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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극복한 사람 / 조상호 목사
10일 전인 지난 2일 한국은 ‘톱 탤런트 최진실의 자살사건’으로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최진실씨는 한 두 해 반짝하다가 시들해버린 보통 연예인이 아니라, 1988년에 20세의 나이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20년 동안 줄곧 연예계 정상을 지킨 톱스타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출연하는 작품마다 줄줄이 히트를 치게 해서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상복도 많아서 1991년에는 대종상, 춘사영화제, 청룡영화제 신인상을 싹쓸이한 후, 1995년에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1991년, 1995년, 1997년에는 백상예술대상 인기상, 1997년에는 MBC 연기대상 대상, 1998년에는 한국방송대상 여자 탤런트상, 등 굵직한 상을 잇따라 받았습니다. 또 TV의 모 가전제품 CF에서 싱그러운 표정으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말을 유행시키는 등 각종 CF를 통해 귀엽고 똑소리 나는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20대에는 깜찍한 외모와 발랄한 이미지를, 30대에는 출연한 작품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킬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각각 앞세워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가리켜 ‘만인의 여인’ ‘CF 요정’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4년 전 이혼을 한 후에는 두 자녀의 성(surname)을 자신의 성(surname)으로 바꾸는 등, 호주제 폐지 및 여성 인권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지난 2일, 자기 집 욕실에서 자살한 것입니다. 처음 그녀가 자살했을 때,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전날까지도 CF 촬영에 임했고, 새롭게 출연할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드러난 것은 그 동안 그녀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우울증과 불면증 때문에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롭고 힘들다’며 종종 전화를 했으며, 심각한 우울증 때문에 몇 차례 병원치료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매스컴에 의하면 이 우울증이 그녀가 자살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매스컴에서 밝힌 대로 우울증이 그녀의 자살원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원인이 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울증은 무섭다는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 가운데 약 8%가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20%는 충동적으로 자살한 사람이지만, 나머지 80%가 우울증을 거쳐 자살에 이른 경우라고 합니다. 이 우울증에 걸리면 괜히 슬퍼지고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해지며, 무슨 일을 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잠께서 자주 깨게 되고, 입맛이 떨어져 식사량이 줄어듭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분은 괜찮은데도 소화불량, 두통, 변비, 설사, 등이 생기고, 목과 가슴에 뭔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또한 평소보다 말수도 적어지고 잘 웃지를 않고 만사를 귀찮게 여깁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도 쉽게 잊어버리고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인류를 괴롭히는 위험한 질병가운데 4번째가 이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현재 세계인구 가운데 3억 4천만 명이 우울증에 걸려 있고, 2020년이 되면, 우울증으로 인한 사망이 심장혈관질환 다음 두 번째로 높은 사망원인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1808년 어느 날, 영국 맨체스터의 유명한 의사 제임스 헤밀튼 앞에 지치고 슬픈 표정을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선생님, 아주 심한 병입니다." "어떤 병인데요?" "저는 세상 사람들이 테러를 할까봐 겁이 나서 살 수 없습니다. 또 매일 우울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아무데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고 도무지 즐거운 일이라곤 없습니다. 저는 정말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금방 죽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제가 보니 죽을 병 같지는 않군요. 지금의 상태에 변화를 한번 주면 어떨까요. 한번 신나게 웃고 즐거워 해보세요. 마음의 병이 곧 나을 겁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저녁 서커스를 보러 가서 광대짓을 하는 그리말디를 보십시오. 이 세상에 그리말디만큼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배우는 없습니다. 그리말디가 당신의 우울증을 말끔히 고쳐줄 것입니다." 그러자 환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제발 웃기지 좀 마십시오. 제가 바로 그리말디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을 웃기는 희극배우도 우울증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자료에 의하면 남자는 10명 가운데 1명이, 여자는 남자보다 2배 정도 많아 5명 가운데 1명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호르몬의 영향과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 폐경기 등에 심각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부들의 경우에는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도, 중년기에 접어들면 갱년기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노년에도 노년기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또 시험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입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성형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성형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직장에서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웃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의 미소 우울증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 우울증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나타납니다.
하다못해 그리스도인들도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앞장서서 봉사하는 직분자 뿐 아니라, 목회자들 가운데도 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특별히 목회자 사모 가운데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우 ‘믿음이 없다’ ‘권사가 오죽 못났으면 우울증에 걸리냐’ ‘목회자가 기도를 등한히 해서 그런다’ 등의 소리를 들을까봐 쉬쉬하며 숨깁니다. 아니 우울증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교회 안에서 더 열심히 봉사하고, 더 기쁘고 환한 표정을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가면성 우울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죄가 아닙니다.
우울증은 부끄러운 질병이 아닙니다.
그냥 방치해놓으면 우울증이 점점 심각해져서 문제가 되지만, 우울증 자체만 본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조차 이 우울증에 걸려 고생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몸에는 악창이 나서 성한 곳이 없을 만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욥기 3장을 보면,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기가 모태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왜 자기를 태어나게 했느냐고 한탄하기까지 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며 아우성을 칠 때 모세가 어떠한 반응을 보인 줄 아십니까?
