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교회론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제일 풀리지 않아서 고심을 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상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소명을 갖고 있느냐? 소명을 갖고 있다면 그 주체가 평신도인데 평신도가 과연 소명자라는 것을 어떻게 교회 본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의 교회론을 읽고 또 조직신학을 읽고 했지만, 주로 제가 읽는 내용이 개혁신학 계통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신학 서적들이니까 자연히 한계가 있어서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교회는 본질을 논할 때에 7가지를 논하는 사람도 있으나 보통은 4가지나 3가지를 논하게 된다. 여기서 성성(聖性), 통일성, 보편성, 사도성의 네 가지를 논하는데, 개혁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신학자들의 저서들은 거의가 3가지를 논한다. 위의 네 가지 중에서 “사도성”이 거의 빠져있다.
⑵ 사도성에 대한 오해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야 그런 줄 알았지요. 여러분이 신학교에서 교과서처럼 사용하는 벌코프가 쓴 조직신학에도 보면 3가지만 이야기 하고 사도성이 빠져 있다. 교회는 거룩하다, 성성이지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unity이다, 머리되신 주님과 몸된 교회니까 이것은 통일성을 갖고 있지요. 교회는 보편성 즉, 세계교회는 하나다. 인종과 시대와 국경과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다. 이 세 가지만 이야기 한다.
그런데 벌코프가 조직신학의 요점을 간추려서 매뉴얼을 썼는데, 거기에는 교회의 사도성을 이야기 했다. 사도성을 이야기 했지만 반쪽 진리만 이야기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성에 대해서 너무 소극적이었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소명자냐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그 이유를 찾아보니 로마 교회가 자기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항상 들고 나오는 것이 사도성이었다. 로마 교회만이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카톨릭만이 사도의 후계자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 때에도 사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정당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사도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는 것이었다. 한쪽에서 너무 남용하고 오용하니까요. 이런 분위기에서 될 수 있으면 사도성에 대해서 쓰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성에 대해서 쓰기 싫다고 하더라도 진리라면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사도성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도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카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이었다.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로 손꼽을 만한 사람이다. 저도 몰랐는데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한스 큉의 교회론에 대한 책이 요약집으로 1960년대부터 번역한 것이 나와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전혀 발견을 못했던 것이다. 한스 큉은 교회론에 대한 책을 썼다고 해서 카톨릭에서는 이단자로 몰리고 개신교에서는 쌍수로 환영을 받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보수성이 강한 Westminster 신학교에서 한스 큉이 쓴 교회론 책(The Church)을 발견했다. 그의 책은 그렇게 감동적이고 명료하고 심오할 수가 없었다. 잠간 들여다보았는데 사도성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나와 있었다. 사도성에 대해서 읽는 순간 나는 하늘로부터 비치는 강한 빛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아! 대답이 여기에 있구나. 그 책을 사가지고 들어가서 정신없이 읽으며 제 나름대로 정리를 했는데 약간 카톨릭 냄새가 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교황 직제에 관한 것이라든지, 성직에 관한 것이라든지, 교회의 성례식에 관한 것이라든지 모든 것이 너무 개신교적이었다. 그리고 카톨릭 신학자에게서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내가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이다. 나는 이분이 쓴 글을 구약에 나오는 발람의 당나귀가 자기 주인을 책망했던 것에 비유하고 싶을 정도였다. 즉, 하나님께서 이분을 사용하셨다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용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그렇게 명료하고 심오할 수가 없다. 한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책에 대해 교수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개혁 신학교에서 카톨릭 신부가 쓴 책을 서점에서 팔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스 큉의 교회론(The church)과 칭의론(Justification)은 참 좋은 책이니 꼭 읽어보라고 오히려 추천을 해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잘못된 부분을 집어내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분이 이 책을 쓰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을 받아썼다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인용하기로 했다. 그의 교회론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제자훈련 목회철학의 기초를 삼게 되었다.
⑶ 사도성이란 무엇인가?
사도성이란 무엇이냐? 이 내용은 한스 큉이 쓴 교회론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 본질 가운데 사도성의 중요성을 한스 큉은 너무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① 요 20:21, 엡 2:20(지상의 참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 쉽게 말해면 사도성이란 요한복음 20장 21절과 에베소서 2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이 그 근거이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지상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사도성을 갖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통일교를 사도성을 가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터가 다르다. 그들은 원리 강론의 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터가 다르면 사도성도 없고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도들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터가 같다.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라면 사도성을 갖는 교회입니다. 또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소명 아닙니까? 여기서 “너희”라고 하는 것을 12 사도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하면 안 된다. 이 “너희”는 사도 한 사람도 되고 사도 전체도 된다. 이와 같이 "너희"는 믿는 사람 한 사람도 되고 교회도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명령을 받는 대상이 지상교회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지상교회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사도들을 파송하신 것 같이 교회를 파송하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교회라면 교회는 하나님의 소명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성(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을 논할 때, 한스 큉은 이렇게 주장한다. 성성(聖性)도 중요하고 통일성도 중요하고 보편성도 중요하지만 사도성이야말로 다른 본질을 평가하는 표준이 된다고 하였다. 아무리 교회가 거룩하다고 주장해도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그 성성을 논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 아무리 교회가 통일성을 주장해도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터, 즉 보내심을 받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면 성경이 말하는 통일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회가 진짜 교회냐 아니냐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도성을 가지고 평가해야 된다는 의미에서 사도성은 교회 본질을 평가하는 표준이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교회 본질을 종교개혁자들이 만든 교회론에서도 거의 취급하지 않았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이어받은 유수의 훌륭한 학자들도 똑 같이 사도성에 대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교회론을 논했으므로 그 교회론은 핵심이 빠진 교회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역사적인 흐름에서 배워야 한다. 아무리 완전하다고 해도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대적인 요구를 앞에 놓고 우리는 교회를 다시 보고 또 다시 보아야 한다.
