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2. 하르빈, 목단강 - 발해를 그리며 ①
천년전 사라진 해동성국 유적 푯말만 외로이 남아
|
<발해 석등> |
사진설명: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위치한 흥륭사 경내에 있는 발해시대의 석등. 높이 5m인 이 석등은 발해불교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
2002년 10월16일 목요일. 중국 대륙 서쪽 끝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시작된 중국취재가 사실상 마무리되는 날이다. 이날 오전엔 법원사(法源寺)와 중국불학원을 돌아보았다. 어제 본 광제사(중국불교협회가 있는 곳)와 함께 현대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천안문 광장 등 몇 군데를 더 본 뒤 오후5시30분, 북경 역에 도착했다. 밤 기차를 타고 흑룡강성 성도(省都)인 하르빈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으로 유명한 하르빈 기차역에 도착하는 내일 아침부터는 ‘발해(渤海)불교’에 대한 천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6일 오후6시20분발 기차를 탔다. 그동안 정들었던 안내인 임복금씨와 헤어진 뒤 침대칸에 올랐다.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듯 임복금(林福錦)씨는 다시 기차가 있는 곳까지 들어와 배웅해주었다. 시간이 되자 기차는 움직였고, 차창밖에 서 있는 임복금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기차는 달렸다. 내일 아침부터 취재할 곳은 동북3성.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우리 민족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자, 중국교포(조선족)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이다. 침대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내지로 들어오며 벌어졌던 일들, 하서주랑에 있는 석굴들을 답사할 때 있었던 일들, 우리를 안내했던 중국인들, 난주 병령사 석굴, 천수 맥적산 석굴, 용문.운강석굴의 부처님들, 칙칙폭폭 소리에 맞춰 지나간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검표원이 들어와 깨울 때를 제외하곤 계속 잔 것 같았다.
17일 새벽 5시경. 기차 안에서 눈을 뜨니 밖의 풍경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가을이 가득했던 대륙의 풍경은 겨울을 가득 담은 황량한 벌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차 안까지 추위가 밀려온 듯 몸이 가볍게 떨렸다.
맞은편 침대에 누운 중국인이 내복을 입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새벽 6시45분. 마침내 하르빈 역에 도착했다. 침을 챙겨 내렸다. 동북3성에서 우리를 안내한 장홍주(張弘柱)씨가 역 내에 들어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역 밖으로 나갔다.
혹 안중근 의사 기념비라도 있는가 확인해 보니, 89년에 역사를 신축하며 안중근 의사 표지석과 동상을 없애버렸다 한다. 내심 의아했으나, 자국의 역사가 아닌 의거를 중국인들이 굳이 놔둘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압력도 있었을 것이다.
역 안팎엔 러시안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흑룡강성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리라. 밖으로 나와 기념촬영을 한 뒤 예약한 호텔로 들어가 몸을 푼 뒤, 오전10시경 하르빈 옆에 있는 도시 ‘목단강’(牧丹江)으로 출발했다.
하르빈 시내를 벗어나자 들판이 펼쳐졌다. 도로 주변 밭엔 옥수수대들이 그대로 남아 추위를 맞고 있었다. 간혹 벼들을 경작한 논들이 나왔고, 베어낸 벼들을 묶은 다발들이 논바닥에 쌓아져 있었다. 안내인은 “벼를 경작한 논이 나오면 동포들이 주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면 된다”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팍팍한 살림을 피해 보다 잘 살아보자고 간도로 들어간 우리 동포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귀국하지 못하고 동북3성에 정착했다. ‘벼 경작’은 우리 민족이 이곳에 뿌린 문화라고 장홍주씨는 덧붙였다.
설명을 듣고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정말 볏단을 쌓아 올린 논들이 많이 보였다. 목단강 근방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다시 차는 달렸다. 거의 하루 종일 달린 것 같았다. 하르빈에서 목단강까지 이렇게 멀 줄 몰랐다. 오후4시, 마침내 목단강에 도착했다. 날씨는 대단히 추웠다. 갖고 온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다. 그래도 추웠다. 만주의 추위가 대단하다고는 들었지만, 어제 북경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가을이었는데, 하루 만에 혹한의 벌판에 버려진 듯 몹시 추었다. ‘넓은’ 중국이 실감났다.