민수기 11장 10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어째서 저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십니까? 이 백성의 짐을 나에게 지우십니까? 이 백성에 대한 책임이 너무 무겁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이것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길입니다.”라고 하나님께 따지며 심한 우울 증세를 보인 적이 있습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22편에 보면 다윗의 우울 증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 왜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않습니까? 주께서 나를 죽음 가운데 두셨습니다.”라고 하며 눈물로 침상을 적실만큼, 심한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 선지자도 심한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원래 그는 우울증과 전혀 상관이 없는, 아니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가 사렙다 과부를 위해 기도하자, 기근이 끝날 때까지 기름병의 기름과 가루통의 가루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그는 홀홀 단신으로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여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었다가, 그가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려 땅이 열매를 맺게 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제외하고, 에녹과 함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엘리야 선지자가 심한 우울증에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엘리야가 우울증에 빠진 이유를 아십니까?
1절과 2절을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자신이 섬기는 선지자들을 엘리야가 모두 죽였다는 소식을 남편 아합으로부터 들은 이세벨은 복수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한 메신저를 보내 위협을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그만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엘리야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갈멜산에서 남쪽 지방인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사환을 남겨두고 혼자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도망을 친 후 어느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으려고 할 만큼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무엇 때문에 엘리야가 우울증에 빠졌습니까?
엘리야가 우울증에 빠진 이유를 아십니까?
지금 상황은 이세벨이 보낸 특수부대가 엘리야에게 몰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엘리야가 적군에게 사방으로 포위당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세벨이 보낸 메신저로부터 ‘내일 이 맘 때에는 죽은 850명의 선지자들처럼 엘리야 당신도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엘리야는 죽으려고 할 만큼 심한 우울증에 빠진 것입니다.
서두에서 20년간 정상을 지킨 톱스타 최진실이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했는데, 그 우울증은 세간에 떠도는 여러 가지 ‘말’ 때문에 생겼습니다. 가냘퍼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평소 당차고 똑 부러진 그녀였지만, 인터넷 악성 댓글에는 민감했습니다.
2004년 이혼한 후에 악플, 특별히 아이들과 관련한 악플 때문에 세상에 나서기가 두려울 만큼 괴로워하고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또 최근에는 안모라는 연예인이 자살한 것은 최진실이 빌려준 사채를 갚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채설 루머’로 인한 인터넷 악성 댓글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채설 루머를 퍼뜨린 증권사 여직원 백모(25세)씨가 최진실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용서해 달라, 잘못했다 선처해 달라’고 계속 연락을 해오면서 이중 삼중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비록 이 루머를 퍼트린 백모씨가 경찰에 검거되기는 했지만, ‘사채설 루머’와 인터넷에 올라오는 악성 댓글 때문에 심한 마음고생을 하다가, 급기야는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최진실이 자살을 한 것은 우울증 때문이었고, 우울증이 생긴 것은 악성 댓글이었던 것입니다.
윌리암 J. 디엄의 ‘감동을 창조하는 인간관계’라는 책에 보면, 말이 얼마나 무서운 영향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로스앤젤레스 근처에 있는 쌍 페르난도에서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자기의 의붓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나는 결코 아빠를 즐겁게 해드릴 수 없어요. 나는 결코 좋은 일을 할 수 없어요. 저는 죽고 싶어요.” 좋지 못한 언어 습관을 갖고 있던 그의 의붓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그럼 가서 죽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침대에 올라가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해버렸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된 후 경찰에서는 그 의붓아버지를 살인죄로 기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이를 때려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로 그 아이를 죽였던 것입니다. 잘못된 말 한마디로 어린 생명을 죽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말에는 생명을 죽게 할 만큼 능력이 있습니다.
잠언 18장 21절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에는 사람을 죽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로써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와 여러분들의 입술이 죽이는 입술이 아니라, 살리는 입술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낙심케 하는 입술이 아니라, 절망한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주는 입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는 이세벨이 보낸 메신저의 말을 듣고 나서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이 맘 때에는 죽은 850명의 선지자들처럼 엘리야 당신도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지금 엘리야가 하나님을 위하여 순교를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기 때문에, 차라리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기는 뭐하니까 ”하나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하며 죽기를 소원할 만큼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엘리야가 죽기를 소원할 만큼 깊은 우울증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이세벨이 보낸 메신저로부터 전해들은 ‘내일 이 맘 때에는 죽은 850명의 선지자들처럼 엘리야 당신도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울증에 빠진 것은 그러한 외부적인 원인과 함께 그 자신의 내부적인 원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엘리야가 무엇을 보았다고 합니까?
