步見會 (2次回)
淸 平 寺 探 訪 記
2011.10.6(木)
보견회 두번째 탐방지는 그간 여름 물난리로 가지 못했던 청평사를 가게 되었다.
상봉역에서 10시5분 춘천행 전철을 타기로~ 고속터미날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려던 중
두목회장 서강조 동지(앞으로 보견회 멤버 호칭은 동지라 하겠다)를 만났다. 반갑게 자리를
잡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만 상봉역을 지나쳐 버렸다. 그것도 무려 일곱정거장이나.
이 정도면 치매로는 중증이겠지? 그 다음부터는 전철 탈때마다 바짝 긴장. 회원들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려고 일찍 출발했기에 망정이지 큰 낭패를 당할 뻔 했다.
오늘 참가자는 8명. 11명 중 세명이 참가치 못했다.
오늘 가는 청평사의 사전 자료 '淸平寺 步見'은 허현동지가 미리 원고를 준비했다. 복사본 교
재를 만들어 전철 안에서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어찌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차안에 탑승한 다
른 승객들이 노인들 공부하는 모습이 신기한듯 쳐다본다. 그냥 가방 속에 넣어버리는게 보통
의 경우이다. 우리 동지들 공부열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런데 나중에 하는 말들 --- 글이 수려하다. 내용이 고차원이다. 한시가 너무 어렵다.
인터넷에도 없는 자료를 어디서 구하나? 대단하다. 다음 발표자는 어떻카라고~
경복궁이나 창덕궁 탐방 때 후배 허균교수 못지지 않는 내용이라고-
그래서 옛말에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 실감한다고.
허현동지의 제의에 따라 춘천 모 식당에 전화를 했다. 식당차가 역에 나온단다. 그 차를 타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먼저 먹고 소양강 배타는 곳까지 가기로 했다. 춘천역에 도착하니 식당차
기사가 우릴 알아보고 안내한다. 의암호변에 자리한 식당(필라델피아 숯불닭갈비)에서 약간
이른 점심을 먹었다. 호수 주변에 핀 빨간꽃이 호수의 파란 물과 어우러져 도화지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여태껏 먹어보았던 춘천닭갈비는 고기는 안보이고 양파밖에 없는 것 같았는데 이집의 숯불닭
갈비는 달랐다.숯불에다 닭갈비를 직접 구워 먹으니 맛이 그만이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맛
이 좋단다. 첫 단추가 잘 끼인것 같다. 여행에서 맛여행의 비중도 크기 때문이다. 닭갈비에
춘천막국수까지 잔뜩 배를 불리고 양재기에 막걸리까지 한잔 걸치니 기분이 그만이다.
오늘 식사는 허현 동지가 쏘기로 했다. 최문택,김문헌 동지도 신청을 했지만 청평사 발의를
처음 한 허현동지의 강력한 요청으로--회비는 모아서 다음 지방 여행시 보태기로 했다.
허현동지 비용이 좀 과했는데~ 고맙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다음달 행선지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11월3일이니 단풍이 남쪽지방에 한창
일 시기라 첫 지방여행을 가기로 했다. 목적지,차량 등 회장이 김민효 동지와 상의하여 결정
하기로--
점심을 마치고 식당버스로 소양강 선착장까지 갔다. 일반버스 종점보다 더 올라가 선착장 입
구까지 데려다 주었다. 맛좋은 식사에,모든 교통편의에, 못 올라가는 곳까지 데려다 주니 덜
걸어서 좋고--일타 3매다.
소양호 댐공사 과정, 댐의 크기,저수량, 취수탑 등 전시관을 돌며 김민효동지가 자세한 브리핑
을 해주었다. 우리 보견회의 진정한 보배 동지다.
소양호 선착장에 도착하여 배를 타니 15분후에 출발한단다. 평일인데도 승선객이 많다.
젊은 데이트족, 아줌마 단체 놀이그룹이 대부분이고 나이찬 영감들은 우리 뿐이다.
한결 젊어진 기분이다. 모처럼 배를 타고 물살을 가르며 달리니 신이 난다. 10여분만에 도착
했다. 계곡길을 따라 청평사로 발길을 재촉한다. 가는 도중에 식당가가 늘어서 있다. 호객이
대단하다. 계곡따라 30여분 오르게 된다. 도중에 폭포가 보인다. 2개의 쌍폭이다. 구성폭포다.
