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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나의 소견 360번. 영적해석과 상징적해석의 대안 문장적해석(3). 2017-11-15
이름 : 이재현
게시일 : 2017-11-15
3. 문장적 해석
1)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여러 방법들
지금까지 기존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주로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해왔다.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 상징적 해석(Symbolic Interpretation), 영적 해석(Spiritual Interpretation)이 그것이다. 과거적 해석(Preterist Interpretation, 과거주의), 역사적 해석(Historical Interpretation, 역사주의), 미래적 해석(Futurist Interpretation, 미래주의)도 있지만 이것은 요한계시록 성취시기에 따라 구분될 수 있기 때문에 앞에 열거한 해석들과는 구별하고자 한다(상징적 해석은 상징주의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신학적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 문법적 해석(Grammatical Interpretation), 이상적 해석(Idealist Interpretation), 일반적 해석(Generic Interpretation), 문학적 해석(Literary Interpretation) 등이 있다. 문자적, 문법적, 일반적 해석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이상적 해석은 영적 해석 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문자적해석
이러한 해석들 가운데 저자는 문자적 해석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문법적 해석을 포함하는 문자적 해석). 가능한 한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 해석하려는 자세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경향을 보면 문자적 해석을 고지식한 해석으로 터부(Taboo) 하는 이들이 있다. 문자적 해석이란 언어의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성경 원래 의미한 바를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종교개혁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좋은 해석이란 성경에서 통상적인 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문자적 해석을 강조했다. 현존하는 학자 중 몇 안 되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자 중 대표적인 분이 한정건 박사이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영해하는 현재의 세태를 비판하며 "칼빈은 성경을 철저하게 문자적-역사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선지서들의 예언을 영해하는 것조차 극히 경계하였다."62)고 역설하였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칼빈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만큼은 의도적으로 문자 해석을 배제하려는 습성이 강한 것 같다.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들고 있지만 영적 상징적인 방법만을 취하려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특히 무천년주의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성경 1권에서 65권까지 개혁주의 입장에서 문자적·역사적으로 해석하다가 66권 째에 와서는 대부분을 상징적·영적인 것으로 덮어버린다. 창세기부터 유다서까지는 개혁주의 신학과 관련이 있고 요한계시록만은 예외라면 요한계시록은 성경이 아니라는 것인가?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의 총본산으로 종말 계시가 집중적으로 기록되었다는 특징이 있을 뿐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문자적 해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무천년설은 칼빈주의(Calvinism) 곧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의 성경 해석으로 보아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자가 속한 교단이 자유주의자들로 부터 근본주의자라고 공격 받는 것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축자영감설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만큼은 성경을 기록하고 편집하는 데에 인간의 의도가 개입되었다고 보는 진보주의(진보적성경관=동력적영감설(Dynamic Inspiration))나, 성경을 아예 처음부터 인간이 만든 허구로 보는 자유주의(자유적성경관=성서비평학(Bible Critisism)) 견해인 해석학적 입장에서 영적 상징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총회63)차원에서도 이러한 선언이 있었다. 베리칩이 짐승의 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신학부(부장유웅상목사)의 연구 결과를 발표에서였다(2013.9.24.).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과 베리칩을 동일한 것으로 연관 짓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666과 베리칩을 연관 지어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배격하기로 한다. 한 마디로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허황된 주장"64)이라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성경적인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베리칩과 같은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를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65)라고 한 것은 짐승표를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해석과 동일하다.
