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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국내의 한 대학교 교내에서 일어난 불의의 교통사고로 신학을 공부중인 딸을 잃은 유족들이 미움을 삼키고 가해자를 용서한 것이 뒤늦게 알려진 일이 있습니다. 2006년 4월 14일 이 학교 1학년생 A군이 운전면허없이 친구의 차를 빌려 운전연습을 하던 도중 야외수업 중이던 신학과 1학년 학생 12명을 덮쳤고, 이 사고로 이소연 양이 숨졌습니다. 너무나 잘잘못이 뚜렷한 상황이었지만 이 양의 부모는 딸을 죽게 한 가해자에 대한 원망도 접은 채 가해자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이 양의 부모는 딸의 발인예배 전날 “발인을 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다”며 대리인을 통해 가해자의 부모와 합의를 끝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사고 당시 가해자에게 차량을 빌려줬던 친구의 부친인 선광호 씨가 6월 29일 이 학교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습니다. 자신은 무교라고 밝힌 선 씨는 “이번 사고 후 소연 양의 유족들이 보여준 용서와 사랑을 보며 종교의 힘을 느꼈다”며 “돌아오는 새벽길에 아내에게 과연 우리 같으면 저렇게 용서해 줄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딸이었을텐데 그 무엇이 유족들로 하여금 용서와 사랑을 베풀게 만들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번 사고로 본인 역시 가해자 아닌 가해자가 되어 마음고생을 했던 선 씨는 “그날 사고로 많은 충격을 받았을 소연 양의 유족분들과 피해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아직도 투병중인 두 학생을 비롯한 피해 학생들 모두 건강하게 캠퍼스로 돌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밝혔습니다.
참 아름다운 용서의 장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인간사는 냄새가 나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극적인 화해와 용서의 드라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이지만 가족일 수 없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모두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귀한 화해의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상처를 입고 버림을 받은 요셉은 애굽에 와서 온갖 어려움을 당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총리로 전 세계를 호령하는 엄청난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는 가뭄과 기근으로 몇 년째 기아에 허덕이며 식량비축에 성공하여 먹을 것에 여유가 있는 애굽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야곱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고 이 상황에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총리를 만나 온갖 힘든 과정을 거쳐가며 식량을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애굽총리가 바로 야곱의 아들이요, 르우벤과 유다를 비롯한열 두 형제들중 열 한 번째의 형제인 요셉인 것을 밝히며 서로간의 상처와 과거의 기억에 대해 용서를 빌며 화해를 하게 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깨닫고 참된 사랑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진정한 용서를 한 사람은 자신에게 피해를 줬던 사람과도 이제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5장 9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3절도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요셉은 자신이 애굽총리가 된 사연을 모두 밝히고 이전의 모든 힘들었던 과거사를 털어놓게 됩니다. 아직도 여전히 형들은 놀라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요셉은 형들에게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어려운 형편에 놓인 가나안땅에서 내려와서 함께 지내자는 제안입니다.
특별히, 본문을 보면 요셉의 심정가운데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 지를 표현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게 어떤 단어일까요?
9절을 보면“지체말고”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속히”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이 단어를 통해 아버지와 그 외의 가족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며 만나고 싶어하는 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족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어린 자신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긴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지내려고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침드라마 “복희누나”라는 드라마에 보면 “복남”이라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이 청년은 어린 시절 가정형편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부부가 결별하게 되었을 때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와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가족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고 버림받은 것에 대한 상처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이런 상처 때문에 어린 시절에 함께 살았던 가족과 자신을 입양했던 가족 모두 그를 찾아와서 다시 함께 살자고 하고 있지만 쉽게 마음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 번에 걸쳐 설교시간에 예화로 들려드렸던 손양원목사님의 삶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손양원목사님은 여수 애양원에서 사역하시던 중 여수와 순천지역에 일어났던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사건으로 인해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공산주의사상에 물든 안재선이라는 청년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손양원목사님은 이미 죽은 아들 둘에 대한 보복을 선택하기보다 살아있는 가해자 안재선을 변화시키고 그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한 명도 아닌 두 명을 죽은 살인자를 사형장에서 구해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지만 그를 양아들로 삼고 함께 가족으로 지내며 입혀주고 먹여주며 키워준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손양원목사님은 아들을 살인한 살인자를 용서해주었을 뿐 아니라 곁에서 지내면서 이전의 상처를 모두 해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아버지를 용서하며 가족이 함께 지내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모든 가족이 만나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에게 어려움을 끼친 사람이라도 그들과 함께 지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길 때 진정한 용서가 된 것입니다.
호세아서 3장 3절을 펴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한 음녀를 상징하며 하나님을 버린 부정한 아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전에 함께 사랑하다가 자신을 버린 아내 혹은 남편이 있는데 그 남편, 그 아내가 다시 돌아와 함께 살자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냥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서 헤어졌던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중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그에게로 가서 살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떤 심정이며 이런 아내나 남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우리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에게 절을 했던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다시 돌아왔을 때 용서하고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잘못을 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과거에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에 대해 우리는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상처가 남아 있고 우리의 생활속에 여전히 원수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용서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용서의 사람이 되시려고 할 때 우선 원수같았던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과거의 모든 힘든 일을 잊어버리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일까요?