이 형편, 즉 자기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는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보았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보는 대신, 이세벨이 보낸 메신저만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신 하나님,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아나게 해주신 하나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기름과 떡가루를 마르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을 보는 대신, 자기 앞에 펼쳐진 환경을 보았습니다. 엘리야의 이 시각이 그로 하여금 절망케 하고,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윌리엄 힌슨’이라는 사람은 언젠가 동물 조련사가 사자의 우리에 들어갈 때, 의자를 들고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조련사는 회초리와 권총을 갖고 있는데도 사자 우리에 들어갈 때는 항상 의자의 네 다리를 사자를 향하여 들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자가 의자 네 다리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게 함으로서, 사자로 하여금 일종의 무기력증에 사로잡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결국 집중력이 분산된 사자는 매우 온순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력증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에는 초점을 맞출 만한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맞추어야 할 초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이 무기력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우울증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야는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보았습니다. 자기 앞에 놓여있는 문제를 보았을 뿐,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보기보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환경을 보고 절망하고 낙심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느냐보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 앞에 놓여있는 환경만을 본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문제를 보기보다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눈앞에 있는 환경을 보지 말고 그 환경 너머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손 내미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엘리야의 낙심의 원인은 외부적 환경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환경이나 문제를 보면 낙심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뚫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 우울증에 빠져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신 다음,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시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 약 25Km를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배고픔과 갈증이 심했던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져 주신 다음, “일어나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다시 떡과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야, 엘리야. 네가 선지자냐? 나는 너의 한심한 행동을 보고 정말 실망했다.”라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그냥 “야, 엘리야. 떡 먹어라. 급하게 떡 먹다가 체할 수 있으니까 물도 마시라.”고 한마디 툭 던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낙심하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시고, 떡을 주시되 그냥 주시지 않고 숯불에 구워서 주시고, 또 떡만 주시지 않고 물까지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야의 육신 뿐 아니라, 상한 마음까지 치유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탈진해서 쓰러져 있던 엘리야는 천사를 통해서 공급해주신 떡과 물을 먹고 마신 후, 힘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40일 동안 달려 호렙산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엘리야는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호렙산에 있는 어느 동굴에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절)고 물으셨습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낙심하여 굴속에 숨어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4절)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한 말씀을 하십니다.
다같이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는 아무도 자기 곁에 없고 ’오직 나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너 말고 7,000명이나 남겨놓았다. 그들은 아합 왕의 핍박과 환난 가운데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너와 함께 동역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 자리 가운데 엘리아처럼, ’아무도 내 주위에 없습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혼자가 아닙니다.
엘리야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 끓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놓으신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동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중보해주는 중보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면, 여러분들과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하시며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C. S. 루이스 교수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나니아 연대기> 일곱 권을 썼는데, 그 가운데 <말과 소년(The Horse and His Boy)>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 샤스타라는 소년은 무덤과 계곡과 건조한 사막을 지나면서 계속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지만, 그때마다 계속 어떤 사건이 생겨서 보호를 받습니다. 마침내 안전지대에 도착해 나지막한 산길을 올라갈 무렵 자기 옆에 누군가가 계속 따라오고 있는 신비스러운 임재를 느끼면서 샤스타는 갑자기 옆을 행해 이렇게 외칩니다. ”누가 있지? 지금 내 옆에 누가 있는 거지? 당신은 누구야?“ 그때 조용한 목소리가 이렇게 들려옵니다. ”너와 아리바스가 만나도록 한 사자가 바로 나였어. 네가 죽은 자의 무덤에서 공포의 밤을 지내던 그 밤에 너를 위로했던 고양이가 바로 나였어. 네가 자는 동안 승냥이를 쫓아버린 사자도 바로 나였어. 네가 늦지 않고 루운 왕에게 도착하도록 너의 말들이 최선을 다해 달리도록 뒤쫓던 사자도 바로 나였어.“ 그러자 소년은 직설적으로 이름을 묻습니다. 그 때 옆에 있는 그림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I am that I am(나는 스스로 있는 자야)“ 루이스교수는 바로 이 동화를 통해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사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 어디 계세요? 하나님, 어디 계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할 때, 주님은 ”아니야, 난 지금 너와 함께 있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지쳐 쓰러져 있을 때에 나 몰라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가오셔서 위로해주시고 어루만져 주십니다.
혹시 이 자리 가운데 엘리야처럼 우울증에 빠져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우울증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물질의 문제 때문에, 자녀의 문제 때문에, 직장과 사업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하고 낙심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고민하고 염려하고 낙심하며 문제를 바라보기보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죽기를 구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던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셔서 어루만져주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해진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시간 주님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길은 능력의 손길입니다. 구원의 손길이요, 축복의 손길이요, 치료의 손길입니다.
주님이 만져주시면 여러분의 모든 질병의 문제, 물질의 문제,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 자녀의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어루만져주시면 상한 마음이 치유되고 낙심된 마음이 회복되는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생각하면서 ’날 세우시네’라는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주보 뒷면 은혜 나눔터에 언급했지만, 원래 ”You raise me up“라는 제목의 이 곡은 2002년 노르웨이 출신 그룹 ’시크리트 가든‘의 음반을 통해 팝송으로 처음 소개되었다가, 워낙 흡인력 강한 멜로디와 아름다운 가사 덕분에 거꾸로 복음성가가 되었습니다. 원래 영어로 된 이 가사를 보면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설 수 있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가사를 생각하며 부르면 굉장히 깊은 의미로 우리 마음에 부딪칩니다. 이 시간 찬양팀이 부르는 “You raise me up”을 경청하고, 두 번째 부를 때는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