 또한 ‘혜’를 갖추게 되기 때문에 이 역시 현관하는 것이라 해야 한다는 뜻.
30)
고법지인 내지 멸류지인이 현관하는 것이라면, 고법지 내지 멸법지의 7지(즉 무루 8지 중 멸류지를 제외한 7지,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본권 주31 참조)는 거듭 현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증상력을 갖지 않게 된다.
31)
고제와 집제의 본질은 다같이 5취온이지만 고제는 무상ㆍ고ㆍ공ㆍ비아(非我)로 표상되며, 집제는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으로 표상된다. 4제의 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 ‘4선근’을 참조 바람.
32)
도류지(道類智)는 제16찰나의 현관이지만 견도(見道)가 아니라 수도(修道)이다. 무루혜에 의한 4제의 현관은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견도’라고 하는데, 도류지에 이를 때 아직 알지 못한 진리(上2계의 道諦 4상인 道ㆍ如ㆍ行ㆍ出)는 있을지라도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진리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즉 ‘인’은 모두 ‘견’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제15 찰나인 도류지인(道類智忍)에서 4제의 현관을 모두 마친 것이 되며, 제16 찰나에서는 제15 찰나를 거듭 관찰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에 견도라고 하지 않고 수도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논에 나락이 한 이랑 남았다 해서 ‘이 논은 아직 나락을 베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본론 제63권 ‘16심의 견ㆍ수도 분별’ 참조) 본권에서는 ‘대해를 건너는데 겨자씨만큼 건너지 못하였다고 해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후설) 곧 견소단의 번뇌[迷理惑, 이지적 번뇌]는 돌이 깨어지는 것처럼 단박에 끊어지기 때문에 견도위는 각기 일 찰나로 이루어지지만, 수소단의 번뇌[迷事惑, 정의적 번뇌]는 연근 심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수도위는 다 찰나에 걸쳐 상속한다.
33)
중현은 앞서 이지근을 ‘무루혜로서 이미 현관을 획득하고서였지만 나머지 번뇌를 점진적으로 영원히 끊는데 증상력을 갖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34)
3계 9지 중 유정지(有頂地, 비상비비상처)의 일체(9품)의 번뇌를 끊는 무간도를 금강유정이라 하며, 이후 찰나에 생겨나는 해탈도를 진지(盡智)라고 한다. 이때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된다.(본론 제65권 참조)
35)
가비라(迦比羅,Kapila)는 상캬(Saṁkhya,數論)학파의 개조. 그는 사고기관[意]과 다섯 가지 감각기관[知根]과 다섯 가지 행동기관[作根]등 11근(根)을 설정하였는데, 여기서 입 즉 발성기관 등은 생식기관[小便處]과 함께 다섯 가지 행동기관에 속하는 것이다. 생식기관은 쾌락의 뛰어난 작용을 갖는다.
36)
여기서 견번뇌란 다섯 가지 염오견으로,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계금취(戒禁取)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를 말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47권 ‘5견’ 참조.
37)
열반은 무위법으로 근도 아니지만 비근도 아니라는 뜻.
38)
손은 집취(執取)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발은 보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각기 ‘근’으로 설정한 것이지만, 손이 없는 자는 발로 잡기도 하며, 발이 없는 자는 손으로 기어가기도 한다는 뜻.
39)
이는 앞서 ‘근의 본질과 작용’에 대해 이설을 주장한 식견가(識見家)의 설로서, 22근을 유전(流轉:번뇌와 업의 전변)과 환멸(還滅:번뇌와 업의 소멸)의 근거로 해석한 것이다.
40)
3계의 유전은 식을 본질로 하지만 6식은 6근을 소의로 삼아 일어나기 때문에, 6근은 바로 유전의 소의이다.
41)
본론 제1권 ‘5근’ 참조.
42)
초정려에서는 심(尋)ㆍ사(伺)ㆍ희(喜)ㆍ낙(樂)ㆍ등지(等持)가 수반되는데, 이때 낙은 안ㆍ이ㆍ신식과 구기한다. 왜냐하면 색계에는 비ㆍ설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소의로 하는 식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43)
즉 제3정려 중에는 신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5식신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즐거움[心悅]’을 바로 낙근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44)
여기서 마음의 희탐(喜貪, pritī-rāga)이란 ‘희’에 미착(味著)하는 것. 즉 하 3지에서의 마음의 즐거움은 이러한 미착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안정되지 못하고 거칠다.(후술)
45)
다시 말하면 제3정려지에서의 마음의 즐거움을 낙근이라 하고, 그 아래 세 지에서의 마음의 즐거움을 희근이라 한다.
46)
마음에 존재하는 괴로움이란 바로 우근을 말하며, 즐거움이란 희근을 말한다. 즉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은 선정이나 이숙에 의해 비롯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분별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대개’라고 하였다.
47)
몸에 존재하는 5식상응의 고락(苦樂)은 마음의 분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색 등의 대상의 힘에 의해서만 생겨나기 때문에 무분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학의 성자에게도 이러한 5식상응의 고락은 존재하는 것이다.
48)
여기서 무분별이란 계탁분별(計度分別)이 없는 것, 즉 무의식의 상태를 말한다.
49)
여기서 ‘처중’이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양자 부정[俱非]의 뜻으로, 여기서는 분별이나 경계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저절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50)
앞의 아홉 가지 근 중 사근(捨根)은 무기성이므로 제외된다.
51)
이하 22근의 유ㆍ무루, 이숙ㆍ비이숙, 3성(性), 3계계(界繫), 3단(斷) 등에 대해 분별한다.
52)
구(垢, amala)는 번뇌의 뜻. 즉 무구란 더 이상 번뇌를 갖지 않는 상태.
53)
여기서 유여사는 보광에 의하면 화지부(化地部). 즉 화지부에서는 세간의 유루의 신(信) 등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신’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신근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설한다. 대중부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 세존의 설은 『잡아함경』 제26권 제653경(대정장2,p.183중)에서의 인용임.
54)
즉 신 등의 5근은 유루ㆍ무루 모두와 통하지만, 그 같은 경설은 다만 무루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온갖 성자의 지위에 대해 분별하면서 그것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신 등의 5근이 오로지 무루라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 없다는 뜻.
55)
즉 이 같은 경설은 신 등 5근을 끊은 단선근자(斷善根者)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 5근은 무루근이 아니라 유루근이라는 뜻.