둘째로, 진실된 용서를 위해서는 과거에 피해를 주었어도 지금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합니다.
11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요셉은 과거에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형들을 보며 마음속에서 여전한 분노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요셉도 인간이라고 한다면 다분히 과거의 엄청난 상처로 인해 더 이상 아버지와 형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것을 양보한다고 할지라도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그냥 털어버리자라고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큰 혜택을 주고 싶은 생각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냥 가족이니까 혈육의 정에 못 이겨 함께 지내자라고 마음을 추스렸을 때 우리 대부분의 생각속에서는 ‘그냥 가까이도 말고 멀리도 말고 그냥 가족이니 가끔 연락이나 하며 지내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이런 정도의 용서가 아닌 모든 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가족들의 생계까지 걱정하며 모든 필요를 채워줄 뿐 아니라 앞으로의 필요한 것까지 챙겨주는 사랑을 베풀어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고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할 용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음에서 과거의 잘못을 잊어버리고 용서했지만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힘들어할 뿐 아니라 그들의 현재 어려움을 보면서도 잘 되었다. 전에 나에게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이제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고소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없습니다.
‘창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미국 항공 선교회소속이던 다섯 명의 청년들이 에콰도르의 인디언인 와오다니 부족들에게 선교하다가 순교한 내용입니다. 영화의 첫 부분은 아마존 정글, 적도의 나라인 열대 밀림을 항공기가 서서히 오버랩 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되어 그 정글에 선교하려던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인디언들에게 처참히 살해되는 영상을 보여줍니다. 순교당한 선교사의 아들로써 지금도 아마존 정글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스티브 세인트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선교대회에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를 죽인 그 인디언을 내게 소개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던 그 아마존 정글과 그 인디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였던 그는 창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린 나는 다짐했습니다. 훗날 내가 크면 이 창으로 당신을 죽이고 말것이라고….”
어린 시절 스티브 세인트는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아마존 정글 밀림지역의 조금만 부족마을을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아버지를 따라 에콰도르 와오다니의 메라마을에 거주하며 아버지처럼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키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선교하러 갔던 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와 이모는 아버지를 죽인 그 와오다니에서 아버지를 죽인 민카예과 함께 살면서 여전히 선교하며 지내게 됩니다. 어머니와 이모와 함께 아마존 정글 그것도 아버지를 죽인 그 부족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스티브에게 가장 힘든 것은 무더운 열대 날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용서라는 단어조차 없고 살인해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모르는 인디언들에게 너무나 무의미한 용서의 행위였습니다. 복수나 살인이 정당화된 그들의 삶속에 증오의 칼날을 갈았던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영화는 짐작케 합니다. 용서가 무엇인지, 화해가 무엇인지,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무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아끼지 않고 사역하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스티브는 장성하여 아마존 정글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됩니다. 그에게 돌아 온 것은 안정되고 좋은 직장의 보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애기를 듣습니다. 그는 만사를 제쳐 놓고 아마존으로 달려 갑니다. 어머니를 찾아 온 스티브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이곳에서 네 아버지가 한 것처럼 이들을 섬겨 주려므나"
아버지를 죽인 그 부족을 증오했던 스티브에서 청천벽력 같은 어머니의 당부는 스티브의 숨겨진 분노를 터트리는 계기가 됩니다. 스티브 세인트는 어머니의 애기를 거부하였 뿐 아니라 추장 민카예가 아버지를 죽인 장소를 보여 주며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큰 사랑에 결국 굴복된 스티브 네이트도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그는 미국의 안정된 재정 자문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다 포기하기에 이르고 자신의 아버지를 창으로 죽였던 그 아우카 부족으로 돌아가 그의 삶을 헌신하는 실제 삶의 이야기를 이 영화는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그 창끝을 보며 마음의 창끝 날, 즉 복수의 창끝을 갈고 살았던 스티브에게 창끝의 종착점은 용서이며 화해이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입니다. 용서보다 더 큰 복수는 없습니다.
스티브 세인트의 아버지 네이트 세인트 말고 함께 순교당한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하고 포악한 종족에 대한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교시각에 대해 여론이 들끓을 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이 비극이라니요? 남편은 바로 그들을 위해 순교하기 위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 곳에 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하여 그 땅에 갔습니다. 남편의 희생은 분명 그곳에서 하나님의 생명 역사를 이루는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런 선교는 불필요한 낭비라는 비난이 들끊지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삼가해 주세요. 낭비라니요? 나의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책임을 수행한, 그리고 자기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짐이 순교하자 불과 10개월 밖에 안 된 딸 발레리(Valerie)와 함께 1959년 아우카 족 즉 와오다니 부족에게 가서 선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그녀를 헤치지 않았습니다. 청춘을 불태워도 아깝지 않은 꽃다운 나이의 젊은 여성이 인디언 마을에서 섬기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은 추장이 어느 날 그녀에게 물어 봅니다.
