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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에게 출발을 명령하시다 : 탈출 33,1-9
지난 시간에 33절 전반부를 3절까지 보았습니다. 약간 되짚으면서 33장부터 강의시작하십니다. 성경번역이 아주 좋은 번역입니다만, 직역했을 경우에도 한번 알아봅니다.
신부님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이 꼭 주의하셔야 할 점은 주교회의의 성경번역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을 보고 이렇게 알아들을 수도 있고 또 직역하니까 조금 여러가지 가능성이 열린다는 면에서 설명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탈출 33,1 직역
그리고 야훼가 모세에게 말씀했다
올라 -가라 / 이곳으로부터
히브리 말 문장에는 두 가지 동사가 복합적으로 쓰여져있습니다. 가다, 라는 동사와 오르다, 라는 동사가 함께 쓰여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올라라, 하기가 쉬울것 같은데 여기서는 두 동사가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탈출 33,1 직역
너와 그 백성을 / 네가 올라오게 한
이집트 땅으로부터
네가 이집트 땅으로부터 올라오게 한 너와 그 백성은 이곳으로부터 올라가라. 어디로?
탈출 33,1 직역
그 땅으로 / 내가 맹세한 /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에게 / 그리고 야곱에게
그런데 맹세한 내용은 ?
탈출 33,1 직역
너의 씨에게 / 나는 그것을 줄 것이다.
여기서 씨, 라는 말은 후손을 뜻합니다.
그것은 땅을 준다는 의미, 따라서 당사자들에게 준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조사를 이렇게 읽어보면은 거기서 하느님이 약속하실 때 당사자들 한테 주실것과 같이 약속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그러한 표현으로, 하지만 그 약속은 성조들의 당대에 막펠라에도 땅을사고 그러하지만 완전히 성취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하느님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은 언제입니까? 여호수아기에서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너고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그러면서 마지막에 스켐에서 지파 대회를 열면서 그 약속이 완전히 성취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단어가 쓰입니다. 야훼가 맹세를 합니다.
"내가 맹세한" 조금 이상합니다. 대개 맹세라는 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서, 인간이 신에게 맹세를 하는데 여기서는 야훼가 맹세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에게 야곱에게,
여기서 '맹세' 라는 단어를 그냥 직역했지만 사실 좀 의역한다면 약속한,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왜? 그런데 약속이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세라는 단어를 썼냐면? 그 어감이 맹세했을 경우에는 법적으로 묶입니다. 여기서 맹세했다는 것은 공적으로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적으로 한 얘기는 법적으로 묶이지 않습니다. 맹세는 법적, 공적 의미를 지님.
부모님들이 엄마들 한테 그렇게 하면 안되겠지만 *** 해주겠다고 해 놓고서 안해주는 경우에는 아이가 경찰에 고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ㅎㅎ
하지만 그것을 해야하는 것.
오늘날의 마인드로 생각하자면 이것이 법적, 도덕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도 법적, 도덕적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지켜 지는 맹세 수준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공약입니다. 항상 선거때 마다 후보자가 또 뽑아주세요 라고 했을 때 자신이 한 공약을 지켰나? 안지켰나? 자신이 한 공약을 안지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치명적이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공약은 아무도 안지키니까,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 가 잘 자리잡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바로 그런점에서 바로 깨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공약을 지키는 사람인가?
하느님은 여기서 그들에게 한 약속을 맹세의 수준으로 얘기합니다. 나는 법적으로 이걸 지켜야할 책임을 갖고 있다. 라는 맹세로서
탈출 33,2 직역
나는 보낼 것이다.
너의 면전에 사신
사신 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사신은 죽음의 신이 아닙니다.
왕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사신 또는 천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사라는 말을 쓰지 않으신 것은 인간적인 임금이 다른 나라에 누군가를 보낼때도 똑같은 단어 '말악' 이라는 히브리 단어를 쓸수 있기 때문에 조금은 중립적인 단어를 써보고자 해서 사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도 가능합니다.