② 사도적 본질/사도성의 계승 : 그러면 사도성이란 무엇인가? 사도성이란 이미 말 한대로 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소명자라는 것을 가리키는 내용이다. 그래서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위에 세워진 교회는 예외 없이 사도성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도성은 다른 본질을 평가하는 표준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성의 계승이다.
사도성의 계승
증거의 말씀
사도들 전(全)교회
증거의 사역
한스 큉이 말한 내용은 사도직은 계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카톨릭에서 사도직이 계승 된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교황도 사도직의 계승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직은 계승이 안 된고 단회적(單回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성은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면 사도성은 누가 계승하는가? 이 사도성은 개인이 절대로 계승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카톨릭 교황도 계승자가 아니다. 그러면 누가 계승하는가? 계승할 수 있는 것은 전 교회(Whole Church)가 계승한다. 여기에는 교역자와 평신도가 구별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전 교회가 사도성을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성을 계승한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증거의 말씀이요, 또 하나는 증거의 사역이다. 쉽게 말하면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 신약성경 말씀을 교회가 그대로 계승해서 듣고, 믿고, 고백하고, 배우고, 순종할 때 그 교회는 사도성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③ 사도성의 참된 계승자(전 교회는 내적 연속성을 통해 사도들의 사도성을 계승한다) :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사도의 계승자들이다. 이 점은 벌코프가 매뉴얼을 쓰면서 말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야말로 정말 사도들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개인에게 다 읽히잖아요. 또 개인에게 다 고백하게 하잖아요. 그러므로 교회가 교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 모두가 사도성을 계승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우리가 참 잘했다. 앞으로도 잘 해야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카톨릭에 비해서 개신교가 훨씬 앞서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을 빠트렸다. 벌코프도 나머지 하나를 고의적으로 생략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명령 받은 사역을 계승한다는 것을 누락시켰다. 우리가 진정 사도성을 계승하는 교회가 되려면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만 계승해서는 안 되고, 사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명령 받은 사역도 함께 계승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도의 계승자로서 우리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소명을 받았는가?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소명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고, 그들은 그 소명을 위해 평생을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이 본 것처럼 사도들이 그런 명령을 받고 순종했지만, 사도들이 간 다음에는 그 소명이 우리 일반 교인들에게 이어지지 않고 교회에도 이어지지 않았다고 본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소명을 평생 순종하다가 갔는데 그 소명은 누구에게 계승이 되느냐? 그들이 세운 교회에 계승이 되는 것입니다.
④ 평신도는 보냄 받은 소명자: 사도성이 교회에 계승된다면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가? 여기에는 전 교인, 모든 평신도가 포함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인 것을 계승할 때, 그 교회는 사도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고, 교회본질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소명자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제자훈련을 왜 시켜야 되느냐? 평신도를 깨워라! 무엇으로 깨우느냐? 소명자로 깨워라. 목사만 뛰지 말고 같이 뛰자.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도의 후계자들이다.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고의적으로 이렇게 사도들의 사역은 계승하지 않는 것처럼 가르쳤다고 하는 것은 중세기에는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그랬고, 오늘날 우리는 너무 중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에만 비판 없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런 우를 범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교인들에게 소명자라는 것을 자신 있게 내놓고 가르치지 못했다. 그래서 전도를 하라고 할 때에도 “우리 교회가 부흥해야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금년에는 1000명은 모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열심히 전도합시다.” 그러면 의식 있는 평신도들은 무어라고 하는가? “우리 목사 욕심이 많다. 500명도 감당을 못하면서 무슨 1000명을 만들자고 하는가?” “나는 평신도야, 복음 전하는 것이나 세상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소명 받은 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헌금만 하면 할 일 다 하는 것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전도하자는 말도 잘 안 먹히고 교회를 부흥시켜야 된다는 말도 어떤 면에서는 목사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비쳐지는 것이다. 본질적인 접근이 안 되는 것이다.
저도 우리 교회에서 대각성전도집회를 17년째 하고 있는데 일 년에 한 달 이상은 영혼을 구원하는 문제를 가지고 전도에 대해 강조하면서 야단법석을 친다. 그러면 다른 교회에서 우리교회로 이적한 사람들은 “목사님, 장소가 없어요. 어떻게 하려고 자꾸 전도하라고 합니까?” 라고 한다. 항상 실리적으로 따진다. 그런데 1년 정도 지나면 그런 소리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교회가 좁아서 사람이 들어설 곳이 없어도 교회 밖의 잃은 양이 한 마리라도 있으면 우리는 나가야 된다. 우리는 사도들과 똑 같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소명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당신은 그 소명에 복종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사람이 된다. 왜 소명자가 목사뿐이냐? 당신도 소명자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교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손들어보라. 아무도 손 안 들지요. 손들었다가는 큰일 나지요. 그러면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누구냐? 아무도 모른다. 다섯 달란트 받은 평신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한 달란트 받은 목사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달란트 비유는 모두가 소명자라는 이야기이다. 왜 이것을 오늘날 교회가 바로 깨우치지 못하느냐 말이다. 그 이유는 교회 본질에 대해서 이해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소명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날마다 구차스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전도하자고 교인들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잘못 된 것 아닙니까? 교회는 사도의 계승자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교회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도의 계승자라고 할 때에는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그리고 계승하기 때문에 무엇을 먼저 계승합니까? 그들이 전해준 말씀을 계승하고 사역을 계승하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이고 또한 그것은 나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보냄 받은 소명자입니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 평신도를 깨우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자훈련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신도로 하여금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드는 것이다. (제12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