볏단 쌓인 논…우리 동포 벼농사 흔적
시간상 오후4시라고 하지만 목단강 시내엔 이미 어둠이 깔려있었다. 때 마침 비까지 오고 있었다. 비 때문에 질퍽거리는 흑룡강성의 한 지방도시를 거니는 맛도 괜찮았다. 이런 곳에 뿌리내리려 고생했을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예약한 상업대하빈관(商業大厦賓館) 방안에 들어가도 따뜻하지 않았다. 이불을 덮고 있어도 훈기가 돌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내에 나가 저녁을 먹고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추위에다, 하루 종일 차를 타다보니 몸이 피곤했던 것이다.
|
사진설명: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유적지.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 부근에 있다. |
2002년 10월18일, 발해유적을 처음으로 보게 될 날이다. 내심 기대됐다. 목단강을 떠나 발해 당시 도읍이었던 상경용천부 유적이 있는 동경성 발해진(渤海鎭)으로 갔다.
목단강을 떠난 지 1시간 만에 상경용천부 외성(外城)벽이 나왔다. 유적 푯말이 있었지만, 약간 높은 지대 이외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성벽 좌우엔 옥수수대들만 자욱한 밭들이었다.
마침 첫눈이 온 날이라, 하얀 눈(雪)만 성벽 위에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성벽 위를 거닐었지만, 발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년 전 사라진 ‘해동성국’ 발해(698~929).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귀에 새기며, 성벽 위를 30분 정도 걸었다. 몹시 추웠지만, 발해 상경용천부의 외성 벽을 눈(眼)에만 담아가고 싶지 않았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발해의 역사를 떠올렸다.
발해는 698년 건국돼 926년 망할 때까지, 15대를 이었다. 건국 후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는 매우 발달해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발해는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겨졌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비로소 당연시됐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
사진설명: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영안현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발해의 상경용천부 외성 유적. |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뒤의 고왕)도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 조양)로 옮겼다.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 이곳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해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돼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 조홰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대조영은 이 틈을 타 고구려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했다. 추격해오는 당군을 천문령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육정산) 기슭에 진국(震國)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敖東山城)과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바로 그 유적지다.
발해 건국이 기정사실화 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당은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했다.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713년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하기도 했다. 나라 이름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 시조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선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었다는 〈구당서〉 기록과,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었다는 〈신당서〉 기록이 병존한다. 반면 우리나라 기록인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고 있다.
발해 상경용천부 외성 흔적만 남아
|
사진설명: 흥륭사에 봉안돼 있는 발해시대 부처님. |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에 즉위했다. 그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했다.
발해의 세력이 강해지자 불안을 느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줘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시켰다. 그러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고 말았다.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문제를 둘러싼 외교 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인 732년 가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등주(登州. 산동성 봉래)를 급습했다.
당은 유주(幽州. 북경)에 대문예를 보내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남동쪽에서 발해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1.2대 왕을 거치며 국가기반이 확립되자, 문왕은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는 먼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정당성.중대성.선조성) 6부(충.인.의.예.지.신부) 시스템을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750년대 전반 문왕은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로 옮겼다. 문왕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로 천도하기도 했으나, 성왕(成王)대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겨 멸망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문왕 이후 발해는 동북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는 등 국력이 매우 향상됐다. 대내외적 정비를 통해 국력이 향상되자,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려지게 됐다. 성벽을 밟으며 상념에 빠져있는데 “갑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해진에 있는 흥륭사(興隆寺)와 상경용천부 내성 유적으로 보고 싶었다. 특히 흥륭사에 남아있는 발해 석등과 대석불에 참배하고 싶었다. 아쉬움만 남긴 채 발해진으로 출발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