이는 무천년설에 입각하여 알렉산드리리아 학파(School of Alexandria)66)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대다수 무천년설은 따르는 목회자들과는 별개로 교단 신학으로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마저 달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결국 알레고리(Allegory) 성서해석 방법인데 이는 우의적 해석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지향하는바와 일맥 노선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큰 염려를 더하게 된다. 비록 요한계시록 13장 16절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에 국한시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짐승표를 장차 종말의 때 등장할 한 인격체인 적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될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류 역사가운데 항상 존재했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상징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합동의 공식 입장이라니 심각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총회 소속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앞으로 역사 가운데 출현할 적그리스도를 거짓메시아로 보지 않고, 그가 배포할 생체이식 장치 등을 짐승표가 아니라고 하여도, 교단 안에서 공적으로는 아무런 제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개혁주의 안에서 문자?문법?역사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변을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다. 저자는 본서 발간 기준으로 10여 년 동안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에 나타난 종말 계시를 연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관련된 많은 저서들을 탐독하였고,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자료들도 수렴하였다. 이 분야 실력 있는 분들의 세미나에도 참석했었다. 그 중 한 목회자의 강의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종말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개혁주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장로교중 5위권의 교단에 소속되어있다. 개혁주의신학을 표방하고 있는 신학대학원 출신이다. 그에게 수백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말씀을 배우고 있다. 그런데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이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어떤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여기 저기 좋은 것들을 모아 잘 포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잡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목회자이고 종말론을 연구하고 싶다면 꼭 당부하고 싶다. 정통 신학은 바른 종말론을 정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잣대로도 흠잡을 수 없는 성경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고 신학이 성경을 앞선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깊이 보고 그 기반위에 세워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학으로 검증하여도 이탈되지 말아야 한다. 그 신학은 저자 입장에서 말할 때 성경의 신앙적이요, 신학적 최대 표현인 개혁주의 신학이다.
역사적해석
그리고 역사적 해석을 견지한다. 예수 재림 전 7년을 지구의 마지막 시간으로 보고 그 안과 후,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벌어질 사실적 사건으로 요한계시록을 본다.
신학적해석
또한 신학적 해석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에서 핵심 되는 주제를 발췌하여 하나의 신학 체계를 구성한 다음 이 체계에 따라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데, 종말 계시 총론의 개론과 각론 및 세론을 정립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신학적 해석을 사용한다고 해서 기존 조직신학 틀 안에서 또는 신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해석한다는 말이 아니다. 개혁주의 전 전 천년설이라는 골격과 구조를 세워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장적해석
요한계시록에는 중복해서 계시해 주신 사건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건들이 짧은 7년 환난 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 기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처럼 질서정연하게 진열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에 흐르고 있는 문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 계시만 보고 그 사건에 대한 결론을 쉽게 내리지 말고 여러 곳에 다른 모습으로 계시된 동일한 사건을 찾아내어 서로 연결시켜 하나의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해석 방법을 문장적 해석(文章的解釋, Sentential Interpretation)67)이라 칭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해석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한 사건이 이중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게 되고 동일 사건인데도 다른 사건으로 해석하게 되는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부연하면 요한계시록은 한 사건에 대한 상징과 실제가 한 모습으로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 사건인 계시들이 다른 형태로 장절(章節)을 뛰어 넘기도 하고 성경 각 권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한 사건이지만 여러 곳에 다르게 기록된 상징과 실제 계시의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완성시켜야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문장적 해석이라 부르며 이 해석에는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에 중점을 두고 조화 있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2) 종말론 해석에 유의해야 할 점
종말론을 해석하는데 유의해야 할 점은 어느 한 주의를 한 해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역사주의에도 문자적 상징적 영적으로 각각 해석을 한다. 대부분 과거주의로 상징적 해석을 하는 무천년주의자들도 있지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문자적인 해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역사주의와 미래주의를 수용하는 관점을 가진 이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일(G. K. Beale)은 이러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시록은 이와 같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동시에 재림 직전과 직후의 미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주의와 미래주의가 혼합된 원근통신의 원리로 해석되어야 한다. … 역사주의와 상징주의 장점들도 계시록 해석에 고려되어야 할 점이다."68)
1985년부터 종말론세미나를 개최하여 다수의 무천년주의자들에 의해 묻혀있던 역사적 전 천년주의를 공론화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이광복 목사는 자신의 천년설에 대해 "역사적 전 천년설의 입장에 굳건히 서서 다른 여타의 견해를 성경적으로 검증하고 통합하는 입장에 서 있음을 반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이러한 '통합적-역사적 전 천년주의'(수정 전 천년주의) … 이 같은 해석만이 이 시대 종말 신앙의 확고한 대안이라고 확신한다."69)고 하였다. 이러한 이목사의 연구 방법에 대해 한정건 박사는 "세대주의자들의 지나친 문자주의도 배격하지만, 특히 무천년설의 지나친 영해를 경계한다."고 논찬했다.70)
앞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세대주의 해석이라도 성경적이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이 견해에는 저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원리와도 구별되는 것이 문장적 해석이다. 요한계시록을 하나의 문학작품과 같이 보고 전체를 한 문장으로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 방법이다. 문장적 해석에는 확고한 원칙과 기조가 있다.
