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한의 세상을 바꾼 전략 · 1 - 15 回 |
물길 뚫기 전 물 흐름 살피듯 … 정치는 수읽기의 예술 |
⑮ 예측 조사의 위력
| | | In chaos theory, the butterfly effect is the sensitive dependence on initial conditions in which a small change in one state of a deterministic nonlinear system can result in large differences in a later state. The name of the effect, coined by Edward Lorenz, is derived from the metaphorical example of the details of a hurricane (exact time of formation, exact path taken) being influenced by minor perturbations such as the flapping of the wings of a distant butterfly several weeks earlier. | | 브라질 아마존의 나비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킨다는 나비효과 (카오스이론, Butterfly Effect, chaos theory) 는 작은 차이가 증폭되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걸 의미한다. 과연 조그마한 변화 하나가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까.
나비 날갯짓 하나로 토네이도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토네이도가 불기 직전에 나비 날갯짓이라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토네이도를 나비 날갯짓으로 만들었다고 눈속임하는 것이 더 쉽다. 즉 세상을 의도대로 변화시키는 것보다 세상의 변화를 읽어 이용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
경제가 장기 침체에 막 들어섰을 때 침체의 부작용을 최소화한 경제책임자보다는, 어떤 정책을 실시했더라도 경제는 호전될 수밖에 없었던 시기의 경제책임자가 대중에게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 또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던 정치지도자를 박빙으로 아깝게 패배하게 만든 참모의 능력도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대신 실제 승리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당선한 정치지도자에 미리 줄선 참모가 더 능력자로 평가받는다. 바람이나 물길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 또한 전략이다. 정확한 표본 추출이 표본 크기보다 중요
흐름을 추정하는 방법은 시뮬레이션, 시나리오, 게이밍, 역술 등 다양하다. 선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추정방법은 부분을 갖고 전체를 추정하는 표본조사방법 이다. 전체 모집단의 비율은 무작위로 추출된 n 크기의 표본에서 조사된 비율 P로 추정하되 다음과 같은 95% 신뢰도의 오차범위를 갖는다.
P±1/√n
예컨대 무작위로 추출된 100명의 표본에서 대통령 지지도가 50%라고 하면, 95% 신뢰도에서 국민 전체의 대통령 지지도는 50% ±10%포인트, 즉 국민 전체의 대통령 지지도가 40~60%일 가능성은 95%라는 것이다. 만일 3000명의 표본이라면 95% 신뢰도의 오차범위는 2%포인트에 불과하다. 물론 통계학이나 조사방법 문헌에서 소개하는 공식은 좀 더 복잡하지만 그 또한 몇 가지 가정이 전제된 조건하에서의 오차범위일 뿐이다. 편의상 ±1/√n 을 95% 신뢰도의 오차범위로 계산해도 무방하다.
표본이 작아도 정확하게 추출하기만 하면 수천만명 혹은 수억명 전체의 평균값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표본조사방법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빌 클린턴 후보에게 뒤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유세에서 “여러분 가운데 여론조사 받은 사람이 있느냐” 며 여론조사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국내에서도 종종 젊은 연령층이 있는지를 묻고는 없으면 아예 조사를 하지 않은 전화를 받은 노년층은 “무슨 여론조사가 젊은 층만 찾느냐” 며 여론조사결과를 믿지 않기도 한다.
선거 관련 여론조사에서 가장 정확하다고 평가되는 것은 출구조사다. 투표 기권자까지 포함할 수밖에 없는 사전조사와 달리, 출구조사는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선거결과에 근접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 부재자 및 사전 투표자의 선택이 투표소 투표자의 선택과 다르지 않고 또 출구조사 마감 전후의 선택이 서로 다르지 않다면, 출구조사 표본은 전체 투표자를 잘 대표할 것이다. 출구조사에서는 자신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알려주기 싫은 사람도 응답내용을 보여주지 않고 바로 수거함에 넣기 때문에 솔직한 응답에 대한 부담감도 덜 하다. 출구조사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실제 선거결과와 아주 미미한 오차만을 보여줄 것이다.
신뢰도 높은 예측은 선거 결과에도 영향
| | | 2000년 4월 13일 국회의원선거 출구조사 모습. 당시 선거법은 투표소 300m 밖에서만 조사를 허용했고, 출구조사는 어느 정당이 최다 의석을 차지할지도 맞추지 못했다. | | 지금으로부터 꼭 15년 전인 2000년 4월 13일 대한민국에서 첫 출구조사가 실시됐다. 물론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투표소 500m 밖에서는 출구조사를 실시할 수 있었으나 500m 기준 때문에 출구조사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 선거법 개정으로 투표소 300m 밖에서 조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방송3사의 첫 출구조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최다의석 정당을 잘못 예측하는 등 30여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잘못 예측했다.
2004년에 개정된 선거법은 투표소 100m 밖 조사를 허용했다. 2004년과 2008년 국회의원 선거의 출구조사는 제1당 의석수를 약 20석 틀리게 예측했다. 투표소 50m 밖 조사가 허용된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출구조사는 20개 가까운 선거구의 당선자를 잘못 예측했다.
200명 넘는 당선자를 예측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와 달리 당선자 1명만을 예측하는 대통령 선거나 16~17인을 예측하는 광역단체장 선거에서의 출구조사는 틀린 예측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선자를 맞췄다 하더라도 실제 득표율이 예측 득표율과 큰 차이를 보인 경우는 허다하다. 투표소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법적으로 허용된 거리보다 더 가까이에서 조사한 곳도 있고, 또 예측이 틀렸을 때 받을 비난을 피하기 위해 예산에 책정된 표본보다 더 작은 표본으로 일부러 오차범위를 늘린 조사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출구조사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무엇보다 출구조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늦게 예측한다는 점이다. 마라톤 경기에서 종착점을 몇 미터 앞에 두고 우승자와 우승기록을 예측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출구조사 결과를 실제 정치에 활용할 길은 별로 없고, 주로 방송용으로 쓰인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도하는 게 일종의 특종으로 여겨지기에 출구조사는 2000년 4월 이래 매 선거마다 시행되고 있다. 같은 이유로 개표방송에서도 방송국들은 실제 개표보다 더 진전된 개표 상황을 보도한다. 개표율 높은 방송으로 채널을 돌리는 시청자를 잡기 위해서다. 이렇게 방송국 간 경쟁으로 각 후보의 득표수를 지나치게 올려 방송하다가 이미 방송된 중간득표보다 최종득표가 적을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한다.
출구조사든 사전조사든 표본이 모집단을 잘 대표하도록 추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작위 추출이 어렵다면 조사내용과 관계있는 응답자 배경(연령·지역 등)의 각 비율을 모집단대로 할당하여 표본을 추출할 수 있다. 추출된 표본이 모두 솔직하게 대답하면 조사결과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무응답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처리하는 방법이 정확한 예측조사의 노하우 가운데 하나다. 응답자 다수가 편향된 답변을 할 땐 과거 사례 분석을 통해 보정할 수 있다.
예측 자체가 실제 결과에 영향을 줄 때도 있다. 정확한 예측은 예측의 효과까지 감안한 예측이다. 예측에 대한 신뢰가 높거나 부동(浮動)표가 많을 때 그리고 정당보다 인물 위주의 선거, 다자구도, 예비선거, 작은 선거 등에서 선거예측의 영향력이 크다.
| | | 대선에 나섰던 문재인과 안철수는 2012년 11월 야권 단일화 협상을 벌였지만 룰에 대한 의견차만 확인한 끝에 결국 안철수가 사퇴했다. 그리고 13일만인 12월 6일 두 사람은 전격적으로 회동해 대선 유세에 힘을 합치기로 합의했다. [중앙포토] | |
국민만족 정책 위해 필요한 여론조사
여론조사가 한국 선거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계기는 2002년 노무현-정몽준 대통령 후보 단일화였다. 이회창 후보 지지자를 제외한 응답자에게 “한나라당 이회창후보와 경쟁할 후보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 고 물은 후 그 조사결과에 따라 노후보로 단일화했다. 만약 질문이 달랐다면 정후보로 단일화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12년 야권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문재인 후보측은 새누리당 지지자를 제외한 응답자에게 “박근혜 후보와 경쟁할 후보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중 누가 적합하다고 보느냐” 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안철수 후보측은 전체 유권자에게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맞불을 경우 누구를 지지하느냐, 또 박근혜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맞붙을 경우 누구를 지지하느냐” 를 묻자고 주장했다. 결국 양측의 이견으로 단일화 여론조사는 실시되지 못했다.
야권후보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여당 지지자가 여당 후보에게 약한 야당 후보를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이른바 역선택 문제는 어떤 방식에서도 발생한다.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여당 지지자는 전체 국민을 포함한 조사뿐 아니라 여당 지지자를 제외한 조사에서도 여당 지지자가 아니라면서 참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야당 지지자도 여당 후보 선출에 전략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
여론조사는 이제 선거뿐 아니라 정당의 공천과정에도 활용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공천후보 결정을 위한 여론조사에 부정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도 있다. 예컨대 어떤 선거구에 1만개의 유선 전화선이 있고 그 가운데 1000개를 확보한다면 상대 후보보다 10%포인트 앞서서 경쟁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업무방해죄가 적용될 수 있는 위법 행위다. 왜곡되지 않은 정확한 여론조사는 국민의 마음을 드러낸다. 유권자 마음 읽기는 정치인의 득표 증대뿐 아니라 국민을 만족시키는 정책 실현에도 필수적이다.
4·29 재보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도 딱 1년 남았다. 정확한 여론조사로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큰 흐름을 제대로 읽고 행동하여 정치적 이득을 얻고 동시에 유권자의 만족도도 증대되기를 기대해본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22호 | 201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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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3월 29일 사이공 베트남군사지원사령부(MACV) 해산식에서 미군 장병이 성조기를 접고 있다. [AP Photo/Charles Harrity, File] |
본전’ 생각한 미국, 베트남 철군 미루다 수렁 속으로 |
⑭ 지는 것도 전략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42년 전인 1973년 3월 29일은 미국이 베트남 주둔 전투부대를 철수 하고 종전(終戰)을 선언한 날이다. 이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손을 뗀다는 의미뿐 아니라 미국 정부 스스로 패전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미국은 질 전쟁에 왜 개입했을까. 근본적인 대답은 질 줄 몰랐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미국은 60년대 베트남에서 다른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전쟁은 적어도 패전국에게, 어떤 경우엔 승전국에게도 손해인 선택이다. 쌍방에게 모두 손해인 전쟁이 쌍방 모두 최선을 선택한 결과일 때도 있다. 각 선택이 실제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전(事前)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더라도 실제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승리 효용성 크지 않았던 베트남전
불확실성을 감안해 각 선택별로 향후 결과를 사전에 전망하는 기초적인 계산은 기댓값 계산이다. 부에노 데 메스키타(Bruce Bueno de Mesquita)는 전쟁수행에서 오는 기대이익이 현상유지보다 더 크면 전쟁을 수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수행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전쟁의 기대효용을 다음 식으로 계산했다.
전쟁수행 기대효용(EUw) = 성공 가능성(P)×성공의 효용(Us)+실패 가능성(1-P)×실패의 효용(Uf)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군사개입 결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국의 만족도는 지극히 낮았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도미노처럼 다른 아시아지역도 공산화할까봐 우려했고, 베트남에서 공산세력을 봉쇄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만 미국에게 인도차이나 지역의 가치는 중남미나 유럽보다 작았기 때문에 베트남전 승리의 효용(Uf)이 매우 큰 것은 아니었다.
대신 미국은 베트남전쟁 성공 가능성(P)을 매우 높게 인식했다. 중국과 소련이 북베트남을 지원한다고 해도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적어도 지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도덕이나 당위의 측면에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처음부터 줄곧 비판 받았지만, 초강대국 미국이 북베트남에게 패전할 것으로 내다본 분석은 개입 초기 당시엔 거의 없었다. 실제로도 베트남전쟁 동안 미군측 사망자는 약 5만명으로, 백만명을 상회하는 공산측의 사망자보다 훨씬 적었다. 미국은 스스로 높게 인식한 성공 가능성(P)으로 인해 전쟁수행에서 올 기대효용(EUw)이 높았고 따라서 전쟁을 하게 되었다.
북베트남의 기대효용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북베트남은 자국이 승리할 가능성(P)을 미국만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성공의 효용(Us)은 미국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게 인식했다. 다수의 희생을 무릅쓰고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지고의 가치가 공유되었다. 전쟁승리에서 올 효용(Us)의 값이 워낙 컸기 때문에 비록 성공 가능성(P)이 높지 않았더라도 전쟁수행에서 기대되는 효용(EUw)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때보다 컸을 것이다. 북베트남은 미국이 참전하더라도 전쟁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군사력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북베트남이 미국과 치열하게 싸운 것은 기댓값 계산에 기초한 전략적 선택이었고, 이는 인도차이나를 뛰어넘어 국제질서를 바꾼 전략이기도 했다. 데탕트도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 | |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정에 따라 1973년 3월 존 매케인(후에 미국 상원의원 및 대통령후보, 정면 바라본 사람 중 맨 앞)을 포함한 미군포로들이 미군측에 인계되고 있다. | |
이제 73년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철수 선택을 살펴보자. 미국은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덜 잃기 위해 철군했다고 볼 수 있다. 레둑토(1911~1990)가 공동수상을 거부한 키신저의 노벨평화상이 미국의 유일한 전리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73년 1~3월 미국의 여러 정책은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인도차이나 안정에 기여했다고 포장하면서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수순에 불과했다.
지는 데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론, 철군할 거면 더 일찍 했어야 했다. 하지만 본전 생각에 철군을 주저했다. 미국은 이미 수많은 인명과 재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그냥 철군하기에는 아쉬움이 매우 컸다. 확대와 철수 가운데 성공 가능성(P)을 더 높여주는 확대를 선택했다. 그러나 베트남 주둔 군사력을 증강했어도 실제 성공 가능성(P)은 증대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 한발 더 개입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됐다.
비즈니스에서 이미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 추가로 투자할 때가 많다. 기존 투자금의 회생 가능성이 높지 않을 때는 기존 투자금을 잊어버리는 게 더 큰 돈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일단 선택한 후에는 선택 이전의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기간에 걸쳐 매번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주도록 선택됐다고 가정하고 전략을 구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73년 철군은 더 이른 철군보다는 못한 전략이었지만 조기 철군 옵션이 이미 지나가버린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여러 대안 가운데서는 가장 나은 전략이었다.
68년 초 공산측의 대공세 이후 미국은 자국이 베트남에서 이길 가능성(P)이 낮다고 인지 하게 되었다. 동시에 중-소 분쟁 등으로 봉쇄의 필요성이 대폭 감소되었고 부당한 전쟁 이라는 미국 내 반전 여론이 득세하면서 성공에서 오는 미국의 효용(Us)도 낮게 인식됐다. 따라서 전쟁수행에서 기대되는 효용(EUw) 또한 감소했고 철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골리앗은 다윗과의 싸움 피했어야
| | | 1 미켈란젤로 카라바조가 17세기 초에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카라바조는 자신의 젊은 모습을 다윗의 얼굴에, 자신의 나이든 모습을 골리앗에 대입하여 그렸다고 전해진다. 2 거대한 골리앗에 돌팔매질을 하는 다윗. 오스마르 신들러의 1888년 작. | | 미국 철군의 전략적 효과는 추후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이다. 다른 개발도상국처럼 남베트남정부도 부패와 쿠데타로 정권이 불안정했다. 미국으로서는 분단된 남베트남 대신 통일된 베트남을 관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76년 통일한 베트남은 77~79년 캄보디아와, 79년 중국과 각각 전쟁을 치렀다. 85년 부분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했고 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했다. 이후 92년 한국과, 95년에는 미국과 각각 국교를 수립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베트남과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데 걸린 시간은 미국이 베트남에 적대적으로 개입했던 기간보다 더 짧았다.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인 세력균형론에서는 이길 가능성과 질 가능성을 매우 중시한다. ‘손자병법’ 지형편에서도 “싸워서 반드시 이기면 주군이 싸우지 말라고 해도 반드시 싸울 수 있고, 싸워 이기지 못하면 주군이 반드시 싸우라고 해도 싸우지 않을 수 있다 (戰道必勝 主曰無戰 必戰可也 戰道不勝 主曰必戰 無戰可也)” 고 언급하고 있다.
성공 가능성에 따라 행동을 선택하라는 이런 고전적 경구가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달걀로 바위를 깨려고 시도하는 것, 그리고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이 최선의 전략일 때도 있다. 왜소한 다윗은 무모하게 보이 더라도 거구의 골리앗과 싸웠다. 실패하더라도 더 나빠질 게 없다든지 혹은 성공할 때 너무 좋아진다든지 하면 실패 가능성이 매우 높아도 도전할 수 있다.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자가 센 자와의 싸움으로 자기 위상을 높일 수 있을 때 특히 그렇다.
반대로 골리앗은 다윗을 피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이겨봤자 더 나아질 게 별로 없거나 실패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에서는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높아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성공 가능성(P)과 실패 가능성(1-P)이 얼마나 크고 작으며, 성공(Us)과 실패(Uf)가 얼마나 좋고 나쁜지를 함께 계산해야 한다. 이러한 기댓값 계산은 더 나은 선택을 위한 기초자료다.
