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이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 말씀 앞에 우리는 벌거숭이가 되지만,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아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그 은총의 어좌로 나아갈 수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이 모습을 보고 불평을 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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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철학자도, 임금도,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든 사람도 세리들과 어부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씀입니다. 보잘것없는 어부들,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세리들. 이들이 예수님께 부름 받아 거대한 교회 역사의 기초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우리를 경탄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약함과 죄스러운 상처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그분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특별히 “사목자의 상처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수용하는 환대의 자리이며, 타인을 위한 치유의 원천”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비천함과 죄스러운 상처들이 어쩌면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을 환대하고 위로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초기부터 완전하고 올바른 사람들로 시작된 곳이 아닙니다. 병원으로 환자들이 모여들듯, 비천한 죄인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사목자도, 봉사자도, 상처와 죄가 없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부와 세리처럼 약하고 죄스러운 자리에서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상처 난 사람들을 또한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입니다.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약함과 죄스러움은,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이며, 이웃을 환대하고 용서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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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위는 암의 발생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음식물이 쌓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움직이며 살아야 합니다. 활동적인 사람이 건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암의 발생률이 적은 곳은 심장이라고 합니다. 계속 움직이며 피를 공급하기에 암세포가 들어붙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베풀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영혼의 암’에 걸리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트집 잡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든’ 시비 걸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먹어서 ‘죄 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과 함께 먹었기에 ‘죄가 되는’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법이 있다면 하느님을 옹졸한 분으로 만드는 법입니다. 암세포는 서서히 자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초기에 발견하면 고약한 암이라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게 발견하면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영혼의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마음’과 ‘남을 무시하는 행동’이 영혼의 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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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반대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부유한 집단이었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율법을 저해하는 힘으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죄인과 어울리면 함께 부정해진다는 율법 때문입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는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레위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태오입니다(마태 9,9-13). 아마도 마태오는 두 이름을 가진 듯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귀하고 천한 구분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여전합니다. 사람들의 편견 때문입니다. 남을 괴롭히는 일이 아니면 모두가 당당한 직업이 아닐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율법 자체에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 사람들의 편견을 뛰어넘어 세리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자체를 부정한 행위로 간주하던 때였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숫자에 매달리고 자신의 업적과 치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의 근본을 망각한다면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말과 글도 삶이 한 표현 방법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이 전제됨이 없이는 새로운 말과 글이 나올 수 없다. 비슷비슷한 되풀이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선감이 없는 말과 글은 그의 삶에 중심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글은 법정 스님의 글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사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하는 말과 글을 제 자신이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너무나 많은 글을 썼지만, 이것들 중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남을 말과 글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러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직접 글로 남긴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니까요.
이렇게 살아 있는 말씀을 하실 수 있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새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당시의 소외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십니다. 죄인과 함께 있는 것 자체로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풍속을 보았을 때, 예수님의 이 행동은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었지요. 솔직히 예수님께서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오히려 당신에게 커다란 스캔들을 가져올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음식과 함께 하십니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사랑에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멋진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해서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어 우리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내 자신의 구태의연한 삶을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타협의 말들도 벗어버려야 합니다. 대신 내 자신을 또다시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통해 새롭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며, 나의 말과 글에도 커다란 힘이 담기게 됩니다.
사람은 과거의 원한과 시름만 갖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벤자민 프랭클린)
남을 심판하지 말라
-오기백 신부-
바리사이들처럼 우리도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국적이나 옷차림이나 직장이나 말 표현 등 여러 가지 기준을 갖고 말입니다. 저의 경험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작년에 지하철을 타고 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타고 가던 중에 한 역에서 청년 세 명이 탔는데 그들은 눈에 띄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제법 시끄러웠습니다.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자신을 자랑하는 것 같은 그들을 보며 저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는 이들이구나’라고 판단을 하면서 ‘저들이 빨리 내렸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이 든 시각장애인 한 분이 전철 안에서 구걸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못 본 척했는데 뜻밖에 이 세 명의 젊은이는 각각 자신들의 지갑에서 천 원씩을 꺼내어 그에게 주었고, 그러고 나서 그들은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적잖이 놀랐고 저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놀란 눈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새로운 눈으로 그 세 청년을 보게 되었지요. 저는 속으로 매우 부끄러웠고 사람을 쉽게 판단한 것에 대해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
한 식탁에 둘러앉아
- 조정희 수녀-
새터민들을 만나는 한 수녀님이 저녁 식탁에서 한 이야기다. 새터민 아이 37명이 다니는 J초등학교에 지원하는 학생 수가 줄어 42개 학급 중 19개 학급이 비어 있단다. 그 이유는 부유한 아파트에 사는 학부모들이 새터민 자녀와 함께 다니는 것을 꺼려 부동산업자에게 돈을 주고 위장 전입을 해서 아이들을 다른 학교로 보내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새터민 아이들이 거칠고 불량해서 함께 있으면 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나돈다는 것이다. 그 학교 교장 선생님께서는 새터민 아이들이 특별히 더 거칠지도 않고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예쁘고 좋은 데 이런 일이 있어 속상하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며 사람의 무지와 선입관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마음이 들어 안타까웠다. 함께 뒹굴며 서로를 이해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을 갈라놓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레위와 세리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은 모습을 본다.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공허하고 외로웠을 레위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당신의 사람으로 불러주시며 몸소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께 얼마나 감격했을까`…. 하지만 율법학자는 자신의 의로움에 매여 사랑을 잃어버리고 메말라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연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시며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눈뜨도록 깨우쳐 주시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만남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새터민들임을 기억하며, 비록 인간적 약함을 지녔지만 한 교실에서 배우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며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느 성당에는 날마다 정오만 되면 들어갔다가 2~3분만에 나오는 행색이 초라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분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러 온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짧았고, 그렇게 신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날, 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매일 정오만 되면 성당에 들어가시는거에요?”