3) 문장적 해석의 지향점
그렇다고 상징적 영적인 해석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해석 방법은 전통적으로 종말론을 연구하는데 큰 틀(Framework)을 제공해 주었다. 저자도 이러한 해석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은 물론 상징적, 영적 해석들도 사용한다.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방법으로는 풀 수 없는 계시가 있다. 어떤 면에서 요한계시록을 바로 해석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들 해석들을 보면 한 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많이 드러난다. 또 장절에 얽매여 계시의 본뜻을 찾아내지 못하고 엉뚱한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같은 사건을 장절이 다르다는 것만을 보고 다른 사건으로 본다. 혹은 그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문장적 해석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우선시한다고 하여, 영적, 상징적 해석을 외면한다는 것이 결코 아님을 다시금 밝힌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 자체가 지닌 중대한 특징 가운데 일부가 이탈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상징적 해석을 우선하고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도외시한다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측면 자체가 간과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문자적, 역사적 의미 내지 신학적 이해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말 계시를 바르게 정립하는 해석 과정에서 필수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건데 영적, 상징적 해석을 단절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해석들을 보완하고 성경이 본래 전하고자하는 사실적 진리를 깨닫고 나아가 실제적 보화의 깊은 의미로 연결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적 해석은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과 뚜렷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외 해석들을 보완하거나 완성해주는 의미를 가진다.
다른 연구가들도 문장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그와 유사한 해석을 하는 분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흐르고 있는 맥들을 찾아내어 성경적으로 입증시키고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 문장적해석이다.
문장적 해석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만(Dogmatic)의 해석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결코 바른 태도가 아니다. 다만 문장적 해석은 극히 성경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문장적 해석은 모든 해석 가운데 정수(精髓)라 말하고 싶다.
문장적 해석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민병석 목사는 종말 계시를 연구하는 원칙과 기조 가운데 이를 정립하였는데 그는 이 해석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문장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읽을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이 곧 하나의 문장이다. 문장은 하나의 작문, 곧 문학작품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되어질 징조와 사건에 대하여 미리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문학작품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계시 문학"이라고 부른다. 문장은 언제나 전체적으로 맥(脈)이 이어져야 한다. 맥이 통하지 않는 문장은 횡설수설일 뿐 글로서의 아무런 가치도 없다. 다음에 이해(理解)가 되어야 한다. 특별한 교리에 발이 묶인 신학자들만 이해하는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 문장에는 일관성(一貫性)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이 합리적(合理的)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그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해서 이 같은 관점에서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나 과거적 해석 방법이나 상징적 해석 방법이나 세대주의적 해석은 이 모든 것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학적으로가 아니라 문장적으로 이해해야 바른 해석이 나온다."71)
4) 문장적 해석의 미래주의
문장적 해석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종말에 나타날 미래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해석임을 입증하게 된다.
상징주의자들 가운데는 칠십 이레를 상징으로 보고 마지막 '한 이레'(단 9:27)을 교회시대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절반(전3년반)은 예수님 승천이후 로마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 초토화까지, 나머지(후3년반)는 예수님 재림까지라고 한다. 그러면 전자는 40여년, 후자는 현재 2,000여년이 훌쩍 넘었다. 숫자를 상징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고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해석해도 무방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다니엘서 9장 24~27절 사이에 아무 이유 없이 70이레를 7이레, 62이레, 1이레를 나열하였을까? 70이레는 성건 중건령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7이레가 지난 후 완성된 다음 62이레가 경관된 69이레에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 인지 모르지만 장차 한 왕(적그리스도)이 등장할 때부터 1이레가 시작된다고 구분하고 있다. 1이레 7년이 지나면 종말이다. 이 기간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한 때 두 때 반 때'(단7:25;계12:14), '이레의 절반'(단9:27), '1260일'(계11:3,12:6)을 문장적 해석을 통해 연결하면 '7년 환난'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 9:24~27) ;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 ;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 12:14)
이렇게 문장적으로 해석하면 다니엘서 '한 이레'를 요한계시록의 '한 때 두 때 반 때', '1260일' 한 계시임을 파악할 수 있고 종말에 있을 7년의 기간임을 정립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혹독한 핍박을 받던 초대교회 시대로 보는 '과거주의'(Preterist), 사도 요한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의 청사진으로 보는 '역사주의'(Historicist), 상징적 해석으로 전 교회시대에 주신 것으로 보는 '상징주의'(Idealist)에 반(反)해, '미래주의'(Futurist)로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문장적 해석으로 종말 계시를 종말 전과 시점 그리고 이후 역사까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다.