탈출 33,2직역
나는 보낼 것이다. / 너의 면전에 /사신(천사)를
그리고 나는 몰아낼 것이다
그 가나안을 / 그 아모리를 / 그리고 그 히타이트를
그리고 그 프리즈 / 그 히위 / 그리고 그 여부스를
여기 있는 관사를 의도적으로 우리말에는 조금 부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여기다가 집어넣으셨습니다. 따라서 관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가나안인지 어떤 아모리인지 어떤 히타이트인지 어느 여부스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 보면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관사를 쓰기 위해서는 그 텍스트 안에서 이미 등장했던 어떤 것을 지칭할 때 관사를 씁니다.
이 대목에서 관사가 쓰여진 것은,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적어도 이 탈출기를 쓴 사람들은 독자들이 그들이 누군인지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 라는 관사를 집어 넣은 것입니다.
2절만 딱 내려놓고서 본다면,
그 천사의 역할은 그 민족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내는 천사는 단지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하느님의 군대처럼,
구약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하느님의 군대처럼 등장한 경우가 아시리아 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701년 그 밤에 하느님의 천사가 와서 아시리아 군대를 다 무찌르는 그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구약에서 천사, 사신의 1차적인 개념은?
야훼의 군대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이미 등장했습니다.
탈출 23,23.28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
나는 또 말벌을 너희보다 앞서 보내어, 히위족과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게 하겠다.
23장에서는 죽여버리겠다는 것이고, 여기서는 쫓아내겠다는 것입니다. 28절에서는 주석학자들이 해명하기 어려워하는 표현중에 하나입니다. 왜 ? 말벌이라는 표상이 사용되었는지 조금은 토론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무튼 말벌은 천사를 은유하는 표현입니다.
탈출 33,3 직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ki) 나는 오르지 않을 것이다 / 너의 가운데에서
(ki)히브리말 접속사입니다.
(Ki) 바로 네가 목이- 뻣뻣한 - 민족이다
내가 너를 먹지 않도록 / 그 길에서
3절에서 문법적 구조가 망가집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주어도 안나오고 동사도 안나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중복된 전승이 있는 것이라서 이것을 1절과 이어서 읽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 연결된 문장은?
1절 그리고 야훼가 모세에게 말씀했다. 올라 가라 이곳으로부터
그리고 3절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 중간에 1절 중간부터 2절까지 나와있는 내용은 편집적인 첨가이거나 아니면 다른 전승에서 이 안으로 뛰어들어 온 것으로 봅니다.
▶ 그러면서 여기에서 두번의 (ki)가 나오는데 ki 라는 접속사를 첫번째 접속사는 양보적인 의미로 두번째 접속사는 인과적인 의미로 이해합니다.
양보적인 의미에서 문장,
내가 오를지 않을 지라도 , 비록 내가 너의 가운데에서 너와 함께 또는 너에 가운데에서 오르지 않을 지라도
여기서 또 '가운데' 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이 이동하다가 텐트를 칩니다. 그 텐트를 11개의 지파, 각각의 지파들이 둥글게 텐트를 칩니다. 그리고 야훼의 천막이 그 가운데에, 레위 지파가 그 천막을 보호하는 식으로 그 가운데에 있고 각각의 지파들이 야훼의 천막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지 너와 함께가 아니라 너의 가운데에서, 내가 오르지 않을 지라도 올라가라 이곳으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런데 왜?
너희 가운데에서 오르지 않느냐?