“나? 당연 기도하려고 성당에 들어가는거지요.”
“참 나, 할아버지께서는 기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시간을 가지고 성당에 머물지도 않잖아요.”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사실 나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글도 못 읽고 그래서 성경도 기도문도 읽을 수 없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당에 와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저요.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그냥 나와요. 아주 짧은 인사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얼마 뒤, 이 노인이 길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큰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너무나 밝은 것은 물론, 아픈 환자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건네주는데 최선을 다하는 이 할아버지를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힘들었지요. 그래서 간호사 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큰 부상을 입었는데도 어떻게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항상 웃을 수 있어요?”
“날마다 날 찾아와주시는 방문객 때문이지.”
“아니, 할아버지는 가족이나 친척이 없어서 이제까지 한 명도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지. 그런데 날마다 정오만 되면 침대 저쪽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베드로, 날세. 나 예수일세.’라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나?”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더군다나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로 내치지 않는 분이시죠. 문제는 그 주님을 만나는데 방해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완고한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말하는 죄인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그들이 말하는 죄인의 기준은 하느님의 기준이 아니라, 사람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인간에게는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대신 사랑으로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의 이행이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함께 걷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짧은 기도를 바쳐 보세요. “예수님, 저 당신께 왔어요.”라고…….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
-박기호 신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회적 하층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분임을 알게 됩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착취 앞잡이로 조세저항의 표적이 되었고 인정과세의 원성을 샀습니다. 카이사르 얼굴이 새겨진 화폐로 우상을 섬겼고 협박했고 재물을 탐냈고, 십계명을 줄줄이 어겼으므로 유다 사회에서 단죄되고 배척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세리 무리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있으니 빈축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진정한 의인이고 죄인입니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그들이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으로 죄값을 보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윤락여성이나 ‘조폭’들은 떳떳치 못한 생활임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법적 처벌에도 손가락질에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의로운 척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들은 뇌물을 챙기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처하고 대통령도 해먹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더라도 예수님 시대에 우리가 유다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세리가 되어서도 창녀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되 타인의 생명과 행복을 존중하는 직업이라야 그리스도교 윤리에 합당합니다. 정신을 마취시키는 술·마약, 무기제조 판매업, 고리대금업, 부동산 투기, 소비조장, 유흥업소…. 그리스도인은 공동의 행복을 해치는 이런 일에 종사하면 안 됩니다.
밥상 친교
-박영대-
딸들이 커가니 모든 식구가 함께 밥 먹는 일도 점점 어려워진다. 아침. 등교와 출근 준비로 바빠 한 밥상에 앉아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허겁지겁 밥만 먹고 일어선다. 점심. 각자 학교 식당과 직장 근처 식당에서 먹고 집에서는 부모님만 드신다. 늦둥이 막내 혜빈이도 유치원에서 먹는다. 저녁. 고등학교 1학년 큰딸 혜진이는 학교에서 먹고(야간 자율 학습을 그만둔 지금은 집에서 먹는다), 나는 술자리에서 저녁을 때우고, 집에서는 나머지 식구만 먹는다. 쉬는 날도 늦잠 자느라, 각자 약속 때문에 한자리에 앉아 밥 먹는 일이 드물다. 모든 식구와 친척들이 모여 얘기도 나누며 제대로 밥 먹는 경우는 생일잔치처럼 특별한 날뿐이다. 함께 밥 먹는 일은 중요하다. 밥만 먹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밥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다. 밥 먹으면서 울거나 화낼 순 없다. 어릴 때 반찬투정을 하다가 야단맞고 울면서 밥 먹을 순 있지만, 울면서 밥 먹는 건 정상이 아니다. 또 화가 나 숟가락을 내던지고 나가버릴 수는 있어도 줄곧 화내면서 밥 먹을 순 없다. 이렇게 먹었다가는 십중팔구 체한다. 그래서 밥 먹는 자리는 친교와 화합의 자리다. 가정 해체는 밥상에서 시작된다. 따로 먹거나 어쩌다 모여 먹어도 밥만 먹는 ‘식사(밥 먹는 일)’가 가정 해체를 불러온다. 그 회복도 밥상에서 시작된다. 가정 해체의 아픔을 겪는 한 선배는 형수가 집을 나간 뒤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서 두 아들과 함께 먹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웃음도 살아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함께 밥 먹는 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식구끼리 가끔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밥 먹는 일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게을러서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양승국신부-
<침착하고, 밝고, 굳세게, 집주인처럼>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분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글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그는 독일이 낳은 대표적인 행동주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이란 부당한 현실 앞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반 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의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1943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고, 1945년 4월 9일 히틀러 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39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당시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침착하고, 밝고, 굳세게, 집주인처럼’ 의연하게 지낸 특별한 수인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1943년 4월, 체포된 순간부터 1945년 4월 9일 처형되기까지 약 2년간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에 옥중에서 가족과 그의 친구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었는데, 이것을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 ‘반항과 복종’이라는 부제목의 ‘옥중서간’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당시의 독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봤었고, 그래서 적극적 반 나치, 반 히틀러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목사님은 지독한 어둠의 때를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1943년 말 그는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독방생활은 대림절에 대해 많은 것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또 희망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굳게 닫힌 문은 오직 바깥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은 바깥에서만 열수 있다는 목사님의 말은 우리의 선택을 분명히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갇힌 수많은 이들을 위해 문을 열어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감방 안 어둠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문을 열라’는 하느님의 희망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영혼의 깊고 깊은 방안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직업 그 자체의 죄의 근원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절대 문을 열고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절치부심의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드디어 그 누군가가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누구도 열지 못하던 문, 그리도 육중하던 문이었는데, 단 한 마디 그분의 말씀에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습니다.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개방적이신 분, 얼마나 화끈하신 분, 얼마나 자유로운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 하면 다들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다들 멀리 피해갔습니다. 다들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만큼 세리들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세리들 역시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이상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바닥이 그 바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이 바닥을 벗어나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해봤지만,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미지근한 시궁창 물에 온 몸이 잠긴 채로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레위였습니다.