정성욱 박사는 미래주의에 대해 저자와 동일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가장 근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미래에 대한 기록임을 확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은 과거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현재에 대한 것도 아닌 미래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미래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서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읽어야 한다. …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하는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은 잠언서와 같이 삶의 지혜를 교훈하는 책이 아니며, 서신서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다루는 책도 아니고, 복음서나 사도행전과 같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즉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적 기록의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사건'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사건적 측면을 무시하고, 요한계시록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신앙적·신학적 의미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근본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바른 독법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의 근본 성격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독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독법으로 제시된 전통적인 방식 중에서 '과거주의적', '역사주의적', '이상주의적' 해석보다는, '미래적' 혹은 '미래주의적' 해석이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에 가장부합하는 방식이라고 확신한다."72)
이상근 박사는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해석법 중 문화적 해석법(The Literay-Critical Method)은 "계시의 성격을 무시하는 것으로"73), 심리학적 방법(The Psychological Method)는 "신적 기원을 부정하는 것으로"74), 영적 해석법(The Spiritual or Idealist Method)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적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에서 시작된 학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제하는 편도 있으나 이를 부정하고 역사는 상선벌악의 끝없는 반복으로 규정하는 편도 있다. 하여튼, 여기에 우화적 학파의 약점이 뚜렷하다. 그것은 본서 자체가 강조하는 예언적 성격(1:3, 10:11, 22:7, 10, 18, 19)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75), 과거적 해석법(The Preterist Method)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그 중에는 유력한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 응용에는 구구한 바 있어 의견의 일치는 기할 수 없다. 또한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을 포함한 종말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므로"76), 역사적 해석법(The Historical or Continuous-Historical Method)또한 "구구한 견해들로 혼란을 극하고 있다. 아마 이와 같은 혼란상 자체가 이 학설의 부적당을 입증할 것이다(Henry C. Thiessen)"77)며 배격과 비판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미래적 해석법(The Futurist Method)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종국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학설로서 "본서의 예언적이며 종말적인 성격에 비추어 보아 가장 타당한 것이다"78)고 하였다. 그러면서 타 해석법의 유용과 적용에 대하여 "역사적 또는 영적 해석법에도 일리가 있는 것은 아울러 시인하여야 할 것이다. 본서의 환상 중에 분명히 당시의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조화는 용이하다. 즉, 가까이 그 시대적 사건을 들어 그것을 메시야 예언귀들이 그 시대적 배경 아래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납득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박해가 종말적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된 사실(마 24:15,계13장)도 참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서인 본서는 그 당시의 사건을 가리키면서 이를 통해 종말적인 사실을 예언한다고 볼 것이다."79)고 하였다. 이는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가 강조하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적원근통신법'과 동일한 견해이다.80) 이광복 목사도 "요한계시록은 현시대에 응용은 할 수 있지만 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81)며 "계시록은 기본적으로 재림에 대한 예언적 의미, 미래적 의미를 갖고 있다"82)고 강조하고 있다.