56)
이는 『잡아함경』 권26(제651경)의 경설로, 신(信) 등의 5근은 원래 깨달음에 이르는 뛰어난 법이지만, 그것이 반대로 미혹의 원인임을 알지 못하였다면 아직 무상각(無上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불타라고 할 수 없다는 뜻. 여기서 ‘집(samudaya)’은 생사를 초래하는 원인의 뜻이며, ‘몰(yavana)’은 침몰의 결과, ‘미(āsvāda)’는 미착(味著), 과환(ādīnava)은 번뇌 업을 낳는 것, 출리(niḥsaraṇa)는 미와 과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57)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제33권(대정장3,p.806하).
58)
이는 22근의 이숙ㆍ비이숙 관계를 분별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방론으로, 명근의 이숙성과 유다수행(留多壽行, bahv-āyuḥ-saṃskārān-sthāpayati)에 관한 내용이다. 유다수행이란 자재를 획득한 아라한이 현재세에 목숨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명근이 오로지 과거의 업에 의해 인기되는 이숙과라고 한다면 현재의 아라한들이 연장시키는 수명, 즉 유다수행의 명근은 누구의 목숨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이하에서 논술하는 바와 같이 『발지론』에서의 논증에 따라 아라한의 유다수행도 역시 과거업의 이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친이나 경량부는 명근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본론 제13권에서 상론함), 그 이숙도 부정한다. 유다수행에 반대되는 말은 사다수행(bahu-jīvita- saṃskārān-utsrjanti)인데, 이를테면 불타는 120세, 혹은 100세까지 살 것을 80세로 단축한 것을 말한다. 본론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59)
『발지론』 12권(한글대장경176,p.275). 완전한 인용은 이러하다. “아라한으로서 신통을 성취하고, 마음의 자재를 획득한 자가 만약 승중(僧衆)이나 혹은 각각의 사람들에 대해 옷이나 그릇, 혹은 각기 사문들의 목숨의 근거[命緣]가 되는 여러 도구를 보시하고, 보시하고 나서 발원하고, 바로 변제(邊際)의 제4정려에 들고,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기를 ‘부의 이숙을 초래하는 나의 모든 업, 이것이 전이하여 수명의 이숙과가 초래되기를 원한다’고 하면, 그 때 부의 이숙을 초래하는 그의 업은 바로 전이하여 수명의 이숙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을 유다수행이라고 한다.”
60)
전생에 반만 받고 남겨진 나머지 목숨의 이숙과를 변제정에 의해 지금 받는다는 뜻.
61)
『구사론』 제3권(앞의 책, p.130). 여기서 지속력[住時勢分]은 과거의 업력에 의해 인기(引起)된 제근(諸根) 대종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얼마간 비행하여 지속하는 동안의 세력과 같은 것을 말한다. 법보(法寶)에 의하면 이 주장은 논주 세친의 평설(評說)이나(『구사론소』 제3권, 대정장41,p.519중) 보광(普光)에 의하면 경부(經部)설이다.(『구사론기』 제3권, 대정장41,p.62하) 즉 경량부에서는 유부와 달리 명근의 개별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다만 제근의 대종이 상속하여 지속할 때의 세력을 일시 명근이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본론 제13권 참조), 그것의 연장(유다수행)과 단축(사다수행)은 오로지 대종세력의 변화[轉變相續]를 통해 설명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62)
법승(Dharmaśrī)은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논사로, 『대비바사론』을 간추려 요약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의 작자. 보광(普光)은 불멸(佛滅) 500년 중엽의 인물로, 길장(吉藏)은 700년 무렵의 인물로 전하고 있다. ‘7유색근(眼 등 5근과 여ㆍ남근)과 의근과, 우근을 제외한 4수근(낙ㆍ고ㆍ희ㆍ사근), 그리고 명근의 13근이 이숙[是報] 비이숙[非是報] 모두와 통한다’는 기사(見實者, 分別十三根中, 或性是報, 或非)는 그의 『아비담심론』 제4권(대정장28,p.829중하)과 이것의 주석서인 『아비담심론경(阿毘曇心論經)』 제6권(대장정28,p.864중하)에 나온다.
63)
유기성(有記性)이란 무기성의 반대로, 우근은 선 또는 불선의 성질이며, 신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오로지 선한 성질이다. 이에 반해 이숙은 무기성이다.
64)
이는, 경에서 설하고 있는 ‘순우수업(順憂受業)’ 즉 ‘우수에 따르는 업’이란 바로 우수로서 이숙과를 초래하는 업이므로 우근이 반드시 이숙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난문을 예상한 유부의 답이다. 즉 난문자는 ‘순(順)’을 ‘이숙과의 초래’로 해석한데 반해 유부에서는 ‘상응’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업이 우수와 상응하기 때문에 ‘순우수업’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65)
우근과 희근은 다같이 분별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분별의 욕탐을 떠난 이에게 우근이 없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이숙(무기)의 희근도 없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떠한 이유[相]에 의해 그것이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 하는 뜻의 물음.
66)
‘우근은 강한 의지[强思]에 의해 일어나게 때문에 무기가 아니며, [선정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욕계] 산지(散地)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역시 또한 무루가 아니다.’(『구사론』 제3권, 앞의 책,p.137) 여기서 강한 의지 즉 강사(强思,vikalpa-viśeṣa)란 강한 분별 혹은 특수한 분별을 말하는 것으로, 근심은 바로 이러한 강한 분별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선 혹은 악에 국한되고, 무기와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67)
앞의 여덟 가지 근이란 22근 중 안 등의 5근과 여ㆍ남근과 명근을 말하고, 최후의 세 가지 근은 미지당지근 등의 무루근을 말한다.
68)
22근의 배열순서 상 신(信) 등 5근과 3무루근은 가장 뒤에 있지만, 바로 앞 절(유이숙과 무이숙)의 분별 내용 중 신 등의 5근이 가장 마지막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근보다 먼저 설하게 되었다는 뜻.
69)
안 등의 여덟 가지 근이란 안 등의 5근과 여ㆍ남근과 명근을 말한다.
70)
이는 『구사론』(제3권, 앞의 책, p.139) 상에서의 주장이다.
71)
『중아함경』 제28권 『구담미경(瞿曇彌經)』(대정장1,p.607중). “여인은 5사(事)를 행할 수 없으니, 만약 여인으로서 여래ㆍ무소착(無所著)ㆍ정등각이나 전륜왕ㆍ천제석(天帝釋)ㆍ마왕(魔王)ㆍ대범왕이 되고자 한다면 이러한 것은 끝내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남자로서--.”
