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 속 부처님 이야기] 3. 부동주 개념을 통한 공존 ②
견해차 있다고 상대방을 부정해선 안돼
부동주, 상대 인정 통해 공존의 길 제시
화장실의 물 사용을 둘러싸고 시작된 꼬삼비 스님들 간의 대립은 부처님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 결과,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한쪽 그룹이 경계 밖으로 나가 개별적으로 포살(布薩)을 하고 승단회의를 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한 절에서 한 솥밥을 먹던 스님들 간에 싸움이 벌어져 둘로 쪼개졌는데, 화합의 노력은커녕 함께 행동하지 않겠다며 한쪽 그룹이 독립해서 나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 스님으로부터 이 사태를 전해들은 부처님의 대답은 기묘하다. 그것은 만약 그들이 따로 따로 포살을 하고 승단회의를 한다 하더라도 만약 그 회의진행 방식에 있어 문제가 없다면,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에 따라 회의를 진행한다면, 그 승단회의는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그들이 서로 부동주(不同住)라는 점을 거론하신다. 알듯 모를 듯, 참으로 알쏭달쏭한 말씀이다.
양쪽이 실행한 포살 및 승단회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 두 그룹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역적인 문제 등과 같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나뉜 것도 아니고, 싸우고 싸우다 한쪽이 화합 불가능을 외치며 나와 버린 격인데,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상식적으로 여기서 기대해 볼 만한 가르침은 ‘그런 행동은 옳지 않느니라. 서로 화해하고 함께 승단회의를 실행해라’가 아닐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부동주란 희한한 이름으로 이들의 행동을 여법한 것으로 인정해주고 계신 것이다. 도대체 부동주란 무엇일까?
부동주란 『사분율』등의 한역율에서 사용되는 역어인데, 빨리어로는 나나상와사까라고 한다. 나나+상와사까이다. 상와사까란 동주(同住)라는 의미로 스님들이 함께 살며 포살이나 승단회의를 공동으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나란 다르다는 의미이다. 즉, 나나상와사까란 자신들과 다른 동주생활을 하는 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따로 행동하게 된 꼬삼비의 스님들을 서로 나나상와사까, 즉 부동주라는 이름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구분을 지어 이들 서로의 독립을 용인하고, 나아가 이들이 설사 의견의 차이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승단을 운영하는 한, 불교승려로서의 그들의 존재는 부정될 수 없음을 설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인간의 삶은 정해진 규칙대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예기치도 못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게다가 그 내용 또한 다양하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보는 시각에 따라 정반대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두 다 법으로 정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의견이 대립할 경우, 서로 화합하고 이해하고 양보하라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디 이성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인가.
제3자가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둘은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특성이다. 그리고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의 인간의 독단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꼬삼비건도」에 등장하는 부동주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리라.
이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들어준다고 문제가 본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화합하라고 할 수도 없다. 이미 그 선은 넘어버린 것이다. 이때 피해야 할 상황은 극단적인 서로의 부정이다. 서로에 대한 분노가 도를 넘어, 서로의 존재 자체, 다시 말해 불교승려, 내지 인간으로서의 부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부동주의 개념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갖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그들과 공존하는 길을 담은 놀랄 만한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여유 있는 태도가 실질적으로 어떤 결과를 불러 오게 되는지,「꼬삼비건도」의 이어지는 이야기가 보여준다.
이자랑
(도쿄대 박사)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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