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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4월 13일
우리는 숙명처럼 가슴이 따뜻하다.
풀벌레
바람소리
수밀도 진한 그리움
바다가 보이는 그 끝에 서면
우리들은 자유롭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완만하고
숨가프다.
덕지 덕지 뿌려 놓은
들꽃무덤 지나서
충만한 세상 보인다.
살아있는 만큼의.
-이재창 시인의 「저물무렵 그리움의 詩·1 – 격포에서」전문 (현대시 1999년 3월호)
*4월13일 오늘은 비서의 날, 1952년 미국에서 시작, 상사가 비서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로 비서에게 식사대접하는 풍습, 4월 셋째주가 비서주간, 비서주간의 수요일이 비서의 날
*토머스 제퍼슨 탄생일: 미국
*1990년부터 2018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었다.
1397년 (조선 태조6)동대문(興仁之門, 보물 1호) 준공, 정면5칸 측면2칸 다포식 2층 목조건물, 옹성 있음, 1869년(고종6) 개축
1409년 [윤]태종 9년, 건원릉(健元陵, 태조 능)에 신도비를 세움
1413년 [음]태종 13년,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의거하여 여러 제사 제도를 정함
1490년 [음]성종 21년, 합천 향교의 토지를 이전 소유처인 월광사(月光寺)로 다시 귀속시킴
1511년 [음]중종 6년, 일본 사신이 화친을 요청함
1516년 [음]중종 11년, 추포(麤布, 거칠게 짠 베) 사용을 금함
1516년 [음]율문감교청(律文勘校廳, 율문 보완과 교정을 위한 임시 기구)을 다시 설치함
1519년 [음]중종 14년, 현량과를 실시하여 김식·정인 등이 등용됨
1592년 [음]선조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남
1597년 [음]선조 30년, 승병장 유정(惟政, 사명당)이 왜적을 강력히 토벌할 것을 상소함
1609년 임해군 피살
--1572년(선조 5년) 8월 14일,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임해군이 여섯살 되던 무렵,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1585년(선조 18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임해군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임해군의 성격이 방탕하고 포악했기 때문이다. 임해군은 왕명을 받고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으기 위해 함경도로 떠났다.
7월 23일,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회령에서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 끝에 풀려났다.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김희철 또한 왜란 중에 전사하였다.
임해군은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만하고 난폭하게 행동하였으며, 심지어 임해군이 부리는 시정잡배와 가노들 또한 오만방자하게 행동하여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거나 사소한 원한이 있는 자를 살해하는 등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대간과 삼사 사헌부가 임해군의 죄를 묻고 강하게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후에도 임해군과 정원군, 순화군은 끊임없는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의 처벌과 추국을 요청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진도에 안치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되었다.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 또한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교동으로 유배된 이듬해에 그를 지키던 수장 이정표가 강제로 독약을 마시게 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임해군의 노비가 증언함으로써 임해군이 목이 졸려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689년 [음]숙종 15년, 정개청(鄭介淸)의 사당을 다시 세우게 함
1693년 [음]숙종 19년, 역노(驛奴)와 역녀(驛女)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역노에 영속하게 함
1694년 [음]숙종 20년, 인현 왕후(仁顯王后, 숙종 비)가 복위됨
1705년 [음]숙종 31년, 최석정(崔錫鼎)이 영의정이 됨
1732년 [음]영조 8년, 부정을 저지른 양성현감(陽城縣監) 김집(金潗)을 파출(罷黜)함
1754년 [음]영조 30년, 영남과 호남의 곡식 5만 석을 통영(統營)으로 옮기게 함
1782년 [음]정조 6년, 사복시(司僕寺)에서 조마법(調馬法)을 정함