사람들은 전략이 이기기 위한 것이지 지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쉽게 이기는 것뿐 아니라 잘 지는 것 즉 덜 지는 것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일보후퇴 이보전진’처럼 길게 보고 현재에는 지는(양보하는) 것, 그리고 지는 게 확실하다면 적게 지는 것이 그런 예다. 적자생존은 적게 진 자가 살아남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윗은 기습적인 돌팔매질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이로써 다윗의 선택이 옳았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선택은 결과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이겼기 때문에 무조건 옳은 선택이고 졌기 때문에 무조건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윗의 돌팔매질이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애초에 없었다. 불확실성이 수반되는 선택에는 운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엔 결과가 좋았지만 전략은 나쁘게 평가될 수 있고, 또 결과가 나빴더라도 좋은 전략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20호 |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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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44년 3월 15일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된 카이사르가 한 때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아래 쓰러져 있다. 카이사르 암살 관련 그림 가운데 가장 사실적이라고 평가받는 장 레온 제롬의 그림(1867년 작). |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황제로 만든 ‘의인물용’ 전략 |
⑬ 제휴와 배신의 이면
“3월 15일을 조심해라 (Beware the ides of March)!” 지금으로부터 2058년전인 BC 44년 한 점술가가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에게 했다는 경고다. 율리우스 달력으로 이 날 카이사르는 혼자도 아니고 수십명에 의해, 그것도 몰래, 지독히 비겁한 난도질로 암살됐다.
“3월 15일을 조심해라” 보다 더 유명한 카이사르 암살 관련 문구는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 다. 카이사르가 죽으면서 했다는 말인데,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자신이 믿었던 브루투스의 배신에 놀라 나온 말이라는 해석뿐 아니라 배신한 브루투스에 대한 저주로 뱉은 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이사르 시해(弑害)의 두 주역 카시우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브루투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경쟁자 폼페이우스 휘하 장수였다. 내전 후 카이사르는 그들을 사면하고 포용했다. 로마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종신독재관직을 부여했고, 또 공화정 수호자들의 반발을 유도하려했는지 몰라도 카이사르를 왕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내의 적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특히 자신의 통제 없이는 로마가 내전상태로 들어갈 것이니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을 암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남을 믿는다는 것은 늘 위험이 따른다. 지난해 세월호 침몰 때 객실 안에 그대로 있으면 구조된다는 안내방송을 믿었던 승객 다수는 희생되고 말았다. 내가 믿지 않은 상대의 습격보다 내가 믿는 상대의 습격이 나에게는 훨씬 더 치명적이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믿지 않고 경계했더라면 죽음을 피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용인물의(用人勿疑)는 간혹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원로원의 암살 주모자들은 자신들이 카이사르를 배신했다기보다 오히려 카이사르가 로마 공화정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신들은 독재자를 없앤 숭고한 거사를 단행했으니 다수로부터 박수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브루투스 등 일부 주모자들은 아무런 후속계획 없이 카이사르만 제거하는 것이 순수성을 인정받는다고 주장했다. 원로원 귀족들끼리만 소통하다 보니 원로원 밖의 여론을 잘 읽지 못했고, 또 카이사르를 비판하는 것과 카이사르를 처참하게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 | | 셰익스피어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에 삽입된 그림 (헨리 셀루스 작)에서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가운데)가 레피두스에게 살생부를 강요하고 있다. | |
안토니우스, 민심 간파하고 입장 바꿔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전개된 로마 상황은 암살 주모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갔다. 카이사르파 핵심인물 안토니우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사건 직후엔 원로원에 협조적이다가 카이사르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후에는 원로원 책임론을 공개적 으로 밝혔다. 카이사르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거사에 초대되지 못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와 함께 죽이지 못한 것이 큰 실수라고 지적했다. 암살 주모자들은 정권을 잡기는커녕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자살이나 타살로 모두 생을 마감했다. 사건 후 관심은 원로원의 권력 강화나 공화제의 공고화가 아니라 누가 카이사르를 계승하느냐로 바뀌었다.
카이사르 사후 새로운 지배자 등장의 첫 무대는 카이사르의 유언 공개였다. 유언에 따라 카이사르 누이의 손자인 18세의 옥타비아누스(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의 상속자가 됐고,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했다. 노련한 안토니우스를 경계하던 키케로는 덜 위협적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BC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부관으로 합류시킨 군대로 안토니우스를 처단하려 했다. 원로원 기대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제휴해 이른바 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고, 삼두 연합은 카이사르 암살과 관련된 살생부를 작성하여 숙청을 실시했다. 특히 안토니우스 측이 키케로를 죽일 때 옥타비아누스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BC 42년 삼두 연합은 원로원파 군대를 격파했고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했다.
BC 40년 옥타비아누스는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들을 처형했다. 그 가운데에 안토니우스의 동생도 포함됐다. BC 36년 레피두스의 군대를 매수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연금시키고 삼두정치를 종식했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했고, BC 30년에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결국 자살로 이끌었다. 이로써 삼두정치의 파트너인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모두 제거됐다. BC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황제(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됐다. 카이사르 암살을 겪은 옥타비아누스는 용인물의 대신 의심스러운 자는 쓰지 않는 의인물용(疑人勿用)을 따랐다.
옥타비아누스뿐 아니라 그의 양부 카이사르도 최고권력자로 등극하기 전 삼두정치를 거쳤다. 카이사르는 공동통치로 로마 지배를 시작했다. BC 60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휴가 이른바 1차 삼두정치다. 1차 삼두정치 3인의 지지기반은 각각 평민 · 퇴역군인 · 돈이었다. BC 53년 크라수스의 죽음과 함께 삼두정치가 붕괴되고 카이사르의 독주가 시작됐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귀족파와 제휴했는데, BC 49년 1월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BC 48년 카이사르를 피해 이집트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는 그곳에서 살해됐다. BC 44년 2월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에 추대됐고 한 달 후 암살됐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모두 삼두정치 파트너를 제거해 최고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혼자서도 로마를 지배할 수 있을 때 굳이 남과 제휴해 권력을 나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연합은 거느린 입이 적을수록 좋다. 승리에 불필요한 연합 구성원의 존재는 나머지 구성원에게 갈 몫을 줄인다. 전리품 분배에서 자기 몫을 극대화하려면 승리에 불필요한 구성원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 즉 거대연합 대신 최소승리연합(MWC·minimal winning coalition)을 지향한다.
토사구팽은 불필요한 인물 솎아내기
토끼를 잡은 후엔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도 불필요한 멤버 솎아내기 의 하나다. BC 473년 범려는 문종과 함께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범려는 구천이 고난을 함께해도 영화는 함께할 수 없는 위인이라며 월나라를 떠났다. 범려는 “나는 새가 없으면 훌륭한 활을 넣어두고,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蜚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 며 문종에게 월나라를 떠날 것을 충고했지만,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구천의 탄압을 받아 자결했다고 사마천의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사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토사구팽 당사자는 한신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일등공신 한신을 초왕으로 봉했으나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 하여 BC 201년 회음후로 격하했다. 한신은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쓸 개를 삶아먹고, 나는 새가 사라지면 괜찮은 활을 넣어두며, 적국이 망하면 훌륭한 신하도 필요없고,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당연히 팽 당한다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고 말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은 독재자를 제거해서 공화제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실제론 오히려 공화제를 종식시켜 최초의 로마황제를 등장시킨 사건이었다. 귀족들 다수는 사건 후 황제체제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정치적 소신보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카이사르는 토지개혁 등 귀족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은 귀족의 이익을 빼앗아서 평민에게 주는 움직임에 대한 저항이었다. 카이사르가 귀족의 이익을 잘 챙겨주지 않아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귀족 이익을 잘 챙겨서 귀족의 충성을 받아냈다. 즉 황제체제든 공화체제든 충성은 자신이 받는 혜택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간의 권력구조 논쟁도 대의명분보다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로 더 잘 설명된다. 권력구조에 관한 정치적 소신도 결국 권력구조에 따른 이해관계에 불과할 때가 많다. 혜택이 있는 쪽에 가담하고, 이를 감안해서 세 규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배(승리)할 수 있는 크기의 연합 만들기는 권력 장악의 필수조건이며, 이미 권력 장악에 성공한 연합에서는 불필요한 멤버 솎아내기 또한 필연적인 현상이다. 쪼개져 있다 보면 승리를 위해 합하게 되고, 또 합해져 있다 보면 자기 몫을 늘리기 위해 쪼개지기 마련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18호 | 201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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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12. 괴뢰정부와 완장 효과 |
| 1935년 일본을 방문해 일왕 히로히토와 함께 무개차에 탄 푸이(앞줄 오른쪽).[중앙포토] |
푸이 내세운 만주국 건설은 일제의 ‘차시환혼(借尸還魂)’ 책략 |
⑫ 괴뢰정부와 완장 효과
최근 북한 여러 매체가 대한민국 정부 및 당국자를 ‘괴뢰’로 호칭하며 비난하고 있다. 남이 조종하는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의미하는 괴뢰(傀儡, 꼭두각시, 앞잡이, 인형)는 최근뿐 아니라 분단 70년 내내 남북한관계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괴뢰는 어떤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을까. 괴뢰정부의 효능은 근대 이후에 더 커졌다. 근대 이전에는 조공관계처럼 다른 나라 내정에 직접 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괴뢰정부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에 비해 내정불간섭의 근대국가 체제에서는 역설적으로 타국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괴뢰정부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된다.
근 · 현대 국가는 독립국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외세의 관여는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 정권이 괴뢰정권인지 아닌지는 늘 논란의 대상이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 후 수립된 프랑스 비시정권은 괴뢰정부라는 견해가 많지만 온건한 민주정부였다는 평가도 있다.
이에 비해 논란의 여지없이 괴뢰국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라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83년 전인 1932년 3월 1일 건국한 만주국이 그렇다. 만주국이 괴뢰국으로 공인되는 이유는 국제연맹의 유권해석 때문이다. 중국 제소로 발족된 국제연맹 리튼위원회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며 만주국 지역은 중국의 주권관할 지역이라고 1932년에 보고했다. 이에 일본은 이듬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 남만주철도주식회사(滿鐵)가 1934년 3월 1일 푸이의 만주국 황제즉위를 기념하여 발행한 그림엽서. 즉위 연도를 1933년으로 잘못 인쇄하여 1934년으로 정정하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그만큼 즉위시점이 불명확했다. 만주국-일본-미국 항로와 함께 만주국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왕조였음을 강조하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
잃을 것 없는 푸이에겐 ‘치명적 유혹’
| | | Manchuria Daily News 1934년 3월 1일자 만주제국 황제즉위 기념호. | |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세웠다. 5족(만주족·한족·몽골족·조선족·일본족) 공생 국가를 표방하여 아시아판 미국을 지향했다. 또 공화정 대신 왕정제, 그 가운데서도 패도가 아닌 왕도를 표방했다. 만주국 경제는 일본 지원으로 급속히 성장했고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관동군 개입을 비판하고 만주국 독립을 주장하던 일본 내 목소리도 있었다. 만주국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여러 나라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았다.
그렇지만 만주국이 기치로 내세운 다민족 왕도정치는 전혀 실천되지 못했다.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은 입법원을 설치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국무원 산하 총무청이 거의 모든 정책을 결정했다. 만주국은 총무장관, 총무청 차장, 관동군 헌병대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만주중공업개발 사장 등 이른바 2키(도조 히데키, 호시노 나오키) 3스케(기시 노부스케, 아아키와 요시스케, 마쓰오카 요스케)로 대표되는 일본인이 지배한 병참기지에 불과했다.
만주국으로 이득을 본 일제는 내몽골 · 난징 · 베트남 등에도 왕족이나 고위관리를 통해 각각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에 따라 중국 분열은 심화됐는데, 이는 일제가 의도했던 바다. 당시 국제정세는 특정 국가가 중국을 독점할 수 없도록 중국 침공을 서로 견제하던 분위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자결과 민주주의라는 국제여론이 힘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타국을 병합하거나 압박을 가하는 것보다 괴뢰국가나 괴뢰정부를 내세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만주국 건설의 배경에는 식민지 한반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만주는 조선 독립운동의 배후기지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국 건설은 일제의 한반도 장악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서 수탈할 때 조선인을 내세웠다. 완장을 차면 완장을 채워준 자의 기대 이상으로 악랄하게 행동하는 자는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앞잡이를 세우든 괴뢰국을 세우든 이는 간접 통치에 해당한다. 간접 통치는 직접 통치보다 전략적이다.
종전 후 만주국을 상대로 제기한 여러 소송에서 일본은 만주국이 일본과 관계없는 독립국이라며 책임이 없다고 대응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일본은 만주국 황제 푸이가 중국 동북지역 침략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푸이는 자신도 일제의 피해자라고 항변했다.
푸이가 만주국 황제로 즉위한 날은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인 1934년 3월 1일이다. 만주국 황제 즉위는 일제뿐 아니라 1906년생 푸이의 선택이기도 했다. 푸이는 유아 시기 2세(1908)부터 6세(1912)까지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재위했고 복벽사건으로 11세(1917)때도 잠시 재추대됐는데, 재위기간 내내 섭정이 이뤄졌다. 아무 실권도 없던 자신이 왕조 패망의 책임자로 여겨지는 상황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푸이가 만주국 황제 자리를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만주국 황제 자리는 만주족과 청 왕조를 부흥시킬 수 있거나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 나은 대안이었다. 만주국 황제로 취임하더라도 더 나빠질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은 남의 칼을 빌려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고, 차시환혼(借尸還魂)은 남의 시신을 빌려 다른 혼을 불러온다는 뜻이다. 칼(刀)을 빌린 자나 칼을 빌려준 자 모두 혜택을 보는 경우도 있고, 칼을 빌려준 자는 다치고 자기 칼 대신 남의 칼을 빌린 자만 혜택을 보는 경우도 있다. 일제가 푸이에게서 빌리고자 한 것은 칼이 아니라 정통성이었다. 푸이는 1924년까지 청나라 황제 칭호를 유지했는데, 일제는 푸이라는 청왕조의 시신(尸)을 빌려 동북부 중국을 지배하려 했다.
시신이나 칼을 빌려준 자가 적의 괴뢰로 간주되면 시신이나 칼의 효능은 급격히 떨어진다. 중국에서는 만주국을 가짜 만주라는 뜻의 위(僞)만주국 혹은 줄여서 위만으로 부른다. 만주국이 일제 괴뢰국으로 지칭되면서 일제가 얻는 효과는 반감됐다. 특히 괴뢰로 받아들여지는 당사자는 비록 시신이더라도 채찍질을 받는, 이른바 굴묘편시(掘墓鞭屍)를 당하게 된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자마자 만주국은 패망했고, 정치적 영향력이 없던 푸이도 소련과 중국의 수용소에서 십년 넘게 고초를 겪었다.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괴뢰라는 낙인은 치명적이다. 실제 적과 내통하지 않았더라도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 남북한이 체제우위를 경쟁하던 시절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를 괴뢰로 불렀다. 물론 남한이 북한을 더 이상 체제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북한이 주변국 압력에 불구하고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북한은 더 이상 북괴(북한괴뢰)로 불리지 않고 있다.
민주국가도 다루기 쉬운 ‘꼭두각시’ 선호
괴뢰국을 내세우는 전략은 제국주의자나 군국주의자만 구사하는 게 아니다. 민주국가도 괴뢰국 파트너를 선호한다. 괴뢰국이나 독재국가일수록 대가를 받고 외국의 정책적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만일 파트너가 국민 이익에 충실한 민주국가라면 그 파트너를 통제하기 어렵다.
민주화 지수를 이용한 통계분석은 민주국가나 유엔 개입이 현지국의 민주화에 도움 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켰음을 보여준다. 미국 개입만 현지국의 민주화 지수를 높였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상은 미국의 개입조차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이 개입한 국가 다수는 민주주의 수준이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낮은 단계의 국가들이었다. 즉 표본 편중에서 오는 착시효과다. 그런 사례를 빼고 계산하면 미국 개입도 평균적으로 민주화를 후퇴시킨 것으로 나온다.
대외원조 효과도 마찬가지다. 여러 정치통계는 대외원조를 많이 받은 나라일수록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조 공여국은 원조 수혜국의 정책적 양보를 원하기 때문에 정책적 양보가 더 용이한 독재국가들이 더 많은 원조를 받게 되며 따라서 정권연장도 독재국가가 더 쉽다. 즉 대외원조를 받음으로써 더 오래 유지되는 나쁜 정부로 인해 빈국 빈곤층의 삶은 오히려 더 피폐해지는 것이다.
