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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날짜: 2015년 5월 31일
본문: 고린도전서 3:1~4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참 실망스럽습니다!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고린도전서 3장 1-4절]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실망스럽다는 건…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며 계속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도 불완전하고 때로는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하게 행동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실망하지만, 그 안에 버려지지 않은 기대 같은 것 말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오늘 본문 1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어떤 것인가요? “참 한심하기는 한데, 너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어린아이와 같이 대해서라도 깨닫게 해야겠다!”는 마음이죠.
교인들이 목회자를 볼 때 가장 실망스러운 순간이 언제인가요? 아마도 목회자답지 못할 때가 아닐까요? 요즘 들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보니 “목회자에 대한 실망”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더군요. 그러면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보면서 가장 실망스러울 때는 언제일까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자라지 않는 것, 즉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볼 때입니다. 그래서 때로 목회자도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런 실망은 떠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죠.
대개 실망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일어나지요.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어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실망스럽다!”는 말 속에는 아직 버리지 않은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이 않나요? ‘나는 너에 대한 기대가 있어!’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죠.
출처는 잘 알 수 없는데 설교를 준비하며 온라인상에서 보았던 내용입니다.
여론조사 기관인 G. H. 코리아에 의뢰한 ‘교인의식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463명 중 가장 많은 66.3%가 ‘성도의 신앙 성숙’을, 교회가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 꼽았다고 합니다. ‘교회부흥과 성장’이라는 응답은 4.1%에 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이 우려스러운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55.9%는 ‘매우 그렇다.’ 35.9%는 ‘조금 그렇다.’고 답해, 91.8%가 우려의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개인 신앙 성장에 저해가 되느냐?”는 설문에는, 6.5%가 ‘매우 그렇다.’, 20.9%가 ‘조금 그렇다.’고 답했으며, 18.4%는 ‘그저 그렇다.’, 34.2%는 ‘별로 그렇지 않다.’, 18.6%는 ‘전혀 그렇지 않다.’로 대답해,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개인의 신앙 성장과는 관련이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 때문에, 나 개인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한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새가족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 새가족들의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로 오기까지 받은 상처 때문에 참 많이 방어적이기도 하지요. “여기에서는 상처를 받지 않겠다.”고 작정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새가족들과의 애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로 담임목사를 믿지 마세요! 동산 목사도 전도사도 교인들도. 믿으면 반드시 실망하기 때문이죠. 사랑하려고 노력하세요. 그러면 실망스러운 일이 생겨도 감싸 안고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은 고린도전서 3장 전반부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보았던 고린도 교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이죠.
“젖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여러분을 양육할 작정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될 때에만 만족하는 젖먹이와 여러분이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를 지지한다”고 말한다니, 여러분은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이 아닌가요?”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유치하게 자기편과 남의 편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불안 때문에 누군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안심합니다. 교회 안에서 편이 갈리는 것은 가장 유치한 모습입니다. 어떻게 교회에 목사편이 있고, 장로편이 있고, 부목사편이 있고 원로목사편이 있습니까? 아무리 외형이 큰 교회라도 편을 나눠 싸우고 있다면 가장 유치한 모습이 아닐까요? 덩치 큰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육신에 속한”이라는 말은 지금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무엇이 문제냐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라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온갖 문제들을 양산해 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이가 먹으면서 육신은 성장하지만, 신앙의 연수가 깊어져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에 머무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거나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 혹은 자신의 옛 습성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의 욕망이 고개를 듭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증명되는 것은 평상시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이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그런 성숙된 습성이 있습니까? 아마도 사도 바울에게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같은 고민이 있다면, 예수를 믿고 주를 고백했음에도 옛 자아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어린아이들에게는 성숙함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많아서 먹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실수입니다.
그 교회는 위스콘신 주에 있는 작은 교회인데 미국에 정착한 지 오래된 한인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이민 온 사람들은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이 당시 이민 올 때의 나이에 머물러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집사들이 주일 낮 예배 때마다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할 때면 긴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들어봐서 알지만, 대표기도의 패턴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회의 사역을 위해, 그리고 목회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아주 심각하게 준비하여 기도를 하는데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붙잡아 주셔서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세, 영적으로, 육적으로, "성적으로!!!"
그 순간 교인들이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던 적이 있다는 것이죠.
어떤 교회에서는 2세 목사님이 한인 교인들에게 교회에 늦은 이유를 교인들에게 설명하며 어머니의 “육갑 잔치 때문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하죠.