"당신은 누구길래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애쓰십니까?"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을 죽인 청년은 주님의 사랑 앞에 감복하여 목사가 됩니다. 그녀의 남편 짐 엘리옷이 쓴 마지막 글귀 가운데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내 모든 것을 다 바쳐드리기를 원합니다. 생명까지 드리기를 원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용서는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용납해주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필요을 채워주도록 노력할 때 진실된 용서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아픔을 주고 어떤 상처를 주었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면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용서의 사람이요,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만약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그들이 살아가는데 힘든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을 위해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일까요?
셋째로, 진정한 용서의 사람은 자신이 먼저 손내밀어 화해를 청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요셉은 가족들을 챙기고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굳이 자신이 그럴 필요도 없을 뿐아니라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가족들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가족이기에 용서를 했고 가족이기에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주려는 마음을 요셉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절, 15절을 보시면 그들의 육체의 필요를 채워줄 뿐 아니라 이제 모든 과거를 털어버리고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요셉을 보게 됩니다.
더욱이 이 말씀을 보면 형들은 자신들이 노예로 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에 놀래서인지 아니면 예전에 자신들이 했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어떻게 빌어야할 지 몰라서인지 한 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형들과 모든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요셉이 먼저 다가가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손을 먼저 내밀어 용서를 빌고 먼저 손내밀어 화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남들이 먼저 우리에게 용서를 빌기 원하고 남들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기를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찬양사역자인 최용덕씨가 만든 “오늘 나는”이라는 곡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후렴>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 있네 어찌 할수 없는 이 마음을 주님께 맡긴 채로
참 우리의 마음을 잘 표현한 가사입니다. 특별히 상처를 주고 받은 사람과의 관계를 잘 표현한 노래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준 사람과 함께 하기를 참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들과 화해하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중 가장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 있고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중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손가락에 꼽히는 대통령으로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약 150년 전의 대통령인데요. 그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 전, 일리노이주에서 변호사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리노이주에서는 스탠튼이라는 유명한 변호사도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맡은 사건마다 척척 해결해 명성이 그 일대에 자자했습니다. 그런 스탠튼에 비해 링컨은 애송이 변호사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날 링컨은 스탠튼과 같은 사건을 맡게 되었고 링컨은 이번 사건을 통해 스탠튼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싶어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링컨과 함께 일하게 된 사실을 알고 난 스탠튼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링컨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촌뜨기 변호사와 어떻게 함께 일하라는 겁니까? 나는 못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법정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갑작스런 사태에 법정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지만 링컨은 모욕을 받고서도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는 언제나 링컨을 향해 인신 공격을 인신 공격을 서슴치 않으며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스프링필드에 가면 원조 고릴라를 볼 수 있거든요" 스프링필드는 링컨의 고향이고 얼굴을 뒤 덮은 덮수룩한 수염의 링컨을 조롱한 말 이었습니다.
그 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남북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 후임자를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국방장관이 자리를 물러나 참모들이 여러 의견을 냈으나 링컨은 딱 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탠튼씨를 신임 국방장관에 임명하겠소.' 그러자 참모진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각하, 지난 날 스탠튼씨가 각하에게 한 무례한 행동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링컨은 참모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수백 번 무시당한다해도 괜찮소. 다만 그 사람이 국방장관이 되어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기만 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소!'
참보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적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장관으로 임명한 것 때문에 내가 잃은 것이 있다면 정적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람, 요셉처럼 또한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하나님의 사람 링컨대통령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베풀며 다가가기 힘든 사람에게 먼저 용서의 손을 내밀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용서와 화해의 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들에게 더욱 아름답게 비춰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드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요셉은 왜 하나님께서 축복의 땅으로 선조인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가나안땅에서 다시 애굽땅으로 선택된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내었을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고 그렇게 배워왔던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리라고 약속한 땅에 버티고 있으면 결국 놀라운 축복을 받고 회복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셉은 상황이 힘들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가나안땅을 버리고 살기좋은 애굽땅으로 가족을 데려왔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딜레마와 동일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다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그 부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참 신에 대한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민족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 민족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의 충돌이 있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가나안땅으로의 부르심인데.. 가나안땅 인근에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의 민족과 백성들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의문에 답답하거나 딜레마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심령의 회복과 신앙인으로 우리를 부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요셉의 용서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요셉에게 몹쓸 죄를 지으며 죄악가운데 빠져 살던 야곱과 그 아들들을 회복으로 부르시며 평안함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먼저 부르신 야곱과 그 아들들을 통해 아직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애굽땅의 사람들을 하나님편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베풀며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었지만 잘못된 생활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또한 아직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불신앙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전파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회복과 용서가 되어지고 저와 여러분의 삶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빛과 소금의 삶이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