72)
즉 색계에는 남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계 중에서 남자의 몸이 갖는 특성, 이를테면 이욕의 위세나 맹렬함이 존재할 따름이다.
73)
이는 『구사론』(제3권, 앞의 책,p.140) 상에서의 주장이다. 즉 색계에는 유정의 신체가 정묘하여 촉뇌(觸惱)를 낳는 고의 근거[苦依]가 없기 때문에, 불선법이 없어 고의 대상[苦境]이 없기 때문에 고근이 제외된다는 것이다.
74)
이러한 의(意) 등의 4근은 88가지 견혹(見惑)과 상응할 때는 견소단이고, 81품의 수혹(修惑)과 상응할 때는 수소단이며, 무루의 법과 상응할 때는 비소단이다.
75)
색법과 불염오법과, 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은 수소단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론 제6권 ‘18계의 3단(斷) 분별’을 참조할 것.
76)
신 등의 5근으로서 유루인 것은 수소단이고 무루인 것은 비소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 염오법이 아니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니다.
77)
여기서 태생은 태(胎)로 태어나는 것, 난생은 알로 태어나는 것, 습생은 습기로부터 태어나는 것, 화생은 의지하는 바 없이 홀연히 생겨나는 것을 말함.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2권 ‘4생’을 참조할 것.
78)
중유(中有)로부터 생유(生有)에 이르게 되는 순간, 그 밖의 다른 근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명근과 신근만이 획득될 뿐이다. 그 밖의 다른 근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79)
속생(續生) 즉 생을 상속한다고 함은 중유(中有)로부터 생유(生有, 入胎)로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80)
유부에 의하는 한 수생(受生)과 명종(命終)의 단계에서는 사근이 반드시 상응하고, 의근 또한 수생의 단계에서 반드시 일어나지만, 부모에 대해 품은 애(愛) 또는 에(恚)와 상응하는 염오성이기 때문에(남성의 중유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욕을, 아버지에 대해서는 진에를 일으켜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순간 미워하는 이의 그것을 자신의 존재로 여기고 기뻐한다. 이 때가 바로 중유가 멸하고 생유가 일어나는 속생의 순간이다. 본론 제24권 ‘중유의 여러 특징’ 참조) 무기의 이숙근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ㆍ락ㆍ우ㆍ희ㆍ신 등의 5근도 역시 생겨나지만 이숙생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
81)
무형자가 초생위에서 획득하는 6근에, 일형자는 여ㆍ남의 성 중 어느 한 가지를 더한 일곱 가지를, 이형자는 이 둘을 더한 여덟 가지를 획득한다.
82)
이는, 화생은 4생 중 가장 수승한 생인데, 여기에 어찌 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이형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변명이다. 화생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그 모두가 수승한 것은 아니다. 지옥의 유정은 모두 화생이고 아귀 중에도 화생이 있으므로 그러한 악취 중에는 악업에 의해 초래된 이형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83)
즉 무색계에는 형색이 존재하지 않아 방처(方處)가 없으므로 공간적 규정인 ‘위(上)’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없지만, 다만 선정과 그 생이 수승하다는 점에서 ‘위’라고 하였다는 뜻.
84)
이상은 본 항의 방론으로, 명근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본 권 주58; 본론 제13권 참조)를 대상으로 한 논설이다.
85)
습기는 마치 씨앗이 식물의 생기와 사멸을 잇는 것이듯이 생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로, 종자(種子)의 이명이다. 종자설은 유식학파의 주장이지만, 그 선구로 이해되는 경량부도 이를 주장하였다. 본론 제12권 ‘득(得)’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비판하고 있다.
86)
색계에 태어나는 유정은 오로지 화생이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87)
일형자(한 性만을 지닌 자)는 앞에서 설한 여덟 가지에 여근과 남근 중 어느 한 가지를 더한 아홉 가지를, 무형자는 다만 색계에서 죽을 때 멸하는 여덟 가지 근만이 멸할 따름이다.
88)
사문과에는 예류과(預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 네 가지(4果)가 있으며, 이러한 단계로 향하는 이를 예류향(向) 내지 아라한향(4向)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4권~65권에 걸쳐 상론한다.
89)
예류향은 견도 15찰나이며, 제16찰나에 이르러 견도를 성취한 성자를 예류과라고 한다. 이는 수도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색계 선정를 수습(修習)하지 않는 단계이다.
90)
등류과는 유사한 성질을 지닌 원인(同類因)의 결과, 사용과는 동시에 존재하는 원인(俱有因과 相應因)의 결과.
91)
이에 대해 『구사론』(제3권, 앞의 책, p.146)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지근은 무간도(無間道)에 존재하고, 이지근은 해탈도(解脫道)에 존재하니, 이 두 가지가 서로 도와 최초의 사문과(예류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 근은 그 순서대로 이계(離繫)의 득(得)에 대해 능히 인인(引因)과 의인(依因)이 되기 때문이다.” 즉 미지당지근은 무간도인 제15심 도류지인(道類智忍)에 동류인이 되어 무위택멸 즉 이계득을 낳는 것[引因]이 되고, 이지근은 해탈도인 제16심 도류지에서 이계득과 함께 생겨 이계득을 지지하는 것[依因]이 되어, 서로를 도와 예류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92)
곧 아라한과와 아라한향은 9지(미지정ㆍ중간ㆍ4근본정ㆍ무색계의 아래 세 선정) 중 어떠한 지로도 획득할 수 있는데,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한 자는 희애(喜愛)와 상응하고, 제3정려에 의한 자는 낙애(樂愛)와, 미지정을 비롯한 그 밖의 정에 의한 자는 사수(捨受)와 상응하기 때문에 세 가지 수근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다.
93)
무루의 출세간도가 증진됨에 따라 예류향 예류과 나아가 아라한과를 순서대로 획득하는 것을 차제증(次第證)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부에 의하면, 수소단의 번뇌는 반드시 무루도에 의해서만 끊어지는 것은 아니며 유루 세속도에 의해서도 끊어지기 때문에, 일찍이 이생위에서 수소단의 번뇌를 끊은 이가 견도 제16 찰나에 이르게 되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나 불환과를 획득하기도 하는데, 이를 초월증(超越證)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유루 세속도로써는 비상비비상처의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아라한과는 초월증의 성자가 아니다. 초월증에 대해서는 본론 제64권 ‘견도위와 초월증의 성자’를, 유루 세간도에 대해서는 본론 제66권을 참조할 것.
