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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네
영화네 집과 우리 집은 울타리 사이를 두고 영화는 앞집에 살고 우리는 뒷집에 살았다. 영화네 집은 안채와 바깥채의 큰 집으로 안채는 아래 윗방과 마루를 사이에 두고 사랑이 있고 그 뒤란으로는 안채보다도 높게 곡식을 넣어 갈무리하는 창고가 있었다,
바깥채로는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마구간이 있고 오른 쪽으로는 가마솥을 걸은 부엌이 있는데 이 부엌과 연결된 방이 두 칸으로 아랫사랑에는 이 댁의 할아버지할머니가 기거를 하시고 윗사랑은 일꾼 둘이 사용을 하였다.
위사랑에는 바깥마당 쪽으로 마루를 놓아서 가을 타작이라도 하게 되면 창고에 다 들어가지 못한 곡식들을이 마루에 쌓아 놓기도 하였다,
이 동네에서 가장 부자로 사는 이 댁에는 증조할머니가 안사랑을 차지하고 계셨는데 근력이 좋으셔서 환갑 진갑을 다 지나시고도 아흔 네 살까지 사시는 동안 어느 하루 몸이 아프단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조반을 잡수시고 나서 아무래도 속이 메스꺼우니 소금을 좀 갔다 달라고 하셔서 며느리가 소금을 가지고 들어가자 눈을 스르르 감으시더니 주무시는 듯 돌아가셨다.
그 시기가 마침 가을 타작을 거의 다 하고 난 뒤라서 집집마다 바쁜 일이 없다 보니 한가하게 된 아낙네들이 모두 와서 장사집의 일들을 거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동네에서 장사가 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다 참여를 할 정도로 부락사람들의 정이 넘치기도 하였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못살던 때라 때를 때우기 위해서도 식구들이 진종일 그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그때는 5일장이 아니면 9일장을 치렀는데 이 댁은 9일장을 지나기로 하였으니 멀리 나가서 있는 일가친척들이 다 참석토록 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잘 사는 집들은 장사 날을 길게 잡았다.
제사상은 안채 마루에다가 차렸는데 저녁 제사에 삼지 사방에서 떡이며 과일과 술이 들어오는데 떡시루며 술 퉁자를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
상주 김 영길이 아이고 아이고 곡을 시작함에 따라서 저녁제사가 시작이 되었는데 안 채 넓은 마당에는 가마니를 깔고 상주와 건 잡이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축문을 낭독할 때에 절을 하는데 그 수가 아마 .4. 50명은 넘었으니 부자 댁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워낙 대소가들이 많기 때문에 그랬다.
저녁제사가 끝이 나게 되면 제사에 참여한 분들에게 저녁을 대접하는데 앞마당에 상을 펴고 그 위에 음식을 차렸다.
상마다 떡과 과일이 가득 차려지면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가 상 앞으로 다가 앉는데 어떤 이는 밥을 먹기 전에 술부터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 술은 막걸리를 달라고 하시면 막걸리를 대령할 것이고 탁주를 가져오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머슴이 큰 소리로 말을 하자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도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서면 뱅길이에서 떡을 한 시루 지고 오느라 죽을 똥을 쌌으니 여기부터 술을 가져와요.”
그러면 저쪽 마당 끝에 앉았던 양복쟁이가 일어서면서 연설을 늘어놓는다.
“그쪽보다 우리는 더 먼 가평에서 왔으니 여기부터 가져와야 맞지요.”
그러자 머슴이 그 눈치를 채고는 주전자 두 개를 가지고 와서 각각 그 앞에다가 놓는다.
술을 찾던 사람들에게 막걸리 주전자를 안기니 더 이상은 아무 소리를 하지 않은 채 술 잔을 돌린다.
어른들이 이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저녁상을 받는 동안 엄마 아빠를 따라왔던 아이들은 떡을 받아먹을 채비를 하느라 대문간 앞으로 모여들었다.
마침내 떡함지를 멘 아저씨가 아이들을 소집하였다.
