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
'죽음의 뜰'이란 의미의 킬링필드(Killing Field)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정권 때,
크메르군에 의해 수천명이 학살되어 매장된 곳이다.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
킬링필드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로 채워진 위령 사리탑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민주 캄푸차정권 시기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라는 무장단체가 저지른 학살을 말한다.
DC캠 매핑 프로그램과 예일 대학의 조사 결과, 1,386,734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크메르 루즈에 의한 희생자 수(병사한 사람과 굶어죽은 사람 포함해서)는 800만명 중 170만명-250만명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민주 캄푸차는 종말을 고한다.
캄보디아의 저널리스트인 딧 프란은 "내가 독재정권을 탈출한 이후의 기간"이 킬링필드 시기라고 말했다. 1984년 영화 '킬링필드'는 딧 프란과 또다른 생존자 하잉 응고르가 겪은 일들을 보여준다.
크메르 루즈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6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학살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 공화국의 론 놀이 세력이 약해져 해외로 망명한 사이,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고 수도 프놈펜에 크메르 루즈가 입성했다. 국명을 민주 캄푸차로 개칭한 크메르 루즈는 혼란한 국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화폐제도의 폐지·도시 주민의 강제 농촌 이주 등의 극단적인 공산주의를 내세워, 기존의 산업시설을 모두 파괴하고, 기업인·유학생·부유층·구 정권의 관계자, 심지어 크메르 루즈 내의 친 월남파까지도 반동분자로 몰아서 학살했다.
희생자 수
청아익 킬링필드: 크메르루주 무장단체에게 학살당한 어린 아이들의 뼈.
근거있는 희생자 수가 나오기 전까지 120만명이 살해되었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다. 1980년 통계로는 200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1986년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610만명의 국민의 희생되었다고 나온다. 보통 학자들은 집계되지 않은 사람과 이 시기에 기아로 사망한 사람의 수를 합하면 캄보디아 인구(당시 약 600만)의 1/3에 해당하는 200만명에 달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근거가 불확실하다. 다른 한편 크메르 루즈의 학살 희생자는 수가 과대 평가되었고, 1969~73년에 이루어진 미군 폭격에 의한 희생자 수 40만~80만명,크메르 루주 학살 희생자 10만~30만명, 기아에 의한 사망자가 약 70만~80만명 정도로 추산되어 이를 모두 합쳐야 최대 약 200만명 정도가 된다는 주장도 있다.
1975년 4월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약화된 캄보디아의 친미 론놀정권을 몰아낸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포트가 '농민천국'을 건설한다며 1979년 1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할 때까지 4년간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하였다.
당시 폴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놀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환영하였다.
그러나 폴포트는 새로운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이주 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놀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명을 살해하였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극빈층의 청소년들을 회유하고
공산주의로 교육시킨 다음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무기를 넘겨받아 무장을 시켰다.
폴 포트는 그 자신이 지주의 아들로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지만, 캄보디아를 농경사회로 만든다는 계획 하에 100만 명에 달하던 프놈펜의 인구를 농촌으로 소개하고 유령도시로 만들었다. 이들은 사유재산과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집단농장으로 보내졌다.
폴 포트의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지식인과 전문직들은 무차별 살해당했다. 모든 대학과 학교를 폐쇄하고 교수의 80~90% 이상을 처형하고 대학생 50%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죽음을 당한 사람 중에는 안경을 썼거나, 영어를 배웠거나, 손이 부드럽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한 경우도 있었다. 승려들과 국제경기에 참가한 선수들도 포함됐다. 특히, 종교를 금지하여 거의 모든 사원이 파괴되고 8만여 명의 승려들이 처형되었으며 살아남은 승려는 500여 명에 불과했다.
투올슬렝(Tuol Sleng)은 1976년 고등학교를 폐쇄하고 만든 크메르 루주의 수용소였다. 공식적으로는 ‘S-21’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어린이 2,000명을 포함하여 약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며 지식인들을 상대로 잔악한 고문과 처형을 자행했다.
재미로 많이 죽이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을 하기도 했는데,
사람을 죽일때 마다 하나씩 칼집을 내어 죽인 사람 수를 비교하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묻혀서 다 발굴하지 못하고
그냥 방치된 상태로 있기때문에 옷이 바닥에 끼어있다.
사람들을 죽인자들의 옷.
그 당시 죽인자들은 중학생 정도라고한다
아기를 죽였던 곳, 나무에 못을 박아서 아기를 쳐 죽이거나 하늘위로 던져서 총으로 쏴 죽였다.
학살의 상처는 서로의 죄를 묻는 것 조차 힘들정도로 깊다.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이 또 다른 상처로 서로를 할퀴게 될까봐 더 진전시키지 못하는 그들
2003년 6월 캄보디아 정부와 유엔은 과거 크메르 루주 정권에 의해 자행된 집단학살에 대한 재판을 하기로 합의하고
집단학살 관련자 처벌을 목표로 국제사회가 지원하는 특별재판소를 설치키로 하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했다.