그 이유가 설명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로 네가 목이 뻣뻣한 민족이고 그래서 내가 너를 먹지 않도록,
여기서 '먹는다'는 말은 몰살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먹어치우지 않도록, 그렇게 올라가는 길 위에서,
3절까지 읽는다면은 전첵적인 텍스트에 관점에서 본다면은 2절에서 본 사신 또는 천사가 하는 역할이 2절에서는 그 민족들을 몰아내는 역할을 하고,
1절, 2절, 3절을 함께 놓고 읽으면은 그 천사의 역할이 하느님은 같이 안가시니까 그 천사를 보내셔서 너희들을 인도하시겠다는 라는 중복적인 혹은 중의적인 애매한 천사의 역할이 보여집니다.
그리고 4절~~~
탈출 33,4 직역
그리고 그 백성은 들었다 / 이 악함의 말씀을
그리고 그들은 비통해 했다
그리고 각자 달지 않았다
그의 장식을 / 그의 위에
여기서 신부님은 직역하시기 위해서 '이 악함의 말씀을' 이라고 하셨는데 하느님이 악하다는 표현은 오늘날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보면은 하느님이 누군가의 마음에 악령을 보내서 이런식의 따라서 구약의 관점에서는 유일한 하느님이라고 얘기하다 보니까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모두 하느님이 주관한다는 의미로, 현대 신학의 입장에서는 신부님들이 굉징히 어려워하시는 담론 중에 하나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기원하느냐?
그것도 하느님으로부터 온것이냐? 아니면 그렇치 않느냐?
인간의 모든 불행도 역시 하느님이 원인이 되는 것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이러한 부분이 현대 신학 안에서 굉장히 풀기 어려워 하는 문제중에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이 텍스트 안에서는 악의 기원까지도 하느님이 주관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선하게 보이는 것, 악하게 보이는 것이 있지만은 하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것이 다 다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이 주관한다라는 것을 텍스트에 행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 신학을 알고 있는 번역자들은 '이 악함의 말씀을' 이렇게 직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어 번역이나 독일이나 이태리 번역에서도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려고 하고 우리 성경에서는
'이렇듯 참담한 말씀을 ' 이라고 쓴겁니다.
부정적인 의도를 집어 넣어서 현대 신학을 반영하는 의역을 우리 성경이나 다른 현대어 번역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와 너의 가운데에서 함께 오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는 굉장히 알아 들을 수 없게 들리는 겁니다.
사실상 이 부분은 이 앞선 대목에서 이스라엘이 질문했던 부분입니다.
탈출 17장의 마싸와 므리바 라는 장소에서 이스라엘이 던졌던 질문이
'야훼가 과연 우리 가운데에 있는가? 없는가?' 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인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들에게, 그들 가운데에 함께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 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습 안에서 인간의 어떤 나약함을 만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우리도 신앙이 약해지는 상황을 경험합니다. 하느님이 안계신것처럼 느껴질 때,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성장 가운데에서 한번은 경험하게 되는 그와 같은 위기인것 같습니다. 신부님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막타니...'라고 기도 하실때 말씀에 위로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시편의 한 대목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의 어떤 절망을 보여주시는,
'아!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도 이렇게 절망하셨구나...' 라는 마음으로
물론 그 부분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하시는 신학자들도 있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안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런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그 역할을 잘 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고 좌절하게 되고 그리고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엉뚱한 데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와 같은 마음을 갖게됩니다.
교회라는 것 역시 성직자, 수도자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삶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통해 하다' 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여기서 비통해 한다는 것은,
단지 인간의 내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비통해하는 것은 총체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적인 그들이 꾸미는 그런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변화를 외적으로도 보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외적이 표상은?
옷을 찢고, 재를 뿌리고, 베옷을 입고 하는 그리고 신발을 벗은 채로 발이 아플지라도 걸어다니는 그와 같은 모습들입니다.
그 비통함을 외적으로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전례 안에 까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 비통함을 재를 머리에 얹음으로써 표현합니다.
성서적으로 보자면은 에제 24,16-17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즉 여기서는 외적 표현까지도 제한 하는 것입니다.
