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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로 성당 - 납북 콜리어 신부 살신성인 기념 성당 |
강원도 춘천시 소양로 2가 78-1
강원도 춘천시 모수물길22번길 26
광복 무렵 죽림동 본당 관할이었던 소양로 지역의 신자수가 나날이 늘어나자 사목적 차원에서 본당 설립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그래서 1950년 1월 소양로 본당 설립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콜리어(Anthony Collier, 고高)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 신자 수는 약 250명이었고, 발산 공소와 금산 공소가 소양로 본당 관할로 편입되었다. 춘천교구 두 번째의 성당이었다.
주임 신부의 납북과 살신성인의 순교
그러나 그해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일어나던 6월 25일은 주일이었고, 콜리어 안토니오 신부는 본당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교우들과 저녁 기도를 바치고, 그 곳에 머물렀다. 적군이 코앞에 와 있었지만 고 신부는 6월 26일에도 미사를 봉헌했고,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우선 성체를 옮겨 놓았다. 폭격이 심해지자 방공호로 대피한 후, 콜리어 신부는 함께 있던 복사와 신자들을 안전하게 피신하도록 권고하고, 자신은 성당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전황이 나빠지자 6월 27일 오후 고 신부는 복사이자 교리교사였던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죽림동 성당으로 가던 중 우체국 근처 로터리 부근에서 인민군의 검문을 받았다
인민군이 콜리어 신부에게 스파이냐고 묻자 신부는 가톨릭 신부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고, 둘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인민군 장교는 신부의 주머니를 수색하여 시계, 묵주, 돈과 개인 소지품을 다 가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즉시 밧줄에 묶여 소양강변 부근(또는 공지천 방향)으로 끌려갔는데, 도중에 인민군은 콜리어 신부를 먼저 쏘고 다시 두 발을 더 쏘았다. 총을 맞고 신부는 그 자리에서 선종하였다. 김 가브리엘은 신부가 총을 맞으면서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에 목과 어깨에 심한 총상만 입고 살아났다.
살아난 김 가브리엘의 증언에 의하면 함께 밧줄에 묶여 공지천변으로 끌려가던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인민군 병사는 경고 한마디 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1950년 6월 27일에 순교한 고 신부의 시신은 6월 29일 교우와 동네 사람들이 총살당한 그 자리에 묻었다.
콜리어 신부의 순교 이후 한국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소양로 본당에는 신부가 파견되지 못했다. 따라서 성당도 없었다. 그 후 휴전이 되면서 1954년 8월에서야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로 있던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원주교구 용소막 성당 참조)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숙원이던 성당의 신축
콜리어 신부와 함께 납북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퀸란(Thomas F. Quinlan, 具仁蘭) 토마스 신부는 귀환 후 춘천교구장에 서임되자 한국 전쟁으로 순교한 사제들을 기념하기 그들이 사목했던 세 곳(콜리어 안토니오 신부의 소양로 성당, 진 야고보 신부의 삼척 성내동 성당, 라 파트리치오 신부의 묵호 성당에 기념 성전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1956년 4월에 3대 주임 버클리(J. Buckley, 부夫) 야고보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해 안토니오 신부 가족이 보내온 950파운드를 포함하여 여러 은인과 교우들로부터 모은 25,000불(한화 1,500만환)으로 그해 9월, 6개월 만에 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실로 소양로 본당이 설립된 지 7년 만이었다.
성당 건축을 진두지휘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버클리 신부는 고딕 성당을 주로 짓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했다. 버클리 신부가 당시 유럽에서조차 드물었던 반원형 평면 양식을 한국에서 처음 시도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버클리 신부가 1953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선포된 성모 성년 때 로마 성지 순례를 하는 중에, 현 소양로 성당과 비슷한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며 선교지에 돌아가 성당 지을 기회가 생기면 꼭 이와 같은 성당을 짓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소양로 성당의 의미와 중요성
먼저 건축적 가치이다. 소양로 성당은 그 역사성과 건축적 의미가 높이 평가되어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근대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소양로 성당을 정밀 실사한 문화재위원들은 소양로 성당의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하게 혼합된 건축기법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아치형 버팀벽, 천정 몰딩 등은 교회건축에서 흔히 사용되는 고전적 기법이다. 반대로 외형을 반원형 평면으로 하고, 실내외 의장과 제단 주변을 소박하게 처리한 점은 현대 건축이 추구하는 가치이다. 거기다 또 원형창 유리화를 제대 십자가 조형과 일치시키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점이 문화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번째는 목자의 순교 정신이 깃든 성당이다. 춘천교구는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현재 춘천교구에서는 콜리어 안토니오 신부의 순교지 확인과 발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여러 구술과 기록에 의해 정확한 위치를 찾는 중이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대상자인 콜리오 고 안토니오 신부의 최후 사목지인 소양로 성당과 향후 밝혀지게 될 순교 터에 많은 이들의 순례가 이어진다면 교구의 성지로 선포될 수 있는 중요한 신앙의 터가 될 것이다.