만일 공여국 국민이 수혜국의 민주화 혹은 빈민구제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공여국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을 수혜국 정부에 강요하기보다 수혜국의 민주화 혹은 빈민구제 진전 등 인류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요구해야 한다. 민주국가 국민이라고 해서 독재국가 국민보다 더 착한 것은 아니다. 인성과 정치체제는 별개의 문제다. 정부정책에 다수 국민의 입장이 반영되면 민주주의이고, 그렇지 못하면 독재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동맹조차 남의 힘이나 명분을 빌리는 일종의 차도살인 혹은 차시환혼이다. 민주정권이든 독재정권이든 누구나 남의 힘 혹은 명분을 빌리는 것이 필요할 때는 빌리려 한다. 괴뢰라는 확실한 친구를 만드는 것, 남의 괴뢰가 되어서라도 이득을 좇는 것, 경쟁자를 괴뢰로 낙인찍어 무력화시키는 것, 이 모두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실존하는 전략적 행위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16호 | 201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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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2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선에서 1위로 들어온 뒤 러시아 국기를 두르고 있는 빅토르 안(안현수) 선수. 러시아로 귀화한 안 선수의 활약 후 빙상경기연맹은 대표선수 선발과 관련해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국가적 기준에서는 부당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
협력 지나치면 담합 … 내부고발이 확실한 파괴 무기 |
⑪ 협력과 담합 사이
인간은 협력에 목말라한다. 협력하면 서로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 답답해한다. 지구온난화도 세계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면 해결될 문제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5년 2월 16일 지구온난화라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교토의정서가 발효됐다.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지구온난화 방지에 공감하고 합의했다는 점에서 교토의정서는 세상을 바꿨다는 평가도 있다. 과연 지구온난화 문제가 해결됐을까. 교토의정서가 효과 못 본 이유
설명의 편의상 이 세상에 두 나라만 있고 온실가스 배출을 계속할지, 아니면 감축할지를 각자 결정한다고 하자.
두 나라 모두 자국 경제 침체 대신 성장을 원하고 지구환경 또한 훼손되지 않기를 원한다. 두 국가의 선택에 따라 네 가지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에 대해 각국이 좋아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A국: 중간A > 양호 > 훼손 > 중간B B국: 중간B > 양호 > 훼손 > 중간A
B국이 기존 배출량을 유지할 때 A국도 유지하면 지구환경이 훼손되고, 이와 반대로 A국만 감축하면 지구환경은 별로 좋아지지 않으면서 A국 경제는 침체된다. 즉 B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지 않을 때는 A국도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국에 나은 선택이다.
다음 B국이 배출량을 감축할 때를 살펴보자. A국도 감축하면 지구환경이 양호해지지만 A국이 감축하지 않는다면 성장이라는 자국에 최선인 결과를 얻게 된다. 즉 B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더라도 A국은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국에 나은 선택이다.
B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A국은 배출량을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이다. B국도 동일한 전략적 계산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결과는 쌍방이 배출량을 줄이지 않아 지구환경은 훼손된다. 양국 모두 훼손된 지구환경보다 양호한 지구환경을 더 선호함에도 말이다.
이는 각자 자기 이익에 맞게 행동했지만 모두에게 손해인 결과다. 그래서 이를 딜레마로 부른다. 죄수 딜레마 게임이 그런 딜레마의 전형적 스토리다. 노벨 수상자를 포함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수십 년 동안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해왔다.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먼저 협력한 후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 혹은 보상 · 보복을 하는 전략이 상호 협력을 유도한다는 게 밝혀졌다. 예컨대 A국은 일단 먼저 감축하되 그 이후엔 B국의 선택 그대로 따르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B국은 자신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면 A와 B 모두가 감축해 양호한 지구환경이 되고, 자신이 감축하지 않으면 A와 B 모두의 비협력으로 지구환경이 훼손된다는 걸 알게 된다. 쌍방의 비협력에 의한 ‘훼손’보다 상호 협력에 의한 ‘양호’를 더 선호하는 B국이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 사고가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한다.
| | |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3차 당사국총회. 이곳에서 합의된 교토의정서는 2005년 2월 16일 발효됐다. [중앙포토] | | 교토의정서 발효 후 지난 10년을 돌이켜 봤을 때 지구온난화 방지의 실제 성과는 미미하다. 교토의정서는 강제적 의무가 없고 미사여구로 가득한 문서라 많은 국가가 동의한 것뿐이다. 말로는 어느 나라나 지구온난화 방지를 강조한다. 문제는 말뿐이고 실천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교토의정서는 상호 관계가 지속되도록 만들지도 못했고 또 상대방 행동에 따라 보상하거나 보복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에 상호 협력이라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협력을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 미국과 유럽 사회의 오래된 문제의식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거꾸로 왜 특정 집단의 협력(담합)이 지속되고 또 어떻게 담합을 깰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다. 사회에 나쁜 범죄를 저질렀지만 서로 협력(공모)해 처벌받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론 바람직하지 않다. 범죄자가 서로 배반해 적절한 처벌을 받고 그래서 범죄가 덜 발생하도록 만드는 것이 공익이다.
‘의리’ 붙은 최근 유행어 모두 부정적 의미
협력이나 담합은 일회성 접촉에서 잘 이뤄지지 않고 지속적 접촉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의리는 그런 지속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협력이고 말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정의가 이 사람 저 사람 차별하지 않는 탈(脫)공간적 협력 가치라면, 집단 의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차별해 배타적이고 대신에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 탈(脫)시간적 협력 가치다. 지속적인 관계에서는 배반보다 의리가 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의리라는 수식어가 붙은 최근의 복합어는 모두 부정적이다. 의리 축구, 의리 야구, 의리 쇼트트랙, 의리 산악회, 의리 인사…. 모두 부정적 어감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로 한국 사회가 더 투명해졌고, 집단 의리를 사회정의보다 우선시하는 경향도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빅토르 안(안현수)
꼭 1년 전인 2014년 2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선에서 러시아 대표 빅토르 안(안현수)이 금메달을 땄다. 안현수는 500m와 5000m계주에서도 금메달을 러시아에 안겨줬다. 이에 비해 한국 남자대표팀은 노메달이었다. 안현수가 러시아 대표로 한국 선수와 레이스를 펼칠 때 적지 않은 한국인이 안현수를 응원했다. 귀화한 동아시아 선수들을 출신국 사람들이 비난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당시 여론은 안현수가 한국 대표 선발전 시기와 방식을 포함해 불공정한 과정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여론에 정부도 가세해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슬로건하에 스포츠계 개혁을 추진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열린 월드컵 쇼트트랙에서 남자대표팀은 과거 실력을 되찾았다.
안현수는 파벌에 의존한 선수가 아니었다. 안현수는 내부 고발성 글을 사이버공간에 올리기도 했다. 안현수 부친도 내부 고발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소속팀 성남시청 빙상팀이 해체되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한 안현수는 러시아 귀화를 선택했다. 한국에 계속 있더라도 앞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안현수의 선택이었다. 한국 빙상계를 내부 고발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러시아 귀화는 일종의 내부 고발로 작동했다.
내부 고발자 불이익 줄이는 장치 필요
내부 고발이 배반으로 낙인찍히지 않고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받으려면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였고 집단의 내부 절차가 부당함을 증빙해야 한다. 소치 올림픽은 결과적으로 3관왕 선수 대신에 노메달 선수들을 한국 대표로 선발한 절차가 부당했음을 증명했다.
의리 체육계 내에서야 병역 특혜 같은 여러 혜택을 고루 나누기 위해 대표 선수를 선발했다고 스스로 정당화하겠지만 이는 국가적 기준에서는 부당한 행위다. 현행 법령은 체육 병역혜택의 근거로 국위 선양을 들고 있는데, 군필자나 미필자를 구분 하지 않고 최우수 선수들로 국가 대표를 구성한 후 국위 선양의 성적을 내면 미필자에게 그 특기를 활용해 병역 의무를 수행하게 한다는 취지다. 실력 있는 군필자보다 실력 없는 미필자를 우선 선발하는 행위는 군필자를 차별하는 동시에 국위 선양에도 맞지 않다.
군필자에 대한 차별보다 더 추악한 담합도 있다. 실제로 집단의 비윤리적 가치관과 행동에 동참하지 않아 따돌림을 당할 때도 있다. 왕따를 당하면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콤플렉스는 남을 따돌리는 사람들의 것이 더 크다. 혼자서 남을 지배할 수 없으니 나쁜 짓을 해서라도 무리에 기대어 그 콤플렉스를 해결한다.
양심선언과 내부 고발처럼 조직에 대한 배반이 사회적으론 오히려 긍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담합 구도에서 이득을 얻는 자가 이탈할 동기는 크지 않다. 대신 담합으로 피해를 본 자의 고발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고발이 외부에 알려질 때 담합에서 오는 혜택 또한 줄기 때문에 그 담합은 대부분 와해된다.
소집단의 이익 때문에 전체 이익이 훼손되지 않게 하려면 내부 고발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서 내부 고발의 불이익을 줄여야 한다. 담합 사실을 스스로 신고하면 과징금을 면제해 주는 리니언시, 그리고 사건 규명과 범인 체포에 기여한 공범에게 형량을 감면하거나 기소하지 않는 플리바기닝도 그런 제도다.
지구온난화 방지처럼 모두가 참가하는 것이 좋은 협력도 있고, 또 패거리처럼 다수에게 피해를 줘 와해돼야 할 담합도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죄수 딜레마 상황에서의 상호 협력을 유도하는 전략이고, 내부 고발은 담합을 와해시키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14호 | 201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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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모습. 경부고속도로에는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이라는 의미의 AH1 표지판이 현재 설치돼 있다. [중앙포토] |
헝가리와의 수교, 다른 공산국과 이어준 전략적 연결 |
⑩ 연결의 전략
역사 속 2월 1일에 발생했던 사건으로는 1881년 파나마 운하 기공식, 1917년 독일의 외국 선박 공격, 68년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89년 한국·헝가리 수교 등이 있다. 운하, 해상 공격, 도로, 수교 등 이들 이질적 사건이 공통적으로 갖는 전략적 함의는 연결이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고자 했거나 아니면 기존의 길을 지켜 전략적 이해를 고수하려 했다.
다니던 곳에 길이 생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수요에 따라 공급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되는 선후(先後)관계도 있다. 즉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기도 한다. 길이 생기게 되면 그 길을 따라 사람이나 물건이 다니게 되는 현상도 있다. 종종 공공시설의 엄청난 조성비용은 그 시설로 발생할 새로운 수요에 대한 기대로 정당화된다. 물론 현실은 그런 기대와 달리 공급에 의한 실제 수요 창출이 별로 없을 때도 있다. 여하튼 길 만들기 자체가 전략이고, 따라서 전략적 고려가 필수다. 2월 1일의 역사적 사건 가운데 가장 전략적인 연결은 파나마 운하다. 파나마 운하라는 지름길은 출발 및 도착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서양과 태평양 간 연결에 약 1만5000㎞라는 거리를 단축시켰다. 수에즈 운하가 단축시킨 약 1만㎞보다 훨씬 긴 거리다.
파나마 운하는 지금으로부터 134년 전인 1881년 2월 1일 기공됐다. 수에즈 운하 건설에 참여했던 프랑스인이 당시 파나마를 지배하던 콜롬비아 정부와 계약을 하고 운하 공사를 시작했지만 난공사와 재정난으로 1889년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파나마 운하의 완공은 미국이 주도했다. 1898년 쿠바에서 스페인과 일전을 벌인 미국은 미 서부 해안에 정박 중이던 자국 함대들을 쿠바 전투에서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의 필요성을 절실히 체감하고 콜롬비아 정부에 돈을 주고 건설과 운영을 승인 받았다. 하지만 콜롬비아 상원은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파나마 독립을 부추기고 군사적으로도 지원했다. 미국은 독립한 파나마의 양해하에 1903년 운하 굴착권을 프랑스 회사에서 구입했고 공사를 재개했다. 파나마 운하는 1914년 완공됐는데, 운하 개통은 미국 부흥의 시작을 의미한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운영하다 우여곡절 끝에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에 이양됐다.
중국, 루트 확보 위해 니카라과 운하 지원
태평양과 대서양의 연결은 그 자체가 거대 전략이다. 그 루트는 파나마뿐이 아니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 굴착권 구입 이전에 니카라과 운하를 추진했다가 포기한 바 있다. G2 가운데 하나인 중국도 대양 연결이라는 거대 전략을 추진 중이다. 중국이 지원하고 있는 니카라과 운하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2014년 12월 착공됐다. 중국은 태평양-대서양 루트 확보뿐 아니라 태평양-인도양 루트 확보를 위해 인도양 곳곳에 항구를 건설하고 있다. 이에 미국과 인도가 경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수로뿐 아니라 육로, 또 국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전략적 연결이 시도돼 왔다. 47년 전인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있었다.
사실 경부선은 고속도로보다 철로가 먼저였다. 일본 자본이 한 · 일 병합 이전에 일본과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루트로 경부선과 경의선 철로를 건설했다. 당시 러시아와 지역 패권 경쟁을 벌이던 일본은 러시아의 한반도 접근을 차단하면서 일본의 만주 접근을 용이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그런 전략적 의도가 철도 건설 노선 선택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노선뿐 아니라 철길 궤도 너비와 레일 종류도 누구를 견제하고 누구의 진출을 활성화하느냐에 따라 선택됐다.
100년 전 경부선은 부관선(부산~시모노세키), 경의선(서울~신의주), 만주선 등과 연결돼 아시안 하이웨이로 기능했다. 제국주의시대의 연결망과 그 속성을 달리하지만 오늘날에도 유사한 연결망에 대한 갈구가 있다. 경부고속도로에는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이라는 의미의 AH1 표지판이 설치돼 있는데, 일본 · 한국 · 북한 · 중국 · 동남아 · 인도 · 터키를 경유하는 AH1 하이웨이가 터키에서 유럽 하이웨이 E80에 연결된다는 구상이다. AH1은 아직 개통하지 않았지만 그런 전략적 연결에 대해 아시아 국가들은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 분단선과 바다로 둘러싸여 일종의 섬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내에서도 지역 간 연결은 전략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그렇지만 지역 간 연결 루트는 늘 논란거리다. 공항 유치를 둘러싼 지역 갈등이 그런 예다. 47년 전 착공한 경부고속도로 노선도 대표적인 갈등 소재였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루트는 유행가 가사의 “서울 · 대전 · 대구 · 부산 찍고” 를 포함해 매우 다양하다. 설명의 편의상 서울 ·부산 ·대전 ·광주의 네 도시만을 생각해 보자. 이 네 도시 가운데 두 도시만을 뽑아내는 방식이 6가지이고, 그 두 도시 간에 연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으니 네 도시 간 연결시스템 종류는 64(=26) 가지나 된다. 네 도시 간 모두에 직통로 6개가 건설된 연결시스템은 여러 좋은 효과를 낼 것이나 연결로 개설 및 운용에 비용이 들기 때문에 늘 좋은 선택은 아니다. 또 네 도시 간 아무런 연결이 없는 시스템 또한 건설비용은 들지 않으나 효과 또한 없을 테니 좋은 선택이 아니다. 전략적으로 고려되는 네 가지 유형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방사형 연결시스템이다. 대전이나 광주를 중심 도시로 해 나머지 3개 도시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육로가 아닌 항공로는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연결시스템이다.
다음 유형은 일자형 연결시스템이다. 서울-대전-광주-부산 순서로 연결하는 것은 그 예다. 물론 다른 일자형 연결 시스템도 있으나 연결 거리가 더 길다.
순환형 연결시스템도 있다. 서울-대전-부산-광주-서울로 연결하는 루트가 그 예다.
끝으로 교차형 연결시스템이다. 방사형에서 관찰되는 전략적 거점 없이 4개 지역 간 모두 총 6개의 루트를 설치하는 방식이다. 로컬과 로컬 간(L2L) 연결은 전략적 거점이 없기 때문에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 특히 루트 건설비용이 크지 않은 부문에서 효과적이다.
이런 다양한 연결 방식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비용과 효과를 계산해야 한다. 연결 비용은 주로 도로 길이와 지형, 도로 부지의 기회가치에 따라 좌우되는 반면 연결 효과는 주로 운용의 부가가치에 따라 좌우된다. 대체로 동선(動線)이 짧을수록 그 비용이 적게 든다. 가장 짧은 동선은 운영분석(OR) 기법으로 계산될 수 있는데, 그 가장 짧은 동선을 위주로 해 연결하는 것이 기본 접근이다.
물론 동선 길이 외에도 감안해야 할 다른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분배도 그런 조건 가운데 하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고속도로 건설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 루트에 대한 이견이었고 자기 지역이 소외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가장 효율적 루트를 선택하고, 분배의 문제는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옳다. 연결 자체를 효율성 이외의 다른 기준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연결의 전략적 가치는 훼손된다. 활용도가 지극히 낮더라도 공항을 유치하는 것이 유치하지 않은 것보다 지역사회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인식하는 한 핌비(Please In My Backyard) 갈등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적절한 장소에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다른 지역들에도 도움이 되도록 분배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야 한다.
| | | 최호중 외무장관(오른쪽)과 줄러 호른 헝가리 외무차관이 1989년 2월 1일 수교 합의 의정서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 | 하드웨어 연결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연결도 전략이다. 26년 전인 1989년 2월 1일 한국과 헝가리는 대사급 공식 외교를 맺었는데, 헝가리는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최초의 공산권 국가였다. 공식 수교 이전 1988년 양국은 극비리에 접촉해 이미 상주대표부를 설치하던 중이었다. 한국은 헝가리를 전략적 거점으로 해 다른 공산권 국가와 연이어 수교를 맺었다. 이런 맥락에서 헝가리와의 수교는 전략적 연결이었다.