결국 그도 엄청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련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예수님 구원의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에게 다가가신 예수님, 다가가실뿐만 아니라 당신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그를 통해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부족한 우리 죄인들에게 이토록 큰 위로와 희망을 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찬미드릴 뿐입니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아무 쓸데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산 사귐에서 쫒아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추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 회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형제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곽길섭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연중 첫 주간의 마지막날입니다.
이번 주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많은 치유사화와 함께 우리들 신앙생활의 방향성을 잡아 주시는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의 마지막인 이 주말에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환기하시며, 앞으로 신앙생활 안에세 반드시 필요한 요소를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늘 걸려 넘어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게 희망이 되고,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처럼, 병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전을 기하며 완벽한 분들이 많습니다. 철저히 자신의 삶을 관리하면서 죄와는 거리가 멀게,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 요즘 부쩍 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죄가 없노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뵙게 됩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관리하시는 분들을 뵈면 존경스럽고 참 좋지만, 죄가 없노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뵐 때면, 오히려 가슴이 아파옴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이 완벽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죽음과 고통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교만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면 죄를 짖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세상적인 죄의 개념 안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과연 '죄'란 무엇인가? 다시금 정리하셔야 되리라 생각됩니다. 단순히 사횢거인 개념의 죄는 다른 이에게 손해나 피해를 입히지 않는 정도. 공공의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죄'에 관한 개념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다 철저하지도 보다 느슨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인들의 죄에 대한 근본 기준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로 성립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면, 너의 이웃을 너의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뜻과 다른 상태. 맞지 않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른 의미의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고 해서만이 죄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분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고 보면, 오늘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관원을 부르시고 그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자신들 나름대로는 정말 죄도 짖지 않고,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확신하며 생활했지만, 그래서 자신들은 죄가 없는 존재라고 자만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의 모습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놓여 있지 않기에 더 죄 많은 모습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겸허하게 자신의 모습을 주님께 내어놓던 레위라는 세관원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죄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처벌하시면서도, 우리 인간이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저지를 경우, 그 죄인을 자비로이 당신 품에 안으시며, 사랑으로 대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 저지른 잘못과 죄의식에 휩싸여 실의에 빠져있는 우리 인간을, 새로운 희망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부할 때 인간은 비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오히려 고개 숙여 그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며 용서청할 때, 우리는 주님 말씀을 의미를 잘 깨닫는 것이고 나아가 그분께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모습을 제대로 되돌아 보며 그분 앞에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회개의 삶
-이철구신부-
사제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보람 중 하나가 고해성사를 보는 교우가 진정으로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자격도 없다며 눈물을 흘리는 교우를 접하면서 저 역시 반성할 것이 많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제가 그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사제 직분 안에 맡겨 주신 은총의 선물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큰 희망으로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지 않고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이기에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회개의 삶으로 이끄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주님께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것은 회개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유 루시아 수녀-
◆예수님은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시고,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같이 잡수십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밖에서든 집안에서든 식사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또 화해와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에게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서 보았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 그림 속에는 예수님이 제자들·노인들·아이들·창녀들과 또 다른 여성들이 둘러앉아 최후의 만찬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그림 앞에 서서 묵상을 하였는데 요셉병원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베푸는 추석 제사와 음식을 같이 나눈 것도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정작 죄인은 우리가 아닐런지요?
-이상일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중 당신을 도울 협력자인 제자들을 찾아다니시고 부르시는 장면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린다하여 터집을 잡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스스로를 나약하고 미천한 이라고 낮추는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심을 알수 있습니다. 정작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마음안에 아집과 편견, 그리고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나름으로 잘 살고 있다...”라고 자만하며 쉽게 쉽게 타인들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우리 자신을 고스란히 예수님께 봉헌하셨으면 합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바다로간 소금인형>에서 신부님은 오랫동안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건 대답은 마찬가지로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 였다고 합니다.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되지 않았을뿐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몰아붙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 더 무기력해지고 옴짝달싹할수 없었다고 이야길 합니다. 그런 어느날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이때부터 마음이 놓이고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라는 친구의 말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위 사람을 험담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심판하기까지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정작 우리 자신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그대로 좋으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지금 이순간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또 다른 협조자를 우리 자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시곤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말씀에 온전히 일어나 그분을 따랐던 레위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나를 따라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언제나 “예..주님..종이 기다라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을 드리며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특급 제자, 일등제자가 여러분들이 되시는 건 어떨런지요? 아멘.
