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긍정적이든지 부정적이든지 어찌되었든지 십자가 사건의 증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있었고, 베드로가 있었고, 빌라도, 바라바, 아리마대 요셉, 막달라 마리아, 도마, 혜롯,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특히 군중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 군중들의 세 가지 얼굴(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환영하는 얼굴입니다(마21:6-9).
오늘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이날 수많은 무리들은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겉옷을 펴서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가지고 열렬히 환영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들의 환영과 찬양은 결코 자신들 스스로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복음 21:6-7절에 보면 제자들이 먼저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 군중들의 환영행렬은 제자들의 환영행렬 바로 다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중들은 제자들의 환영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종려주일을 중심으로 한 사건 속에서 본 무리들은 그들이 어떤 마음의 동기였든 간에 예수님의 편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입술을 열어 찬양했습니다. 비록 제자들을 모방한 것이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환영하는 행렬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무리들의 첫 번째 얼굴입니다.
여기에 모인 얼굴들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노래했습니다.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21:9에 경배의 환호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환호하면서 외쳤던 찬양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고 했습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즐거움으로 부르는 성가대의 찬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가가 마음으로부터의 찬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얼굴이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그러나 닷 새 후에 그들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2. 배반하는 얼굴입니다(막15:12-15).
이는 군중심리에 의한 신앙의 위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가니까, 제자들이 그렇게 하니까, 거기에 함성이 있으니까, 함께 찬양하고 덩달아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고백과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개인적인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 신앙은 결국 군중심리의 흥분의 물결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군중심리가 바뀌면 신앙도 언제든지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군중들 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내일은 주님을 배신했던 이 군중들입니다. 이것은 확신 없는 신앙입니다. 고백 없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백 증거들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반드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환경이 와도 동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 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이단의 미혹에 끌리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오. 그 율법을 지키겠습니다." 하며 모세에게 큰소리 쳤으나 막상 모세가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는 이미 몇몇 족속의 행동에 부화뇌동(附和雷同)되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율법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저들에게 개인적 신앙고백을 요구했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선택한 사람들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부화뇌동한 사람들은 음부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가나안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여호와만을 섬길 것 같이 하던 그들이 막상 가나안땅에 입성하자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부화뇌동되어 그들의 우상신을 섬기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기 시작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마침내 마지막 확신을 가지고 저들에게 도전합니다. "너희들은 오늘날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선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수24:15)" 이러한 개인적 확신이 없이는 이방 신이 범람하는 가나안 땅에서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을 알았던 여호수아였습니다.
여러분은 저 갈멜산상의 뼈대 없는 군중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지만 대세에 따라 바알신을 추종하다가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이 불로서 입증되는 순간 그들은 또다시 하나님 편에 섭니다. 그러한 군중들에게 향하여 엘리야는 이렇게 신앙고백을 요구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 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언제까지 지조 없이 눈치만 살피고 있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알신과 여호와신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대세에 휩쓸리던 그 군중들처럼 오늘은 예수를, 내일은 우상을, 주일날은 하나님을, 월-토요일 동안은 세상을 섬기는 군중의 물결 속에서 휩쓸려 다니는 군중신앙의 위험성을 이 무리들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오직 한분 뿐이시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고백 없이는 절대로 신앙의 정조를 지킬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증거를 저 십자가 주변에 있던 군중들에게서 오늘 확인했습니다. 이것이 군중신앙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 무리들의 모습을 통해서 또 한가지, 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라바와 예수님중 누구를 석방 할 것인가에 대한 빌라도의 요구에 바라바를 선택했으며, 뿐만아니라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저주까지 합니다. 이것이 무리들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변신한 얼굴입니다. 바뀐 얼굴입니다. 마치 야누스의 또 다른 얼굴 같습니다.
불과 닷새 전에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이 이제는 완전히 돌변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바라바를 놓으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치는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열광이 이제 예수를 죽이는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 대목에서도 주목 할 점이 하나 있는데... 11절에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 무리를 충동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2:4)고 했습니다. 뻔뻔한 얼굴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적어도 무리들의 입장은 예수님을 반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아들..."운운하면서 충동질하자 삽시간에 그들의 행동이 돌변합니다. 이것이 군중들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여 일이 지난날, 이 군중들의 세 번 째 얼굴을 보게 됩니다.
3.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얼굴입니다(행2:23-37).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이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문도 들은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120명을 통해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의 무리를 보고 "예수는 바로 당신들이 죽인 것이라"고 담대히 죄를 지적하고 나서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들의 악을 선용하셔서 구원의 기회를 주셨으니 이 복음을 믿으라"고 강력히 증거 합니다. 이 설교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행2:37절에 보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하며 괴로워했으며, 41절에 보면 무려 삼천명씩이나 회개하고 예수 믿기를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개하고 있는 군중들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군중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저를 못박으소서"라고 입술을 열어 소리쳤던 장본인들이 바로 이 무리들이었습니다. 누가 뭐라든, 무슨 변명과 핑계가 있든 그들이 분명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의 오판은 단순히 저들의 민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최고의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고 당신을 못박았던 이 무리들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역사 하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을 배신했어도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가슴에 못박았던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장본인들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댔던 이 무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군중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가슴과 영혼 속에 역사하셨던 분이 바로 배신당하셨던 당사자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병상에서 회복할 가능이 없었습니다.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 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38:1-5)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회개의 얼굴이야말로 마음다운 얼굴이며 응답의 얼굴이며, 기적의 얼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저 군중들의 세 가지 얼굴을 보았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 환영하는 얼굴과,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배반하는 얼굴, 그리고 "어찌할꼬..."하며 가슴을 치고 회개하는 얼굴입니다. 이와 같은 군중들의 모습은 이천년 전 십자가 주위에만 있던 사람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이천년이 지난 오늘, 고난주간이 돌아왔습니다. 십자가에 죽음 당하신 그 끔직한 금요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의 얼굴로 부활절을 맞이하시겠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