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극장
신 복 희
바람이 심한 날이다. 아침부터 ‘산불 조심 합시다.’라는 안내방송을 앞세운 지프차가 왁자하게 떠들며 동네를 돌고 갔다. 썩지 못한 낙엽이 뒹구는 아스팔트 길 위에는 먼지도 일지 않고 지프차가 뿜고 간 연기만 뭉글거린다. 연기 속에 남기고 간 소리가 잠시 웅웅대다가 사라지니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용한 길 위로 그 옛날 읍내 가설극장이 들어오던 날, 트럼펫 소리를 높이며 마을을 한 바퀴 돌던 트럭이 보이는 듯하다.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동네로 들어서던 낡은 트럭에는 분장한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트럼펫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지나갔다. 그때 울리던 트럼펫 소리는 어렸던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찌르는 무거운 슬픔이 있었다. 지금도 가설극장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애수(哀愁)에 잠긴 그 트럼펫 소리가 먼저 살아난다.
가설극장에는 서커스가 지나가면 영화가 들어왔다. 영화를 상영하는 날은 트럭이 마을로 오지 않는 대신 가설극장 지붕 꼭대기에 달아놓은 확성기가 노랫소리를 힘차게 뿜었다. 아침부터 해가 이울 녘까지, 그 시절 유행하던 ‘꿈은 사라지고’ ‘외나무다리’ ‘럭키모닝’ 같은 노래들이 지붕마다 춤을 추듯 내려앉으면 너도나도 마음이 들뜬 마을사람들은 그날 저녁은 아예 일찍 먹어치우고는 극장으로 향했다.
가설극장이란 원래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극장에 드는 관객의 수에 따라 하루 이틀 더 주저앉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둘러 떠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렇게 급히 걷어가는 가설극장이라서 그런지 서녘하늘을 적신 노을이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갈 때쯤이면 둑길에는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힘차게 들리던 노랫소리도 그 즈음에 잦아들고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밤늦도록 텅 빈 듯한 마을의 정적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외로움을 느끼게 해서 가설극장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면 이유 모를 설움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어느 해였던가, 그날도 오늘처럼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읍내에 영화가 들어온 날이라 아침부터 확성기에서 흐르는 유행가에만 귀 기울이던 언니와 오빠는 할아버지 몰래 가설극장으로 가기로 하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가기엔 입장료가 턱없이 모자랐지만 그 일을 눈치챈 나를 떼어놓고 두 사람만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셋이 다 포기하고 집에 있기엔 그 시절 영화란 너무나 흥미롭고 매혹적인 대상이었다.
언니는, 나를 아기처럼 업고 들어갈 거라면서 누가 나에게 나이를 물으면 절대로 다섯 살이라고 해야만 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그때 여덟 살이었던 나는 몸집이 작은 편이긴 했지만 누가 보아도 다섯 살이라고 보기엔 너무 컸을 것이다. 밤길은 땅이 언 채로 있어 발밑이 온통 돌멩이가 깔려있는 것처럼 단단하면서도 미끈거렸다. 전등불 하나 없던 새까만 밤길을 한참을 걸어야 우리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기대에 부풀어 추운 줄도 몰랐다.
가설극장에 이르자면 매표소 앞에는 모여드는 사람들을 위해 녹슨 드럼통에다 장작불을 피워놓아서 극장 앞은 그런대로 따뜻했다. 쌀 창고였던 곳이라 극장 안에는 관객들의 체온만이 난로 역할을 할 뿐 별다른 난방시설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극장을 채우고도 남을 것처럼 많았다.
언니는 나를 데리고 어두운 곳으로 가서 등에 업었다. 집에서 나올 때, 미리 준비해 간 아기 포대기를 두르니 오빠가 윗도리를 벗어서 내 머리를 덮어주고는 이가 딱딱 마주치는 소리를 내며 추위에 떨었다. 다시 극장 앞으로 가서 앞장 선 오빠가 두 사람의 입장료를 내자 언니는 아기를 업고 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에 우물쭈물 대답했다. 우리는 가까스로 통과되는 듯했다. 그러나 입구를 지키던 사람이, 돌연 내 머리를 씌운 옷을 벗겨서 ‘너무나 큰 아기’의 얼굴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거 뭐야? 아기 아니잖아? 너 몇 살이야?”
“다섯 살이에요. 나 진짜 다섯 살이에요.”
나는 언니가 시킨 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언니 등에서 내려야만 했다. 오빠는 벌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언니는 나를 업었던 포대기를 뭉쳐 안은 채 나만 들어가라고 등을 밀었다. 언니와 나는 잠시 상봉했다가 헤어지는 이산가족처럼 눈물을 그렁거렸다. 그런데 그날의 일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언니 혼자 집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셋이 다 돌아왔는지 기억에 없다. 언니 등에 업혔다가 내릴 때의, 땅이 폭삭 꺼질 듯한 실망감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실망감 속에서, 언제나 동생들 때문에 희생당한 언니의 하얀 얼굴이 떠오른다.
언니는, 가설극장에서 내 등을 밀어 넣듯 상급학교 진학 때에도 오빠를 위해서 희생했다. 육 남매의 맏이였던 언니는, 어머니 곁에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성장했다. 희생과 포기는 결혼 후에도 이어졌고 무책임한 남편의 외도와 가난한 살림 때문에 얻은 병으로 젊은 날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가설극장에서 상영되던 영화는 필름이 자주 끊기며 중단되는 일이 많았다. 위태롭게 영사기를 돌리다가 며칠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무대를 내리고 떠나던 가설극장처럼 언니도 그렇게 살다가 떠난 것 같다.
산불 조심 스피커를 단 차는 멀리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가설극장에 들어온 영화를 선전하던 유행가 소리도 예전에 사라졌다. 가설극장 앞에서, 등에 업었던 나를 내려놓으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던 언니가 생각난다. 찬바람이 보도를 치고 달아난다. 언니가 보고 싶다. 턱밑까지 달라붙은 죽음이 두려운 듯 눈을 감고 있던 언니의 얼굴이 잊어지지 않는다.
눈발이 스친다. 먼지 같은 눈발이 바람에 설레인다. 바람 속에서 다시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해도 가설극장은 서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가설극장이 다시 와서 아무리 오래 머문다 해도 이제 언니와는 함께 갈 수 없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면 가장 기뻐할 사람인데 우리 언니는 떠나고 이제 없다. 가설극장도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가설보다 좋은 진짜극장에서 날마다 온갖 영화가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마음은 그때보다 더 춥기만 하다.
첫댓글 이 글이 아름다운 이유는 작가의 참 마음이 그대로 담긴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복희 작가님은 소리 소문 없이 어느날 우리 곁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글을 쓰고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