그 주변에 상사뱀 이야기에 얽힌 전설의 주인공 공주의 동상이 서 있다. 공주 몸을 감고 있는
뱀을 공주가 오른손으로 보고 있다.
마침내 청계사 입구에 도착했다. 청계사 뒤로 오봉산이 높이 서 있고 청평사 회전문이 가장 앞
쪽에서 탐방객을 맞이한다. 문화재 해설을 부탁했었는데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30분 동안에 설명을 마쳐달라고 부탁드렸다.
해설 중 참고사항은 사진소개와 함께 같이 설명키로 하고 아래 허현동지가 준비한 교재를 같
이 실었으니 참고하고 대부분 중복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단 절의 개요와 공주와 상사뱀
에 얽힌 전설만을 아래에 소개한다.
청평사(淸平寺)
이절은 고려 광종24년(973) 승현선사가 창건하였으나, 폐사되었다가 문종때 춘천에서 높은 관
직에 있던 이의(李顗)가 뛰어난 경관에 매료되어 절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아들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내려와 중건하여 문수원이라 했는
데 훗날 주지인 보우스님에 의해 청평사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김시습이 서향원을 짓고 은거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고려 조정이 이곳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한다.이자현이 대학자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할아버지가 딸 세 명을 모두 왕
들에게 시집을 보냈고,그 가문에서 세 사람의 재상을 배출한 대단한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자현이 이곳에 내려와 주변 폭포와 산세에 맞춰 고려시대 제일가는 정원을 만들면서, 자연
을 벗 삼아 독서와 문예로 여생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지어졌고, 보물 제164호인 회전문과 돌 축대만이 옛 모습의 일부라고
한다. 문화재로 3층 석탑, 부도, 암자터 몇 군데가 남아있다. 절 입구에 두 그루의 전나무
가 일주문처럼 양쪽에 서있는게 이채롭다.
공주와 상사뱀 전설
청평사 오르는 중간쯤에 높이 십여미터되는 ‘구성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내리쏟고 있다.
옛날 중국 공주가 목욕을 했다는 이 폭포는 그 소리에서 아홉 가지의 다른 음이 들린다고해
부쳐진 이름이다. 그 주변 바위 위에 오른 손에 뱀을 올려놓고 바라보는 공주상이 있다.
그리고 계곡 건너편 능선에는 ‘공주탑’으로 불리는 삼층석탑도 있다.
경주‘용장계삼층석탑’처럼 자연 암반위에 두 기단을 하고 삼층 탑신으로된 작은 석탑이
홀로 서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인데, 창건시기로 볼 때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
으로 생각된다.
이탑과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중국의 한 공주를 사모하던 어떤 청년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되었다.
신분차이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총각이 한이 맺혀 뱀으로 변해 공주의 몸을 감아버린다.
왕이 각 방면으로 방책을 수소문 했지만 뱀은 꼼작 않았고 공주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그러다 신라에 건너가 영험 있는 절을 찾아 기도를 드려보라는 권유를 받아드린다.
신라에 온 공주와 시녀는 어느 날 저녁 여기 청평사까지 와 작은 동굴에서 노숙을 하게 된다.
이튿날 종소리가 들려 공주는 뱀에게‘절이 멀지않은 곳에 있는 듯해 밥을 얻어 올 테니 제
몸을 풀어주시오,너무 피곤해 걷기가 힘드니 잠시 기다리면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자 상사뱀이 사르르 공주 몸에서 내려온다.
공주는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한 후 밥을 얻으러 갔다.
뱀은 공주가 늦어지자 도망간 것이 아닌가 하고 그녀를 찾아 나섰다.
절에 다다라 절문을 기어들어서는 순간 하늘에서 뇌성 벽력과 함께 폭우와 벼락이 뱀몸둥이
에 내리쳤다. 공주가 밥을 얻어와서 보니 뱀은 죽어 폭포 물에 둥둥 떠 있었다.
그간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속이 후련했지만, 자신을 사모하던 짐승이라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폭포근방에 정성껏 묻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기뻐하고, 신하로 하여금 금덩이 3개를 보내어 그곳에 법당을
짓게 했다. 금 한 개로 법당을 짓고, 다른 한개는 법당을 중건하때 쓰라고 묻어두고, 나머지
한개는 공주가 귀국할 때 노자로 남겼다.
