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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7:29-34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오늘 저는 수 염소의 피에 적신 요셉의 옷을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피뭍은 옷을 상징적으로 살펴보면서 또 다른 예수님의 한 면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바쁘게 형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요셉의 모습을 죽음의 땅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길이 아닌 길을 형들을 만나기 위한 한 목적으로 왔지만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형들의 날카로운 시선이었고 폭력이었습니다.
110키로 그 먼 길을 달려온 동생을 대접하는 형들의 모습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7: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어떻게 하자고 합니까? 죽이자 라는 말이죠?
그리고 무엇을 버리지 못합니까? 요셉의 꿈 그 꿈이 그래도 이루어 지는지 우리가 보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방해하였던 사탄의 추종자들처럼 그렇게 보입니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그 가운데서도 요셉이 죽지 않도록 한 형제의 마음을 감동합니다.
누굽니까? 장자 르으벤이 요셉을 살리려 계책을 씁니다.
창 37: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이런 모의를 할 때 그런 것을 알지 못하은 요셉은 그 먼 길을 해메다 형들을 만난 그 기쁨으로 아마도 형님들 저 왔어요 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왔지만 그 형들은 요셉을 보자 마자 어떻게 하였습니까?
창 37: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잡아서 어떻게 합니까?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물 없는 구덩이에 던집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요셉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형들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였을까요?
훗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형들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하여 요셉이 베푼 계책에 말려 들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무슨 내용입니까?
후에 우리 다시 살펴볼 내용이지만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하였죠?
아직 요셉의 마음은 어떠하다는 말입니까?
이 형들이 나를 미워 한 것처럼 나의 동생 베냐민도 미워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의 몸에 어떤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염려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동생을 보려고 형들을 함정에 빠트립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금할 때 그 형들이 서로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요셉이 어떻게 하였다고 합니까? 애걸하였다.
무슨 일로 애걸 하였을까요? 살려 달라고 그렇게 애걸 하였을까요.
예기치 못한 일을 형들에게 당했을 때 요셉은 정말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난이 아닌 실제 상황임을 직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애걸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애걸하였습니까? 애걸이 무슨 말입니까?
애걸을 한자는 이렇게 씁니다. 哀 슬플애 乞 빌걸 슬프게 비는 모습을 애걸이라고 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하였다는 말입니까? 당하는 시련을 슬퍼하면서 빌었다.
예수님도 슬프게 비는 모습이 나옵디까?
성경 보겠습니다.
마 26:37-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리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죽게 되었다.
동생을 구덩이로 집어 넣을 때 애걸하는 요셉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흔적이 좀 보이는 듯 합니까?
요셉은 살려달라고 내가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 해 달라고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애걸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로 나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사 죽게 되었을 때 그 입에서 무슨 기도가 나왔습니까?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 말씀은 그냥 자지 말고 눈 뜨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까?
그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어떤 기도를 드리셨나요?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요셉은 자기를 죽일 수도 있고 죽음에서 건져 줄 수도 있는 노한 형들에게 애걸을 합니다. 뭐라고 애걸하였을까요?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을 것이고요.
예수의 그림자로 살았던 요셉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기도를 드리시고요. 나를 살려 주옵소서.
우리 성도님들 성경은 그냥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한 간단한 기도였겠습니까?
증언의 말씀은 그날 그 겟세마네의 고뇌의 장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망 759(영문) “광야에서부터 갈바리까지 사단의 분노의 폭풍이 그분에게 휘몰아쳤으나 그것이 무자비하게 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아들은 더욱더 굳게 하나님의 손에 매달리셔서 그 피로 물든 그 길을 헤치고 나아가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합니까?
“광야에서 갈바리까지 사탄의 분노의 폭풍이 그분에게 휘몰아 쳤다”
사탄이 얼마나 분노 하였을까요?
분노의 폭풍이라는 시대의 소망의 표현이 제대로 된 것 같습니까?
광야에서 라기 보다는 베들레헴에서 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아기로 태어 났을 때는 그를 삼키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고요.
그를 삼키지 못한 사탄의 분노는 베들레헴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이는 것으로 분노를 풀었고요.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셨을 때는 그 시장끼를 이용하여 돌을 떡 만들어 먹으라고 신성을 사용하여서 굶주림을 면하라고 하였고요.
예수그리스도 공생에 내내 그의 목을 지키며 괴롭혔고.
이제 십자가로 나가시는 길에 다시 사탄은 예수 그리스에게 어둠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후의 일에 대하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 후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예수그리스도 옆에서 말을 합니다.
너의 죽음은 헛것이라고요.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을 보라고요.
그중 한 명 가장 똑똑하다고 하는 제자는 너를 팔 것이고 또 다른 제자 수석제자라고 하는 제자는 너를 저주하게 될 것이고 너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다 너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요.