헝가리는 동독과 서독 간의 연결에서도 전략적 연결고리였다. 89년 5월 소련 고르바초프의 지원으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즉 철의 장막을 해체했다. 그해 9월 동독인들은 서독을 바로 가지 않고 헝가리를 통해 우회해 서독으로 갔다.
프랑스 마지노선, 독일군 우회해 무용지물로
독일인의 우회 전략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관찰된 바 있다. 프랑스는 1차 대전 직후 독일과의 국경 지역에 지붕 있는 포대로 구성된 방어선을 구축 했다. 육군 장관 마지노의 건의로 추진됐기 때문에 마지노라인으로 불린다. 2차 대전에서 나치 군대는 프랑스로의 짧은 진격로에 위치한 마지노 요새를 그냥 우회했다. 우회함으로써 난공불락의 요새는 무용지물이 됐다. 즉 전략적 연결이라고 해서 늘 물리적으로 짧은 루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우회가 좋은 전략이다.
| | | 1917년 2월 1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전투 지역(진한 색)을 공표한 지도. | | 끝으로 연결 유지도 중요하다. 연결 단절은 전략적 손실이기 때문이다. 1차 대전 당시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독일도 영국에 대한 해상 봉쇄로 맞섰다. 이는 전쟁물자 수출로 이득을 보던 미국의 이해와 충돌 했다. 미국의 참전을 원치 않았던 독일은 제대로 된 해상 작전을 실시하지 못하다 1917년 2월 1일 적국에 전쟁물자를 수송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선박을 잠수함으로 격침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은 해상 봉쇄로 미국의 참전 이전에 영국이 항복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독일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2개월 후 참전했다. 적국과 제3국 간의 해로를 차단해 자신의 해로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거꾸로 제3국인 미국의 참전을 가져와 자국의 패전을 가져다주었다. 남의 길을 끊는 행위도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전략적 연결은 지름길이어야 하고, 확산 효과가 큰 거점 연결이어야 한다. 가끔은 우회가 더 나을 때도 있다. 봉쇄 역시 연결만큼 그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전략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12호 | 20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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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 김영삼 양김 지원으로 창당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의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 모습. 기존 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이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국정에 반영하지 못하자 이에 만족하지 못한 유권자가 대거 신민당으로 돌아섰고, 신민당은 단숨에 제1야당에 올랐다. [중앙포토] |
YS · DJ 브랜드 파워 … 신한민주당은 창당 성공의 교과서 |
⑨ 창당의 전략
대한민국 정당체제는 늘 가변적이다. 2015년 벽두도 예외가 아니다. 진보진영의 신당 창당, 그리고 제1야당의 당명 변경이 추진되거나 거론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아직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한국 정당체제의 변화는 어느 민주국가보다도 복잡하다. 창당, 분당, 합당이 매우 잦다. 현재 가장 오래된 정당이라고 해봤자 그 나이는 2~3세에 불과하다. 원내의석을 가진 정당 가운데 당명 기준으로 가장 오래된 정당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통합진보당이었다. 2011년 12월에 창당한 통합진보당은 3년을 넘기자마자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됐다. 통합진보당이 사라진 현재에는 2012년 2월 출범한 새누리당이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한국 정당사에서 가장 성공적 창당
정당의 등장과 소멸이 빈발한 한국 정당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창당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이다. 신민당의 주 구성원은 84년 12월 정치활동 금지에서 해제된 정치인들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 이 양김씨가 신민당 창당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제1야당 민주한국당(민한당)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국정에 반영하지 못했다. 이런 요구를 배경으로 해서 신민당은 창당됐다. 신민당은 정강정책으로 반민주적 요소 제거, 대통령직선제, 군의 정치적 중립, 언론 자유 등을 채택했다.
창당 후 20여 일 만에 치른 85년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 등극했다. 한 지역구에서 두 후보를 선출한 중선거구제하에서 신민당은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보다 당선자가 적었지만 서울과 부산에서는 민정당보다 당선자가 많았으며, 대구와 인천에서는 민정당과 당선자 수가 같았다. 선거 이후 민한당 소속 당선자 대다수는 신민당에 입당해 민정-신민의 양당구도가 형성됐다.
[그림]은 세 정당과 아홉(A~I) 유권자의 입장을 하나의 스펙트럼상에 표시한 것이다. 유권자 G, H, I는 자신들과 유사한 입장의 민정당에 투표했고, 유권자 D와 E는 민한당에 투표했다. 민정당과 민한당 사이에 있는 유권자 F는 두 정당에 대해 차별성을 느끼지 못해 기권했을 수도 있다. 유권자 A, B, C는 민정당보다 민한당에 더 가까운 입장이지만 민한당과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신민당이 없었던 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했거나 기권했을 수 있다. 신민당은 민주화를 갈망하던 유권자 A, B, C의 지지로 제도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실제 민정당의 85년 득표율 35.2%는 81년에서 불과 0.4%포인트 감소한 수준이었다. 민한당은 81년 22%, 85년 20%를 득표했고 한국국민당(국민당)은 81년 13%, 85년 9%를 얻었다. 85년 선거의 신민당 득표율 29%는 여러 야권 지지층에서 온 것인데, 특히 85년 무소속 득표율 3%가 81년의 11%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사실에서 신민당의 지지자 상당수가 무소속 지지층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유권자들에게 지지하는 정당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보기가 가장 많이 선택된다. 이는 무소속연대와 같은 당명이 사용되기도 하는 이유다.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유권자를 다 끌어모을 수만 있다면 제1당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구나 기존 정당의 지지자 가운데 신당으로 이탈할 유권자까지 감안하면 창당에 대해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낙관이 늘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는 자신의 입장과 가장 유사한 정당이라고 해서 그 정당에 무조건 투표하지는 않는다. 파급력과 흡입력이 있는 정당에 투표하려 한다. 신민당의 경우 양김씨가 표를 끌어모으는 일종의 브랜드였다. 창당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정당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창당 바람이 선거 때까지 지속됐고, 이에 신민당 공약에 공감한 유권자들은 지지를 주저하지 않았다.
신당 출현 가능성은 기존 정당의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 미국처럼 양당제가 정착된 곳에서는 좌파 정당의 우클릭과 우파 정당의 좌클릭으로 양당이 중도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신당 출현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존 정당은 만일 신당이 자신의 지지기반을 잠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면 중도로 옮겨가는 것을 자제한다. 새로운 정당의 진입 가능성은 비슷한 정책이념을 표방해 온 기존 정당이 중도로 변화하는 것을 억제시킨다.
기존 정당들은 신당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먼저 신당과 유사한 기존 정당은 자신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다. 민한당은 신민당의 창당 가능성에 대해 미리 대처하지 못했다. 신민당의 선거 참여는 제1야당 민한당 의석을 81석에서 35석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마저도 민한당 당선자 대다수가 신민당으로 이적함으로써 민한당을 다시 3석의 군소정당으로 추락시켰다. 이는 신당(신민당)이 기존 정당(민한당)을 대체한 대체재라는 의미다.
신당은 대체재뿐 아니라 보완재 속성도 지닌다. 최근 허니버터칩이라는 과자가 출현해 인기를 얻자 경쟁 제과업체들의 첫 반응은 자사 제품 매출액 감소 우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경쟁업체들은 유사 제품을 내놓아 매출액 증가라는 혜택을 공유했다. 이는 낙수 효과로도 불린다.
| | | 민한당을 탈당한 당선자 16명이 1985년 4월 3일 신민당에 입당했다. [중앙포토] | | 30년 전 당시, 여당 민정당은 신민당 창당이 야권 분열로 연결돼 자신의 국정 운영에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고 전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신민당 창당은 결과적으로 민한당 세력까지 통합한 강한 야당을 출범시켰다. 신민당의 돌풍을 예측하지 못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 책임자는 선거 직후 경질됐다. 민한당 입장에서 신민당은 민한당을 대체한 정당이겠지만, 민한당 소속 국회의원 당선자 입장에서는 신민당이 낙수효과로 자신의 입지를 결국 보완해 준 정당이었을 것이다. 실제 한 지역구에서 두 의원을 선출하는 85년 선거에서 민한당 후보와 신민당 후보는 민주화를 위해 동반 당선돼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정치문화에 따라 진화된 창당 행태
창당 효과는 신당만 누리는 것이 아니다. 기존 정당도 당명 변경으로 창당 효과를 볼 수 있다. 심지어 해산된 정당도 헤쳐모여식의 창당을 모색한다. 정당을 음식점에 비유하면, 유권자는 손님에게 비유된다. 각 음식점(정당)은 더 많은 손님(유권자)을 유치하려 한다.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던 음식점에 갑자기 손님이 줄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근처에 새로운 음식점이 개업했다면 인테리어를 바꿔보기도 하고, 더러운 주방이 노출되지 않게 또는 반대로 깨끗한 주방이 노출되게 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엔 풍수지리를 활용해 보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기도 한다. 또 종업원, 더 나아가 주방장을 교체하기도 한다. 정당도 당사 건물이나 후보 자택을 풍수지리가 좋다는 곳으로 이전하기도 하고 정책, 당직자, 후보 등을 교체하기도 한다.
이런 정도의 노력으로 매출(지지)이 늘지 않을 때에는 다른 음식점(정당)과 연대해 체인점으로 운영하기도 하고 기존 음식점(정당)을 완전 폐업시킨 후 같은 위치에 새로운 이름의 음식점(정당)을 개업하기도 한다. 이름이 바뀌면 과거와의 단절은 좀 더 쉬워진다. 새로운 당명의 사용 여부는 과거 당명의 브랜드 가치, 즉 기존 당명에 투표할 지지자 수 그리고 새로운 당명에 투표할 지지자 수를 비교해 결정해야 한다. 단순 지지자 수보다 경쟁 정당 지지자 수와의 차이가 더 중요함은 물론이다.
음식점의 기존 위치가 소비자들이 더 이상 몰리지 않는 동네라면 다른 동네로 이전할 수도 있다. 소비자(유권자)들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문화에서는 매출(지지)을 극대화하기 위해 떴다방 식으로 여러 곳을 돌면서 개점(창당)과 폐업(소멸)을 반복하기도 한다. 물론 너무 멀리 옮기면 정치인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렇지만 같은 장소, 같은 간판을 고집한다고 해서 다수의 소비자(유권자)가 선호하지는 않는다. 한국정치사에서 10년 이상 존속한 정당이 네 개에 불과한 이유도 바로 유권자의 정치문화 때문이고 동시에 정당의 미미한 브랜드 가치 때문이다.
창당의 성공 여부는 기존 정당들을 지지하지 않던 유권자들이 다수이고 이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정당 지지자를 뺏어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기존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하고 또 그 잠재적 지지자를 투표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신당은 기존 정당이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곳을 공략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 대표되지 못한 시장이 작으면 틈새시장이고, 크면 블루오션이다. 정권 쟁취를 목표로 하는 기성 정치인은 블루오션에서만 창당할 것이고, 더 작은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에게는 틈새시장도 창당의 동기가 된다. 틈새시장인지 블루오션인지는 민심의 분포를 정확히 헤아려야 알 수 있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10호 | 201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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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5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서울 점령을 기뻐하는 중국 인민지원군과 북한 인민군. [중앙포토] |
천도는 권력의 이동 의미, 정변·전쟁 아니면 험난한 길 |
⑧ 수도에 담긴 정치학
2012년에 시작된 중앙행정기관 이전이 지난 세밑에 완료됨에 따라 새해 을미년은 행정 중심복합도시의 원년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서울 한 곳에서 효율적으로 수행되던 행정이 여러 곳으로 분산됐다고 비효율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고, 지방분권을 위해 수도가 통째로 이전됐어야 했다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상태로의 합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최근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 원장 임명을 두고 빚어지고 있는 당내 갈등도 10년 전 세종시특별법 통과를 둘러싼 갈등에서 연유하고 있다. 그만큼 수도나 그 일부 기능의 이전은 여러 사람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문제다. 수도 이전은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표준 변경에 해당한다. 표준은 일종의 권력이기 때문에 표준 변경은 곧 권력 교체이며, 따라서 수도 이전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이루어진 예는 별로 없다. 주로 정변이나 전쟁에 의해서였다.
수도 이전은 일종의 표준 변경
| | | 1135년 1월 4일(음력) 묘청이 천도를 시도했던 서경 대화궁의 터 | | 먼저 정변에 의한 수도 이전이다. 지금으로부터 880년 전인 1135년 1월 4일(음력) 고려의 수도 이전이 발표됐다. 묘청은 개경(개성) 대신에 서경(평양)을 수도로 하여 ‘대위국’이라는 국호와 또 ‘천개’라는 독자적 연호로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실시했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서경 천도론은 묘청뿐 아니라 태조 왕건을 위시한 고려의 여러 국왕들도 검토했었다. 대표적으로 제3대 국왕 정종은 지지 기반인 서경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5년도 채우지 못한 짧은 재위기간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천도론은 새 수도의 풍수적 입지를 기존 수도와 비교하기도 하고, 지역 간의 대립 구도로 설명되기도 한다. 서경 천도론에서도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 그리고 두 도시의 풍수지리 비교가 늘 등장했다. 국제 정세의 이용은 천도 추진과 천도 저지 모두에 필요하다. 대외 위상을 높이는 칭제건원에는 다수가 공감하더라도, 막상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주변국을 정벌하자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묘청의 금나라 정벌론은 천도반대론자들을 결집시키게 만들어 결국 서경 천도는 실패했다. 이에 비해 이성계의 한양 천도는 명이라는 새로운 패권국 등장과 함께 성공했다. 물론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해서 천도나 정권의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조선 광해군과 소현세자가 그런 예다.
다음은 전쟁에 의한 수도 이전인데, 모두 수도가 경쟁국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에서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먼저 점령됐다. 소련이 점령한 동독 지역 한가운데에 위치한 베를린은 수도라는 이유로 전승 연합국인 미국 · 영국 · 프랑스 · 소련에 의해 다시 분할 점령됐다. 1949년 서독 정부(FRG)와 동독 정부(GDR)가 출범한 이후에도 베를린은 동 · 서독 정부의 주권 관할에 있지 않고 법적으론 전승 연합 4개국의 관할하에 있었다. 90년 통일이 되어서야 동 · 서 베를린은 하나로 합쳐졌고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됐다. 서독의 옛 수도 본에도 일부 수도 기능을 남겼거나 새로 추가시켰다.
패전국 독일 관리를 위한 분할 점령이 시작된 45년, 한반도에도 패전국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분할 점령선이 공포됐다. 그 분할선 위치는 수도의 위치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소련에 비해 병력이 한반도로부터 멀리 있었던 미국은 서울이 북위 38도선 이남 에 있고, 또 38선이 대략 한반도를 절반씩 나누기 때문에 38선을 분할 점령선으로 소련에 제의했고 이에 소련은 동의했다. 만일 대한제국 수도나 조선총독부가 평양에 있었더라면 평양 바로 남쪽에 위치한 39도선을 미 · 소 간 분할선으로 하고 평양을 다시 남북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미국은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수도가 세종 · 공주 · 부여 등지에 위치했더라면 37도선으로 제안했을 수도 있다.
철저한 준비로 적에게 타격 준 1·4 후퇴
전략적 수도 이전은 전쟁 직후보다 전쟁 직전이나 전쟁 중에 실시된다. 고려 무신 정권의 강화도 천도가 그런 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임시 수도가 설치됐듯이 6·25전쟁 중에도 여러 차례 수도 이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전략적 수도 이전은 1·4 후퇴다. 지금으로부터 꼭 64년 전인 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비우고 부산으로 임시 수도를 옮겼다. 이미 50년 12월 24일에 서울시민 피란령을 공표해 차근차근 철수를 진행했다. 1월 5일 서울에 입성한 중국인민지원군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전선의 북진보다 적군 전투력 박멸에 주력한 유엔군의 반격으로 중국군은 1~2월에만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군사 거점으로 활용되는 고지와 달리 낮은 지대의 도시는 공격에 취약하여 군사전략적 가치는 작다. 물론 적군에게 수도를 뺏겼다는 사실은 군대 사기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완전히 비운 서울은 먼 중국 지역에서 보급을 받고 있던 중국군과 북한군의 자원 소모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 흥남, 서울 등지에서 철수할 때 사람뿐 아니라 물자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하면서 철수했다.
이런 1·4 후퇴에 비해 6·25전쟁 초기의 서울 철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이루어졌다. 특히 철수 과정에서 6월 28일 발생한 한강 인도교 폭파가 그런 예다. 많은 시민을 서울에 남겨둔 채 너무 일찍 폭파되었고, 또 폭파 작전이 인근 국군 부대들과 소통되지 않아 병력 손실이 많았다. 또 폭파 작전을 수행한 공병감을 이적행위의 죄목으로 8월에 체포한 뒤 바로 9월에 총살시켜 의혹을 키웠는데(1962년 무죄로 판결되어 사후 복권되었음), 이 철수과정은 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이승만 정부의 지도력에 큰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철수도 내용에 따라 그 결과가 바뀌기 때문에 작전으로 불린다. 1·4 철수가 성공한 작전이었다면, 6·28 철수는 실패한 것이었다.
