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공중목욕탕은?~●
우리나라엔 언제 처음 공중 목욕탕이 생겼을까요?
일제 강점기경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처음 생겼을 지? 아니면.....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에도 공중 목욕탕이 있었는 지 사뭇 궁금해 지네요.
가. 우리나라 목욕역사(민간 목욕유래)
문헌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 알영이 동천과 북천에서 각각 목욕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 당시의 목욕은 청결 미용 또는 의식절차 수단으로 주로 활용됐으며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석조욕조는 비록 왕족들의 전용 욕장이지만 야외 목욕장까지 만들어 사용했고 이 석조 조형물은 바닥을 마개로 막게하고 구멍과 등받이 및 여과장치까지 갖추어져 있어 당시 신라인들의 지혜와 목욕탕 구조를 파악하는데 큰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시대는 절에 대형 공중목욕장이 설치되고 가정에도 목욕시설을 한 것으로 보아 목욕재개를 중시하는 종교의식(불교의식)의 영향이 목욕문화에 크게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인들은 신라인들에 비해 더 사치스런 목욕을 즐겼다고 하는데 기록(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하루 서, 너차례 목욕을 하였고 개성 시냇가에서는 남, 여가 혼욕까지 했다고 한다.
상류사회에서는 어린애 피부를 희게 하기 위해 복숭아 꽃 물로 세수시키거나 목욕시켰고 어른과 여자는 난초 삶은 난탕에 목욕함으로서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하고 몸에서 향냄새가 나도록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청결위주의 대중목욕이 중시되어 6월 보름날이 되면 계곡과 냇가에서 목욕과 물 맞이를 했고 제례 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는 관습이 성행했다. 이를 위해 대갓집에서는 목욕시설인 정방을 집안에 설치하고 조루(팥, 녹두를 갈아서 만든 가루비누)만들어 저장했다고 한다.
특히 혼례를 앞둔 규수는 난탕을 비롯해 인삼달인 인삼탕, 창포탕, 복숭아잎탕, 마늘탕 등을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목욕형태는 유교적 사상으로 노출을 꺼려 벌거숭이로 목욕하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신체의 부분을 씻었고 여인들은 허리위 반신욕 정도로 목욕을 끝냈다고 한다.
이처럼 삼국시대나 조선시대를 통해본 우리나라 목욕은 신체를 청결히 하는 수단외에 점차 미용, 건강, 질병치료목적 및 종교의식 수단으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나. 우리나라 대중목욕장 유래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하기 이전 돈을 받고 목욕을 하게 하는 오늘날의 대중목욕탕은 없었고 서민층은 추운 계절을 제외하고 강이나 냇가 또는 호수에서 목욕을 했고 겨울에는 물을 데워 부엌이나 헛간에서 했다. 양반층은 목간통이라는 나무로 만든 둥근 욕조를 안방 또는 사랑방에 들여놓고 목욕했다.
개방이후 선교사를 비롯해 각국의 외국인이 국내에 거주하면서 이들과 상대하는 호텔과 여관이 생겨났고 그들의 목욕수단에 따라 대부분의 숙박업소에서 방마다 욕실을 두거나 아니면 크게 하나를 만들어 투숙객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도록 했다. 이것이 오늘날 숙박업소가 대중탕을 겸하고 있는 시초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탕는 1924년 평양에서 설립됐다. 이 때의 공중목욕탕은 부(府)에서 직접운영하고 관리인(욕탕사용료수납, 시설, 용수, 욕탕사용인원 제한 등)을 임명했다.
이전에도 일본인들이 공중목욕탕을 설치코자 했으나 여럿이 모인 곳에서 옷 벗고 목욕하는 것은 천민이나 하는 짓이지 동방 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는 할 수 없다고 크게 반발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첫 공중목욕장은 1925년에 처음 등장했고 광복이후 인구 증가와 위생관념의 발전으로 사설 목욕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영업허가를 위한 시설 규정이 제정되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휴식기능을 겸한 다변화한 고급스런 목욕문화가 태동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