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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특징
36: 8-19
8.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앙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9. 매폭의 장은 이십 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0. 그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그 다섯 폭을 서로 연하고
11.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를 만들되
12. 그 연락할 한 폭에 고 오십을 달고 다른 연락할 한 폭의 가에도 고 오십을 달아 그 고들이 서로 대하게 하고
13.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어 그 갈고리로 두 앙장을 연하여 한 막을 이루었더라 14.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십 일폭을 만들었으니
15. 각 폭의 장은 삼십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십 일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6.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하고
17. 앙장을 연락할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18.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어 그 앙장을 연합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19.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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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집값이 비정상으로 비싼 것 같습니다. 집을 가진 사람이야 아파트 값이 오르면 재산이 늘겠지만, 집이 없는 사람은 내 집 장만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집 없는 설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제나 주인 눈치 보며 살아야 하고, 언제라도 이사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도 엄청나게 이사를 많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이사를 자주 할 것을 각오하시고, 자신의 성전을 자주 이사할 수 있도록 조립식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집이 없어서 그러셨을까요? 그게 참 궁금하지요?
또 하나 궁금증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인데, 이 땅위에 하나님의 집이 과연 필요할까요? 더구나 하나님은 이 지구나 태양보다도 크신 분인데, 이 좁은 지구위에 하나님이 계실 집을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요?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오늘 당신의 집을 성막으로 지으라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공부해 보겠습니다.
사실은 이 땅위에 하나님이 사실 집이 필요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사실 집을 인간이 짓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집을 지으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만나주시고 지켜주시고 축복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너무나 크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집은 엄청나게 크고 화려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으라고 주신 설계도를 보면 하나님의 집은 놀랍게도 조그만 조립식 건물이었습니다. 전체 면적이 30평도 못됩니다. 요즘도 가끔 조립식 건물을 보게 되는데, 이 조립식 건물은 임시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짓는 건물만 못합니다. 여러분이 25평 조립식 집에서 산다면 좀 창피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성전을 조립식으로 지으라고 하셨고, 그 조립식 건물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제로 성막을 짓는 내용입니다. 출25장에서 31장까지를 보면 “너희가 앞으로 이런 모양으로 성막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갈 기구들을 만들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과 기구들을 만드는 것을 본문이 보여줍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었던 성막의 특징들을 살피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막은 겉은 수수하나 안은 영광스러웠습니다.
대개의 유목민들은 텐트생활을 합니다. 민족에 따라서 텐트의 모양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텐트 중앙에 하나나 두 개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위에 텐트를 입히면 가운데가 뾰죽 솟은 텐트가 되는 것입니다. 텐트 중앙에 높은 기둥을 세우는 것은 그렇게 해야 빗물이 잘 흘러내리고 바람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목민의 텐트라 하더라도 추장이나 귀족의 텐트는 중앙을 아주 높게 하고 화려한 천을 덮어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막에는 중앙에 솟은 뾰죽 솟은 기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사방에 삥 둘러 널빤지를 세웠는데 남쪽과 북쪽을 담당하는 양쪽 벽은 20개씩 세웠고 서쪽 벽은 여섯 개를 세웠으며, 동쪽은 입구이기 때문에 널빤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널빤지들은 쉬띰나무라고 하는 광야에서 자라는 가시나무로 만들고 순금으로 감쌌으며, 널빤지중간에 고리를 달아서 채로 죽 꿰었으므로 견고한 벽을 가진 텐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천막을 덮어놓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기둥이 없고 가운데는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한 것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기둥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외형이 화려한 것 보다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장애물이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을 이 건물의 구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이나 천주교의 성당들을 보면 중간에 많은 기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설계하신 성전은 기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기둥 뒤에 숨는 신이 아니라 친히 백성과 함께 계시며 동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지붕을 덮은 천막은 네 겹인데, 맨 안쪽의 천막은 성막의 천장을 이루는 하얀 세마포였는데, 여기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여러 천사의 모양을 수놓아서 성전 안에서 올려다볼 때 천정에는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위에는 염소 털로 짠 천막을 입혔는데, 이 염소 털은 요즘으로 하면 단열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붉은 색 수양의 가죽으로 만든 텐트를 덮었는데 그것은 견고한 지붕 역할을 했고, 맨 위에는 물개 가죽을 입혔는데 이 물개 가죽은 방수지붕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외모로 보기에 참으로 보잘것없게 느껴질 정도로 작고 수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들도 텐트로 임시 막사를 짓는데, 옛날에도 전쟁에 나간 왕이나 장수들의 텐트는 지붕이 높고 색깔이 화려해서 멀리서도 그 위엄과 권세가 돋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집은 비록 텐트라 할지라도 얼마나 크고 화려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친히 설계해 주신 하나님의 장막은 지붕이 높이 들리지도 않은 평평한 지붕이었고 그 바깥에 보이는 색깔도 우중충한 물개가죽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보면서 ‘도대체 이처럼 보잘 것 없는 텐트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수수했습니다.