공주는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부처님모시기에 지극정성을 했고, 구성폭포위에 삼층석탑
을 세워 부처님공덕을 찬양하였으니, 이 탑을 후세에 공주탑이라하였다.
그리고 상사뱀이 돌아나간 문을 회전문, 공주가 노숙했던 작은 동굴을 공주굴, 그가 목욕
하던 웅덩이를 공주 탕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있다.
3층석탑 공주탑 뱀을 손에 쥐고 있는 공주상
청평사를 둘러보고 나니 시간이 바빠졌다. 소양호 선착장에 식당차가 4시20분에 기
다린다 했으니 4시배를 타야 했다. 부랴부랴 내려가서 배를 가까스르 타니 안심.
배 안의 손님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푸른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기도
하고 마음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 비록 10여분 밖에 안돼지만 배를 탄다는 게 일반
여행과는 다르다. 편하게도 춘천 전철역까지 버스가 데려다 주었다.
오늘 청평사 탐방은 좋은 날씨에 마음맞는 친구들과 같이 즐겁게 마치니 더이상 바
랄게 없다. 5시 전철을 타고 서울로 ~ 상복역에서 6명이 오리집에서 술한잔 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오늘 스폰서를 못해 못내 섭섭해하던 김문헌동지가 저녁을 쏘았
다. 점심,저녁 스폰서가 줄을 서니 행사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고맙고 감사할 뿐.
동지들 다음달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시다.
아래에 그날 찍은 사진을 중심으로 문화해설사의 보충설명도 첨기한다.
종착역 춘천역
춘천시내로 들어가는 입구 의암호가 시야를 확 틔운다.
의암호변에 자리한 식당/의암호변에 예쁜 꽃단장
소양호 전망대에 오르다. / 취수장 건설공사
노란 표시까지 차면 저수량이 29억톤이라고--
동지들
카메라가 쉴 틈이 없다
이곳이 어딘가? 베니스인가? 나폴리인가?
배안에서/식당가를 지나면서
오후 돌아가는 배 시간표
거북처럼 생겼다고 거북바위
거북바위 앞에서 동지들이 다 모였다.
상사뱀과 공주 전설의 공주상
구성폭포와 유래
공주굴과 공주탑 안내판
영지 그리고 약수
영지(影池) 오봉산이 이 연못에 들어와 있다.
문화재 해설사의 도움을 받았다.
오봉산과 청평사
청평사는 육이오 전란으로 모두 불타고 회전문만 남았다. 육이오 이전부터 간헐적인 교전이
있었는데 뒤로 보이는 400m 높이의 오봉산과 부용산을 이으면 삼팔선이라고. 육이오 이후
20년간 민간출입이 통제 되었다가 1976년부터 복원이 시작 되었다. 극락보전이 1976년에
복원되었다.회전문만 전란을 피할 수 있었는데 보물 제164호이다.
청평사는 고려 때는 승려가 140명이나 되는 대사찰이었다.
회전문
전란에 불타지 않은 유일한 유적으로 보물 제 164호. 불교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이다. 일반 사찰의 천왕문에 해당하나 이곳에는 사천왕상이 없다.남북한 통털어 유일하다.
경운루/회전문을 들어가면서 본전인 대웅전이 계속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이 절의 특징이다.
행랑/범종각
드디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이 -
나한전과 관음전
경운루에서 문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보통 누각에는
출입이 안되지만 이 절은 자유롭게 출입한다.
일반사찰과는 달리 긴 회랑이 이어져 있다. 벽도 없고 문도 없다.
대웅전 난간의 소맷돌-임금의 궁전 계단 양식이다.옆으로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소맷돌 옆면을 보니 깨진 자국이 있다. 붙였다고. 전란의 상흔이다.
태극문양이 선명하다./경주 감은사지와 나주의 절터에 태극문양이 있으나
대웅전 난간 소맷돌의 태극문양은 현존하는 절에는 남북한 통털어 유일하단다.
대웅전 안 삼존불
극락보전이 따로 있다.국내 절 중 가장 화사하고도 장엄하다는 평이다.
삼성각과 내부
삼성각 옆벽에 그려진 것은 천년 수명의 학과 범이다.
신기하게도 위치를 옮겨가며 봐도 계속 범은 나를 주시한다.
