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천재시(神童天才詩)
來時襁褓金時習 내시강보김시습
小 亭 舟宅何人在 소정주택하인재
올 때 포대기에 싸인 김시습이라고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대답 했고,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보면 김시습이 강보에 싸여 겨우 8달 만에 능히 글을 알아서 일가 할아버지가 논어(論語) 첫 장에 있는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 시습(時習)을 따다가 (時習)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 살 때 글을 지을 수가 있었는데, 읊은 시가 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르니 봄이 저무는구나! 푸른 바늘로 구슬을 꿰니 솔잎 이슬이로다〔桃紅柳綠三春暮 珠貫靑針松葉露〕라는 시(詩)다. 다섯 살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전한다. 장안에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 자자 하자, 다섯 살 때 정승(政丞) 허조(許稠)가 집에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字)를 가지고 시(詩)를 지으라’고 하니,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지어서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神童)이다”라며 감탄했다. 이렇게 장안에서 신동(神童) 소문이 나자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김시습을 대궐로 부르게 한다,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묻게 했다. 박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세종을 대신해,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곧 “올 때 포대기에 싸인 김시습〔來時襁褓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또 벽에 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지을 수 있겠느냐?”고 하자, 곧, 바로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고 한다. 박이창이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라는 전교(傳敎)를 내리며 매우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며 가져가게 했더니, 비단 그 끝을 서로 이어서 허리에 비단을 묶고 끌고 나갔다고 한다. 나이 어린 다섯 살 아이가 무거운 비단을 들고는 못가니, 비단을 허리에 묶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김시습을 오세 문장(五歲文章)라는 별명(別名)이 얻게 되었다.
세종은 직접 보고자 했으나 대신들 이목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 직접 만나지는 않고 앞으로 크게 쓸 동량(棟樑)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신동(神童)이라고 한 김시습(金時習)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을 몰아내고 왕위찬탈(王位簒奪)을 하자 삼각산(三角山:북한산) 절에서 글을 읽다가 이 소식을 접한 김시습은 방문을 걸어 닫고 사흘간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울부짖고 통곡하다가 읽고 쓰던 서책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바로 방랑길에 올라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울분(鬱憤)의 마음을 달래다가 머리를 깎고 불교에 입문하여 설잠(雪岑)이라는 법명(法名) 받고 출가하게 된다. 오세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조선 현실 정치는 그 천재의 무대가 아니었다. 속세를 떠나 남긴 시도 2,000수(首)가 넘는 숫자이고 잠시 환속을 하지만 아내가 1년 만에 죽자 다시 절로 들어가서 마지막 열반(涅槃)한 사찰은 충남 부여에 있는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入寂)한다. 무량사 뒷컨 한적한 청한당(淸閒堂)에서 혹한(酷寒) 겨울밤 차 한잔을 마시면서 남긴 차시(茶詩)가 있다.
오래도록 앉아 있어도 잠은 안 오고, 한치 남은 촛불 심지 베어냈네, 서릿바람 내 귀에 들려오더니, 싸락눈은 침상 머리에 떨어지는구나, 마음은 물과 같이 깨끗하니, 유유자적 막히고 걸림이 없네, 이것이 바로 사물과 나를 잊는 것이니, 혼자서 잔에 차를 따라 마시네. <坐久不能寐 手剪一寸燭 霜風聒我耳 微霰落床額 心地淨如水 脩然無礙隔 正是忘物我 茗椀宜自酌> 이시는 설잠 고풍(古風) 십구수(十九首) 중에 16수(首) 차시(茶詩)다. 오언율시(五言律詩)인데 압운(押韻)은 입성(入聲)에 여러 운족(韻族)으로 작시(作詩)를 했다. 율시(律詩)는 평성(平聲) 한 운통(韻統)의 운(韻)으로 운(韻)을 맞추는 것이 상식인데, 설잠시(雪岑詩)는 그렇지않은 것이 특징(特徵)이다. 이 시의 운(韻)은 입성(入聲) 여러 운목(韻目)의 운족(韻族)으로 작시(作詩)를 했다, 수련구(首聯句) 촉(燭)은 옥(沃)의 운족(韻族)이고, 함련구(頷聯句) 액(額)은 맥(陌)의 운족(韻族)이고, 경련구(頸聯句) 격(隔)은 맥(陌)의 운족(韻族)이고 미련구(尾聯句) 매(寐)는 거성(去聲) 치(寘) 운족(韻族) 중에 매(寐)의 운족(韻族)으로 시(詩)를 지었다. 요즘 근체시(近體詩) 작시법(作詩法)과는 거리가 있다. 설잠이 남긴 시는 2,000수(首)가 넘는다고 한다. 그가 남긴 시 전체를 운(韻)을 맞추어 보지 않아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차시(茶詩) 한편만 보아도 오세문장(五歲文章)답게 사성운중(四聲韻中)에서 자유롭게 작시(作詩)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 시속에는 울분(鬱憤)을 승화시키는 시도 많았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설잠의 시(詩)와 저서로는 매월당집(梅月堂集), 금오신화(金鰲新話),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해동이적(海東異蹟)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유금오록(遊金鰲錄), 동일록, 신귀설(神鬼說), 태극설(太極說)) 천형, 애민의(愛民議), 산행즉사(山行卽事), 위천어조도(渭川漁釣圖), 도중(途中), 등루(登樓), 소양정(昭陽亭), 하처추심호(何處秋深好), 고목(古木), 사청사우(乍晴乍雨), 독목교(獨木橋), 유객(有客,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등이다. 설잠(雪岑)의 행적이나 저서는 너무 방대하여 대 소개할 수가 없어서 다음 백과사전자료와 한민족 백과사전자료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여여법당 화옹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