에제 26,16
바다의 제후들은 모두 왕좌에서 내려와, 예복을 치우고 수놓은 옷을 벗을 것이다. 공포를 옷처럼 입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줄곧 떨며, 너 때문에 질겁할 것이다.
비통함, 공포, 두려움 이런것을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적인 표상들 위에서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광야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기본적인 패물을 한것입니다.
그런 패물을 몸에서 떼어내는 그의 장식을 그의 위에서 달지 않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에서는 그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서 금고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야훼를 위해서는 어떤 장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떼어놓으라고 합니다.
탈출 33,5 직역
그리고 야훼는 모세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해라
너희들은 목이 - 뻣뻣한 - 백성이다
한 순간 / 내가 오른다면 / 네 가운데에서
그리고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 그리고 이제
내려 놓아라 / 너의 장식 / 너의 위로부터
이미 내려놓았는데 또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탈출 33,5 직역
그리하여 내가 알 수 있도록
무엇을 내가 너희에게 할 수 있을 지
여기에서 분명히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아! 비슷한 이야기가 두개가 있었구나! 라는 의미로 한 이야기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난 너희 가운데에서 같이 안가겠다. 왜냐하면 너희가 목이 뻣뻣한 - 백성이라서 내가 너희랑 같이 가다가는 내가 너희를 죽여버릴 지도 몰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비통해 하면서 각자의 몸에 있는 그와 같은 장식들을 내려 놓았다. 라는 이야기가 하나있고,
두번째는 하느님께서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 가운데에서 간다면 너희들을 죽여버릴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내가 이렇게 화가 났으니까 너희는 그와 같은 장식들을 너희 몸에서 떼어놓아 그리고 나서 내가 좀 생각해 볼께. ' 라는 약간은 좀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가지의 이야기가 1절~ 6절 안에서 발견됩니다.
4절에서 이미 백성들은 이미 장식을 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편집적인 측면에서 5절의 명령이 왜 이미 완결된 행위를 다시 명령하시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습니다.
단지 4절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앞에 있는 3절, 4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역시 행간에서 우리는 대단히 큰 야훼의 분노를 느낄수가 있고 5절에서 특별히 그 대목을 짚어 낸다면,
'한순간' 그냥 너희 가운데에서 계속 같이 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이라도 함께있게 된다면 그 순간에 내가 너희를 내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대단히 야훼의 분노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단지 야훼의 결정이 5절의 내용은 완결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절대로 안가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 패물부터 떼어놓고 회개해봐. 그러면 내가 그때 그 태도를 보고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지를 조금더 생각해 보겠다.' 라는 어감을 우리는 5절에서 듣게 됩니다.
그래서 6절~
탈출 33,6 직역
그리고 이스라엘 - 자손은 벗었다
그들의 장식을 / 호렙의 산으로부터
여기서 '벗다' 라는 동사를 히브리 말로 '나짤' 이라고 합니다. 나짤(נצל)이라는 동사는 단지 그냥 뭔가를 벗었다. 라는 인간의 행위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 을 함께 뜻합니다.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
예를들어 사람들이 아침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어떤 사람은 조금 고민을 합니다.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라고, 수녀님들은 그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우십니다. 입으실게 한가지 밖에 없으십니다.
유니폼을 입으시는 분들은 그런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오늘의 옷에 어떤 귀걸이를 하면 좋을까? 그리고 어떤 신발을 신을까? 코디를 중요시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그런것에서 떠나계시는 사제이심에도 지하철 안에서 젊은이들의 옷차림을 보고서 '신경을 썼는데 색의 배색이 좀....그렇구나.' 라는 세속적인 생각을 하신적도 있으시다고....합니다.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단추를 엇갈리게해서 스웨터를 입은 젊은이를 보고서 “자네 옷을 ...잘못 입었네.' 라고 할지 말지를…정말 오래 고민만 하시고 내리셨는데,
당시에 청년들 강의가 있으셔서 청년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신부님, 그게 요즘 유행이에요."