94)
여기서 ‘배리욕탐의 초월증자’란 유루 세간도로써 욕계 9품의 수혹 중 일부분(6ㆍ7ㆍ8품)을 끊고 견도 제16찰나인 도류지에 이른 성자(즉 일래과)를 말한다. 참고로 후술하는 ‘전리욕탐의 초월증자’란 세간도로써 9품의 수혹을 모두 끊고서 도류지에 이른 성자(즉 불환과)를 말한다.
95)
즉 초월증의 불환과는 그 소의지가 미지(未至)ㆍ중간ㆍ4근본정의 6지(地)이므로 수근(受根)에 있어서도 낙ㆍ희ㆍ사 중 어느 한가지와 상응한다.
96)
『발지론』 제15권(한글대장경176, p.339).
97)
유부에서는 견도에 의한 예류과는 유신견 등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이지적 번뇌[迷理惑]의 단멸이기 때문에 물러남이 없지만, 수도에 의해 정의적 번뇌[迷事惑]의 단멸을 증득한 일래ㆍ불환ㆍ아라한 등의 과위(果位)에는 물러남이 있다.
98)
이는 ‘아라한과와 마찬가지로 불환과에 대해서는 어째서 열한 가지 근에 의해서 획득된다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구사론』(제3권, 앞의 책, p.148)에서의 진술은 이러하다.: “만약 낙근으로 불환과를 증득하면 그 이후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거기서 물러나고서 낙근에 의해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이욕하고서 초월하여 세 번째 사문과를 증득한 이(초월증의 불환과)는 다시는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이욕의 사문과는 두 가지 도(유루ㆍ무루도)에 의해 획득되어 지극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즉 유루도로써 색계 제2선의 번뇌를 끊고, 제3선의 낙근을 얻어 견도에 든 초월증의 불환과는 그 힘이 강력 견고하여 물러나는 일이 없지만, 차제증의 불환으로서 하지로 물러난 이는 욕계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미지정의 무간도에 의지하여 사수로써만 본래의 과위(果位)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낙근에 의해 다시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99)
이하 22근의 상호 성취ㆍ불성취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데, 그 관계가 매우 복잡 번쇄하다. 먼저 명근과 의근과 사근은 일체의 지(地)와 소의에 편재하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를 성취하면 반드시 자근(自根)과 더불어 다른 두 근도 함께 성취하며, 하나라도 결여되면 세 근을 모두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信) 등의 5근은 비록 일체의 지에 두루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일체의 소의에는 두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후술)
100)
안 등의 네 근은,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코 성취하지 않으며, 만약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未得] 이미 상실한[已失] 자 또한 역시 성취하지 않는다.
101)
신근은 결정적으로 오로지 무색계에 태어난 자만이 성취하지 않는다.
102)
여근과 남근은 색ㆍ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정코 성취하지 않으며,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이미 상실한 자 또한 성취하지 않는다.
103)
환언하면 이생(異生)으로서 제4정려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코 성취하지 않는다. 즉 성자는 설혹 제4정려나 무색계에 태어날지라도 제3정려의 무루의 낙근을 성취하니, 이러한 무루법은 계계(界繫)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계지(繫地)를 초월하더라도 버리지 않는 것이다.
104)
환언하면 이생으로서 제3ㆍ제4정려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결코 성취하지 않는다.
105)
환언하면 신(信) 등의 5근은 선근이 끊어진 자에게 결코 성취되지 않으며, 미지당지근은 일체의 이생과 이미 견도 16심에 머무는 자에게, 이지근은 일체의 이생과 견도와 무학위에 이른 자에게, 구지근은 일체의 이생과 유학위에 든 자에게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 즉 이지근과 구지근은 각기 수도위와 무학위에 든 자만이 성취하기 때문이다.
106)
여기에 신근(身根)을 제외하는 것은 성자가 무색계에 태어날 때는 제3정려의 무루낙근을 성취하더라도 신근은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107)
여기에 낙근을 제외하는 것은 범부가 제4정려에 태어날 경우, 신근은 성취하지만 거기서는 낙근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범부였든 자라면 제3선의 무루낙근은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108)
여기서의 희근은 욕계와 초선과 제2선의 열수(悅受)이다.
109)
희근을 성취하면 결정코 낙근을 성취하게 된다고 할 경우, 제2정려지에 태어난 범부는 제2선의 희근은 성취하지만 초선(下地)에서의 5식상응의 낙근은 유루법으로서 이미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할 수도 없으며, 제3선(上地)은 아직 닦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낙근도 성취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만약 성취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낙근인가 하는 난문의 답이다. 즉 제2정려지에 태어난 범부는 아직 제3정려의 번뇌를 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과 상응하는 염오한 낙근을 성취하게 된다.
110)
고근을 성취하는 것은 반드시 욕계로서, 거기에 태어난 자로서 이욕(離欲)할 경우 우근을 버리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우근을 성취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111)
22근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선근(善根)을 논할 경우 당연히 3무루근도 포함되겠지만, 여기서의 선근은 어리석은 이(이생)가 성취하는 ‘여덟 가지 근 중의 선근’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
112)
여기서 두 가지 계박이란 상응박(相應縛)과 소연박(所緣縛). 상응박이란 마음이 그것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번뇌에 계박되는 것이고, 소연박이란 마음이 번뇌의 소연이 되어 계박되는 것을 말한다.
113)
즉 견도에 머무는 유학의 성자라면 이지근과 구지근이 제외되고, 만약 수도에 머무는 성자자라면 미지근과 구지근이 제외된다.
114)
성자로서 성불구자는 없기 때문에 여근과 남근 중 어느 한 가지는 제외해야 하는 것이다.
제10권
1)
무인론(無因論) 혹은 자연론(自然論,niyati-vāda)은 만물은 모두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운명에 따라 저절로 생겨난다는 막칼리 고살라 등의 주장이며, 일인론(一因論)은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실재(自在神)인 브라흐만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인도전통 바라문사상의 견해이다.
2)
이는 자성(自性) 혹은 승인(勝因) 등으로 번역되는 프라크리티(prakṛti)라고 하는 근본원질에 의해 만물이 전개되었다고 주장하는 상캬학파의 견해이다.
3)
이는 만물이 전찰나의 공능(功能,이를 종자라고 한다)이 상속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련의 경량부 계통을 말한다.
