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0> 서장 (書狀)
향시랑(向侍郞)에 대한 답서
法은 언제나 그대로다
“편지에 말씀하시길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꿈과 깸이 하나다’고 하시니 한 조각 인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대가 반연(攀緣)하는 마음으로 법을 들으면 이 법도 반연하는 마음일 뿐이다’고 하셨습니다. ‘지인(至人)은 꿈이 없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없다’는 말은 ‘있다 없다’고 할 때의 ‘없다’가 아닙니다. 꿈과 꿈 아님이 하나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세간을 보면 도리어 꿈 속의 일과 같습니다. 경전 가운데 분명한 글이 있습니다. ‘꿈은 전적으로 망상(妄想)인데도 중생은 거꾸로 뒤바뀌어 매일 대하는 눈 앞의 경계를 진실하게 여기고 이 모든 경계가 꿈인 줄은 전혀 알지 못한다.’
더구나 그 가운데에서 다시 허망한 분별을 내어서 잠과 꿈과 깨어 있음을 말하니, 이것은 바로 꿈 속에서 다시 꿈을 말하는 것이며 거꾸로 된 가운데 다시 거꾸로 되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하는 짓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꿈이 곧 진실이며 모든 진실이 곧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지인에게는 꿈이 없다는 뜻이 이와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을 눈 앞에 드러나는 의식(意識)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공부도 의식 속에서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은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여섯 가지 지각기관과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이라는 여섯 가지 지각의 대상이 접촉하고 반연(攀緣)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상대적이고 무상(無常)하게 변화하는 인연법(因緣法)일 뿐이다. 따라서 의식에만 머물러 의식만을 보고 있다면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실한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보통 선을 공부하는 이들이 공부의 완성도를 재는 척도로서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한결 같다는 오매일여(寤寐一如)를 말한다. 이것은 깨어 있을 때 한 순간에도 화두(話頭)를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꿈 속에서도 화두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며 나아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를 한 순간에도 놓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통 공부인들이 빠져드는 잘못된 길은,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다는 오매일여를 두고 의식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이라고 착각해 버리는 것이다. 즉 깨어 있을 때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화두를 의식하고 있고, 그렇게 화두를 의식하는 행위가 꿈에까지 나타나고, 나아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 속에서도 그렇게 화두를 의식하는 행위가 끊어짐 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매일여가 무엇인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서, 그야말로 ‘반연(攀緣)하는 마음으로 법을 들으면 이 법도 반연하는 마음일 뿐이다’는 말에 딱 알맞은 짓이다.
자나 깨나 화두를 들고 있다는 말은 ‘뜰 앞의 잣나무’라든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등의 특정한 ‘화두’라는 말마디를 의식 속에서 늘 생각하며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의식적으로 이런 말마디를 늘 기억하며 잊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반연하는 의식으로서 허망한 상(相)에 막혀서 성(性)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색(色)에 막혀서 공(空)을 알지 못하는 일이다. 이것은 ‘있다 없다’라는 분별심(分別心)에 빠져 있는 것이니, 꿈과 잠과 깨어 있음이 하나라는 말은 이런 분별심과는 십만리나 떨어져 있다.
화두는 곧 법(法)을 가리킨다. 법(法)은 곧 나 자신으로서 붙잡거나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은 깨어 있음과 꿈과 꿈 없는 잠이라는 여러 가지 변화하는 경계를 드러내지만, 언제라도 법은 그대로이다. 의식의 경계에서 보면 꿈과 잠과 깨어 있음이 제각각 다르지만, 법을 알면 꿈도 법이요 잠도 법이요 깨어 있음도 법이니, 잠자는 것이 곧 깨어 있음이요 깨어 있음이 곧 꿈꾸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 화두를 놓칠 수가 있겠는가.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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