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전 아는 지인을 서울 동묘역 인근에서 만났다. 지인에게 작은 추석선물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동묘역 인근은 헌책방, 중고 전자기기, 만물상, 건강원, 낚시점 등 중고품 시장이다. 그런 벼룩시장 분위기에 맞게 나이든 보행자가 많았다. 바로 역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의 세련된 손님들과 대조적이었다. 헌책방에 진열된 책을 보니 사실 살만한 책도 없었다. 이발소 간판에는 커트 5,000원. 베테랑 면도사가 있다고 붙여놨다. 요즘 면도사가 있는 이발소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가능한 가격인지 모르지만 ‘우족탕 3,900원’이라는 현수막도 보였다. 중고시장답게 모든 가격이 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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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찌개집 외관
오늘 지인과 만나기로 한 식당은 상호도 없이 그냥 ‘김치찌개’ 간판만 붙어있다. 더욱이 전화도 없다. 그래서 필자는 동묘역 3번 출구에서 지인을 만나 함께 걸었다. 동행인은 최근 인턴으로 입사한 대학생으로 역시 외식산업에 종사할 젊은 친구다. 식당에 도착하니 나이든 사람 셋이 찌개에 소주로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식당은 아주머니 혼자서 운영하는데, 메뉴는 묵은지 김치찌개와 고추장불고기 딱 두 가지다. 우리는 고추장불고기와 묵은지 김치찌개를 각 2인분씩 주문했지만, 아주머니가 한창 점심때라 바쁘니 김치찌개로만 먹으라고 했다. 여기서는 손님이 왕이 아니고 주인이 왕이다. 어쩔 수 없이 김치찌개로 주문했다.
사실 필자는 인턴사원에게 번철(燔鐵)에 굽는 고추장불고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인턴사원은 고등학교 때 조리 관련 학교를 다녀 요리를 어느 정도 안다. 그러나 번철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음에 한가할 때 다시 와서 번철에 굽는 고추장불고기를 한 번 보여줄 생각이다. 번철은 식당에서 ‘노스텔지어 콘셉트’에 활용할 수 있는 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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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찌개
'쌍팔년도' 분위기 그대로
김치와 돼지고기가 통째로 들어간 냄비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 위 가스에 올렸다. 김치는 묵은지로 역시 통으로 넣었다. 돼지고기는 유독 비계가 많았다. 앞에서 언급한 옛날 정육점 돼지고기 이상의 비계 덩어리였다. 반찬은 쌈채와 겉절이 딱 두 가지다. 반찬은 단출하지만 쌈채를 주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쌈채용 쌈장은 직접 담근 집된장으로 만들었다. 된장 특유의 냄새가 좀 났지만 제조용 된장보다는 훨씬 낫다. 밥에 보리가 많이 들어갔다. 아크릴 간판, 돼지비계, 번철, 냄비, 집된장, 보리밥 등 마치 70~80년대 식당으로 회귀한 느낌이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묵은지는 1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필자는 묵은지보다 숙성지를 좋아한다. 맛도 맛이지만 2~3개월 숙성된 김치가 발효나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묵은지는 좀 깊은 맛이 있다. 고기는 제주도산 돼지고기로 좀 비계가 과도할 정도로 많다. 돼지고기 자체는 고소하고 맛있다.
깔끔 떠는 여성들에게 이 식당은 절대 비추다. 동행한 지인이 털털해서 그렇지 만일 좀 까다로운 성격이었다면 속으로 좀 섭섭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식당 김치찌개는 묘한 매력이 있다. 파를 많이 넣어서인지 맛이 진하면서도 당기는 맛이 있다. 김치의 묵힌 맛이 은근히 중독성도 있다. 동행한 대학생 인턴은 양 많기로 유명한 탐식가(貪食家)이고 성격도 원만하다. 신세대지만 역시 이 식당 김치찌개가 나름 괜찮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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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과 돼지고기와 쌈
돼지고기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서 먹었다. 기름기가 많아서인지 오히려 더 맛있기는 했다. 아내가 이것을 보면 한소리 했을 것이다. 고기 먹지 말라고 늘 잔소리인데 그것도 순 비계이니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열심히 쌈채를 쌈장을 곁들여서 먹었다.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하니. 단 열이 많은 필자는 당귀(當歸)는 피했다.
우리는 소주도 한 병 주문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딱 한 병만 된다고 했다. 주당이 아닌 필자는 낮술은 그렇게 안 마신다. 걱정 마시라. 지인이 소주보다는 맥주가 낫다고 맥주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딱 부러지게 노우(No!)다. 주인아주머니 혼자 하는 가게라 업소 편의성을 앞세운다. 하긴 인터넷 지도 등록도 전화도 없이 운영하는 아날로그 식당이다. 소주와 밥과 돼지고기 건더기를 거의 다 먹고 나서도 김치찌개 국물에 숟가락이 간다. 국물도 역시 끌리는 맛이 있다. 가게는 무척 허름했지만 우리 같이 털털한 중년 2인과 청년 1인 입맛에는 맞았다. 그리고 간만에 먹은 돼지비계도 솔직히 맛있었다.
지출 (3인 기준) 묵은지찌개 6000원x 3인+ 소주 3000원= 2만 1000원
<김치찌개> 서울 종로구 숭인동 234-32 전화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