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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라디오의 역사
저녁상 설거지를 끝낸 어스름 저녁 무렵. 가족들은 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케이스의 ‘제니스 라디오’나
사각형 나무통 속에 진공관이 촘촘히 박힌 금성라디오 앞에 둘러앉았다. 라디오에서는 ‘동심초’나
‘이 생명 다하도록’ 같은 연속극이 흘러나왔다.
엄마와 누나는 이별을 앞두고 한껏 감정을 돋운 남녀의 목소리에 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선반이나 경대 위,
대청마루에 ‘모셔놓고’ 들었던 당시의 라디오는 지금 같은 누름단추가 아니라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었다
치직거리는 잡음 섞인 방송조차도 잘 나오지 않아 팡팡 치고 이리저리 다이얼을 맞추느라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라디오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친구'였다. 솜씨 좋은 형들은 부속품을 사다가 라디오를 조립하기도 했다.
그 시절 라디오의 꽃은 바로 연속극이었다. '아낌없이 주련다' '빨간마후라'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은 나중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라디오 연속극이다.
김수현의 '저 눈밭에 사슴이'도 인기였다. 이미자가 구성지고 정감어린 목소리로
불렀던 '총각선생님'은 같은 제목의 연속극 주제가였다. 연속극이 시작되면 온 식구가 성우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다
'태권동자 마루치 정의의 주먹에 파란 해골 13호 납작코가 되었네…'. 아이들은 '태권동자 마루치'에 홀딱 빠져 있었다. '손오공'도 참 재미있게 들었던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아버지는 샛바람 시원한 툇마루에서 성우 구민씨의 '전설따라 삼천리'나 오승룡씨의 '오발탄', 11시55분이면
'어이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로 시작되는 '김삿갓 북한방랑기'를 들었다.
'재치문답'은 '재치박사'로 불리는 남녀 패널들이 나와 퀴즈, 놀이, 재치 경쟁 등 다양한 게임을 진행하는 공개 방송이었다. 한국남, 안의섭씨 등이 단골 재치박사로 출연했다. 장소팔.고춘자씨가 따발총처럼 쏟아내던 만담도 오랫동안 인기를 누린 오락프로였다.
TV가 드물었던 1960년대와 70년대 초엔 라디오 연속극에서 희로애락을 연기하던 성우의 인기가 대단했다.
구민, 고은정, 장민호씨 등은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고은정씨는 영화에서 엄앵란씨 목소리를 도맡았기 때문에
같은 인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진공관 라디오가 퇴조하고 광석 라디오가 나온 뒤에는 집집마다 몸통보다 더 큰 '빳데리'를 고무줄로 친친 감아 뒤에
매단 낡은 트랜지스터가 있었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 라디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능이 좋았다.
들로 산으로 들고 다니며 축구나 권투 같은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을 수도 있었다.
임택근, 이광재, 박종세씨 같은 아나운서는 "고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으로 분위기를 띄운 뒤 극적인 장면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온 국민을 흥분시켰다. 중계방송만 듣고 있으면 모든 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월등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게임에서 지면 국제심판의 편파적인 판정 때문이라는 식으로 '애국적 중계'를 했다.
누나들은 김을 맬 때나 보리를 벨 때도 라디오를 들고나가 이미자. 패티김, 하춘화, 김상진,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미화, 바니걸스, 김상희, 남진, 나훈아의 노래를 배우고 따라불렀다.
사춘기 아이들은 임국희, 최동욱, 피세영, 이종환씨 같은 디스크자키가 진행하는 심야음악 방송을 즐겨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에는 왠지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밤 10시만 되면 감미로운 멜로디와 함께 이종환씨의 달콤한 목소리가 청소년들의 마음을 감싸주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최고 인기의 심야방송이었다. 폴 모리아의 '이사도라'가 울리면서 시작되던 '밤의 플랫폼'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0시의 다이얼' 같은 프로그램도 전국 청소년들을 라디오 앞에 불러 모았다. 전축 역시 드물 때여서
듣고 싶은 노래를 관제엽서에 적어 신청하는 일은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통과의례였다.
청소년들은 시험공부를 할 때도 라디오를 틀어놓았고 이불 속에까지 갖고 들어가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가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웬즈데이 차일드' '예스터데이' 같은 먼 이국의 노래가 왜 그리 좋았던지.
진행자에게 이런저런 삶의 사연들을 털어놓는 외로운 사람들은 또 왜 그리 많았는지.
심야의 달콤한 음악과 사연을 들으며 한밤중 깨어있는 사람들만의 동류의식이나 유대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남진,
나훈아. 이미자만 알고 지내던 청소년들은 심야프로를 통해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 국내의 포크 가수들을 알게 됐다.
60년대 중반 몇몇 집에서는 흑백텔레비전을 들여놓거나 야외전축을 사들였다. 고등학생들은 삼촌이나
형님의 야외전축을 몰래 들고나가 '울리 불리'나 '상하이 트위스트'에 맞춰 신나게 개다리 춤을 췄다.
킹스컵 축구나 김기수의 권투, 박치기 왕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에는 돈을 내고 만화방에
가거나 이웃집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텔레비전, 컴퓨터 등에 익숙한 영상시대. 그러나 라디오에는 보여 주는 것이 결코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가 있었다. 귀와 가슴을 열고 듣던 머리맡에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던 옛 친구였다.
라디오 공개방송
라디오 장수프로들(1999년)
별이 빛나는 밤에/싱글벙글쇼/밤을 잊은 그대에게.. 20년 이상 롱런 기록
30주년을 넘긴 별이 빛나는 밤에 외에도 싱글벙글쇼 여성시대, 2시의 데이트(이상 MBC)
밤을 잊은 그대에게(2라디오 밤10시5분) 가정음악(1FM 오전9시·이상 KBS)같은 프로는 30년을 향해 간다.
라디오는 청취자들과 편지나 전화로 사연을 주고받는 쌍방향 대화가 가능하다. 자극적인 TV와 달리 라디오는 청취자와 끈끈한 정서적 교류를 나눌수 있다. 오래된 친구같은 느낌이다.
MBC 7층 라디오국 복도에는 입술 주변 얼굴을 새긴 상이 5개 걸려있다. MBC 라디오를 20년 이상 진행한
DJ에게 준 골든 마우스 2개와 10년 이상 진행자에게 수여한 브론즈 마우스 3개다.
지난 96년 라디오 문화 발전에 기여한 이들을 기념해보자는 궁리 끝에 MBC 제작진이 탄생시켰다.