호의와 친절
-이중섭 신부-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고마운 마음에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해드렸습니다. 세관장 정도면 돈이 많았을 터이니 그런 대접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돈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나누고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요즈음은 만사를 돈으로 해결하고 돈으로 계산하려는 사고방식 때문에, 남을 도와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 합니다. 바라보는 눈으로 기쁨을 주는 목시(眼施), 웃는 얼굴로 기쁨을 주는 안시(顔施), 말로 위로와 격려를 주는 언사시(言辭施), 몸으로 남의 일을 도와주는 신시(身施), 마음으로 타인에게 너그러움을 베풀어 주는 심시(心施), 내가 앉은 좌석을 양보하는 좌석시(床座施), 잠자리나 먹을 것을 제공하는 방사시(房舍施). 이것이 돈 없이도 남에게 도움을 주고 베풀 수 있는 방법입니다. 호의와 친절,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원아 모집
-문화순 수녀-
어린 시절, 큰언니는 자주 “나는 학교 선생님한테 시집가고 싶어”라고 했다. 그리고 내 바로 위 언니의 담임인 총각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팔자가 사나우니…”라는 말로 언니의 뜻과는 정반대의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10남매 중 여덟번째인 나는 학부형 소집이 있으면 언제나 큰언니를 오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 어머니는 젊은데 우리 어머니는 할머니 같아서 창피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도 학부형 소집에는 아예 큰언니를 대신 가게 했다. 그래서 언니는 자연스레 동생 넷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학부형으로 자주 오면서 총각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어쩌면 언니가 좋아하던 선생님과 결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복숭아빛 얼굴의 큰언니가 시집을 갔는데 그 집이 바로 성당 앞에 있었다. 나는 큰언니 집을 자주 들락거렸는데 그때 성당에서 나오는 수녀님들을 만나면서 ‘나는 저 학교에 가야지’ 하고 결심했다. 천주교를 전혀 몰랐던 나는 수도복을 교복으로 알았기 때문에 여고를 졸업하면서 입학원서를 사러 성당에 갔다. ‘한국순교복자수녀원’이라는 팻말 아래 붓글씨로 ‘원아모집’이라고 써 있어서 내심 때맞춰 왔다고 좋아했다. 그것이 유치원 원아모집 광고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우여곡절 끝에 나는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에 입회했다. 세례 후 신자생활 3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지금도 수련장님은 나를 보고 유치원 갈 사람이 수녀가 되었다고 놀리신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선 너무 무지한 나를 잘못 부르신 것 같다. 내가 좀더 거룩해졌을 때이거나 좀더 똑똑해졌을 때, 아니면 덕이 뛰어나거나 공부를 많이 했을 때 부르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똑똑함과는 거리가 멀고 거룩하지도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은 나를 그분은 부르셨다.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데도 “나를 따라라” 하고 불쑥 부르신 것처럼. 지금도 나는 여전히 참 수도자의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 먼 알래스카까지 와서 사도직을 하고 있다. 내 자격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자격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기 때문에 불러주시고 당신 가까이 두시는 것은 아닐까? 가끔 교우들에게 교회일을 맡기면 자기는 아직 자격이 없다고 사양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나는 자격이 있는 사람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는 사람을 위해 왔다”라고 하지 않으실까?
제1주간 토요일
- 이차룡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시자 군중이 모여들었고 그 장소에서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강론과 가르침의 사목이요 또 하나는 치유와 마귀를 쫓는 사목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테4,2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을 때에는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면 올리브산에 올라가셔서 밤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언제 어디서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 가르침이 주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인간구원의 시간이 왔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빨리 회개하고 세속적 가치 기준에서 멀어지며, 하느님을 믿고 복음적 가치에만 가까이 하라는 요구입니다.
복음의 요지는 하느님은 요구하시는 동시에 사랑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처럼 완전하고 거룩해지며, 사랑과 자비가 많기를 원하시고 진복팔단에 표현된 행복의 가치에 따라 살며, 지상에 재물을 쌓지 말고 내일에 연연해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방탕한 아들을 용서하신 아버지의 이야기에서처럼 우리가 하느님이 세워 놓으신 표준에 들지 못하고 하느님의 기대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집으로 되돌아오기를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신다는 것 또한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중 어느 하나라도 잃어버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큰 기쁨이 있듯이 아흔아홉 명의 올바른 자녀보다 한 명의 죄인 자식이 회개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더욱 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벌하시기 보다는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 삶의 원천인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당신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길을 가시다가 우두커니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 말에 레위는 즉시 그분을 따랐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으며 식사대접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내 곁을 지나가시다가 “본당의 일 좀 하자꾸나? 봉사자로 나의 일을 좀 도와다오!”라고 나를 부르신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요? 레위처럼 즉시 일어나 “예수님, 저를 써 주십시오. 제가 여기 대령하였나이다.”라고 일어나 감사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 있을까요? 봉사도 봉사할 때가 있고, 봉사자도 봉사자로 불러줄 때가 있다. 그 때를 놓치지 마시라! 하느님이 내 곁을 지나가시는데도 자기 아집과 교만과 게으름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주님을 붙들고 주님 주시는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는 말씀에 굶주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예수님에게서는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귀한 당신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만나면 함께 식사를 하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던 것이다. 매일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예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식사를 하심으로써 그들을 받아주셨고 사람들을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얼마 전 새해 첫날 우연히 저녁시간에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부자들의 성공습관 다섯가지’ 중에서 커피 브랜드를 석권하여 부자가 된 하워드 슐츠의 성공 포인트는 “매일 다른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다른 사람과 만나서 인맥관리를 하며 남의 좋은 아이디어를 내 것으로 삼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한 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에 병든 인간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학자나 대사제나 원로들을 위한 식사였는데 그들만이 구원받은 특권을 누렸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약한 자, 버림받은 자, 죄인, 창녀들도 똑같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의인인가요? 아니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인이지만 그분으로부터 용서받았다면 행복한 죄인입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 나를 죄 없다고 인정하시는데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요?
예수님의 전문 분야
- 황지원 신부-
감기 정도는 약을 먹지 않고 잘 이겨내는 편인데, 몇 년 전 심한 감기에 걸려 미사 중에 콧물?·?눈물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걱정하며 약도 챙겨주고 감기에 좋다는 것을 주기도 했는데, 쉽게 떨어지지 않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소개로 내과가 아니라 이비인후과 전문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주사를 맞았는데, 감기는 내과 질환이기도 하지만 호흡기 계통 질환이기도 해서 이비인후과 진료가 더 적당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주사가 잘 들어서인지 금방 회복해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의사라고 말씀하시면서 세리와 죄인들을 당신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해주시는 전문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직접적으로 병중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전문 분야는 죄인들을 용서해 주는 용서 전문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죄로 힘겨워하는 사람들, 삶의 멍에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불러 모아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빵을 나누며 그들의 무거운 짐과 불편한 멍에를 벗겨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성공을 청하고 건강을 기원하기도 하는데, 예수님의 전문 분야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또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어둠을 치유해 주십니다.