“ 애들아. 이리로 다 모여라. 지금부터 떡을 나누어 줄 터이니까. 한몫익만 받는 거여. 알았지.”
그러면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그 아저씨가 멘 떡함지 쪽으로 몰린다.
아저씨는 대문 앞에 선 아이들에게 차례대로 함지에 담긴 떡을 지피는 대로 나누어준다.
아이들은 한껏 저고리 앞섶을 벌려서는 떡을 받다가 잘못해서 떡을 땅바닥으로 떨어트리기도 한다.
“ 손을 넓게 벌려야 떡을 많이 주지. 더 벌려 봐.”
그러나 아이들의 손이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아이들은 떡을 받아서는 어떤 놈은 장작불이 훨훨 타는 불 옆으로 가서 먹지만 어떤 약아빠진 아이는 얼른 줄 뒤로 가서 한몫을 더 받아가지고는 내뛰었다.
떡함지 들고 있던 아저씨가 모르는 줄 알지만 속으로 저놈은 이다음에 어딜 가도 굶어죽지는 않겠어.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떡을 받은 어떤 아이들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에는 떡을 받아 올 때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 댁에서 제일 슬퍼한 식구는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증손자인 영화였다.
영화 엄마는 이 댁으로 시집을 올 때부터 몸이 약하여서 아이들을 전혀 낳지를 못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래도 어떻게 약을 지어서 먹고 난 다음에 시집온 지 4년 만에야 겨우 아들 하나를 낳고 이어서 딸을 본 후에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을 만큼 만날 약으로 살았다.
그렇게 귀하게 증손자를 보게 되자 누구보다도 증조할머니는 이 손자를 귀여워 해주시고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도 할머니 옆에서 떠나지를 못하게 할 정도로 영화는 할머니의 사랑을 극진히 받고 자랐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증손자는 밥도 먹지 않고 할머니를 찾으면서 우는 바람에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분이 없었다.
장례식 날은 날이 꾸물꾸물해서 비가 올까 걱정을 하였는데 요행이도 회닫이가 다 끝나고 분상을 모을 때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다 말아서 사람들은 그만하기가 다행이라면서 뒷마무리를 하고 산을 내려갈 무렵인데 저 아래를 보니 순사 두 사람이 장지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 중의 한사람은 우미노라는 일본 고등계 형사이고 또 한 사람은 조선 형사인조 갑씩이었다,
순사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긴장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으니 일본순사들은 수시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밀주를 단속하는가 하면 몰래 사랑방을 전전하며 투전하는 사람들을 알아내고는 주재소로 불러서 구타를 하고 벌금을 물리기도 하였다.
김 영길이 우미노에게 밉상이 된 것은 언젠가 술집에서 술 한 잔을 하고 나오는데 그날 옆방에 우미노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사실 김 영길은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학교 다닌다는 핑계로 매일같이 아침을 먹으면 열심히 학교를 가는 줄 알았는데 그때 벌써 김 영길에게는 묘령의 학생과의 사랑이 싹 트고 있었다,
집에서 그런 사실을 알고 손을 쓰려고 할 때는 이미 시일이 지나서 정학을 맞은 후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이렇게 여자에게 관심을 두었고 나중에는 아기까지 낳게 되자 집안에서는 창피하기도 하였지만 우선은 사랑방을 내주어 살게 하였는데 무슨 일로 삐졌는지 일 년을 살고는 홀연히 아기를 둔 채 싹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김 영길의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이 밉긴 하였지만 그래도 내치지 못하고 아들이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 뱅길이에 사는 색시에게 장가를 들였으니 그가 바로 지금의 영화 엄마였다.
뱅길이라는 시골에서 자란 신부는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자라고 바느질과 길쌈을 잘 하여 동네에서도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예의가 발랐지만 몸이 약하고 속병이 있어서 음식을 많이 먹지를 못하여 몸은 빼빼 마른 편이었다.