범은 우리 것이며 결코 호랑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보호수 수령 800년의 주목
해설사 설명에 열심히 공부중
오르고 내리는 길목의 진락공 이자헌 부도/청평교 다리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는구나~
淸平寺 ‘步見’
‘步見’의 의미
대학 때의 친구들에게 문화유적답사 그룹을 만들었다고 자랑하자 건강을 위한 등산이나 하지 뭣 때문에 없는 돈을 들여 쓸 데 없는 짓을 하느냐고 핀잔을 받았다. 나는 유식한 체하며 맹자 의 말을 들이댔다. 눈과 귀 코 입 등 사람의 기관들은 다 나름대로 원하는 것이 있는데 마음이 라고 해서 원하는 것이 없겠느냐고 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채우겠다고 한 것이 다. 말이 되는가?
5감의 충족은 현장을 보고 인터넷을 뒤지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 그러나 마음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사색이 필요하다. 마음의 창을 여는 데 딴에는 쬐끔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각종 자료를 짜깁기 하고 노가리 까는 수준의 이야기를 늘어놓겠다. 건방지게 들려도 헛발질이거니 하고 양해하시라. 그래서 허발이다.
淸平寺라는 사찰의 이름인 淸平은 고려 중기 이곳을 꾸민 李資玄의 호인 淸平居士에서 비롯된 것으로 맑게 하고(淸), 고르게 한다(平)는 뜻이다. 불교 사찰 이름치고는 華嚴 등의 일반사찰과 비교해서 뭔가 다른 냄새를 풍기고 있지 않는가. 또한 가람의 배치도 다른 사찰과 다르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하고 조선조 유학자들의 답사기 내지 시를 인용해서 이곳의 의미를 되새겨 본 다.
淸平寺
淸平寺 터에서 도를 닦기 시작한 사람은 許가의 후손이다. 농담이 아니다. 10세기 고려 때 선승 承賢이 禪을 닦는 곳<白岩禪院>으로 되어 있던 곳을 11세기에 들어 당대의 세도가 李顗가 인 공을 가하기 시작했고<普賢院> 그 아들 資玄(1061~1125)이 이곳에 와서 園林을 꾸몄다<文 殊院>. 李顗의 본은 진성 이씨이고 시조는 김해 허씨 許謙이다. 이른바 賜姓이다. 김해 許가와 진성 李씨는 그래서 동본이라 혼인할 수 없다. 각설하고... 청평사가 된 것은 1550년, 조선조 문정왕후의 후광을 업은 普雨선사가 이 사찰을 중건하면서부터였다.
어떻든 청평사는 학자들 사이에 극단적으로 말해서 남과 북을 통틀어 가장 이색적인 사찰이라 고 한다. 다 아는 이야기이겠지만 나도 좀 아는 체하겠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 좌로부터 법주사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통도사 불이문<법주사 사진은 미전의 ‘찰각’을 도둑질했다.>
보통 사찰을 들어갈 때는 4개의 문을 거친다. 문의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 진 一柱門은 첫 번째 문으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라는 의미의 문이다.<一心> 두 번째는 金剛 門이다. 일종의 대문이다. 악한 무리에 경종을 울리고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잡신과 악귀를 물 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른쪽 왼쪽의 금강역사들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고 한다. 세 번째 문은 天王門이다. 사천왕상을 모셨다. 佛國淨土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像이다. 사찰에 들어 온 신자들에게 이곳이 신성한 곳이고 또 보호받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이라고 한다. 네 번째는 不二門이다. 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는 구별을 하지 말라는 뜻 이다.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이치 그것이 해탈이다. 요즘 다르다는 말을 젊은이들은 ‘틀린다. ’라고 한단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곳을 지나야만 불국정토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청평사 입구에는 4개의 문이 없다. 廻轉門 앞쪽에 곧게 뻗은 잣나무 두 그루<확인 못해 봤다>가 일주문 역할을 한다고 했다. 廻轉門은 일반사찰에서 말하는 세 번째 문 즉 天王門에 해당한다. 회전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回轉이 아니라 廻轉<돌 회/변할 전>이다. ‘輪廻轉生’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있어야 할 사천왕상이 없었다. 더구나 회전문 천장에는 향교나 서 원에 있는 홍살문이 있고, 회전문을 들어서면 긴 회랑이 이어져 있다. 다르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또 4번째 문인 不二門 즉 解脫門은 아예 사찰경내 밖에 있다. 이것 역시 일반 사찰의 가람배치와 다르다.