그렇습니다. 언어와 행동은 계속 오랜 시간을 통해 습성화되고, 연습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유치한 수준에 머물든지, 아니면 옛 습성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란 끊임없는 성장과 연륜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 들었습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데 “저는 모모태 신앙인입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귀에는 그 말이 “뭐 못해”라고 들렸습니다. 그분의 말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신앙의 유산이 물려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모태’신앙을 ‘못해’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서 부모의 신앙유산을 잘 물려받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첫 세대가 예수를 믿고 영접했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그 자녀들이 신앙의 세계에 머무르지 못한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신앙이 3대를 내려가면 ‘뭘 못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신앙의 유산이 물려지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늘 여러분이 받아야 하는 도전의 첫 번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아니, 고린도전서 전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신앙을 받았으나 자라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잘 성장해서 대를 이어가는 성숙함을 기대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바라보는 목자의 마음이 아닐까요?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절)
‘예수를 믿는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였는지를 분명하게 고백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것이 목숨을 건 행위였던 것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누구의 소유인지를 천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를 ‘Lord’라고 불렀습니다. 즉 자신이 로마의 황제에게 속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황제를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서 ‘Lord’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의 삶에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내가 그분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누군가에게 속하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가장 안정감을 주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들이 속하는 ‘계파’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속감이 자기를 지켜 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계파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그룹들이 존재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예수님께 속하는 것보다 내가 활동하는 그 단체의 이득이 더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면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예수를 믿는 것 같지 않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장소 문제로 싸우는 것을 봅니다. 우리 부서가 그 장소를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연 그런 문제로 분노가 생길 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해 보셨습니까? 우리 교회가 많이 고치고 넓혔음에도 어디에서인가 불만족한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의 가장 큰 불만은 청소년부 시설에 농구대를 만들어 놓고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농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농구를 하는 시간에 아래에서 초등부 어린이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시끄럽다고 못 하게 하고, 오후에는 농구를 할 만하면 꾸러기 축구단이 연습을 한다고 하며, 평일 낮에는 배드민턴을 하는 어른들 때문에 정작 자신들이 농구를 하고 싶을 때 농구를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불만을 듣고 담임목사인 제가 아들의 관점에서 농구를 잘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다면 제가 얼마나 유치한 목사입니까? 저는 아이에게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하고 예배드리는 장소야!”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공동체에 어떤 제한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단체 중에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단체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는 학교 지역의 구분이 없는 곳입니다. 회비를 따라 자격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내가 이제부터 예수님께 속했다!”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던 장면을 보세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그들은 그물을 놓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실 때,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더 이상 내가 앉아 있던 곳, 내가 살던 곳이 중심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삶의 중심이 예수님을 향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을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겠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자로 내 삶을 다시 정리하겠다는 말입니다. 삶의 관점을 바꾸겠다는 것이고, 더 이상 내 성질대로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답답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작은 고린도 교회에서 서로 기득권을 가지려고, 서로가 잘났다고 자랑하는 무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사도 바울과 함께 개척한 멤버이기 때문에 기득권이 있다는 사람과 지금 목회하는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실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툼이 평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무언가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양보해야 하는 순간이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고개를 듭니다.
한번 이런 이야기를 같이 생각해 볼까요?
기차 안에서 책을 보던 한 승객이 귀여운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좌석 사이로 뛰어다니면서 다른 승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자신의 인형을 자랑했습니다. 그 승객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아이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객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것으로 보여 누구와 함께 이 기차를 타고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기차가 어둡고 긴 터널 안으로 들어섰고, 객실 안 실내등이 깜박거렸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복도 맨 끝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그의 팔에 풀썩 안겼습니다. 그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렇죠!
당신이 지금 누구를 가장 의지하며, 무엇이 당신의 삶을 주관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사람 때문에 교회를 나오는 어린아이와 같습니까?
가만히 묵상해 보세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드리는 것일까요?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
NIV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worldly’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이라는 것이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될 때에만 만족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언젠가 제가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교인들을 내 편으로 만들려 한다면, 반드시 반대편 사람들 때문에 어렵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목회하면서 나를 지지해주는 교인이 많으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유치한 일은 없는 듯합니다.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이처럼 징징대는 것은 ‘내 편’을 들어달라는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새내기들에게는 이런 것이 용납됩니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이제는 내 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편이 되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이란 그런 것입니다. “교회의 유일한 주인이 예수님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교회에서의 싸움은 딱 한 가지만 존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주님의 뜻인가? 아니면 사단의 계략인가?’
이 싸움은 피가 터지도록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권세가 무엇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싸움으로 하나님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면 그 싸움을 멈춰야 합니다. 징징대는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쳐야 합니다.