부자 집으로 시집을 와서도 그렇게 밥을 먹지 못하자 시어머니는 한약을 달여서 먹였지만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우미노가 김 영길이 술집에 와서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우연히 소변을 보러 나오다가 옆방에 귀를 세우다가 목소리를 듣고는 김 영길임을 알았다.
술집을 자주 드나드는 김 영길은 그때 새로 온 기생을 친해보려고 하였는데 이 기생은 이미 우미노에게 잡혀서 있을 때였으니 자연히 김 영길은 우미노에게 미움의 대상이었다.
‘ 흐음. 안 되겠어 . 김 영길이 윤 송희를 찝쩍댄다고.’
벼르는 제사에 물 한모금도 못 떠놓는다는 말이 있지만 우미노가 벼르는 조선 사람은 언젠가는 그에게 주리를 틀리는 경우가 허다하였기에 그 당시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 쳐놓고 우미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김 영길만은 겁을 내지 않았으니 일본 사람에 대해서 어떤 배타심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날도 김 영길은 윤 송희를 만나려고 늦은 저녁을 먹고는 술집엘 가니 그 날 따나 윤 송희는 아직 화장을 하느라 방에 나오지를 않고 있어서 김 영길은 윤 송희를 얼른 내보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윤 송희가 뛰어나오면서 오늘은 안 되니 어서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 왜 오늘은 안 된다는 거여. 어떤 서방을 만나기로 한 거냐.”
김영길이 소리를 지르자 윤 송희는 김 영길의 입을 막으면서 오늘은 우미노 고등계 형사가 온다고 하였으니 어서 집으로 가시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하고는 막 그를 떠미는 찬 라인데 그때 대문으로 들어오던 우미노가 이를 보고는 대번에 윤 송희에게 달려들더니 윤 송희의 귀쌰대를 후리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 니 언제부터 김 영길을 좋아했냐. “
갑작스럽게 귀쌰대를 얻어맞은 윤 송희는 무슨 말을 할듯 하더니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문으로 들어서다 기생을 때리는 것을 본 주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 우미노. 지금 행동은 너무 경솔하구나. 왜 약해빠진 여자에게 손찌검을 해.”
일이 이리 되자 주인 마담이 얼른 나오더니 주임의 손을 집으면서 집안으로 잡아끌었다.
“주임 나리. 오해를 푸셔요. 우미노 형사님도 성질이 그리 급한 줄을 몰랐는데 오늘은 공연히 흥분을 하시네요.”
주인마담이 방으로 안내를 하자 주임은 마지못해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이날 이후 우미노는 김 영길을 한번은 혼을 내주겠다고 벼르고 있던 중에 장사가 나는 바람에 장사가 끝난 후에나 연행을 하려고 올라오던 중이면서도 김 영길을 보자 깍듯이 인사부터 하였다.
“ 어 긴상. 할머니노 장례 잘 모셔으셔습니까. 내가 여기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 장사를 치름에 있어서 밀주를 많이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가택 수색을 하려다가 말았는데 그 경위를 조사하려고 하니 바로 나와 같이 주재소로 갑시다.”
일제강점기 시절 시도 때도 없이 일본 고등계형사들은 이렇게 악질적으로 조선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 당시야 말로 밀주를 금하였지만 큰일을 치르는데 술이 없을 수가 없었고 일이 끝난 뒤에는 손님들에게 술을 대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영길이 생각을 하니 아무리 천하를 지배한다는 일본 놈들이지만 장사 날 상주를 연행하려는 놈들이 어디 있는가. 생각대로라면 이 천하에 개돼지만도 못한 놈들아 어찌 초상집에 와서 무례하게 상주를 연행하려 하느냐고 왜가리의 목청을 돋우어 큰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사람들의 울분일 뿐 화를 꾹 참고서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아직 장례도 끝나지를 않았으니 양해를 좀 해주세요.”
그러자 우미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슬쩍 본론을 접고는 엉뚱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실은 말이요. 오늘은 긴 상을 만나려고 한 것은 이번 장례 날 투전이노 한 자들을 조사하려는 것이요. 대일본제국에서는 투전판을 강그리 못하게 하려는 것은 다 알고 있을 텐데 골방쥐 같은 조선 놈들이 말을 도통 들어먹지를 않는다는 말이야. 그러면 내일 주재소로 들어올 때에 그 명단을 하나도 바짐없이 서가지고 오시오. 알겠소.”
