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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정확한 저주 이해가 구원의 초석이다>의 줄거리:
구원은 저주로부터의 건짐입니다. '저주'라고 하면 우리의 일상에서 거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저주받은 상태를 날마다 체감하면서 삽니다. 일상적으로 느끼는 부족감과 결핍감은 저주 상태에 빠진 마음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입니다. 좋아하는 데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저주 개념이 정확해야 구원을 이룹니다.
정확한 저주 이해가 구원의 초석이다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정확한 저주 이해가 구원의 초석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정확한 저주 이해가 구원의 초석이다’
본문과 연관하여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목사님의 간절한 호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께서는 구원의 감격을 죄 사함의 감격으로 보시며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죄 사함의 감격을 느낄 수 없게 된 상태를 안타깝게 지적하셨고 죄 사함의 감격을 되살릴 수 있기를 호소하셨습니다.
죽은 다음에 천당 간다는 정도의 인식에서는 구원의 감격은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죄 사함의 감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해방됨을 떠올리며 이제 죄 사함을 받아서 의롭게 되었으니 죽어서 천국 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죄 사함의 의미가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구원이나 죄 사함이라 여깁니다.
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구원과 죄 사함의 감격을 일상적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저주의 핵심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국 죄로 인한 저주받은 상태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일상적으로 체감되기 위해서는 먼저 저주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주의 상태를 알 때 그 저주에서 벗어난 구원의 감격 또한 일상적으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저주의 상태에서 주어지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느낌은 부족감이나 결핍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주의 근본적인 증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아 저주에서 건짐을 받게 되면 부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만이나 원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부족감은 외로움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만 이 또한 구원의 상태에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불만이나 원망 혹은 외로움이 느껴진다면 저주 속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구원받은 자의 감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만족함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죄 사함, 의롭다 칭함을 받음 등의 구원을 의미하는 표현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바로 절대 만족감입니다. 우리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마음에 부족감을 느끼고 있다면 저주에 빠져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감격이란 부족감과 결핍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저주의 문제를 부각시켜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소유의 문제를 끈질기게 언급해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또한 이 소유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소유의 연장선상에서 저주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요즘은 나병이 치료 가능한 피부병이 되었습니다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나병은 가장 큰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리신 천형(天刑)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나병은 부정하게 여겨지는 병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걸리게 되면 인간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고 살아서 움직이지만 실제 삶이 없는 죽은 상태와 같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굴의 이목구비와 사지의 마디마디가 썩어들어가는 중에도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마음과 의식은 채움을 추구하게 됩니다. 나병환자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 그리고 격리로 인한 사회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주의 극치가 표현되는 상태가 바로 그 당시의 나병환자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나병환자의 삶으로부터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저주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주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가지지 못해도 괴롭지 않을 텐데, 좋아하는데 가질 수 없으니 괴롭습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상태의 가장 보편적 체감방식이 부족감과 결핍감으로 나타납니다.
어제까지 구원의 감격을 느꼈더라도 오늘 다시 눈곱만큼이라도 부족감과 결핍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다시 저주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허락받았지만 구원을 이루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허락받은 구원을 이루었거나 이루기 위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사소한 부족감이나 결핍감조차 생길 수가 없습니다. 외로움 또한 마찬가지로 생길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생겼다면 저주 속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기에 돌이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주란 좋아하는데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상태이므로 그 좋아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아함이란 가질 때에 마음이 채워져서 만족하리라는 믿음입니다. 좋아함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좋아하는 이유는 줄리엣이 있으면 만족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로미오에게 저주란 그렇게 좋아하는 줄리엣을 가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줄리엣에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좋아함에는 채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토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은 맞지만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해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가지면 마음이 채워져서 만족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본래의 저주란 하나님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을 가질 수 없게 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의 개념을 사탄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음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나 건강이 없기 때문이라고 속였습니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승진을 못해서 만족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에 좋아하는 대상이 돈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이란 하나님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좋아하는데 하나님을 갖지 못하는 저주의 상태에 놓인 자들에게만 예수님의 구원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채움 능력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만 가지면 절대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그러하신 하나님을 갖게 해주시는 분이고 도달하게 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돈을 좋아한다는 것은 돈의 채움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상태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예수님을 붙잡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를 데려가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지지 못해 부족과 결핍을 느끼는 저주의 상태에서 나를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데 가질 수 없는 상태를 저주로 여기는 동안에는 예수님은 내게 메시아도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는데 가질 수 없음을 저주로 여기는 자들에게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메시아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고치신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나았음을 보이게 하셨는데 그중에서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돌아온 사람과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말씀의 역점이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게 하심은 제사장이 나병환자를 확인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치료가 되었을 때도 제사장은 환자였던 사람을 검진해서 사회로 환원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심은 나병이 나았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병환자들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기쁨을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병에 걸리면 이목구비가 썩어들어가고 손가락 마디가 썩어서 떨어져 나가 결국에는 몽당손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상황이니 가족과 친구들과도 헤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들의 나병은 완치됩니다. 열 명의 환자가 그 놀라운 감격을 느끼며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였고 그중 아홉 명은 세상으로 재진입을 이루고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15~16절을 보면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16절의 ‘감사하다’라는 표현을 보면 헬라어 에우카리스톤(εὐχαριστῶν)으로 기쁨을 뜻하는 카라(χαρά)가 포함된 합성어입니다. 