1786년 [음]정조 10년, 전국 37만여 곳의 무덤을 보수하고 새로 단장함
1788년 [음]정조 12년, 장용영(壯勇營)의 환무미(換貿米) 수납량을 조정함
1795년 [음]정조 19년, 행궁 보수 물력을 ’화성 행궁 정리 수성곡(華城行宮整理修城穀)’이라는 이름으로 마련하게 함
1800년 [윤]정조 24년, 주자소(鑄字所, 책자 발간소)를 의장고(儀仗庫)로 옮겨 설치함
1826년 [음]순조 26년, 대제학 김조순(金祖淳)이 사직함
1828년 [음]순조 28년, 왕세자가 윤대(輪對)를 함
1833년 [음]순조 33년, 여러 도(道)의 진휼에 필요한 물자를 보태 준 사람들에게 시상함
1838년 [윤]헌종 4년, 《순조실록(純祖實錄)》을 편찬함
1848년 [음]헌종 14년, 《익종보감(翼宗寶鑑)》의 체재를 정함
1865년 [음]경복궁 중건 공사 기공
1874년 살레시오회 창립
1894년 (고종31)한의학자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발간
1903년 대한민국의 종교인 오문환 출생
1905년 군제 개편, 시위대(중앙군)의 1개 혼성 여단으로 감축, 진위대(지방군) 8개 대대로 감축
1906년 최익현 의병 일으킴
1910년 최초의 여성의학박사 박 에스더 세상떠남
1913년 대중음악 작곡가 손목인 출생
1914년 한글학자 주시경 『말의 소리』 간행
1914년 영화감독 하길종 출생 -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上海), 4/11 임시헌장 10개조 발표 (이동녕.이승만.김구.이시형.김규식)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지사 1000여명 모여 대의사(지금의 국회의원) 33명 선출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친일 단체 조선인 거류민회 조직
1936년 소설가 최인훈 출생 -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친 `광장`
--최인훈은 1936년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6·25 때 피란민으로 아수라장을 이룬 원산항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월남했다. 전쟁 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법과 문학의 갈림길에서 4학년 때 중퇴하고 문학을 평생을 업으로 받아들였다.
1958년 장교로 입대해 군 복무 중이던 1959년 ‘GREY 구락부 전말기’로 ‘자유문학’을 통해 데뷔했다. ‘광장’이 발표될 때도 그는 군인 신분이었다. 이후 ‘회색인’(1963),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 등을 발표하고 1970년대 들어서는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 ‘봄이 오면 산에 들에’(1977) 등을 발표하며 연극을 새 장르로 선택했다.
‘광장’이 원고지 600장 분량의 중편소설로 발표된 것은 ‘새벽’지 1960년 10월호에서였다. 6·25 전쟁 후 반공소설류가 이데올로기 문학의 정형처럼 굳어 있던 시절에 발표된 ‘광장’은 문단으로부터 “한국문학 사상 최초로 문단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로 다룬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광장’ 이후 최인훈에게 ‘전후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가 쏟아질 만큼 ‘광장’이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1937년 독립운동가, 만주 독립군 총사령관 김동삼(1878~1937), 경성 감옥에서 옥사
1937년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중 경상도, 전라도 지방을 관할하던 대구대목구에서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가 분리 설정
1946년 북한 토지개혁 실시, 몰수토지 100여만 정보, 무상분배 농가 71만호
1949년 로마교황청 한국정부 승인
1954년 미 국방성, 6·25 전쟁시 미군 사상자수 발표 △전사자 33,629명 기타 사망자 20,617명 부상자 103,284명
1959년 일본-북한 제네바서 재일동포 북송회담 개최
1960년 이승만 대통령, 마산 사건 배후에 공산당 개입 혐의 언명하는 특별 담화
1961년 영화 ‘오발탄’ 개봉
--1959년 한 편의 소설이 유현목의 가슴을 쳤다. 전쟁 후 궁핍하던 한국 사회의 비극적 모습을 가장 리얼하고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 이었다.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절망감에 공감한 유현목은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제작자를 찾아나섰다. 하지만 “주제가 무거워 흥행이 안 될 것”이라며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 최초의 조명기사 김성춘이 사재를 털어 제작비를 대겠다고 나선 덕에 영화는 1959년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태프와 출연진도 최고 개런티로 출연하겠다며 영화 완성에 십시일반 도왔다.