5) 문장적 해석의 중요성
거시적과 미시적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에 나타난 종말론을 문장적 해석으로 연구하면서, 말씀을 보는 시각이 거시적(Microscopic)이면서 미시적(Microscopic)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쓰신 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총론이라면 그 구원의 완전성을 설명하시기 위해 여러 각론이 있다. "'사랑', '공의', '죽음', '보혈', '부활', '심판', '회개', '믿음', '칭의', '충성', '상급', '영생', '천국'…" 등등이다. 이것은 소주제들로 하나하나가 독립된 한 문장이면서, 각 문장들과 유기적 관계에 있으며 강들과 같아서 전체를 묶으면 구원이라는 바다로 모이게 되는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각론들은 성경 중 특정한 한 권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각 권에 넓게 산재해 있다. 그 각론 중 하나이면서 최종적인 소주제는 '종말'이다.
성경적인 인류사는 구원사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가 역사를 이끈다는 사관을 믿는다. 이 섭리사관(攝理史觀)의 최종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즉 구원의 완성은 종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말이 계시된 성경 각 권들을 연결하여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종말론을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인 문장적 해석이다.
그리고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성경 각 권에 나타난 종말 계시는 요한계시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우리는 성령시대 은혜시대를 사는 성도들로서 교회시대에 주신 종말 계시는 요한계시록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는 종말에 관한 계시를 요한계시록의 계시된 체계를 따라 종합적으로 맥을 따라 연결시켰다. 특히 다니엘서와의 연계를 철저히 했다."83)
문장적 해석으로 정립한 종말 계시라는 강이 구원의 완전성이라는 바다에 합류할 때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노선에 비추어 문제없고 성경적으로도 지지 받으면 올바른 해석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을 위해 문장적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적 해석을 통해 정립한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믿는다.
이와 같이 문장적 해석은 요한계시록만을 위한 해석방법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바로 보고 분명한 뜻을 깨닫고 목양에 적용할 수 있는 열쇠이다.
사역계승의 마지막 주자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믿는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문장적 해석이라는 진수(眞髓)로 세워진 거봉(巨峰)과 같다. 문장적 해석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종말론 연구를 바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목회자들은 문장적 해석에 대한 훈련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래야만 능숙하게 정상을 등정(登頂)할 수 있다. 그리고 적용과 응용을 통해 가장 높은 곳에서 '열려진 종말 계시'라는 천상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통찰과 예견이 겸비된 하나님의 사자가 될 수 있다.
다니엘서 12장 9절에 종말의 계시를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하였고. 10절에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요한계시록 22장 10절에는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하였다. 종말의 계시가 지금은 지혜 있는 자를 통해 활짝 열린 계시가 되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것을 확실히 믿고 '전하는 자는 거룩한 자요 그는 믿는 그대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계 22:11). 또한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며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게 될 것이다'(단 12:3).
성경에 담겨 있는 교리는 사도 바울로부터 '어거스틴'(Augustin,354∼430)을 거쳐 '칼빈'(John Calvin,1509∼1564)에 의해 '개혁주의 신학'(The Reformed Doctrine of Theology)으로 체계화 되었다. 이것은 '루터'(Martin. Luther,1483∼1546)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완성이기 하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연속성으로 지켜 내려온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은 '구 프린스턴 신학'(Old Princeton)의 마지막 주자인 '메이천'(John Gresham Machen,1881∼1937)에 의해 주장되었고 교수되었다. 이 분에게 사사(師事) 받은 박형룡, 박윤선 박사는 한국개혁파장로교 나아가 한국개신교 신학의 뿌리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를 통해 빚어진 그릇 안에 정통 보수 신앙이 담겨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두 분에게 직·간접적으로 지도를 받고 배출된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목회하고 지구 땅 끝까지 선교를 감당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에 비추어 문장적 해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성경 속 종말론의 정점은 요한계시록이다. 그 후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와 관련된 연구서들은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일까? 감춰진 계시가 아니라 사도 요한에 의해 이미 '해석된 계시'*를 본문을 중심으로 장절과 성경 각 권을 연결하여 모순 없이 정립한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문장적 해석의 체계화이다. 말세지말에 부름 받은 종들로 요한계시록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문장적 해석을 통한 개혁주의 전 천년설 사역을 계승하여 전해야 할 마지막 주자와 같다 하겠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먼저 요한계시록은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요한계시록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상징을 사용해서 기록됐고,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특히 더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는 아예 접근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선입견에 불과하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정말 어려운 책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려우니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초두에서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말씀하신다."84)