골든 마우스 수상자는 2시의 데이트로 이름난 김기덕과 밤의 디스크쇼,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이종환씨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이문세와 싱글벙글 쇼의 강석 김혜영은 브론즈 마우스를 받았다. 장관 입각으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여성시대'를 떠난 손숙 씨는 몇 달만 채우면 브론즈 마우스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라며 아쉬움을 비췄다.
브론즈 마우스 후보로는 9년째 음악캠프를 진행하는 배철수가 유력하다.
라디오 전문 진행자들은 의외로 비사교적인 경우가 많다. 김기덕은 라디오를 오래 한 사람들은 자기 프로그램 외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목소리로만 만날 때 갖는 신비감을 잃을수 있다는 것이다.
70?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는 청소년 프로그램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지금은 30?40대가 되었을 이 세대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넘기던 첫 세대가 아닐까. 약칭 '별밤'으로
불린 이 프로그램은 10년 넘게 진행을 맡은 이문세를 만나면서 전성기를 만났다. 1985?96년까지 자리를 지킨
그는 청소년 프로그램 DJ로는 처음으로 교육부장관상을 수상, '밤의 교육부 장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별밤은 지난 69년, 명사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15분짜리 대담 형식으로 시작했다.
차인태도 잠시 마이크를 잡았다.70년 팝 전문 DJ였던 이종환의 등장으로 별밤은 본격 음악 생방송으로 자리잡았다.
철학자 안병욱 교수, 가수 조영남, 유일한 여성 DJ였던 극작가 오혜령, 코미디언 고영수, 김기덕, 이수만,
서세원 등이 차례로 별밤 DJ석을 지켰다. 이문세는 지난 96년 12월 1일 1만회 방송 돌파 후 별밤을 떠났고
가수 이적을 거쳐 개그맨 이휘재가 '별밤지기'를 맡고 있다. 별밤을 거쳐간 작가중에는 드라마 은실이,
이금림과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를 쓴 송지나도 있다.
여성시대
주부들의 편지사연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MBC 여성시대(오전 9시10분)에는 요즘도 하루 200?300통 씩 편지가
몰려든다.IMF 위기 직후엔 가장의 실직과 어려워진 살림살이를 호소하면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사연이
줄이어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서민들의 살아가는 얘기를 무기 삼아 MBC 라디오 청취율 조사에서 늘 수위를 다툰다.
여성시대는 지난 5월 진행자 손숙이 환경부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역대 장관 1명과 국회의원 3명을 배출한 막강한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90년 4월부터 9년여간 진행자로 활약했다. 여성시대는 75년 시작한 임국희의
여성살롱이 전신이다. 88년 '여성시대'로 이름을 바꾼 후, 진행을 맡았던 변웅전
(90년 10월?91년 4월) 정한용(91년 4월?92년 11월)이 96년 5월 나란히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75년 10월 1일 첫 방송한 2시의 데이트도 MBC가 내세우는 장수프로다. 2시의 데이트는 진행자
김기덕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이 프로그램 전신인 FM스튜디오부터 만 22년간 진행을 맡았다.
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진행자(만 20년)로 한국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나른한 오후, '따라라라 따라라라 라?'하는 시그널 음악 폴모리아의 임마누엘이 잦아들 무렵, 활기찬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2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를 외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올드 팬이 많다.
73년 아나운서로 입사, 라디오 진행자로 변신한 김기덕은 2시의 데이트'가 70년대 이후 청년 문화 상징처럼 돼 버린
팝음악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창구라고 말한다. "80년대까지는 팝송 듣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드물어요.
90년대초까지 라디오에선 팝과 가요가 절반씩 나갔거든요. 서태지가 등장한 93년 이후로 10대들이
완전히 가요로 전환했어요." 부국장 대우 제작위원인 그는 이문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요즘은 'FM 골든 디스크
김기덕입니다'(오전 11시)를 진행하고 있다.
음악살롱, 가요응접실
영화배우 배유정이 진행하는 음악살롱(오전 9시)도 유명 진행자들이 거쳐간 간판프로다.
김미숙, 최명길, 송채환, 김령, 노영심 등이 마이크를 잡았다. 양희경을 거쳐 오미희가 맡고 있는
가요응접실(오후 4시)도 인기를 모은다.
밤의 플랫폼의 김세원 -
KBS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정음악(김세원)
KBS는 1,2 FM과 1,2 라디오 등 4개 채널에서 수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만 MBC 만큼 장수 프로나
오래된 진행자는 많지 않다. 70년대 TBC 때부터 내려온 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1FM 가정음악 정도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70년대 MBC 별이 빛나는 밤에와 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과 함께 청소년 청취자를 놓고 격돌을
벌였던 음악 프로그램. 95년 방송작가 오재호씨가 진행을 맡으면서 성인 대상 인생상담 프로그램으로 내용을 바꿨다.
가정불화나 이혼, 자녀교육 문제를 상담한다. 이미선이 진행을 맡고 있는 1FM '가정음악'은 클래식을 주로 소개한다.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이름난 김세원이 진행을 맡았다.
SBS 이숙영의 파워FM/최화정의 파워타임
SBS는 역사는 짧지만, 다른 방송사에서 화제를 모았던 인기 DJ를 스카우트해 막강 진용을 갖췄다. '이숙영의 파워FM'(오전 7시)이나 '최화정의 파워타임' (FM 낮 12시)은 톡톡 튀는 멘트로 출근길과 점심시간 직장인의 귀를 붙잡는다. '아름다운 이 아침, 김미숙입니다'(오전 9시)는 정감있는 목소리로 청취자를 유혹한다. SBS는 '여성시대'에서 투박하면서도 정감어린 진행으로 이름을 얻은 손숙을 영입, 지난 13일 '아름다운 세상, 손숙입니다'(오전 9시5분)를 신설했다.
교통방송
운전자들에게 필요한 교통정보를 전달하는 교통방송에도 베테랑 진행자가 많다. MBC 푸른 신호등을 진행하다
교통전문가로 나선 가수 서유석이 구수한 목소리로 TBS 대행진 1·2(오전 7시5분)를 진행하고,
MBC 여성살롱을 요리했던 임국희가 서울로 미래로 1·2를 이어간다. 배한성 송도순 콤비는 '함께 가는 저녁길
1·2부로 오후 퇴근길을 안내한다. 라디오 진행자들은 추석 때면 대목을 맞는다. 전국민 절반 이상이 차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귀성길이야말로 새로운 라디오 청취자를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교통방송은
9월 22일 낮 12시부터 27일 오전 7시까지 6일간 MBC와 함께 교통 특별방송을 실시한다.