승리한 적에게 혼란주는 공성계 전략
지킬 수 있는 성은 지키고, 지킬 수 없는 성은 비우는 것이 전략이다. 이른바 공성계(空城計)다. 삼국지연의에서 공성계는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방어를 더욱 허술하게 해 상대에게 혼란을 줘 아예 공격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런 심리전은 소설에나 나올 이야기고 실전에서는 통할 가능성이 희박한 무모한 행위다. 상대가 정찰을 수행할 수 없고 불확실성을 무조건 피하는 경우에만 성공 가능한 전략이다.
실존의 공성계 사례로는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공격을 격퇴한 러시아(소련)를 들 수 있다. 181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텅 빈 모스크바는 보급에 어려움을 겪던 프랑스군이 오래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모스크바 점령은 2~3년 후 완료된 나폴레옹 패망의 시작이었다. 42년 1월에는 나치 독일군이 모스크바 근방에서 소련군의 반격을 받고 퇴각했는데, 모스크바 진격 실패는 히틀러의 전투 일정에 큰 차질을 줘서 나치 패망의 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스크바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사례는 13세기 몽골이 유일한데, 보급에 문제가 없던 몽골군이 오히려 도시를 불태워버렸다. 공성계는 최종적인 패배를 피하기 위해 일시적인 점령을 받아들이는 전략이다. 단기적으론 손해를 최소화하면서 지는 전략이고, 장기적으론 결국 이기기 위한 전략이다.
수도와 같은 표준을 두고 각축하는 시장은 독점을 전제한 경쟁이다. 새로운 표준을 도입하려는 측은 단기적으론 출혈을 감수하면서 대내외 다수의 호응을 유도하려 한다. 기존의 표준을 보유한 측 역시 도전자가 제공할 수 없을 정도의 혜택을 대내외 다수에게 제공하고 또 규제를 만들어 표준 시장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만일 도저히 표준을 고수할 수 없다면, 자신의 표준뿐 아니라 경쟁자의 표준까지 무용하게 만들어 아무도 독점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독점적 표준의 일시적 부재는 공성계에 해당한다.
표준의 다양화분점 역시 공성계에 해당한다. 수도 이전도 아니고 수도 고수도 아닌, 수도 분할은 그런 예다. 실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특별자치시는 행정수도로 불리지 않는다. 수도 이전이 아니고 행정기관 분산이기 때문이다. 무릇 정치적 타협 대부분은 비효율적이다. 민주주의에서는 효율성보다 교착되더라도 타협을 더 중시한다. 만일 타협을 중시한다면 비효율적인 표준 분할을 감수해야 하고, 만일 효율을 중시한다면 표준 독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타협과 효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높은 신뢰수준의 민주주의에서나 가능하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08호 | 20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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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7. 120년 전 마녀사냥의 교훈 |
| 1894년 12월 20일 재판 피고인석에서 드레퓌스가 자신을 반역자로 지목한 증인을 내려다보고 있다. 1894년 12월 23일자 ‘르 프티 주르날’ 지면. 이 신문은 반(反)드레퓌스파 언론 가운데 하나였다 |
드레퓌스 누명 벗긴 도화선은 졸라의 ‘양심 편지’ 한 통 |
⑦ 120년 전 마녀사냥의 교훈
목하 한국 사회는 늘 그랬듯이 진실 공방이 진행 중이다. 당사자들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또 자신이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딱 120년 전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오늘날 진실 공방이나 마녀사냥의 전략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12월 22일 프랑스 군사법정은 만장일치로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에게 종신유배형과 공개 군적 박탈을 선고했다. 유대계 프랑스 장교인 그가 적대국 독일에 군사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였다. 당시 헌법이 정치범 사형을 금지했기 때문에 종신형은 최고형이었다. 군적 박탈식은 선고 2주 후 집행됐다. 육군사관학교 광장에서 드레퓌스의 계급장, 단추, 바지 옆줄은 모조리 뜯겨졌고 군검도 조각났다. 군중의 야유도 있었다. 태워 죽이지 않았다는 점 말고는 마녀 화형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시 2주 후 드레퓌스는 유배지를 가던 도중에도 군중에 둘러싸여 폭행당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끝난 것 같았던 드레퓌스 사건은 어떤 인물 때문에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거짓을 보고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 마리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었다. 피카르는 본래 드레퓌스 유죄를 의심치 않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참모본부 정보부장 자격으로 첩보자료를 보고 관련 혐의자를 조사하면서 드레퓌스 유죄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냥 덮으라는 상관의 요구에 불응하고 조사를 계속했으며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 받았고 뒤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피카르보다 더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온 인물은 에밀 졸라다. 반(反)유대주의를 비난해온 졸라는 1898년 1월 ‘나는 고발한다’ 를 ‘로로르’에 게재했다. 본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였는데 발행인이자 편집인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제목을 바꿨다.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된 군인과 필적감정가 그리고 군사기관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고발하고 명예훼손죄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졸라는 많은 성원을 얻었지만 동시에 각종 위협에 시달렸고 실제 징역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다수결로 정하는 게 아닌 진실
| | | 르 프티 주르날’ 1895년 1월 13일자에 실린 앙리 메예의 드레퓌스 군적 박탈식(1월 5일) | |
| | | | 군중에게 둘러싸여 위협당하는 에밀 졸라를 묘사한 앙리 드 그루의 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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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파와 반(反)드레퓌스 간의 진실 공방은 정권 획득 경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1898년 5월 의회선거에서 반유대, 반드레퓌스파가 승리했다. 졸라와 피카르가 곤욕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1902년 의회선거에서는 드레퓌스 지지를 매개로 한 사회당, 급진당, 공화 좌파 등 좌파연합이 승리했다. 선거 승리는 드레퓌스파에게 정치적 보상을 제공했고 동시에 드레퓌스 사건의 종결을 가져다 주었다.
1903년 드레퓌스는 자신에 대한 판결의 재심을 요청했다. 1906년 통합법정은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를 복권시켰다. 드레퓌스는 기병대 소령으로 복귀했고 군적 박탈식을 당했던 육군사관학교 광장에서 훈장 수여 열병식을 받았다. 이때 내무장관은 클레망소였고 그는 몇 달 후 총리가 됐다. 피카르도 군에 복귀하면서 중령에서 바로 준장으로 승진했고 10월에는 클레망소에 의해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졸라의 유해는 프랑스 위인들의 안식처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전략적 키워드는 마녀사냥, 사실왜곡, 폭로, 결집, 양극화 등이다. 먼저,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했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 유럽 곳곳에는 실업자 수와 유대인 수를 동일한 숫자로 표시한 선전 구호가 유행했다. 유대인 때문에 직장을 얻지 못한다고 선동하는 문구였다. 남들이 싫어하는 존재(마녀)가 있으면 이를 악용하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드레퓌스를 희생양으로 하는 마녀사냥이 성공하려면 잘못된 정보가 일단 사실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사실왜곡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수가 거짓을 강경하게 주장하면 진실을 말하던 소수도 다수의 거짓 의견을 따르게 됨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는 많다.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지어낼 수 있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은 다수결로 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대중은 간혹 다수결로 진위를 판단한다. 그래서 드레퓌스 사건 초기에는 프랑스 사람 대부분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의심치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애초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신했던 사람들은 다수가 아니었다. 비공개 군사재판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모르거나 말없는 다수가 아니라, 목소리 큰 소수가 전체 의사를 대변했을 뿐이다. 따라서 드레퓌스 사건 초기의 여론은 목소리 큰 소수의 의견대로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믿었다.
외국과의 승부보다 국내 정치가 우선
드레퓌스 사건은 독일에 대한 당시 프랑스의 콤플렉스에서도 연유했다. 1870년 프로이센에 먼저 선전포고했지만 전쟁에서 지고 또 자신의 안방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 선포식을 바라만볼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로서는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프랑스는 독일의 첩보활동을 완전하게 처단하기 위해 독일과 전쟁까지 불사하려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프랑스 군사력이 독일에 대항할 정도로 강하지 않았으며 독일과의 정면 승부 대신에 국내 마녀사냥을 선택했다. 15세기 잉글랜드의 지배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잔 다르크가 화형되는 것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방치했듯이 국내 정치가 우선이었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밝히려는 행동 역시 집단적으로 방해받았다.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공개하는 것 자체가 프랑스 안보에 위협된다고 반드레퓌스파는 주장했다. 마녀사냥에 박수 치지 않으면 마녀 편에 선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압력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군부를 개혁하자고 하면 적대국을 돕는 이적행위라는 반발이 나오게 마련이다. 정상적인 과정을 통한 진실 규명이 어렵다 보니 취한 선택은 ‘폭로’ 였다.
폭로가 폭로에만 그치지 않고 세의 규합으로 연결되면 그 파급효과는 크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를 계기로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즉,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세력의 결집이 시작된 것이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에 수천 명의 지지 서명이 뒤따랐고 1898년 11월 ‘로로르’ 에 실린 피카르 옹호 탄원서에도 1만 명 넘는 지지 서명이 있었다. 반드레퓌스파도 각종 서명과 글들로 결집했음은 물론이다.
계층 간 소통 활발해야 양극화 막아
조직화나 결집은 영향력을 극대화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한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마녀사냥도 쉽고 이에 대항하는 측의 동원도 쉽다. 쿠데타 자체가 조직적인 특정인들에 의해 추진되듯이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도 조직화될 수밖에 없다. 진실을 밝히려는 측뿐 아니라 은폐하려는 측 또한 선악의 대결에서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결집했다. 결집이 지속되면 진영이나 패거리로 불린다.
진영에 집착하다 보면 양극화가 심화된다. 극단적 대립은 집단화될 때 심화되고 집단화되지 않을 때 완화된다. 어떤 실험 연구에서 누가 찬반인지 알려주지 않고 좌석도 무작위로 했을 때 타협의 빈도가 높았고, 반면에 찬반으로 나누어 좌석을 배치하고 이를 미리 알려주었을 때 타협의 빈도는 현격히 떨어졌다. 계층 간 소통은 없고 대신에 계층 내 소통만 활성화돼 있을 때는 양극화되기가 쉽다. 양극화된 진영 간 소통은 논리보다 기 싸움이다. SNS에서의 다른 의견에 대해 “너 알바지”라는 대응이 그런 예다. 이런 인신공격이 합리적인 인식 공유를 가져올 리 만무하다. 결집에 결집으로 대응하는 것은 진화된 모습이지만 그런 양극화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냉전의 역사에서 보듯이 다극화되기도 하고 또 내부적 양극화로 대체되기도 한다.
결집한다고 해서 승리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성공적인 결집이 되려면 공동이익뿐 아니라 진실이 담보돼야 한다. 다수 혹은 목소리 큰 소수를 통해 진실을 호도할 수 있더라도 영원히 그렇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마녀 편이라고 규정되더라도 진실 쪽이면 결집도 용이하고 또 정치적 이익도 얻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주 전개되는 진실 공방 게임과 마녀사냥의 당사자들이 숙지해야 할 전략적 측면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06호 | 201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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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2월 7일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과거를 사과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 |
브란트, 피해자 앞에 무릎 꿇어 ‘통독의 씨앗’ 뿌리다 |
⑥ 마음 얻는 첫걸음
44 년 전의 오늘,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격리지역)의 희생자 추모비 앞. 마침 내리던 비가 그치고 추모비를 숙연하게 응시하던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가 추모비 앞에서 억울한 죽음들을 애도할 거라고는 예상됐었지만 축축한 바닥에 무릎까지 꿇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이런 브란트의 행동은 서독 내에서 거센 반발을 가져왔다. 브란트의 지지자들조차 무릎 꿇은 행동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이는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주변국에선 젊은 시절 나치에 저항하다 박해받은 브란트가 나치와 독일 국민을 대신해서 사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진정성 있는 사죄가 있었기에 훗날 주변국들은 독일의 재통일을 허용했다. 사실 독일의 입장에선 오늘날 폴란드 서부 접경지역이 역사적으로, 또 국제법적으로 자국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은 이런 정치적 영유권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독일은 다시 통일할 수 있었고, 유럽 연합이 확대됨에 따라 과거 독일이 한때 점유했던 지역들은 자연스럽게 독일 경제권역에 포함되었다. 주변국 방문 때 무릎 꿇은 독일 총리는 빌리 브란트뿐이 아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폴란드 방문, 그리고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프랑스 방문 때도 그런 행위는 있었다. 모두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44년 전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다른 독일 지도자의 무릎 꿇기도 있었다. 2년 전인 2012년 12월 초, 아돌프 히틀러다. 실제 살아 있는 히틀러가 아니고 이탈리아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히틀러 얼굴을 재현해 만든 조각상(아래 사진)이었다. 이에 유대인 유족들이 반발했다. 희생자를 모독하는, 상업적 행위에 불과하다면서 작품 철거를 주장했다. 결국 다음 해에 철거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릎 꿇기가 아니라 진정성이다.
‘주는 것이 얻는 것’ 깨닫는 게 정치
사마천은 상대 마음 얻기를 신의로 이해한 듯하다. 『사기』 ‘관안열전’에서 노나라 장수 조말은 제나라 왕 환공을 칼로 위협해 노나라 땅을 돌려주겠다는 환공의 약속을 받았다. 뒤에 환공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으나 관중이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조말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고, 이에 환공은 노나라 땅을 돌려주었다. 이후 다른 제후국들은 관중의 예상대로 제나라에 귀의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는 것이 얻는 것임을 아는 게 정치(知與之爲取 政之寶也)” 라는 말이 등장한다. 제나라가 노나라에 보여준 신의는 다른 제후국들에 그대로 전파되었고, 제나라는 노나라에 양보한 것 이상으로 훗날 더 큰 보상을 받았다. 사실 제나라뿐 아니라 노나라의 전략도 통했다. 환공을 인질로 땅을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인질 전략이 늘 효과적이지는 않다. 만일 테러범이나 납치범과는 협상이나 대화 자체를 절대로 하지 않는 상대라면 그 상대에게 어떤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테러나 납치는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부 나라에서는 테러나 납치를 예방하기 위해 그들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고수한다.
조말의 행위는 엄밀한 의미의 인질 전략이 아니다. 약속에 대한 아무런 보장 없이 환공의 말만 믿고 환공을 풀어주었다. 조말은 환공을 위협해서 얻은 약조를 환공이 지킬 것이라고 과연 믿었을까. 노나라는 힘으로 땅을 되찾을 수 없고, 남은 방법은 제나라에 읍소해 애원하는 것, 그리고 인질을 잡아 요구하는 것 두 가지뿐이다. 읍소의 방법만으로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나라가 모든 나라의 읍소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질로 요구하는 내용도 어느 정도 타당해야 한다. 타당하지 않은 요구는 제나라에 약속 번복의 구실을 제공했을 것이다.
칼로 위협해 받은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고 인질을 풀어주는 것은 대의명분과 큰 목표를 가진 상대에게나 통할 전략이다. 말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하는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협상 시 백지수표를 제시하는 전략도 상대를 봐가면서 구사해야 한다.
싸움 없이 이기려면 상대를 존중해야
여러 설문조사에 따르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대체로 신뢰를 받는 특정 국가들이 있고, 반대로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대체로 불신을 받는 특정 국가들도 있다. 신뢰와 매력은 국가 간에도 존재한다. 신용이 개인적 자본이라면, 사회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고, 대외 신뢰는 외교적 자본이다. 독일이 폴란드와 유대인에게 보여준 양보 · 화해 · 사죄는 다른 주변국의 마음을 샀고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동의로 연결되었다.
싸워서 뭐를 얻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얻는 것이 더 나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손자병법에서도 백전백승(百戰百勝)보다 싸우지 않고 양보 받는 게(不戰而屈人之兵)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질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싸우지 않고 얻는 전략 가운데 하나는 상대를 존중하기다. 사실 존중은 도덕이나 윤리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전략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자신도 더 나아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남을 도우면 자신의 면역 기능이 향상된다는, 이른바 ‘테레사 수녀 효과’ 혹은 ‘슈바이처 효과’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이타적 행동은 남을 도와주는 데서 오는 행복감뿐 아니라 물질적 보상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2011년 미국 프로야구 경기에서 관중석으로 날아온 공을 받은 소년이 그렇지 못해 울고 있는 아이에게 공을 양보했는데, 이 선행 장면이 TV로 생중계되어 그 소년은 더 큰 선물을 받기도 했다.
상대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뭔가를 주어야 한다. 그 뭔가는 실리적 물건일 수도 있고, 또 아무런 혜택 제공 없이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말일 수도 있다. 일방적으로 물질적 혜택을 제공받는 자는 자신이 상대에게 정서적 혜택을 제공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정서적 혜택은 대체로 말로만 하는 립 서비스다.
