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외 4편
장 효 종
가지 끝에 눈망울이 매달렸다
한 칸씩 더 올라갈수록 다리가 떨리고
한 손을 놓아야만 올라갈 수 있다는데
나는 어느 순간 손을 놓아야 하는가
꼭대기에 올라가야 손이 닿는
솟대 위의 열매
없는 바람은 왜 사다리를 스치는가
올라갈수록 그림자는 멀어지고
나는 왜 멀어질수록 자꾸만 떠는지
달콤한 것은 왜 감을 닮았는지
이대로 내려가기엔 목이 허전하다
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나비처럼
사다리를 오를 때
가을빛보다 더 빨갛게 물들어가는
내 사랑의 목젖이 보인다
가지가 부러질수록 감은 더 시퍼런 공중에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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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길 가운데 멈춰선
동그라미 하나
누가 나를 힘껏 차 주었으면 좋겠다
비명이 깊을수록 멀리 날아간다는데
나는 제대로 한번 차이지도 못하고
문 앞에 선다
저 문을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얼굴에 멍자국 하나 없이
그림자를 떨구어 본 적도 없이
굴러굴러 너에게로 가야하는데
골목길은 가파르기만 하다
흙 묻은 공이 뻔뻔하다
오늘도 나는 벽시계를 먹고야 만다
그것도 사랑이라고 했나
솟구치는 멍울마다
동그라미 동그라미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길목에
커다란 눈덩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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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유리병속에 낙타의 발자국이 있다
더 뛰어내릴 것이 없을 만큼 한쪽이 비어가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다시 골목 속으로 돌아올 때
그림자가 추적거린다는 것을
불빛에 들킨 나
그리고 낙타의 등짝 같은 골목사람들
낙타의 짐을 내릴 수가 없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하는, 그래서
가로등 밑에서 보았던 민들레 한 송이처럼
아내의 전등을 켜고 싶은 밤
모래 묻은 지폐 몇 장을 내려놓는다
길이 사막이라서
그곳에 나무 한 그루 심는 것조차 힘들다
주머니 속에 모래만 가득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털어버린 주머니가 모래시계의 공간처럼 말이 없다
나는 뒤집혀지지 못했으므로 내속의 것 또한 흐르지 않는다
물구나무서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건지
누워있는 방이 사막이다
삽날에 묻은 별이 초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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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의 방
애니는 억울하게 죽었다 건강했던 어린 애니는 메리 킹스 클로스에 감금되고 그곳에 격리된 흑사병 환자들로부터 전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애니는 수백미터 지하에 있는 메리 킹스 클로스의 골목어귀에 매장되고 로얄 마일 거리의 왕족과 귀족들은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쳤다 많은 세월이 지나고 묻히고 잊혀졌던 클로스들이 다시 열리자 메리 킹스 클로스의 애니는 숨을 쉬었다 애니유령이라는 이름으로 배회하는 그녀의 방을 만들어 사람들은 인형으로 그득 채웠다
건널목 앞에 섰다
애니가 흔들던 메리 킹스 클로스의 문이 신호등에서 깜빡거릴 때
길을 건넌다
길엔 바람의 숫자만큼이나 문이 많으나
클로스의 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한 애니는 얼마나 많은 문들을 흔들어보았을까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문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것인가
엉켜 자란 나뭇가지를 자른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길은 왜 클로스 같다고 생각이 드는 건지
애니의 울음소리가 왜 신호등에서 들리는지
내 머무는 곳곳마다 애니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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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벽
투명한 것이 투명한 것에 다가온다 더 이상 투명해질 수 없는 낙타가 투명을 위해서 몸을 닦는다 투명은 왜 까말까 까매져야 투명할 수 있다고 믿는 까마중이 제 몸을 까맣게 물들여가면서 투명해진다
로프에 매달려 유리벽을 닦는데 미치도록 너의 뒷모습을 보아야만 비로소 나는 별이 되는 것 있는 것처럼 없고 없는 것처럼 있는 저쪽에 낙타가 있다 바람얼룩 사이로 보이는 낙타의 문과 낙타의 벽과 낙타의 그림자를 넌지시 응시할 때 들켜버린 내부혈관의 호흡소리가 유리창을 때린다
내가 너였다가 네가 나였다가 신의 얼굴이었다가 짐승의 얼굴이었다가 꽃잎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한손으로 문지른 투명한 유리 사이로 모르는 사람처럼 얼굴이 반사될 때 21층의 로프가 순간, 떤다 발을 들일 수 없는 투명한 장막을 두고 나는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가
걸어가는 것은 닦는 것이라는 생각
닦아낸 것은 얼룩이었다 눈물이었다 나의 나였다 낙타가 낙타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창이 열린다면 비로소 나는 하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벽을 깨트리며 걸어왔을까
아직도 나와 나 사이에는 얼룩진 유리벽이 놓여있다 로프에 매달린 눈망울이 쓸쓸하고 아래는 까마득하다
유리벽에 비친 얼굴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장효종 2015년 {애지}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