라디오 시대는 80년대 이후 TV에 밀려 막을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자동차 보유대수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지만 TV가 개국했을 때와 컬러 TV가 나왔을 때, 종일 낮방송이 시작됐을 때가 고비였다. 하지만 라디오는
퍼스널한 접근이 가능한 매체이기 때문에 틈새시장을 파고 들면, 얼마든지 발전할 여지가 많다고 낙관했다.
(주간조선 1999.10.7)
라디오 드라마 '아차부인 재치부인'
성우 최응찬(작고), 임옥영씨
성우 남성우씨
-제니스 라디오
미국의 전자회사로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1950년대까지 미제 제니스 라디오 한 대는 나락 열섬과 바꿀 만큼 고가품이었다.
-금성 라디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국산품 라디오를 내놓으면서 많은 가정에 라디오가 보급됐다.
왕관 마크와 금성의 영문표기인 골드스타(GoldStar) 등이 새겨져 있었다.
다이얼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하도 많이 돌려서 플라스틱 다이얼이 부러져 나가고 쇠만 삐죽 나와있는 경우가 많았다.
-저 눈밭에 사슴이
현재까지 최고의 인기작가인 김수현씨의 69년 라디오 드라마 데뷔작.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태권소년 마루치와 아라치가 외계에서 온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내용이었다.
-빳데리건전지 로케트 밧테리'가 유일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
1969년 3월 시작돼 지금까지 방송되고 있는 심야 음악방송의 원조.
이종환씨를 비롯해 차인태, 서세원, 이수만, 이문세, 이휘재 등이 진행을 맡았다.
-유쾌한 응접실’
국내 최고의 석학과 지성인들이 고정출연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던 ‘유쾌한 응접실’.
동아방송의 개성과 품격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란 평을 받은 ‘유쾌한 응접실’은 공개오락방송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한국방송사에 획을 그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 출신인 극작가 이서구와 동국대 교수 양주동(梁柱東)은 이 프로그램의 단골 손님이었다.
연속방송극 ‘장희빈’으로 안방 마님들을 울리면서 ‘장희빈이 방송될 때는 여자 목욕탕이 텅텅 빈다’ 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공전의 인기를 누린 멋쟁이 노신사가 이서구였다. 그리고 ‘국보(國寶)’라는 별명의 양주동.
그의 박학다식은 진작부터 정평이 나 있었지만 화술과 유머 또한 뛰어나 그가 입만 열면 방청석은 온통 웃음바다였다.
“아, 요즘 명함에 보면 직업이니 직함이니 하는 걸 잔뜩 써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요.
허지만 내 명함엔 내 이름 석 자밖에 없어요. 아, 국보 양주동박사 모르면 쌍놈이지.”
‘유쾌한 응접실’은 방송시작 때부터 10여 년 동안 청취랭킹 3위 이내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 동아방송 개국 때부터 폐국 때까지 계속 방송된, 최장수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유쾌한 응접실’의 명사회자였던 전영우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풍성한 대화야말로 유쾌한 응접실의 중심요소였다.
여기에 즉흥적인 발상과 서민의 애환 및 개성, 유머와 위트가 자연스럽게 교차한 것이 청취자들을 끌어당겼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코미디나 억지는 배제했고 이야기 손님들간에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배려가 자리잡아 항상 화기넘치고 품위있는 분위기였다.
(출처:네이버 지식iN)
왼쪽에서 두번째가 고은정씨
성우 고은정(1936.2.1~ )
출생 : 1936년 2월 1일-데뷔: 1954년 KBS 공채 성우 1기(동기: 김소원, 오승룡, 김수일)
1954 수도여자고등학교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77 ~ 드라마 '대니 할머니' 방송극본 당선 - 1997 ~ 고은정 언어예술원 개원
1998 ~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 2000 ~ 방송위원회 위원
2000 ~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 2000 국민훈장동백장 수상
영화: 1974 별들의 고향 ‘경아’ 역
방송: 1958 KBS 산 넘어 바다건너 ‘미라’역 1956 KBS 청실홍실
방송극본: 가을에 온 손님, 불모의 수령
소설: 고운정 미운정, 위험한 체험
텔레비젼이 없었던 1960년대 이전부터 라디오 드라마 여간첩 김수임, 저 눈밭에 사슴이 등에 출연
(자료:네이버 지식iN)
1945.8.15 덕수국교 경성중앙방송국
“나 아니면 방송이 안 될거라는 착각 속에 지난 50년간 성우 생활을 했다.”
1960∼70년대 숱한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고,특히 영화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아 인기가 높았던 고은정(68)이
올해로 성우 인생 50년을 맞았다. 1954년 KBS 성우 공채 1기로 ‘목소리 배우’의 길에 들어선 그는 59년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에서 표독스런 목소리 연기로 명성을 얻었고,이후 엄앵란 김지미 장미희 정윤희에 이르는
당대 최고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도맡아 연기했다.그는 “60년대 라디오 드라마는 대중문화의 꽃이었다”면서
“당시 성우는 요즘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얻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TV가 보급되면서 라디오의 인기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대중들의 기호가 변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라디오에 몸 담았던 사람들이 모두 TV로 옮겨갈 땐 서운함을 넘어 허탈했어.” 고은정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라디오 드라마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그 역시 방송작가로 변신,
지금까지 작가와 성우 활동을 병행해오고 있다.
고은정은 오승룡 김수일 박용기 등 현재 생존하고 있는 성우 동기생들과 함께 ‘KBS 성우 공채 1기 50주년 기념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한다. TV가 없던 시절,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목소리 연기만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던 주인공들이 30여년만에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원로 성우들이 오랜만에 예전의 실력을 보여줄 라디오 드라마는 KBS 1라디오 ‘KBS 무대’를 통해 12월 한 달간
매주 일요일 오후 11시10분부터 45분간 방송된다. 첫 회 ‘돌아온 아이들’은 5일 이미 방송됐으며,‘목탁새’(12일)
,‘가을과 노을(19일),‘만남’(26일) 등이 이어진다. 특히 ‘만남’은 고은정이 직접 대본까지 맡은 작품으로 지난
반세기동안 성우로 살아온 그들의 인생역정을 고스란히 펼쳐보일 예정이다.
고은정은 “다시 만나서 방송하니까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면서 “부디 우리 화법이
구닥다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04.12.9 국민일보)
성우 인생 50년 고은정씨
1954년 입사한 KBS 성우 공채 1기생들이 방송생활을 시작한 지 올해로 50년이 됐다.