김 영길은 무어라고 변명의 여지가 없었으니 이리 되면 또 앰한 사람들이 몇 명 주재소에 가서 혹독한 심문을 받게 되어 상주로서는 그만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어라고 씨부링거리고 간 거여. 보나 마나 이놈들이 또 돈을 달라고 하였겠지.”
“ 그러나저러나 큰일 났어요. 이번에 투전한 사람들의 명단을 깡그리 적어내라는 거예요.”
“ 아이쿠. 큰일 났네. 또 그놈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한단 말이야. 이 주리를 틀 놈들 을 어떻게 해야 원수를 갚아.”
“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 우리 몇 명은 또 그놈들 앞에 가서 죽어나게 생겼으니.”
누구보다도 동네에서 장사가 나면 어김없이 화토 장을 들고 다니는 장 당구의 말이다.
“ 여보게들. 과히 걱덩하디 말라우야. 소식을 들으니께니 더 일본 놈들이 덤령하였다는 남양군도가 미군한테 빼앗겼다고 하던데. 그리되면 더놈들의 앞날도 멀디 않았을 끼야.”
“ 이참에 저놈들 다리 몽데이를 분질러 버릴까.”
“ 야. 너 덩신없는 소리 하디를 말라우야. 아딕은 더놈들의 세상이니께니 도심을 했다가시리 무슨 도은 소식이라도 들리게 되면 그 때 가서리 이 답놈들을 요덜을 내다구여.”
“ 거 말을 들어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자네는 어디서 그렇게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듣는 당가.”
“우리 사랑에 선생님이 계시디 않아. 그 양반이 미군의 방송을 매일 밤 듣고 있는데 엊그데 나를 슬쩍 부르더니께니 알려두더란 말이네. 그러면서 이 말이 밖으로 새면 큰일이니 덜대로 아무에게도 말을 하디 말라는 걸 내가 한 거여, 그러니 그리 알고 있어 보단 말이디. “
“ 알겠네. 알겠어. 일본 놈들은 만날 저들이 전쟁에서 이긴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아무렴 미군과 같은 강대국에 일본이 덤볐으니 쓴 맛을 단단히 보아야 할 거야. 더구나 미군의 방송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
김 영길이 막상 장사 날 왔다가 담배내기를 한 사람을 알아보니 장 달구를 비롯하여서 모두 아홉 명이나 되었으니 김 영길은 이름을 적긴 하였으나 도저히 이 명단을 제출한다는 것이 도무지 안 될 일이라 죽으나 새나 그자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꾀병을 앓는 척 하기 위해서 골을 싸매고 드러누운 것이다,
그런데 장사 날 왔다가 사무실로 들어간 우미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양군도가 미군에 의해서 점령이 되어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는 비보가 일본의 유력지 기자가 논평을 낸 것을 본 것이다.
“ 거.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대일본제국이 미군에 의해서 손을 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구,”
우미노는 앉았다 일어나면서 책상을 발로 걷어 내차자 책상위에 놓여 있는 화병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깨지는 소리에 조형사가 놀라며 왜 그러시느냐고 하였다.
“ 말도 말라 우야. 우리 일본이 지금 망하게 생겼단 말이네."
우미노는 순간 분을 참지 못하는지 들고 있던 유리컵을 내던졌는데 현관입구에 걸어놓은 거울에 가서 명중을 하니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주위를 뒤흔들었다.
우미노는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조 형사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 니도 일본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냐.”
“ 네.”
조 형사는 우미노가 소리를 지르자 겁이 났던지 차려를 하며 대답을 하였다.
“ 뭐라. 네 라고. 이놈이 미쳤나.”
우미노가 조형사에게 발길질을 가하자 그는 손을 무릎으로 가져가면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니놈도 조선놈이니까 할 수 없구나.”