진정성 없이 상대를 존중하는 체할 수도 있다. 생색낼 수 있는 일은 본인이 직접 하고, 남을 아프게 할 일은 다른 남에게 시키기도 한다.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닌, 단체 소유의 것으로 생색내기인 계주생면(契酒生面), 그리고 남의 칼로 다른 남을 죽이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은 남의 기분을 의식한 행위다. 이간질이나 이이제이(以夷制夷) 모두 차도살인의 범주에 속한다.
이와 달리 자기를 희생해서 남에게 혜택을 줘도 말로 모욕감을 주면 악의가 없었다손 치더라도 미움을 받아 손해 보기 십상이다. 특히 진실이 다수에게 아픈 상처를 줄 때 그 다수는 불편한 진실보다 편한 거짓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세련된 거짓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한다. 지동설처럼 진실을 믿거나 주장한 소수가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 사례는 무수히 많다.
실제 존중과 아부는 구분하기 어렵다. 대체적으로 존중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일수록 아부에 약하다. 아부가 문제될 때에는 아부 받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아부 행위를 아부 행위자들만의 탓으로 나무랄 수는 없다.
마음 비워야 마음대로 얻는 게 세상 이치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자에 대한 아부만큼이나 유권자에 대한 아부도 심각하다. 정치인의 선심 대부분은 계주생면(契酒生面)에 불과하다.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는 것 대신에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줌으로써 인기를 얻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조삼모사는 큰 문제가 아니다. ‘아침 3개, 저녁 4개’와 ‘아침 4개, 저녁 3개’는 실제 원숭이들에게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유권자가 ‘아침 3개, 저녁 4개’보다 ‘아침 4개, 저녁 1개’에 더 끌리는 수준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유권자가 긴 안목을 가지면 조삼모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유권자를 의식해 가급적 많은 혜택을 주려고 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고, 실제 혜택은 적게 주면서 눈속임 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는 복잡한 전략적 계산 없이 “그냥 좋아서” 혹은 “그냥 싫어서”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현행 단임제 대통령 임기 말에는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추락 하고, 따라서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은 반대에 직면하며, 나쁜 모든 게 대통령 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 많은 정치적 반대 행위가 “노무현이 싫어서”라는 이유로,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말의 정치적 반대 행위 다수는 “이명박이 싫어서”라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 마음을 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상대 마음을 사려면 자신의 마음부터 바꾸어야 할 때가 많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면 그 바뀐 마음대로 무엇이든 얻게 된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곧 마음대로 얻게 되는 지름길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04호 | 201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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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1월 23일 오후 북한의 포탄이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남측 영토인 연평도에 떨어진 직후 모습. |
민주국가를 독재국가보다 강하게 하는 건 ‘청중비용’ |
⑤ 위기를 넘는 힘
독재국가와 민주국가가 전쟁을 하면 누가 이길까. 또 독재자와 민주국가 지도자 가운데 누구의 위협이 더 통할까. 사람들은 독재자의 호전적 위협이 더 통하고 독재국가가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정반대다. 역사 통계에 따르면 민주국가의 승률이 독재국가보다 훨씬 높았다. 또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상황에서도 민주국가보다 독재국가가 더 자주 굴복했다.
꼭 31년 전인 1983년 11월 23일 소련을 겨냥한 미국의 미사일이 서독에 배치됐다. 물론 소련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를 철회시키지 못했다. 62년에는 소련이 미국 바로 앞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 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냉전시대 미 · 소 간 대치상황에서 미국의 승리는 종종 국가 지도자가 대외 경고를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을 때 국내 정치에서 부담해야 할, 이른바 ‘청중비용(audience cost)’ 으로 설명된다. 청중비용을 피하려는 민주국가 지도자는 다음 선거를 위해서라도 공개적인 경고를 실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국이 그 경고를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독재자에게는 청중비용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매뉴얼대로’ 작동하면 북도 달라질 것
| | |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11월 23일 저녁에 비상 소집된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 벙커에서 현황 보고를 받고 있다. | | 4년 전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도 쿠바 미사일 사건과 종종 비교된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0분쯤, 연평도 주민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의 포탄 세례를 받았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래 처음으로 북한이 남측 영토, 그것도 민간인을 향해 포탄을 퍼부은 사건이다. 연평도 포격 8개월 전에는 인근 해상 에서 천안함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 했다. 이후 이른바 5·24조치 담화문을 통해 이명박(MB) 대통령은 북한이 “우리의 영해 · 영공 · 영토를 무력 침범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 이라고 밝혔다. MB는 천안함 사건 직후 백령도를 방문한 데 이어 10월엔 연평도를 방문해 서해 영토 · 영해의 수호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11월 남측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해상에서 사격훈련을 실시한다고 북측에 통보했다. 22일과 23일 아침, NLL을 인정치 않는 북측은 자국 영해에 남측 사격이 이뤄질 경우 즉각적인 물리적 조치를 가하겠다는 통지문을 남측에 발송했다. 남측으로서는 연례적인 호국훈련이라 예정대로 오전 10시 조금 넘어서부터 약 4시간에 걸쳐 사격훈련을 실시했다. 남측 사격훈련이 끝난 직후인 오후 2시30분쯤부터 약 1시간에 걸쳐 북측은 연평도 군부대와 민가에 무차별 포격을 실시했다. 북측의 포격이 시작된 10~20분 후 남측의 대응 포격이 있었다.
<그림>은 A국과 B국 간의 간단한 위기대응 게임이다. 제1단계에서 A가 상대국 도발 시 강하게 응징 하겠다고 천명할지 말지를 선택한다. 그런 경고가 없다면 상황은 A와 B 간의 대세에 따라 흘러간다고 볼 수 있다.
만일 A가 B에게 경고했고 제2단계에서 B가 이를 수용해 도발하지 않는다면 A의 승리다. 만일 A의 바람과 달리 B가 도발한다면 공은 다시 A에게 간다. 이 제3단계에서 응징이냐 아니냐는 두 가지 선택지가 A에게 주어진다. 응징하면 전쟁이고, 응징하지 않으면 B의 승리다. 제2단계에서 B가 도발할지 말지는 제3단계에서 A가 어떻게 할지에 대한 B의 추정에 달려 있다. A가 감히 전쟁까지는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B가 판단한다면 B는 도발을 선택하게 된다.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쌍방은 상대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북측은 MB의 5월 경고를 무시했고, 남측도 포격 사건 전날과 당일의 북측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포격 사건 직후 열린 청와대 벙커 회의에서 MB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 고 합참의장에게 지시했다. 오후 3시30분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확전 방지를 지시했다”고 언론에 알렸다. 이후 청와대는 언론에 배포한 대통령 지시 문구를 수차례 바꾸다 저녁 6시엔 청와대 홍보수석이 ‘확전 자제’라는 표현은 전혀 없었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포격 직후 남측은 항공기 출격 여부, 그리고 출격 항공기의 공대지미사일 장착 여부와 관련해 오랜 시간 우왕좌왕했고, 또 교전규칙의 국제법적 해석을 두고 한미연합사와 수차례 전화하는 등 오랜 시간 설왕설래했다. <그림>에서 좌(응징)로 갈지 우(응징하지 않음)로 갈지 묻고 고민한다는 것은 우로 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전쟁은 남측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이 이런 남측의 전개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연평도 포격을 감행한 것이라면 전략적으론 옳은 선택이다.
‘도발 응징’ 약속 못 지키면 리더는 치명상
만일 <그림>의 제3단계에서 A가 좌로 갈지 우로 갈지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자동으로 좌(응징)로 가는 시스템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B는 도발 감행을 주저하게 된다. 남측이 정치적 고려 없이 매뉴얼대로 즉각적이고 심각한 대북 공격에 나설 것으로 북측이 예상했다면 북측은 아예 도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북한, 특히 북한 정권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자동적으로 에스컬레이트 되는 사안에서 북한이 도발한 적은 없다. 연평도 포격 사건, 판문점 도끼 사건 등은 모두 즉시 가동될 남측의 응징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북한이 일으킨 사건이다. 역설적이게도 자동적으로 에스컬레이트 되는 응징시스템이 도발을 억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지지에 의존하는 민주국가 지도자는 자신이 천명한 대외 경고를 실천하지 못하면 정치 생명이 거의 끝난다. 따라서 외부를 응징하겠다고 천명했으면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MB가 연평도 포격을 받고 강력 대응하지 못했을 때 대통령 지지도는 가파르게 하락했다.
포격 사건 1개월 후 한국군은 연평도 앞바다에서 사격훈련을 다시 실시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우리의 주권을 쏘았다” 고 보도했다. 연평도 포격 당시 북한이 발끈했던 K-9 자주포는 딱 1발만 쏜 것이어서 동일한 강도의 훈련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단 굴복하지는 않았다는 대내적인 모양새는 갖췄다. 12월 사격훈련에 대해 북한 조선중앙TV는 남측이 북한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격훈련 장소와 타격 지점을 변경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혁명 무력은 앞에서 얻어맞고 뒤에서 분풀이하는 식의 비열한 군사적 도발에 일일이 대응할 일고의 가치도 느끼지 않는다” 고 보도했다. 독재자의 청중비용이 작다는 맥락에서 보면 북한 정권은 자신의 대남 경고를 꼭 실천해야 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12월 사격훈련에 대해 응징하지 않았다.
배후에 있는 국민을 이용하는 전략은 민주 정부만이 구사할 수 있다. 예컨대 정부 간 합의가 최종적으로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발효되는 국가는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협상에서 상대국의 양보를 얻기가 더 쉽다. 독재자보다 민주 지도자가 국민을 핑계로 상대를 더 잘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가격 흥정에서도 대리인을 내세우는 측이 유리할 때가 많다. 주인이 아닌, 대리인에 불과한 자판기에서 가격을 깎은 소비자는 별로 없다. 오히려 자판기가 돈을 먹고 상품을 내놓지 않아 자판기를 흔들다 깔려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 실제 미국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위기상황은 보통 치킨게임으로 설명된다. 쌍방이 서로 마주보고 자동차를 몰았을 때 피한 측은 치킨(겁쟁이)이 되고, 피하지 않은 측은 영웅이 되는 게임이다. 상대의 양보를 강요하기 위해 상대가 보는 앞에서 자기 차의 핸들을 부숴버리고 자신은 피할 수 없는 선택임을 강변할 수도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상대는 자기 차 핸들뿐 아니라 자기 차 브레이크까지 부수며 더 강경한 모습을 보여줘 이기려 할 수도 있다. 미친 개에 물리지 않으려면 미친 개와 싸우지 않고 피해야 하는데, 이를 이용해 실제 미치지 않았지만 미친 것처럼 보이게 해 상대로 하여금 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치킨게임에서는 선택을 바꿀 여지가 있는 자가 패배하고, 자신의 선택이 바뀔 수 없음을 상대에게 인지시키는 배짱 센 자가 승리한다. 그 배짱은 잃을 게 없어 ‘배 째라’는 식의 불리한 처지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한쪽이 작은 것에 목숨 걸고 싸우면 다른 큰 것을 갖고 있는 다른 한쪽은 양보하게 된다.
상대방 심리 못 읽은 ‘배수진’은 자충수
벼랑 끝 전략(brinkmanship), 배수진(背水陣), 필사즉생(必死則生). 이런 전략을 잘못 쓰면 벼랑 끝에 떨어지거나 물에 빠지거나 아니면 죽을 수도 있다. 자충수(自充手), 즉 바둑에서도 자기가 놓은 돌이 오히려 자기의 수를 줄여 결국 패하게 될 때도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웠으나 참혹한 패배를 겪었다. 배수진에서는 비기는 것이 없다. 이기지 않으면 참패인 것이다.
치킨게임에서 나의 강경한 의지를 반대편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치킨 상황에서는 자신의 강경함을 상대가 믿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상대가 그렇게 믿지 않음에도 강경하게 밀어붙이면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가 발생한다. 상대의 강경한 모습은 ‘쇼’이고 상대가 궁극적으론 양보할 것이라고 쌍방이 확신하는 상황은 매우 위험하다. 상대를 압박해 상황을 주도하든지, 상대에게 밀려 양보하든지, 계속 밀리는 판을 뒤집거나 계속 주도권을 잡기 위해 몇 차례의 파국을 감수하든지, 이 가운데 어떤 전략이 나을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02호 | 201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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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4. 양날의 칼 ‘외부 위협’ |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운데)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한 ‘브뤼메르 18일’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 ‘생클루 오백인회(五百人會)의 보나파르트’. 파리 교외 지역인 생클루에서 오백인회를 해산시키는 장면이다.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부쇼의 1840년 작품 |
내부의 적 잡는 외부의 적 … 권력자에겐 ‘신의 한수’ |
④ 양날의 칼 ‘외부 위협’
지금부터 215년 전인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 전면에 등장한 날이고, 1918년 11월 9일은 프랑스의 맞수 독일 빌헬름 2세가 강제로 퇴위돼 유럽 전제황권이 종식된 날이다. 동아시아 일본에서는 1867년 11월 9일 메이지(明治)가 에도(江戶)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받아 거의 700년 만에 왕정으로 복고했다.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이 세 군주의 등장과 쇠퇴에는 공통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그들을 만들었다. 당시 그들의 권력 장악 혹은 퇴진이 요즘 말로 ‘대세’였다는 의미다. 무릇 권력은 세(勢) 규합에서 시작하는데, 세 규합이 걸림돌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권력 장악 이후에는 외부에서 자원을 더 많이 가져와서 배분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세 권력자 모두 집권 후에는 세계 혹은 지역 패권을 추구했다. 장기집권의 기반인 외부와의 지속적인 경쟁, 특히 전쟁은 당시 기본적인 국가 전략이었다. 그들의 팽창정책이 세상을 많이 바꾸었다. 전쟁 승리하는 동안 브레이크 없는 권력
| | | 왼쪽부터 메이지(明治), 빌헬름 2세, 나폴레옹 1세. | | 먼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권력 장악을 살펴보자. 혁명 이후 성립된 프랑스 제1공화정은 반란과 쿠데타로 계속 불안했다. 특히 프랑스혁명과 공화정에 대한 외부의 위협이 드세었다. 1799년 들어선 5인 총재 정부를 이끌던 사람은 에마뉘엘 시에예스(Emmanuel Sieyes)였다.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시에예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바꾸고 싶었다. 그 일에 적합한 군인이 나폴레옹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야심가 나폴레옹을 경계하긴 했지만 황제로 즉위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시에예스와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1일 만나 쿠데타를 모의했다.
1799년 11월 9~10일, 당시 혁명력(曆)으론 2월에 해당하는 안개(브뤼메르)달 18~19일, 나폴레옹의 장병들이 원로원과 500인 의회를 포위해 쿠데타가 감행됐다. 나폴레옹은 쿠데타 과정에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는 나폴레옹이 거사에 성공한 날이라기보다 시에예스의 브뤼메르파가 자코뱅파에 승리한 사건으로 당시엔 여겨졌다. 부르주아 공화국 수립을 원한 브뤼메르파는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을 다시 전장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실권 없는 국가원수직에 두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일련의 정치무대에서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순순히 협조하는 길을 택했다. 대신에 원로원 의원직에다 많은 돈과 영지를 받았다. 결국 브뤼메르파는 계급적 특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나폴레옹 독재를 수용하게 된 셈이다.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마침내 황제에 즉위한다. 자코뱅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세력이 정부 요직에 중용됐다. 전쟁이 낳은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전쟁이야말로 민심을 잡고 권력을 유지하는 좋은 수단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재위기간 내내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이기는 동안은 프랑스 내의 그 누구도 나폴레옹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나폴레옹 정권의 붕괴는 국내 반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이뤄졌다.
메이지 시대엔 외부위협으로 내부결속
무쓰히토(睦仁), 즉 메이지(明治)의 경우를 살펴보자. 무쓰히토는 부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1867년 1월 15세의 나이로 즉위식도 없이 일왕(日王)에 즉위했다. 그 당시의 일본 사회 역시 혼란과 암살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권력자 에도(江戶) 막부는 전국을 통제하지 못했고, 서남지역 번(藩 · 지방 제후의 영지)들이 막부에 대항하던 정국이었다. 대외 개방 압력에 존왕양이(尊王攘夷) 구호가 자주 등장했다.
막부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국가 통치권을 일왕(日王)에게 돌려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일부 번으로부터 제의받고 11월 9일 이를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다음해 막부는 번들의 군사적 위협에 항복하고 스스로 해체했다.
왕정복고의 일등공신인 여러 번도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1869년 영지(領地)와 영민(領民)에 관한 판적을 일왕에게 반환했고, 1871년에는 번을 폐지하고 대신 현을 설치해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도록 했다. 이른바 ‘폐번치현(廢藩置縣)’은 번의 주군들을 도쿄에 강제 이주시키고 대신 현령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1867년 대정봉환에 이은 제2의 왕정 쿠데타로 불리기도 한다. 또 메이지 정부는 1873년 사무라이 대신 국민개병제를 도입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메이지 이름으로 시행됐지만 메이지가 기획하고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번 출신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주체들이 따로 있었다. 막부의 권한을 모두 일왕에게 주는 것만으로 국내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뭔가를 줘야 하는데, 일본 내에서는 줄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외 팽창이 조만간 필요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3걸 가운데 1인으로 불렸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지방 무사계급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을 정벌하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내치를 우선시하는 반대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이고는 참의직을 사퇴했다. 1877년 사이고는 세이난(西南) 전쟁을 일으켰고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자결했다. 조선의 대일 태도를 문제 삼아 제기된 정한론에 대해 메이지는 동의하지 않는 입장에 섰지만 정한론 자체에 반대했다기보다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정권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언젠간 외국 진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조선 개항,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병합 등이 모두 메이지 때의 일이다. 외부와의 전쟁 때마다 메이지는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 준비를 챙겼다. 심각한 전쟁 패배를 겪지 않은 메이지는 죽을 때까지 권좌에 머물렀다.