KBS 1라디오(표준 FM 97.3㎒) `KBS무대'(매주 일요일 오후 11시10분)는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26일 라디오
드라마 `만남'을 통해 성우 1기생들의 방송생활 반세기를 극화한다. 성우 1기생들의 방송 인생을 담는 `만남'은 성우
고은정(68)씨의 작품. 고씨는 유명 성우로만 알려져 있지만 지난 77년 MBC를 통해 정식 데뷔한 방송작가이기도 하다.
고씨는 `만남'에서 성우 1기생으로 작고한 신원균, 이창환씨 등 망자들을 불러내 이들과의 대화로 통해
성우 1기생의 삶의 애환과 즐거움 등을 그려낼 예정이다.
2004년 12월8일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열린 `KBS무대' 기자 간담회에서 고씨를 만났다. 고희를 앞둔 그는 짧은 커트머리에 여전히 특유의 고운 음색을 유지하고 있어 시간이 그를 비켜간 듯 보였다. 그는 "성우를 시작할 당시에는 녹음하면서 코트 하나 걸 데도 없었지만 방송 아니면 죽을 것 같았고, 방송에 대한 짝사랑으로 지난 50년을 지내온 것 같다"며
방송 50주년을 맞은 감회를 밝혔다.
고씨는 한국 성우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스타. 엄앵란을 비롯해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60∼70년대를 풍미했던 여배들의 영화 속 목소리는 모두 고씨의 것이다. 그는 당시 제작되는 모든 영화의 여주인공 목소리 연기를 도맡아했고 전성기를 맞은 라디오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하는 등 성우 전성시대를 살며 인기와 명성을 함께 누렸다. 그러나 고씨가 처음부터 성우로서 각광을 받은 것은 아니다. 1954년 숙명여대 영문과 1학년에 재학중이던 고씨는 대학생들의 연극 경연무대인 `대학극 경연대회'에서 선배로부터 KBS 전신인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성우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당시는 어려운 시대니까 용돈이나 벌어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응모했어요. 당시 연극을 너무나 사랑했으니 얼마나 좋은 아르바이트야." 그렇게 쉽게 시작한 방송생활이지만 성우의 길은 순탄지 않았다. 성우 연수가 끝난 뒤 처음으로 투입된 삼일절 행사에서 한 실수 때문에 그는 캐스팅에서 다른 동료들에게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최고 성우로 올라섰던 것은 피나는 노력 때문이다.
"당시 녹음실에는 배우나 성우들이 녹음하고 버리고 간 대본들이 많았어요. 그걸 모두 주워 집으로 가져간 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모든 배역을 매일 연습했어요. 그러니까 어느날 귀가 트이더라고요."
고씨가 말한 귀가 트인다는 것은 성우 자신이 자신의 연기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귀를 갖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고씨는 "내 연기에 대해 귀가 트인 것은 56년에서 58년 사이인 것 같다"며 "내 감정연기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는 날개를 단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한 경험도 있다. 선배의 핀잔에 "내가 성우 말고 할 것이 없겠느냐"는 생각에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하는 영예를 안았다.
`평안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아나운서도 그에게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나 보다.
그는 드라마가 끝나면 출연진이나 소개하는 아나운서 일을 하면서 "내가 왜 이렇게 재미없는 일을 해"하며 다시 성우로 돌아왔단다. 현재 대학과 방송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고씨는 성우의 기본으로 정확한 발성을 꼽았다.
최근 독특한 말투로 인기를 모으려는 일부 성우들에 대해 "유행은 곧 지나간다. 먼저 기본을 다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2년 전부터 성우 1기생들의 모임을 갖고 있다는 고씨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예전에는 성우들의 단결력이 대단했다"며
"성우 1기 50주년 기념행사가 성우들이 다시 단결하는 구심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2004.12.8 연합)
50년 ‘목소리 인생’ 성우 고은정씨
‘목소리의 마술사’가 있다. 반세기 동안 격동의 현대사를 ‘목소리’ 하나로 관통했다. 질곡의 50년 세월속에 가느다란 성대의 떨림으로 감동과 추억의 파노라마를 무수히 연출했다. 타고난 ‘천(千)의 목소리’는 대중들의 가슴을 쥐락펴락했다.
암울했던 1960∼70년대, 라디오의 ‘연속방송극’과 ‘추억의 영화’ 등 무려 1000여편에 출연했다. 엄앵란 문희 남정임 정윤희 등 내로라하는 당대 여배우들의 목소리를 도맡아 ‘얼굴없이’ 많은 인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 주변에서 이꼴저꼴 다 보면서 연설과 다큐멘터리 대역(代役) 등을 해
흥미진진한 야화도 간직하고 있다.
‘여자의용군 예술대’ 자원입대
고은정(70)씨.1954년 12월 KBS 성우 공채 1기로 출발,50년 ‘목소리 인생’을 걸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12월과 올 4월 단막극을 직접 쓰고 출연까지 했다. 최근에는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모호텔 정원에서 만났다. 먼저 해마다 6월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다름 아닌 6·25에 참전했던 것.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50년 11월 어느날. 수도여중 3학년 재학 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고은정은 친구들과 모여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대열에 합류하는데 우리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 결국 며칠 뒤 고은정은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훈련막사는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 자리). 때마침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가칭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됐다. 고은정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외출허가가 떨어졌다. 이때 가족들이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어떻게 외출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귀대했다. 그런데 동료 3분의1가량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어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날 별도의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당도했다.(관련자료에 따르면 50년 9월 여군교육대가 부산에서 결성됐으며, 군부대와 병원 등의 위문을 위해 군악 및 예술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군번 0995862 육군 제대
부산에 도착한 예술대원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며칠 뒤 크리스마스 이브때 고은정은 면회 온 목사의 도움으로 십수권의 책을 장만할 수 있었다. 워낙 책을 좋아한 데다 병원위문을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숙소 앞에 ‘소공녀의 방’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그러던 51년 2월 부대에서 휴가를 다녀오란다. 딱히 갈 곳이 없어 지난번 도움을 받은 목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때마침 목사는 제주도의 피란민들을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고은정도 목사와 함께 떠났다. 도착했더니 돌아올 여객선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목사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복귀를 하지 못했다. 고은정은 관계요로를 통해 이같은 사정을 전한 뒤 그해 2월 제주 오현중에 설치된
피란민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와 관련, 고씨는 “얼마전 육군에 확인해 보니 군번도 있고 제대처리돼 있었다.”면서 당시 입대했던 친구들을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눈다고 귀띔했다.