이로부터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께 영화로운 광채가 비친다는 의미입니다. 깜깜한 무대 위에서 주인공에게만 조명이 집중되는 상황과도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과 의식에서 배우자도 자녀도 나의 몸도 아닌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조명을 하나님께만 비추어드리는 것입니다. 이 고침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서는 오직 하나님만 보였고, 하나님이 1등을 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나병에 걸리면서 자신이 저주 안에 갇히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이 사람이 하나님과 격리돼있는 저주의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데 그 하나님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자가 되었다는 저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우선적인 존재로 드러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마음은 마치 짝사랑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10년 동안 구애를 하고도 늘 거절만 당하던 아가씨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아가씨는 언제나 그 청년을 좋아합니다. 청년을 좋아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던 마음은 항상 불행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이 아가씨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이 아가씨의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잡혼으로 인한 혼혈민족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이들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중에는 모세오경을 붙들고 하나님을 믿으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라 일컬어지는 나병에 걸림으로써 강제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나 나병이 깨끗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이 사람은 10년 만에 좋아하던 남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은 아가씨처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나병의 치유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관계 할 것이다. 내가 너의 마음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데이트 신청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러한 기쁨을 안고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은 상태의 의식을 가지고 그 하나님이 계시는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한편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기쁨과 만족의 이유가 달랐습니다. 저주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에게도 나병은 저주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나병이 하나님과 끊어졌음을 알게 하는 상징이었으나, 아홉 명의 유대인들에게는 나병은 인간세상으로부터 격리되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것에 한이 맺혔다면, 이들은 인간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것에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아 인간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아함의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감사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정신병자도 아니고 분명히 예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이유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으로 돌아가서 끊어졌던 관계들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부모자식과 끊어졌던 관계, 친구들과 끊어졌던 관계, 일과 끊어졌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것이 이들의 바람이었습니다. 이들이 좋아했던 것은 인간세상과의 관계였고, 이들에게 저주란 인간세상과 격리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를 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겼을 것이고 나중에 찾아와서 감사를 전하려고 했던 자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과 이들을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것은 저주의 이해가 다르기에 감사의 방향 또한 반대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19절을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열 명이 고침을 받았으나 구원을 선언 받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내서 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과 만남을 이루었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있느냐가 결정적 차이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주를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지금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끼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없음으로 부족함과 결핍감을 느끼는 것이 구원받을 수 있기 위한 초석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저주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이 느끼는 부족감과 결핍감의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중간에 개입해서 이러한 저주의 이해를 막고 비틀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백발백중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저주의 개념을 왜곡시켜버렸습니다. 돈이 없어서 부족하다고 느끼게 합니다. 건강에 대한 부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승진이 안 되고, 자녀가 형통치 못함에서 결핍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저주의 개념이 바뀌게 되면 믿음의 방향이 바뀌게 되고 구원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구원이란 저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처해있는 저주의 상황을 모른다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할지를 모르기에 예수님께서 나를 건져주실 수도 없습니다.
저주의 이해가 분명하면 구원의 감격은 일상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끼지 않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에 대한 이해가 분명치 못하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도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아홉 사람은 세상으로 기쁘게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이제 세상 안에서 또 다시 좋아하는 것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것을 갖지 못했음을 깨달으며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저주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나병환자의 저주의 상태에서 또 다른 저주로 옮겨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을 갖지 못하는 것을 저주로 여겼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정확하게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누리는 상태에서 세상으로 파송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좋아함이 유지되는 한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 감격이 지속되는 가운데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만 마음 채움이 되신다는 믿음이 예수님을 붙잡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사마리아 사람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만 보이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만 보이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져서 만족과 평강이 유지되는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강릉에 오셔서 저를 처음 만난 분들이 거의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버림당하시고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가신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연쇄사건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이 명약관화한 사건을 그동안 신앙 속에서 잊어버리고 살았음을 깨달으셨다는 것입니다. 땅을 빠져나가 하늘에 도달하는 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때만 의미가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좋아하여 저주의 개념이 틀어진 상태에서는 이 진리를 마주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갖지 못해서 부족감과 결핍감을 느낀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무력화시키면서 예수를 믿었다고 착각해 왔고, 복음의 능력을 무효화시키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은데 하나님을 가질 수 없음을 저주로 느낄 때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갖게 하시려고 오신 분이시지 다른 것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올바른 저주의 개념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을 때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세상으로 파송을 받게 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이란 올바른 저주 개념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좋은 분이며, 하나님만을 가지지 못한 것을 저주의 상태로 여기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고 믿음의 옳고 그름을 결정짓는 시금석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저주의 이해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결정하고 구원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버지를 가지지 못함이 저주임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저런 거짓된 이유들에 대해 느끼는 부족감과 결핍감에 속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복음으로써 그리스도로서 그 능력이 충분히 나타나 저주에서 벗어나 영속되는 구원의 만족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마리아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