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수 배 희한
서울의 마포 네거리에서 여의도로 나가는 신작로 왼쪽에 서울 가든 호텔이라는 것이 우뚝 서 있는데, 그 뒤쪽으로 그전에는 '삼선당이'라고 부르던 야트막한 구릉에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달라붙어 있는 동네를 볼 수가 있다.
예전 같으면 삼선당이 여기저기에 발그레하게 피어나는 복사꽃의 꽃무덤을 봄마다 볼 수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복사꽃 대신에 사시사철 늘 그 모습인, 이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포 아파트의 후줄그레한 몰꼴이나 빛깔이 다 바랜 낡은 양철 지붕 따위를 볼 수가 있을 뿐이다. 거기가 바로 마포가 삼개로 불리던 시절에 복사골이라고 불렸던 동네인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럴싸한 문자를 써서 도화동이라고 부른다. 옛이야기를 빌면 도화동은 을축년 곧 1927년에 있었던 큰 물난리로 집과 살림을 죄다 잃었던 이촌동의 수재민들이 '큰고개'를 넘어와서 일구었던 이른바 난민촌이다.
배 희한이라는 조선 목수도 그 '난민촌'에서 살았다. 곧, 서울시 마포구 도화 2동 134번지의 일본식 기와가 얹힌, 다 낡은 판대기로 대문과 벽을 둘러 놓은 집이 그가 살았던 데다. 그가 마포에 사는 지도 쉰다섯해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을축년 장마때에 뗏목 장사를 망쳐서 원효로 사가에 있던 '대궐 같은 집'을 일본 사람 빚쟁이한테 날리고 다른 난민과 함께 복사골로 밀려난 뒤로 줄곧 한동네에서 산다. 그는 이처럼 비록 '성문 바깥'에서만 살았지만 그리 흔치 않은 서울 토박이임에는 틀림없다. 서울 말귀에 밝은 사람은 그의 말씨가 '마포 사투리'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의 말씨에는 스무해쯤 서울에서 산 사람도 쉽게 알아듣기 힘든 대목도 많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그와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지 않은 사람들과 얘기를 할 적에는 그전에는 무엇이라고 했는데 이마적에는 무엇이라고 하지라는 투의 주석을 여러 차례나 달아서 말을 하는 고생도 하게 된다.
목수 배 희한은 지난 1908년 유월 열아흐렛날에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산천동 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대 독자인 '배 씨' 집안은 '복사골' 로 옮기기 전에는 팔대를 줄곧 용산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곡식 장사를 해서 그럭저럭 먹고 살았는데 아버지도 이런저런 장사의 솜씨가 꽤 좋아서 그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자랐다. 그래서 외동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어서 공부를 시키려는 부모의 욕심도 컸겠지만 그는 그때에 사년제였던 용산 공립 보통학교마저 세해쯤만을 다니고는 학교 공부와는 등을 돌렸다. 그는 일본 선생이 가르쳐 주는 학교 공부보다 혼자 만지작거리는 '만들기'가 훨씬 더 재미있었다. 아직도 마포 집의 접은 마당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그가 열다섯살 때에 만들었다는, 꽃가마 같은 닭장을 보면 어릴 적부터 솜씨가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솜씨 때문에 부모들마저 목수가 되려는 그의 마음을 돌려 놓지는 못했다.
그에게 목수일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은 오다라는 일본 목수였다. 오다는 그때에 철도국의 '대령 목수'로 일한 재주가 좋은 목수였다. 그 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땅에 부려 놓은 것은 모두 새로운 것이었고 또 좋게 보였던 것이었다. 어린 배 목수의 눈에 비친 일본집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집보다 더 오밀조밀하였고, 그래서 그게 조선집보다 짓기가 더 어려운 줄로 알았다. 그러나 큰 재주가 있어야 짓는 줄로만 알았던 신까베니 오까베니 하는 그 일보집들이 알고 보니 '그게 그거'여서 세해쯤 그 바닥에 있다가 손을 털었다.