에피소드 1
74년 8월14일이었다. 영화 ‘맹물로 가는 자동차’ 더빙을 하느라 밤을 새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꿈을 꾸었다. 고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로 초청했다. 고씨는 의사 동생과 함께 갔다. 육 여사는 진작 보고 싶었다며 “조국을 위해 고생이 많은데 부탁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고씨는 “서울신문에 다니던 오빠가 필화사건으로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고씨는 육 여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단골로 등장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얼마만큼 잤을까.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니 아이들이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탕탕탕 하는 총소리와 함께 TV 전원이 꺼졌다.8·15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영부인 피격사건’이었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육 여사 다큐멘터리에 더욱 많이 출연하게 됐다. 박근혜씨가 영부인 역할을 맡을 때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박씨는 “아버지는 고 선생의 목소리가 엄마하고 똑같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 뒤 연말마다 청와대에서 금시계를 보내왔다.
대통령 부인들과 자주 만나
에피소드 2
5·16 직후였다. 동아방송에서 ‘천일야화’라는 대담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김종필(JP)씨를 초청했다. 시간이 됐는데도 그가 오지 않아 찾아나섰다. 점퍼차람의 한 사람이 방송실 입구에서 “나를 찾는 겁니까.”하고 말했다. 인사를 하자 JP는 “고 선생은 골라쓰는 단어가 아주 달라요.”라고 했다. 인연이 돼 나중에는 JP자택에서 부인과 자주 만나게 됐다.
“80년대 초반 민정당 창당대회 때 권정달씨의 부탁으로 봉두완씨와 사회를 같이 보게 됐지요. 이때부터 본의 아니게 정치 언저리에 맴돌게 된 것 같아요. 여성계 대표라는 명분으로 종종 청와대에서 이순자·김옥숙 여사와 식사도 했지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는 마침 우리 아들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습니다.”
87년 대선을 일주일 앞둔 때였다. 노태우 후보측에서 63빌딩에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이종찬씨도 함께 있었다. 노 후보는 목이 꽉 잠겨 있었다. 노씨는 “고 선생, 어떻게 하면 목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이종찬씨는 달걀을 먹어야 한다고 거들었다. 고씨는 “소염제를 먹고 당분간 필담으로 대화할 것”을 주문한 뒤 연설 때 5만,10만 관중을 염두에 두지 말고 오직 자신 앞에 있는 마이크를 상대로 감동을 시킬 것을 권했다. 낮은 톤의 목소리가 오히려 장점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이어 노 후보가 여성정책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자 “이제와서 새로운 정책을 내놓은들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선거 때까지 애처가라는 소문만 잔뜩 퍼뜨릴 것”을 주문했다. 전직 대통령의 목소리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설득력은 있으나 노 전 대통령의 현대적 감각에는 뒤떨어진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10분 동안 113개의 언어가 틀릴 정도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돼 ‘우리나라에선 통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발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편이라고 했다. 고씨는 “스피치는 공인의 덕목 가운데 매우 중요한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 출강에 여전히 방송활동
고씨는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고흥숙.‘흥’자 돌림이다. 막내동생이 한나라당 국회의원 고흥길(성남시 분당갑)씨. 오빠 고흥욱(72)씨는 청와대 출입을 오래한 기자출신으로 현재 LA에 산다. 얼마전 국제전화를 걸어와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는데 무슨 일이냐.”고 뜬금없이 물어 “아냐, 길은정이 죽은 것을 보고 그러겠지.”하고 대답했단다.
어머니는 5남매를 남겨놓고 30대 나이에 요절했다. 새 장가를 든 아버지도 54년 교통사고로 일찍 명을 달리했다. 새어머니는 5남매를 친자식 이상으로 키웠다. 현재 94세로 분당 아들집에서 산다. 고씨 자신은 59년에 결혼, 이듬해부터 연년생으로 자식 넷을 낳았다. 함께 지내는 둘째딸(44)을 제외하곤 다들 결혼했다. 고씨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해 고비를 맞았지만 요즘은 서울예대 장로신학대 출강과 극동방송에서 매일 10분짜리 방송 등을 하며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족사를 쓰고 있어요. 여름방학 때는 밀린 대본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일생을 담은 모노드라마도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1936년 서울 출생
51년 제주 피란민학교에서 수도여자중학 졸업
54년 수도여고 졸업, 숙명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KBS 성우공채 1기
56년 최초 연속방송극 ‘청실홍실’ 성우
58년 연속방송극 ‘산너머 바다건너’에서 상하이 여자 ‘미라’역을 맡아 주목받음.
이후 ‘장희빈’‘고운정 미운정’‘왕비열전’‘대동강은 알고 있다.’‘불꽃의 소리’‘113수사본부’등 드라마와
영화를 합쳐 1000여편 출연.77년 드라마 ‘대니할머니’당선으로 방송작가 데뷔.
97년 고은정언어예술원 개원-98년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2000년 방송위원회 위원,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
방송극본 가을에 온 손님, 불모의 수령, 저녁노을, 사랑의 계절, 두고온 언니에게 등.
소설작품 고운정 미운정, 위험한 체험 등.
상훈 국민훈장동백장(2000년)
(2005.6.13 서울신문)
고은정 “50년전 성우는 아나운서보다 엘리트”
“예전에 라디오 성우는 최고 스타였어요. 지금보다 훨씬 품격 있는 존재였죠. 연예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밀려드는 인터뷰가 하기 싫어 기자들을 피해 다녔어요.”
54년 12월 공영방송인 서울 중앙방송 공채 1기로 입사해 반백년 간 10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성우의 길을 걸어온 원로 고은정(69). 12월 한 달간 KBS 1라디오 ‘KBS 무대’를 통해 1기 동기생들이 모처럼 모여 입사 50주년 기념 방송을 한다고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말도 못하게 좋죠. 아무도 이 마음을 상상 못할 거예요. 부디 우리들의 화법과 표현방식이 구닥다리가 아니길 바랄 뿐이죠.
50년 전 처녀 총각으로 만난 동기들이 손주를 본지 오랜데 마치 함께 산 부부같이 느껴져요.”
1기 모집에서 400여 명 가량의 응시자중 20명 안에 든 이들 동기들 중 고씨는 가장 먼저 캐스팅의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입사 후 처음 맡은 3ㆍ1절 애국시 낭독 때 3천만 전 국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에 너무 큰 소리를 내 진동 때문에 마이크가 고장나 한동안 캐스팅 순위에서 뒤로 밀려 맘고생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유명 배우들이 쓰고 버린 대본을 주워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앉아 죽어라 연습했어요.
그러다가 57년에 어느 순간 제 소리와 정서의 정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는 놀라운 체험을 했죠.”