당신에게서 솟아나는 그 불평과 비난이 하나님 때문인가요? 아니면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징징거리고 있는 것인가요?
언젠가 새벽에 묵상하며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제 마음에 들어온 소원이었죠.
“하나님 제가 목회를 하는 동안 제 편을 만들지 않는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온 교회가 한 가지 방향을 향해 치열한 싸움을 하는 교회. 그래서 싸움이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는 싸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싸움이 아니라, 아무리 그 싸움이 치열해도 의의 최후 승리를 믿고 얻는 그런 싸움을 싸우며 살기를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꼭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 오늘 우리가 싸우는 치열함이 복된 일인지, 아니면 비난받을 유아적 사고인지를 깊이 묵상한다면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을까요? 오늘 조용히 그러나 깊이 우리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싸움의 이야기를 적어본다면 조금은 명백한 사실이 보이지 않을까요?
묵상은 조용히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분’ 앞에서는 고독의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듯합니다. ‘독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거룩한 고독의 시간’ 말입니다. 고독의 시간을 즐기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성숙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 횟수만큼이나 우리의 삶에서 영적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주함!
가장 유치한 아이들의 특징입니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분주함을 ‘열심’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 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못하고 일어나는 우리의 열심은 ‘분주함!’일 뿐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다는 것!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4절)
이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을 했습니다. 시기와 분쟁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아’가 강력하게 살아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백화점 왕 ‘존 와나 메이커’가 한번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와나 메이커는 자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일에 성공하지 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투자한 일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일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와나 메이커는 “내가 투자한 일 중에 가장 기억나는 일은, 내가 열세 살 때 2달라 50센트로 성경을 산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기자 중 한 명이 “나도 성경을 샀는데 왜 성공하지 못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와나 메이커는 “나는 성경 속에 있는 말씀을 따랐고, 당신은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아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주인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그분의 말을 우리가 믿고 따라 살아갈 때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는 것을 점점 명확하게 깨달아 갑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이 나를 성공으로 이끌고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채워졌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성공입니다.
성숙한 인격은 자신이 왜 화를 내야 하는지, 언제 화를 내야 하는지,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예를 들어볼까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움을 하게 된 동기를 보세요. 사무엘 상 17장 26절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싸움에 나가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숨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안전의 욕구 때문에, 그것이 제일 중요하기에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숨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신앙적인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자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요 영적인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마태복음 6장에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되어 있지요.
성숙한 가장은 가정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철이 든다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아닌가요?
자아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절대로 희생하거나 양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 말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즉, 자신이 기대한 것만큼의 보상이 돌아오지 않을 때, 상대방과 비교하여 내가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시기와 분쟁입니다.
그런데 이 판단이 아주 주관적이라고 하는 데 문제가 있으며, 이 판단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교만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관적인 판단이 충돌할 때, 시기와 분쟁이 일어납니다.
‘자아’가 가장 분명하게 살아 있어서 자신을 주장하고,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다름과 틀림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셔서 사용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은사와 상반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아니, 상대방이 혹시 나보다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이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는 원인입니다.
제가 5월에 강남금식기도원에서 며칠을 머무는 동안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70이 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평생 아파서 강단을 비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하시는데, 나는 설교를 하지 못하고 기도원에서 쉬고 있는 것이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왜 그런 건강을 주시지 않았을까?”라는 투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제가 설교하는 시간에 저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어 저의 약함을 간증했습니다. 저의 약함으로 인해 그곳에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의 아픔을 안고 설교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날 기도원에서 만들어진 테이프 중에 제일 많이 판매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픈 자도, 건강한 자도 사용하십니다.
참 은사가 다양하지요.
저는 한 번도 교회를 건축해본 적이 없습니다. 전도사 시절 교회가 지어진 곳에서 시작했고, 군목으로 부임한 곳은 사단장이 사재를 털어서 지어놓은 건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있던 때로 새 교회에서, 만나 교회 역시 이전 목사님의 헌신과 땀과 눈물 위에 지어진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가는 곳마다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의 능력이 아니라, 교회를 지어 놓은 이전 세대의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 열매가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요.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그릇만큼 하나님이 사용하심을 기대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며, 나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제가 만나 교회에서 리더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부목사님들이 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쁘고 감사한 생각이 들 때입니다. 부목사님들이 교인들의 칭찬을 들을 때, 얼마나 기쁜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 감사해서 말입니다.
실망이 기대로 바뀌는 순간이 언제일까요?
더 이상 내가 바울이나 게바나 아볼로에게 속한 것을 주장할 이유가 없을 때,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누군가를 기뻐할 수 있을 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