일본집에서 손을 턴 뒤에 만난 사람이 그가 나중까지 스승으로 섬긴 도편수 최 원식이었다. 열일곱살이 되던 때였다. 최 원식은 그 때에 조선서는 '그이를 웃친 이'가 없을 만큼 뛰어난 목수였다. 배 목수도 최 원식을 두고 '조선일을 끝맺고 간 사람'이라고 여긴다.
배 목수는 처음부터 최 원식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최 원식은 그의 눈에 든 아이였을 망정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고작해야 끌로 구멍이나 파도록 했다. 모질게 꾸짖기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배 목수는 품삯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이 최 원식의 수발을 하면서 재주를 익혔다. 끌질을 익히고 나서 대패질을 익혔고 그 다음으로는 자귀질을 익혔다.
그즈음에 최 원식은 배 목수한테 큰 걱정거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장차 저 아이 앞에서 일을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걱정거리였다. 곧, 배 목수의 눈에 들 만큼 재주가 좋은 목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배 목수가 데리고 일할 목수가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최 원식은 배 목수가 최 원식 자신처럼 구차하게 살 것이라는 것도 짐작했다. 그것도 배 목수의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배 목수는 세해 만에 목수로서 배울 수 있는 재주는 다 배웠다. 이른바 먹 긋는 재주도 익혔다. 최 원식은 배 목수의 재주가 남다른 것을 대견해 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하기도 했으나, 배 목수는 겨우 스무살이 되던 때부터 아버지뻘이나 되는 선배 목수들을 거느리고 편수 곧 대목 노릇을 하였다.
그는 스물두살에 장가를 갔다. 색시는 지금의 마포구 신수동 언저리인 '무쇠막'에서 무쇠솥을 만들어 팔고 또 한쪽으로는 '받힘술'을 만들어서 술장수한테 팔아서 돈푼깨나 만지던 부자집의 막내-외동딸인 김 선업이었다.
입김으로 불어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곱고 착한 그 색시는 '중학교꺼정' 마친 흠 잡을 데가 없는 색시였다. 그러나 '이뿌고 화사한' 외동아들과 '곱게 자란' 외동딸이 만났지만 살림살이는 곱지도 않았고 화사하지도 않았다. 곱게 자란 부자집 외동딸이 시집살이를 제대로 꾸려나갈 턱이 없었고 그런 며느리가 그때의 시어머니한테 '이뿌게'만 보일 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아도 찧어 보지 못했고 바느질도 제대로 못한 며느리는 하나 뿐인 아들을 하루 아침에 며느리한테 빼앗긴 시어머니의 시샘까지 겹으로 받아서 '밤낮 들들 볶이는 게' 일이었다. 그러다가 김 선업은 끝내 시집에서 살지 못하고 시아버지가 얻어 준 삼선당이 꼭대기의 세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김 선업은 시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누울 때까지 시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시집에서 쫓겨나와 따로 살기는 하였지만 배 목수와 김 선업은 그런대로 금슬이 좋았다. 배 목수는 부자집 색시가 자신한테 시집을 와서 고생만 하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목수의 아내라면 거의 다 겪게 되는 외롭고 애달픈 사정을 배 목수는 그의 스승의 아내한테서 일찍부터 보아 왔던 터였다. 백리든지 천리든지 또 석달이든지 삼년이든지 일거리를 찾아서 집을 떠나는 게 목수의 팔자였다. 그런 생활 속에서 스승인 최 원식은 어린 제자들을 안고 밤을 보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최 원식은 여자와는 잠을 못 자는 버릇까지 들고 말았다. 최 원식은 술을 잘 먹었고 투전판에서 돈을 날리기도 했다. 그래서 몇해 만에 집으로 돌아올 때에 지닌 것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연장 망태기 뿐이었다. 아내는 고개를 돌리고 아이들도 반기지 않았다. 그래도 떨쳐 버릴 수 없는 '목수진' 때문에 다시 일거리를 찾아서 차가운 식구들의 눈초리를 모른 체해야 했다. 이 땅의 '쟁이'들이 다 그렇게 살았듯이 목수도 목수의 일을 그만둘지라도 목수의 때는 씻지 못했다.