그러더니 책상위의 서류를 내동댕이치면서 미친 사람처럼 대일본제국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 밖으로 뛰어나갔다.
일본이 진주만폭격을 가할 때만 해도 일본 군부가 얼마나 자가당착에 빠졌으면 미국과 같은 엄청난 잠재력의 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수가 있었겠는가.
일본의 국군주의자들은 아세아를 지배하게 되자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꿈을 키웠지만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미국을 너무도 모르고 덤볐던 일본인의 망령이었을 뿐이다.
36 년간이나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사람들이 지금까지 누렸던 지배력을 잃게 되고 당장 쫓겨 갈 처지에 놓였으니 일본사람이라면 우미노처럼 미치지 않고는 백이지 못할 것이다.
김 영길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주재소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어서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데 하루는 장 달구가 찾아왔다.
“ 형님 계시오. 아직도 누워 계시는 거요. 이제는 툭툭 털고 일어나셔도 되갔이요.”
“ 자네가 식전에 웬 일이여. 그리고 방금한 소리는 뭐여.”
" 해해. 형님 소식이 깡통이시네요. 일본아 조만간 항복을 한다는 소문이 쫙 퍼지고 있다니까요. “
“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그러네.”
“ 아무튼 이제는 일어나셔도 되갔이요. 난 지금 나무하러 산으로 가기 때문에 그 다음의 이야기는 있다 와서 할게요. “
김 영길은 머리에 동였던 수건을 풀고 밖으로 나와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정신이 다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보름 후인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게 항복의 방송을 하였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온 국민들이 태극기를 손에 손에 들고는 거리로 쏟아져 나가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일본 순사들에게 혹독하게 고문을 받던 사람들은 주재소를 향하여 달려갔으며 우미노와 조 갑식을 만나게 되면 요절을 내려고 하였는데아뿔사! 이놈들은 아무리 찾아도 이미 흔적도 없이 살아졌던 것이니 허탈하게 발을 돌려야 했던 청년들은 주재소의 창문을 부수는 것으로 울분을 달래야 했다.
조선 사람들의 수탈을 강요하던 일본순사들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조선 사람들이 나라를 등지고 해외로 망명을 하였으며 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조선백성들이 그들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로 재산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어야 했던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결코 그들의 만행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후세들은 이를 교훈삼아 다시는 외세에 굴하거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48년 8원 15일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수립이 되어 세계만방에 선포를 하였으니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이나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은 감격의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을 1950년 6월25일 새벽을 기하여 38선을 돌파하여 남침을 강행하였으며 3일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을 당하고 말았으니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집과 재산은 모두가 잿더미로 날아가고 말았다.
영화와 나는 신동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우리 마을에서 신동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 중에서 영화의 성적은 우등생으로 평상시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좀처럼 입이 무거울 정도로 말을 하지 않는 성질이었다.
그러면서도 학예회 때가 되면 영화는 늘 뽑혀서 무대에 섰는데 나도 거기에는 빠지지를 않았다. 한번은 심청전을 할 때인데 영화는 나라님이 장님잔치를 할 때에 총지휘를 하는 대감으로 출현을 하였고 나는 심청의 아버지 심 봉사를 잔치마당으로 안내를 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처음으로 학예회 무대엘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떨리는지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연극이 끝난 뒤에는 학부형들의 박수 소리가 들리긴 하였지만 얼마나 긴장을 하였는지 그것이 기쁜 줄도 몰랐다.
그런데 학예회가 끝나고 나서 영화에게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그는 하나도 떨리지를 않는다고 하여 나는 영화가 말은 없어도 대담한 아이라는 것을 느꼈다.
우리 여섯 명 아이들은 학교를 등교할 때나 집으로 돌아올 때도 함께 다녔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와 눈이라도 내려 발이 빠지게 되면 아버지가 삼아주신 짚신 속으로 눈이 들어가는 바람에 발이 몹시 시려워서 백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책보를 둘러멘 채 학교로 뛰어갔으니 교실에 난로를 쬐기 위해서였다. 교실로 들어가면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으니 얼어 들어왔던 몸은 서서히 녹아서 아이들 얼굴마다에는 화기가 뱅그르르 돌았다.
