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무게 외 4편
박영화
꿈이었다
점점 불어나는 물
물고기 한 마리
푸른 바다를 닮은 꿈
바다 한가득
여물지 않은 어둠의 무게
꿈과 물이 엉키고,
투신!
떠밀린 섬이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함몰하는
바다 밑 적요
침묵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나비 떼
장미 미용실
꽃은 그리움이라 했지, 커피 향 진하게 코끝을 타고 흐르는 날이었어, 라디오에선 사랑이 필요할 뿐이라는 비틀즈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지, 늙은 고양이 한 마리 꼬리를 살랑이며 리듬을 타고 있었어, 넌 좌우대칭까지 맞춰가며 두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 그런 너의 눈초리가 제법 진지했나 봐, 낯선 눈빛에서 읽어내는 경계, 불안은 전염성이 강해, 먹이를 찾아 헤매던 킬리만자로 표범이 마른침을 삼켜,
어떻게 해드릴까요?
장미 스타일?
내 눈은 부지런히 네 손을 쫓고 있어 장미꽃이 예쁘게 피고 있었어
눈빛과 눈빛이 얽혀들며 우린 서로 마주 보고 웃었어, 한낮의 햇살이 유리창에 부서졌다 돌아가는 사이, 이번엔 잘 안 풀어질 거라는 너의 말, 아무렴 술술 풀리기만 하면 재미없지, 줄장미 넝쿨에도 걸리고 매듭처럼 꼬이기도 해야 제맛이라며, 넌 은근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지, 한낮이 어느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천장에선 분홍 나비 여럿 날아다녔어, 순간 거울 건너편으로 어미 같은 불두화 한 송이 피어났지, 불안을 쫓던 표범은 티브이 속으로 몸을 숨기고, 고흐의 해바라기가 벽을 허물고 나와 떼춤을 추었어, 나비 잡으려 뛰어오르는 장미
커피, 라디오, 비틀즈, 고양이, 나비 그리고 불두화 한 송이
장미 미용실에는 그리운 이름들이 살고 있어
개심사 명부전
급커브 구간,
천천히 돌아야 했다
깨어진 유리 파편이 저녁 햇살에 반짝인다
욕망은 도로 위에서 더욱 단단하다
불면은 눅눅한 어둠을 갈아먹고도
좀처럼 죽지 않는다
하얀 벽에 그어지던 붉은 실금
길은 선을 넘지 않았다
화병 속 마른 꽃 한 송이
침묵에 잠기고
가을이 다 타도록
개심사 명부전 아래 돌이끼 선명하다
슬픔을 토해낸
심장을 꺼내놓고도 오랫동안 살아있다
오필리아를 위한 파반느
비는 처서를 적시고
처서는 바람을 물고 오고
급히 떠나느라 흘리고 간
저기 연못 속
꽃잎은 안녕처럼 피어나고
꽃의 혓바닥은 달콤해
이별은 짧고
흔들리는 오후 네 시
진홍빛 감잎 한 장
지키지 못할 약속에 화르르 마음 내려놓는다
꽃에 누워, 홀로 누워
어느 인연의 길 붉게 물들인다
배롱꽃 유서인 양 몸을 날린다
쏙독새
불면이 불러들인 소요 앞에서
나는 당신의 문장을 펼친다
오래전 잃어버린 당신의 말,
호명하듯 여름밤을 깨운다
새벽을 털며 깨어난 슬픔의 행간 사이로
싹둑, 마음 잘려 나간다
진작 끝이 났다고
심장 깊숙이 박히는 쏙독새 울음소리
어둠을 자르고 날아와
서툰 그리움을 앓는다
‘애지’ 당선소감
박영화
노트북 하나 들고 나만의 아지트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순간이었습니다. 두 눈에 선명하게 박히던 '애지 봄호 당선' 문자, 순간 머릿속으로 비행기 한 대 빠르게 날아갑니다.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기쁘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이것이 꿈은 아닐까? 춤이라도 추며 자랑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면 왠지 꿈에서 깰 것 같아 입을 닫은 채 긴 하루를 보냈습니다.
시는 나의 오랜 꿈이자 마지막 갈망이기도 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시인이 되는 꿈을 꾸었지만, 주부로 산 지 이십 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시를 찾았습니다. 시어 하나 찾기 위해 밤이면 히말라야 설산을 헤맸고 유년의 강을 건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시는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손 뻗으면 잡힐 듯한데 막상 그곳에도 시는 없었습니다. 다른 건 다 접고 오로지 시만 생각하며 기나긴 짝사랑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어느 날 얼어 죽은 줄 알았던 군자란이 꽃대를 피워 올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닫습니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짓는 거라고, 아이를 낳듯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시는 그런 거라고, 시인은 그런 사람이라고, 자연에서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두려움이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첫발을 뗀 만큼 지치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갈 것입니다. 기나긴 여행길 기꺼이 문학의 길을 열어주신 김가연 선생님, 그리고 서산문학예술연구소 문학아카데미 식구들 모두 감사합니다. 오랜 꿈을 선물로 안겨준 애지 심사위원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 큰 꿈을 꾸고 활짝 날아오르라는 격려인 줄 압니다. 마지막으로 긴 시간 믿고 격려해 준, 가장 든든한 후원자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들 그리고 갸르쏭. 핫산 사랑합니다. 영광스런 이 상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박영화
bluestar1da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