그러나 배 목수는 그의 스승과는 달랐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투전 따위도 몰랐다. 벌어들인 품삯은 '꼼방꼼방' 아내한테 갖다 주었다. 그가 번 돈 중에 그의 손으로 쓴 돈은 담뱃값 뿐이었다. 그래도 살림은 하나도 나아짐이 없었다. 겨우 풀칠만 하는 것으로 '구명종사'를 했다. 그의 말대로 '죽은 나무 깎아 먹는 사람'한테는 늘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나마 해방이 될 즈음까지는 먹고 사는 데에 눈이 뒤집힐 지경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수일을 잘 익힌 탓으로 징요에 끌려 갈 것도 용케 피했다. 그러나 그가 목수로서 받은 대접은 그것으로 다 끝난 셈이었다.
육이오 난리통에는 숨어서 목숨은 건졌지만 난리가 끝나자 그와 그의 식구들은 먹을 것을 구하는 데에 다 매달려야 했다. 아내는 남대문 시장으로, 큰아들은 염전머리로 나가 행상을 했다. 그 통에 그는 이태원에 있던 미군 부대에 일자리를 구해서 미군들의 궤짝이나 짜는 이른바 소목으로 탈바꿈을 했다. 그가 만든 '오케이장'은 미군들한테 큰 인기를 얻어서 재주있는 늙은이라고 하여 그런 대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대궐 목수가 베니어로 궤짝이나 짜고 있을 것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쉬운대로 일거리가 그때그때에 생기지도 않았다. 부서진 벽이나 마루 따위나 고쳐주는 게 고작이었다. 조선 목수의 일거리는 점차로 줄어만 갔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부자가 되는 목수도 생겼다. 이른바 집장수로 탈바꿈한 목수들이었다. 집이야 몇해 못 가서 찌그러지더라도 겉만 번드르하게 해 놓으면 돈이 생기는 판국이었다. 아름드리 나무는 관리들의 꽁무니에 몇 푼만 채워 주면 얼마든지 마구 잘라 올 수 있던 세상이기도 했다. 배 목수 곁에서 흉내내는 것만 배우고 나간 풋나기 목수들도 다들 한몫씩 잡았다. 그래도 그는 일거리조차 없었다. 그는 대궐 같은 집을 짓는 재주가 있어도 집장수를 할 만한 장사속도 없었거니와 눈가림만 하던 그런 집장수들의 집을 지을 재주도 없었다. 그 통에는 그의 재주는 아무짝에도 못 쓰는 재주였다.
그에게도 집장수 노릇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한몫을 잡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느 목수들처럼 날일보다 청부일을 좋아하기만 했다든지, 그나마 떠맡기는 청부일만이라도 하라는 대로 하기만 했더라면 반몫쯤은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 목수는 청부일조차 할 줄을 모른다. 청부가 되었어도 며칠을 못 넘겨서 날일꾼이 되겠노라고 자청해 버린 경우도 더러 있었다. 청부를 맡아서 집을 지으면 돈을 남길 생각만 자꾸 앞서게 되어 끝내 자신의 눈에 차는 집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잘 내 눈에 차야 남의 눈에도 찰게 아니냐는 투의 이야기를 한다. 몇 차례나 어쩔 수 없이 청부를 맡아서 일을 했다가 번번히 낭패만 당하고 말았다. 돈이 남기는 커녕 자신이 들인 품삯도 건지지 못했고 게다가 데리고 쓰는 일꾼들한테 줄 공전조차 없으면 그가 혼자서 품삯도 못 받는 일을 몇달이나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나라일 따위의 청부를 맡아서 짭짤한 재미를 볼 적에도 그는 부숴진 데나 고치는 날일꾼 노릇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청부일이란 말짱 헛일만 해 주는 게 되고 말았다.그가 남의 집을 제 집보다 더 정성스럽게 다듬어 주었다고 해서 '뒷일' 하는 목수들보다 돋보이게 더 나은 대접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그는 뒷일하는 목수들의 공전에다가 장리씩을 더 얹어 받는 게 고작이다. 곧, 뒷일을 하는 목수가 하루에 만원을 받으면 그는 만오천원쯤을 받는다. 집 한채를 짓는데 그가 해내는 몫과 견주면 결코 적당한 대접은 못 된다. 그래도 그는 여지껏 이른바 공전 타령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공전때문에 시원찮은 '해방 목수들'한테 낭패를 당한 집주인은 많아도 배 목수한테 낭패를 당한 집주인은 아무도 없다.