경내에 탑이 없다! 공주를 사랑한 평민 청년이 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몸에 붙어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3층 석탑<공주탑>이 있기는 하지만 사찰 길목에 서 있다. 보통 금당 앞에 탑을 세운 경우와는 다르다. 그래서인지 願塔, 또는 供養塔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 한다.
대웅전 소맷돌<계단 난간>에는 태극 문양이 보인다! 모두 궁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고려시대 한때 8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221칸이나 되는 대가람은 사라졌지만 문정왕후의 적극 적인 지원으로 왕실의 願刹 역할을 했기 때문이란다.
사찰 경내와는 3km나 떨어진 오봉산 정상<779m> 부근에 寂滅寶宮이 있다. 건물을 빼면 사람 몇이 겨우 설 수 있는 정도의 좁은 바위위에 근래<1979> 세워졌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는 확인되지 않고 있단다. 왼쪽 암벽에는 淸平息庵이라고 쓰여 있다. 李資玄의 친필이라고 한 다. 息庵은 두 무릎을 겨우 세우고 앉을 정도의 작은 방. 그는 이곳에서 ‘누비옷을 입고 푸성귀 음식을 먹으며’ 참선을 했다고 한다. 당시 왕비를 10명이나 배출해서 나라를 들썩이던 명문세 도가의 자제인 그가, 이 깊은 산골로 들어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는가.
모든 사찰이 그러하지만 淸平寺 역시 누대의 전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본 모습을 상상하 기에는 힘이 든다. 그러나 새로 지어진 極樂寶殿 왼쪽에는 나이가 각각 800년과 500년이 되었 다는 두 그루의 주목이 있다.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1949년에 불타버린 極樂殿(구 국보 115 호)은 당시 최고의 기술로 지어 궁궐 못지않게 화려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李資玄이 꾸 민 園林은 그대로다.
影池
naver 지식사전에 의하면 園林은 “집터에 딸린 뜰, 혹은 공원의 수풀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그런 뜻이라면 13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일본 교토<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의 枯山水式 정 원이 딱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이곳 園林이 일본의 그곳보다 200여 년 앞선 것이라고 자 랑삼아(?) 이야기한단다. 인터넷을 뒤져 그곳의 사진을 보았다. 인공의 흔적이 전부였다. 여기 서 말하는 園林은 그런 뜻이 아니다. 지난번 동생이 창덕궁 ‘보견’ 때 말한 자연의 경관을 비유 와 상징으로 자연 그대로를 빌린 借景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 園林이 그렇다.
李資玄은 한 술 더 떴다. 오봉산을 아예 연못 속으로 끌어들였다. 影池다. 문자 그대로 그림자 를 담아내는 인공 연못이다. 무영탑에 얽힌 전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남북이 19.5m, 북쪽 연못 안이 16m, 남쪽 연못 안이 11.7m라고 한다. 연못의 북쪽 면이 남쪽 면보다 길지만, 정면에서 보면 정사각형으로 보인다. 원근법을 이용한 설계라고 한다.
연못 안에는 3개의 돌이 있다. 자연석이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다. 마음 心을 그렇게 상징적으 로 비유했다고 한다. 어느 건축 학자는 “연못에 있는 돌에 들어가서 연못을 바라보면 연못이 정 방형으로 보인다.”고 한다. 자신을 자연에 집어넣어 하나가 되게 하고자 하는 의도만큼은 확실 하다. 불가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儒〮 〮佛 仙
평소에 나는 이른바 조선조의 엄격한 배불숭유정책 하에 어떻게 이런 사찰들이 살아남았는가 를 궁금해 했다.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가 쓴 『한국불교사』를 보면 태종/연산군/중종 등 만 강력한 억불정책을 폈고 태조/세조/명종/정조 등은 오히려 숭불정책을 폈다고 했다. 정조의 경우 지난 번 용주사에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 외의 왕들은 조선 건국의 공신들처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유가 기본이 되어 주로 승려와 사찰행사 등의 폐단을 없애는 데 주력했을 뿐 구체적인 탄압에는 무덤덤했다고 했다. 왕비 등 왕의 가족들은 이른바 願刹이라고 하여 오히려 사찰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배불숭유정책의 이론적인 바탕은 유학자들이 만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데이터베이스에 접 속하면 유학자들의 생각을 써 놓은 글들을 접할 수 있다. 원문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것들은 우 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들은 사찰, 특히 이곳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가 궁금했다. 梅月堂 金 時習, 退溪 李滉, 淸陰 金尙憲, 茶山 丁若鏞 등이 검색되었다. 예외 없이 그들은 이곳에서 불교 의 의미를 읽은 것이 아니라 유가적 생각을 我田引水(?)격으로 표현하고 있다. 첨부 ‘퇴계 등’ 에 전문이 있다.