공부가 끝나고 난 뒤에 복도의 신발장에 놓아둔 짚신은 녹지를 않아서 얼음덩이 신을 다시신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날씨가 추운 날이 많은 것이 겨울이라고 하지만 겨울은 아이들에게 환희의 계절이고 썰매를 타는 계절이다.
더구나 눈이라도 내리게 되면 아이들은 저마다 들개 이상으로 눈을 맞으면서 학교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제 몸뚱이보다도 더 커다랗게 눈사람을 만들어서 학교 교문 앞에다가 세우기도 하였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은 꽝꽝 얼은 강에 나가서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고 술래잡기를 하였는데 어느 날 보니 영화가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피겨스케이트를 타고 있어서 아이들은 원숭이 구경을 하듯이 멍하니 서서 영화가 율동을 하며 부리는 재주를 구경하였다.
그러다가 누가 말을 했는지 한 번 씩을 빌려서 타보자고 하여 돌아가면서 타보았지만 타면 넘어지기를 계속하니 나중에는 어느 누구도 다시 타려하지를 않았다.
영화네는 부자로 살기 때문에 동리사람들이 그 집에는 만날 끓다싶이 하였으니 그만큼 일감도 많아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아버지 영길 씨는 그때 투망질을 해서 고기를 잘 잡았는데 영화는 아버지가 잡은 고기를 종드래키에다가 담아가지고 다니다가 집에 와서는 고기를 많이 잡았다고 할머니께 자랑을 하였다.
영화 엄마는 언제나 몸이 아파서 누워 있으면서도 아들이 학교를 갔다가 오게 되면 매일같이 학교에서 배운 것에 대해서 복습을 시킬 정도로 아들이 자라나는 것을 대견해 하셨다.
영화 밑으로는 4살 아래 여동생 귀순이가 있었는데 귀순이도 자랄 때에는 금이야 옥이야 하며 귀여움을 오빠 못지않게 받으면서 잘 자랐다.
6. 25 이후에는 춘천여고를 나와서 한 동안 양말 공장엘 다니다가 일찍 시집을 가긴 하였으나 부자 집 딸로서는 출가를 잘 하지 못하여 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마흔 살도 살지를 못하고 요절을 하였다,
어렸을 때 귀공자와 공주처럼 자란 형제이기에 커서도 그렇게 잘 살 것이라고 하였는데 영화의 운명 또한 동생처럼 기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춘천농고 입학을 한지 석 달 만에 6.25가 났는데 첫 피란은 잘 하고 1.4 후퇴로 다시 춘천에 살던 사람들이 피란을 나가야한다고 동네가 어수선하던 때였다,
영화에게는 그때 삼촌이 앞집에 살아서 수시로 사촌들끼리 놀이도 같이 하고 밤늦도록 윷놀이를 하고 놀 때에는 밤참으로 김치에 밥을 비벼서 먹었는데 그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언젠가 학교에서 이야기를 하여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그때야말로 아이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영화는 발표력이 좋았다.
영화는 삼촌댁을 매일같이 가서 살다시피 하였으니 형제가 많지 않아서 사촌과 어울려 놀 수밖에 없었다.
어떤 때 삼촌이 족대로 고기를 잡으려고 강엘 가게 되면 사촌 형제들은 한꺼번에 몰려가서 잡은 고기를 종드래키에다가 담아가지고 와서는 화롯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구워먹었다.
6,25가 난 이후에 아이들은 학교에 등교하라고 연락이 왔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은 하나도 학교엘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저녁에 회의에 나가지 않으면 민청위원회에서 호출을 하기 때문에 억지로 나가서라도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할 수박에 없었다.
아이들을 저녁에 모이라고 하는 곳은 예배당으로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예배당은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몰수당하여 민청위원회 소속 영화관으로 운영을 하였다.