죽림동 성당에서 소양로 성당까지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약 10분 정도다.
주차장에 내리니 큰 건물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바트리시오 교육관이다. 성 바트리시오는 소양로 성당의 주보 성인이다. 그리고 그 앞에 옛 건물이 더 있는데 수녀원이다.
여기서 계단을 오르면 바로 성당 구내로 가지만 정작 성당 정문은 다른 편에 있다. 계단 옆 성당으로 오르는 담 밑에는 성모자상이 있다.
소양로 성당을 위에서 보면 원을 반 뚝 잘라 놓은 반달형이다.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교우석을 부채꼴로 배열하고, 원주면 중앙에 현관과 고해소, 좌우 끝단에 제의실과 유아실을 덧붙인 형태이다. 제대를 중심으로 교우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어, 신자들 모두가 제대와 사제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전례에 임할 수 있다.
성전 내부 역시 중앙의 둥근 제단을 중심으로 부채꼴 반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대 후면에 아름다운 원형 유리화 아래에 십자고상이 있고 그 좌우로 길다란 아치식 유리화가 있다. 그 옆으로 성모상과 예수성심상이 좌우 벽에 모셔져 있다
밖에 나오면 성당 앞마당에 사제관 · 사무실이 있다. 그리고 사무실 앞 복도에는 역대 신부님 사진이 걸렸다. 사제관 · 사무실 건물 앞에는 바트리시오 교육관과 이어져 있는데 그 앞에는 콜리오 안토니오 신부의 사진과 순교 상황이 게시되어 있다.
그리고 뜰에는 오래된 종과 성모동산이 있다. 이 종에는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이 종은 1957년7월에 서울에서 제작되었으며 원래의 자리는 한옥 성당이 있던 아랫마당 주차장 입구라고 한다. 지금은 종탑의 위치를 아파트가 들어서는 주변 상황을 고려하여 적당한 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벌써 오후 1시 반이 훌쩍 지났다. 춘천 시내 성지를 다 순례한 셈이다. 이제 시장기가 엄습한다. 겟세마니 피정의 집을 향하는 중 식당 하나를 찾아 들어갔더니 메뉴는 춘천 하면 생각나는 닭갈비, 그리고 메밀 막국수이다. 다 맛보기 위해서 막국수는 소짜 둘을 시키고 닭갈비는 2인분을 시켰다.(닭갈비는 2이상 주문해야 함) 세 사람이 4인분을 시킨 셈이다. 거기다 지역 막걸리 한 병을 곁들여 배부르도록 먹고 다시 출발. 1시간 남짓 달려 오후 3시40분 경 인제군에 있는 겟세마니 피정의 집에 도착.
겟세마니 피정의 집 - 신앙의 산 증인 조선희 필립보 신부 |
강원도 인제군 빙어마을길 196 (033)461-4243
강원 인제군의 소양강변에 위치한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1991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조선희 필립보 크로스비(Philip J. Crosbie) 신부가 설립하였다.
조선희 신부는 1915년에 호주에서 태어나 1939년에 수품 후, 1940년에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58년 동안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해방 전 이미 일제에 의한 강제 구금과 추방을 경험했던 조 신부는, 홍천 본당 주임 신부로 재직하던 중,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피신하지 않고 교우들과 성당을 지키다가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
‘죽음의 행진’과 3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수많은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조 신부는, 주님의 은총으로 생환하여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변함없이 선교사로 신앙을 전하며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헌신하였다,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웃에게 모자람 없는 참사랑을 실천했다.
일선 사목에서 물러난 뒤에는 1991년 오랫동안 준비하고 계획했던 평화와 보속을 위한 기도의 집을 남북 경계의 38도선 위에 건립하여 세계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생활하였다. 1998년 11월, 노령과 지병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신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제 영혼의 반은 한국에 놔두고 갑니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본국 호주로 돌아가 2005년 3월 24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평화와 보속을 위한 기도의 집은 1996년 겟세마니 피정의 집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오후 3시 40분쯤 겟세마니 피정의 집 도착. 입구부터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안내 게시판에는 겟세마니 피정의 집의 약사와 순례지 안내도가 있다. 특이한 것은 순례지 장소마다 바칠 고유한 기도문이 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를 참고하여 동선을 정했는데 대체로 번호 순으로 순례했다.