저는 학창시절부터 공부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어서인지 성적도 그렇게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그래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무난하게 신학교에 진학도 했고,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학위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부까지 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신부가 되고서 얼마 뒤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글쎄 신학교 총장신부님께서 제게 공부를 더 하라는 것입니다. 갈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유학생활을 통해 저의 부족한 학적 지식이 채워주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통해 폭넓은 사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공부였습니다. 워낙 공부를 싫어하는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을 간다 해도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나의 성장을 위해서 간다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도, 또한 하느님의 일에 있어서도 커다란 손해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포기를 하고 소신 있게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이렇게 인터넷을 포함해서 교회 내에 ‘빠다킹 신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면 과연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를 떠올려 봅니다. 더 훌륭한 사제가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공부를 싫어하는 저이기에 중간에 포기를 했거나, 또 다른 길을 선택하면서 힘들게 살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제게 이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공부를 잘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한 다른 재주가 많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의 이끄심은 이렇게 우리들의 판단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하긴 주님의 삶 전체가 우리의 판단을 뛰어넘는 활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만을 봐도 그렇지요. 누구나 다 죄인이라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레위에게도 “나를 따라라.”하면서 손을 내미십니다. 또한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당신의 사명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솔직히 사람들의 비판에 자주 넘어지는 우리들입니다. 또한 소신껏 행동하기 보다는 마지못해 다른 길을 선택할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 가지 원칙, 즉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생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차갑고 날카로운 비판에서도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소신 있게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필요합니다. 즉,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에서 나오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오는 사소한 행복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부모의 마음
-김광태-
“그동안 미사에 나오지 않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한테 사기 치고도 뻔뻔하게 성당에 나오는 OO가 꼴 보기 싫어서 안 나가요.” 그럴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자기 민족과 영혼을 팔아먹는 세리와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께 화를 내는 바리사이들의 심정 역시 이해할 만합니다. 물론 그들이 회개를 했다면 무엇 때문에 문제 삼겠습니까? 행실을 고치지 않으면서도 그럴듯한 자리에는 꼭 얼굴을 내밀려는 그들도 괘씸하고, 그들의 행태를 용인해주는 듯한 예수님의 태도도 못마땅합니다. 형이 맘에 안들 때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는 것이 유일한 무기였던 꼬맹이 시절, 그때마다 어머니는 저를 달래느라고 형을 꾸짖기도 하고 어떤 때는 등을 때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알았습니다. 동생이 울며 고자질할 때, 어머니는 제게 눈짓을 하며 나무라는 척하고, 또 소리만 요란하게 제 등을 두드리셨으니까요. 어머니에게는 우리끼리의 옳고 그름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가 화목하게 지내기만을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죄인도 끌어안으시고, 속 좁은 바리사이도 달래시는 것입니다.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
-김찬선신부-
2010년 새 해 저의 警句를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로 삼았습니다. 올해는 이웃의 잘못을 보기보다는 고통을 보겠다는 뜻입니다.
지난 해 복음 묵상을 하면서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를 반성하고 여러분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이웃의 고통을 보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보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보면 나도 같이 고통을 느끼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강하게 압박을 합니다. 어디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 같은 가녀린 몸에 주사 바늘이 여기저기 꽂혀 있고 눈물이 그렁한 어린아이를 보면 같이 고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웃의 고통보다 잘못이 눈에 먼저 들어오면 사랑은 싹 사라지고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합니다.
옛날 제가 결핵환자들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하고 뭔가를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는 결핵환자들을 위한 시립병원의 사정이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의사, 간호사, 간병인 등 의료인도 많지 않았고, 약도 시설도 음식도 형편없었습니다. 제일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 화장실까지 갈 힘이 없어서 침대 밑에 신문지 깔아놓고 거기에다 큰일을 봐 놓고 그리고 그 옆에서 밥을 먹고 있는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머리는 깎지도 감지도 않아서 산발에 벌레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아침이면 가래를 뱉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는 하였습니다. 독한 약을 먹으면서도 먹는 것이 너무 부실하여 갖가지 합병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런 고통만을 보았을 때는 제가 사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잘못을 보게 되면서 사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다 몸이 좀 나아지면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웁니다. 연민이 실망을 거쳐 미움으로 바뀌고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도 계속 그러면 미움은 분노로 바뀝니다. 한동안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제가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더 깊은 아픔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실 누가 잘못하고 싶어서 잘못하겠습니까? 사실 누가 죄짓는 것 좋아서 죄짓겠습니까? 그것이 그의 한계이고 그의 아픔이지요. 그러니까 사랑은 그의 한계와 잘못과 죄까지 아파하고 연민으로 볼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겉고통은 사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보이는 속고통에 비하면 고통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이해받을 수 있는 고통은 사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에 비하면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해받지 못하는 죄인의 고통에 더 큰 사랑이 더 필요합니다. 누구나 쉽게 병증을 알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는 병에 명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간해서는 왜 아픈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치료하기도 힘든 속병에 명의가 필요하듯 죄인에게 더 큰 사랑이 더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주님의 말씀이 크게 다가오는 아침입니다.
