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쟁이란 무엇이며, 위험한 이유
김기봉 /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집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을 홀로 보존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이것이 통사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반드시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국가가 몸이라면, 역사는 정신이다. 일제강점기라는 36년 동안의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한국은 보이지 않아도 한국사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박은식 선생 같은 애국지사가 있었던 덕분이다.
오늘날에는 우리의 몸과 정신인 한국과 한국사가 온전히 있다. 그런데 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전쟁이 재연되는가? 근래 벌어지는 역사 전쟁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건국절 논쟁이다. 여기서 건국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역사란 몸이 아닌 정신에 관한 것인데, 왜 한국이란 형체가 언제 다시 만들어졌는가의 문제로 내전까지 벌여야 하는가? 건국절 논쟁과 연관된 주제는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추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조차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세워진 정부의 대통령임을 천명했는데, 뉴라이트는 그를 대한민국을 건국한 국부로 기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해 지하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런 주장이 자기모순임을 모르지 않는 뉴라이트가 굳이 역사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 국가를 수립한 이후의 문제는 대한민국이 어떤 국가가 될 것인가이다. 한국사에서 국가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왕정과 공화정이다. 대한제국까지 한국사는 일반적으로 왕조 국가의 교체로 서술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미는 왕이 없는 정치체제로서 공화정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이 발현되는 한국사의 새 장이 열렸다는 점이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대한민국 국가가 탄생했으며, 어떤 국가 체제를 지향할지를 헌법 제1조로 명시했다.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1항의 민주공화국은 국가의 형태 및 정체를 규정한 것이고, 2항은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에 관한 것으로,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통치 권력의 행사는 최종적으로 국민의 의사에 따라 행해진다는 국민주권의 원리를 천명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규정하는 제일 원칙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대한민국의 기조를 표현한 문장은 없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이후 역사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어떻게 하면 모든 국민의, 모든 국민에 의한, 모든 국민을 위한 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돼야 한다.
그런 민주공화국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이끈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는 조국이라 표현했다. 그에게 조국은 단지 태어난 땅이 아니라 공유된 정치적 이상과 사랑의 감정으로서, 개인과 인류를 이어주는 매개체를 의미했다. 그런 조국이 있기에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조국은 특정 인종이나 이념을 기준으로 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조상과 현재의 우리 그리고 미래의 후손을 역사의 정신으로 통합한 파트너십으로 성립한다.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희생당한 전몰자를 추모하는 연설에서 "온 세상이 탁월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지금의 한국은 순국선열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나라이고, 우리의 임무는 그 조국을 미래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그 조국이 어떤 국가인가를 천명한 것이 바로 헌법 제1조다. 우리의 조국은 국민주권의 원리로 성립된 민주공화국이고, 그런 조국을 위해 사는 시민종교를 세속적으로 표현한 용어가 헌법 애국주의다.
미래의 한국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의 한국인과는 다른 인종과 문화를 가진 이민자들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저출산 사회로 변모하는 추세에서 그들의 조국이 한국이 되지 않으면, 한국이란 국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 뉴라이트가 금과옥조로 삼는 자유민주주의가 가지는 치명적인 한계는 민주공화국을 위한 포용의 용광로가 아닌 반공국가를 위한 배제의 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역사 전쟁의 내전으로 조국이 갈라져서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공을 통해 선진국으로 도약한 이후 또 한 번의 새역사를 창조하는 혁신은 불가능하다. 포용과 혁신을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냉전 논리로 조국을 내전 상태로 휩싸이게 만들기보다는 통합을 위한 민주공화국 시민종교를 고양할 수 있는 역사 정신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 지금의 역사 전쟁은 57년 지기 죽마고우도 갈라서게 하는 종교전쟁을 방불케 한다. 목욕물이 더럽다고 민주공화국이라는 애까지 버릴 수 있는 위기를 자초할 수 있기에 휴전이 필요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내전이 조국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과연 무엇을 위한 역사 전쟁인가에 대해 냉철하게 반성해 보자.
[출처] :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성숙의 불씨’, 903호, 2024.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