그래도 제작비는 늘 부족해 필름이 생기면 찍고 떨어지면 쉬기를 반복했다.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당시의 사회 현실에 맞게 시나리오를 다시 손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촬영된 영화 ‘오발탄’은 1961년 4월 13일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무대는 북에서 피란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의 해방촌이었다. 영화는 심한 치통에 시달리면서도 박봉 때문에 병원조차 갈 수 없는 월급쟁이 철호와 그 가족을 하나하나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노모는 전쟁이 터지던 날 폭격의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가자, 가자!”를 외쳐댔고, 아내는 영양실조에 만삭이었다. 상이군인 출신의 동생 영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깡패였고 여동생 명숙은 미군들에게 몸을 팔았다.
철호는 이런 현실에서도 아등바등 살아보려 했으나 동생 영호가 은행강도를 하다 경찰에 붙잡혀가고 아내는 아기를 낳다 죽는 등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철호가 어느 날 온갖 고통을 암시하는 충치들을 한꺼번에 뽑아버리고 택시를 잡아탔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횡설수설하자 택시운전사가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군. 자기 갈 곳도 모르는…”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내용상으로만 보면 ‘오발탄’도 다른 궁핍한 시대의 문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에는 작가 이범선이 깔아놓은 복합적인 주제의 복선이 있었고, 영화에는 이를 리얼하게 살린 유현목의 뛰어난 연출이 있었기에 영화는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한 달 후에 일어난 5·16쿠데타는 ‘오발탄’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내용이 너무 어둡고 극중 노모(엄앵란)가 내뱉었던 “가자, 가자!”가 북한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이 상영을 전면 중단시킨 것이다. 상영금지는 27개월이나 계속되다가 미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가 ‘오발탄’의 출품을 요청한 덕에 1963년 8월 23일, 상영금지 딱지를 뗄 수 있었다
1965년 서울시내 대학생 4000여명 굴욕외교반대 데모
1966년 민주사회당, 주비대책위원회 구성
1968년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
--서울고법 형사부가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을 열고 정규명, 정하룡 , 임석훈 등 3명에게는 사형, 조영수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 15명에 대해서는 1심판결을 모두 깨고, 형량을 줄이는 판결을 내렸다.
구 동독의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사건으로 알려진 `동백림사건`은 관련자인 임석진(명지대 조교수.철학박사)씨가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1967년 7월 8일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대학교수를 비롯,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의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공작단에 포섭되어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에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건국사상 최대의 정보사범 사건이었다.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여 구속 107명, 학계-문화계의 저명인사 등 관련자가 194명에 이르렀다.
1970년 KBS 1 TV, 첫 아침 방송 실시
1973년 개정약사법 발효
1974년 북한 인민문화궁전 준공
1977년 한국-수단, 국교수립
1980년 박찬희, 한국프로복싱 사상 첫 5차방어 성공
1982년 노인헌장 제정
1982년 국가안전기획부, 서울·안동에서 25년간 암약해 온 안승륜 일당 등 3개 간첩망 18명을 검거 발표
1983년 문화공보부, 낙동강 하류의 철새 도래지 198만 ㎡를 천연기념물 지정에서 해제
1984년 전국 55개 대학, 학원 민주화 요구하며 시위 농성
1985년 정부, 각종 행사서식에서 본적·본관 기재 삭제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
1986년 이승만 박사 유품중 한성 임시정부선언문 발견
1987년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로 현행 헌법으로 대통령선거 연내 실시, 88년 2월 정권이양 발표
1987년 미 국무성, 개헌논의 중단에 유감 논평
1987년 통일민주당(가칭), 발기인대회 갖고 직선제 개헌 비폭력투쟁 다짐
1987년 4ㆍ13 호헌조치
--전두환 대통령이 전국 방송망을 통해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5공화국 마지막 해인 1987년,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대학가 역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위의 열기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그러나 5공 정권은 민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 시민항쟁에 맞섰다. 당시 경찰은 전두환 정권의 4ㆍ13 호헌조치에 맞서 전국 20개 도시에서 개최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원천봉쇄했고 전국에서 3천8백31명을 연행했다.