성전의 외모가 왜 그렇게 초라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하신 성품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습을 치장하심으로 사람들의 눈을 끌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겉모습을 평범하게 하심으로서 누구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안의 모습입니다. 그 안의 벽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찬란할 수가 없었습니다. 널빤지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지만 모두 금으로 쌌기 때문에 성전의 내면은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했습니다. 그리고 천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수놓아져 있었기 때문에 과연 여기가 하늘인지 땅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온갖 아름답고 찬란한 영광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진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분처럼 보였습니다. 부자도 아니요 학식을 가진 자도 아니요 외모도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라고 예언한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갈릴리 사람들을 꼭 “갈릴리인”이라고 차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가 시골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한번 그분을 만나서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거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외모는 그렇게 보잘 것 없으신데, 누구든지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그가 하나님이심을 철저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과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입을 벌려서 말씀하시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 입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들었고 사랑을 느꼈으며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한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제한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끼리 만나서 교제하면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처음에는 좀 괜찮은 것 같다가도 조금만 지나고 나면 바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자기 자랑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무의미한 농담과 썩은 이야기가 거침없이 흘러나옵니다. 그 사람도 별수 없는 인간이라는 증명인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사귀어도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끊임없는 지혜와 사랑의 말씀들이 흘러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당신이 만난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있으며, 지금 무슨 문제가 있으며, 어떤 인생을 살아 왔는지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를 치료하는 말씀이고 능력을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움직일 때 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곤경에 처한 혼인집을 돕기도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로 굶주린 군중 오천명을 먹여주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물위로 걸어가셨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으며,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만 만지고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실 수 없는 것이 없었고 예수님에게는 노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아멘이었습니다. 이것이 우중충한 텐트로 감추어진 성전 내부의 영광스런 모습의 의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배당의 화려한 외모를 보고 찾아옵니다. 어느 교회가 시설이 좋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느냐고 외모를 따집니다. 그러나 교회의 원형인 성막은 모습이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도 가난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안에 들어와 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없는 보배로운 축복이 충만한 곳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용서와 능력이 공급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들어와 예배를 드릴 때 이미 우리는 사면이 금으로 싸여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온 것이며, 하나님의 보물창고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지붕도 높지 않고 하늘을 찌르는 기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깊이 들어와 보면 놀라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성전 안에 모인 금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 자신이고, 그들에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사죄와 구원의 영광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은 초라한 사람들이 아니라 금보다 귀한 믿음이요, 그들 머리위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둘째, 하나님의 성막은 이동식이었습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는 이동을 위해서 조립하고 분해할 수 있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이방의 어떤 나라에도 자신들의 신전을 이동식으로 짓는 민족은 지구상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이동식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아마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조립식으로 짓는다고 하면 모두가 비웃으면서 무슨 신전을 조립식으로 짓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전을 저 한적한 곳에 거대한 규모로 짓고, 신에게 제사할 때만 그곳으로 찾아가곤 했습니다. 요르단에 가면 신 7대 불가사의라고 페트라 유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위산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신전입니다. 그런데 그 신전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화려한 성전을 짓는 것 보다는 그들이 생활하는 한 가운데서 계시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여행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늘 함께 계시려면 조립하고 이동할 수 있는 텐트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엄한 외모가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간편한 텐트성전을 짓게 하시고 그들이 진을 구축할 때 먼저 가운데 성막을 조립한 다음에 사방으로 세 지파씩 12지파의 위치를 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말씀을 행동으로 보증하신 것이 성막을 이동식 텐트로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장소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어디나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에 있던지 언제나 동행하며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각기 벽돌집을 짓고 살 때에도 500년이 지나도록 고정식 성전을 돌로 지으라고 하시지 않았고, 다윗이 요구할 때에도 허락하지 않으시다가 솔로몬 때에야 허락하셨는데, 하나님은 이 돌로 만든 성전을 썩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돌로 성전을 지은 뒤에는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이 후퇴하였고 결국 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돌로 만든 고정식 성전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언제라도 그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게 하려고 당신의 집이라고 일컫는 성막을 조립식으로 만들어서 늘 메고 다니면서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 들판에서 꿈을 꾼 뒤에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서, 자기가 베게로 삼았던 돌멩이를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맹세하였습니다.