무언가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그와 같은 '벗다' 의 의미의 동사입니다.
또 이 표현이 이집트인들이 은과 금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줄때 탈출 3장.11장. 1장에서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집트인들이 은과 금을 벗었을 때,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도 자신들의 장식을 벗어야 합니다.
따라서 탈출 33,1절~ 6절을 쭈욱 읽다 보면 사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호렙산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갈때 자신들의 장식을 벗어야만 했는가를 설명하는 이야기 처럼 들립니다.
그 이야기 자체에서 물론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이제부터의 문제는 야훼 하느님께서 그 시나이 산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함께 갈것이냐? 그렇지 않을것이냐? 의 문제인데,
1절부터 6절을 딱 떼어놓고 보면, 왜? 그들이 호렙 산으로 갈 때 그렇게 장식을 떼어야만 했는가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신부님은 이 대목을 읽으시면서 '그렇다면 혹시?? 이게 유다의 어떤 전례적인 규정들과 관련이 있지 않나?' 유다에서 보면은 예루살렘으로 순례 축제들이 있습니다.
순례 축제를 가는 사람들은 이런 장식을 다 벗어 놓고 가야한다는 그런 규정과 관련되어 있는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성경을 열심히 찾으셨습니다.
그런 규정은 없으셨다고 합니다.
장식이라는 말과 관련된 그런 규정을 신부님은 발견하지 못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만남의 천막 탈출 33,7 부터의 내용입니다.
탈출 33,7 직역
그리고 모세는 치곤 했다 / 그 천막을
그리고 그는 그를 위해 치곤 했다
그 진영의 밖에 / 그 진영으로부터 멀찌 감치
그리고 그는 그것을 부르곤 했다 / 만남의 성막
그리고 있곤 했다 / 야훼를 찾는 모든 이는
그는 나가곤 했다 / 만남의 천막으로 / 그 진영의 밖에(있는)
지금까지는 뭐뭐 했다. 그리고 뭐뭐 했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는 신부님께서 말의 끝부분을 바꾸셨습니다.
뭐뭐하곤 했다. 로
왜냐하면 여기서 이상하게도 의도적으로 미완료 동사가 계속 등장합니다. 지금까지는 완료형 동사가 계속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뭐뭐 했다. 그리고 뭐뭐했다. 그리고 뭐뭐했다. 야훼가 말씀하셨다. 모세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이 장식을 벗었다. 이러한 이야기 였는데
▶ 여기에서부터 미완료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탈출 33,7-11 까지의 내용은 전체에 이야기의 흐름에서 시간적으로 빠져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고 모세가 증언판을 받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갔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보고 화가나서 그 증언판을 던져버렸고 그리고 나서 레위인들과 함께 죄지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고 이러한 시간의 흐름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빠져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만남의 천막을 언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그것보다 앞선 사건일 수도 있고 또는 그것보다 미래의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여기서 왜 이것을 치곤했다. 라고 생각하시나면 이것은 그런 광야에서의 시간 전체를 놓고서 모세가 한번 친게 아니라 모세가 어디갔다가 이제 앞으로 미래적인 의미지만 앞으로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이런 천막을 쳤다. 접었다.
쳤다. 접었다. 하는 것들을 좀 반복적으로 표현하시는 것으로 이 미완료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쯤되면 탈출기 전체를 읽으신 분들은 신부님께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탈출기 후반에 보면은 성막이 완성되니까요,
성막이 완성되면 천막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천막을 광야 시절에도 폈다는 말인가? 에 대한 반론을 말입니다.
그점에 관해서 나중에 설명을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만, 천막과 성막사이에 텍스트 자체가 갖고 있는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있지 않은지....설명하셨습니다.
이 천막은 탈출18,7에서 이미 언급된 천막과 동일한 천막이기에 ,
탈출 18,7
모세는 장인을 맞으로 나가 엎드려 절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함께 천막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여기서도 관사를 붙입니다.