退溪 李滉
우선 退溪<退溪先生文集 제1권 詩 중 淸平山을 지나다 느낌이 일어 幷序함>를 보자. 시를 쓰 기 전에 다소 긴 문장으로 李資玄을 평가한 대목이 있다. 요약한다. 권세를 휘두르기가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웠는데도” “지위를 피하기를 마치 더러운 세속에서 매 미가 껍질을 벗듯이” 하고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하면서” “37년 동안이나 오래 머물렀다.” 고 했다. 혹자는 그런 일이 후세에 명성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라고 비판하지 만 “그 괴로움과 즐거움은 아주 다른 것”이라고 일갈하고 “흉중에 즐기는 바가 없다면 어찌 그 럴 수가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이른바 속세를 떠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불가의 방식과는 확 실히 다르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허공 가득 하얀 달에 그대 기상 남았는데 / 맑은 이내 자취 없이 헛된 영화 버렸구나. /
우리식의<東韓>의 이 맛<隱逸>을 누가 지어 전하려나. / 조그만 흠 꼬집어 흰 구슬을 타박 말라
梅月堂 金時習
梅月堂 金時習은 승려로 출가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찰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유학자 다. 그는 이곳을 사찰로 읽지 않았다. ‘신선 골<仙洞>로 읽었다<續東文選 제6권>. 그의 시 ‘有 客’은 말한다.
“맛난 나물은 때를 알아 자라나고 / 향기로운 버섯은 비를 지나 부드럽다 / 시를 읊조리며 신선 골을 드나니 / 백 년의 내 시름을 녹여 주고녀.”
淸陰 金尙憲
남한산성의 굴욕을 평생 되씹으며 청나라에 대한 항쟁의 불길을 끄지 않았던 淸陰 金尙憲<淸 陰集 제10권 淸平錄>은 강원도 지방을 여행한 후 장문의 기행문을 썼다. “하늘이 만들어 내고 땅이 베푼 자연”인 일반 명승지와 신선노름<神遊>과 꿈속에 노닌다는<夢遊>의미가 담긴 이곳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묻고 “안목을 갖춘 자가 뒷날에 확실하게 논하기를 기다린다.”고 했 다. 아마도 이곳을 경승지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곳 影池를 놓고는
찾아온 객 허연 머리 비치는 게 부끄러워 / 애오라지 연못가에 가서 갓끈 씻어 보네
라고 했다. 우리의 친구 창염수 서강조는 한술 더 떠서 갓이 없으니 등산모라도 씻겠다고 했는 가?
茶山 丁若鏞
마지막으로 茶山 丁若鏞이다. 그는 이곳 곳곳을 詩題로 삼아 장문의 시들을 남겼다<茶山詩文 集 제7권>. 그중 한 대목의 일부만 소개한다.
숭산의 소림사에 불자가 된 게 애석하고/촉의 청성처럼 주역 강론 안 한 게 한스럽네/ 작은 티 가 흰 패옥을 다 가리지 못하나니/ 땅벌레를 고니에겐 비할 수 없는 거라오
중국의 삼국시대 靑城處士 范長生이 자연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유학을 강론한 사실을 들고 는 李資玄이 禪道에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불 가들이 말하는 속세를 완전히 떠나지 못한 그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작은 티가 흰 패옥을 다 가리지 못하나니”라는 퇴계의 말을 그대로 쓰고는 땅벌레와 고니의 비 유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노가리
유학이라면 침을 튀기며 욕을 해대는 대학 때의 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갓끈을 매고 있 을 때만 유가이지 갓끈이 떨어지면 도가다.”라고 했다. ‘갓끈’이란 바로 벼슬을 상징하는 말이 다. 또 있다. “수양한답시고 가부좌 틀고 하는 짓 꺼리가 禪僧과 무엇이 다르냐?”라고 했다.