그래도 그들을 위해 죽을 것인가 라고 사탄은 말을 합니다.
너는 죽으면 그뿐이라고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너는 나의 수중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는 영원히 끝날 것이고 부활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비우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인류를 위하여 죄가 되신 예수님은 완전한 죄덩이가 되셨기 때문에 죄인의 영원한 멸망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진바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것을 알고 그 길을 간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셨습니다.
시대의 소망은 또 이런 말씀을 줍니다.
시소 759 “온 하늘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은 대쟁투를 목격해 왔다. 큰 흥미를 가지고 그들은 투쟁의 마지막 장면까지 따라갔다. 그들은 구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시는 장면과 그의 영혼이 엄청난 어둠의 공포 때문에 기가 죽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라는 그분의 비통한 부르짖음을 들었다. 아버지의 임재가 거두어졌을 때에 그들은 죽음과의 마지막 대쟁투에서 오는 엄청난 슬픔 때문에 탄식하시는 그분을 바라보았다. 땀구멍에서 흘러나온 피땀이 물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
온 하늘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우주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지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온 우주에 생 중계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온 우주 거민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현장들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들은 겟세 마네 동산에서 그 고뇌로 슬퍼하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봅니다.
전능자를 비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일을 경험 하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요?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의 말을 들었습다.
죄를 알지 못하는 천사들과 우주의 거민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죄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죄 덩이가 되는 것을 싫어했을지도 모릅니다.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사람 되신 것만해도 하시지 말아야 되는 일을 하셨을 것이라고 알았을 것이고 그분에게 어떤 고난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죄 있는 지구를 포기하시고 고통을 받지 않으시기를 원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간절한 기도에 주님의 이마에서는 핏방울과 같은 땀이 떨어 집니다.
모세 혈괄이 파열되어서 땀 구멍으로 피가 흘러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었을 때 예수님을 잡으로 온 폭도들에 의하여서 하늘의 왕은 힘 없이 끌려 가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다시 한번 사람으로 오신 하늘 왕의 이런 애걸의 소리가 들립니다.
막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처절한 애걸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할 때 주님의 십자가의 감동이 밀려와서 눈물이 나서 준비할 수가 없어어요, 한참 울다가 말씀을 다시 준비하였습니다.
창조주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렇게 까지 하셔야 하셨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아닙니까?
요셉의 형들은 후에 애굽 총리로 있는 요셉에 의하여 감옥으로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애걸할 때 우리가 모른척 함으로 그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이런 애걸을 할 때 십자가 아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마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자기들의 죄를 위하여 하늘의 왕이 당하시는 고난임을 알지 못하고 조롱을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될까요.
그날 십자가 주변에서 하늘의 왕을 조롱한 사람들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이런 말씀을 줍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그리스도를 막았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로 부터 좇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복음을 생각으로라도 거절하지 말길 소원합니다.
하늘은 이렇게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구원을 우리가 등한히 하면 우리는 그 댓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신령과 진실함으로 믿음의 길을 가시길 축복합니다.
내 생각들 다 버리시고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말씀으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이제 다시 요셉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창 37: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형들이 무엇을 벗겼다고요? 요셉의 옷을 벗겼다.
예수님도 옷이 벗겨 졌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7: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요셉의 옷은 벗겨져서 어떻게 하였다고 합니까?
창 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완전 범죄를 위하여서 요셉을 팔았습니다.
이 내용은 다음에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옷을 찢어서 수 염소를 잡아 그 피에 요셉의 옷을 적시어서 아버지께 보여드리려 가져 갑니다.
예수님의 옷은 벗겨지고 그 옷은 나누어 가져 갔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옷에 대하여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 63:1-3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무슨 내용입니까?
에돔에서 홍의를 입고 오는 자가 누구일까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홍의가 무슨 옷입니까? 붉은 옷
보기에 화려하게 보이는 그 옷에 왜 그렇게 붉은가 라고 뭇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라 합니까?
3절 하단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다
바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모습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까?
형들이 가져간 요셉의 옷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수 염소의 피 다른 말로는 형들의 그 추악한 죄악의 모습이죠?
에돔에서 오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은 무엇으로 더렵혀졌다고 합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악으로 더럽혀 졌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사람으로 오신 하늘 왕 전능자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살라는 자유가 아닙니다.
하늘 백성답게 살라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진정으로 누리는 사람들이 하늘 백성들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작은 예수 들입니다.
그 작은 예수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이고요.
우린 이 장유에서 그런 작은 천국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을 연습하는 삶이고요 그렇게 연습된 사람들이 하늘에 갈 것입니다.
이제 주님 오시는 날은 피로 적신 옷이 아니라 우주의 왕의 자격으로 영광의 옷을 입으시고 오시는 우리의 예수그리스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 우리 모두 작은 예수들로 살다가 기쁨으로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