마키아벨리 “현명한 군주는 적대감 조성”
호전적 대외정책으로 권력을 잃은 사례는 빌헬름 2세다. 그도 부왕이 취임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자 1888년 29세의 나이로 독일제국 황제직에 올랐다. 당시 독일제국의 한 축이었던 재상 비스마르크를 해임시켜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됐다.
빌헬름 2세는 세를 규합해 새로운 권력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세습받은 것이다. 그래서 빌헬름 2세는 대외관계에서도 세 규합에 목매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와 달리 동맹을 경시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늪에 빠지게 됐다. 패전이 임박해지면서 독일 내부에서 퇴위 권유를 받고 버티다가 결국 1918년 11월 9일 퇴위했다. 네덜란드로 망명해 살다가 1941년에 쓸쓸히 죽었다.
세 가지 사례를 보면 전쟁이 주요 외교 전략이고, 또 외교는 주요 권력 유지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외부와의 경쟁이 권력을 공고히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권력을 와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먼저 외부 위협이 국내 안정을 가져다주는 측면이다. 그런 의미를 담은 동서고금의 문구는 많다.
『손자병법』 「구지(九地)」편에 나오는 “서로 미워하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서 풍랑을 만나게 되면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구한다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過風 其相救也如左右手)”, 즉 오월동주(吳越同舟)는 그런 옛 문구의 예라 할 수 있다.
현대의 문구로는 ‘국기집결(rally-round-the-flag)’ 현상이 있다. 미국 국민이 대외 위기 시 정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다는 뜻이다.
개나 사파리 곰들은 같은 우리에 있는 다른 동물과 서로 앙숙으로 싸우다가도 더 강한 동물을 보게 되면 서로 협력한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도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여러 실험에서도 어려움 없이 함께 있었던 집단보다 함께 어려움을 겪었던 집단이 서로 잘 협력했다는 것이 입증된 바 있다. 정쟁도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자의든 타의든 완화된다. 시위대 내의 내부 이견으로 지지부진하던 시위 양상이 경찰의 출동이나 진압으로 인해 오히려 일사불란하게 전개됐던 예도 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외부 적의 존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행운(fortuna)은 군주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적을 만들어 주고, 군주는 적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가는데 현명한 군주는 일부러 그러한 적대감을 조성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외부 적과의 경쟁에서 이기면 권력 유지가 쉽다.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하더라도 패전의 책임을 경쟁 정파에 지울 수 있다면 패전 또한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책임을 박헌영과 남로당에 지우면서 자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 군부는 좌파가 연합국 측의 부추김을 받고 반전주의와 혁명주의로 후방을 교란하면서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바람에 전쟁에서 패했다며 좌파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렸다.
외부와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또 그 책임을 내부 경쟁자에게 돌리지 못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면 외부 위협의 조성은 나쁜 수, 즉 패착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1세와 빌헬름 2세 모두 패전으로 정권을 잃었다. 나폴레옹 1세의 경우 외부 점령자들이 책임을 물었고, 빌헬름 2세는 국내 경쟁자들이 책임을 물었다. 이에 비해 일왕은 1945년 전쟁 패배 후 퇴위되지 않았다. 외부 경쟁자와 내부 경쟁자 모두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긴장관계로 내부를 단속하는 전략은 영구적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한국 증시와 선거에서 북한 위협론을 강조하는, 이른바 ‘북풍 효과’가 과거처럼 강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등 서방 강대국과의 대립을 통해 정권을 비교적 오래 유지했던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카다피 모두 권력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불행한 죽임을 당했다.
요약건대 외부와의 경쟁 모드는 내부 정서의 측면에서 정권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런 정서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길게 보면 부국강병에 의한 실리가 분배돼야 권력이 유지된다. 결국 외부와의 경쟁에서 얻은 걸로 전 국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배연합만이라도 배부르게 해야 정권이 지속된다는 말이다. 정서든 실리든 외부 경쟁은 내부 정치를 위한 ‘신의 한 수’다. 잘못 쓰면 패착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00호 | 201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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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3. 판도 바꾸는 패권 공백 |
| 2011년 9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오른쪽)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불출마를 밝힌 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포옹하고 있다. 예비 후보 1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지지율은 39.5%로 1위, 박원순 지지율은 3.0%로 5위였다. [중앙포토] |
넘버2의 비애 … 최고 되기는 어렵고 사라지는 건 순간 |
③ 판도 바꾸는 패권 공백
1등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까. 2등이 새로운 1등으로 등극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지금으로부터 딱 35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현직 대통령이 시해된 것이다. 그 절대 권력자를 이어 누가 새로운 권력자가 됐나. 정치권에는 3김씨를 비롯한 여러 대권주자가 있었고, 행정부 쪽에도 최규하 총리 등 후계자로 거론되던 인사들이 있었다. 10개월의 혼란을 겪은 후 실제 정권을 잡은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10 · 26 사태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지면 전두환 소장이 최고 권력자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10 · 26 사태 이전에 전망했던 사람은 없다. 대통령 시해의 주도자, 즉 당시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조차 전두환의 권력 장악을 예상치 못했다. 이처럼 권력 공백 이후 새로운 패권은 애초 후보군에도 끼지 못하던 쪽이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0 · 26 직후 3김씨는 대체로 낙관적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의 12 · 12 군사반란 이전과 이후 다 그랬다. 세를 모으기 위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지만. 민주화는 8년이 더 연기되었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데도 적어도 1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김재규의 행동 역시 자신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전두환 정권의 등장을 초래했다. 세상을 바꾸긴 했지만 자신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였다. 즉 전략적 사고가 없었다. 투표의 사례를 살펴보자. 3년 전인 2011년 10월 26일 실시된 서울시장 선거다. 당시 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관련, 사퇴해 실시된 보궐선거다. 오 시장 사퇴 선언 직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명숙, 나경원, 추미애, 박영선 정도가 다음 서울시장으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다가 안철수의 출마 가능성 보도 이후의 여론조사들은 안철수, 나경원, 한명숙, 박원순 순의 지지도를 발표했다.
오세훈 사퇴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2, 3, 4등을 달리던 정치인들이 오세훈 사퇴 이후 각각 1, 2, 3등으로 한 단계씩 올라가지 못했다. 또 안철수의 불출마 직전에 2, 3, 4등으로 평가받던 후보들이 안철수의 불출마 이후 각각 1, 2, 3등으로 되지도 못했다. 2011년 선거의 당선자는 박원순 후보였다. 안철수 불출마 전에는 빅3에 포함되지 못했던 그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후보 간 경쟁 결과는 다른 후보가 있고 없음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특히 1인1표의 다수결에서는 본래 특정 후보에게 갈 표가 다른 후보에게 가기도 하고, 특정 후보에게 가지 않을 표가 별다른 후보가 없어 그 특정 후보에게 가기도 한다. 다른 후보의 유무에 따라 각 후보의 득표가 달라지니 당선자도 달라진다.
사람들은 한 후보에게만 표를 주는 방식보다 각각의 후보에게 차별화된 표나 점수를 주는 방식이 복잡하지만 더 낫다고 보기도 한다. 얼마나 좋고 싫으냐가 반영될 수 있고, 특정 후보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실제로 각종 콘테스트와 외국 의회선거에서 채택되고 있다.
각 유권자가 가장 덜 좋아하는 후보에게 0점을, 그리고 한 단계씩 좋아할수록 단계당 1점씩 더 준 후 가장 많은 총점의 후보가 선출되는, 이른바 ‘보다 방식(Borda count)’으로 서울시장을 선출했다고 치자. 그럼 안철수의 불출마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설명의 편의상, 서울시민이 10명이고 아래와 같은 후보 선호도를 갖고 있다고 임의로 가정해보자.
ⓐ(1명) 안>나>박 (시민 ⓐ는 안철수·나경원·박원순 순으로 선호하며, 3인이 출마한 점수투표제에서 안 후보에게 2점, 나 후보에게 1점, 박 후보에게 0점을 줌) ⓑ(3명) 안>박>나 ⓒ(3명) 나>안>박 ⓓ(3명) 박>나>안
10명이 3인의 후보에게 점수투표를 실시한 결과 세 후보는 아래와 같은 총점을 받는다.
안: 2점×4명(ⓐ+ⓑ)+1점×3명(ⓒ)=11점 나: 2점×3명(ⓒ)+1점×4명(ⓐ+ⓓ)=10점 박: 2점×3명(ⓓ)+1점×3명(ⓑ)=9점
따라서 위 가정하에서 세 후보가 출마했다면 총점은 안철수, 나경원, 박원순 순이었고 안철수가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는 출마를 접었다. 그렇다면 10명 시민의 후보 선호도는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된다.
ⓐ(1명) 나>박 ⓑ(3명) 박>나 ⓒ(3명) 나>박 ⓓ(3명) 박>나
안철수가 빠진 이후 나경원은 ⓐ+ⓒ의 4명에게 1점씩 받아 4점을 얻고, 박원순은 ⓑ+ⓓ의 6명으로부터 6점을 얻는다. 박원순이 나경원에게 6대4로 승리한다. 즉 안철수의 불출마 이전에 3등을 했던 박원순이 안철수의 불출마 이후에는 2등에게 역전해 1등에 오른 것이다. 따라서 당선을 위한 박원순의 핵심 전략은 안철수의 불출마였다. 실제 선거일 50일 전 안철수와 박원순은 짧은 회담을 하고 박 후보로의 단일화를 발표했다.
1등의 공백은 종종 판 바꾸기로 연결된다. 그 판 바꾸기로 기존 서열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판 바꾸기는 애초에 불리한 측에게 더 유혹적인 전략이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의 1억원대 피부클리닉 출입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그런 이슈를 그의 감표 요인으로만 보는 것은 단선적이다. 억대 피부과 이슈는 나경원과 박원순 간의 양자대결의 판을 바꾼 것이기도 했다. 기존 판에다 극소수 특권층 대 나머지, 즉 1 대 99라는 새로운 이슈를 추가한 것이다.
<그림 1>은 억대 피부과 이슈 등장 이전 두 후보와 10명 유권자의 입장을 기존 판인 가로축 위에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선 유권자 40%(①, ②, ③, ④)가 박원순을 더 가깝게 느낀 반면, 60%(⑤, ⑥, ⑦, ⑧, ⑨, ⑩)는 나경원을 더 가깝게 생각했다. 즉 나경원이 박원순에게 6대 4로 승리할 판세였다.
<그림 2>에서는 억대 피부과 이슈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가로축 외에 세로축인 1대 99의 이슈가 추가되었다. 그 새로운 이슈에서의 유권자 입장이 드러났다. 물론 기존 가로축에서의 유권자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선거판에서는 유권자 60%(①, ②, ③, ④, ⑤, ⑥)가 박원순을 더 가깝게 느꼈다. 따라서 박원순은 40%(⑦, ⑧, ⑨, ⑩)의 지지를 얻는 나경원에게 6대 4로 승리하게 되었다. 당시 여론조사들은 안철수와의 단일화로 급상승한 박원순의 지지도가 이후 조금씩 하향하는 추세였고, 나경원의 지지도는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였는데, 억대 피부과 이슈 등장과 함께 흐름이 뒤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억대 피부과 이슈는 일종의 스캔들이다. 그 스캔들은 흠결의 크기만큼 지지율 감소를 초래했다기보다 1 대 99와 같은 새로운 이슈의 추가에 따라 판이 바뀐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경원이 피부클리닉에 지불한 액수가 수백만원에 불과하다고 밝혔지만 지지도를 회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등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백도 새로운 1등의 향방에 영향을 준다. 앞서 가정한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이 불출마하고 대신에 안철수와 나경원이 양자대결을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서울시민 10명의 선호는 다음과 같이 재정리된다.
ⓐ(1명) 안>나 ⓑ(3명) 안>나 ⓒ(3명) 나>안 ⓓ(3명) 나>안
이 경우 안철수가 4명(ⓐ+ⓑ)에게서 1점씩 총 4점을 받는 반면에, 나경원은 6명(ⓒ+ⓓ)으로부터 1점씩 총 6점을 받게 된다. 본래 2등이었던 나경원이 3등의 불출마로 1등이었던 안철수에게 승리하는 경우다. 즉 3등의 공백도 1, 2등 사이의 우열관계를 뒤바꿀 수 있다.
이를 다른 역사적 사건으로 살펴보자. 105년 전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날이다. 안 의사의 의거는 일본 내 권력 향방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토가 권력에 가까이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오쿠보 정권’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피살(1878년)이었다. 오쿠보의 경쟁자들이 아닌, 이토가 오쿠보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후 이토는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을 시작으로 1901년까지 네 차례나 총리직에 올랐다. 그러다 1903년 이토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입헌정우회 총재직에서 밀려났다.
안 의사 의거 당시의 일본 정국은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두 사람이 번갈아 총리를 맡을 정도로 서로에게 1, 2등의 경쟁자이자 협력자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사이온지는 이토와 함께 온건파였고, 가쓰라는 강경파라 할 수 있다. 당시 사이온지의 정우회가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1908년에 들어선 2차 가쓰라 내각의 수명은 짧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10년 5월 일본에서는 다수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메이지(明治)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검거되었다. 이른바 대역(大逆)사건이다. 안 의사 의거가 그 모의의 출발점이었다는 주장, 또는 가쓰라 내각이 날조한 사건이었다는 주장이 오늘날까지 제기되고 있다. 진실이 어떠하든 이토의 피살은 결과적으로 2차 가쓰라 내각을 더 연장시켰다. 1, 2등이 아닌 이토가 사라지면서 1, 2등 간의 경쟁 판도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최근 여러 조사기관에서 차기 대권주자에 관한 지지도를 발표하고 있다. 각 후보의 지지도는 앞으로 부침을 거듭하고, 또 그 지지도 순위는 다른 주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크게 변동할 것이다. 어떤 강력한 차기 후보가 다음 대권을 잡는다는, 이른바 대세론은 현실화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대세론의 주인공이야 판을 유지하려 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스캔들도 일종의 판 바꾸기다. 스캔들은 지지를 감소시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판을 바꾸기 때문에 매우 파급적이다.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스캔들조차 판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 현 상황이 유리한 측은 어떻게 판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할 것이고, 불리한 측은 새로운 프레임(frame)을 들고 나와 판 바꾸기 전략을 구사하려 할 것이다.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398호 |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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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2. 돌고 도는 ‘국민의 뜻’ |
| 1987년 9월 18일 국회의장실에서 이재형 국회의장(가운데)과 여야 원내총무들이 6공 헌법안을 마주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국회에 접수된 개헌안엔 264명의 국회의원들이 서명했다. 왼쪽부터 신민당의 정재원, 민정당의 이대순, 이재형 의장, 민주당의 김현규, 국민당의 양정규 총무. |
26%의 힘을 ‘전체’로 둔갑시킬 수 있는 과반의 마법 |
② 돌고 도는 ‘국민의 뜻’
세월호특별법과 관련한 논쟁에서 한쪽은 자신의 의견을 ‘유가족 뜻’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자신의 주장을 ‘국민의 뜻’이라고 규정한다. 모든 유가족의 입장이 100% 똑같지는 않을 테고, 더욱이 국민의 생각도 똑같을 수가 없다. 생각이 어느 정도 공유돼야 ‘유가족 전체의 뜻’ 또는 ‘국민 전체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딱 27년 전인 1987년 10월 12일 국회는 개헌안을 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재적 의원 272명 가운데 258명이 표결에 참여했고 254명이 찬성했다. 보름 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도 투표자의 93%가 찬성해 현행 헌법(제10호 헌법)이 탄생했다. 이 정도면 국민의 뜻이라고 해도 별 이의가 없다.
민주주의와 어긋나는 유신헌법이나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국민의 뜻은 어땠을까. 72년 11월 실시된 유신헌법안 국민투표에선 찬성표가 90% 이상 나왔다. 80년 10월의 제5공화국 헌법안 국민투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감안한다면 국민이 그 두 헌법안을 최선으로 봤기 때문에 찬성한 것은 아니다. 그냥 국민 다수가 이전 헌법보다 새 헌법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한 데 불과하다. 헌법안에 대한 정당이나 사회인들의 의견 개진이 금지된 상황에서 72년의 국민 다수는 정국 불안정의 제3공화국 헌법보다 유신헌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고, 80년의 국민 다수는 장기 집권의 유신헌법보다 단임제의 제5공화국 헌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제5공화국 헌법의 추진세력은 국민들 눈에 유신헌법보다 나은 헌법만 제시하면 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이어 87년의 국민 다수는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하는 제5공화국 헌법보다 직선제 대통령제의 현행 헌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현행 헌법 대신에 내각제(제2공화국형) 헌법이나 대통령 중임제(제3공화국형) 헌법을 국민 다수가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 5년 단임 대통령제보다 4년 중임 가능 대통령제가 더 높은 국민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헌법이라 해도 시간이 지난 뒤엔 또다시 국민 다수가 지지하는 새로운 헌법으로 교체될 수 있다. 국민 전체의 뜻은 돌고 돈다.