그러던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 6월 시민항쟁의 불을 댕겼다. 6월 10일 마침내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은폐 규탄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것이 바로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근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에 참여하지 않던 일반 시민들까지 대거 길거리로 몰려나온 이 시위로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독재정권 연장을 꾀하던 5공 정권으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ㆍ29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의 새마을비리사건과 관련 국가원로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명예총재직 공직 사퇴
1988년 일해재단-초호화 이름바꿔-세종연구소로
1988년 13대 총선 입후보자 등록 마감
1988년 재무부, IBRD출자순위 30위로 상승했다고 발표
1989년 공안합수부, 문익환목사·유원호씨 김포공항 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 혐의로 구속 수사
1989년 한-미 당국 한미행정협정을 개정
1989년 동해시재선거 후보매수사건 발생
1990년 KBS노조, 서기원사장 퇴진-방송민주화요구 파업
1990년 박철언 정무장관 사표 제출
1990년 부동산 2개월내 등기의무화 등, 부동산투기 억제책 발표
199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1주년 기념식이 광복후 처음으로 정부주관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려.
1990년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 연합 추진 위원회 (민연추) 결성.
1992년 스위스 주르날 드 주네브紙, 북한에는 현재 11만5000∼15만명의 정치범이 강제노역소에 있다고 보도
1992년 대법원,혼인무효소송을 제기, 승소했을 경우 혼인기록이 남아있는 호적대신 새로운 호적을 작성, 발급.
1993년 정부,행정쇄신방안을 심의해 대통령에게 건의할 대통령직속의 행정쇄신위원회를 발족
1993년 경원전문대 박춘성 교수, 90학년도 입시에서 250여명이 답안지 조작을 통해 부정입학 폭로.
1994년 與ㆍ野, 상무대 이전사업 정치자금 의혹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국정조사권을 발동키로 합의
1995년 외무부, 한국과 이집트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키로 했다고 발표
1995년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발족, 컴퓨터통신과 음성정보서비스 내용심의 시작
1995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베이징에서 정부정책 비판 발언
1996년 자민련 박규식 의원 선거법위반, 구속
1997년 국제의회연맹(IPU) 서울총회 개최
1997년 한국은행, 96년 외국인투자는 22억9000만 달러, 해외투자는 41억3000만달러 투자수지적자 밝혀
1998년 정부,국민회의,자민련, 외국인투자 및 외자 도입에 관한 법률 개정, 국내기업 인수.합병 무제한허용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총선거,
--투표율 57.2% 역대 최저(12대 84.6% 13대 75.8% 14대 71.9% 15대 63.9%) 한나라당133석 민주당115석 자민련17석 기타8석, 국회의원 정수의 41%인 112명이 초선, 시민단체들이 총선시민연대 결성해 지역감정조장과 부패 무능 정치인 대상으로 낙천낙선운동을 벌인 결과 59명(낙선대상자86명의 69%) 낙선
2000년 16대 총선 출구조사 발표와 실제 개표결과와의 큰 차이로 방송사 망신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여론조사 기관들의 투표자 여론조사 실패가 이번 16대 총선에서도 되풀이 됐다. MBC와 KBS, SBS는 2000년 4월 13일 저녁 6시 시보와 함께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 민주당이 원내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MBC-갤럽은 민주당이 127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고 KBS-SBS와 소프레스 등 4개 조사기관은 민주당이 132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 개표결과는 한나라당이 133석, 민주당이 115석을 확보해 한나라당이 제1당이 되었다. 실망한 유권자들의 항의-비난전화가 각 언론사에 빗발쳤다. 방송사와 여론조사 기관은 1996년에도 개표결과와 무려 39곳이나 틀린 출구조사를 발표해 물의를 빚은 바 있어 `전과 2범`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2002년 원로가수 현인씨 별세
2004년 주유소 `공짜 화장지`서 피부염 유발 유해물질 검출
2004년 서울 서소문로 입구 태평로에 첫 횡단보도 신설
2005년 동해에서 황만호의 월북 사건이 발생하다. (~ 2005년 4월 19일)