순례지 약사를 보니 조 신부는 북한에 억류되었던 기간 포로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수도자와 사제, 평신도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기록은 2003년에 기나긴 겨울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는 몇 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갈릴레아 피정터로 가는 길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석상이 있다. 갈릴레아 피정터는 겟세마니 피정의 집 뒤편 호숫가 숲 속에 있는데 이 호수를 갈릴레아 호수로 보는 것이다.
쉼터 주변에는 진복팔단이 게시되었다.
“예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밤새껏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말을 거셨다. 그리고 배의 오른쪽에 그물을 쳐라고 하시자 그대로 했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올릴 수도 없었다.
이 표징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양떼를 잘 돌보아라고 하시며 교회를 맡기시어 이렇게 오늘날까지 이어온 것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호숫가를 따라난 길이 평화의 기도 순례길이고, 오른쪽으로 난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평화의 기도 순례길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비는 기도문의 구절들이 줄줄이 서 있다.
평화를 비는 기도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기도길이나 십자가의 길은 입구에서 시작하여 여기가 마지막이다. 십자가의 길은 마지막 15처가 부활하신 예수이다.
부활하신 예수상의 네 인물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과 왼쪽의 성모님, 그리고 오른쪽은 베드로와 요한이다. 상 뒤의 두 개의 회색 돌은 무덤을 열고 부활하시 예수님을 상징한다. 이는 싱가포르 한인 천주교회 교우들이 봉헌했으며 작가는 김 안젤모 수녀인데 1915년에 조성했다.
다시 돌아 나오면 평화의 기도길과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곳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화의 종을 보며 순례를 마쳤다. 공사 중이라서인지 내부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다시 돌아 벌써 오후 4시가 훌쩍 넘었다. 실제 오늘 예정됐던 일정은 다 했다. 내일 일정인 홍천 성당과 풍수원 성당을 가기 위해 숙소지역인 홍천을 향했다.
겟세마니 피정의 집을 떠나 홍천에 도착하니 이미 6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다. 예상 이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직 숙소를 찾아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일단 홍천 성당에 갔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성당은 약간 높은 지역에 있는데 길은 잘 나 있다.
홍천 성당 -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물의 전형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105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마지기로 54
현 홍천 성당에서 12㎞ 떨어진 송정리는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터를 일구고 산 옹기촌으로 유명했다. 관련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교우촌에 공소가 설립된 시기는 1902-1903년 경이라고 추정된다. 송정 공소는 처음에는 풍수원 성당 관할이었다가 1920년 곰실 공소가 승격하여 풍수원 성당에서 분리되어 나간 이후는 곰실 성당(현 죽림동 주교좌 성당) 관할로 변경되었다.
3년 후 1923년 6월, 송정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2대 주임 김경민(金慶旻) 루도비코 신부는 송정리가 홍천 읍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후 교세 확장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현 성당 터인 홍천군 희망리에 부지를 매입해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홍천 성당이다. 이는 마치 곰실 성당이 미래의 발전을 위해 춘천 외곽에서 춘천 시내로 옮겨 오늘날 죽림동 주교좌 성당이 된 것과 같은 방식이다.
비록 성당을 넓은 곳으로 옮겨가면 자신의 본당은 다시 공소로 격하될 것은 뻔하지만 본당의 발전을 위해 불편과 아픔을 감수하는 생각은 참으로 훌륭하다. 지역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오늘날 같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경주 문무대왕면에 한수원 본사가 들어섰지만 경주 발전에 별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실제 홍천 시내 본당 이전은 3대 주임 심재덕(沈載德) 마르코 신부 재임기인 1936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1939년 강원도 지역 사목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로 위임되면서 이후는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한국 전쟁이 종료될 즈음 9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동오(崔東五) 아타나시오 신부는 1953년 9월 전쟁으로 파괴된 목조 성당을 재건하였으며, 이듬해부터는 여러 가지 재정적 · 물질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 성당의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 전쟁 중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경험하고 본국인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되었던 8대 주임 크로스비(P. Crosbie, 조선희) 필립보 신부는 1954년 8월 재입국하여 10대 주임으로 재부임하여 성당 신축 공사를 이어 나갔으며 사제관 신축 공사도 병행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1955년에 완공을 하였다.