4)
공간적 부피를 지닌 색(즉 有對色)을 세분하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을 극미(極微,paramāṇu)라고 하는데, 이러한 다수의 극미가 화합한 것을 미취(微聚)라고 한다. 전자가 무방분(공간적 부피를 지니지 않는 것)이라면 후자는 유방분으로, 본론 제32권(‘극미의 실유 논증’)에서는 전자를 관념적으로 더욱 분할되어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가설적[仮] 극미, 후자를 5식에 의해 알려지는 실제적[實] 극미라고 하였다. 참고로 『잡아비담심론』 제2권(대정장28,p.882,중)에서는 전자를 사(事)극미라 하고, 후자를 취(聚)극미라고 하였다. 즉 다수의 가설적 극미가 화합(微聚)할 때 비로소 색법의 자상(즉 礙性)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세친은 무방분의 극미를 부정하고 오로지 복합극미 즉 미취만을 인정하기 때문에(본론 제8권 주13 참조) 『구사론』(제4권,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156)에서는 “색취(色聚)로서 지극히 세밀한 것을 ‘미취(微聚)’라고 이름하니, 더 이상 이보다 미세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는 말로 본 절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5)
즉 안ㆍ이ㆍ비ㆍ설근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신근(몸)과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기 때문에 안근을 갖는 미취는 최소한 10사(事)가 동시 생기해야 한다.(次註참조) 여기서 ‘사(dravya)’는 실체의 뜻이다.
6)
색취(色聚) 즉 객관의 물질일반은 반드시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종과 그 결합물인 색ㆍ향ㆍ미ㆍ촉의 4조색(造色) 등 8사구생[八事俱生 隨一不減]하지만, 유정물로서 신근(身根)을 가질 경우 8사에 신근을 더한 9사구생이고, 여기에 안ㆍ이ㆍ비ㆍ설의 4근 중 하나를 가질 때에는 10사구생이며, 여기에 다시 소리가 존재하는 경우, 각기 증가하여 8사구생은 9사로, 9사는 10사로, 10사는 11사구생이 된다. 예컨대 안근의 경우, 이것은 반드시 신근에 근거해야 하며, 이것은 다시 8사와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안 등이 근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체[事]는 열 가지이며, 여기에 소리가 더해질 경우 열한 가지이다. 이를테면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경우, 이때 소리는 유집수대종(감각이 있는 대종)에 근거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무집수대종에 근거한 소리일 경우 객관의 물질 자체는 다만 9사구생이 될 것이다.(전술)
7)
이러한 논란은 『구사론』 제4권(앞의 책,p.159)에서 제기되었다. 즉 팔사구생(八事俱生)이라 할 경우, 이때 ‘사(事)’를 색법 자체[體,dravya], 이를테면 색경의 경우 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 등의 8형색과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12현색, 촉경의 경우 4대종과 미끄러움ㆍ껄끄러움ㆍ무거움 등 11가지 소조촉 각각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처(處,āyatana)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즉 만약 전자라면 8사ㆍ9사ㆍ10사 등은 너무 적은 것이 되고, 후자라면 4대종은 모두 촉처(觸處)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에(그럴 경우 4事가 되어야 함) 너무 많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종으로서의 ‘사’가 응당 많아져야 할 것이니, 소조색은 각기 별도로 하나의 4대종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구사론』,앞의 책,p.160) 만약 소조색인 색ㆍ향ㆍ미ㆍ촉(즉 능의)을 처(處)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라면, 그것들은 각기 4대종에 의한 것이므로 결국 16가지 대종에 의한 것이 되고, 여기에 다시 4대종을 더하여 욕계의 색취는 적어도 20사구생(나아가 9사는 25사로, 10사는 30사구생)이라고 설해야 하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 이하 논설은 이에 대한 중현의 변명이다.
9)
본론 제5권 ‘비유논사의 소조색 무별체설(無別體說) 비판’ 참조.
10)
본론 제4권~5권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이라는 상좌설 비판’ 참조.
11)
비록 색ㆍ향ㆍ미ㆍ촉의 소조색 각각이 4대종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하여 ‘20사구생’이 된다 할지라도 그 소의가 모두 4대종으로서 동일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존재유형이 동일하기 때문에 ‘8사구생’이라 할 수 있다는 뜻.
12)
유색법은 앞서 논설한 유대(有對)의 색법(色法)을 말하며, 무색법은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과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을 말한다.
13)
즉 마음은 이러 저러한 작용의 심소법이 일어나는 소의처가 되는 것으로, 이러한 마음을 ‘지’라고 한다는 뜻.
14)
여기서 대법이란 수(受)ㆍ상(想) 등의 심소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체의 마음과 두루 통하며, 반드시 함께 생겨나기 때문에 ‘대법’이라 하는 것이다. 곧 마음은 이러한 대법(大法)을 소유하며 그것의 소의처가 되고 통솔자로서 구기(俱起)하기 때문에 ‘대법의 지’ 즉 ‘대지’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15)
수(vedana)란 영납(領納)의 뜻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고(苦, 不快의 減損)ㆍ낙(樂, 快의 增益)ㆍ불고불락을 감수하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16)
상(saṃjñā)이란 취상(取像)의 뜻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사물의 형상이나 언어적 개념의 차별상을 취(표상)하여 설정하게 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17)
사(cetanā)란 마음으로 하여금 선ㆍ불선ㆍ무기를 조작(造作)하게 하는 의사 혹은 의지의 의식작용으로, 유부에 의하면 이는 의업(意業)의 본질이다. 주31 참조.
18)
촉(sparśa)이란 근ㆍ경ㆍ식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좋거나 좋지 않은 등의 느낌 즉 ‘수’가 일어나게 된다. 이는 말하자면 순수감각과 같은 의미의 의식작용이다.
19)
욕(chanda)이란 마음으로 하여금 뭔가를 희구(希求)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20)
혜(prajñā)란 소연이 되는 대상에 대해 능히 판단ㆍ간택(簡擇)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21)
염(smṛti)이란 기억의 의식작용으로, 이것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대상을 명기(明記)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
22)
작의(manaskāra)란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거나 경각(警覺)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23)
승해(adhimukti)란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 인가(忍可=認可) 결정하게 하는 의식작용이다.
24)
삼마지(samādhi)란 마음을 평등(平等)하게 유지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게 하는 의식작용[心一境性]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마치 뱀이 죽통(竹筒)에 들어가면 바로 펴지듯이 마음이 삼마지에 들면 산란되지 않고 바로 곧게 전이하게 되는 것이다.’