귀가 제대로 뚫리는 엑스터시를 맛본 이후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56년 주말극 ‘청실홍실’ 58년 일일극 ‘산 너머 바다 건너’를 통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고씨는 동기들 중 단연 선두주자였다. 지금 연기계의 대표적인 원로 L씨가 새로 생겨난 민영방송국에 18,000원에 스카웃 돼가던 때에 고씨는 50만 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는 아나운서가 생활고로 자살하던 시절이었어요. 성우 선배한테 야단맞고 학생증 사진을 뜯어 홧김에 아나운서 시험을 봤다가 붙었는데, ‘내가 왜 이렇게 인형같이 사나?’ 후회가 들어 금방 다시 성우로 돌아왔죠.”
민영방송국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때에 남아도는 성우 인력이 한때 TV로 몰리기도 했지만 고씨는 밀려드는 섭외 요청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성우들이 너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TV로 팔려 가는 듯해 그들의 출연료를 높이고자 한번 TV 연속극 출연을 결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촬영중 그 방송국에 불이 나 무위에 그친 것을 보고 성우 팔자라고 여기게 됐단다.
“그런데 춥고 배고픈 시절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성우였고, 맘속에는 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66년 MBC 라디오 ‘고운정 미운정’이라는 아침 칼럼에서 국내 최초로 원고를 직접 쓰는 DJ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79년 막내 올케 이름으로 MBC 극본 공모에 당선됐죠.”
현재 방송작가 활동도 겸하고 있는 고씨는 ‘KBS 무대’ 26일 방송분 ‘만남’의 대본을 직접 썼다. 이 작품은 현존하는 1기생 전원이 출연하며 이미 고인이 된 동기생들과의 가상 대화도 담는 등 1기들의 50년 성우 인생을 그리게 된다.
“라디오 드라마의 깊이와 진정성은 TV가 못 따라가는 면이 있죠. 성우들은 정년 퇴임도 없고, 연수가 끝나면 알아서 스스로 살아 남아야 했어요. 가수 최희준 씨는 성우들이 잘 뭉치고 의리가 넘치는 걸 늘 부러워했죠.”
영상 시대 속에 성우들의 입지가 나날이 줄어드는 이 즈음 고씨는 성우 후배들이 순간의 기회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긴 안목과 강한 긍지를 가지고 실력을 키울 것과 이번 50주년 기념 방송이 성우들의 구심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간절한 바람을 나타냈다.
(2004.12.9 머니투데이)
'소리상자'의 마법에 울고 웃던 80년
한국 라디오방송 80주년… 1927년 첫 전파, 성우 · 가수 등 숱한 '라디오 스타' 배출
방송의 꽃으로 자리 잡았던 라디오 드라마에 얽힌 이야기들과 주요 인기 드라마 주제가들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특집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절감한 것은 역시 기록의 부재다. 관련 자료가 드물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방송 관련 고서를 뒤적이며 얻어낸 정보는 보물단지 같았다.
1924년 시험방송 때 국내에 보급된 라디오는 5대에 불과했다. 개국 후 1,000대가 넘었지만 한국인이 보유한 라디오 숫자는 200대에도 못 미쳤다. 배우 복혜숙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체신국 뒤뜰에 천막을 쳐놓고 시험방송을 할 때 마이크 앞에서 소위 연극을 했다. 그때는 무대연극의 대본 그대로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무대극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설명이 덧붙여진 형식이었다”고 한다. ‘소리 상자’로 불린 라디오는 당시 대중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라디오 보급 숫자는 개국 1년 6개월 만에 1만 대를 넘어설 만큼 선풍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드라마 형식이 시도된 것은 한국어·일어 2중방송이 시작된 후 ‘라디오 프레이미팅’이라는 단체가 연출한 34년 작 <노차부>가 최초다. 김희장이 쓴 이 드라마는 군더더기 설명 없이 대사로만 꾸며진 라디오 드라마의 원형이었다.
35년 12월에는 세모(歲暮)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PD와 아나운서들이 <신안책귀방어>라는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했다. ‘빗장이 방어 작전’이란 드라마다. 1936년에는 부민관에서 라다오 드라마 경연대회가 열렸다. 요즘 말로 말하면 공개방송이다. 그동안 무대극을 중계해오던 방송이 새로운 창작 라디오 드라마를 일반에 공개했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은 방송극을 신민정책을 위한 전쟁수행과 목적극으로 변질시켜 나갔다. 41년 2차대전을 일으킨 후 사라진 드라마는 해방 후에도 좋은 극장프로를 중계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면서 방송에 파견된 미군정의 고문관들로 인해 정시 방송제와 프로그램의 드라마화가 이뤄졌다.
해방 후 최초의 방송 드라마는 홍은표 작 윤준섭 연출의 <화랑관창>이다. 드라마에 관심이 증폭되자 숨은 작가 발굴을 위해 방송희곡 현상모집까지 했다. 1등에 김희창 작 <꿈의 공덕>, 2등에 최요안 작 <세뱃돈> 3등에 조남사 작 <큰아버지 소동>이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도 성우라는 독립된 영역은 없었다. 무대배우가 방송에 나오면 성우가 되는 형편이었다. 방송극출연자는 복혜숙, 한은진, 김승호, 황정순 등 무대배우들이 압도적이었다. 이때 보강된 최초의 성우들은 고 최무룡과 윤일봉 그리고 구민 등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방송은 다시 암흑기를 맞이했다가 54년 CBS가 개국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라디오 드라마에 주력한 기독교방송은 전속성우 모집을 통해 양과 질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이에 충격을 받은 KBS는 54년 5월 ‘환도 후 제1회 방송성우’를 공개 모집해 22명을 뽑았다. 유명 성우인 오승룡, 고은정이 이때 선발되었다. 1기생들은 3개월의 강습을 거쳐 <무도회의 수첩>이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KBS와 CBS의 라디오 드라마 경쟁은 대단했다. 1956년 조남사의 KBS 일요연속극 <청실홍실>이 최초로 드라마 주제가를 도입하며 빅히트를 터트리자 CBS도 <수정탑>으로 대응하면서 연속방송극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57년 10월 1일 첫 일일연속극 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의 <산넘어 바다건너>는 새로운 방송극 시대를 전개했다.