요즈음 목수들, 그의 말대로 하자면, 해방 목수들은 목수일을 하다가도 자신한테 유리한 건덕지가 조금만 보이기만 하면 당장 공전을 더 달라고 트집을 잡는 경우가 수두룩 하지만 그는 한번 정한 공전을 일이 끝날 때까지는 바꾸려고 들지 않는다. 때때로 배 목수의 뒷일을 하는 사람이 그와 똑같은 공전을 받아도 그는 자신의 공전에 달리 욕심을 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유달리 나무에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무를 고르느라고 장목전에서 닷새 또는 열흘을 보냈더라도 그 때문에 공전을 내놓으라고 해 본 일이 없었다. 세상이 그전과는 크게 다르다고만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배 목수는 영락없는 멍청이고 그의 말대로 '우무 팥죽'인 셈이다.
이 승만 정권 시절만 해도 배 목수를 찾는 일거리가 드물지는 않았다. 구황실의 일거리는 거의 다 그가 맡아서 했다. 그에게 맡기면 다른 목수보다 더 많은 품삯을 들여야 했지만 그의 재주가 싸게 치일 수 없다고 믿던 때였다. 그러나 오일륙이 있은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성역화' 니 '문화재 보수니 하는 바람이 시골 구석까지 불어닥쳤어도 오히려 그에게는 일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체로 짧은 기간 안에 서둘러 끝내야 했던 '성역화 작업'에는 배 목수와 같은 목수는 그다지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배 목수는 다른 목수들을 크게 탓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아꼈던 제자 중에 한명이 맡아서 지었다는 아무아무 조선집이 법에 안 맞게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제자의 재주가 그것 밖에 못 되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제자가 그런 일이라도 해서 먹고 살 궁리를 했다면 배 목수는 당장에 먹을 것이 없는데도 쉽사리 그런 일에 손을 못 대는 차이가 있을 뿐이겠다.
조선집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당치 않은 말을 하거나 그가 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괄시를 당하면 그 자리에서 연장 망태기를 꾸려서 나오고 마는 버릇이 다른 목수와 다르다면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그는 그가 잠깐 잘못 생각해서 어디가 조금이라도 틀리게 되었으면 그것 때문에 크게 마음이 상하여 그 자리에서 연장 망태기를 꾸려서 나오고 만다. 그가 한 일은 무엇이든지 틀림이 없어야 하고 그래서 그가 한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자랑스러운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 안 구석 구석에서 헐고, 짓고, 바르고 하는 법썩을 떨었는데도 그는 구차하게 집에 틀어박혀서 목수일을 배운 팔짜를 하릴없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꼭 한명 뿐인 대궐 목수가 아직도 살아서 일을 한다는게 늦게나마 알려진 것은 그가 화가 서 세옥의 집을 짓고 난 뒤부터였다. 서 세옥의 집은 창덕궁에 있는 연경당의 사랑채를 그대로 '모범'을 떠서 지은 집인데 사람들은 그런 빼어난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수가 아직도 살아 있는 데에 저으기 놀랐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놀라는 것과는 달리 배 목수의 마음은 오히려 허전하기만 했다. 그만한 나무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서 세옥과 같은 집주인이 흔치 않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예술가에 견주어 추켜 주는 서 세옥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을 더 고맙게 여길 따름이다.
배 목수는 김 선업과의 사이에서 모두 팔 남매를 낳았다. 그 중에서 혼인한 지 네해만에 어렵게 얻은 큰아들은 난리통에 병으로 잃었고 둘째아들도 또한 낳은 지 세이레 안에 잃었다. 그래서 지금은 올해 서른다섯살된 외아들인 진석과 딸 다섯을 거느리고 있다. 올해 마흔여섯살인 큰딸은 불광동에 살고 있고, 네째딸과 막내딸도 시집을 갔다. 막내딸은 시집가기 전부터 꼬박꼬박 벌어서 제 힘으로 면목동에 집칸까지 마련하여 아직 제 집이 없는 오빠 진석의 식구들을 이녁집 건넌방에 들게 했다. 배 목수는 하나뿐인 아들한테 집 한칸도 못 장만해 준 것을 늘 꺼림칙하게 여기면서도 막내딸의 억척스러움을 대견스럽게 여긴다.