25)
경량부에서는 심소법의 개별적인 실재성도, 마음과의 구기 상응설도 부정하며, 다만 마음의 변화 차별상을 가설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친은 『구사론』(앞의 책, p.162)에서, 열 가지의 대지법과 온갖 마음의 상응구기를 ‘전설(傳說)’로 설하여 예의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 인용한 경은 『잡아함경』 제13권 제306경, ‘眼色緣生眼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참고로 상좌는 이 같은 경설에 따라 수ㆍ상ㆍ사 세 가지 법을 대지법으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경량부(비유자나 『성실론』)와는 입장을 달리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水野弘元,『佛敎의 心識論』,p.244)
26)
‘안근과 색을 조건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난다’고 할 때, 안식이 생겨나는 순간 이미 삼사(三事)가 화합한 것이므로 이러한 상태가 바로 ‘촉’이다. 다시 말해 ‘식’과 ‘촉’은 근과 경의 동일한 결과로서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는다.
27)
경부의 힐난. 즉 항아리는 점토, 물, 물레 등을 조건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지만 점토 물 등을 떠나 존재하지 않듯이, 촉 또한 안과 색과 안식을 조건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안 등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의 힐난. 즉 경량부에서는 안(眼) 등의 세 법의 실재성은 인정하지만 촉 등 제 심소법의 개별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비유를 설하게 된 것이다.
28)
앞서 상좌는 경설에 따라 수(受)ㆍ상(想)ㆍ사(思)의 세 법의 실재성과 동시생기는 인정하였었다.(주25참조)
29)
경부의 힐난. 즉 경전 상에서도 수(受)의 본질[體]은 영납(領納), 상(想)은 취상(取像), 사(思)는 조작(造作), 작의(作意)는 경각(警覺) 등으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촉에 대해서만은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만 정의할 뿐 그 공능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는 다만 ‘식유필경(識有必境)’이라는 인식론적 요청에 의한 것일 뿐이라는 힐난. 그러나 중현은 앞서 ‘삼사화합’이란 촉의 특성[相]이 아니라 촉을 낳게 한 제 조건일 뿐이라고 해석하였다.
30)
안 등의 근은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통해 추리되는 것이지만, 각기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는 뜻.
31)
유부에 의하는 한 의업의 본질은 오로지 ‘사(思, 의지, 조작)’이다. 본론 제42권 ‘업의 명의(名義)’ 참조. 이에 반해 비유논사에 의하면 탐ㆍ진ㆍ치가 바로 의업이다.(『구사론』 제17권, 앞의 책,p.767)
32)
경량부에서는 제 심소를 마음이 특수하게 변화한 상태로 이해하여 개별적인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33)
주25)의 경설에서 ‘촉은 수ㆍ상ㆍ사를 함께 낳는다(觸俱生受想思)’고 하였다.
34)
경부의 힐난. 즉 경부에서는 근ㆍ경ㆍ식의 화합(이를 ‘촉’이라 가설함)을 근거로 하여 ‘수’의 영납작용이 낳아질 뿐 그 사이에 별도의 촉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35)
본 권 주 25)의 『잡아함경』의 경문 참조.
36)
즉 “안과 색을 조건으로 하여 안식을 낳는다”고만 설하여도 이미 안 등의 세 가지는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가 되어 화합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의 화합이 촉이다”는 말을 설할 필요가 없지만, 거듭하여 설한 이유는 세 법과는 다른 별도의 법으로서 촉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뜻.
37)
다시 말해 세 가지 법 자체에는 화합의 뜻이 없지만, 이와는 독립된 개별적 실체인 촉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 가지 법 사이에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
38)
여기서 제5 성(聲)이란 범어의 여덟 가지 격(格)변화 중 다섯 번째 탈격(奪格)을 말하는 것으로, ~로부터, ~보다, ~ 때문에 등과 같은 출발점이나 비교 이유 시간을 나타내는 용법이다. 즉 ‘세 가지가 화합하였기 때문에 촉이다’고 말하는 경우, 촉은 화합 이후에 생겨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구기설(俱起說)에 어긋나게 된다. 따라서 그같이 말해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게 말하였을 경우 이후에 생겨난다는 의심을 막기 위해 경전에서와 같이 ‘동시에’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는 뜻.
39)
‘촉’과 ‘수’에 대해서는 본론 제29권에서 다시 상론한다.
40)
이하 앞의 게송(이는 구사본송이 아니다)에 대한 상좌(上座) 스리라타의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촉의 개별적 실재성을 논증하고 있다.
41)
경부사(經部師)인 상좌 스리라타에 의하면, 먼저 제1찰나에 근ㆍ경이 일어나고, 그것을 연으로 하여 제2찰나에 식이 발생한다. 곧 식이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삼사화합의 촉의 순간으로(따라서 ‘촉’은 마음과는 독립된 개별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한 화합의 촉을 연으로 하여 제3찰나에 수가 낳아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42)
‘안(眼)과 색(色) 두 가지를 근거로 하여 온갖 심소법이 생겨나니, 식(識)ㆍ촉(觸)과 함께 하는 수(受)ㆍ상(想)’에서 ‘식’이라는 말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촉이 앞의 심소법에 속하는 말이 아니라면(다시 말해 심소법과 무관한 말이라면) 이와 함께 하는 수 등도 속하지 않을 것이므로 심소법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수 등이 심소법이라면 촉 역시 심소법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
43)
예컨대 ‘어머니를 근거로 하여 자식이 생겨났다’고 하는 말을 ‘자식은 어머니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 즉 ‘떠나지 않는다[不離]’는 말은 상호관계를 의미하므로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의 근거가 될 때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럴 경우 자식을 근거로 하여 어머니가 생겨났다고 해야 한다.(후술)
44)
다시 말해 안과 색은 마음만을 낳고, 이 세 가지가 화합(즉 촉)함에 따라 온갖 심소법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촉 또한 안과 색에 의해 낳아진 심소법으로서 마음과는 다른 개별적인 실체라는 뜻.
45)
일체 유정이 네 가지 존재[4有, 生有ㆍ本有ㆍ死有ㆍ中有]로 지속하게 되는 것은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사식(思食)ㆍ식식(識食) 때문이다. 여기서 단식이란 향ㆍ미ㆍ촉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분할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 촉식은 삼사(三事)화합의 촉을 본질로 하는 희락(喜樂), 사식은 ‘사’를 본질로 하는 희구(希求) 즉 희망, 식식은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심식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0권에서 상론한다.
46)
여기서 ‘접촉되는 것’이란 근ㆍ경ㆍ식의 화합에 의해 생겨나는 것(대지법으로서의 ‘촉’)이 아닌 신근의 대상으로서의 촉경을 말한다. 촉경에는 견(堅)ㆍ습(濕)ㆍ난(暖)ㆍ동(動)의 4대종과 미끄러움 등의 일곱 가지 소조촉이 있지만 경부에서는 소조촉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본론 제4권~5권 참조) 곧 이러한 촉경이 수를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47)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있으므로 촉의 염오가 끊어지면 수의 염오도 끊어진다는 뜻.