"요한계시록은 결코 어려운 계시가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계시록의 내용이 어렵다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결코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읽는 자는 알 수 있습니다. 듣는 자는 알 수 있습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85)
상기의 논조에 대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신약학 교수로 바울신학의 권위자인 이한수 박사는 성경에 담긴 신적 진리의 아름다움과 장언함에 대한 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다양한 계층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책이다. 그것은 수사학적 기술을 익힌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섭렵될 수 있는 책도 아니고, 지식층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책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 빈부귀천과 지식 유무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기를 바라셨다. 모든 사회계층을 포괄한다. 일반 대중이 그것을 믿고 준수하여 영적 유익을 얻어야 한다. 때문에 성경은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 언어를 사용하셨으며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친숙한 그림언어들로 기록되었다."86)
그렇다면 이 해설 안에 성경 중 요한계시록만 제외 인가? 그럴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다른 정경과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단 벤쟈민 키취(Benjamin Keach, 1640~1704)가 "'하늘의 언어'나 '하늘의 화법'이라고 표현한 '예표, 환유, 반어, 상징, 비유, 제유'"87)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상징적 장면들을 어떤 식의 언어로, 즉 문자적의미의 언어로 변환해야 하는지 아니면 상징적 의미의 언어로 변환해야 하는지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인들은 추론적이고 분석적인 언어에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상징(이미지 언어)들이 기껏해야 진리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문학적 기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징에는 상징 자체로 볼 것이 있고 실제 내용을 찾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해석 방법이 문장적 해석인 것이다.
종교개혁 패러다임Paradigm의 완성은 종말 계시 팩트Fact의 완성이다.
저자는「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 참석했었다.88) 마치 칼빈이 살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온통 칼빈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 가득한 자리였다. 이종성, 한철하, 신복윤, 이수영, 이종윤, 정성구 박사 등 대표적인 칼빈 신학자들과 국내 유수의 신학대 총장 및 교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주제 발표 논문인 「칼빈과 한국장로교회의 성장과 과제」(이종윤)를 비롯하여 7개 분과별로 무려 70여 편이 쏟아졌다. 칼빈의 '구원론', '칭의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성화론', '자본주의', '민주의의', '사회복지', '정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칼빈의 종말론 등을 다룬 논문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칼빈이 요한계시록 주해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논문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이 하나도 없다니 어쩌면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개회 예배에서부터 마지막 '패널'(panel) 토의까지 7시간 동안 이에 대해 단 한 명의 발제자도 없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인가!'하는 두려운 위기의식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종말의 징조가 열리지 않았던 시대 칼빈이 주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그 해석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아예 시도조차 해보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칼빈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전 천년설을 비교한 이유이다.
칼빈이 '종교개혁의 패러다임'(Paradigm)을 완성한 것처럼. 이제는 문장적 해석을 통해 쌓아올린 개혁주의 전 천년설을 '종말 계시의 팩트'(Fact)로 완성할 책임이 마지막 시대 주의 종들에게 있다. 종교개혁 패러다임 완성은 종말 계시 팩트인 개혁주의 전 천년설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정신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책이다. 인류 구원의 최종은 종말이이다. 재림이야말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일이며 성도들에게 가장 놀라운 복을 안겨 주시는 복음 성취의 최종적인 최대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사명자들은 종말의 때 한국과 세계교회를 건질 두 증인들로 훈련되어지고 훈련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칼빈의 신앙과 신학이 세계 각국의 종교와 문화에 뿌리를 내린 것과 같은 위대한 성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하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62) 진해신학강좌 기념 고신포럼에서 주관자인 고려신학대학원장 한정건 박사가 '우리의 종말론' 주제 강의 중. "진해신학강좌 기념 고신포럼, 창원한빛교회에서 열려"(2009.6.19, 창원한빛교회(윤희구 목사)), 허난세. 2009.7.2.
http://www.christiantoday.co.kr)
63)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8회 총회(총회장안명환목사). 2013.9.23.(월)~27(금). 수원과학대 라비돌리조트 신텍 스컨벤션(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세자로 286).
64) "예장 (합동) 총회장에 안명환 목사 추대". 크리스챤월드모니터. 크리스챤월드모니터. 2013.10.1.