개헌이라는 국민의 뜻을 확인할 때 90% 찬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과반수 투표와 투표자 과반의 찬성만 있으면 된다. 다만 국민투표 이전에 국회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도록 규정해 가급적 더 많은 동의를 구하도록 하고 있다. 개헌안 의결 외에도 대통령을 탄핵소추하거나 국회의원을 제명할 때에도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또 재적 의원 과반수 찬성이나 출석 의원 3분의 2 찬성을 요구하는 사안도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의결에는 재적 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하는 게 현행 헌법 49조의 내용이다.
‘재적 과반수 출석, 출석자 과반 찬성’으로 전체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가장 흔한 민주주의 원칙이다. 이 다수결 원칙에서는 극단적인 경우 재적 26%가 전체의 뜻을 결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재적 100명 가운데 찬성 26명, 반대 74명이라고 하자. 반대파 가운데 25명만이 출석하고 찬성파 26명은 전원이 출석한다면 26대 25로 통과된다.
출석자 과반 찬성이 확실할 경우 반대파는 어떤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까. 출석자가 과반에 미달해 의결 자체가 진행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프거나 출장 중이라 출석이 불가능한 의원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링컨 대통령은 주 의원 시절 출석자 과반 찬성을 확신한 상대 정파가 의사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의사당 출입문을 봉쇄하자 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국회 의결에 51% 대신에 대략 60%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만든,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은 어떤가. 폭력 국회를 예방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하지만 사실 몸싸움을 하고 안 하고는 의결정족수와 별로 상관이 없다. 표결에 지면 49%뿐 아니라 20%도 몸싸움을 벌일 수 있다. 지금의 국회는 의안이 통과되지 않기 때문에 몸싸움이 없는 것뿐이다. 통과에 많은 찬성을 요구할수록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른바 식물국회가 될 가능성은 높다. 국회 선진화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법이 헌법이나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과반수 출석, 출석자 과반 찬성’으로 의결한다는 헌법 49조에 위배된다고 한다.
아렌트 레이파르트(Arend Lijphart) 같은 여러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다수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인종·종교·언어·출신지역 등에 의해 다수 집단과 소수 집단 간의 구분이 뚜렷한 사회에서는 소수 집단이 지속적으로 정권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권력을 지지의 비율만큼만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도권 내에서 자신의 의사를 반영시킬 수 없는 소수 집단은 폭동이나 시위와 같은 비제도적인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51%의 지지를 얻은 정파에 권력의 51%를, 49%의 정파에 권력의 49%를 부여하는 비례대표제나 각 정파가 자치권을 갖고 전국적 이슈에는 거국적 합의로 추진되는 합의제를 제안한다. 다수결과 만장일치제를 포함해 어떤 결정 방식이 민주적일까. 7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는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 존재하지 않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애로가 말한 민주주의 조건은 ①어떤 후보끼리도, 어떤 정책 대안끼리도 경쟁될 수 있어야 하고 ②그 경쟁의 결과는 제3의 후보나 정책 대안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달라지지 않아야 하며 ③후보나 정책 대안 간의 우열 관계는 순환되지 않아야 하고 ④전원이 더 선호하는 후보나 정책 대안은 그렇지 않은 대안보다 우선적으로 선택되어야 하며 ⑤집단의 선택이 특정 개인의 선호와 늘 완전히 일치해서는 안 된다는 다섯 가지다.
애로의 ‘민주주의 불가능성 정리’를 달리 표현하자면 어떤 방식이 위 1, 2, 4, 5번의 네 가지 민주주의 조건을 충족시킬 때 그 방식에 의한 후보나 정책 대안 간의 우열 관계는 순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의 뜻이 대통령 중임제보다는 내각제를, 또 내각제보다는 대통령 단임제를 원한다면 상식적으론 대통령 중임제보다 단임제를 원하는 게 국민의 뜻이어야 한다. 이것이 위 3번의 비(非)순환성 조건인데 현실은 늘 그렇지가 않다. 국민이 단임제보다 중임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세 가지 권력구조에 대한 국민 선호의 우열 관계가 순환되는 것이다.
심지어 만장일치제에서도 우열 관계가 돌고 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통일 이슈에 대해 여당 · 야당 · 북한의 주장이 각기 그런 주장에 대해 국민이 각각 전체의 35%, 5%, 60%를 차지하는 ①, ②, ③으로 나뉘어 있다고 하자.
①35%: 야 > 여 > 북 (야당, 여당, 북한의 제안 순으로 선호) ②5%: 야 > 북 > 여 (야당, 북한, 여당의 제안 순으로 선호) ③60%: 여 > 야 > 북 (여당, 야당, 북한의 제안 순으로 선호)
만장일치제를 채택하는 경우 여당안과 야당안 가운데 양자택일하는 결과는 무승부다(여≡야). ①+②의 국민 40%가 야당안을 지지하지만 60%의 국민 ③이 여당안을 지지하여 어떤 제안도 만장일치로 지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장일치제에 의해 여당안과 북한안 만 놓고 양자택일하는 결과도 무승부다(북≡여). ①+③의 국민 95%가 여당안을 선호하는 반면에 ②의 국민 5%는 북한안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야당안과 북한안 간의 대결에서는 야당안이 채택된다(야≫북). ①, ②, ③ 세 집단 모두 북한안보다 야당안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위 세 가지 우열 관계를 종합하면 ‘여≡야≫북≡여’다. 이는 순환되는 우열 관계다. 즉, 야당안은 북한안보다 만장일치로 더 선호되고 그 야당안과 비기는 여당안 또한 북한안에 이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북한안은 야당안과 경쟁한다면 존속할 수 없겠지만 여당안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름 생명력을 갖는다.
이이제이(以夷制夷)와 같은 전략으로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경우는 대체로 이런 순환 관계에서다. 고전적 순환 관계는 오행(五行) 간의 상극 관계다.
수극화(水克火): 물이 불을 끈다. 화극금(火克金): 불이 쇠를 녹인다. 금극목(金克木): 쇠가 나무를 방해한다. 목극토(木克土): 나무가 흙을 황폐화시킨다. 토극수(土克水): 흙이 물을 흐리게 한다.
이에 따라 오행 간의 우열 관계는 다음처럼 순환된다. … 》水(물) 》火(불) 》金(쇠) 》木(나무) 》土(흙) 》水(물) 》…. 이 상극 관계와 더불어 상생 관계도 존재한다.
목생화(木生火): 나무가 불을 지핀다. 화생토(火生土): 불탄 재가 흙을 살찌운다. 토생금(土生金): 흙은 광물을 만든다. 금생수(金生水): 광물은 좋은 물을 만든다. 수생목(水生木): 물은 나무를 돕는다.
물이라는 천적을 둔 불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림>의 土-水-火 삼각형에서 불은 화생토(火生土), 즉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흙(土)을 이용해 그 흙이 물을 극(土克水)하게 해 물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는 상생 관계로 천적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이런 전략이 없다면 불은 물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만 순환적 상황을 이용한 전략적 사고로 그런 천적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水)도 자신이 키우는 나무(木)로 천적 흙(土)을 극복할 수 있다. 나무(木)와 쇠(金) 역시 유사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약점은 있게 마련이다. 그 물고 물리는 관계는 대체로 돌고 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권력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뜻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 쿠데타의 주역들도 자신의 행위가 국민의 뜻이라고 말한다.
만장일치의 국민 뜻도 돌고 돌 수 있는데, 하물며 다수결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 결정된 뜻은 더더욱 무너지기 쉽다. 개인 의지의 총합과 구분되는 ‘일반 의지’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시대정신’이니 하는 말도 절대적이지 않을뿐더러 언젠가는 바뀌는 법이다. 그런 상대성을 활용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바로 전략이다.
여론조사 발달로 전략투표 더 쉬워져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396호 | 201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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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의 김대중(왼쪽)과 김영삼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 |
| 1987년 9월 29일 외교구락부에서 후보 단일화 담판을 앞두고 악수하는 김영삼(왼쪽)과 김대중. |
‘2등 DJ’를 박정희 대항마로 만든 건 전략적 표심 |
① 전략적 투표의 힘
이종욱 전 서강대 총장의 ‘다시 쓰는 고대사’ 에 이어 금주부터 김재한 한림대 교수의 ‘세상을 바꾼 전략’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근거한 전략적 행동을 규범적 잣대가 아닌 게임이론의 틀에서 주로 분석하는 글입니다. 세상사는 대개 개별 인간들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로 진화돼 왔다. 전략이라고 해서 모두 위법과 위선으로 흐르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보는 게 더 현실적인 관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전제하는 담론 자체를 비난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자기 이익을 전략적으로 추구하는 행위가 공공이익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는 제도가 바람직하다. 그런 면에서 전략의 정석이 통하도록 하는 것이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구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딱 44년 전인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역전극이 벌어졌다. 당시 제1야당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얘기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YS)은 421표를 얻어 김대중(DJ, 382표)에 앞섰지만, 투표자 885명의 과반수 획득엔 실패했다. 82표는 이철승을 포함한 다른 사람을 지지했던 무효표였다. 같은 날 2차 투표가 치러졌는데, 이를 앞두고 이철승 측 대의원들에 대한 양김의 적극적인 지지 호소가 있었다. 특히 DJ가 적극적이었다.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해 주면 해줄 약속을 명함에 적어 준, 이른바 명함각서 등 많은 정치적 거래가 그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 몇 시간 후 실시된 2차 투표에서 총 투표 884표 가운데 DJ는 과반수인 458표를 얻어 410표를 얻은 YS를 눌렀다.
불과 몇 시간만에 대의원들의 지지 성향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DJ의 기세였을까, 호남의 바람이었을까. 물론 그 날의 역전극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키려면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선의 후보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다. 즉 2차 투표 당시, DJ가 자신에게 최선의 대안은 아니지만 적어도 YS보다는 나은 대안이라고 판단한 대의원들이 최소한 76명(DJ의 1,2차 득표차)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들이 71년 대통령 선거의 신민당 후보를 결정했다고 보면 된다.
그로부터 17년 뒤이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7년 전인 87년 9월 29일 서울 남산외교구락부. 이번엔 DJ와 YS가 제13대 대통령 후보 단일화 담판을 했다. 하지만 결렬됐고, 두 사람 모두의 출마는 기정사실화됐다. 실제 둘 다 출마했다.
살얼음판 승부 좌우하는 ‘전략’
87년 대통령 선거의 실제 득표율은 어땠나. 노태우(TW) 36.6%, YS 28.0%, DJ 27.0%였다. DJ, YS 두 후보가 DJ로 단일화해 TW와 겨뤘다면 TW가 당선됐을 것이고, YS로 단일화했다면 TW가 낙선했을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만일 그 조사가 정확했고 또 DJ가 그 조사 결과를 믿고 YS에게 양보했다면, YS는 단일후보가 되어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수도 있다.
야권 단일후보 DJ가 TW에게 패하는 반면, 단일후보 YS는 TW에게 승리하도록 하는 유권자의 선호도 조합은 여러 가지다. 가장 간단한 조합의 예는 유권자 전체를 각각 3분의 1씩 차지하는 세 후보의 지지집단 D, T, Y의 후보 선호 순서가 다음과 같을 경우다.
D: DJ > YS > TW
(DJ, YS, TW의 순으로 선호)
T: TW > YS > DJ
(TW, YS, DJ의 순으로 선호)
Y: YS > TW > DJ
(YS, TW, DJ의 순으로 선호)
이에 따르면 DJ와 TW의 일대일 대결이 벌어진다면 D만 DJ에게 투표하고 나머지 T와 Y는 TW에게 투표하기 때문에 DJ는 TW에게 패배하게 된다. 반면 YS는 TW와의 대결에서 D와 Y의 지지로 TW에게 승리한다.
<그림>처럼 야권이 먼저 단일화를 추진하고, 이를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선호 후보에 따라서만 투표한다면, DJ와 YS 간의 예선에서 유권자 집단 T와 Y는 YS에게 투표하는 반면, 유권자 집단 D는 DJ에게 투표할 것이다. 만일 YS가 예선에서 승리하여 TW와 최종결선을 치르게 되면, 유권자 집단 D와 Y가 YS에게 투표하기 때문에 YS가 최종승자가 된다.
이때 TW는 어떤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까. DJ와 YS 가운데 결선에서 자신에게 질 사람으로 단일화되도록 행동할 수 있다. 즉 TW를 지지하는 유권자 집단인 T는 DJ보다 YS를 더 선호하지만, 야권후보 단일화 투표에서 자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후보인 DJ에게 투표할 수 있다. 그러면 TW가 최종대결에서 야권 단일후보인 DJ를 이기고 당선될 수 있다. 이는 TW가 자신의 천적인 YS를 DJ로 이이제이(以夷制夷)하는 셈이다. 이처럼 자신의 선호대로 단순하게 후보를 선택하지 않고 최종결과를 염두에 두고 투표하는 것을 ‘전략적 투표(또는 전략투표)’라 한다.
그럼 선거가 TW의 의도대로 진행될까. DJ가 결선에 가면 TW에게 패배한다는 사실을 유권자 집단 D도 안다면, D 역시 다르게(전략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D는 야권 후보 단일화 투표에서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DJ에게 투표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최악의 후보인 TW의 당선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인지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D는 예선에서 최선의 후보 DJ가 아니라 차선의 후보 YS를 지지함으로써 결선에서 YS가 최악의 후보 TW에게 승리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또한 전략적 투표다. 유권자가 프로라면 D와 Y 모두 YS를 줄곧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DJ와 YS 간의 단일화 투표라는 예비 대결은, 한 수를 미리 내다보면, 결국 DJ 대신 TW 그리고 YS 간의 최종대결인 셈이다. 즉 전략적 국민의 투표에 의한 야권 후보 단일화는 본선에서의 YS 당선이고, 그런 방식을 주장할 측은 바로 YS 진영이다.
물론 87년 당시에는 선거 여론조사가 잘 공개되지 않아 모든 유권자들이 몇 수를 내다보고 투표할 여력이 없었다. 실제 단일화 투표를 하지도 않았다. 유권자들도 자신의 선호나 지지성향에 따라 투표했다. 하지만, 지금은 선거 여론조사 결과가 유권자들에게 속속 알려지고, 또 각 진영에서도 전략적 투표를 독려한다.
여론조사 발달로 전략투표 더 쉬워져
YS가 승리한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일부 유권자들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대신 당선가능한 차선의 후보에게 투표하기도 했다. 이 또한 전략적 투표다.
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 이회창 · 이인제 간의 각축이 벌어졌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이회창 측은 “이인제에게 투표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고 강조했고, 이인제 측은 “이인제에게 투표하면 이인제가 당선된다”고 반박했다. 득표율은 DJ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였다. 이회창과 이인제가 얻은 표를 단순 합산하면 DJ의 득표를 웃돈다. DJ가 일대일로 대결해서는 이회창에게 이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결과였다. 그런 의미에서 97년 대통령 선거는 DJ가 이인제 후보로 이회창 후보를 제압한 이이제이(以李制李)였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의 3자 동시 출마의 경우엔 박근혜가 가장 앞서고 ▶박근혜와 문재인 간의 양자 대결에서도 박근혜가 앞서며 ▶박근혜와 안철수 간의 양자 대결에선 안철수가 앞서고 ▶야권후보 단일화 경쟁의 단순 지지도에선 문재인이 안철수를 앞선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만일 문재인과 안철수 간의 국민경선이 치러졌다면 어땠을까. 물론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유권자가 많았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안철수보다 문재인이 본선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해서 문재인에게 투표하는 안철수 지지자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안철수가 박근혜에게 승리할 후보라고 판단해서 안철수에게 투표하는 문재인 지지자도 있었을 것이다. 또 두 사람 가운데 박근혜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큰 후보에게 투표하는 박근혜 지지자도 있었을 것이다. 이 모두 전략적 투표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인식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더 큰 차선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전략적 투표 행위는 오늘날 민주정치에서 흔히 일어난다. 전략적 투표는 겉으로 2등이나 3등, 심지어 꼴등이던 대안이 1등을 제치고 최종승자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전략적 투표는 유권자들로부터 강한 호불호(好不好)를 받는 후보 대신에 차선으로 선호되는 후보에게 기회를 주어,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민주적 행위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 1.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의 김대중(왼쪽)과 김영삼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 [사진설명] : 21. 1987년 9월 29일 외교구락부에서 후보 단일화 담판을 앞두고 악수하는 김영삼(왼쪽)과 김대중.
- 중앙선데이 | 김재한 한림대 교수 | 제401호 | 20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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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 한림대 교수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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