저녁마다 거기엘 가면 소련의 무성영화를 보여주었는데 영사기가 돌아갈 때 보면 그 옆에서 변사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영화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주었지만 아이들은 아무 뜻도 몰라서 떠들기만 하였다.
영화구경이 끝이 나면 바로 김일성에 대한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장백산 줄기줄기를 열두 번도 더 불렀을 만큼 저녁마다 하는 것은 노래 부르는 일뿐이었으니 그것이 공산주의 사상을 집어넣는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눈발이 날리고 날씨가 추운 1950년 12월 20일 경이었다.
늦은 조반을 먹은 영화는 이날 안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사촌인 인수가 영화를 불러내었다.
“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냐.”
영화가 방문을 열고 나가니 그때 앞집의 삼촌이 장작을 패는 곳에서 꿀을 넣는 대병만한 노란 포탄피를 어디서 주워 왔는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영화의 사촌 동생 인수가 서 있어서 영화는 바로 그 옆에 가서 보니 삼촌은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다가 망치를 가지고 톡톡 치자 희한하게 울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동옥이 아버지 (삼촌의 매형) 가 그곳을 지나다가 “ 뭘 해” 하였는데 그 순간 꽝하는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산지사방으로 퍼졌으니 탄피를 두드리던 삼촌과 그 옆에서 들여다보던 인수 그리고 영화는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동옥 아버지는 발 뒤꿈치에 파편이 박혀서 저만치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주위가 난장판이 된 것은 물론 세 사람의 팔이며 다리가 사방 울타리를 넘어 흩어졌던 것이니 이런 비극이 어찌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영화의 아버지 영길씨와 영화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사람들이 현장을 와보는 사이에 방금 전에 집을 나간 영화를 부르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으니 사람이 살다가 이러한 일은 겪지를 말아야 하는데 그 무도한 공산주의자들로 해서 아까운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은 것이다.
영화는 부자 집의 아들로 태어나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자랐고 마음이 착하고 공부도 잘 하는 편이라서 어른들은 이다음에도 잘 살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는데 영화는 삼촌의 잘못된 판단에 따라 나이 스물은커녕 고등학교도 마치지를 못하고 비명으로 횡사를 하고 만 것이니 어찌 불쌍타 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동네에서 한꺼번에 줄초상이 나고 그 수습도 하기 전에 14,후퇴 피란을 나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정전 협정이 성립되자 3년여에 걸친 전쟁은 휴전선을 그어놓은 채로 멎고 말았다.
정전 협정이 이루어진 뒤에 우리 동네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니 우선 집을 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지어야 했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 동네의 집들은 거의가 다 폭격에 불이 타버렸으며 영화네도 그 큰집이 한 채도 남기지 않고 다 타 없어졌다,
1.4후퇴 직전에 폭발물에 의해서 아들을 잃은 김 영길씨도 피란을 무사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천막 속에서 지날 뿐 집을 지으려 하지를 않았다.
더구나 영화 엄마가 아들을 잃은 후에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싶이 몇 달을 지나는 바람에 건강은 아주 나쁜 상태에 있었다.
주위에서 이제는 죽은 아들 생각하지 말고 살 궁리를 하라고 권고를 하면 영화엄마는 아들이 없는 세상에 무슨 낙으로 살겠느냐면서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우리 속담에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고 시간이 지나게 되면 슬픔도 반감이 된다고 하더니
영화가 죽고 나서 3년여가 지나게 되자 영화어머니는 그 사이에 머리가 백발이 된 채 누워계시고 그렇게 활달하게 다니던 영길씨 또한 힘이 다 빠진 채 툇마루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 다 소용이 없는 거여. 재산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형수를 뵈오려 왔던 먼 촌간 동생이 급하게 영길씨를 흔들었다
“ 형님. 일어나셔요. 아무래도 아주머니가 시각을 다투시는 것 같아요.”
“ 뭐야. 집사람이 ,”
“ 그런가 봐요. 형님. 어쩌지요….”
김 두 수 (金 斗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