65) Ibid.
66) 알렉산드리아 학파(School of Alexandria):고도의 학문 연구를 위해 2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최초 의 그리스도교 학파. 최초의 유명한 지도자들(판타이누스·클레멘스·오리게네스) 아래서 이 학파는 알레고리 적 성서해석 방법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절충하는 사상을 따랐으며, 교리의 변화가 심한 시기에 이단적인 주장들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확립하려고 애썼다. 알렉산드리아 학 파에 대해 반대입장을 취한 학파는 안티오크 학파(School of Antioch)로서 이 학파는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주장했다(COPYRIGHT(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67) "'문장적 해석'이라는 용어는 신학사전에도 없습니다. 민 목사님께서 성경에 나타난 종말 계시의 흐름을 연구하시면서 명명한 것입니다.". 「민병석목사의 문장작 해석에 관한 고찰 」, 이재현, 서울:신생, 2010.1.8. p19.
68)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Eerdmans, 1999, p.48-49. (그는 이러한 입장을 '절충주의'(eclecticism)로 보고 Caird, Johnson, Sweet, Hendriksen, Wilcox 등 무천년설 주석가들을 이 그룹으로 분류했다.)
69) 이광복, 『계시록종말론신학의통합을위한역사적전천년주의국제학술대회논문집』, 도서출판 흰돌, 2012.5.30. p.183.
70) Ibid, p.269.
71) 민병석. 「쉽게 배우는 요한계시록」. 서울 : 신생. 2006. p270
72) 정성욱,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논문, 2013.8.20. www.bamjoongsori.org.
73) 이상근, 『신약주해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성등사, 1998.10.30. pp.31
74) Ibid.
75) Ibid, pp.32-33
76) Ibid.
77) Ibid.
78) Ibid.
79) Ibid.
80)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예언적 원근 통신법'(Preophetic Foreshorte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다른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적 원근통시법…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미래의 사건과 머나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통시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소망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Hoekema Anthony A. The Bible and The Future;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8,p.171~172). 조지 E. 래드(George E. Ladd)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원근통신(遠近通信)이란 예언자의 현재 및 근접 미래와 궁극적 종말 사건이라는 두 개의 초점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을 말한다. 예언의 목적인 미래의 프로그램이나 차트를 만드는 것은 두 완성을 통해서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 당시와 궁극적 미래가 연대기적인 구분이 없이 역동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것이다."(George E. Ladd, 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Grabd Rapids:Eerdmas, 1972),p.13). 성경은 기록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동시에 재림 직전과 직후의 미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가 혼합된 원근통신의 원리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감람산의 강화문'(Olivet Discourse, 마 24:3~51; 막 13:3~37; 눅 21:5~36)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끝날 에 관한 예언을 예수님께서 함께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더 응용하여 적용한다면, 요한계시록 17장 8절 '짐승은 전에 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자를. 다니엘 8, 11장 등에 등장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요한계시록 13, 17장 등에 등장하는 '일곱 머리 열 뿔 짐승' 즉, 적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것이다.
81) 이광복, 『성경종말론특별세미나』, 서울목양교회, 2014.7.7.~9.
82) 이광복, 『성경종말론계시록통합전집 성경종말론』, 서울:도서출판흰돌, 2014.7.7. p.176.
83) 민병석, 「요한계시록음성설교」, ppt, "2. 1. 천년왕국과 흰 보좌 심판(계 20:1-50)". (1) 본 강해의 신학 적 체계. 2) 본 강해는 어떤 방법을 취했나? 中에서, http://www.bamjoongsori.org.
84) 정성욱,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논문, 2013.8.20.
85) 민병석, 『재림의 메시지 101(요한계시록 심층 설교)』, "요한계시록 연구(1)" 중(中)에서, 서울:도서출판 신생, 1995.
86) 이한수, "성경적 상징주의해석 이론의 연구". 「상징해석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학술대회 대회사. 서울: 도서출판흰돌, 2013.5.27. p.78.
87) Benjamin Keach,「성경의 환유,은유,예표,비유,제유 해설 대사전」, 김경선역. 서울:도서출판여운사, 1994.
88) 2009.6.22. 서울교회(담임 이종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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