2005년 프로 야구 선수 장명부 작고
2007년 외교통상부·국방부·환경부, 미군 기지 14곳의 반환 절차 완료 발표
2009년 개인 프리워크아웃(사전채무조정) 시행, 1∼3개월미만 연체자들의 연체이자면제, 원금상환연기, 이자상환기간10년~20년까지 연장, 연체정보삭제, 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전락위기 모면
2012년 북한 인공위성 광명성3호 실은 은하3호 발사 135초만에 공중폭발 “은박지에 싸인 식기세척기”-미국정부 대변인의 비유
2014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 철회-반발 전국 확산
2016년 오늘 제20대 국회의원총선거, 16년만의 여소야대, 더불어민주당123석 새누리당122석 국민의당38석 정의당6석 무소속11석
2017년 대법원 김성수 전 부통령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
2019년 임실 치즈산업 일으킨 지정환 신부(벨기에 출신) 선종 88세
2020년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 세월호참사 보도행태에 대해 6년만에 사과
2022년 자동차 등록대수 2천500만대 돌파...국민 2명당 1명 자동차 보유
548년 베트남의 이남 황제(李南帝) 작고
814년 불가르족의 칸 크룸 작고
1111년 헨리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오르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1594년 낭트칙령 공포
--앙리 4세가 낭트에서 프랑스의 신교도에게 조건부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 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15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이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했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때부터 신교도도 비로소 공직을 가질 권리가 생기고, 예배와 관혼 상제의 집행, 유언의 등기 등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파리를 제외하고 어떤 지역에서든 공동예배가 가능해졌고 신교도의 최고회의·목사회·서임권 등도 공인됐다. 또한 칙령은 비밀조항으로 백 수십 곳의 도시에 신교도의 자치특권을 인정했다. 그로 인해 그 도시들이 신교도의 무장지역이 되어 반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신교 측은 지역을 제한받은 것이 불만이었고 가톨릭은 신교를 인정한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앙리 4세가 일생동안 네 번의 개종과 30여 차례의 암살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힘을 쏟은 결과 종교전쟁은 서서히 끝이 나고 프랑스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해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1685년 10월 18일,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는 결국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의 권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서 프랑스에 많이 살던 약100만 명의 신교도 중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근면한 상인·기사·공예인·군인이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보아야 했다.
1598년 프랑스왕 앙리4세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와 사상의 자유 인정한 낭트칙령 선포, 이에 따라 위그노 전쟁 끝나고 가톨릭과 개신교 화합 도모
1695년 프랑스 우화작가 라 퐁텐 사망
--라 퐁텐은 상파뉴 지방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26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결혼을 시켰으나 그는 35세 때 홀연히 가정을 버리고 단신으로 파리로 올라와버렸다. 라 퐁텐에게 명예나 지위, 이해 타산, 남의 평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어린애같은 청순한 마음과 자유로운 정신은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 품 파는 일 없이 일생 동안 당시의 유명한 고관과 귀부인들의 보호와 총애 밑에 살았다.
우화 제1집을 토해낸 것도 불혹(不惑)을 훨씬 지난 47세에 이르러서였다. 그 후 다시 10년에 걸쳐 제2집이, 그리고 그가 죽기 전 1년 전에 마지막 편인 제3집이 나왔다.
1742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초연
1743년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출생
1808년 전화기의 최초 발명가 안토니오 메우치 출생
1838년 일본 정치가 고토 쇼지로 출생 -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1849년 헝가리가 공화국이 되다.