우리가 모였을 때 물론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도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에도 따라와 동거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음을 생활 속에서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는 성전을 분해해서 널빤지 하나씩을 들고 이동하다가, 진을 칠 때에는 가지고 있던 널빤지들을 모아서 다시 성막을 조립하여 세웠습니다. 우리 성도 한사람, 한사람은 성막의 널빤지 한 조각씩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함께 모일 때는 널빤지들을 조립해서 하나의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성막을 해체해서 널빤지 하나씩을 들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그 판자를 세우고,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돌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며 순종의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장막을 조립하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할 장소를 찾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함께 노력할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과 순종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움직이는 성전의 의미입니다. 이런 움직이는 성전의 개념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도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소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 가든지 우리와 함께 가시며, 그곳과 그곳에 간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순종할 때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삽시다.
셋째, 성막 안은 쾌적했습니다.
사막은 낮에는 너무 덥고 반대로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그래서 텐트는 바람이 통하도록 낮에는 옆 날개를 말아 올렸다가 밤에는 늘어뜨려서 보온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라고 하신 성막은 사방이 판자벽으로 막힌 텐트입니다. 그 안에서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더워서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보통 텐트였다면 찜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텐트의 지붕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네 겹입니다. 그중에서 두 번째인 두꺼운 염소 털로 만든 앙장은 완벽한 보온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깥에 아무리 땡볕이 내리쬔다 할지라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았고, 밤에도 춥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제사하는 환경을 아주 쾌적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전 안은 아름답고 쾌적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에게 제사장의 복장을 다 갖추고 밀폐된 텐트 안에서 제사하라고 했을 때 나는 못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해 보니 그 안은 어디보다 더 시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열을 만드신 분입니다. 열이 어떻게 전도되고 어떻게 차단되는지 다 아십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환경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정도면 너무 더워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거나 이 정도면 배가고파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말씀대로만 하면 잘못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면서 자기 생각으로 행복을 추구하려합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라고 하셨는데, 요즘은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 결혼해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늘어갑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엿새 일하고 하루를 쉬라고 하셨는데 요즘 일주일에 5일만 일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소에게는 풀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소와 양의 내장을 갈아서 소에게 사료로 주니까 광우병이 생긴 것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지혜이고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합리적인 분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거역하면 재앙을 만들 뿐입니다. 나를 사랑해서 내게 유익한 말씀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이 당신의 집을 이동식 작은 텐트로 지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계실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항상 너희들 가운데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 이것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그들을 “내 아내”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면 신방을 차린 후에 같이 사는 것입니다. 성전은 그들이 남편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성도의 신방이 되는 셈입니다. 여자가 남자와 결혼하면 남편의 모든 부와 지위를 누릴 권리가 생깁니다. 대통령의 부인은 퍼스트레이디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작은 성전을 그들의 진중에 짓게 하신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살면서 너희에게 나의 모든 부와 은혜와 사랑을 누리게 하려고 네 곁에 있다는 사인입니다. 이제 우리도 나와 동거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그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한가람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느끼며 사랑하며 매사에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봅시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환경이 쾌적하여 이웃들도 부러워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신앙생활 합시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오해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는 신앙을 하면 고난에 빠져서 갈 바를 모르고 해매는 우리 이웃에게 구원의 등대가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