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경남역사]임진왜란 역사 간직한 충절의 상징 진주성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보름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임진왜란이 수개월 동안 전개되자 식량이 부족해진 일본군은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라도 지역으로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그 길목에는 천혜의 요새 ‘진주성(사적 제118호)’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32년 전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충절의 정신이 가득한 진주성을 찾았다.
고려 말 왜적 대비 석성으로 축조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던 3월 초 임진왜란의 역사를 간직한 진주성으로 향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은 가파른 산의 형세를 하고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 불린다. 진주성 북쪽에 위치해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공북문(拱北門) 앞에서 김은옥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김 해설사는 진주성 축조 시기부터 설명해 준다.
“삼국시대 때 흙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때 진주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점에 있어 서로 다투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했죠. 이후 고려 말에 왜군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종전에 흙으로 쌓았던 토성을 석성으로 쌓았답니다.”
면적 17만 1805㎡, 둘레 1760m인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진주대첩 이끈 김시민 장군
진주성 안으로 들어서자, 김시민 장군 동상이 눈에 띈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당시 진주는 군량 보급지인 전라도를 지키는 길목에 있어서 진주성을 두고 조선과 왜의 다툼이 아주 치열했습니다.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과 3800여 명의 군사로 약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김시민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과 천혜의 요새인 지형을 이용해 승리를 거둬 진주대첩이라 불렸습니다.”
성벽을 오르려는 일본군과 저지하려는 조선군의 치열한 싸움, 이곳 진주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힘을 합쳐 일본군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논개
진주성엔 나라를 지킨 또 다른 이가 있다. 바로 촉석루 앞에 있는 의암에 관련된 이야기다. 진주대첩 다음 해인 1593년 6월 왜군 10만여 명이 진주성을 공격했고, 결국 진주성은 일본군에 함락됐다. 승리에 취해 있던 일본군들의 자축연에서 논개는 곱게 단장을 하고 이 바위 위에서 왜군 수장의 허리를 껴안고 투신한다. 이때 논개 나이는 불과 열아홉이었다.
“지금은 네모반듯한 모양이지만 예전에는 뾰족뾰족하여 바위가 위험하다 하여 위암(危巖)이라 불렀어요. 논개의 순국 이후 의로운 바위라고 하여 ‘의암(義庵)’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국보 환원 추진 중인 촉석루
남강의 높은 절벽에 서서 전쟁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누각, 촉석루(矗石樓·경남 유형문화재 666호)로 향했다. 돌이 우뚝 솟은 누각이라는 뜻을 지닌 촉석루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가 되었고,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도 쓰여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불렸다.
촉석루는 1948년 국보 276호였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상당 부분 소실되는 바람에 국보가 취소됐다. 시민들의 성금과 국비를 받아 1960년에 재건되었지만, 국보의 자리를 찾진 못했다. 그 때문에 지역 향토사 학계를 중심으로 촉석루를 국보로 환원하자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진주성
주소 진주시 남강로 626(본성동)
관람 하절기(3월~10월) 05:00~23:00
동절기(11월~2월) 05:00~22:00
관람료 어른 2000원, 청소년·군인 1000원, 어린이 6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