1883년 세묜 부됸니, 소련의 군인 출생
1885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미학자 게오르크 루카치 출생
1901년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출생
1906년 아일랜드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 출생
1909년 하싯트 터키황제, 청년당원 학살
1909년 폴란드계 미국 수학자 스타니스와프 울람 출생
1919년 영국군 인도 암리차르에서 집회중인 인도인 무차별학살 사망400여명 부상1,200여명
1924년 미국의 영화감독 스탠리 도넌 출생
1934년 미국 전쟁채무 불이행국에 융자정지 결정
193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사망
1940년 프랑스의 영화 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 블라디미르 코스마 출생
1941년 일-소 중립조약 체결
1941년 베오그라드, 독일군에게 함락
1943년 카틴 숲 학살 사건 현장 발견
--독일이 러시아 남부 스몰렌스크의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들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것을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은 소련에 의한 폴란드인 학살의 증거라고 발표했지만, 소련은 나치에 의한 폴란드인 포로 학살이라고 반박했다.
1990년 당시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Gorbachev)는 카틴 사건에 대한 소련의 잘못을 인정했고, 이후 공개된 당시 문서를 통해 1939년 폴란드로 쳐들어간 소련이 카틴 숲 근처의 수용소에서 학살한 2만1768명의 명단이 알려졌다. 당시 스탈린은 폴란드가 독립국을 만들지 못하도록 폴란드의 엘리트들의 처형을 지시하였다.
2010년 4월 10일 키틴 사건 70주년 기념식 방문차 러시아로 가던 중 레흐 카친스키(Kaczynski) 폴란드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이후 러시아와 폴란드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0년 4월 28일 사건의 책임이 구소련에 있음을 증명하는 비밀 서신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1948년 루마니아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1966년 사이공 공항 베트콩에 피습
1970년 아폴로 13호에서 산소탱크가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다
1975년 팔레스타인 사람이 탑승한 버스 피격 사망 30여명, 레바논내전 시작
1977년 아르헨티나의 5월광장어머니회 목요집회 시작, 대통령궁앞 5월광장에서 실종된 자식 돌려달라며 하얀 머릿수건 두르고 묵묵히 원을 그리며 걷는 침묵시위, 지금도 열림, 5월광장어머니회=1976년부터 1983년까지 지속된 군사정부에 의해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만든 모임
1983년 미국 시카고시장 선거에서 최초로 흑인 당선
1991년 지중해 최악의 원유 유출사고 발생
--키프로스 선적 유조선 헤이븐호(10만9천톤)가 제노바시 근해에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켜 지중해 사상최악의 원유 유출사고가 발생했다.
헤이븐호는 전날 이탈리아 앞바다에서의 화재로 견인 중이었다. 전날의 사고로 이미 3만톤의 원유가 유출된 가운데 이날 폭발사고로 또 다시 10만톤의 원유가 바다로 흘러 극심한 환경오염 사태를 빚었다.
유출원유는 이탈리아 최대 휴양지인 제노바만 일대 10여㎢에 이르는 지역에 넓게 퍼졌다. 이와 관련, 기오르기오 루폴로 이탈리아 환경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불행한 일이지만 이번 위기는 지중해 최악의 생태계 재난`이라고 말했다. 한편 유럽 위원회를 비롯한 이탈리아 정부는 긴급방재 활동을 펼쳤으나 폭발과 함께 불이 붙은 원유가 수백㎡ 해상에 넓게 펴져 사고배에 접근을 못해 진화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7년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세계 메이저골프대회에서 첫 승)
1983년 레프첸코 소련KGB 소령(미국 망명) KGB협력일본인 명단 공개
1986년 교황 사상 처음 유대교회 방문
1998년 복제양 돌리, 새끼양 보니 출산
1998년 미국 대형은행 네이션스뱅크와 뱅크아메리카 합병
1999년 안락사를 도와준 의사 잭 케보키언, 2급 살인죄로 10~25년 징역형 선고
--루게릭병 말기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준 잭 케보키언 박사(70)에게 2급 살인죄가 적용돼 10∼25년 징역형이 선고됐다. 미국 미시간주 오클랜드 순회법원 제시카 쿠퍼 판사는 1999년 4월 13일 “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글을 쓰거나 강의하고, 언론을 통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지만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며 검찰 구형대로 이같이 판결했다.