그는 서울 목수들 죄 거지야라든지 목수일 암만 잘해야 소용없다구라든지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다. 그가 그런 말을 그렇게 내뱉지 않아도 그의 살림살이를 보면 그가 궁색하게 평생을 살아 왔음을 알 수가 있다. 낡은 일본 기와를 덮은 다 찌그러져 가는 그의 집을 두고 '나라 목수'의 집으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기도 하려니와 그나마 그게 그가 예순해 동안이나 재주있는 목수 노릇을 해서 남겨 둔 하나 뿐인 재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줄을 알지만 목수일을 배운 것을 가끔 후회하기도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그게 그거일 것 같은데도 그는 목수가 되느니보다 기와쟁이가 되었더라면 그나마 일거리가 없어서 굶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곧, 그가 후회하는 것은 일거리도 없는 기술을 배운 것 뿐이다.
도편수는 정승감이어야 한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그런데 이 속담이, 흔히 속담이 그렇듯이, 도편수를 그저 좋게 이야기하려고 정승에 견준 것은 아닌 것 같다. 곧, 조선 왕조 성종 십년에 서울의 남대문을 새로 고쳐지었는데 그 역사를 맡았던 대목 이른바 도편수의 벼슬이 '어모장군 정삼품 당하관'이었음을 볼 때에 정승감이라는 말이 듣기 좋으라고 한 말만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목수 배 희한도 그런 좋은 시절에 목수 노릇을 했더라면 정삼품의 벼슬길에 올라서 자손 대대로 영화를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스승인 최 원식이 도편수였고 최 원식의 스승인 최 백현이 도편수였다고 그가 대를 이어서 마땅히 도편수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배 목수는 최 백현이나 최 원식보다 더 재주가 뛰어난 목수일지도 모른다. 그는 열일곱살에 목수일을 배워서 겨우 스무살 밖에 안 된 총각 때에 벌써 '먹을 그어서' 집을 지었으니까 그가 목수일에 천재라고 해서 티 잡을 구실은 없다. 죽을 때까지 먹 긋는 기술을 익히지 못해서 '구멍이나 파다가' 죽은 목수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지난 1980년 12월에 국립 민속 박물관이 '목공 연장 특별전'을 열었는데, 그때에 배 목수의 연장을 빌어다 전시하면서 '도편수 배 희한 현재 사용 연장'이라고 쪽지에 써붙임으로써 그가 '도편수'임을 국가 기관이 사실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래도 그에게 붙여 준 '도편수'라는 말 대접이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그는 잘 안다. 그의 말대로 '조선 목수는 줄면 줄었지 늘지 않는' 세상에 도편수 따위가 소용이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또 그에게 믿을 만한 제자가 한명도 없는 게 썩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어차피 조선 목수들이 소용없는 세상에 애써 제자를 길러 두었댔자 제 값 제대로 못 받을 터이고 또 그렇게 되면 그가 겪은 고생까지 죄다 물려 주게 되는 걸 걱정해서 제자를 두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성깔에 맞는 제자를 두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대패질을 한번 했는지 두번 했는지를 나무만 보면 담박에 아는 그의 재주를 따르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재주를 그의 어깨넘어에서, 그것도 호된 꾸지람까지 받으면서 일을 배우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그의 스승인 최 원식이 '조선일을 끝맺고 간 목수'라고 말했지만 배 목수야말로 조선일의 끝장을 맡아서 하고 갈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조선것', '왜놈 것'을 가릴 줄 모르는 해방 목수나 '연장 망태기' 와 '연장 궤짝'을 정확하게 가려낼 줄 모르는 이른바 한옥 전문가들은 조선집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고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조선집' 을 지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지 다 마찬가지겠지만 겨우 백년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 사람들이 살던 집이 이제는 한갓 유물이나 구경거리가 된 것을 배 희한의 목수 노릇 육십년에서 더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