그 천막을 쳤는데 문제는?
그리고 그는 그를 위해 치곤했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첫번째 그는 모세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일수도 있고 야훼일수도 있고 또는 계약 궤 일수도 있습니다.
아직 계약 궤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이 이야기 전체가 시간의 전체 흐름에서 빠져나와있기 때문에 미래적인 이야기를 앞당겨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계약 궤 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만남의 천막이라고 했을 때 만남의 천막을 히브리 말로 모엗 오헬(מועד אהל)이라고 부릅니다. 모엗(מועד)이 만남이라는 소리인데 계약 궤를 얘기하는 또는 증언판을 얘기하는 증언, 증인이라는 단어들이 '엗' 또는 '앋' , '에다' 이와 같은 발음이 납니다.
따라서 모엗, 엗, 에다 에서 그 안에 갖고 있는 언어의 유희가 가능한 만남, 증언, 증인, 이런것들로 언어의 유희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런것들 치곤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부르곤 했다. 만남의 천막이라고,
그리고 나서 그 만남의 천막에는 누가 오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있곤 했다. 누가 있었냐 하면은 야훼를 찾는이가 있곤 했다.
야훼를 찾는다는 소리는? 그냥 하느님을 찾는다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성당에 가서 하느님을 찾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러 또는 성당에 갈 때는 미사하러 갑니다.
여기서 찾는다.라는 표현을 구약에 맥락 안에서 이해해 본다면 ,
▶ 찾는다 :구약의 맥락 안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호세 5,15
그들이 죄를 깨닫고 내 얼굴을 찾을 때까지,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 있으리라.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얼굴 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였는데요, 이것은 앞으로 등장할 내용과 서로 맞닿아 있어서 신부님이 좀 강조하셔서 이 구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8절
탈출 33,8 직역
그리고 모세가 나갈 때/ 그 천막으로
모든 백성은 일어서곤 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 천막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그 천막은 진영과 좀 동떨어진 곳에서 있었는데 하느님의 거룩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속적인 것이 서로 중복되지 않도록,
앞선 대목에서 시나이 산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하느님이 금그어 놓으시고 그 선을 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그 구분됨을 말씀하십니다.
탈출 33.8 직역
그리고 모세가 나갈 때/ 그 천막으로
모든 백성은 일어서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있곤 했다 / 각각 자신의 천막 입구에서
그리고 그들은 지켜보곤 했다 / 모세의 뒤에서
그의 옴(도착)까지 / 그 천막으로
여기서 지켜본다는 것은 1차적으로 일정한 방향을 주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는 쭈욱 사열하고 있는 군인들이 지휘관을 주목하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시면 됩니다.
탈출 33,9 직역
그리고 모세가 도착했을 때 / 그 천막으로
구름 기둥이 내려오곤 했다
그리고 그는 자리잡곤 했다 / 그 천막의 입구에
그리고 그는 말씀하곤 했다 / 모세와 함께
여기서 구름 기둥이라는 것은 ? 야훼이 이동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문법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구름기둥이 내려오곤 했다. 그리고 그는 자리잡곤 했다. 에서의 '그'가 구름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름 기둥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리잡곤 했다. 에서 이미 그 대명사가 야훼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은 구름기둥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조금 애매한 경우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모세가 도착했을 때 구름 기둥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구름기둥이 천막 입구에 자리 잡고 있고 하는님은 천막 안으로 들어와서 모세와 얘기하는 그림들을 그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단지 탈출기 텍스트를 이미 다 읽으신 분들에게는 하느님의 얼굴을 볼수 없는데??? 그 천막에서 들어와서 서로 등대고 이야기했나? 이런식의 충돌,
따라서 탈출기 얘기 안에서도 어떨때는 모세와 하느님이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와 같은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어떨때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안된다는 두 흐름이 탈출기 안에서 동시에 발견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