48)
물질적 에너지(즉 段食)가 다수의 극미로 이루어진 것이듯이 촉식 역시 근ㆍ경ㆍ식 등 다수의 법으로 이루어진 가설적 존재라는 뜻. 그러나 극미 각각은 단식이라 할 수 있지만, 안 등 세 가지는 그 자체 촉식이라 할 수 없다.(후술)
49)
즉 (6)근ㆍ(6)경ㆍ(6)식의 삼사화합이 바로 ‘촉’이라고 하는 경우, 식식(識食)은 의근과 6식에, 단식은 향ㆍ미ㆍ촉경에, 사식은 법경에 포섭되어 결국 촉식이 나머지 세 가지 식을 모두 포함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50)
단식의 본질은 향ㆍ미ㆍ촉이다.(前註 참조) 즉 촉식이 만약 ‘접촉되는 것(감촉)’이라고 한다면 단식과의 변별이 불가능하다.
51)
본 권 주41) 참조.
52)
여기서 무간이란 전찰나와 후찰나 사이에 더 이상 일 찰나의 간격도 없는 시간적 연속을 말한다.
53)
12연기에서 식을 근거로 하여 명색이, 명색을 근거로 하여 6처가, 6처를 근거로 하여 촉이, 촉을 근거로 수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 만약 그러한 각각의 지분(支分)이 인과적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지분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면, 수가 생겨날 때에도 6처나 명색은 여전히 능생의 작용을 갖게 되어 뒤죽박죽[雜亂]이 되고 만다.
54)
분위연기란, 연기의 12지는 모두 5온을 본질로 하지만 두드러진 상태에 근거하여 각각의 지분의 명칭을 설정하였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무명이 두드러진 상태의 5온을 ‘무명’이라 하고, 노사가 두드러진 상태의 5온을 ‘노사’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부의 정설로, 이에 따라 12연기를 삼세(三世) 양중(兩重)의 인과설로 해석하였다.(본론 제27권 ‘연기에 대한 네 가지 해석과 분위연기’를 참조할 것)
55)
고법지와 집법지는 욕계에서의 고제와 집제의 진리성(무상ㆍ고ㆍ공ㆍ무아와 因ㆍ集ㆍ生ㆍ緣)을 통찰하는 견도의 무루지이다. 따라서 이것으로는 오로지 욕계 고제와 집제에 미혹한 견혹만을 끊을 수 있을 뿐이다.
56)
즉 ‘촉’과 ‘수’가 동시 구기한다면 ‘촉’이 끊어지면 이와 함께 ‘수’도 끊어지겠지만, 근(根)과 경(境)에 근거하여 제2찰나에 ‘식’과 ‘촉’이 생겨나고, 이를 근거로 하여 제3찰나에 ‘수’ 등이 생겨난다고 할 경우, ‘촉’이 끊어졌다고 해서 ‘수’도 끊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
57)
이하 옛날의 여러 논사들이 제시한 촉의 개별적 실재성을 논증하는 여섯 가지 논거를 먼저 언급하고, 이에 대한 상좌의 이석(異釋)을 열거한 다음 이를 다시 비판하고 있다.
58)
만약 근ㆍ경ㆍ식 세 가지의 화합을 일시 가설한 것(즉 세속법)이 촉이라면, 계경에서 그것을 어떻게 실유의 법(승의법)인 6처와 수의 결과와 원인이 된다고 설하였겠는가? 하는 뜻.
59)
여기서 『대육처경(大六處經)』이란 『잡아함경』 제13권 제305경(일명 『육입처경(六入處經)』을 말한다.
60)
여기서 『육육경(六六經)』이란 『잡아함경』 제13권 제304경을 말한다.
61)
만약 촉이 실유(實有)가 아니고 가유(仮有)라면 어떻게 그러한 가설적인 법과 그 소의(6내처ㆍ6외처ㆍ6식신)를 각기 차별하여 설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
62)
촉이 만약 세속법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였다 하여 ‘참답게 관찰하였다[如實見]’거나 ‘성도(聖道)가 안주하는 소연’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승의법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뜻.
63)
만약 근ㆍ경ㆍ식 세 가지의 화합을 일시 가설한 것이 촉이라고 한다면, ‘항아리의 색ㆍ형태 등을 본다’고 하듯이 가설적인 법[仮法]의 소의도 역시 각기 차별하여 설할 수 있기 때문에 6근ㆍ6경ㆍ6식의 열여덟 가지의 촉신이 있다고 설해야 함에도 다만 6촉신이라고 설한 것은 촉이 바로 세 가지의 화합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뜻.
64)
이하 이상의 여섯 논거에 대한 상좌 스리라타의 해석이 진술된다.
65)
근ㆍ경ㆍ식의 화합이 반드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욕계에 있으면서 천안을 얻어 색계의 색을 보는 경우, 욕계의 안근과 색경은 이러한 안식의 소의ㆍ연이 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제8권 ‘3계 9지에 따른 근ㆍ경ㆍ식과 소의신의 관계’ 참조. 곧 여기서 ‘각기 별도로 존재한다’고 설한 것은 이러한 차별적인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66)
‘무거운 짐(5취온)’을 떠나 ‘짐을 진 자(즉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일시 가설하여 다르게 설할 수 있듯이, 근ㆍ경ㆍ식의 화합을 떠나 촉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시 가설하여 각기 달리 설할 수 있다는 뜻. ‘무거운 짐’과 ‘짐을 진 자’의 비유는 『잡아함경』 제3권 제73경(일명 『중담경(重擔經)』과 『증일아함경』 제17권 제4경에 나온다.(후술)
67)
촉이 승의법이라서 ‘참답게 관찰하였다[如實見]’거나 ‘성도(聖道)가 안주하는 소연’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수의 원인으로서 잡염과 이염의 근거, 즉 사물의 실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는 뜻.
68)
이하 논주 중현이 앞의 상좌의 해석을 비판하고서 자신의 해석을 진술하고 있다.
69)
주 25)의 『잡아함경』 제13권 306경.