가장 위대한 발견
-전삼용신부-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슨 경은 진통제(마취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진통제로 많은 이들이 고통 없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의학계의 한 획을 긋는 대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노년 시절에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생애동안 가장 뜻 깊고 소중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교수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내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진통제를 발견한 것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나’라는 존재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의 죄를 씻어주실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인간임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음식까지 함께 잡수십니다. 세리란 같은 민족 사람으로서 자신 나라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내어 로마에 바치고 또 자신들도 배를 불리는 매국노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 직업을 버리고 곧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호화생활을 접고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생활과 박해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세상의 호화로움이 자신을 구원해주지 못함을 깨닫고 몸은 힘들더라도 자신의 구세주를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오히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어울리고 죄인을 제자로 부르는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 안에는 강한 역설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고 구원하시는 이들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이들을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겐 구원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에겐 의사가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스스로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임을 발견한다는 것은 진정 위대한 발견입니다. 바로 자신의 구원의 길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아직 자신이 병자고 죄인이고 혼자서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제로서 신자들의 영혼을 치료해 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상담을 요청하고 자신의 어려운 문제들을 토로합니다. 대부분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사람이고 조금 듣다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답이 바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 이것이 문제요.’라고 말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상담하러 오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듣고 고치려는 자세를 지니고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힘들어서 이야기라도 해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데, 바로 이것저것을 고치라고 하면 반발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계속 말을 해가면서 본인의 문제를 본인 스스로 찾도록 유도합니다. 본인이 먼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것을 고쳐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치료도 할 수 없는 것 과 같습니다. 자신은 아프지 않으니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에겐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구세주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들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구원받게 됩니다.
매일 만나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하루 종일 이야기하다가 헤어져 집에 가서도 전화기로 몇 시간씩 이야기 할 것들이 있지만, 오랜만에 전화하게 된 사람에게는 오히려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해를 듣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해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고해 내용도 매우 다양하고 길지만 오랜만에 고해하는 사람들은 대충 간추려서 한두 가지만 짧게 고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으면 그만큼 더 큰 죄인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멀리 있으면 자신을 잘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리 큰 죄를 짓고 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 하느님을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느님을 더 가까이 해서 스스로 죄인이라 느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발견은 누구에게나 가장 큰 발견이 됩니다.
바오로 성인은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느낀다면, 항상 기도로 주님을 찾고, 나를 용서해 주신 하느님께 항상 감사하며, 구원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장 큰 발견, 바로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식사(食事)가 아니라 식사(食死)>
-양승국신부-
밖에서 맴도는 한 아이와 천신만고 끝에 연락이 닿아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약속 장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허탕을 친 것입니다. 꽤 먼길이었기에 김도 새고 맥도 빠진데다 점심시간이 되어 혼자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이 깔끔해서인지 아니면 그날 근처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서인지 앉을 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손님, 여기 자리 났습니다." 하길래 다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제게 안내한 자리 맞은 편에는 이미 다른 손님이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쩔까 하다가 동석을 하게 되었는데, 잠깐이었지만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또 식사를 하는 시간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워낙 숫기가 없는 저이기도 하지만 뭐라고 말 걸기도 뭣하고 해서 그저 서로 딴 방향을 바라보며 그렇게 껄끄러운 모양새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밥을 한 식탁에서 같이 먹는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전혀 모르는 사람과 마주 앉아 한 식사는 식사(食事)가 아니라 식사(食死)였습니다. 그날 오후 내내 단단히 체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식사는 주로 가족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친구나 친지들, 동료들, 적어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식탁에 앉는다는 말은 서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서로 일치한다는 것, 서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는 것, 서로 한 마음, 한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식탁에 앉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구세주 하느님께서 당대 가장 손가락질 받던 부류의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으십니다. 긴가민가하지만 메시아 후보감이 틀림없다고 여겨지던 예수님께서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 갈 데까지 간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십니다.
하느님이 세리와 창녀들과 한 식탁에 앉았다는 것, 당시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큰 스캔들, 스캔들 중에 가장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특히 폼잡기 좋아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서서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의 본질을 명백하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위로의 손길을 느낍니다. "나이 들면 좀 나아지겠지?",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죄를 덜 짓겠지?"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입니까? 눈덩이처럼 불어난 죄와 악습의 굴레를 괴로워하면서도 과감하게 벗어 던지지 못한 부끄러움의 날들이었습니다.
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기도를 끝도 없이 반복해온 제게 하느님께서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도저히 현실성 없는 계획-의인이 되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이제 그만 내려놓거라. 있는 그대로 살아가거라. 나는 죄인의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 왔단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서...
-오상선신부-
정신지체 저능아를 가진 자매가 하나 있다. 근데 남편은 그 저능아 아들을 본체만체하며 가정을 돌보지도 않았다. 10여년간 홀로 아들 둘을 키워오면서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겠다며 "보이지 않은 길을 찾아가야 하니 필요할 때마다 힘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간단하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길이 보이지 않지만 눈이 녹으면 길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내하십시오."
이스라엘에 왕정이 도입되는 초기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사무엘서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가문 출신인 사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이스라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로서는 상상조차할 수 없는 세리 레위(혹 마태오)를 제자로 선택하신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하느님의 선택, 즉 누가 생각해도 합당한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데 그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사울과 레위의 입장에서 오늘 상황을 묵상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사울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려는 지파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12지파 중에서 가장 힘없는 벤야민 지파에서 왕이 추대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벤야민 지파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었다. 비록 출중한 인물과 힘을 갖춘 힘센 용사였지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애당초 길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라진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다가 찾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실패 체험이었다. 되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종이 암나귀들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을 더 해보자고 한다.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성읍에 선견자가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암나귀들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사울은 참으로 종을 잘 둔 셈이다. 그보다도 종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실행에 옮긴 것이 사울이 성공한 이유이다. 대부분 종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말진대, 사울은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자"며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하여 하느님의 사람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암나귀도 찾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다.