1955년 석조 성당이 완공된 뒤 옛 목조 성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면서 신자들의 행사 장소뿐 아니라 홍천 주민들에게 유일한 문화 공간 역할까지 했다.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신자들이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성탄 연극을 공연하면 주민들이 모두 몰려와 관람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빛바랜 공연 사진들이 교육관 내 유물 전시관에 걸려 있다. 신자와 읍내 주민들에게 크리스마스 겨울밤의 추억을 남겨준 목조 건물은 1978년에 철거되었다.
11대 주임 이후 부임한 주임신부들은 나름대로 본당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85년 10월에는 교육관 완공, 1989년 4월에는 본당 묘지 확장공사 시행, 1992년 12월에는 사제관 봉헌, 노인 복지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94년에는 양로원인 안나의 집과 요아킴의 집을 개원하였다.
다행히 문을 닫지 않은 터라 경내를 차근차근 돌아볼 수 있었다.
성지의 경내 구조는 넓은 광장 언덕에 성전이 있고 광장 반대편에는 요셉 교육관과 부속 건물이 딸려 있다. 그리고 성전 앞의 울타리 밖 조금 낮은 지역에 안나 노인요양원이 있다.
성전 오르는 계단 왼쪽에는 피에타 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성모 촛불 봉헌대가 있다. 그리고 피에타 뒤에는 사무실이 있다. 성모상 오른쪽에는 예수 성심상이 팔을 벌려 맞이해 주신다.
홍천성당 성전은 6 25전쟁 직후인 1955년 미군 공병대의 도움과 최동오 신부와 크로스비 신부 그리고 신자들의 헌신으로 건립되었다. 홍천성당은 삼마치 고개에서 채석해온 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방식으로 외벽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성당 바닥 마루는 5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군데군데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해도 비교적 양호하다. 그 비결은 마루 아래 공간이 유난히 넓은 데다, 습기를 방지하려고 그 안에 새끼줄 타래를 깔아 놓은 데 있다고 한다. 홍천 성당 건물은 1950년대 전형적인 석조성당의 가치를 지녀 등록문화재 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로스비 신부는 한국으로 재부임하기 전 프랑스에 들러 큰 종을 사서 화물선으로 부치고 돌아왔는데, 현재 그 종이 종탑에 걸려 있다. 종탑은 일반적인 뽀족 첨탑이 아니라 4단으로 연결되었는데 연결부에는 탑의 갑석과 비슷한 날개벽이 있다. 성당의 높이는 지붕까지가 약 8m이고 종탑은 꼭대기는 약 20m에 이를 정도로 엄청 높다.
성당 내부는 극히 수수하다. 화려한 장식보다는 기능성을 강조하다보니 창문도 뾰족형 아치가 아니 평범한 창문이고 천장도 궁륭형이 아니고 격자형으로 일반 강당과 다른 점이 없다.
성전을 나와 성당 사무실을 경유하여 광장으로 다시 내려간다. 광장 맞은편에 요셉 교육관, 그리고 광장 오른쪽에 김대건 신부상이 있고 왼편에는 성모님의 고통을 재현한 십자가의 길이 인조 잔디 공간에 조성이 되어 있다.
성모 십자가의 길
홍천 성당은 소박하면서도 깔끔하면서도 시원스럽다. 오염되지 않은 강원도의 자연풍광과 같은 느낌이 든다. 성전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수녀님은 다 다녀보았지만 이 성당에서 기도가 가장 잘 된다고 하셨다. 순례하고 나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녁 7시 30분. 오늘 계획보다 홍천 성당을 하나 더 순례하고 일정 완료. 화양강 호텔에 숙소를 잡아 놓고 바로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호텔이라도 시설이나 숙박료가 모텔이나 별로 다름이 없다.
홍천불백이라는 식당을 지나는데 ‘전 메뉴 가격 이하’라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렸다. 들어가니 14,000원 하던 ‘간장 숯불고기 정식’의 할인 가격은 11,000원이었다. 비록 수입육이라도 너무 값이 싸다. 맛도 한우와 별반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음식 메뉴보다 술 판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맥주 한 병을 시키니 셀프 판매대에 가서 구입하라고 한다.
한쪽에 셀프 판매대가 있는데 맥주 한 병이 2,000원이다. 직접 팔면 최소한 4,000은 받을 텐데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야 주인 마음이란다. 어쨌든 값싼 음식에 값싼 술로 저녁을 때우고 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