60년대 들어 MBC, DBS, TBC등 민간방송이 앞다투어 생겨나면서 라디오 드라마는 온국민을 웃기고 울리며 라디오 앞으로 끌어 모았다. 그 결과 각 방송국의 성우모집 때가 되면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성우는 당시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TV보급 확대와 더불어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는 자연스레 TV로 이동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차부인 재치부인>, <즐거운 우리집>, <김삿갓 북한 방랑기>등 라디오 드라마는 각 가정의 시계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지금은 TV, 인터넷 등 음악이나 오락, 정보, 뉴스를 얻을 수 있는 미디어가 넘친다. 그러나 라디오는 보는 것만으로는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지녔기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미디어로서의 생명력은 지속될 것이다.
(2007.3.7 주간한국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1966년 '하숙생'이전 마지막을 장식한 노래가 '샐러리맨 출세작전'과 '광복 20년'이다. 두 작품 모두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다. 각각 MBC와 TBC(옛 동양방송)에서 라디오 드라마로는 상당히 장기간 방송됐다는 특징이 있다.
'샐러리맨 출세작전'은 말 그대로 샐러리맨 이야기였다. 아침 출근 무렵에 방송돼 일터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화제가 됐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 근대화.산업화의 역군들이었고, 드라마는 이들의 일상에 활력소였던 셈이다. 노래도 경쾌했다.
작곡가 홍현걸씨와는 '엄처시하'의 주제곡을 부를 때 처음 만났다. 이 무렵 포클로버의 멤버 위키 리(이한필)의 노래 '눈물을 감추고'도 홍씨가 작곡했다. "눈물을 감추고 눈물을 감추고/이슬비 맞으며 나 홀로 걷는 밤길/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쓰라린 가슴에/고독이 넘쳐 넘쳐 내 야윈 가슴에 넘쳐 흐른다."
'광복 20년'은 광복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은 TBC 특집 다큐멘터리 드라마였다. '인물로 엮은 광복 20년사'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내 기억으로 TBC 개국 직후부터 1백회 이상 넘게 방송된 히트작이었다. 당시는 라디오 드라마의 전성기로 성우들의 전성시대였는데, 이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우들이 기량을 맘껏 뽐냈다. 구민씨가 이승만 대통령 목소리를 근사하게 흉내내 대단히 인기였다. 이후 이승만 목소리 하면 구민으로 통했다. 영화배우 신성일 목소리의 더빙을 전담했던 이창환씨, 그리고 고은정씨 등이 이 드라마에서 성가를 높였다.
"먹구름 가시면 별빛도 맑은데/20년 풍운 속에 묻고 묻힌 사연들/비바람에 흘렀던가 아아 영욕은 무상해라 광복 20년."
나는 광복절이 찾아오면 이 노래의 숫자를 살짝 바꿔서 부르곤 했다. 95년 가수인생 35주년 기념 음반을 냈을 때는 '광복 50년'이라는 타이틀로 녹음했다. 만약에 내가 다시 무슨 기념 음반을 낸다면,이 노래의 숫자가 또 한번 바뀔 것이다. 말 그대로 내 노래 인생과 '영욕'을 같이하는 노래인지도 모른다. 이 노래의 작곡가는 김광수(93년 작고)씨다. 이 난을 꾸준히 읽은 독자라면,김씨와 나의 뜻밖의 만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58년 가을 서울대 총학생위원회 주최로 열린 '서울대 장기놀이 대회' 말이다. 내 가수 인생의 시발점이 된 이 축제의 반주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김씨다. 김씨가 이끄는 악단은 60년대 탱고 밴드로는 최고였다. 첫 인연은 극적이었으나, 내가 부른 김씨의 노래로는 '광복 20년'이 유일하다. 작곡가라기보다 연주자로 전념한 탓이기도 했다. 지금도 동요처럼 애창되고 있는 '엄마야 누나야'가 바로 김씨가 작곡한 노래다.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졸업한 김씨는 50년 부산 최초의 실내악단을 조직해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56년 신중현씨를 최초로 무대에 서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방송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60년 초반 잊혀지지 않은 풍경 하나가 라디오 공개방송의 유행이다. 방송사에서 방청권을 나눠주면 청취자들은 이걸 가지고 공개방송장에 들어왔다. 스튜디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예식장을 빌려 활용했다. MBC는 인사동에 있던 종로예식장을 주무대로 썼고 KBS는 남산 공개홀을 사용했다. 공개방송은 보통 1시간 정도였다. 서서 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대단히 인기였다. 극장 쇼 외에 가수 등 연예인을 직접 만날 수는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으니 그럴 만했다. 극장 쇼보다는 훨씬 다정다감하게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바로 공개방송이었다고 보면 된다. MBC의 '오색의 화원'과 동아방송의 '유쾌한 응접실' 등이 공개방송 프로그램으로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오랫동안 동아방송의 간판이었던 '유쾌한 응접실'의 진행자는 고등학교 1년 선배인 전영우(수원대 교수)였다. 이야기가 있는 노래시간이랄까. 노래외에 가수의 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2002.9.4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인생은 나그네길' 가수 최희준)
1949년 상업은행합창단
텔레비전 소유가 부자의 판단 기준이 되던 시절. 그 시절 라디오는 서민의 애환을 함께 해왔고 1950, 60년대 라디오드라마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라디오 연속극이 방송되는 시간이면 지금의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가족들을 이웃들을 라디오 앞으로 불러모아 귀를 기울이게했다. 그 당시의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들, 성우들은 지금의 TV톱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고 그 일부는 TV가 개국하면서 라디오 드라마에서 갈고 닦은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지금은 원로 TV 탤런트로 명성을 떨치고 있기도 하다. 불과 8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귀에 익숙한 인기 라디오 드라마의 제목들을 기억하고 있다. 사랑의 계절, 꽃님이네 집 등 그렇게 라디오 시대을 함께 하며 목소리 연기로 인기를 누리던 성우들이지만 이제 디지털 영상시대를 맞아 모든 것은 영상으로 좌우되고 소리만의 매력은 한 걸음 물러나는 듯하다.
성우되기 그 치열한 현실
당시 MBC에서 제16기 전속성우를 모집하고 있었다. 탤런트나 미스코리아 등 연예계에 입문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모집 광고를 보고 우연히 응시하게 되었어요” 라든가 “주변의 권유로 뜻하지 않게”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성우시험에서는 절대 이런 우연이 통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7전 8기의 모진 노력이 있은 후에야 고진감래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서 종종 성우가 되고 싶다며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다. 성우 5년 차의 햇병아리 성우가 뭐 그리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마는 성우시험 합격비결이 듣고 싶은 것이려니 하고 나름대로 정보를 주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의 경우는 정말 성우가 되고싶어 못 견디겠는지, 다시 한번 질문을 해 보기도 한다.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성우가 되기도 어렵겠거니와 설혹 노력 끝에 성우가 된다 해도 성우계에서 이름 석자를 날리고 처자를 보란 듯이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시험 못지 않은 모진 풍파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우는 맘 고생, 목 고생할 준비가 된 사람만을 기다려 준다.