레위는 어떠한가? 레위는 세리였다. 말하자면 로마인들의 압잡이가 되어 동료 유다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매국노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이 일을 하면서도 늘 죄인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이 없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처자식을 먹여살릴 방도가 없었다. 자신은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냥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신다.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세리가 길을 찾은 것은 그 말씀에 <예>하며 따랐기 때문이다.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이렇게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직접 혹은 그 누구를 통해서든 말씀을 건네실 때, <예>하고 그 길을 쫓아가면 된다. 그 말씀은 길을 열어주신다. 상상치도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신다. 기적이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내릴지 모르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가 막막하게 길이 보이지 않았던 때를 한번 돌이켜보면, 그 터널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터널을 뚫고 지금 여기 있다. 인내한 결과이다. 그때 분명 하느님께서는 직접 혹은 다른 누구를 통해서 그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정확하게 의식하고 있든 못하든간에 분명 그분이 길을 열어주셨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은가?
그대, 오늘도 길이 보이지 않는가? 그럼 인내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힘써라. 언제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기에 깨어 들으려 노력하라. 그럼 소복한 눈이 쌓였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길이 햋볕이 나면서 조금씩 녹으면서 그 길이 드러나게 되듯이, 그 길이 보이게 되리라.
그 따사로운 햋볕이 그대에겐 필요하다. 그 빛이 되어 주실 분은 과연 누구신가? 과연 누구를 통해서 빛을 던져 주실 것인가?
벽을 허물고
-강영구신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친구처럼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한자리에서 앉아서 먹고 마시기를 즐기신 예수님, 당신이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 되심을 알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장벽들을 만들어 스스로 그 속에 갇히거나 이웃과 형제들을 감금하는지 모릅니다. 불신과 편견의 장벽, 아집과 이기심의 장벽, 聖과 俗의 장벽, 온갖 차별의 장벽을 만들어 편 가르고 서로 헐뜯고 끌어내리면서 싸우고 다툽니다. 눈에 보이는 장벽은 허물거나 폭파하거나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는 장벽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허물거나 폭파할 수도 없습니다. 설령 허물었다 하더라도 언제 생겼는지 모르게 또다시 새로운 장벽이 생겨나서 우리 스스로를 감금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은 눈앞에서 서로 빤히 쳐다보면서도 천리만리 떨어진 것처럼 서로 타인이 되게 합니다. 이렇게 장벽은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서로를 갈라놓거나 고립시킵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벽 속에 갇히거나 가두는 것이 지옥입니다. 서로 오갈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나누거나 베풀 수 없는 갇힌 삶이 바로 지옥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대하시고 그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먹고 마시기를 즐기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당신을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과 어울리는 한량閑良이라 모함하기도 합니다.(마태11,19) 그러나 당신은 편견과 멸시와 천대의 장벽 속에 갇힌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당신이 장벽을 허물어 그들을 초대하고 한 자리에 앉으시자, 지옥에 갇혔던 그들이 천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당신과 한자리에 앉아서 먹고 마시며 담소하는 동안은 천국을 누렸습니다.
예수님, 오늘 하루도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서 장벽을 허물어 천국 만드는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 온갖 편견과 불신, 아집과 이기심의 장벽을 허무는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一明)
죄를 용서하는 권한
-박상대신부-
드디어 예수님 주위에 군중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을 떠나 다시 호숫가로 가시는데 제자들뿐 아니라 군중도 함께 따라나섰다.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대략 두 부류로 나뉘어 있다. 한 부류는 얼마 전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에 냉큼 요(침상)를 걷어들고 걸어가던 중풍병자를 눈앞에서 지켜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놀라움과 즐거움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예수께서 죄사함을 운운하여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하며 언짢은 마음으로 따라가는 율법학자들이다. 전자(前者)는 또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질까 하는 호기심과 신명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오, 후자(後者)는 예수가 또 어떤 발상으로 하느님을 모독할까 하는 조바심이나 경계심, 또는 감시(監視)적 차원에서 따라붙은 사람들이다.
호숫가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아마 두 가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첫째는 제자들과 이미 호감을 가진 군중을 제대로 교육시켜나가는 것이고, 둘째는 반대자의 어리석은 생각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 두 생각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어제 복음에서 이미 언급된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2,10)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증명이라도 하시려는 듯 예수께서는 세관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다.(14절) 그런데 이 대목에서 말하는 알패오의 아들로 세리출신인 레위는 12제자단의 하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12사도 중 하나로서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이며, 세리였던 제자는 마태오이다.(마태 10,3; 마르 3,18; 루가 6,15; 사도 1,13) 그러나 알패오가 두 명의 서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세리인 레위가 마태오일 가능성도 있다.
오늘 소명(召命)을 받은 레위는 세리였다. 세리들은 예수님 당시에 동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으니, 예수께서는 죄인을 제자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처사는 당시 유대인 랍비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분명 스캔들이다. 이어서 율법학자들이 보기에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 차원 더 높아진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은 레위의 집에서 다른 세리들과 어울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이다.(15절) 세리들은 되도록 멀리하고 죄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 거룩하여 성별(聖別)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출신 율법학자들의 원칙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어제 복음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죄(罪)는 격리와 이별을 초래한다. 따라서 죄인은 모든 인간적인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소외된다.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식사공동체라니? 이는 죄인들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죄인들을 공동체에 복귀시키는 일이다. 공동체에로의 복귀는 ’용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수와의 식사공동체에 초대받은 이들은, 그가 죄인이라면 이미 죄의 용서가 선행(先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스런 현실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신다. 죄와 떨어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그분은 죄인들을 떨어내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오히려 죄인들을 찾아가시는 분이며 그들을 용서하여 식탁에 불러 기꺼이 음식을 나누시길 원하신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며, 예수님은 이들을 고쳐주실 의사이기 때문이다.
