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89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2) ‘언론: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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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89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2) ‘언론: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우리나라 민주화가 이것밖에 안 되는지. 참담합니다. 참담해.” 서부법원 인근 한 가계 주인의 말이다.(jtbc, 1.20 뉴스 룸) 국가기관이 극렬 시위대에 의해 방화·테러를 당하였고 당할 위기에 처했다. 계엄 사태 한 달 만에 1억 번 극우 유튜버도 있다. 무분별한 혐오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 것이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전광훈 목사의 극우 성향 집회에 출석해 90도로 절을 하였다.
이런데도 20일 발표한 여론조사(리얼미터)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율이 46.5%로 39.0%를 지지하는 민주당에 앞섰다. 국민의힘이 40%대 지지율을 기록한 것은 11개월 만이다.(1월 16~17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4명 대상. 응답률 7.8%,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 무선 97%·유선 3% 자동응답). 계엄령으로 법치가 무너졌는데도 ‘집권 여당의 정권 연장’이 좋다는 응답자는 48.6%로, ‘야권에 의한 정권교체’를 원한다는 응답자 46.2%보다 많았다. 마치 까뮈(Albert Camus, 1913~1960)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우리 시대 특유의 기이한 전도(顚倒) 현상으로 인하여 범죄가 무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니 이런 날에는 무죄한 쪽이 도리어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도록 강요받는다”고 한 문장이 떠오를 정도다.
전 주, 이 란을 통해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1)’에서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 이유 첫째가 이 나라 ‘상충부의 욕망이 빚은 비극’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둘째는 바로 ‘사이비 언론’ 때문이다. 세칭 언론인이란 자들이 극우 난동세력이 선동하는 “‘좌파 사법 카르텔’ 이게 우리가 성스러운 전쟁을 통해서 깨부숴야 할 ‘1호 검은 카르텔’…” 따위 말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써댄다. 언론의 이러한 보도는 극우 세력을 선동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러니 글로벌 PR 컨설팅사인 에델만이 1월 19일 발표한 신뢰도 지표조사에 따르면 정부와 기업, 언론, NGO에 대한 신뢰도 지수를 합친 전체 신뢰도에서 한국은 41%를 기록했다. 28개국 중 27위이다.(전 세계 28개국 3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10월 25일부터 11월 16일까지 조사이다.) 25위였던 작년보다 순위가 두 계단 하락했다. 대한민국보다 신뢰도가 낮은 나라는 일본(37%)이 유일했다. 에델만은 지표조사에서 60% 이상일 경우 ‘신뢰’, 50∼59%는 ‘중립’, 50% 미만은 ‘불신’으로 분류했다. 한국은 ‘안 믿어! 못 믿어!’를 외치는 불신 사회란 명확한 증거인 셈이다.
특히 언론 신뢰도는 더욱 낮았다. 평균치인 41%에 3%나 적은 38%이다. 뉴스 출처의 신뢰도에 대한 우려는 무려 58%였다. 이는 자극적인 말 받아쓰기와 여·야에 대한 기계적 균형, 양비론인 경우에서 비롯되었다. 언론인으로서 ‘시시비비(是是非非,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해야 한다)’가 없다는 말이다. 언론은 사실과 진실, 옳고 그름을 정확히 보도하는 가늠쇠 역할을 하여야 하거늘, 이런 언론인으로서 의식이 없다. 이쯤 되면 언론(言論)이 아닌 ‘악론(惡論)’이다.
분명 <언론윤리헌장> 서문에는 “…언론은 인권을 옹호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를 통해 시민의 올바른 판단과 의사소통을 도우며, 다양한 가치와 의견을 균형 있게 대변함으로써 사회 통합을 위해 노력한다. 아울러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한국기자협회(https://www.journalist.or.kr/)라 적바림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언론윤리헌장> 제1항이 ‘진실을 추구한다’이다.
이지(李贄,1527~1602)는 「성교소인(聖敎小引)」에서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앞에 있는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 짖어댔다.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그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웃을 뿐(眞一犬也 因前犬吠形 亦隨而吠之 若問而吠聲之故 正好啞自笑也已)”이라 했다. 후일, ‘언론인으로서 악론을 써 불신 사회를 만든 벙어리처럼 웃는 이’, 즉 옆의 개가 짖으면 따라 짖는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라고 서술할 대상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http://www.incheonnewspaper.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