진짜 유가들은 평생 동안 두 가지 인생길에 갈등하고 괴로워했다. 한 길은 나를 위한 길<爲己 之學>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해 일하는 길<爲人之學>이다. 쉽게 말해서 도를 닦을 것인가, 아니면 벼슬을 할 것인가의 갈등이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도를 닦는 길에 대한 이론은 전적 으로 불교에 빚을 졌다. 특히 조선조의 국시라고 할 수 있는 朱子學은 孔孟의 先秦儒學과는 다 르다. 욕망에 이끌려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그 방법이 ‘居敬’이고 구 체적으로 말하면 ‘修己’다. 바로 불교의 8정도 중 ‘正念’이고 무문과 12조의 ‘늘 깨어 있으라<常 惺惺>.’와 똑 같다.
기질의 가림과 업장의 두터움
원래 ‘敬’이라는 한자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존경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朱子는 여기에 대상 을 쏙 빼 버리고 태생적으로 착하게 되어 있는<性善說> 인간성을 만나는 뜻으로 바꾸고 “자신 의 숨겨진 본성의 회복”으로 정의했다. 본성은 “재에 파묻힌 불씨, 진흙에 덮인 구슬, 먼지에 뒤덮인 거울”처럼 때 묻고 가려지고 더럽혀져 있지만, 자신의 본래 가치를 잃어버리는 법이 없 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편견’과 ’선입견‘ 등에 의해 굴절되고 왜곡되어 있고<주자 학은 이것을 ‘기질의 가림(氣質之蔽)’, 혹은 ‘기질의 구속(氣質之拘’)이라고 불렀다.> 여기에다 가, 대상을 향한 이기적 의지와 탐욕이 가세하여 엉망이 되어 있다고 한다. 마음이 본래의 제 집을 버리고 대상만을 따라 다녀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처방 은 ‘求放心’, 즉 ‘집나간 마음을 불러오기’라고 했다.
불교는 자각각타(自覺覺他),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로 처방전을 내놓고 있지만 선결문 제가 있다. 이른바 깨달음이다. 禪家들이 말하는 한 순간의 깨우침<頓悟>이다. 주자학은 여기 서 배운다. 어느 한 순간 ‘확 통하는 경지<豁然貫通>’가 그것이다. 말만 다르다. 그렇지 않은 가.
이를 둘러싸고도 退溪 다르고 栗谷 다르고 花潭이 다르다.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다. 茶 山이 朱子學을 佛敎라고까지 극언하면서 이를 버리고 孔孟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일도, 湛軒 洪 大容이 불교 도교를 끌어안은 사고를 강조한 것도 유학의 다른 모습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儒學을 儒敎라고 하고 宗敎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宗敎라는 말은 유학의 원전 그 어디에도 그 예가 없다. 16-17세기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번안어다. 우리 高사장이 잘 아시겠지만 religion은 엄격하게 말해 一神敎(?)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개념규정을 다시 하지 않는 한 유학은 물론 불교 도교는 종교가 아니어야 한다. 진짜 우리 노가리의 주제는 어쩌면 이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고두고 씹어보자.
나는 종교의 의미를 死生觀의 차이라고 읽는다. 사람이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가를 묻고 대답 하는 삶의 형식이다. 神이 있느냐 없느냐, 신의 성격이 어떠냐를 막론하고 내가 죽으면 현재의 나와 같은가, 다른가를 상상하고 그런 상태가 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첫 머리< 宗>로 하는 가르침<敎>이 아닌가. 현재의 나와 다른 환경<天堂>의 내 모습? 아니면 업보 따 라 다시 태어나는 내 모습<畜生道>? 죽으면 티끌이외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微塵> 그런 건 중요하지도 생각할 필요도 없고 건강하게 오래 살면 장땡? “살아서 최선을 다하고 죽어서 편안하게 쉰다.”? 기독교, 불교, 도교, 유교가 그렇지 않은가. 말이 안 되는가. 히히히. . .
어떻든, 불교신도이든 아니든 기왕에 이곳에 발걸음을 했으니 극락보전의 주련을 한번쯤 되뇌 어 보는 것만은 말이 될 법 하다. 그자?
극락당전만월용(極樂堂前滿月容) 극락세계 보궁 앞의 보름달 같은 모습이여
옥호금색조허공(玉毫金色照虛空) 옥빛 금빛으로 온 누리를 비추시네.
약인일념칭명호(若人一念稱名號)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일념으로 부른다면
경각원성무량공(頃刻圓成無量功) 한 순간에 무량공덕 원만하게 이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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