70)
‘이(伊,∵)’자는 실담(悉曇) 50문자 중의 하나로, 그 형태가 종(縱)도 횡(橫)도 아닌 삼각관계의 세 점으로 이루어져 불일불이(不一不二) 비전비후(非前非後)의 의미를 지닌다. 혹은 이 한자만 일컬으면 우주에 편만한 일체의 근(根)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데, 이는 근을 의미하는 범어 indriya의 첫 자를 연상케 하는데서 이같이 해석하게 되었다. 본론에서의 의미도 아마 ‘이’라고 하는 하나의 문자만으로도 인드리야(근)을 가설할 수 있다는 뜻으로 짐작된다.
71)
촉의 뛰어난 원인은 근이 아니라 식이기 때문에 ‘안식에 의해 생겨난 촉[眼識所生觸]’에서 ‘식에 의해 생겨난[識所生]’이라는 말을 생략하여 ‘안촉’이라 하였다는 뜻. 그러나 상좌의 경우 비록 뛰어난 원인에 근거하여 촉의 명칭을 설정하였을지라도, 이때 뛰어난 원인은 식이 아니라 근이기 때문에 그 이치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72)
잡염이 일어나는 순서를 안근 내지 의근, 색경 내지 법경, 안식 내지 의식으로 설하지 않고 안ㆍ색ㆍ안식, 내지 의ㆍ법ㆍ의식의 순으로 설한 것은 이미 삼자 간의 화합(즉 촉)을 고려하였다는 뜻. 따라서 그 밖의 달리 안촉 내지 의촉을 설할 필요가 없음에도 이를 설한 것은 삼사의 화합과는 별도의 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후술)
73)
상좌는 안근ㆍ색ㆍ식 세 가지의 인과적 화합이 바로 안촉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74)
주 65) 참조.
75)
『잡아함경』 제3권 제73경.
76)
촉도 근ㆍ경ㆍ식도 5취온에 포함되기 때문에 촉을 ‘짐을 진 자’에 비유할 수 없다는 뜻.
77)
법처는 수ㆍ상 등의 심소법 이외에도 무위법이나 불상응행법을 포섭하기 때문에 수ㆍ상 등의 심소법과는 별도로 설할 수 있지만, 삼사화합은 근ㆍ경ㆍ식을 떠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별도로 설할 수 없다. 그럼에도 6촉신을 별도로 설한 것은 그것이 근ㆍ경ㆍ식과는 다른 개별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곧 법처의 경우는 촉의 경우와 동일한 사례(同喩)가 아니기 때문에 앞의 유여사의 논의를 올바른 이치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78)
즉 두 번째 논거인 ‘잡염을 갖는다’는 경설을 해석하면서, 계경(주59)에서 안ㆍ색ㆍ식의 잡염과는 별도로 촉의 잡염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촉은 삼사(三事)와는 다른 개별적 실체라고 논증하였다.
79)
원문에서는 ‘단일한 화합이 아닌 것도 역시 차별하여 설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으로(見非一合亦別說故)’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바로 앞의 상좌의 주장일뿐더러 뒤의 논거와 맞지 않기 때문에 ‘비(非)’자를 빼고 번역하였다. 즉 상좌는, 촉은 항아리와 같은 하나의 보편성을 지닌 단일한 화합이 아니기 때문에 6촉으로 차별하여 설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계경에서는 단일한 중동분을 지닌 보특가라도 역시 그 차별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치상 올바른 논의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80)
명색이나 6처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지만 하나의 개념적 명칭[想名]으로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명’이나 ‘안(眼)’을 명색이나 6처라고 하지는 않지만 일시 보다 큰 범주인 명색 혹은 6처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 이를테면 다수의 미진의 집합을 항아리라 하고, 수ㆍ상 등의 심소나 득(得) 등의 제법을 ‘행(行)’이라 하지만,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일시 항아리나 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81)
즉 촉이든 명색 혹은 6처든 실재하는 법에 대해서만 궁극적으로 인과와 잡염과 이염을 갖는다거나, ‘각기 별도로 존재한다’ ‘끊어진다’ ‘차별이 있다’는 등으로 설할 수 있으며, 가유에 대해서는 그같이 설할 수 없다는 뜻.
82)
여기서 두 가지 뜻이란 ‘수’등의 열 가지 심소법은 개별적인 실체이며, 선이든 불선이든 무기든 모든 마음이 일어날 때 동시에 함께 일어나는 대지법이라는 사실.
83)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 ‘행온은 오로지 사(思)일 뿐이라는 상좌설 비판’에서 언급하였다.: “경에서 ‘그들은 이와 같은 신(信)ㆍ욕(欲)ㆍ근(勤)ㆍ경안(輕安)ㆍ념(念)ㆍ지(智)ㆍ사(思)ㆍ사(捨)를 지니고 있으니, 이를 승행(勝行) 즉 뛰어난 행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만약 ‘신’등의 행이 바로 사(思)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신’등을 설하고 나서 다시 ‘사’를 설하였을 것인가?”
84)
이를테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자식을 두고서 ‘자식도 없다’고 말하듯이, 『아천지가경』(미상)에서 ‘욕이 존재하지 않는다[非有]’고 말한 것은 이미 ‘욕’을 전제로 하고서 방편으로 그같이 말하였다는 뜻.
85)
사견 즉 인과부정의 그릇된 판단은 염오혜의 작용으로 무명과 함께 한다.
86)
불공무명이란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 등 5견과 상응하지 않고서 일어나는 무명을 말한다. 이에 반해 상응하여 일어나는 무명을 상응무명이라고 한다.
87)
일상에서 어떤 대상을 인식[요별]할 때 반드시 그에 관한 기억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기억의 심리현상이 강력할 경우 그것을 알아차리지만, 거의 대개의 경우 미약하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
88)
대개 기억이라 함은 과거 일에 대한 것으로, 현재 대상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89)
즉 계경에서 기억을 상실한 마음[失念]이 존재한다고 설한 것은 기억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한 대상을 인식할 때 그것과는 다른 기억이 생겨난 경우, 혹은 그것에 관한 기억이 부재하는 경우를 말한다는 뜻.
90)
열반의 멸(滅)ㆍ정(淨)ㆍ묘(妙)ㆍ리(離)를 대상으로 하는 멸지(滅智)는 무루지로서 행전(行轉)하지 않는데, 만약 기억이 오로지 과거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멸지 역시 과거로 낙사(행전)하여 소멸하였다고 해야 한다.
91)
사생지(死生智)란 미래세 어떠한 존재로 상속하는지를 참답게 아는 지혜로, 10력(力) 중에는 사생지력(死生智力), 3명(明) 중에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 6통(通) 중에는 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에 해당한다. 즉 기억이 오로지 과거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 같은 미래를 대상으로 하는 지식인 사생지의 실념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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