쿠퍼 판사는 환자에게 통제된 약물을 투여한 혐의도 인정, 3∼7년의 징역형을 추가 선고했다. 판결문이 낭독되는 순간 케보키언 박사는 전혀 동요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곧 수갑이 채워진 채 법정을 나섰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케보키언 박사는 최근 9년간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불치병 환자 130여명의 안락사를 도와주었다고 시인해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인물. 1998년 9월 17일 미시간주에서 루게릭병 환자 토머스 유크(52)에게 치사량의 약물을 투여,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또 이 장면을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 며칠후 CBS방송의 ‘60분’ 프로를 통해 방영토록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같은 혐의로 네 차례 법정에 섰으나 시한부 환자가 고통에 울부짖는 비디오 상영과 “안락사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라는 환자 유족들의 증언을 통해 매번 무죄 또는 미결정 심리 판결로 풀려났다. 그러나 결국 지난달 26일 배심원들은 케보키언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다.
2001년 남아공 축구장 대형 참사로 43명 사망
2003년 영국 폴라 래드클리프 런던마라톤에서 여자마라톤 세계최고기록(2시간15분25초) 세움
2003년 인간 ‘게놈 지도’ 완성
--인간 게놈 지도가 100% 완성됐다. 이로써 단백질로 이뤄진 기나긴 ‘소설’을 해독하는 생명의 ‘알파벳’을 인류가 완전히 손에 넣게 됐다.
이 알파벳들이 어떤 조합으로 어떤 의미를 만드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인간의 신비를 규명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전체 인류의 5%가 윌슨병, 고셔병, 다운증후군 등 유전자 결함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고통 받았었다. 그러나 완성된 게놈 지도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유전자 치료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이번에 게놈지도를 완성한 연구진은 새로 해독된 20번째 염색체의 염기서열이 당뇨병, 백혈병, 어린이 습진 같은 질병과 연관된 유전자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동안의 연구로 찾아낸 인간의 유전자는 모두 2만5000~4만 여개로 이 유전자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그 단백질이 체내에서 서로 상호 작용하여 인체의 신비한 생체 작용을 이뤄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은 성인병·암과 같이 유전병 외의 다른 질병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2008년 미국의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 작고
2008년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주 총독인 쿠엔틴 브라이스가 마이클 제프리의 뒤를 이어 최초의 여성 총독으로 임명
2009년 폴란드 서부 카미엔포모르스키에 있는 노숙자 보호소에서 화재가 발생, 최소 21명 이상이 사망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서 서비스팩이 설치 되지않은 윈도우 비스타에 대한 지원 중단
2011년 이집트의 전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와 그의 두 아들이 이집트 검찰에 구속
2012년 세르비아에서 세잔의 그림을 훔친 강도단이 검거되다
2012년 美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의 차기 개최국을 한국으로 지정, 참가국 만장일치로 서울 개최가 확정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보안군과 무장 친러 독립세력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사태로 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
2015년 노벨상(1999년) 받은 독일작가 귄터 그라스 세상떠남
--“작가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역사가는 승자의 이야기를 쓰지만 작가는 패자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양철북』 “귄터 그라스의 역사가 독일의 역사이고 독일의 역사가 그라스의 역사이다.”-「슈피겔」
2015년 오늘 남미의 양심으로 불린 우루과이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세상떠남 『시간의 목소리』 『불의 기억』
2017년 인터넷과 PC의 창안자인 미국심리학자 로버트 테일러 세상떠남(85세)
2019년 미국의 신경과학자 폴 그린가드 작고
2021년 일본정부, 후쿠시마 제1원전에 보관중인 방사성물질오염수 125만톤 바다방류 결정
2021년 미, 올 회계연도 전반기 재정적자 2천조원 육박...역대 최고
2022년 프랑스의 영화배우 미셀 부케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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