프리랜서 성우
프리랜서가 되면 허허벌판에 홀로 선 뼈저림을 느낄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현재 성우협회에 등록된 성우는 600명 가량. 이 중에서 어느 정도 방송활동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성우는 6분의 1이 채 안 될 것이다. 더군다나 성우의 주 수입원이었던 외화 더빙에 있어서도 케이블TV는 물론이거니와 공중파방송에서 조차 자막 방송이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성우들은 더빙연기의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하는 위기에 놓였다. 성우가 연기자인가, 방송인인가. 20년 넘게 성우활동을 해온 분들은, 성우는 연기자이니 연기를 잘해야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젊은 성우들 사이에서 성우가 연기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성우의 연기영역은 과거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MBC와 KBS는 성우체제가 다르다. MBC는 성우가 영화부 소속이라 주 업무가 영화더빙이고 따라서 성우시험을 치를 때 더빙능력이 큰 관건이다. 반면 KBS는 라디오국 소속이라 외화더빙 시험없이 그냥 라디오드라마 연기로 테스트하며 입사 후에도 주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다가 프리랜서가 되어서야 외화 더빙의 기회가 주어진다. 최근 입문하는 대부분의 성우들은 대개 성우전문양성학원을 거치곤 한다. 이렇게 학원을 통해 배출된 성우지망생 중 극소수만이 성우가 될 수 있고 그 성우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억대 연봉자가 되는 것이다.
성우답지않게 해달라 주문
개인기의 시대. 최근 탤런트 최모양과 개그맨 박모군이 개인기로 외화더빙하는 성우들의 흉내를 내어 웃음을 자아낸다. 외화 더빙특유의 운율을 타는 억양. 대부분 성우들은 그들의 개그에 웃을 수가 없다. 오히려 씁쓸할 뿐이다. 광고 녹음 때 혹은 기타 여러 프로그램들에서 우리를 당혹케하는 주문들이 있다. 그건 바로 “성우답지 않게 해주세요” 다.자연스럽게 해달라는 주문이다. 성우의 연기가 사실성 (Reality) 즉, 자연스러움이 부족하다는 말인듯 하다. TV드라마의 탤런트의 연기와 성우의 연기를 비교할 때 성우들의 연기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문어체적 억양과 너무 꾸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비단 우리나라 성우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라디오 드라마가 제작되는 유럽, 일본, 중국 등의 연기자들도 같이 느끼고 지적 받는 점이다. 자연미의 추구는 세계적 추세이고 이런 점들로 해서 성우의 연기는 구태의연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대본만 보고 연기해야한다는 점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독일의 한 라디오드라마 연출자는 연기자들에게 연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 생각하라 ”고 주문하기도 한다. 상상하라는 것이다.
외화 더빙
성우를 꿈꾸던 시절. 외화를 보며 참으로 궁금했던게 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입이 딱딱 맞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피나는 연습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는걸 아는덴 그리 오랜 시간이 리지 않았다. 지금도 최소한 대여섯번의 시사를 거쳐야 입을 맞추어 내지만 연륜이 지긋하신 분들은 한두번의 시사로도 거뜬히 맞춘다. 성우들은 번역작가가 번역해온 대본으로 최대한 그 영화배우의 감정을 살려서 그리고 말 길이를 잘 맞추어서 더빙한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가 어순이 다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외국배우의 입이 벌어질 때 아무 소리가 없다면 이 얼마나 썰렁할까. 바로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 성우특유의 억양이 발생하며 말의 길이를 맞추는 과정에서 자연스럽지못한 호흡이 많이 들어가기도 한다. 더빙은 참으로 힘겹지만 한편으론 보람된작업이다. 성우들은 누구나가 다 외화의 주인공을 꿈꾼다. 운좋게 영화가 끝나고 자막에서 내 이름이 맨 먼저 나갔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말할 수 없다. '주말의 명화' 더빙시 투입되는 성우는 대략 15~20명선, 액션씬이 많은 대작의 경우는 20명이 넘게 투입되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 녹음실 안에 빼곡이 앉아서 마이크 3대로 최대한 NG를 줄이려 노력하면서 연기하는 것이다. '주말의 명화' 녹음시간은 평균 4시간 정도. 많은 사람의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다 보니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NG를 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마이크 앞 울렁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전속시절, 간혹 막간에 한마디( 예를 들어 지나가는 여자 1 같은) 하면서 NG를 낼 때가 있다. 그때의 싸~해지는 녹음 분위기란! 나 자신이 싫어지기도 하지만 선배님들의 격려의 한마디에 용기를 내어 보기도 하던 시절이다. 혹자는 굳이 외화더빙이 존재해야하는 이유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녀노소 누구나가 다 쉽게 접하는 공중파 텔레비젼을 통해 외화를 거슬림없이 시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외화 더빙은 꼭 필요하다. 간혹 원영화의 느낌을 파괴한다는 등 운운하며 자막방송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영화 마니아라면 영화전문채널이나 비디오, 영화관을 통하지, 공중파TV를 통해 감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우들의 더빙은 영화마니아들이 아닌 일반시청자들을 위한 더빙이다. 방송가에서 일하는 분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성우란 직업은 참 편하겠어요. 그냥 쓱~ 읽기만 하면 되잖아요?” 천만의 말씀이다. 백조가 우아해 보이지만 물속의 백조의 발은 열심히 헤엄치고 있다. 노력없이는 버티기 힘든 곳이 성우의 세계다. “경력10년이 되기 전에는 성우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목소리로만 표현해내는 일은 어렵다는 말이다. 방송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또 시청자의 요구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직업에 있어서도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시청자들은 성우가 정확한 발음과 낭낭한 목소리로 제대로 읽는 것보다는 익숙한 연예인이 그저 재미나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런 변화에 맞춰 발빠르게 대응해 나가는 것이 성우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기생요리집 명월관(明月館)
1918년경에 명월관이 소실된 뒤 순화관(현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태화관은 기미독립선언 때 33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했다. 당시 본관 간판은 장춘관으로 옮겨졌지만 명월관을 경영하던 안순환이 경영했기 때문에 명월관에 모였던 명기들이 그대로 모여 번창했다. 궁정양악대 출신들이 시중에 불려나와 우미관 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를 꾸며
태화관에 등장하기도 했다.
(출처:엠파스블로그 '춘하추동 방송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