레위를 보시고(마르2,13-17)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어제 복음에서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중풍병자를 볼 수 있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레위라는 윤리적인 중풍병자, 정신적인 중풍병자를 만난다. 즉 자기가 다른 사람의 돈을 부당한 모습으로 착취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죄인지를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른 채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윤리적으로 중풍병자요, 또한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하고 똑같은 일에 고정되어 있고 똑같은 생활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정신적인 중풍병자인 레위를 만난다. 사실 우리 사회는 신체적으로 중풍병자보다는 윤리적, 정신적인 중풍병자가 더 많다. 생각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 자기 생각으로 즉 이기적인 생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 자기 사상이나 어떤 선입견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 세계는 늘 새롭게 창조되고 사회는 늘 새롭게 변화되고 늘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연구로 인간의 삶의 질이 새롭게 향상되고 있는데 자기만 늘 자기 생각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늘 똑같은 사고 똑같은 생활 습관 똑같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정신적으로 중풍병자이다. 중풍병의 특징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늘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윤리적인 중풍병자 또는 똑같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인 중풍병자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신 것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부르셨다. 길은 무엇인가? 길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이다. 따라서 길은 앉아 있을 곳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곳이다. 물론 목적지에 가다가 힘들어서 잠시 쉬었다가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고정된 자세로 "앉아 있는" 곳은 아니다.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앉아 있을 곳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할 통로이지 가는 길을 멈추고 앉아 있어야할 곳은 아니다. 예수님은 늘 걸어가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가 9,58)라고 말씀하셨듯이 늘 아버지를 향하여 걸으셨다. 즉 이 세상은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이곳이 영원히 앉아 있어야할 곳인양 앉아 있다. 이미 이 세상이 영원히 살 곳이라는 착각으로 생각이 굳어있고 삶의 틀이 잡혀있고 정신이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으로 고정된 사람은 늘 이 세상 안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그 이상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이 좁고 생활 반경의 폭이 좁고 마음이 좁은 답답한 삶을 살아간다.
레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앉아 있는 곳이 나쁜 곳인지를 몰랐다. 비록 행복하지는 못했도 또 그렇게 만족하지는 못해도 세관이라는 직장은 매일 당연히 자기가 앉아 있어야할 자리라고 생각했고 그곳이 자기의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수단이고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앉아있을 자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의 세계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생각한다하더라도 한 갖 꿈이지 모든 것이 보장되어있고 안전한 그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매일 일어나면 나가 앉을 곳이 세관이라는 직장이요, 만나는 사람이나 그가 해야하는 일은 아무런 변화없이 매일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는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있다. 생각이 고정되어있고 살아가는 틀이 고정되어 있고 하는 일이 고정되어 있다. 그에게 새로움이란 찾아보기 힘들고 아니 새로운 것을 도전해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위는 또 다른 모습의 중풍병자이다. 그는 앉아 있지 말고 걸어가야할 장소에 즉 길에 걸어가지 앉고 앉아 있는 중풍병자인 것이다. 생각이 고정되어있는 중풍병자요, 생활에 아무런 변화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는 중풍병자이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혀 새로운 삶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니 다른 삶을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이미 세관에 앉아있는 생활로 고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중풍병자의 특징은 자기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레위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새로운 세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했다. 그 동안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었고 모든 것이 보장되어있는 자리를 버리고 또 익숙해져있던 자리를 버리고 낮선 분의 한 마디 말씀을 듣고 따라 나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커다란 위험이 뒤따르는 인생 도박이다. 그러나 레위는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의 인생이 새로운 삶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대 성공이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모험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의 삶은 보장 받았겠지만 그 이상의 삶은 살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 우리의 입에 그의 이름이 오르 내리지 않았을 것이고 마태오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세관에 앉아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관의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였기에 오늘 우리에게 마태오 복음을 남겨줄 수 있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또 누구를 따라다니는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예수님은 오늘도 길을 지나가시다가 사람들을 부르시고 나를 부르신다. "나를 따라라."하고.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얼마만큼 예수님을 닮아 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에 대한 유일한 기준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였느냐, 얼마나 봉사를 많이 하였느냐, 사제이고 수도자이고 회장이고 단장이라는 신분과 직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신부이고 수도자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따라라."고 따름의 대상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장애되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것만 취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자기를 따르고 돈과 명예를 따르고 쾌락과 안일함을 따른다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수 없다.
"일어나"라는 말은 부활하다는 말이고 출애굽이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버리고 하느님이 지시하는 곳을 향한 신앙여정의 길을 내딛는 것이다. 레위는 어디로 가는지 어떤 길을 가는 것인지 모른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시는 길이다. 따라서 레위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을 놓치면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예수님만이 그의 길을 안내해주실 분이시고 예수님만이 그가 의지해야할 분이시다. 예수님에게서 눈을 돌리게 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모두 버려야 따라 갈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은 죄인에게서 의인으로 변화시켜주는 길이며 중풍병을 치유시켜 주는 길이며 노예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의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죄인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의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지를 모르고 죄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늘 죄인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따라 가야할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완전한 모습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영원한 미완성의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완전과 완성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요, 인간다운 자세이다. 나의 가장 존귀한 것, 나의 가장 아름다운 것, 나의 가장 참된 것, 나의 가장 진실한 것, 나의 가장 깊은 욕망을 채우는 것, 나의 가장 완전한 모습인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한 것이 인간이요, 인간의 가장 큰 목표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고 건강을 주었고 재능을 주었고 시간을 주었고 인격을 주었고 활동력을 주었고 정열을 주었고 사랑을 부어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인가 보람있는 것을 만들어야 하고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요,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부족한 것을 완성시켜 나갈 때 이루워지는 것이다. 그 일은 매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생각을 갖고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아버지를 향해서 끊임없이 걸어갈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삶을 지향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곧 신앙생활이요, 영성생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성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고 자기취미 생활에 앉아 있다. 이 세상의 것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세계를 향해 걸어가지 못할 것이고 세상의 것에 앉아 있다가 세상의 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걸어가는 이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은 이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 품이다. 아버지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는 인생은 늘 새로운 삶을 살 것이며 나를 위해서 늘 새롭게 펼쳐보여 주시는 새 하늘 새 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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